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박정호기자의 베트남여행기_01

醉月 2009. 11. 3. 11:47

베트남, 적으로 만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비행기 안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추웠다. 환한 미소로 자리를 안내해주는 승무원에게 항공사의 슬로건을 '고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항공사'에서 '고객을 춥게 만드는 항공사'로 바꿔 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5시간 후 열대 기후의 나라에 내리게 될 승객들을 위한 항공사의 배려였을까.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몇 시간은 거뜬히 돌아다닐 수 있게 한기를 팍팍 불어넣어 주는 최첨단 서비스일지도 모른다. 항공사 홈페이지 어딘 가에 있는 '비행기 아이스팩'이라는 항목을 내가 못 봤을 수도.

무턱대고 항공사만 나무랄 수는 없었다. 다른 승객들은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시원한 기내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사실 닭살이 돋을 만큼 추위를 느낀 데엔느 나의 판단 착오가 큰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없다. '거기 정말 덥다'는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평소에 잘 입지 않는 민소매 의상으로 과감한 노출을 시도했으니 말이다. 시원한 복장은 30대 총각의 몸을 보호할 수 없었다.  비행기도 타기 전에 마음은 벌써 열대의 나라에 가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오버'는 고통을 낫는 법. 자리에 앉자마자 항공사의 두툼한 보라색 담요를 목까지 덮었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옆자리의 아저씨가 내 모습을 보더니 춥냐면서 자기 몫의 담요를 내민다.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다. 괜찮다며 눈인사를 하고 뭐하러 베트남에 가냐고 물어보니 사업차 나가는 거란다. 나에 대해 묻길래 혼자 여행 가는 총각이라고 했더니, 그러면 베트남 처녀 만나서 데리고 오면 되겠다며 크게 웃는다. 뜻밖의 충고에 적당한 대답이 언뜻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그건 좀..."이라고 대충 얼버무리면서 쑥스럽게 웃었다. 시큰중한 내 반응에도 아저씨의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동그란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깥에는 짙은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 빨간 신호봉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탄 비행기에 보낼 관제탑의 이륙 명령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면 얼마나 신기할까.

담요 덕분에 한기가 사라질 무렵 비행기의 진동이 온 몸에 느껴졌다. 떨림과 함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아까부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기장의 억양 있는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았다. 각종 주의 사항을 이야기 해주던 기장의 목소리는 엔진 소리에 묻혀버렸다.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활주로 위의 남자가 신호봉을 위 아래로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육중한 비행기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출발에 놀랐는지 앞쪽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륙을 준비하는 승무원들의 몸놀림도 바빠졌다.

담요를 내리고 좌석벨트를 맸다. 추운 게 많이 가셨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내 자리가 화장실 앞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내 자리는 창문 쪽 자리였다는 것. 통로 쪽에 앉은 아저씨는 볼 일을 보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고 가는 사람들 대신 문을 닫아주고 있었다.

비행기는 더 이상 활주로에 머물 수 없다는 듯이 속도를 냈다.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가 보이던 창문 밖 풍경은 이제 들판이 차지했다. 회색 비행기 날개, 회색 활주로와 초록색 들판 그리고 파란색 하늘이 한 데 뭉쳐 스치듯 지나갔다. 형체가 없는 회색과 초록색 그리고 파란색, 빛깔의 조합. 제법 잘 어울렸다.

굉음이라고 할 만큼 엔진소리가 커지고 잠시 멈춰섰던 비행기가 스프링처럼 튕겨져 나갔다. 빠르다. 귀를 찢는 듯한 마찰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창문 밖은 온통 푸른빛이었다. 45도 각도로 머리를 세운 비행기가 힘겹게 하늘로 향했다. 날개 위로 온통 하늘. 귀가 멍멍했다. 등을 간지럽히는 기계의 떨림. 마치 비행기 모형기구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한참 하늘로 향하던 비행기가 고개를 숙였다. 지상의 모든 물체가 장난감처럼 보이더니 어느새 비행기는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었다.

내가 날아가는 곳에도 초록빛깔 들판과 파란빛깔 하늘이 있겠지. 그곳은 우리나라보다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독특하고 풍요로운 문화, 장엄한 경관, 교양 있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여행 가이드의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도 난 그곳에서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오자이와 쌀국수보다 차가운 총과 뜨거운 피

베트남 호치민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베트남 민중 학살 등 미군의 만행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15일 동안 내 발걸음이 닿을 곳은 베트남이었다. 사실 '왜 베트남이야?'라는 친구들의 물음이 반복될 때마다 적당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뭘 바라고 가는 여행이 아니었으니까. '독특하고 풍요로운 문화, 장엄한 경관, 교양 있고 친절한 사람들'을 보러 간다고 했으면 좋은 답변을 됐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꼭 느끼고 와야겠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빠질 수 없는 나라이니까. 내 머릿속에 베트남을 떠올릴 때마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꼭 따라왔다. 아오자이와 쌀국수보다 차가운 총과 뜨거운 피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베트남의 봉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베트남은 프랑스를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이때까지는 전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이 컸다. 남과 북이 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약속이 깨지면서 남과 북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에 북베트남이 통일을 목적으로 남쪽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자, 남베트남에 머물며 이미 베트남 정세에 개입하고 있던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보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수렁 같은 전쟁의 시작이었다.

깊은 수렁은 베트남과 미국 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베트남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던 한국에 마수를 뻗친 것이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베트남 파병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의 '미국 달래기'용이었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면 우방국을 상대로 전쟁 참여를 요청했지만, 오직 7개국만 이에 화답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만이 대규모 전투병을 베트남에 보냈다. 정통성 없는 박정희 정권이 우리 젊은이들의 핏값으로 미국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연인원 32만 명의 우리나라 군인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 약 5만명의 전투병이 베트남에 상주했다. 이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10억 달러를 벌었지만, 5천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1만6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아직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의 패권주의와 권력자의 술수로 인해 아까운 젊은이들이 사지로 내몰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베트남 민중들을 죽였고, 베트남 민중들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죽였다. 푸른 산과 들판에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베트남에 대한 나의 '섬뜩한'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 게 아니다. 강대국의 무모함과 우리나라 독재정권의 잔인함이 나에게 심어준 것이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닮았다

베트남 호치민의 활기찬 오토바이 물결

비행기 안에서 나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식사를 하며 맥주를 한 캔 마신 탓일까. 그보다는 베트남으로 가는 길이 마치 그동안 못 만났던 형제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닮았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았지만, 그 고난을 이겨낸 점. 전개 과정을 다르지만, 남과 북으로 나라가 갈라져 이념 갈등을 겪었던 점. 아무리 생각해도 베트남은 적으로 만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다.

창문 밖을 보니 흰 구름이 같이 날고 있었다. 예쁘다. 다시 추워져 담요를 덮고, 가방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꺼내 읽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뫼르소가 장례식을 위해 양로원을 찾는 부분이 묘사되어 있었다. 어떻게 어머니의 죽음 앞에 뫼르소는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을까.

베트남 호치민. 불과 40여 년전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총을 메고 들어갔던 곳으로 나는 배낭을 메고 날아간다. 혼자가는 첫 여행.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벌써 베트남에 가 있었다. 낯선 곳에 간다는 설렘으로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져 왔다.

하지만, 다른 한 구석은 서늘했다. 그 곳에는 불안감과 외로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15일 동안 혼자일 거라는 생각 만으로 불안하고 외로웠다. 어쩌면 비행기 안에서 느낀 한기는 나의 몸 속에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을 수도 있다.

'과연 나는 혼자 잘 해낼 수 있을까.'

아직 답을 알 수 없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답답함과 '담담', '셀렘', '불안감', '외로움'이 뒤섞인 순간.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오직 승무원들 뿐이었다.

빨간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에게 맥주 한 캔을 더 부탁했다. 베트남 맥주로.

 

3천동으로 항해한 호치민의 오토바이 바다

얼마나 잤을까. 승무원이 나의 좌석을 툭 치고 가는 바람에 눈을 떴다. 이제 곧 착륙하니 좌석을 원위치 하란다. 벌써? 정말이다. 창 밖을 바라보니 이미 비행기의 고도가 많이 낮아졌다. 구름 위에 있던 비행기가 구름 아래로 내려와 있다. 여기가 베트남 상공인가. 어디에도 베트남이라는 표지판은 없었지만, 저 아래 보이는 귀여운 집과 그림 같은 호수가 이곳이 베트남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호치민 교외 어느 마을 위를 날고 있는 게 분명했다.

들뜬 마음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있으려니까 옆자리의 아저씨가 또 다시 말을 건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다, 열심히 찍어라' '잘 먹어야 견딘다' '화장실 옆자리는 처음인데 너무 짜증난다'라는 '주옥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별로 대꾸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지만 아저씨 덕분에 화장실 옆자리에는 절대 앉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건 정말 잘된 일이다.

