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김재희의 여인열전_01

醉月 2009. 11. 2. 10:32

[김재희의 여인열전]

제주도의 큰손, 만덕할망

▣ 김재희/ <이프> 기획위원 franzis@hanmail.net

» (일러스트레이션/ 장차현실)

중학교 1학년 때 장래희망을 조사했는데, 교사와 간호사 말고 다른 선택을 생각하기 힘들었던 반 친구 중 절반 가까이는 ‘현모양처’라는 ‘정답’을 썼다. 개중에는 이 한몸 불태워 가정을 밝히고 싶었던지 ‘현모양초’라고 쓴 아이도 있어 선생님께 불려나갔다. 나는 좀더 멋진 답을 생각하느라 끙끙대다 ‘마술사’라 써서 제출했지만 “장난친 애”는 “맞춤법 틀린 애”와 마찬가지라며 함께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


세상이 바뀌어 역사 속에 묻힌 여자들을 발굴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지난 2000년 가을, 독일 전역에선 지구 여성들 가슴에서 ‘그녀들’을 꺼내오는 행사가 열렸다. 가부장제 역사에서 밀려나 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나는 잔다르크, 너는 포카혼타스 하는 식으로 저마다 ‘필이 꽂히는’ 인물을 택해 다시 보고 추려내는 것이었다. 2천명의 참가자가 여성의 몸과 눈으로 느끼고 궁리한 2천명의 여자를 재현하는 일종의 ‘집단 초혼제’ 같은 축제였다.

나는 누구보다 ‘만덕할망’을 모셔오고 싶었다. 만덕은 제주 기생 출신으로 자비와 구원의 여신이 된 신화적 인물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고 신하들은 실사구시의 시급함을 깨달았을 즈음, 인디오의 땅을 침탈한 백인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즈음, 대영제국의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으로 백성이 안 굶고 사는 법을 설파할 즈음, 우리의 만덕할망은 빛나는 기업가 정신으로 사업을 일으켜 큰돈을 모으셨지만 4년에 걸친 기근으로 굶어죽어 가던 제주도민을 구휼하느라 그걸 기꺼이 내놓으셨다고. ‘개처럼 벌어 만덕처럼 쓴다’는 속담은 거기서 유래했으니 만덕할망은 자본주의가 파국을 피하는 길을 보여주신 희망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나는 최근 <고래가 그랬어>라는 어린이 만화잡지에 ‘고래소녀 만덕’의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만덕의 유년기 기록이 없다는 사실 덕분에 이야기는 오히려 마법에 걸린 듯 신명이 난다. 고구려 때부터 한반도 산모들은 젖도 잘 나고 몸도 빨리 추스르게 하는 미역국을 먹었는데, 그 비밀은 미역을 엄청 먹고 젖을 줄줄 뿜는 귀신 고래로부터 전수받았다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귀신 고래와 만덕의 우정으로 나래를 펼친다.

문헌에 실린 대로 객줏집 운영만으로는 그런 갑부가 될 수 없었을 터라 내 상상력의 겨드랑이엔 또 날개가 돋는다. 열한살에 고아가 되어 열일곱에 기생이 되지만 스물셋 되던 해 기적에서 이름을 지우고 양녀의 신분으로 돌아왔던 만덕은 대체 어떤 아이템으로 그 큰 재산을 만들었을까? 임금님 초청으로 한양에 올라와 현재의 남대문시장 입구 선혜청(당시 세무서)에 묵었던 동안, 이재에 밝은 만덕은 칠순이 넘은 영의정 체제공을 비롯해 스물 초반의 임상옥과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실학자들에게 시장의 원리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내 고모할머니를 통해 들은 ‘가믄장 아기’ 전설과 친구 외할머니의 만주 시절 무용담이 만덕의 삶 속에 겹친다. 역사 속에 숨어 있던 여자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누덕누덕 상상력의 조각보로 다시 태어난다.

 

아름다운 선각자, 레이첼 카슨

해양생물학자이자 작가였던 레이철 카슨(1907∼64)은 오늘날 미국 어린이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과학자 중 한명이며, 미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변화를 이끈 두명 중 한명으로도 꼽힌다. 다른 한명은 <톰아저씨의 오두막집>을 통해 노예제도의 실상을 알리고 자유와 박애정신을 고취한 헤리엇 엘리자베스 비처 스토다. 스토 부인이 19세기 미국의 야만과 폭력을 깨닫게 한 선각자였다면, 레이철 카슨은 20세기 미국의 치명적 모순과 오류를 밝힌 선구자다.

