풍류, 술, 멋

安貧樂道의 즐거움

醉月 2008. 12. 8. 21:58

송대 유학자들의 화두 중 하나는
'공자와 안회가 즐거워 하는 것[孔顔樂處]'이 무엇인가이다.
『송사 도학열전(宋史·道學列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주돈이(周惇 )가 남안(南安)에서 연리( 吏) 노릇을 할 때
통판군사(通判軍事)인 정향(程珦)이 그의 기상과 용모의 비상함을 보았다.
정향은 함께 이야기하고서 주돈이의 학문이 도를 깨닫고 있음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벗이 되었으며,
두 아들 정호(程顥)와 정이(程 )로 하여금 주돈이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주돈이는 항상 그들에게 공자와 안자(顔子, 顔回)가 어떤 일에 대해서 즐거워하였나?
그 즐거워하는 곳[樂處]을 찾도록 하였다.
이정(二程)의 학문이 여기에서 근원하여 흘러나왔다."

 '공안낙처'는 공자가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즐거움은 또 그 가운데 있다."고 한 것,
공자가 안회를 "어질다, 안회여.
대나무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라고 칭찬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공안낙처'의 바탕 위에서
증점(曾點)의 다음과 같은 늦은 봄날의 세계가 열린다.

"(증점이 말한다)
늦은 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을 쓴 어른 5, 6명과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께서 아, 하고 감탄하시며,
'나는 증점의 의견에 찬성한다'고 말하였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유학에는 안빈낙도의 삶이 있다.
그 즐거움은 벼슬이나 권력,
명예 등과는 거리가 멀다.
재물은 더욱더 거리가 멀다.
현실과의 저만치 거리 두기를 통하여 즐거움을 얻는다.
그렇다고 그 현실을 완전히 망각한 노장식의 삶은 아니다. 증점의 '영이귀(詠而歸)'하는 삶은 유가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경계선이 모호한 때가 많았다. 그런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동진(東晉) 시기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주인공인 도잠(陶潛)이었고, 그 같은 안빈낙도의 삶은 송대의 문인 사대부들이 동경했던 삶이기도 하다.

'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
북송(北宋)의 시인 중에 '작은 동파[小東坡]'라고 불리운 당경(唐庚, 1071∼1121. 字는 子西)이 <술에 취해 잠들다[醉眠]>라는 시를 지었다.

산의 고요함은 태고와 같고
하루해는 길어 짧은 일년 같구나.
남아 있는 꽃을 바라보니 취기가 돌고
귀여운 새들은 잠을 방해하지 않는다.
세상살이 힘들어 사립문을 항상 걸어두고
돗자리 깔아놓고 세월 가는 대로 편히 지낸다.
꿈결에 떠오른 몇 개의 시구는
붓을 잡으면 또다시 사라져 버린다.
[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 餘花猶可醉, 好鳥不妨眠.
世味門常掩, 時光簞已便. 夢中頻得句, 拈筆又忘筌.]

당경은 늦봄 혹은 초여름 정도의 시절에 홀로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한숨 자고
다시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평이하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속세의 시끄러움이나 명리를 추구하는 생활이 아닌 모든 것이 유유자적하기만 하다.
당경의 위와 같은 시를 읽고 느낀 바가 있어 남송(南宋)의 이학가(理學家)이면서
문학가인 나대경(羅大經)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나의 집은 깊은 산중에 있어 매번 봄이 가고 여름이 닥쳐 올 무렵에는
푸른 이끼는 뜰에 깔리고 떨어진 꽃잎은 길바닥에 가득하며
사립문에는 나를 찾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없다.
솔 그림자는 길고 짧으며 새소리는 오르내리는 데에 실컷 낮잠을 잔다.
이윽고 샘물을 긷고 솔가지를 주어다가 고명차(苦茗茶)를 다려 마신다.
마음내키는 대로 주역·시경·춘추좌씨전·이소경과 사마천의 사기, 도잠·
두보의 시와 한유·소식의 문 몇 편을 읽는다.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송죽을 어루만지고,
사슴과 송아지로 더불어 함께 장림(長林)과 풍초( 草) 사이에서 뒹굴기도 하면서 쉰다.
앉아서 시냇물에 물장난하다가 양치질하고 발도 씻는다.
돌아와 죽창에 앉으면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과 고비 나물을 만들고 보리밥을 지어준다.
기쁜 마음으로 포식한다.
그 후 창 사이에서 붓을 놀려 큰 글씨 작은 글씨 합하여 수십 글자를 씀과 동시에
집에 보관한 법첩, 묵적, 책을 펴놓고 실컷 구경한다.
흥이 나면 짧은 시를 읊거나 『옥로』 한 두 단을 쓴다.
다시 고명차 한 잔을 끓여 마시고 시냇가로 걸어나가
원옹(園翁)과 계우(溪友)를 만나면 상마(桑麻)를 묻고 갱도( 稻, 메벼와 찰벼)를 말하며,
날씨가 좋은지 나쁜지를 헤아리고 절서(節序)를 따지며 서로 더불어 한참 동안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 섰노라니
지는 해는 서산마루에 걸려 사양(斜陽)이 붉고 푸른 색깔이
수만 가지로 변하여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한다.
소 타고 돌아오는 피리 소리내며 둘이 모두 돌아오니 달은 앞 시내에 돋아 오른다."