창문 밖 MP3 플레이어처럼 보이던 건물이 마법이 풀렸는지 이제야 건물처럼 보였다. 개미떼처럼 보이던 자동차들도 네 바퀴를 가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조용하던 기내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창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승무원에게 뭔가 부탁하기도 했다. 이륙할 때 목청을 높였던 아기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시간. '자, 어떻게 여행을 시작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내 머릿속 어딘가에 던져놓았을 때 비행기는 날개 대신 바퀴에 쭉 펴고 베트남땅 호치민에 내려 앉고 있었다.

프랑스가 터를 닦은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

착륙 전 베트남 상공에서 아래를 바라본 모습.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은 호치민시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베트남에서 가장 큰 공항이라고 한다.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눈에 띄게 웅장한 구석은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활주로 얖 옆으로 보이는 격납고가 인상적이었다. 검은색 아치 모양의 격납고가 군용 시설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전투기나 헬기가 그곳에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전 세계로부터 날아온 알록달록한 비행기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공항에는 어울리는 않아 보였다.

원래 떤선녓 국제공항의 역사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탄생부터 그렇다.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가 1930년대에 이곳에 비포장 공항을 처음 세웠다. 베트남을 수탈하기 위한 프랑스의 인프라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미군은 이 공항을 수리, 보수해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사용했다. 하루에도 수십차례, 수백차례씩 이곳에서 미군 전투기와 헬기가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피비린내를 불러 일으키는) 작전을 마친 전투기와 헬기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먼저 하늘나라로 간 동료를 위해, 아직 살아 있는 자신을 위해 신께 기도했을 것이다.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의 모습. 사람들이 입국자를 기다리고 있는 이곳은 실외다. 준비 없이 입국장을 나섰다가 큰 코 다친다.

입국 심사대로 가는 길. 우리나라 회사들의 광고판이 걸려 있어 반가웠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디에도 'KOREA'라는 말이 없는데 광고를 본 외국 사람들은 이 광고를 한 회사가 대한민국 회사인 걸 알까. 하지만 다가가 물어보기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너무 빨랐다. 그 발걸음에 맞춰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입국 심사대.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는 입국 심사관들에게 물어보기에는 겁이 났다. 질문은 커녕 제복을 입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여권을 달라던 아저씨에게는 인사말조차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니 무미건조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고 무미건조하게 여권을 돌려준다. 나도 무미건조하게 땡큐라고 한마디 한 뒤, 내려와 배낭을 찾고 입국장으로 향했다.

공항 안 환전소에서 베트남 화폐인 '동'으로 환전했다. 준비해간 달러를 10만동과 1만동, 그리고 약간의 잔돈으로 바꾸었다. 우리나라 지페보다 세로는 약간 길고 가로는 약간 짧았다. 만약 지페로 베트남의 위인들을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당장 그만두자. 금액과 색깔의 차이만 있을 뿐 지페에는 죄다 호치민 아저씨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친절한 아저씨들에게 'No'라고 말하다

공항에서 호치민 시내로 운행하는 152번 버스다. 우리나라 마을버스를 닮았다. 버스비는 3천동. 버스에 승차한 이후 안내양이 직접 받는다.

돈을 배낭 속 주머니에 넣고 바깥으로 나가자 팻말을 사람들이 많이 서있다. 여기까지는 모든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입국장 풍경이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입국장은 뭔가 달랐다. 참기 힘든 열기는 사우나 한증막에서나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랬다. 떤선녓 국제공항 입국장은 실외였다. 사람들은 이 더운 날씨를 만끽하며 줄지어 서 있었다. 추워서 담요까지 덮었던 비행기 안이 이렇게 그리울 수가. '비행기 아이스팩' 서비스는 정말 있는 건지도 몰랐다. 구름이 태양을 가려주었으니 망정이지 더위를 먹어 그대로 공항 앞에 주저앉을 뻔했다.

가벼운 호흡곤란을 느끼며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미소를 띠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Taxi? taxi? Where are you going?"
"No taxi."

짧은 영어로 아저씨들을 되돌려보냈지만, 공항 주위에는 아저씨들이 많았다. 세 걸음을 채 내딪기도 전에 새로운 아저씨가 똑같이 물어왔다. 몇 번의 '노'를 부르짖었을까. 돈을 아끼기 위해 버스를 타기로 이미 마음 먹은 터였다. 솔직한 심정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택시를 타고 시원하게 호치민 시내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호치민 시내로 가는 길. 오토바이가 정말 많다. 버스는 오토바이 바다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다행히 여행자 거리로 향하는 버스를 쉽게 발견했다. 바로 152번 버스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 보던 마을버스 같았다. 푸른 유니폼을 입은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눈인사를 하고 올라탔다. 버스비 내는 곳이 없어서 '공짜인가'라고 좋아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잠시 후 버스 안내양이 나타났다. 흰 블라우스에 마스크를 쓴 안내양이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며 손을 내민다.

그 손에 버스비를 얹어줘야 했다. 'How much?'라고 물어보니 손가락을 세 개 편다. 버스비는 3,000동. 참 착한 가격이다. 1달러를 18,000동으로 바꾸었으니까 20센트도 안 되는 셈이다. 잔돈을 거슬러 준 안내양은 무심히 뒤로 가버렸다. 뒤를 돌아 데탐거리에 닿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더니, 알아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아주머니 몇 분이 올라타고 나자 버스는 바로 출발했다.


자동차는 슬금슬금, 오토바이는 쌩쌩

더운 날씨에도 미용을 위한 긴팔 옷과 마스크는 필수.

야자수의 환대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가 길은 마치 제주도에 온 것 같았다. 더운 날씨와 야자수 그리고 아담한 공항이 제주도와 닮았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시내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서자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이럴수가. 눈 앞에 보이는 건 오로지 오토바이 뿐. 오늘이 '세계 오토바이의 날'이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오토바이가 도로 위에 있을 리가 없었다. 자동차가 달리는 게 어색해 보일 정도였다. 주눅든 자동차는 슬금슬금, 신이 난 오토바이는 쌩쌩. 오토바이의 바다였다. 오토바이를 신경쓰느라 버스는 천천히 달렸다.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호치민의 경치를 잘 볼 수 있었다.

신기한 풍경에 고개를 돌려 여기 저기 바라봤지만, 버스 안에 눈이 휘둥그레진 건 나밖에 없었다. 승객들과 눈이 예쁜 안내양은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토바이의 물결 위로 유유히 항해했다. 마치 여객선에서 알록달록한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삐~삐~!' 갈매기의 울음소리 대신 오토바이의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물결은 거셌지만 배 안은 평화로웠다.

 

오토바이는 점점 많아졌다. 모든 방향에서, 모든 도로에서 오토바이가 쏟아져 나왔다. 오토바이의 물결은 다른 오토바이의 물결을 만났고 다른 오토바이의 물결은 또 다른 오토바이의 물결과 뒤섞였다. 물결은 경적을 울려대며 자동차를 하나씩 삼켜갔다. 내가 탄 버스도 필사적으로 울어댔지만, 소용 없었다.

왜 이렇게 오토바이가 많을까. 그 해답은 이용하기 불편한 대중교통에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오토바이 덕분에 굳이 대중교통을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한국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베트남의 대중교통 체계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지하철 노선은 아직 완성된 게 없고, 운행하는 노선버스는 가뭄에 콩나듯 보였다. 가뭄을 이겨내고 도로 위를 다니는 버스 대부분이 '콩나물 시루'. 그나마 자주 보이는 택시는 이용객 대부분이 외국인들이었다.

버스가 손님을 태우기 위해 잠시 섰다. 얼굴에 주름이 많은 아주머니가 힘겹게 버스 위로 올라왔다.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당연히 베트남어겠지만) 안내양에게 뭐라고 하면서 버스비를 주었다. 화가 조금 난 것 같았다. 앞차가 승차거부라도 했나? 내 뒷자리에 앉길래 슬쩍 쳐다봤는데 아주머니는 입을 삐죽거리며 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장치마 차림 라이더.

버스의 속도는 아까보다 더 느려졌다. 차선을 바꾸어 잠깐 정류소에 섰던 게 '실수'였다. 오토바이들은 틈을 주지 않았다. 우리 버스가 비워준 공간은 뒤에 있던 오토바이들을 빨아들였다. 오토바이들은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우리 버스를 지나갔다. 묘기를 부리듯 아슬아슬하게 습자지 한 장 차이 만큼의 틈만 남기고.


 아마 내가 호치민에서 운전대를 잡으면 속 터져 죽을 거다. 오죽하면 여행 안내서에서 직접 운전하는 것보다 "운전사가 딸린 차를 빌리는 게 낫다"고 할까. 부디 참을성과 침착성을 겸비한 사람들만 운전대를 잡기를.