» (사진/ Rex Features)


레이철은 얽히고설킨 자연 생태계의 섭리와 생명의 놀라운 힘을 과학자의 전문지식과 시인의 상상력을 결합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말해줬다. <바닷바람 아래서> <우리를 둘러싼 바다> <바다의 가장자리> 등은 과학교양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특히 살충제와 생태계 파괴의 인과관계를 밝힌 <침묵의 봄>은 1962년 발간되자마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이른바 문명에 대한 성찰의 기폭제가 됐다. 미국 농화학협회는 25만달러를 들여 레이철의 자료가 엉터리임을 주장하는 책자를 배포했지만, 그녀의 자료가 워낙 정확하고 빈틈이 없어 오히려 책의 판매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뒤 는 8개월 동안 이 주제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취재하고 토론에 붙인다. 레이철은 마침 심장마비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상태였다. 그러나 수천만 시청자가 토론을 보며 판단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기운을 내어 녹화에 임한다. 방송에서 화학회사 연구진들은 스물여덟 차례나 레이철의 말을 막으며 억지를 부렸으나, 그녀는 해박한 지식과 부드럽고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을 해 시청자들을 감동시킨다. 레이철은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다. 매사를 경쟁관계로 보는 우리 시각이 문제이다. 성숙한 눈으로 자연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깨달아야 한다.”

미국 영재교육의 대부인 조지프 렌줄리 교수는 ‘21세기의 이상적인 영재형 인간’으로 아인슈타인이나 빌 게이츠가 아닌 레이철 카슨을 꼽으며 이렇게 말했다. “레이철 카슨은 자신의 영재성을 개인의 명예나 부의 축적에 쓰지 않고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사용했다. 그녀의 빈틈없는 과학지식과 시적 언어는 케네디 대통령으로 하여금 ‘환경 문제를 다루는 자문위원회’를 만들게 했고, 1970년 그녀를 기리는 ‘지구의 날’이 제정됐고, 레이철 카슨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미국 환경부를 탄생시켰다.”

남이 볼 땐 좋았지만 실제 레이철의 삶은 그리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딸의 영재성을 일찍이 발견했던 어머니의 애정과 집착에 매여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2001년 레이철이 자신보다 열살 많은 한 가정주부와 주고받은 수천통의 찐하고 가슴 아픈 연애편지가 공개돼 전세계 레즈비언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호연재의 호연지기

» (일러스트레이션/ 장차현실)

중·고등학교 시절 한문 시간, 졸음을 확 쫓던 기분 좋은 사자성어가 ‘호연지기’였다. 현모양처 꽁꽁 여민 가슴 풀어젖히고, 치렁치렁 치마폭일랑 죽죽 찢어 빨랫줄에 걸어놓은 채 속곳 바람으로 어디든 질주해도 좋을 것 같은 시원한 깨우침이었다.


300년 전 이런 호쾌함을 제 이름으로 삼은 여자가 살았다 한다. 권력의 중심에선 좀 비껴난 사대부 명문가의 막내딸로, 인류 문명을 통틀어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금실 좋고 다복한 부모님과 아홉 남매에 가솔들까지 호시탐탐 어울려 시 짓고 풍류를 즐기며 한 점 거리낌이나 위축됨 없이 밝고 발랄하게 성장한 호연재(1681~1722)는 ‘마음이 넓고 태연하다’(浩然)는 당호 그대로였다.

하지만 성리학이 뿌리내리던 시기, 요즘으로 치면 수능이나 마쳤을 꽃다운 나이에 배낭여행의 꿈 대신 학연·지연·문벌을 맞춘 혼인에다 서른 넘는 노비 간수하고, 신혼 초부터 그녀 표현대로 적국(敵國·첩)을 배회하며 번번이 과거시험에는 낙방하는 서방님의 답안지를 놓고 이걸 시라고 썼느냐고 그의 짱구 대신 자기 가슴을 쥐어박자니, 이 재기발랄 호호탕탕한 안방마님, 어디 열불 터질 일이 한둘이었을까.

가부장 남성들이 가문의 여성들을 제압하기 위해 “마음이 불타듯 괴로울 때는 이를 벗 삼으라”며 작성한 규훈서의 요지는 ‘투기’에 대한 응징일 뿐이었다. 그에 견줘 호연재 스스로 작성한 수양서 ‘투기를 경계하는 장’은 “창녀와 즐기는 패륜”을 혐오하며, “지아비가 근실하게 행실을 닦으면 어찌 지어미가 투기하는 악행이 있겠는가”라고 왜곡된 현실부터 질타한다.

