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들면 울긋불긋 비경… 귓가엔 쿵쿵 물소리… 과연 ‘쿵쿵소’로다
▲ 의신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만난 쿵쿵소. 지리산 계곡을 타고 내린 물줄기가 힘찬 폭포가 돼 쿵쿵거리는 물소리를 낸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의신계곡에서는 이렇듯 이름이 붙여진 곳 말고도 맑은 물빛과 단풍이 한데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들이 곳곳에 있다.
▲ 벽소령 등산 코스의 들머리인 삼정마을에서 빗점골로 향하는 초입. 노랗게 물든 고로쇠나무 낙엽들로 뒤덮인 이 길을 지나면 조릿대 서걱대는 숲길을 만난다.
# 지리산 자락에서 ‘불편과 고독을 불러들이는 토굴’을 만나다
의신마을에서 가파른 산길을 헐떡이며 올랐으나 연암토굴의 도현 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의 오두막. 아무리 후하게 본대도 서너평이 채 안 될 듯한 토굴은 주인이 비웠어도 정갈하기 이를 데 없다. 부엌에는 호롱 등잔 하나와 장작 때는 아궁이에 얹힌 작은 가마솥 하나. 마당에는 세숫대야 하나, 대나무를 잘라 만든 빨래걸이 하나가 살림의 전부다. 댓돌에 가지런히 놓인 스님의 낡은 검정 고무신 한 짝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낙엽 한 장이 내려앉아 있다.
이곳에서는 그저 비어 있는 거처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정신이 물씬 느껴진다. 다 버리고 이렇듯 간소한 살림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마당으로는 온통 단풍에 물든 지리산 삼신봉이 들여져 있고, 손바닥만 한 연못에는 파란 가을 하늘을 담아 놓았다. 살림은 초라하되, 자연은 그득한 셈이다.
이 토굴의 주인은 선방 수좌사회에서 손꼽히는 차세대 선지식인 도현 스님. 만행 대신 지리산 자락 의신마을 계곡의 산중을 지키며 마음챙김을 통해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위파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스님이 출타하면서 매달아 놓은 문 앞의 작은 수첩을 뒤적인다. ‘물소리를 들으러 왔다 돌아간다’는 이웃 절집 스님의 문안 인사 뒷장에 ‘다음에 왔을 때, 차 한잔 주십사’하는 기별을 적어 넣었다.
전기도 들이지 않은 산중 생활이 불편할 법도 하건만, 도현 스님은 평소 입버릇처럼 “불편하고 고독해야 내면을 응시할 수 있다”고 했었다. 장작으로 군불을 때고,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는 생활도 다 수행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에 합당할지 모르겠지만, 주인 없는 토굴에서 ‘방편이 곧 목적이 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기울이는 향그러운 차 한잔
연암토굴 옆으로는 자그마한 차밭이 있다. 차밭에는 서리를 맞으며 피어난다는 흰 차꽃이 지금 한창이다. 토굴에서 차밭 너머로 오래된 감나무를 앞에 둔 오두막 하나가 꼭꼭 숨어 있다. 오두막은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 도무지 그곳으로 닿는 길이 없다. 인기척에 창호문을 열고 나온 스님에게 ‘길이 어디냐’고 묻자 ‘(길이) 없다’고 했다. 무성한 차나무를 밟으며 오두막에 들어 ‘어찌 사람 사는 곳에 길이 없느냐’고 했더니 스님은 ‘지금 걸어온 게 길이 아니고 무어냐’고 웃었다.
큰 대(大)자에 숨을 은(隱)자. 대은(大隱)이란 법명을 쓰는 스님에게 도현 스님의 근황을 물었더니 “큰스님의 일을 한낱 새끼스님이 뭘 알겠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수행에 혹 방해가 될까봐 스님이 계시건 안 계시건 토굴에는 발길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님은 “해 줄 얘기가 없으니 대신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했다. 방 안에는 물감과 캔버스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차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속가에서 그림을 그리다 출가하면서 다 버렸는데, 어느 순간 ‘다시 그림이 오더라’고 했다.