오토바이 운전자들의 모습은 참 다채로웠다. 와이셔츠에 정장바지를 입은 직장인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젊은이들, 아이들을 태운 아저씨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 젊은 연인들도 오토바이를 몰고 있었다. 예쁜 치마를 입고 오토바이 뒤에 탄 여성들이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불문이었다. 베트남에서는 누구나 '라이더'가 될 수 있었고, 되어야만 했다. 저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내 눈에는 다 똑같이 보였지만 분명히 나이대 별로, 직업별로 인기 있는 오토바이가 있을 것만 같았다.

베트남에서는 누구나 '라이더'

다양한 헬멧을 쓰고 호치민 시내를 달리는 사람들.

오토바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게는 오토바이보다 라이더들의 헬멧에 눈길이 더 많이 갔다. 모두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버스에서 바라보니 마치 컬러풀한 막대 사탕을 모아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유치하게도 하얀 헬멧은 바닐라맛, 빨간 헬멧은 딸기맛 그리고 까만 헬멧은 초콜렛맛이라고. 이 더운 날에 헬멧을 꼭 쓰는 걸 보니 경찰의 단속이 심한 게 분명했다.

헬멧과 함께 눈에 띄었던 건 바로 마스크. 많은 라이더들이 손수건이나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오토바이 꽁무니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를 죄다 마실 필요는 없으니까. 피부보호를 위해서도 마스크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여성 라이더들이 더 더워보였다. 여성들은 긴 팔 옷을 입고 헬멧과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피부노출을 피하기 위한 것. 정말 이런 날씨에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면 피부가 검게 타는 건 금방일 듯 싶었다. 베트남 여인들도 우리처럼 하얀 피부를 더 선호하는 걸까. 선글라스까지 써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여성 라이더도 있었고, 생전 처음 본, 드레스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긴장갑을 끼고 있는 여성도 있었다.

선글라스에 마스크에 긴장갑까지.
여성들은 다리를 꼬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여성들을 본 순간, 갑자기 한나라당의 '복면시위금지법'이 떠올랐다. 이 법이 여당의 뜻대로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저 여성들은 시위 현장에서 바로 연행될 거다. 얼굴을 가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찰에 끌려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버스 승객들이 타고 내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네버엔딩' 오토바이 관찰에 지루함을 느낄 때 쯤 안내양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다 왔구나'. 나도 그처럼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여기냐'고 물어봤다.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곳은 여행자들의 거리, 데탐

호치민 데탐거리의 한 카페에서 바라본 모습.

안내양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미소를 남기고 버스에서 내렸다. 이곳이 바로 여행자들의 거리인 '데탐 거리'. 무수히 많은 숙소와 여행사가 호기심 많은 여행자들을 기다리는 곳이다. 용케도 이곳까지 왔다. 이제 숙소를 구하고 투어를 예약해야 했다.

가로가 좁고 세로가 긴 건물들이 도로 양 옆에 버티고 있었다. 길쭉한 건물들의 베란다 장식은 고풍스러운 서양 건축물처럼 보이게 했다. '프랑스의 영향 때문이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아래쪽으로 내려가는데 여기도 오토바이가 쉴새 없이 지나간다. 이 거리에도 오토바이 엔진소리와 경적소리가 소리의 전부였다.

 

몇몇 외국인들이 앞이 트인 카페에는 병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건너편 카페에는 곱슬머리의 서양 남성 두명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혼자 카페에 있던 한 남자는 책을 탑처럼 쌓아 둔 베트남 남자와 흥정 중이었다. 그 옆에는 여자 셋이서 깔깔거리고 있었다. 카페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시원한 음료로 더위를 이기는 중이었다.

카페에서 눈을 돌려 거리를 둘러봤다. 길가에도 여행자들이 많았다. 배낭을 멘 사람들, 여행 가이드북을 들여다 보는 남자, 기념품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는 여자들. 나는 그들 틈에 끼어 데탐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여행자의 자유를 만끽하며.

가로는 좁고 뒷쪽으로 긴 데탐거리의 건물들.

 

자유를 만끽하던 내 영혼은 금세 멍해졌다. 숙소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알아보고 왔던 가격보다 3,4달러 더 비쌌다. 성수기라서 그런가. 대여섯 군데를 돌아다녔는데도 마음에 드는 방이 없었다.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땀에 절은 티셔츠와 딱 달라 붙은 몸이 기를 쓰고 반대했다. 눈 딱감고 체크 인할 요량으로 처음에 봤던 호텔로 향하는데 길가에서 젊은 남자가 말을 건다. 싼 방이 있단다.

"숙소 찾으세요? 싼 방있어요. 저 따라오세요."
"얼마예요?"
"하룻밤에 8달러요."

싼 방이 있다는 남자를 따라 방을 보러 갔다. '삐끼'를 따라가면 좋을 게 없다지만, 가난한 배낭족은 싼 방만 있다면 지옥에라도 따라갈 수 있었다. 호텔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민박집이었다. 거리 뒷쪽 골목에는 이런 민박집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들어간 집. 웃통을 벗은 할아버지가 웃으며 나를 3층으로 안내했다.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 확인한 하룻밤에 8달러라는 방은 참 심플했다. 날씬한 침대에 귀여운 TV 한 대, 앙증맞은 화장실 겸 샤워실이 그 방 안에 있었다. 흡사 교도소의 독방 같았다.

날씬한 침대, 귀여운 TV, 앙증맞은 화장실

민박집이 몰려있는 골목.

경비가 빠듯하지만 첫날부터 이곳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쏘리'하고 돌아서려는데 할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표정 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계단을 내려가는 내 뒷통수에다가도 뭐라고 궁시렁댔다. 아마 욕이였겠지.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그 집을 나왔다. 삐끼가 아직도 서 있었다. 그에게 안 되겠다고 했더니 방이 더 있다고 나를 잡아끌었다. 무거운 배낭에 짓눌린 나에게는 뿌리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에도 민박집. 가격은 똑같았지만, 운이 좋게도 방금 본 집보다는 나아보였다. 조금 덜 날씬한 침대, 조금 덜 귀여운 TV, 덜 앙증맞은 화장실이 그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아까 할아버지보다 더 착해보였다.


삐끼는 여기가 호치민에서 제일 좋은 집이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난 절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좋은 집을 찾아보자는 욕망은 이미 사라진 상태. 이 배낭을 짊어지고, 땀에 전 몸을 끌고 다시 밖으로 나갈 자신이 없없다. 바로 '그래 어디든 비슷하겠지'라는 마음으로 그 방에 짐을 풀었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간 데탐거리는 훨씬 아름다워보였다. 거리의 활기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숙소를 잡고 샤워를 했을 뿐인데 두려움을 쫓아내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근처 카페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한병 마시면서 거리를 감상했다. 관광객들과 보따리 장수들, 그리고 오토바이로 떠들썩하다.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었다. 참 행복해보였다.

투어를 예약하기 위해 돌아다니는데 오토바이에 걸터 앉은 남자들이 자꾸 'You'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오토바이 택시기사들이었다. 경쟁하듯 내게 말을 거는 남자들에게 웃으며 거절하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미안해서라도 꼭 오토바이에 올라 타줘야 할 것만 같았다. 오토바이 뿐만이 아니었다. 선글라스를 한 판 메고 다니는 남자, DVD를 파는 여자, 색이 고운 스카프를 파는  아주머니, 꽅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 등  무언가 팔려는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데탐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는 아이들.

공원에서 축구를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 베트남에서는 축구 인기가 많다.


한글 팜플렛 덕분에 별 탈없이 투어 예약을 마쳤지만, 근처 벤탄시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탈이 났다. 길을 건너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데탐거리를 벗어나기 위해 횡단보도 위에서 10분 넘게 서 있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라도 그렇지, 너무했다. 회색빛 도로 위 흰색 횡단보도 표시가 라이더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걸까.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는 횡단보도란 말야, 속도 좀 줄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슬그머니 횡단보도 위에 발을 내려 놓아봐도 오토바이는 제 갈 길을 간다. 그리 긴 횡단보도가 아니라 뛰어서 건널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전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오토바이나 차가 조금 뜸해져야지 도로 위로 들어갈텐데 차와 오토바이는 쉬지 않고 횡단보도

위를 지나갔다.

답답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한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아주머니가 횡단보도로 뛰어든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오토바이를 어떻게 피할 셈인가'하고 보고 있으려니 정말 마법같이 오토바이가 그들을 피해서 지나간다. 묘했다. 금방이라도 부딪칠 것만 같았는데 오토바이는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요리조리 피해 갔다. 아주머니와 어린이도 속도를 줄이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천천히 길을 건넜다.

원래 이렇게 건너는 거였나. 마치 각본에 짜여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횡단보도 건너기'였다. 그 뒤 아저씨도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길을 건넜다. 그 다음 아주머니도, 외국인 한 무리도 길을 건넜다. 아하! 용기백배해서 나도 조심스럽게 횡단보도 위에 올라섰다.그런데 그와 동시에 시끄러운 오토바이 경적소리가 귀를 때렸다. 옆을 보니 오토바이 한 대가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호치민 시내의 모습.