신혼부터 시작된 시집과의 불화와 관련해 호연재는 짐승 같은 무리에 맞서 이전투구하며 자신을 더럽히는 건 나를 기른 부모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며, ‘착한여자 병’으로 제 인생을 쪽박 내는 부당한 통념을 유쾌하게 물리친다.

한 10년 위태롭고 고단했던 시집살이에 도가 튼 호연재는 사시사철 꽃과 열매와 뿌리 골라 술 담그고, 시집 조카들의 빛나는 누님이 되어 이들을 끌고 주변 경승을 찾아다니며 시 짓고 학문을 논하길 즐겼다. 그러다 잘 익은 술맛에 취해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라는 시도 남겨두었다.

조금 앞서 사느라 애로가 많았던 그녀, 드디어 때를 만났다. 그녀의 시댁 자리였던 대덕에서는 2004년부터 ‘호연재 여성문학상’을 공모하기 시작했다. 원래 은진 송씨 집성촌으로 현재 대전시 대덕구에 편입된 송촌동 동춘당 공원에 세워진 그녀의 시비에 환한 햇살이 비춘다.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샘에 비낀 별빛 맑은 샘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서러워라 한해는 또 저물거늘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중국을 흔든 화혼, 판위량

한국에 나혜석이 있고 멕시코에 프리다 칼로가 있다면, 중국에는 판위량(潘玉良·1895∼1977)이 있다. 그녀의 사연은 장이모 감독이 제작하고 궁리가 주연한 영화 <화혼>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프랑스와 일본과의 전쟁에서 연거푸 무릎을 꿇은 전족(纏足)의 나라에서 좋은 서양문물만 골라서 배우자는 기치를 든 개혁파의 꿈도 백일몽으로 끝나버린 암울한 시절, 조실부모하고 가난에 찌들어 살던 판위량은 열네살 나이에 누각으로 팔려가 기생이 된다. 여기서부터 드라마틱한 인생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판위량은 혁명당의 회원이며 관리로 부임한 판찬화와 사랑에 빠져 그의 첩이 되고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뜬다. 더욱이 그 인연으로 공산당 총서기 추천을 받아 상하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파리와 로마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모교의 교수가 된다. 귀국 뒤 ‘중국 최고의 서양화가’로도 뽑히지만 창기였던 과거로 인한 수모가 계속되면서 자신은 물론 남편이자 후견인이었던 판찬화마저 위기에 빠지자, 다시 파리로 건너가 화혼을 불사른다. 그리고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1920년 미술대학에 들어간 이후 판위량이 끊임없이 추구한 작품의 소재는 ‘여체’다. 판위량에게 벌거벗은 여성의 몸은 소유와 굴복을 초월하는 자유의 표상으로, 춘화에나 등장하던 누드를 예술로 고집했던 그녀의 집착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자 폐쇄적인 중국 사회와 여성에 대한 폭력에 항거하는 반역으로 평가된다. 그녀의 작품 <나녀>(裸女)는 처음 출품됐을 때부터 상하이 학교와 화단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여성의 몸을 탐하는 그녀의 시선엔 남성 화가들이 대상화해온 여체의 미학이 다분하다. 그것과 일치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어중간한 경계에 서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상태는 그녀의 시선뿐 아니라 손끝의 움직임에서도 느낄 수 있다. 판위량의 수많은 작품에는 세잔과 고흐와 고갱, 마네와 모네와 마티스까지 인상주의 화가들의 필치가 두루 묻어 있다. 거기에 동양화의 터치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수능란한 그녀의 솜씨 앞에서 나는 문득 식민지 백성의 ‘재간’을 보는 듯한 착잡함을 떨칠 수 없다.

파리를 좌우로 가르는 센강 왼편에, 전세계에서 몰려온 여성 예술가들이 1920년대부터 게토를 형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소멸되기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채로운 문화적 실험을 벌였던 역사 밖 에피소드가 책으로 묶여 <파리는 여자였다>란 제목으로 나와 주목을 받았다. 그 시기 센강 주변을 배회했을 것임이 틀림없는 판위량과 나혜석의 흔적을 고대했지만,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들은 아직 식민주의와 인종주의가 무언지조차 성찰하지 않던 시대의 유색인 여자로 살았던 까닭이리라.