스님이 내온 차는 향긋했다. 발효차라는데 향이 짙으면서도 쓰지 않고, 뒷맛이 여간 달큼한 게 아니었다. 깊은 산중에서 혼자 지내는 삶이 적적하진 않을까. 그는 이렇듯 조용하게 침잠하는 시간이 좋다고 했다. 산 아래 세상은 너무 복잡해져 때론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지만 이렇게 산중에 들면 삶이 간명해지고 생각도 한결 또렷해진다고 했다.
# 곳곳에 이름표를 달아 주고 싶은, 늦단풍이 물든 의신계곡 풍경
연암토굴 이야기를 하다가 뒤로 밀리고 말았지만, 의신계곡의 가을 풍경은 지리산의 어떤 계곡에 대더라도 그곳을 압도한다. 삼정마을에서 만난, 지리산을 내집 드나들 듯 다녀 봤다는 산꾼도 “지리산 다른 곳에서도 이곳만 한 풍광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지리산 남쪽 자락의 계곡이라면 피아골과 문수골을 먼저 꼽지만, 그건 의신계곡의 아름다움을 미처 다 보지 못한 탓이지 싶다. 의신계곡이 매력적인 것은 그곳이 행락객은 물론이거니와 등산객들의 손도 타지 않은 청정계곡이기 때문이다.
의신계곡은 지리산의 물이 섬진강에 합류되는 화개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벽소령과 세개골로 오르는 등산로의 들머리가 되는 대성골을 지나 의신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60여가구가 사는 의신마을은 삼도봉, 명선봉, 토끼봉, 칠선봉, 연하봉, 영신봉, 삿갓봉 등 해발 1500여m가 넘는 연봉들로 둘러싸여 있다. 등산객들은 의신마을에 당도하기 전 대성골에서 다 지리산 능선으로 붙고, 벽소령을 가파르게 차고 오르려는 소수의 등산객들만 의신마을을 지나갈 뿐이다. 그나마도 벽소령으로 오르려는 등산객들은 초입의 의신계곡에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다.
이즈음 의신계곡 초입에 서면 먼저 좌우로 협곡처럼 펼쳐진 지리산 자락 단풍의 고운 색깔에 탄성부터 지르게 된다. 계곡을 따라 난 길은 제법 널찍한 비포장과 시멘트 포장도로가 교대로 이어진다. 의신계곡의 부드러운 길을 따라 단풍 트레킹을 즐기겠다면 이 길을 따라가는 편이 낫고, 계곡의 절경을 보겠다면 길을 버리고 계곡으로 내려서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계곡 건너편으로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 놓았다지만 워낙 숲이 짙어 마을 주민들로부터 들머리를 안내받아야 한다.
의신계곡에서 첫 번째로 꼽는 비경은 마을에서 1㎞쯤 오르면 만나는 용소다. 용소에 들면 오랜 시간이 둥글게 깎은 기암을 물굽이가 이리저리 돌아가는 모양새가 장관이다. 곳곳이 빼어난 절경이어서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여기서 20분쯤 더 오르면 또 하나의 비경으로 꼽히는 쿵쿵소에 닿는다. 바위틈 사이로 폭포가 내리꽂는데, 규모는 작지만 바닥까지 비치는 연초록 물빛이 환상적이다.
의신계곡에서는 사실 용소나 쿵쿵소 말고도 절경들이 줄줄이 펼쳐진다. 눈 돌리는 곳마다 기암과 물빛, 단풍과 폭포가 어우러지니 곳곳에 멈춰서서 ‘어찌 이런 풍경에 이름 하나 붙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하게 된다.
# 불붙은 단풍을 둘러친 빗점골에서 만난 두 사람
의신계곡을 타고 넘어 4㎞쯤 가면 벽소령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 들머리인 삼정마을이다. 여기까지는 마을 주민들에 한해 차량 통행이 허용되지만, 벽소령을 넘어가는 작전도로에는 차단기가 내려져 있다. 빗점골로 향하는 이 길이야말로 마을 사람들의 인적마저 끊긴 곳이다. 이 길로 접어들면 와락 무섬증까지 들 정도다.
빗점골. ‘빗점’이란 여러 비탈의 밑자락이 한군데로 모이는 곳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이름대로 빗점은 절터골, 산태골, 완골의 자락이 한데 모이면서 지리산을 타고 내린 물이 합쳐진다. 이곳이 바로 남한 빨치산부대인 남부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 최후까지 은거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이다.