그 짧은 순간 몸을 날려 오토바이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란 내 몸은 얼음처럼 굳었다. 누군가 '땡'해줘야 풀릴 것 같은,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얼음 덩어리'였다.

'여행자 보험도 안 들고 왔는데... X됐다'

눈을 질끈 감고 가만히 있는데 다행히 오토바이가 알아서 피해간다. '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또 다시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리며 달려들었다. 다시 한번 'X됐다'라고 생각하는 찰나 이번에도 오토바이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알아서 피해갔다. 그 이후부터는 좀 쉬워졌다. 뛰지말고 오토바이를 보면서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오토바이가 달려들면 멈췄다가 지나가면 다시 움직이는 게 키포인트. 운전자와 보행자가 서로 신경쓰고 배려하면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었다.

이 방법은 횡단보다가 없는 도로 위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고집하지 않고 '쿨'하게 그냥 무단횡단을 했다. 무단횡단을 할 때도 오토바이의 경적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건너면 쉽다. 오토바이만 신경써야 한다는 건 아니다. 오토바이보다 적은 수지만, 물론 큰 버스나 자동차도 주의해야 했다.

만약 한국에서처럼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넌다면. 물론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오지 않는 길이라면 가능하다. 차가 오기 전에 빨리 건너면 된다. 하지만, 베트남 도로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뛰다가는 사고 위험만 높아진다. 걸어서 건너야 오토바이가 사람을 피할 수 있고, 사람도 오토바이를 피할 수 있다.


"한국사람이죠? 한국 정말 좋아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호치민의 벤탄시장의 모습.

몇 차례 '목숨 걸고 횡단보도 건너기' 프로젝트를 성공하고 나서야 벤탄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 큰 시장이었다. 잡화부터 먹거리 시장까지 갖추고 있는 곳이다. 시장 안에는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조그마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미로같은 모습이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을 닮았다. 식료품, 커피 원두, 원단, 수공예품, 귀금속 등 없는 게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미로'를 즐기고 있었다.

손님 대부분이 관광객인 것 같았다. 호객 행위가 있을 법한데 이곳에는 절대 손님을 붙잡거나 부르지 않았다. 내가 물어봐야 비로소 가격을 이야기해줬다. 가족들에게 줄 스카프를 사려고  몇 군데에서 가격을 알아봤다. 그 중 한 군데를 정해 스카프를 골랐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다. '비싸다'며 나가려고 하자 예쁘장한 점원이 나를 붙잡았다. 미소를 지으며 떠듬떠듬 영어로 말한다.

"한국사람이죠? 한국 정말 좋아요."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저도 베트남 좋아해요"
"호호호, 이 스카프 싼 거예요. 예쁘 스카프인데."
"근데 조금 비싸요. 조금만 깎아 주세요."

미남계가 통했을까. 점원이 못 이기는 척하며 계산기에 가격을 다시 쳐줬다. 조금 할인된 가격이었다. 흥정을 열심히 하는 성격이 아니라 그 정도에 만족하고 바로 스카프를 샀다. 점원에게 속아 바가지를 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흥정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또 우리나라를 좋아한다는 베트남사람의 스카프를 샀다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조그만 가게들로 이루어진 벤탄시장 내부 모습.

스카프를 사고 한참을 돌아다니다 벤탄시장 밖으로 나왔다. 제법 어두워졌다. 시장 입구에 관광객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모두들 양손에 물건이 한 가득이다. 행복해보였다. 적어도 스카프 두장이 든 봉지를 달랑거리고 있는 나보다는 말이다. '뭐 좀 더 살까'라는 충동을 꾹꾹 눌러가며 돌아섰다.

다른 쪽으로 걸어가볼까 하다가 오늘은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행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평소 잘 쓰지 않던 속담이 이런 때는 잘 튀어나온다) 베트남 구경도 잘 먹어가면서 해야겠지. 여행 가이드북에서 봐두었던 숙소 근처 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생각보다 체력은 급격하게 저하됐다. 챙겨두었던 초코바를 꺼내 물었다. '이 조그만 놈이 얼마나 나를 지켜줄까? 시간이 별로 없다' 빠른 걸음으로 데탐거리로 향했다. 길도 한번에 건넜다. 불과 1시간 반 전만해도 횡단보도 앞에서 벌벌 떨었는데 역시 배고픔에는 뵈는 게 없다.


 

호치민 시내 한 공원에서 재기차기 비슷한 놀이를 하고 있는 베트남 청년들


 

해가 저물고 날씨가 시원해지면서 거리가 붐비기 시작했다. 가족을 태운 라이더들이 특히 많이 보였다. 걷거나 저녁 먹은 뒤 오토바이에 온 가족을 태우고 드라이브 하는 게 베트남 가족들의 여가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가족들과 바람을 가르는 기분은 어떨까. 생각만해도 시원하다. 베트남에서는 30세가 넘도록 가족을 꾸리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는데 이미 30대에 접어든 나는 불행한 걸까.


배고픔은 외로움을 부른다

어두워진 호치민 데탐거리.

근처 공원에는 산책하는 연인들과 한 곳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참 보기 좋았다. 따가운 햇살 아래 지친 몸과 일상에 찌든 마음을 치유받는 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하다. 이보다 더 소중한 시간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쉬는 시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다.

 

어둠이 깔린 이 순간 베트남 호치민 거리에 서 있는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없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느낌은 오래간만이다. 군대에서는 갈구는 고참이라도 있었는데... 혼자 여행을 결심했을 때부터 각오하던 '외로움'이 벌써 찾아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친 일상을 끝내고 평안 안에 있기를.

다 배고픔 때문이었다. 나약해진 정신상태는 뱃속이 비어서였다. 식당에 도착해 볶음밥과 사이공 맥주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자 '센치'했던 정신 상태는 포만감이 채워줬다. 푸힛,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외로워질 때면 먹어라!' 여행 첫날 터득한 나만의 여행법이다. 모든 여행자들은 명심하시길!

넋을 놓고 있다가 어제 저녁 부랴부랴 짐을 싼 후유증이 몰려왔다. 배도 부르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 무거워진 눈꺼플을 억지로 올리고 식당에서 나와 벤탐거리를 가로질러 나의 민박집을 찾아나섰다.

그런데 그때 지나치게 하얀 러닝티셔츠를 입은 베트남 아저씨가 내 옆에 바짝 달라붙는다. 뭐라고 말을 거는데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웃으면서 손을 내젓는데 더 달라 붙어 악착같이 뭐라고 한다.

"10달러, 10달러 뷰티플 걸! 어디서 왔어? 예쁜 아가씨 10달러에 해줄게."

이제야 알아차렸다. 이 아저씨는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은 것. '고마운' 아저씨다. 10달러로 예쁜 아가씨를 만날 수 있단다. 내가 그렇게 외롭게 보였던 걸까. 다 큰 남자가 혼자 어슬렁거리니 아저씨 눈에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호의는 고맙지만) 단호하게 "노"라고 했다.

"No! No!"
"8달러! 8달러!"

'고마운' 아저씨는 흥정까지 해준다. 8달러면 우리나라 돈으로 1만원정도인데 그걸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얼마까지 다운이 될까. 호기심이 생겼다.(단순한 호기심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투철한 기자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종에 대한 목마름일 수도 있고... '잠입취재, 베트남 밤문화' 뭐, 이런 제목의 르포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지 않나.


 

하지만, 따라가서 꼬치꼬치 따져물으며 기자질 하기는 싫었다. 아니, 솔직히 약간 무서웠다. '고마운' 아저씨가 싼 가격으로 남성들을 유혹해 멸치잡이 어선에 팔아넘길 수도 있지 않나. 아니면, 지하 공장에 가두어 놓고 노예노동을 시킬 수도 있고...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었다. 결국 두려움이 기자정신을 이겼다. 다행이다.

나도 뫼르소처럼 위로받을 수 있을까

한국 맥주보다 순한 사이공 맥주.

겨우 대꾸없이 빠른 걸음으로 아저씨를 떼어냈다. 데탐거리의 밤은 활기가 넘쳤다. 술집에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관광객들은 술잔을 기울였다. 오토바이의 엔진소리와 택시의 경적소리도 잠들 줄 몰랐다. 관광객들은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시끄러운 거리와 나는 왠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 저 세계에서 떨어져 나왔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차라리 조용한 숙소가 나았다. 선풍기를 켜고 침대에 누워 비행기에서 읽었던 <이방인>을 꺼냈다. 이미 세번 정도 읽었던 소설이지만, 혼자 하는 여행과 컨셉이 맞을 것 같아 들고 왔다. 생각대로 내 심정과 맞는 문장이 많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더 '센치'해지고 외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힘든 일상의 반복, 그리고 마리와 해수욕의 달콤함. 뫼르소는 그렇게 위로받았다. 나는 나를 태웠던 촛불과 내가 경멸했던 우리사회의 부조리에서 떠나 베트남으로 날아왔다. 나도 뫼르소처럼 위로받을 수 있을까. 침묵의 시간, 낡은 선풍기만 요란스럽게 날갯질을 하고 있었다.