 

광기 어린 직접화법, 옐리네크

» (사진/ AP연합)

대학 시절 68혁명을 경험한 전형적인 전후 세대. 작가와 노동자의 이분법을 거부한 순빨갱이. 동구의 와해 무렵까지 당적을 지켰던 공산당 당원. 극우파가 연정에 참여하자 자신의 연극이 상연되는 것을 거부했던 여자. 칸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피아니스트> 덕에 우리에게도 설핏 들어본 이름이 된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59)가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됐을 때, 그녀를 아는 사람 대부분은 구토를 느껴야 했다.


생물학적으로 암컷인 이상 여성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다며 절규하고 발작을 일으키다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타협이라곤 눈곱만큼도 할 줄 모르는 편협한 그녀 앞에서 가부장제식 기품이 덜 빠진 독자들은 불편을 넘어 심한 욕지기를 느끼게 마련이다.

이런 징한 여자를 두고 노벨상선정위원회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음악적 흐름과 이를 분쇄하는 역류는 통속적 억지와 허위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위대함이 있다고 치켜세웠지만, 가부장 사회가 불허하는 금지구역과 적절히 허용하는 남루한 현실에 대한 극단적 묘사로 그녀는 여전히 공공의 적이다.

하지만 옐리네크가 자기 모국에서 공공의 적으로 금치산자가 된 건, 포르노에 시비를 거는 포르노적 작법의 남발 때문이 아니었다. 구역질 나는 과거사, 나치의 적통에 가까이 선 오스트리아 보수당 내부를 관통하는 끈끈한 연속성에 대한 광기 어린 직접화법 때문이었다. 역겹고 추한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된 것을 축하하는 일은, 그래서 무지하게 불편하고 어색한 부조리 연극을 연기하는 느낌이다.

<구토>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던 사르트르는 그게 워낙 싸가지 없는 상이라며 거부했다. 그의 구토가 실존과의 대면에서 올라오는 형이상학적 구토였던 데 견줘, 유명세를 치를 일이 끔찍하다며 집구석에 처박혀 단호한 목청으로 지루하게 긴 수상 소감을 녹음해 주최쪽에 보낸 옐리네크가 조장하는 구토는 비위를 뒤트는 저질 포르노, 그 역겨움을 참을 수 없어 토악질이 올라오는 그런 구토다. 그래서 옐리네크의 작품은 히스테리 극렬 페미니스트의 음탕하고 변태적인 광기로 치부되지만, 그녀 자신은 누구보다 냉철하고 빈틈없는 시각으로 현실을 드러내고 분석한다고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가 선정적이야? 그걸 보고 너흰 달아오르니? 정말이야? 그런 욕망이 정말로 일어나는 거야?”

어느 쪽 이야기에 장단을 맞춰야 할까? 남자의 눈, 남자의 소리, 남자의 철학으로 지은 유리의 성을 깨부수고 뛰쳐나오느라 온몸이 철철 피투성이가 돼버렸다는 그녀의 기괴한 몰골 앞에서 그녀의 주문에 따라 자꾸 구토가 일어나는 건, 낯설고 황당한 사건이다. 제 속에 똬리 튼 새 생명을 지켜내겠다고 몸이 알아서 발작을 일으키는 여자들의 입덧과 닮은 것일까?

 

사막의 꽃, 와리스 디리

» (사진/ GAMMA)

뉴욕의 패션계에서 세계적인 모델로 활약하는 와리스 디리는 1965년, 소말리아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 가족의 생존한 열두 아이 중 하나로 태어났다. ‘사막의 꽃’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녀 역시 이 지역의 ‘관습’에 따라 다섯살 적 어느 밤중, 어머니 손에 이끌려 마을의 주술사 노파 집에 도착해 녹슨 칼끝에 여린 몸을 내어놓아야 했다. 살점을 도려낸 상처는 몇달 넘게 핏자국과 고름이 범벅된 채 찢어지게 아팠고, 어린 소녀는 밤에도 신음 소리를 내며 한달 넘도록 자리에 누워 지냈다. 친언니 하나와 사촌언니 둘은 이 비위생적인 음핵 제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아프리카 북부에서 널리 행해지는 이 해괴망측한 ‘전통’에 대해,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는 명시된 바가 없다고 한다. 그건 종교 전통이 아니라, 여성의 쾌락을 용납할 수 없는 근엄한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이다. 순결한 처녀로 자라기 위해 먼저 할머니들이 칼질을 하고, 정숙한 아내로 살기 위해 다시 남편의 칼이 그곳을 갈라낸다는 엽기적 상상력! 이는 숨통을 조이는 가부장 사회에서 분노와 일탈을 꿈꾸는 대신 굴종과 순응의 생존법을 터득하고 알아서 기는 앞잡이 여성, ‘가부장제 지킴이’ 노릇을 하는 음산하고 비굴한 늙은 여성들에 의해 더욱 야비하고 끈끈하게 보존되었을 게다. 그래서 이집트와 케냐의 경우, 이 끔찍한 관습을 금하는 법률까지 공표되었지만 수백년 넘은 악습은 좀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열네살이 된 와리스 디리는 낙타 다섯 마리와 바꿔져 육십 먹은 영감의 신부로 팔려가기 직전, 여러 날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가로질러 수도인 모가디슈 언니 집으로 도망쳤다 아버지 손길로부터 좀더 안전한 런던, 영국대사였던 친척 집에서 4년 동안 식모살이를 하며 홀로 글을 익힌다. 친척이 귀국한 뒤에도 그녀는 런던에 남아 맥도널드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한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패션잡지 표지모델이 되고, 파리와 밀라노의 패션쇼 출연에 이어 레블론과 로레알의 화장품 모델로도 얼굴이 알려지게 됐다.