항일투쟁을 벌이다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된 이현상은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했다 반김일성파로 지목돼 서울로 피신한 뒤, 지리산으로 들었다. 지리산에 은거하며 유격투쟁을 벌였던 그는 한때 축지법을 쓰고, 담장을 뛰어넘으며 신출귀몰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전남도당위원장에 의해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단죄되고 평당원으로 강등당한 뒤 이곳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이현상에 대해 말하자면, 그를 사살한 토벌부대를 이끈 차일혁 총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18전투경찰대대장이었던 차 총경은 빨치산 토벌 중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고민 끝에 각황전 문짝만 떼어 불태웠다는 이유로 ‘작전명령 불이행’의 처벌을 받기도 했고, 적장이었던 이현상의 시신을 스님들의 독경 속에 예를 갖춰 제를 지내고 화장을 치러 줬다는 이유로 추궁을 받기도 했다. 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버림받고 고립무원의 승산 없는 전투를 벌였던 이현상에게서 ‘시대의 비극’을 볼 수 있다면 그를 사살한 차일혁 총경은 ‘고뇌하는 지식인 지휘관’이었다. 조선 의용군 시절 독립을 위해 생사를 같이한 동료였던 이들에게 당시 ‘두 개의 조국’은 낯설었을 것이고,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야만 하는 상황에서 차 총경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현상의 시신 앞에 예를 취하는 것밖에 없었으리라. 빗점골에서 돌아 나오는 길. 골짜기의 단풍은 유독 선홍빛이 짙었고, 만발한 산죽들이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처럼 바람에 서걱거렸다.
가는 길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함양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지리산나들목으로 나와 성삼재를 넘으면 구례다.
구례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섬진강을 끼고 달려 화개 삼거리에서 우회전, 1023번 지방도로를 따라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면 의신계곡 입구인 의신마을이다.
좀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성삼재를 넘으면서 지리산의 가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가장 빠른 지름길은 호남고속도로로 익산분기점까지 가서 익산-장수간 고속도로로 바꿔탄 뒤 완주나들목으로 나와 19번 국도로 남원, 구례를 거쳐 화개로 가는 길이다.
묵을 곳 & 먹을 것
의신계곡 입구 의신마을 40여가구에서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민박을 친다. 김형택 이장(055-884-6463, 010-5333-3680)에게 문의하면 민박집을 연결해 준다.
펜션 스타일의 깔끔한 숙소를 원한다면 칠불사 입구에 즐비한 숙소를 찾는 것이 낫다. 통나무와 황토로 지은 ‘아름다운 산골’(010-9429-8477)은 구들찜질방과 히노키탕, 벽난로 찻집 등을 갖추고 있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하동은 재첩국과 참게탕이 명물이다. 재첩국은 여여식당(055-884-0080)과 하동할매재첩식당(055-884-1034)이 첫손에 꼽힌다. 참게탕은 개화식당(055-883-2061)이 알아준다.
이 밖에 청학동 대통밥을 내놓는 동이주막(055-882-7069)이나 녹차냉면을 내는 산골산장(055-883-2028)도 알려진 맛집이다.
의신마을에서 가파른 산길을 헐떡이며 올랐으나 연암토굴의 도현 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의 오두막. 아무리 후하게 본대도 서너평이 채 안 될 듯한 토굴은 주인이 비웠어도 정갈하기 이를 데 없다. 부엌에는 호롱 등잔 하나와 장작 때는 아궁이에 얹힌 작은 가마솥 하나. 마당에는 세숫대야 하나, 대나무를 잘라 만든 빨래걸이 하나가 살림의 전부다. 댓돌에 가지런히 놓인 스님의 낡은 검정 고무신 한 짝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낙엽 한 장이 내려앉아 있다.
이곳에서는 그저 비어 있는 거처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정신이 물씬 느껴진다. 다 버리고 이렇듯 간소한 살림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마당으로는 온통 단풍에 물든 지리산 삼신봉이 들여져 있고, 손바닥만 한 연못에는 파란 가을 하늘을 담아 놓았다. 살림은 초라하되, 자연은 그득한 셈이다.