 

 

 

 

 

 

호치민의 아침은 상쾌했다. 아니, 새벽이라고 해야 되나. 6시가 채 되기도 전부터 오토바이의 굉음이 들려왔다. 베트남 사람들은 보통 5시 정도부터 활동한다고 하더니 과연 그랬다. 귀마개를 준비하는 게 좋다던 가이드북의 조언은 100% 신뢰할만 했다. 귀마개가 없다면 그냥 잠에서 깨 일어나면 된다.

어쨌든 날이 밝았다. 상쾌했다. 한 낮의 한증막과 비교하면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일을 보는지도 모른다. 아직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은 데탐거리의 아침은 투어 버스들이 점령했다. 메콩강 투어나 구찌터널 투어를 이용하려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버스는 이른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버스가 우리나라에서 건너왔다. '현대'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버스에는 건설사나 백화점 이름까지 박힌 것도 많다. 한류는 드라마나 노래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버스나 자동차, 건설기계에 이르기까지 한류는 흘렀왔다. 백화점 버스에 오르면 베트남이 아니라 동네 백화점에 쇼핑가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했다.

바게트 샌드위치와 아이스 밀크 커피

작은 상점에서 많이 파는 바게트와 음료, 식품. 바게트에 자신이 원하는 고기와 샐러드를 넣을 수 있다.


 

여러 교통수단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호치민 시내에서 떨어진 곳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투어 버스가 편하다. 에어컨이 나오는 버스가 알아서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 또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있다. 

내가 오늘 택한 투어는 구찌터널 투어였다. 아침 8시 15분에 떠나 오후 1시 30분에 다시 돌아오는 일정. 버스에 오르기 전 아침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근처 빵 가게로 갔다. 긴 바게트에 고기와 샐러드를 넣어 주는 샌드위치를 판다. 큰 빵이 일만동. 50센트가 조금 넘는 가격이다. 달달한 아이스 밀크 커피를 주문해 길 건너 공원 벤치에 앉아 먹었다.

바게크 샌드위치와 아이스 밀크 커피.

생각보다 맛이 좋다. 껍질이 딱딱한 바게트를 입에 무는 게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일단 입을 벌려 한 입 베어 물면 신선한 샐러드와 부드러운 고기가 씹인다. 거기에 시원한 밀크 커피까지 마시니 맛이 그만이다.

베트남하면 쌀국수가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바게트나 스테이크도 잘 먹는다.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의 음식 문화가 남아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농민들에게 노예 노동을 시키고 베트남의 자원을 강탈했던 프랑스. 그들의 문화가 21세기에도 남아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하긴 우리나라는 더하지 않나. 일제의 문화는 커녕 그들 아래에서 부역했던 사람들도 처리하지 못한 나라다. 오히려 목숨걸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고통받았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이런 이념을 떠나, 경제 상황을 떠나, 외세에 당당하게 맞서 자유를 쟁취한 베트남은 나에게는 부러운 나라다.

오픈 투어 버스로 호치민-달랏-냐쨩-호이안-후에까지

여행사 앞 오픈 투어 버스.

호치민의 아침도 서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출근 준비로 바쁜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한산했던 도로 위에도 오토바이가 줄지어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는 탐스러운 구름이 기분좋게 떠 있었다. 구름도 아직 시원한 아침 공기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어제 오늘 감상한 베트남의 구름은 예뻤다. 밋밋한 구름은 하나도 없었다. 뭉게뭉게, 탑스럽게, 저마다의 모양을 가진 구름. 화려했다. 40여 년전 총알이 빗발치던 베트남 전쟁터의 구름도 예뻤을 거다. 프랑스의 식민지배 시절에도. 단지 사람들이 잔인했을 뿐 자연은 그대로였을 게다.

바게트 빵을 깨끗이 먹어 치운 뒤 여행사 앞으로 갔다. 아직 내가 탈 버스는 오지 않았다. 메콩 델타를 향하는 버스가 먼저였다. 짬을 이용해 내일 달랏행 오픈 투어 버스를 예약했다. 이 

오픈 투어 버스는 말 그대로 열려 있는 버스다. 내리고 싶은 도시를 정하고 티켓값을 내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버스티켓을 내준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만, 출발날짜는 미정이다. 버스 타기 전날에만 여행사에 들려 예약하면 된다. 이 오픈 투어 버스를 타고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갈 수 있다. 값이 저렴해 배낭 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한다.

나는 호치민-달랏-냐쨩-호이안-후에까지 가는 티켓을 끊었다. 티켓값은 42만동, 24달러 정도 되는 금액이니 저렴한 편이다. 후에에서 하노이까지는 비행기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오픈 투어 버스로는 1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단 1시간 만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 빠듯한 일정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싶어 한국에서 비행기표를 미리 예약했다.

물론 정해진 루트보다 자유롭게 현지 교통을 이용하면서 여행하는 게 더 좋다. 베트남의 진짜 삶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도보여행가 김남희 선배나 바람의 딸 한비야 선생님처럼 베트남 구석 구석을 걸어서 돌아보고 싶었다.

박지성의 팬, 조벤을 만나다

이른 아침 공원에서 체조를 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슬프게도 직장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법. 15일이라는 시간을 얻은 것만해도 감지덕지였다. 최대한 알차게 압축적으로 여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롯 6개 도시만 돌아볼 수 있었지만, 다양한 베트남의 문화 겉핥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는 오픈 투어 버스로 짧은 기간 동안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베트남을 남북으로 종단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달랏행 예약을 마치고 나와보니 구찌 터널을 향하는 버스가 관광객을 태우고 있었다. 서양인, 아시아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내 옆자리에는 아시아 청년이 앉았다. 혹시 한국 사람인가 했는데 영어를 하는 거 보니 한국사람은 아니었다. 대화를 해보니 싱가포르에서 온 22살의 청년 조벤. 18살에 군대를 다녀와 8월에 경제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된다고 했다. 싱가폴에도 의무병 제도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거리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는 사람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끼리는 원래 잘 통하는 걸까. 그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구찌 터널까지 가는 버스여행이 지루한 줄 모르고 지나갔다. 알고 보니 그는 열렬한 축구팬. 조벤은 '한국이 내년 남아프리카 월드컵에 한국이 나간다는 뉴스를 봤다'며 부러워했다. 싱가포르가 축구를 더 잘 했으면 좋겠단다.

조벤은 자신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자주 본다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 선수를 아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당연히 알고 대단히 인기가 많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박지성 선수와 나의 성이 같다'고 했더니 조벤은 무척 신기해 했다. 뜻밖의 '뜨거운' 반응에 차마 한국에는 '박'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수백만명이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축구 이야기, 군대 이야기, 경제 이야기 그리고 남북 문제까지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 영어가 딸려서 몇 번이고 다시 말해달라고 했던 적도 있고, 어떻게 영어로 표현해야 할 지 몰라 침묵을 지킨 때도 있었지만, 대화는 비교적 잘 통했다. 아마 둘 다 '예비역'이라서 그랬을 거다.

"평화적으로 해결해야지. 통일도 해야하고"


 

구찌 터널에서 조벤과 함께 찍은 사진.


 

하지만 북한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좀 답답했다. 조벤에게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영어로 자세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아, 이 저질 영어는 언제쯤 업그레이드 될까. 먼저 조벤이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을 알고 있다며 나를 걱정해주었다.

"북한에 핵미사일이 있어서 한국 사람들 정말 무섭겠어요. 정말 그거 쏘면 어떡해요? 괜찮아요?"
"뭐, 무섭기는 하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핵은 협상용인 거 같아. 그래서 사실 한국 사람들은 북한 핵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지금도 잘 살고 있잖아."


 

"그래요? 전쟁까지 했던 나라에서 그것도 바로 붙어 있는 나라에서 위협하는데 무섭지 않다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북한이 밉고 무섭죠?"
"다른 나라지만 우리는 같은 민족, 사람들이잖아. 정권을 미워해도 사람들은 미워하지 않아. 내 생각에는 핵에 맞서는 제재나 위협보다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게 더 필요한 거 같아."
"알겠어요. 그런데 오바마가 대통령이 됐으니까 부시 대통령 때보다는 북한 문제가 더 잘 되겠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지. 통일도 해야하고."

어느새 창 밖 풍경은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무들 뒤로 푸른 논과 밭이 보였지만,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중간 중간 따가워 보이는 햇살 아래 물소처럼 보이는 가축들이 진흙 웅덩이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개인 수영장이 따로 없다.