망설임 끝에 그녀는 1997년 자신의 아픈 과거를 고백하고, 음핵 절제로 고통을 겪지만 제 소리를 낼 수 없는 수백만의 자매들을 대표하는 유엔 명예대사로 임명돼, 전세계를 돌며 아프리카 여성의 인권을 호소하고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선 매년 200만명의 소녀가 야만적인 할례 의식 때문에 죽어갑니다. 저도 한 여성으로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학대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여성을 도웁시다.”

어느덧 세계적인 슈퍼모델의 열반에 오른 와리스 디리는 ‘사막의 꽃’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에 대해 역시 유목민다운 결론을 내린다. “난 어디서도 내 삶을 즐거운 것으로 바꾸는 법을 배웠고, 언제라도 거길 떠날 수 있다. 삶은 움직이는 거니까.”

 

국보급 캐릭터의 창조자, 포터

성공한 캐릭터는 오늘날 국보급 가치를 갖는 문화 콘텐츠이다. <해리 포터>나 <포켓몬> 같은 콘텐츠 하나를 개발하려고 각국에서는 국가적 지원을 쏟아붓는 실정이다. 영국과 미국 등 영어권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의 고전 ‘피터 래빗’, 그리고 미키마우스보다 훨씬 먼저 태어난 ‘글로체스터 양복쟁이’ 생쥐들은 어느덧 100살이 넘었는데, 이들은 진작부터 디즈니에서 탐내던 영국의 국보급 캐릭터이기도 하다.

» (사진/ Rex Features)


이들을 창조한 비어트릭스 포터(1866~1943)는, 산업혁명 이후 면방직 공업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부를 획득한 신흥 졸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겉으로는 왕족처럼 한 무리 하인을 거느리고 계절 따라 곳곳에 널린 별장으로 유람을 가는 쾌적하고 화려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실은 괴팍한 부모 밑에서 혹독한 어린 시절을 겪어야 했다. 오죽하면 열네살부터 자기만 아는 글자를 만들어 비밀일기를 써야 했으리.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인데다 바깥 세상과 차단된 음산한 저택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내며 그녀의 관심은 풀과 버섯과 벌레, 도마뱀과 개구리, 생쥐와 그 먹잇감 같은 소소한 생명들에 쏠렸다. 시시때때 이들을 그리며 국보급 토끼를 그리는 솜씨를 키운 셈이다. 사춘기 무렵 그녀를 돌봐주던 애니 언니가 시집가서 낳은 아이들에게 보낸 카드에 담긴 소박한 필치의 생쥐와 토끼들은 아직도 그대로 살아, 전세계 어린이들의 공책과 필통, 심지어는 부엌과 욕실에서 쓰는 플라스틱 물건에도 그 정겨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의 대모 격인 비어트릭스는 사후에도 전세계에서 벌어들이는 엄청난 저작권료를 통해 지금껏 놀라운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건 마흔이 되어 만난 첫사랑마저 부모의 반대로 떠나보낸 그녀가, 그림을 팔아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진 뒤, 자신의 출신과는 거리가 먼 깡촌 마을 농부로 거듭나며 시작한 사업이기도 하다.