이 토굴의 주인은 선방 수좌사회에서 손꼽히는 차세대 선지식인 도현 스님. 만행 대신 지리산 자락 의신마을 계곡의 산중을 지키며 마음챙김을 통해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위파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스님이 출타하면서 매달아 놓은 문 앞의 작은 수첩을 뒤적인다. ‘물소리를 들으러 왔다 돌아간다’는 이웃 절집 스님의 문안 인사 뒷장에 ‘다음에 왔을 때, 차 한잔 주십사’하는 기별을 적어 넣었다.
전기도 들이지 않은 산중 생활이 불편할 법도 하건만, 도현 스님은 평소 입버릇처럼 “불편하고 고독해야 내면을 응시할 수 있다”고 했었다. 장작으로 군불을 때고,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는 생활도 다 수행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에 합당할지 모르겠지만, 주인 없는 토굴에서 ‘방편이 곧 목적이 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기울이는 향그러운 차 한잔
연암토굴 옆으로는 자그마한 차밭이 있다. 차밭에는 서리를 맞으며 피어난다는 흰 차꽃이 지금 한창이다. 토굴에서 차밭 너머로 오래된 감나무를 앞에 둔 오두막 하나가 꼭꼭 숨어 있다. 오두막은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 도무지 그곳으로 닿는 길이 없다. 인기척에 창호문을 열고 나온 스님에게 ‘길이 어디냐’고 묻자 ‘(길이) 없다’고 했다. 무성한 차나무를 밟으며 오두막에 들어 ‘어찌 사람 사는 곳에 길이 없느냐’고 했더니 스님은 ‘지금 걸어온 게 길이 아니고 무어냐’고 웃었다.
큰 대(大)자에 숨을 은(隱)자. 대은(大隱)이란 법명을 쓰는 스님에게 도현 스님의 근황을 물었더니 “큰스님의 일을 한낱 새끼스님이 뭘 알겠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수행에 혹 방해가 될까봐 스님이 계시건 안 계시건 토굴에는 발길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님은 “해 줄 얘기가 없으니 대신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했다. 방 안에는 물감과 캔버스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차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속가에서 그림을 그리다 출가하면서 다 버렸는데, 어느 순간 ‘다시 그림이 오더라’고 했다.
스님이 내온 차는 향긋했다. 발효차라는데 향이 짙으면서도 쓰지 않고, 뒷맛이 여간 달큼한 게 아니었다. 깊은 산중에서 혼자 지내는 삶이 적적하진 않을까. 그는 이렇듯 조용하게 침잠하는 시간이 좋다고 했다. 산 아래 세상은 너무 복잡해져 때론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지만 이렇게 산중에 들면 삶이 간명해지고 생각도 한결 또렷해진다고 했다.
# 곳곳에 이름표를 달아 주고 싶은, 늦단풍이 물든 의신계곡 풍경
연암토굴 이야기를 하다가 뒤로 밀리고 말았지만, 의신계곡의 가을 풍경은 지리산의 어떤 계곡에 대더라도 그곳을 압도한다. 삼정마을에서 만난, 지리산을 내집 드나들 듯 다녀 봤다는 산꾼도 “지리산 다른 곳에서도 이곳만 한 풍광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지리산 남쪽 자락의 계곡이라면 피아골과 문수골을 먼저 꼽지만, 그건 의신계곡의 아름다움을 미처 다 보지 못한 탓이지 싶다. 의신계곡이 매력적인 것은 그곳이 행락객은 물론이거니와 등산객들의 손도 타지 않은 청정계곡이기 때문이다.
의신계곡은 지리산의 물이 섬진강에 합류되는 화개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벽소령과 세개골로 오르는 등산로의 들머리가 되는 대성골을 지나 의신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60여가구가 사는 의신마을은 삼도봉, 명선봉, 토끼봉, 칠선봉, 연하봉, 영신봉, 삿갓봉 등 해발 1500여m가 넘는 연봉들로 둘러싸여 있다. 등산객들은 의신마을에 당도하기 전 대성골에서 다 지리산 능선으로 붙고, 벽소령을 가파르게 차고 오르려는 소수의 등산객들만 의신마을을 지나갈 뿐이다. 그나마도 벽소령으로 오르려는 등산객들은 초입의 의신계곡에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다.