'10분 있으면 도착하니까 내릴 준비하세요' 베트남 가이드가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그 말에 승객들은 활기를 되찾았다. 사람들은 기지개를 켜고 선크림을 바르며 하차 준비를 했다. 이제 '영웅들이 용감하게 싸웠다'(가이드의 말을 빌리자면)는 구찌 터널을 돌아볼 시간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땀을 흘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은 서늘했다.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귀신이 나를 홀리기라도 했나'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발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크게 해봤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단념하고 몇 걸음 앞서가던 조벤을 따라 잡아 함께 걸었다. 조벤은 벌써부터 덥다고 야단이다. 아이고, 새파란 20대 청년이 30대 어르신 앞에서 주름잡는다.

겉보기에 구찌터널 부근은 특별할 게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길고 얇은 나무와 그 사이의 오솔길,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관광객들. 동남 아시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구찌터널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평화'라는 단어 대신 죽음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불과 40여 년전만해도 구찌터널은 피비린내나는 죽음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가슴이 서늘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베트남 전쟁 당시 남북 베트남의통일을 강령으로 삼은 베트콩('베트남공산주의자'라는 뜻)들과 이 지역 주민들은 지하 3층 규모의 지하 터널을 근거지로 삼아 호치민 주변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베트콩들은 호치민과 가깝고 은신하기가 쉽다는 이유로 1940년대 프랑스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비밀통로를 더욱 더 확장해 나갔다.

터널 입구로 들어가는 남자
위장된 나무판을 들어
구멍을 덮으면 감쪽같다.


미군은 베트콩을 쫓아 구찌터널에까지 이르렀지만, 지하로 숨는 베트콩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뭇잎으로 위장된 입구를 찾는 것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입구를 찾았다 해도 덩치 좋은 미군이 폭 50cm 높이 70cm의 터널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도 문제였다. 정확한 지도 없이 250km에 이르는 터널 안을 수색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은 미군에게 골칫거리였다. 특히 호치민과 가까운 구찌 지역 베트콩들은 터널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미군을 더 미치게했다. 구찌터널 내부 공격을 포기한 미군은 터널 외부 공격에 치중했다. 터널을 붕괴시키기 위해 이 지역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고, 울창한 숲을 없애기 위해 고엽제까지 살포한 것이다. 그러나 나무를 고사시키는 위해 무차별적으로 뿌려진 고엽제는 사람까지 말려 죽였다.

250km에 이르는 구찌터널은 자연이 내려준 요새

터널의 공기구멍에 대해 설명하는 가이드.
'도어트랩'의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구찌터널 관광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는 것부터 시작됐다. 구찌영웅(가이드는 이렇게 불렀다) 들의 이야기였다. 우리나라의 허름한 예비군 훈련장을 닮은 건물에서 본 비디오에는 '구찌영웅'의 활약상이 담겨 있었다. '대한 뉘우스'를 연상시키는 흑백 화면은 '구찌영웅'들이 미군 탱크를 어떻게 파괴하고, 미국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보여주었다.


비디오 속 여성의 설명이 잘 안들려 귀를 쫑긋세우고 있는데 조벤이 지루하다며 하품을 한다. 고개를 끄덕여주고 TV를 바라봤다. 영웅들은 조벤의 하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군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비디오 테이프가 다 돌아가자 가이드 아저씨가 지시봉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가이드 아저씨는 키가 작고 풍체가 좋은 아저씨였는데 버스에서 30분 만에 베트남의 근대사를 유창한 영어로 요약해주었다. 그는 '호 아저씨' 호치민의 활동부터 베트남 남북 통일까지 꾀고 있었다.

생각만해도 아찔한 함정을 설명하는 가이드.

아저씨는 버스 밖에서 보니 더 통통해 보였다. 그는 구찌터널 주변 지도와 터널 단면의 모형을 가리키며 열변을 토했다. 구찌 지역은 터널을 파내기에 좋은 자연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흙을 파내면 그 부분이 공기 중 수증기와 결합해 마치 시멘트를 발라놓은 것처럼 단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지 흙을 파내 터널을 만들었을 뿐인데도 웬만한 폭견은 견딜 수 있었다. 과연 자연이 내려준 요새라고 할 만하다.

호미 등의 간단한 도구로 파낸 구찌터널의 지하 1층은 생활공간, 지하 2층은 대피 공간, 지하 3층은 피난 터널이었단다. 지하 3층 터널은 근처 강으로 연결되어 있어 미군의 공격을 피하기 좋았다. 사실 총 길이가 250km에 이르는 구찌 터널은 단순한 터널이 아니라 지하도시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큰 회의실을 비롯해 먹고 잘 수 있는 공간, 화장실, 병원, 무기공장 등 각종 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하 도시에서 긴 전쟁 기간 동안 생활했다니. 경이로웠다. 어떻게 이런 터널을 만들고, 또 어떻게 이런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었을까.

나무판을 밟으면 쇠막대기 위로 떨어지게 된다.

터널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관광객들.


구찌터널 안은 진퇴양난


이제 직접 터널을 구경할 차례. 건물 밖으로 나와 길을 따라 걷다가 나무 판자를 들고 상반신만 내놓고 있는 남성과 마주쳤다. 터널 입구였다. 가이드 아저씨는 터널 입구가 좁기 때문에 미군이 들어오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때 나무 판자를 들고 있던 남성이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입구를 판자로 막았다. 감쪽같았다. 어디가 입구요, 어디가 숲길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관광객들은 신기하다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직접 들어가 보는 '안 뚱뚱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셉보고 사진 찍어준다고 들어가보라고 했더니 너무 좁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베트콩이 터널 주변에 만들었던 여러 가지 함정과 무기도 보여줬다. 땅을 파내 쇠창을 심고 밟으면 뒤집히는 나무판자를 그 위에 놓아 숲을 수색하던 미군들이 빠지게 만든 함정, 문을 열면 상반신에 밖히게 되는 철퇴 등 베트콩은 직접 고안한 장치를 터널 주변에 숨겨두었다. 얼마나 많은 미군이 입구 대신 함정을 만났을까. 끔찍했다.

미군의 불발탄을 분리해 무기를 만드는 베트콩의 모습.

베트콩들은 이곳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당시 베트콩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네킹을 지나 무기를 만들던 곳과 부엌, 병원 등도 돌아봤다. 아무리 봐도 널찍한 방을 호미 같은 도구로 만들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직접 들어가본 터널 안에서는 '신기하다'나 '놀랍다'라는 느낌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살아서 나가야겠다'는 본능만 살아 있었다.

우리 일행 중 희망하는 사람들만 줄을 서서 한 사람씩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가 좁아서 앉아서 걸어 들어가야했다. 가이드 아저씨가 웃으면서 관광객들을 위해 더 넓게 리모델링했다고 우리들을 안심시켰지만, 아직도 너무 좁았다.

들어가자 마자 숨쉬기가 힘들었다. 산소통을 하나씩 메고 들어왔어야 했다. 답답해도 일어날 수가 없고 일어날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뒤에 사람이 계속 들어오니 앞으로 가기는 가야했다. 죽기 살기로 앞으로 기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안을 어떻게해서든 빨리 빠져나가고 싶어도 허리가 꺽인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놀이공원에 있던 귀신의 집을 기어서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귀신이 내 몸을 잡아채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허리를 굽히고 걸어야 했다.
터널 안은 어둡고 답답했다.


간신히 출구로 빠져나왔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손과 등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었다. 단지 몇 분 동안 터널 안에 있었던 것 뿐인데 하루 내내 고생한 것 같았다. 허리를 펴고 서서 공기를 맘껏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나보다 덩치가 더 큰 외국인들은 더 괴로워했다. 바닥에 앉아 연신 물을 들이켜는 여성도 있었다. 젊은 조벤도 터널 밖으로 나와서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너무 좁아서 괴로웠다고 했더니 자기도 힘들었다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몇 일 동안 이렇게 다니면 적응이 되려나. 심한 폐쇄 공포증이 있는 분들은 터널 체험은 안 하는 게 좋겠다.

이 터널 안에서 의식주와 교육 등 모든 것을 해결한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우리들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가이드 아저씨가 '우리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죽기 아니면 터널 안에서 살기다.

"미군을 무찌른 영웅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

사격장과 기념품 가게를 들린 뒤 출구로 향했다. 군데군데 폭격을 맞은 자리가 있었다. 큰 웅덩이 같았다. 구찌 터널과 베트콩을 겨냥한 포탄은 얼마나 많이 떨어졌을까. 얼마나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이 포탄에 목숨을 잃었을까.