산업화의 바람과 함께 영국의 농촌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자, 이에 맞선 지역 인사들이 뜻을 모아 자연보존운동, 이른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시작했다. 40대 후반 드디어 부모의 손을 빠져나와 도시내기의 면모를 벗고 덥수룩한 양치기 아줌마로 변신한 비어트릭스는, 시골에서 만난 듬직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1943년 77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30년 세월, 꾸준히 그림을 그려 책을 만들어 팔아 그 수입으로 주변의 땅을 사들여 본래의 아름다운 시골 모습을 지켜가며, 사진을 찍듯 섬세한 손길로 이 지역의 면면을 그려놓았다.

비어트릭스가 자연보존협회에 기증한 500만평이 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땅과 농장, 저택은 그녀의 그림에 기록된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피터 래빗의 어머니가 살았던 자연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아주 특별한 관광지로, 지속 가능한 경제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폭탄 테러리스트, 슈트로블

<테러리스트가 되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그 장삿속에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한때 임꺽정보다 더 멋진 진짜 여성 테러리스트 조직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이름하여 ‘로테 조라’(Rote Zora)! 1970년대 연속극 주인공으로 의적 조로(Zoro)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후다닥 악당을 물리치고 검은 망토 휘날리며 사라지는, 어린이들을 사랑했던 조로 아저씨! 그의 여성형 명사에 붉다는 말을 더한 로테 조라는 우리 식으로 하면 ‘빨간 조로 아줌마’가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나쁜 짓을 세상에 알려달라는 험악한 편지를 써서 언론사마다 돌렸지만 그에 반응하고 편지 내용을 실어준 건, 독일의 <한겨레> 격인 <타츠>(taz)라는 신문이 유일했다. 독일 전역에 걸쳐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아들러’란 기업 대리점들에 폭탄을 던지겠단 얘기였다. 폭탄을 던지는 이유는, 남한에 진출한 여성복 공장(전북 익산 소재)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면서도 여성노동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간부들을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자매인 제3세계 여성노동자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옷을 싸게 사 입는 일”은 옳지 않다며, 편지 말미마다 ‘로테 조라’라는 애칭을 쓰던 그들이, 1988년 8월15일 드디어 사고를 쳤다.


다음날 <타츠>에는 폭탄 투하로 유리창이 박살난 아들러 매장(12곳)이 위치한 도시마다 폭탄 표시가 그려진 큰 독일지도와 함께 아들러가 무릎 꿇고 사죄할 때까지 정의의 불꽃은 계속 타오를 거라는 비장한 내용의 편지가 소개되었다. 다른 언론에서는 ‘원인 모를 폭발’이 전국적으로 있었다는 두 줄 정도의 기사가 전부였다. 몇년째 미궁에 빠졌던 이 사건이 잊혀질 무렵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사고가 또 터졌다. 망명객들의 입국 절차 과정에서 이들을 도로 싣고 가 본국에 내려놓고 온 항공사 루프트한자 본사에 유사한 폭탄이 터진 것이다. 사제폭탄에 연결된 탁상시계의 일련번호가 드러났고, 그걸 구매한 여성의 신분을 추적한 끝에 범인으로 지목된 ‘언니’는 로테 조라의 단원인 잉그리드 슈트로블이었다.

비엔나대학에서 ‘나치 기간 유럽에서 저항운동을 펼친 여성들’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딴 그의 다른 저작들을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었다. 지루한 재판 과정에서 가끔 <타츠>에 실리는 공판 기록도 꾸준히 수집하면서 나는 그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년 뒤, 비엔나에서 우연히 슈트로블을 아는 작가를 만나 그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10여년을 추적했던 그에게 전화했을 때, 하필 그는 두달짜리 신혼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나의 귀국 일정을 그의 도착일 뒤로 미루어 드디어 그를 쾰른 대성당 옆 오래된 카페에서 만났을 때, 그는 50대에 접어든 행복한 신부였다. 아직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로테 조라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해줄 얘기가 없다고 했다.