이즈음 의신계곡 초입에 서면 먼저 좌우로 협곡처럼 펼쳐진 지리산 자락 단풍의 고운 색깔에 탄성부터 지르게 된다. 계곡을 따라 난 길은 제법 널찍한 비포장과 시멘트 포장도로가 교대로 이어진다. 의신계곡의 부드러운 길을 따라 단풍 트레킹을 즐기겠다면 이 길을 따라가는 편이 낫고, 계곡의 절경을 보겠다면 길을 버리고 계곡으로 내려서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계곡 건너편으로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 놓았다지만 워낙 숲이 짙어 마을 주민들로부터 들머리를 안내받아야 한다.
의신계곡에서 첫 번째로 꼽는 비경은 마을에서 1㎞쯤 오르면 만나는 용소다. 용소에 들면 오랜 시간이 둥글게 깎은 기암을 물굽이가 이리저리 돌아가는 모양새가 장관이다. 곳곳이 빼어난 절경이어서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여기서 20분쯤 더 오르면 또 하나의 비경으로 꼽히는 쿵쿵소에 닿는다. 바위틈 사이로 폭포가 내리꽂는데, 규모는 작지만 바닥까지 비치는 연초록 물빛이 환상적이다.
의신계곡에서는 사실 용소나 쿵쿵소 말고도 절경들이 줄줄이 펼쳐진다. 눈 돌리는 곳마다 기암과 물빛, 단풍과 폭포가 어우러지니 곳곳에 멈춰서서 ‘어찌 이런 풍경에 이름 하나 붙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하게 된다.
# 불붙은 단풍을 둘러친 빗점골에서 만난 두 사람
의신계곡을 타고 넘어 4㎞쯤 가면 벽소령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 들머리인 삼정마을이다. 여기까지는 마을 주민들에 한해 차량 통행이 허용되지만, 벽소령을 넘어가는 작전도로에는 차단기가 내려져 있다. 빗점골로 향하는 이 길이야말로 마을 사람들의 인적마저 끊긴 곳이다. 이 길로 접어들면 와락 무섬증까지 들 정도다.
빗점골. ‘빗점’이란 여러 비탈의 밑자락이 한군데로 모이는 곳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이름대로 빗점은 절터골, 산태골, 완골의 자락이 한데 모이면서 지리산을 타고 내린 물이 합쳐진다. 이곳이 바로 남한 빨치산부대인 남부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 최후까지 은거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이다.
항일투쟁을 벌이다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된 이현상은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했다 반김일성파로 지목돼 서울로 피신한 뒤, 지리산으로 들었다. 지리산에 은거하며 유격투쟁을 벌였던 그는 한때 축지법을 쓰고, 담장을 뛰어넘으며 신출귀몰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전남도당위원장에 의해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단죄되고 평당원으로 강등당한 뒤 이곳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이현상에 대해 말하자면, 그를 사살한 토벌부대를 이끈 차일혁 총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18전투경찰대대장이었던 차 총경은 빨치산 토벌 중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고민 끝에 각황전 문짝만 떼어 불태웠다는 이유로 ‘작전명령 불이행’의 처벌을 받기도 했고, 적장이었던 이현상의 시신을 스님들의 독경 속에 예를 갖춰 제를 지내고 화장을 치러 줬다는 이유로 추궁을 받기도 했다. 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버림받고 고립무원의 승산 없는 전투를 벌였던 이현상에게서 ‘시대의 비극’을 볼 수 있다면 그를 사살한 차일혁 총경은 ‘고뇌하는 지식인 지휘관’이었다. 조선 의용군 시절 독립을 위해 생사를 같이한 동료였던 이들에게 당시 ‘두 개의 조국’은 낯설었을 것이고, 서로 총부리를 들이대야만 하는 상황에서 차 총경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현상의 시신 앞에 예를 취하는 것밖에 없었으리라. 빗점골에서 돌아 나오는 길. 골짜기의 단풍은 유독 선홍빛이 짙었고, 만발한 산죽들이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처럼 바람에 서걱거렸다.
가는 길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함양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지리산나들목으로 나와 성삼재를 넘으면 구례다.
구례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섬진강을 끼고 달려 화개 삼거리에서 우회전, 1023번 지방도로를 따라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면 의신계곡 입구인 의신마을이다.