구찌 터널에 와보니 베트남 전쟁이라는 단어가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베트콩의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미군과 한국군의 시각이 아닌 전쟁 당사자들의 시각으로 전쟁을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독립을 위해, 통일을 위해 외세에 저항하는 그들의 열정과 용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린시절 나에게 베트콩은 한 놈이라도 더 때려잡아야 하는 빨갱이나 적이었는데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베트콩은 항상 나쁜 놈이었다. 얄밉게 밀림 속에 숨어 우리 편을 죽이는 악의 무리가 베트콩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이곳에서 베트콩은 '전쟁영웅'이었다. 영웅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 외세에서 벗어나 민족민주연합을 수립하고 싶어했던, 민중이 잘 사는 나라를 원했던 이들의 의지를 미군의 포탄과 고엽제도 꺾지 못했다. 미군에 참담한 패배를 안겨준 베트남 전쟁은 절박한 심정에서 차이가 난 게 아닐까.

버스에 올라 탄 관광객들을 한 번 둘러본 가이드 아저씨는 웃음을 지으며"구찌 터널 관광이 재미있었냐"고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았다"고 대꾸하자 그는 "저런 곳에서 살면서도 미군을 무찌른 영웅들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구찌터널에서 호치민 시내로 돌아오는 길. 푸른빛이었던 차창 밖 풍경이 다시 회색빛으로 바뀔 때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조용히 있던 조벤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보니 한국하고 베트남하고 비슷하네요. 남북이 전쟁했던 거요."
"응, 비슷한 면이 있지. 그런데 우리는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잠깐 멈춘 거야."
"정말요? 다시 전쟁이 날 지 모르겠네요. 핵무기에다가...한국이 그렇게 위험한 곳인지 몰랐어요."
"하하, 그러니까 전쟁이 안 나게 잘 해야지."


 

놀라는 조벤에게 걱정말라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한반도가 위험한 곳이라는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핵무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이유일 뿐이다. 한 꺼풀만 벗겨내 보면 물리적인 걸림돌보다 더 위험한 장애물이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우리와 다른 모습, 다른 체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그들을 향해 '틀렸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우리가 선이다, 우리와 다르면 악이다' '우리가 그들을 단죄하고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로 남북 문제를 풀려는 사람들. 아직도 이 사람들이 큰소리 치는 우리 사회 때문에 한반도는 위험하다.

"북한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문제야."

구찌터널에서 돌아오는 길. 창 너머 구름이 탐스럽다.

그새 흥미를 잃었는지 조벤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그래"라고 말한 뒤 다시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나는 하릴없이 그의 귀에서 새어나오는 전자음을 들으며 창 너머 풍경을 바라봤다. 어느새 오토바이떼가 지배하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니, 달리고 있는 건 오토바이였고, 우리 버스는 달리는 오토바이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위험한 건 우리 버스네'라고 입속말을 했다.

오후 1시가 넘어서 아침에 출발했던 여행사 앞에 다다랐다. 조벤에게 덕분에 즐거웠다고 인사하고 한국에 오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겠다고 약속했다. 싱글벙글거리던 조벤도 싱가포르에 오면 연락하란다. 그는 오후에 호치민 시내투어를 해야 하는 나를 남겨두고 자신의 일행을 만나러 떠났다.

여행의 참맛은 '맛집 찾아다니기'라고 하던데

쌀국수와 맥주 한 잔.

근처 카페에서 쌀국수와 맥주 한 잔을 시켜 점심으로 먹었다. 쌀국수가 2만동, 맥주가 1만2천동이다. 어젯밤에는 북적이던 카페에 점심 손님은 나 혼자였다. 밤늦게까지 신나는 음악과 술 취한 손님에게 시달렸을 카페는 따가운 오후 햇살 아래 축 늘어져 시장한 손님을 맞았다. 김 빠진 카페에서 먹는 점심 맛이 좋을 리 없다. 국수는 3분의 1정도 남기고 시원한 맥주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 안에 넣었다. 여행의 참맛은 '맛집 찾아다니기'라고 하던데... '미맹'의 사촌쯤인 나에게는 썩 당기지 않으니 어쩌랴. 나에게 맞는 적당한 음식으로 '허기 채우기'로 연명하는 수밖에.

시내투어 버스는 구찌터널 갈 때 탔던 것보다 작았다. 학창시절 학원다닐 때 타던 25인승 버스, 메이커도 현대였다. 학원에서 '열공'하던 나로 돌아가 호치민 관광에 나섰다. 가이드 아저씨는 구찌터널의 통통한 아저씨보다 날씬하고 젊었다. 하지만 영어 발음이 '신토불이'였다. 마치 베트남말을 하듯 영어가 춤을 추었다. 노트에다가 적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에구구, 눈치코치가 필요한 시간이다. 고맙게도 눈치코치는 아저씨가 우리가 돌아볼 곳과 그 곳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와 동행한 관광객들은 대부분 동양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저씨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알아듣는 척 하는건가. 나도 관광객들의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중간 중간 "이야" "오" "아" 같은 추임새와 가이드와 '눈맞추기'를 곁들였다. 정말 '굿리스너'(혹은 '새드리스너'ㅜㅜ)다.

"심호흡하고 들어가세요"

전쟁 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무기. 대부분 미군에서 쓰던 것들이다.

맨 처음 버스가 맘춘 곳은 전쟁박물관 앞.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여기 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가이드는 약속 시간을 정해주고 그때까지 마음껏 둘러보고 오란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들어가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이곳은 원래 미군 정보부 건물이었다고 한다. 깔끔한 야외에는 비행기, 탱크, 기관총, 대포 같은 무기가 자리잡고 있었고, 심심해보이는 사각형 건물 안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원래 박물관 이름이 '중국과 베트남전 범죄 박물관'이었다는 가이드 북의 설명처럼 전쟁 범죄에 대한 생생한 사진과 기록을 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다. 내 평생 이렇게 숙연한 박물관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다. 마치 독서실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군의 잔학행위를 보여주는 사진이 주를 이루고 있다.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을 남자는 피를 흘리며 쓰려져 있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을 일가족은 시체더미 아래에서 눈 감고 있었다. 탱크 뒤에 거꾸로 묶여 끌려가는 포로들, 구덩이에 겹겹이 쌓여있는 시체들. 네이팜탄에 의해 타 죽은 아기, 고엽제 후유증으로 일그러진 어린이,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간 군인들, 마을에서 떼죽음 당한 민간인들. 난도질당한 사람들...

전시실 모퉁이에서 눈을 마주친 한 서양여자가 "끔찍하다"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조용히 "정말 그래"라고 대꾸했다.

미군의 잔학행위를 고발하는 사진들

쌓여있는 시체들과 포로를 잡은 미군.

가이드가 심호흡을 하고 들어가라는 이유가 있었다. 사진은 박물관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참혹했다. '모든 인류 죄악의 총합은 전쟁이다'라는 말처럼 베트남 전쟁에서도 인간성은 상실되었다.

누구의 잘못일까.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 흥분한 군인들? 베트콩을 도운 주민들? 공산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아니면 인간의 증오심? 나는 알 수 없었다.

흑백 사진 속 미군과 베트남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내가 보고 있는 사진이 모두 영화의 한 장면이기를, 모두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를.'

포로를 차 뒤에 묶어 끌고 가는 미군과 베트남 남자의 조각난 몸을 들고 있는 미군.


거의 모든 사진이 미군의 잔학행위를 고발하고 있었다. 베트남이 작정하고 미국을 조롱하고 있는 건가. '미군의 만행 고발관'이라고 박물관 이름을 바꾸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운 박물관'이라고 볼멘소리를 할 만하지만, 누구 입장에서 보든 전쟁이 몹쓸 짓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든 상대방의 생명을 끊어놓아야 하는 것이니까.

무릎 꿇고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진자하게 사진을 보고 있는 관광객들.

모두 진지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주머니,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는 여인, 전쟁 사진을 다시 자신의 카메라로 찍는 청년. 사람들은 불과 몇 십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을 눈으로 확인하며 전시실을 돌았다. 이곳은 숨 죽일 수밖에 없는 곳, 큰 소리는 낼내야 낼 수 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숨 죽이고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진정으로 인간의 잔혹함과 전쟁의 비참함 앞에서 무릎 꿇고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도저히 눈을 들어 전시물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희생자들의 단말마적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그렇게 야외 전시장까지 내려왔다.

전시실을 벗어났는데도 희생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가 본 건 흑백 사진인데 눈 앞에 펼쳐지는 건 생생한 컬러가 입혀져 있다. 짙은 초록빛 위에 검붉은 피다. 이 적나라한 사진들을 어떻게 찍었을까. 대부분 자료 사진은 기자들이 전쟁터를 누비며 촬영한 것이다. 당연히 전쟁 중 희생된 종군기자들이 적지 않았다. 사진 설명에 '그의 마지막 사진이다'라는 문장을 여러 개 봤다.

내가 종군기자였다면 어땠을까. 과연 그들과 같았을까. 잘 모르겠다. 섣불리 대답할 자신이 없다. 목숨 걸고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고스란히 알린 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참담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돌아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비행기와 탱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US ARMY' 마크가 선명한 살인기계들과 함께 사진 찍는 모습이 어찌나 슬퍼보이던지. 학생들은 밝은 표정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독립 운동가는 어느 나라에서든 핍박받는가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도입된 길요틴.
독방에 갇혀 있는 정치범 모형.


