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24

醉月 2009. 10. 29. 09:18

金東鳴  파초(芭蕉)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렬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朝光  1936년 1월호 -

 

 『이 시는 亡國의 설움을 달래는 詩情이 파초라는 한 열대 식물에 대한 열애로 승화된 것을 본다. 원산지인 남쪽을 떠나온 파초와 나라
잃은 시인과의 아름다운 유대가 시의 전체적골격이다.…』이 글은 金東鳴 시인의  파초(芭蕉) 를 풀이한 某氏의 말이다.
  대학수험생을 염두에 두고 쓴 것같은 이러한 글을 읽으면 우선 누구   안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시를 읽는 일종의 불안으로부터 쉽게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쉬운 시라고 해도 그 허슨한 문맥과 사전적 의미에서 일탈된 시어들은 확실히 밤길을 걷는 것같이 발을 헛디디게 할 때가 많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읽기에 필요한 것은 차근차근 시를 맛보아가는 과정보다는 빨리 결론을 내려주는 모범답안인 것이다.  파초는 망국의 설움이다.  이렇게  시 를  口號 로 고쳐주면 불투명했던 의미들이 단순명료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시의 텍스트를 아예 덮어버리고 지은이의 약력을 덧붙이면 된다. 과연 某氏의 그 글에서도 金東鳴 시인이 이 시를 썼던 곳이 함경남도 서호진(西湖津)의 妻家라는 것과 그 우거(遇居)에서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있을 때였다는 전기적 사실을 빼놓지 않고있다. 

  만약에 그 妻家 마당에 파초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는 지를 밝혀 줄만한 자료가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 비평과 독해를 이념적인 구호로 대치해 왔기 때문에 金東鳴 시인의  파초(芭蕉)에서 보듯 시의 한 부분만이 강조되고 그 주제와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는 부분들은 노이즈(雜音)로 제거되어 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파초의 경우에 있어서 풀이의 초점이 되어온 부분은 맨 첫행의  조국을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와 맨 마지막 행의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이다.

조국을 떠나온 파초는 바로 조국을 상실한 시인과 처지가 같다.


  그리고  우리의 겨울 은 일제 식민지의 가혹한 상황을 나타내는 정형구다. 그래서  머리맡 의  가련 한金東鳴의  파초(芭蕉) 는 울밑의  처량 한 홍난파의  울밑에 선 봉선화 와 일란성 쌍둥이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  파초(芭蕉) 를 문자 그대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해서 읽지 않고 텍스트를 총체적으로 읽으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보다도  이제 밤이 차다 의  이제 는 무엇인가. 앞으로 겨울을 예고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의 일제 식민지 상황은 봄이며 여름처럼 따뜻했다는 것인가. 파초가 일제 식민지 상황을 반영한 것이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한 가지 의미로만 읽으려고 할 때 우리는 시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거나 눈감아 버려야만 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이 시에서 파초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이시에서는 파초(사물)와 나(시인)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라고만 돌려도 시는 총체적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으며 그 재미와 자극도 커진다.
  나와 그 대상(파초)의 관계를 두고  조국을 언제 떠났노 /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의 첫연과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의 끝연을 읽어보면 금세 이상한 느낌이 들게 된다. 

 

  첫연은 너가 아니라  파초 라고 되어 있는데 끝연에 와서는 그것이  너 라고 2인칭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말 할 것없이 같은 대상을 놓고 그 호칭이 달라진다는 것은 나와 파초와의 관계가 말하자면 그 거리가 달라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좀더 자세히 읽어보면 김동명의 파초는 대상을 부르는 형식적인 호칭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있어서도 먼데서 가까운 것으로 점차 접근해 오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연의 파초는  나 와  파초 와의 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장소와 남국만큼 떨어져 있다. 파초의 이미지는 나와 무관한 위치에 독립해 있다. 의인화는 되어 있지만 파초는 어디까지나 파초로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둘째연에 오면 파초는 한결  나 와 가까워져서  파초 라는 객관적인 호칭은  너 라는 2인칭으로 불려지면서 하나의 여성으로 의인화된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수녀 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로 여전히 자기와는 단절되어 있는 접근 불능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3연에 오면 비로소  나 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내 쪽에서 능동적으로 파초에 다가간다.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렬의 여인 / 나는 샘물을 길어 네발등에 붓는다 로 파초의 관찰자로서의 화자가하나의 행위자로 바뀌면서  나와 너 의 그 관계가 시작된다.
  동시에 파초의 이미지도 변화한다. 속세와 단절된 고절(孤節)의 수녀에서 정열의 여인으로 변한다. 그래서 나와 파초의 관계를 나타내는 거리 공간은 신체적인 공간으로 좁혀져서  네 발등 으로까지 다가간다.

그리고 그런 접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여름 소낙비로 상징되는 여름의 계절이다.

 

  4연에 오면  이제 밤이차다 /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로서 계절은 가을 밤(서리)의 계절로 옮겨지고 나와 너의 거리는 더욱 더 가까워진다. 그래서 바깥 공간은 보다 은밀한 실내 공간으로 옮겨지고 3연의  네 발등 은  내 머리맡 으로 교체된다. 파초와 나의 관계는 밖에서 안으로 아래(발등)에서 위(이마)로 이동하면서 내면화하여 정신적인 일체감을 이룬다.


  5연에서는 나와 너의 관계는 독립적인 존재로부터 주인과 종처럼 완전히 종속관계로 합쳐진다. 물론이때의 종이라는 것은 계층적 용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끼리 흔히 쓰는  당신의 노예 와 같은 일체화를 나타내는 애칭이다. 그냥 겨울이 아니라  우리의 겨울 이라고 한 것은 완전히  나-너 의 관계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파초 의 텍스트 전체를 정밀하게 읽으면 그 호칭이  파초 에서  너 로,  너 가 다시  우리 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이방의 먼 땅에 있었던 대상이 그 거리가 축소되어 실내의 머리맡까지 이르고, 너의 발등 나의 머리맡은 하나의 치마로 가려진 따뜻한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진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변화시키는 공간의 의미는 계절의 의미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된다. 직접적인 것은 없으나  향수 ,  외로움  등 봄철의 애상이 암시되어 있고 3,4연에는 직접적으로여름과 가을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끝연에는 첫연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올 겨울이 암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봄에서 겨울로 계절이 변할수록 나와 파초의 거리는 좁혀지고 종국에는 겨울 추위에 의해서 나-너의 관계는  우리 라는 일인칭 복수로 마무리된다.


  서정시란 무엇인가.  너 속의 나 ,  나 속의 너 를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 속에서 서정시의 세계가 열린다. 서정시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 사랑의 시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동명의 파초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의 겨울을 치맛자락으로 가리운다는 상상 속에는 강렬한 에로티시즘까지 내포되어 있다. 이 이상의 연시(戀詩)가 어디 있겠는가.
  시에서 안정을 추구하려는 세력은  파초 가 정치시인가 연시(戀詩)인가 모범답안을 빨리 써달라고 할것이다. 그러나 시에서 일상의 논리와 길들여진 언어가 해체되는 그 거북스럽고 불안한 떫은 맛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단지 먼 남국의 파초가 밀실의 머리맡으로 다가오는 그 경이로운 시의 축지법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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