좀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성삼재를 넘으면서 지리산의 가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가장 빠른 지름길은 호남고속도로로 익산분기점까지 가서 익산-장수간 고속도로로 바꿔탄 뒤 완주나들목으로 나와 19번 국도로 남원, 구례를 거쳐 화개로 가는 길이다.
묵을 곳 & 먹을 것
의신계곡 입구 의신마을 40여가구에서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민박을 친다. 김형택 이장(055-884-6463, 010-5333-3680)에게 문의하면 민박집을 연결해 준다.
펜션 스타일의 깔끔한 숙소를 원한다면 칠불사 입구에 즐비한 숙소를 찾는 것이 낫다. 통나무와 황토로 지은 ‘아름다운 산골’(010-9429-8477)은 구들찜질방과 히노키탕, 벽난로 찻집 등을 갖추고 있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하동은 재첩국과 참게탕이 명물이다. 재첩국은 여여식당(055-884-0080)과 하동할매재첩식당(055-884-1034)이 첫손에 꼽힌다. 참게탕은 개화식당(055-883-2061)이 알아준다.
이 밖에 청학동 대통밥을 내놓는 동이주막(055-882-7069)이나 녹차냉면을 내는 산골산장(055-883-2028)도 알려진 맛집이다.
▲ 의신마을에서 산자락을 치고 올라간 외딴 산중. 길조차 없는 오두막에 홀로 기거하며 수행 중인 대은 스님이 연시감이 빨갛게 익어 매달린 오래된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스님은 “산중에 들면 삶이 간명해지고 생각도 또렷해진다”고 했다. |
▲ 지리산 산중 수행공간인 연암토굴은 ‘큰스님’으로 일컬어지는 도현 스님이 기거하는 곳이다. 토굴의 부엌에는 가마솥 하나와 호롱등잔 하나뿐이다.
▲ 스님이 출타하면서 문 옆에 걸어놓은 수첩과 볼펜.
지리산의 물줄기가 섬진강과 만나는 경남 하동의 화개동천. 지난봄 순백의 꽃잎을 눈발처럼 분분히 날리던 벚나무들은 붉고 노란 몇 잎의 이파리만 남긴 채 날카로운 펜화처럼 시리게 서 있습니다. 화개동천의 물길을 따라, 한창 차꽃이 피어나고 있는 차밭을 지나 지리산 자락으로 거슬러 올랐습니다.
지리산에서 가장 늦은 단풍이 물드는 곳. 그곳이 바로 화개동천을 거슬러 대성골과 의신마을을 지나 빗점골까지 이르는 계곡입니다. 이곳에 단풍이 늦게 당도하는 것은 지리산 남쪽 사면에 따뜻한 햇볕이 드는 까닭입니다.
의신계곡은 아마 지리산의 계곡 중에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 싶습니다. 피아골이니 문수골이니 뱀사골 같은 지리산의 이름난 계곡에 밀려 알려지지 않았으되, 의신계곡의 가을 풍광은 다른 계곡을 모두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감을 뿌려 놓은 듯 화사한 단풍의 색감도 그렇거니와 콰르르 쏟아지는 계곡의 명경지수도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이 바위를 깎으며 둥근 물길을 낸 용소나 우당탕 폭포가 쏟아지는 쿵쿵소의 절경이 단풍과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그러나 그보다 더 짙은 향기를 풍기는 것은 그곳에 깃든 이야기들입니다. 지리산이 어디 단풍을 보러 내려갔다 해서 그저 단풍 하나만 보여 주는 곳이겠습니까. 지리산 의신계곡에 들면 능선의 웅장한 깊이와 깊게 팬 근대사의 상처, 거기다 그 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까지 다 만나고 올 수 있습니다.
인적 드문 의신계곡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딛고 산자락을 오르면 지리산에 들어 수행하는 큰스님의 ‘다 버리고 사는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방 수좌사회에서 손꼽히는 차세대 선지식인 도현 스님. 그가 거처하는 연암토굴은 전기도 들이지 않은 1평 남짓한 방과 그 정도 크기의 부엌 하나가 전부입니다. 토굴 옆의 차밭 너머로는 길이 끊어진 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리고 차를 닦으며 수행하는 대은 스님이 거처하고 있습니다. 오두막 툇마루에 앉아 지리능선을 바라보며 정갈한 눈매의 스님과 향긋한 차 한잔을 앞에 뒀습니다. 이쯤이면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더라도 욕심으로 가득했던 도회지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지요.
