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23

醉月 2009. 10. 22. 08:50

 김현승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를 이야기할 때 이따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인용된다. 원래 이 동화는 프랑스 지방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리구두가 아니라

「가죽구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죽(vaire)이란 말이 유리(verre)란 말과 그 음이 비슷해서 영어권으로 건너올 때 유리구두로 잘못 번
역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진짜보다도 더 널리 퍼지게 되어 이제는 프랑스의 본고장으로까지 역수입되어 「유리 구두」로
정착되고 말았다. 본래의 가죽구두보다도 유리구두의 이미지가 신데렐라의 이야기에 더 잘어울렸기 때문이다.


  일단 시가 태어나게 되면 그 언어들은 그것을 낳은 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자체의 이미지로 홀로서기를 한다. 그것을 증명해 보
인 것이 바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이다.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에 등장하는 「백합의골짜기」도 마찬가지이다. 백합이라고 하면
서구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화병이 아니라 골짜기에 핀 백합꽃이라고 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골짜기에는 진달래나 혹은 할미꽃들만이 피어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라 해도 「백합의 골짜기」는 현실속에서도, 그리고 시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미지의 근원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오역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골짜기의 백합」은 「은방울 꽃」(Lisdes
Valles)이라는 발자크의 소설 제목을 일본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옮겨놓은 데서 생겨나게 된 말이다.하지만 우리는 그 덕분에 여지껏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얻게 된셈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골짜기의 백합」은 당당히 홀로서기를 하고,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에 와서는 아주 절묘한 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는 공자가 보며 크게 탄식했다는 「골짜기의 난초」(난향유곡)가 되었거나 혹은 백합의 경우라해도 성경에 있는 구절대로 「들에 핀 백합」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가을의 기도」에서 「백합의 골짜기」는 단순한 장식적 은유가 아니라 「굽이치는 바다」와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를 잇는 중요한 매개공간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영혼」을 가시화하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 「굽이치는 바다」란 말은 시인 자신의 말대로 「겸허한 모국어」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법에 잘 맞지 않는 표현이다. 냇물이나 산맥이라면 몰라도 넓고 편편한 바닷물은 굽이친다고는 할수 없다. 그리고 연극이나 소설의 경우라면 대단원에 해당되는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처럼」은 누가 봐도 진부한 비유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합의 골짜기」가 끼어들면 거짓말처럼 그 모든 시구들은 갑자기 새롭고 긴장된 이미지로 살아난다. 「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를 분석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다른」이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 마지막 시행들은 시인의 내면속에서 변화해 가는 영혼의 모습을 세단계의 은유적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영혼은
「바다→골짜기→마른 나뭇가지」의 순서로 공간을 옮겨가면서, 그 단계마다 영혼의 모습은 「파도」(바다)와 「백합」(골짜기)과 「까마귀」(마른나뭇가지)로 변신한다. 넓은 바다는 좁은 골짜기로, 골짜기는 다시 앙상한 나뭇가지로 면에서 선으로 이동하면서 축소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수평의 바다가 점차 수직화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골짜기가 되고 이윽고 높은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다. 물론 그 공간에 자리한 대상물들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변화해 간다. 바다의 영혼은 파란색 파도로 굽이치고(그렇다. 바다가 골짜기의 백합과 연결되었을 때만이 굽이치는 바다의 시적 일탈성은 허락된다). 골짜기의 영혼은 백합처럼 흰빛으로 조용하게 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이르면 바다의 파도들은 날개를 접은 까만 까마귀가되어 정지된다. 그러니까 영혼의 색채는 청­백­흑으로, 그 움직임은 동­부동­정으로, 그리고 상태는 무생­식물­동물 로 변모해 가고 있는 과정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 패러다임 읽기를 통해서 푸른 바다에서는 봄(젊음)의 영혼, 골짜기에서는 하얗게 정화해가는 여름(노장)의 영혼, 그리고 이윽고 마른 나뭇가지에서는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 있는 영혼의 사계절을 보게 된다. 그리고 움직임도 넓이도 색채도 모두
떨어져 나간 가을의 영혼이지만, 그것이 다다른 곳은 바다와 골짜기보다 훨씬 높은 수직의 자리 라는것을 알 수 있다. 그 영혼의 위치야말로 「홀로 있게 하소서」의 마지막 고독에서 얻어질 수 있다.

 

 「가을의 기도」는 그 형식만 3연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패러다임도 역시 세국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연의 가을은 「기도하게 하소서」로 기도하기와 시쓰기를 위한 모국어(언어)에 대한 욕망을, 가운데 연의 가을은 「사랑하게 하소서」로 시간에 대한 욕망을, 그리고 마지막 연의 가을은 「홀로 있게 하소서」로 고독한 영혼에 대한 욕망을 나타낸다. 가을의 욕망을 나타내는 이 세가
지 패러다임은 단순한 공간적 비교 축으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비교축으로도 전개되어 있다 . 처음 연은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로 초추를, 가운데 연 은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로 중추를, 그리고 「마른 나뭇 가지」의 마지막 연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인 만추의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가을의 기도는 마지막 연에서 완성하도록 되어 있다.


  첫째연과 둘째연은 「가을에는 …하소서」로 시작하여 역시 「…하소 서」의 종지형으로 끝낸 완벽한 병렬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마지막   연만은 같은 병렬구조를 지니면서도 도치법을 써서 「하소서」가아니라 「까마귀처럼」으로 끝맺음으로써 그 틀을 깨고 있다. 형식만이 차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첫연의 기도하기­시쓰기는 모국어라는 대상이 있고, 가운데 연의 사랑하기는 「오직 한 사람만」
이라는 뚜렷한 대상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 연에는 그런 목적 대상이 없다. 마른 가지위의 까마귀처럼 절대 고독의 내면 세계만이 존재한다. 끝연은 첫연과 가운데 연과 대응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1,2,3연의 전구조를 그 내부속에 복사해 놓은 프락탈 구조로 되어있다. 즉 1연의 「기도하기­시쓰기」는 굽이치는 바다에, 그리고 가운데 연의 「사랑하기」는 골짜기의 백합에, 그리고 「홀로 있기」는 「마른가지 위의 까마귀」에 대응한다.


  「가을의 기도」는 시와 종교(유일자에 대한 사랑)를 거쳐 최종적 인 죽음의 자리에 다다르는 삶의과정을 성숙과 조락의 가을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을의 기도」에는 봄의 바다와 여름의 백합,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인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로 삶의 사계절이 내포되어 있다. 첫연의 낙엽과 마지막 연의 고목 사이에는 백합 꽃이 피어 있는 골짜기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백합과 까마귀의 절묘한 결합으로 「가을의 기도」는 비로소 높은 음자리표를 지닌 화음처럼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음성을 너무 닮았다고 나무라서는 안된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골짜기 의 백합」처럼 오히려 오역의 경우가 보다 아름다
운 시의 이미지를 낳듯이 릴케의 기도를 닮았다해도 이미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는 홀로 있는 높은나뭇가지 위에서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영혼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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