 

아테네의 황진이, 아스파샤

포르노는 원래 희랍어로 ‘포르네’, 즉 성매매 여성을 낮춰 부르는 말에서 유래한다. 그와 달리 남자들 연회에서 시를 읊고 노래하며 고담준론을 즐기는 수준의 ‘헤타이라이’라 불리던 여성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아테네 고위 인사들과 정치와 인생에 대해 대화를 나눌 지적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우리로 치면 해어화(解語花)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송도에 황진이가 있고 평양에 계월향이 있었다면 아테네에는 아스파샤가 있었다. 르네상스 시절 플라톤의 작품을 토대로 한 성 베드로 성당의 ‘아테네학교’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만약 이 벽화를 완성한 라파엘이 21세기 정신으로 이 정경을 다시 스케치한다면, 거긴 진리와 선함뿐 아니라 아름다움과 에로스에 대해서도 멋진 수사학을 펼치는 아스파샤가 매혹적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이던 아스파샤는 당시 아테네 곳곳에서 떼지어 다니며 공부하던 무리, 즉 아카데미아를 이끄는 교사로도 활약했다. 플라톤의 제자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제자를 보내며 “좀더 온전한 깨우침을 베풀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던 탁월한 지식인이었다 한다. 형이상학에 치중한 플라톤의 관념적 철학에 견줘 몸과 마음, 성과 도덕, 개인과 공동체의 이분법을 극복한 한결 종합적이고 실용적인 아스파샤의 철학과 쾌활한 성품은 아테네 남성들을 꽤나 설레게 했던 모양이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그녀는 “몇 개월 만에 최고지도자와 통치자들을 유혹했다”는데, 나이로 따지면 아버지뻘이던 아테네 최고의 권력자 페리클레스의 정부로 열다섯번이나 그를 장군에 재선되도록 훌륭한 웅변 원고를 대신 써준 장본인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가난한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걸 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는, 지금까지 회자되는 유명한 구절도 그녀가 써준 대본에서 유래한다니 말이다.

당시 아테네는 민회가 권력을 장악해 입법·사법·행정을 총괄했고 최고의 학문이자 화두는 수사학이었으니, 논리적이고 감동적인 연설로 다른 사람을 설득해 많은 지지표를 얻으면 명예와 부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질투하는 극작가들은 아스파샤에게 ‘페니스를 핥는 암캐’ ‘불알을 파괴하는 마녀’라 비난하며 법정에 세우고 이단자로 기소해 사형까지 선고했다.

지난해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를 종결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약속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는 2005년을 ‘포르놀로지’ 원년으로 선포하고, 남성 중심의 포르노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대신 에로스로 충만한 포르나를 모색하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을 구상 중이다. 빈틈없는 논리와 유창한 언변으로 양성평등의 원리와 지속적 자기수련을 통한 상호보완적 성역할을 설파한 2500년 전 아스파샤의 철학은 이 행사의 그리스적 바탕이 되어줄 것 같다.

 

쯩자매, 군사를 일으키다

신라에서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왔을 무렵, 낙랑 공주가 고구려의 호동에게 깜박 속아 제 아버지 나라의 자명고를 찢어버렸을 무렵, 베트남은 벌써 200년 넘게 한(漢)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시절 하노이 서북쪽 어느 고을에 쯩짝과 쯩니라는 쌍둥이 자매가 사이좋게 살다가 언니 쯩짝이 먼저 시집갔는데, 식민지 총독이던 한나라 태수는 식민통치에 불만을 표시한 쯩짝의 남편을 본보기로 살해하고 그를 겁탈했다.

이에 스물을 갓 넘긴 쯩짝은 동생 쯩니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적들의 손에서 조국을 해방시킨다. 쯩자매는 먼저 자신들의 지략과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호랑이를 잡아 그 가죽을 벗겨 거기에 봉기를 유도하는 선언문을 작성해 군사를 모았는데, 군대 지휘를 모두 여성에게 맡겼다 한다. 둘은 각각 코끼리를 올라탄 채 전투를 이끌었고, 그들의 어머니와 임신 중이던 여성까지 포함해 용감하고 지혜로운 36명의 지휘관으로 구성된 8만의 베트남 군대는 식민지 백성의 수모와 불행을 분연히 딛고 일어나 중국군에 맞섰다.


쯩자매가 이끄는 전투는 계속 승전고를 울리며 65개 성을 되찾았고, 가혹한 중국의 착취에 고통받던 베트남 사람들은 식민세력의 폭압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다. 백성들의 환호 속에 언니인 쯩짝이 왕으로 추대되고, 자매는 해방된 조국을 함께 다스리며 꿈같은 세월을 보내지만, 후한 광무제는 3년 뒤 다시 군사를 동원해 베트남을 침략했다.

두 자매는 다시 전투에 나섰고 베트남 인민들 또한 똘똘 뭉쳐 맞섰으나, 중국은 너무 큰 나라였다. 쯩자매는 서기 43년, 지금의 하노이 부근에서 최후의 전투를 치르는데, 이때 베트남 군사 수천명이 생포돼 목이 잘리고 1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쯩짝과 쯩니는 적군의 손에 들어가 능욕을 당하는 대신 홍강의 지류인 핫강에 투신하는 자결을 택했다(음력 2월6일, 베트남 사람들은 이날을 쯩자매의 죽음을 애도하는 민속 축제일로 기념하고 있다).