어디 이뿐일까요. 의신계곡으로 더 깊이 들면 빗점골이 있습니다. 이곳은 지리산 일대에 은거하던 빨치산부대 남부군의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입니다. 평양에서 반김일성분자로 지목돼 서울로 피신해 왔다가 1948년 11월 겨울이 휘몰아쳐 오던 지리산으로 들어간 그는 1953년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위원장으로부터 ‘적의 앞잡이’로 단죄돼 평당원으로 강등된 뒤, 이곳에서 토벌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답니다.
무성한 산죽을 헤치고 산길로 들어 그가 쓰러졌다는 바위에 서면 온갖 상념이 바람처럼 머리를 헝클고 지나갑니다. 걸터앉은 바위 주위로는 물소리만 그득히 담겼습니다. 빗점골을 돌아 단풍이 온통 핏빛으로 물든 산길을 내려서면서 지리산이 품은 것들을 생각하다 문득 시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 언제나 첫 마음이니 /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중에서)
지리산에서 가장 늦은 단풍이 물드는 곳. 그곳이 바로 화개동천을 거슬러 대성골과 의신마을을 지나 빗점골까지 이르는 계곡입니다. 이곳에 단풍이 늦게 당도하는 것은 지리산 남쪽 사면에 따뜻한 햇볕이 드는 까닭입니다.
의신계곡은 아마 지리산의 계곡 중에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 싶습니다. 피아골이니 문수골이니 뱀사골 같은 지리산의 이름난 계곡에 밀려 알려지지 않았으되, 의신계곡의 가을 풍광은 다른 계곡을 모두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감을 뿌려 놓은 듯 화사한 단풍의 색감도 그렇거니와 콰르르 쏟아지는 계곡의 명경지수도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이 바위를 깎으며 둥근 물길을 낸 용소나 우당탕 폭포가 쏟아지는 쿵쿵소의 절경이 단풍과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그러나 그보다 더 짙은 향기를 풍기는 것은 그곳에 깃든 이야기들입니다. 지리산이 어디 단풍을 보러 내려갔다 해서 그저 단풍 하나만 보여 주는 곳이겠습니까. 지리산 의신계곡에 들면 능선의 웅장한 깊이와 깊게 팬 근대사의 상처, 거기다 그 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까지 다 만나고 올 수 있습니다.
인적 드문 의신계곡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딛고 산자락을 오르면 지리산에 들어 수행하는 큰스님의 ‘다 버리고 사는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방 수좌사회에서 손꼽히는 차세대 선지식인 도현 스님. 그가 거처하는 연암토굴은 전기도 들이지 않은 1평 남짓한 방과 그 정도 크기의 부엌 하나가 전부입니다. 토굴 옆의 차밭 너머로는 길이 끊어진 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리고 차를 닦으며 수행하는 대은 스님이 거처하고 있습니다. 오두막 툇마루에 앉아 지리능선을 바라보며 정갈한 눈매의 스님과 향긋한 차 한잔을 앞에 뒀습니다. 이쯤이면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더라도 욕심으로 가득했던 도회지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지요.
어디 이뿐일까요. 의신계곡으로 더 깊이 들면 빗점골이 있습니다. 이곳은 지리산 일대에 은거하던 빨치산부대 남부군의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입니다. 평양에서 반김일성분자로 지목돼 서울로 피신해 왔다가 1948년 11월 겨울이 휘몰아쳐 오던 지리산으로 들어간 그는 1953년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위원장으로부터 ‘적의 앞잡이’로 단죄돼 평당원으로 강등된 뒤, 이곳에서 토벌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답니다.
무성한 산죽을 헤치고 산길로 들어 그가 쓰러졌다는 바위에 서면 온갖 상념이 바람처럼 머리를 헝클고 지나갑니다. 걸터앉은 바위 주위로는 물소리만 그득히 담겼습니다. 빗점골을 돌아 단풍이 온통 핏빛으로 물든 산길을 내려서면서 지리산이 품은 것들을 생각하다 문득 시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 언제나 첫 마음이니 /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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