이 같은 참으로 좋은 계절인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무렵'
자신이 살고 있는 하룻동안의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읊은
나대경의 글을 읽고 허유(許維)가 부채에다 그림을 그리고 그 내용을 추려서 적었다.

모든 것이 한가롭고 여유롭다.
허유의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는 당경(唐庚)의 시를 참조하면
<산정일장도(山靜日長圖)>라고 할 수 있는데,
허유의 그림은 지팡이를 집고 집으로 돌아오는 즈음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한 가운데에 산의 주봉과 집을 배치하고 있다.
은일(隱逸)하는 군자가 살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푸른 담채(淡彩)의 설채(設彩)가 화면 가득 맑은 느낌을 준다.
깊은 산중에 살다보니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아와 귀찮게 하는 인간이나 일도 없다.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고 정해진 것도 없다.
이웃에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원옹(園翁)과 계우(溪友)가 있다.
다들 속진(俗塵)을 피하여 이런 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나와 뜻이 같다.
이런 이웃이 있다는 것만도 행복하다.

뽕나무가 잘되어야 누에도 치고 비단옷도 입을 수 있고,
비가 제 때로 와야 농사가 잘되어야 할 테인데…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일상적인 삶과 관련된 대화이다.
정치가 어쩌고,
무엇을 하면 돈을 많이 벌까 하는 식의 대화는 없다.
하지만 고생고생 하면서 농사를 주업으로 사는 전업 농부는 아니다.
처자도 있고 마실 고명차도 있다.
서화를 감상하고 글씨를 써 볼 시간도 있다.
일이나 시간에 쫓기는 모습이라곤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한가롭고 여유롭다. 한적하기조차 하다.

다른 그림을 보자. 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 1783∼1837)의 <오수도(午睡圖)>를 보면
'금성상하 오수초족(禽聲上下, 午睡初足)'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위의 나대경의 글의 한 부분을 따온 것이다.
산에서부터 따뜻한 온기를 가진 맑은 바람이 솔솔 분다.
가지가 늘어져 춤을 춘다.
솔 그림자가 들쑥날쑥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는 바람은 솔 냄새를 실어 온다.
솔 냄새는 속세의 번뇌를 떨쳐 버리는데 명약이다.

낮잠을 잘 때는 읽던 책을 베고 자는 것이 제격이다.
낮잠 잔다고 마음먹고 이불을 깔거나 하면 오던 잠이 다 달아나 버린다.
나른한 봄날 쌓인 피로와 춘곤증은 잠깐의 낮잠으로 해결된다.
관료로 있을 때 언제 이렇게 한가롭게 새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잘 겨를이 있었던가?
아마도 낮잠 자는 선비는 장자가 나비가 되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을 꾸고 있으리라.
오르내리며 지저귀는 새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린다. 낮잠은 전염력이 강하다.

뜰 앞의 학 한 마리도 고개를 처박고 졸고 있고,
소나무 가지들도 아래로 축 처져 있는 것이 마치 함께 조는 것 같다.
학이나 소나무는 오수를 즐기고 있는 주인공의 고고한 인품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한 귀퉁이에서 동자가 끓이고 있는 것은 고명차(苦茗茶)다.
고명차는 이백(李白)의 「답족질승중부증옥천선인장다서(答族侄僧中孚贈玉泉仙人掌茶序)」에 의하면
사람이 장수하게 하는 양생의 공효가 있다고 한다.
그림에는 '붓끝에 한 점 속기가 없다[筆下無一點塵]'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찍혀 있다.
비록 위와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부채라도 부쳐가면서 한 때를 지내는 것도 운치가 있다고 본다.

조선조 김희겸(金喜謙)은 당경과 나대경의 글을 가지고 여섯 폭의 그림을 그렸다.
(간송미술관 소장) 그리고 우리는 여타의 많은 그림에서 위 글의 내용과 관련된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탁족(濯足)하는 모습,
소 등을 타고 피리를 불면서 돌아오는 모습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 1741∼1793)의
"목동이 소 허리에 앉은 것이 천연스럽다. 만약 소 등 가운데 앉는다면 속된 목동이다.
[靑莊云, 牧兒倒騎牛, 是天然畵意. 若騎腰正中, 是俗牧兒不曉事]"라는 제평(題評)이 써 있는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 ? )의 <목우도(牧牛圖)>가 그 하나의 예이다.

어지러운 현실에서 隱遁하고픈
주희(朱熹)는 '둔옹(遁翁)'이란 호를 사용한다.
이런 것은 바로 은일하고자 하는 바램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둔옹이란 『주역』 둔괘(遯卦)에서의 '호둔(好遯, 좋은 은둔생활)',
'가둔(嘉遯, 아름다운 은둔생활)',
'비둔(肥遯, 여유로운 은둔 생활)'을 생각하면 된다.
둔(遁)과 둔(遯)은 의미가 같다.
이같이 유학자들에게는 때로는 어지러운 현실을 피해 은둔하거나
혹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자의 곡굉음수(曲肱飮水)의 낙(樂),
안회의 누항단표(陋巷簞瓢)의 낙,
증점의 욕기영귀(浴沂詠歸)의 낙과 관련된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낙천지명(樂天知命)하고자 하는 삶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