쯩자매의 3년 천하는 이로써 막을 내렸고, 베트남은 그 뒤 900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고통받다 972년에야 독립의 꿈을 이룬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킨 독립전쟁은 한나라의 지배에 대한 베트남 최초의 대규모 저항운동이라는 의미 외에, 이후 중국에서 파견 나오는 태수들의 악정과 수탈에 대한 항쟁운동의 끊임없는 도화선으로 작용했고, 나아가 제국주의 프랑스와 미국의 침탈에 맞서서도 끈질기고 지독스런 항쟁을 벌인 저항정신의 뿌리가 됐다.

“남자 영웅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했지만 두 자매는 당당히 서서 나라의 원수를 갚았네.”

15세기 베트남의 한 시인이 쯩자매를 위해 바친 시의 한 구절이다. 논개와 유관순, 잔다르크와 쯩자매의 삶과 죽음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인류에게도 거룩한 분노와 우주적 담대함의 표상으로 그 빛을 발할 것이다.

 

‘논개’에 침흘리지마라

30년 넘게 한국을 떠나 살아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린 친구 하나와 여행을 하다 전북 장수에 있는 논개 사당에 들렀는데, 그는 ‘기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며, 춘향도 기생이 아니냐고 물었다. 한반도에서 보낸 유년기 동안 ‘기생 논개’라는 관습적 표현이 머릿속에 깊이 입력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논개는 우리에게 각인된 기생과는 거리가 먼, 짧은 생애 숱한 고초를 겪었던 무척 기구한 여성이었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차현실)


논개는 선조 7년(1574)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인 주달문과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난봉꾼이던 작은아버지가 동네 늙은이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먹는 바람에, 기겁을 한 논개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도망쳤다 잡혀와 판결을 받게 되는데, 당시 장수 부사 최경회는 사려 깊은 인물이어서 이 갈 곳조차 없는 모녀를 무죄 판결로 풀어주고 자신의 식솔처럼 거두었다고 한다. 얼마 뒤 논개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고아가 된 그는 최경회의 부임지마다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다 열일곱쯤 그의 소실이 되었다는데, 당시 최경회의 나이 쉰을 한참 넘었으니 요즘 말로 ‘원조교제’가 아닌가 싶어 잠시 심사가 어수선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국은 내 심사보다 더욱 어수선하여 곧 임진왜란이 터졌고, 최경회는 의병을 일으켜 군사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논개는 훈련장을 찾아가 의병들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는 등 훌륭한 남편의 ‘내조자’ 노릇을 했다고 전해진다. 최경회의 의병부대가 무주와 진주에서 수많은 왜군을 무찌른 공로로 그는 의병장에 발탁되고 경상우병사로 임명되는데, 운명의 장소가 된 진주성에 입성할 당시 논개는 열아홉, 최경회는 62살의 노년이었다.

논개가 순절한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것은 1593년 6월19일, 진주성 주민들은 치열한 공방을 벌이며 열흘을 버텼으나, 왜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살육이 뒤따르는 형국이었다. 성을 함락한 왜군들이 승전을 자축하는 술판을 벌일 때 문득 촉석루에서 난간 아래 바위 위에 ‘가녀린’ 논개의 자태가 드러났고, 그를 범하러 달려온 왜장을 반겨 안는가 싶더니 순간 그를 껴안은 논개는 깊고 푸른 남강으로 몸을 날렸다는, 비장하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는 우리 역사가 계속되는 한 잊히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장수와 진주 두 지역에서 경쟁하듯 논개를 추모하고 그의 이미지를 문화상품의 소재로까지 넓히는 추세다. 아쉬운 점은, 논개의 캐릭터 설정과 사회문화적 해석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이 너무도 게걸스레 침을 흘리며 유교 이데올로기 속에 그를 가두고 있다는 거다. 어느덧 고운 할머니가 되신 그를 위해 거룩한 사당을 짓고, 지루하고 엄숙한 사당 안에서 남자 시인들은 어여쁜 논개 누이의 정조와 청순함을 노래한다. 오히려 조국통일을 향해 땀을 찔찔거리며 질주하던 처연한 눈빛의 임수경과 오버랩되는 그. 우리의 자매로, 우리의 언니로 논개가 돌아올 그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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