야외 전시장 한 켠에 높은 담장이 서 있었다. 베트남 남쪽에 있는 뿔로 콘도르 섬의 '타이거 케이지'라는 감옥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프랑스에 대항한 베트남 정치범들이 갇혀 고문 받았던 곳이다. 프랑스에서 독립 후 남북을 갈라진 후에는 프랑스 대신 남베트남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 군인들을 그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단두대, 길요틴이 한 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독방에는 발이 철봉에 묶인 인형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독립 운동가는 어느 나라에서든 핍박받는가보다. 독방에 갇힌 인형은 베트남 사람이면서도 우리나라 사람으로도 보였고, 인도 사람, 남아프리카 사람으로도 생각되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권을 밟아 뭉개는 권력의 횡포는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최첨단시대라는 21세기에도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게 서글펐다.

버스로 돌아가면서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박물관 건물 벽에 붙어 있는 박물관의 상징, 흰 비둘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비둘기를 바라보며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지금 지구촌 어디선가 울리는 포성이 당장 멈추기를 빌었다.

"미국이 왜 베트남까지 와서 저랬는지 몰라요"


 

'타이거 케이지'에서 바라본 전쟁 박물관.


이미 미니 버스에는 출발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맨 앞자리의 관광객과 가이드를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이야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대충 들어보니 화제는 전쟁 박물관.

 

"정말 충격적받았어요.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죽였어요? 원래 미국을 안 좋아했지만, 이번 것은 정말 충격적이네요."
"네, 다들 놀라세요. 전쟁이란 게 뭔지 보여주는 거죠."
"미국이 왜 베트남까지 와서 저랬는지 몰라요."
"정치적인 이유죠. 결국엔 우리가 이겼잖아요."

 

그 남자 동양인은 정말 열이 받은 거 같았다. 반미주의자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아까 본 전쟁 사진만으로도 미국을 싫어할 이유는 충분하니까. 내가 한국에서 온 건 알까. 미국에 이어 많은 수의 전투병을 파병한 나라, 그 핏값으로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에서 날아온 관광객이라는 것을. 관광객의 입에서 'Korea'란 말이 나오지나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미국 다음으로 군인을 많이 보낸 한국도 안 좋아해요'라고 말하면 어쩌나. '한국군이 만행을 저지른 사진도 봤다'도 말하면 어쩌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도 모르게 다리를 앞의 의자 아래로 넣고 앉은 키를 낮추었다. 어디론가 그의 시선이 머물 수 없는 곳에 숨고 싶었다.

금성홍기가 나부끼는 대통령궁

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쓰였던 통일궁의 전경.

관광객과 가이드의 대화가 끊기자 버스 안은 금새 조용해졌다. 얼마 달리지 않아 푸른 잔디밭과 가로로 긴 네모 반듯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잔디밭이 마치 서울광장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건물 위에는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금성홍기의 빨강은 혁명의 피와 조국의 정신을 상징하고 황색별 5개의 모서리는 노동자·농민·지식인·청년·군인의 단결을 나타낸다고 한다. 전형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깃발이다.

이곳은 남베트남의 대통령궁. 지금은 통일궁으로 불린다. 1975년 4월 30일 아침에 호치민(당시 사이공)에 처음 도착한 북베트남 탱크가 밀고 들어간 곳이라고 한다. 북베트남에게는 승리를, 남베트남에게는 패배를 확인시켜준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대통령궁이다. 당시의 혼돈은 온데 간데 없고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물을 뿜어대는 분수가 밝은 햇살 아래 제 빛을 뽑내고 있었다. 단지 오른편에 대통령궁으로 돌진했던 탱크가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대통령궁의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몇 걸음 앞서가든 일행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통령궁 자리에는 원래 19세기 프랑스 식민 시절 총독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이 프랑스를 쫓아내고 이 건물을 관저로 사용했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으로 돌아온 프랑스가 다시 이 건물을 썼다. 1954년 프랑스가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라진 다음부터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으로 남게 되었다.

대통령궁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잔디밭. 아무도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가이드는 6개 층으로 이루어진 대통령 궁의 일부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각종 회의가 1층 회의실에서 열린단다. 큰 회의실을 돌아보는데 정말 앞에 행사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남베트남이 패망을 당하던 그 건물에서 회의를 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북베트남 사람이라면 기쁨을, 남베트남 사람이라면 슬픔을 느낄까. 관광객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건물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출입이 금지된 방에는 한 눈에 봐도 비싸보이는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패션잡지 화보에 '호치민 통일궁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라는 제목으로 실릴 만했다. 대통령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사치품이었을 게다. 일행은 품격있는 가구와 잘 정리된 방을 지나면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괜히 그들에게 뒤처지는 것 같아 나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회의실에서도 한 장, 복도에서도 한 장. 하지만, 도대체 흥이 나지 않아 곧 그만 두었다. 대통령궁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이  '디카질'의 열정을 싹 거두어 간 것 같았다. 대통령궁의 분위기는 세월의 무게가 쌓인 건물에서 으레 느껴지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우스개로 한마디 해보자면, 건물 어딘가에 나라 망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는 귀신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통령궁은 모두 6개 층. 접견실, 회의실, 침실 등이 있는데 모두 고풍스럽다.

으스스한 느낌을 떨쳐내려고 양 팔을 돌려보고 기침을 해봤다. 기침소리가 컸는지 한 동양인이 뒤를 홱 돌아봤다. 기다란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머리를 앞으로 돌려 가이드를 따라갔다. 순간, 참을 수 없는 무안함의 무거움을 느꼈다. 진지한 관람 분위기를 깨버린 '역적'이 됐으니.

엘리베이터는 작동되지 않았다. 남베트남의 패망에 가슴이 아팠던 엘리베이터. 그는 그 이후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기로 했나보다. 엘리베이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햇빛이 들지 않아 무척 창백해 보이는 계단으로 이동했다.

3층은 대통령 가족들의 공간이다. 고풍스럽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람들이 방에서 나와 '어서 오세요'라고 맞아 줄 것만 같았다. 정말로 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식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을 가난했는데 대통령은 부자였군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죠."

호치민시 대통령궁 식사 테이블. 금방이라도 따뜻한 음식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음씨 좋은(베에 인격도 있는) 서양남자와 가이드가 방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렸다. 속으로 '당연하지!'를 외쳤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왕과 귀족들은 민중의 삶이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된다'는 기가 찬 이야기를 하는 왕비도 있었지 않나.

사실 대통령궁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건 실없는 짓인지도 몰랐다. 유럽의 화려한 왕궁과 중국의 커다란 궁 앞에서 감탄하는 것도 마뜩잖다. 숨겨진 이면은 감탄보다 통탄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화려할수록, 커다랄수록 민중들은 가난해졌고, 또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쓰러졌다. 그들의 피땀이 서려 있는 건축물을 단순히 관광용으로 대하는 건 미안한 일이다.

대통령궁에는 휴게실도 있다. 영화 감상실과, 정원, 술을 마실 수 있는 바, 카지노, 댄스홀 등이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불과 35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공간이다. 이 공간을 즐겼던 권력자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꼭 맞다.

대통령궁 테라스. 폭탄이 떨어진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테라스로 나가면 대통령궁에 떨어졌던 폭탄의 자리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두 개나 떨어졌었단다. 언제 폭탄이 떨어질까 조마조마 했겠다. 그래서일까. 대통령궁 지하에 전쟁 상황실이 있었다. 뱅글뱅글 일렬로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보니 침침한 형광등 아래 모든 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 마치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벽에는 베트남 지도가 걸려 있었고 각종 전쟁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작전판 오른편에 한국군의 병력 상황도 나와 있다. 가이드의 눈을 피해 '지우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옆 방으로 옮겨갔다.

덩치 큰 통신기계가 있는 통신실을 지나 간소한 대통령 침실을 구경했다. 대통령은 지하 침실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을까. 정말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다. 대통령을 위한 산해진미가 탄생했을, 지금은 버려진 큰 주방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대통령궁 지하 전쟁 상황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3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미로 탐험이었다. 눈부신 태양 아래에서도 칙칙해 보이는 통일궁을 뒤로 한채 버스를 향해 걸었다. 시원한 통일궁에서 나와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금세 땀방울이 이마에 맺힌다. "아직도 덥다"고 투덜거리는 관광객들과 함께 얼른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동코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 앞에 우리를 내려줬다. 성당은 아름다웠다. 호치민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했다. 성당 앞에 서니 이곳이 아시아라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 지어진 이 성당은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란다. '로마네스크'가 로마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뜻이니 이 성당은 유럽의 성당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다름 없었다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2개의 종루의 높이가 57m. 고층 빌딩이 들어서기 전에는 시내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햐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 상은 평화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베트남을 침략한 프랑스가 원하던 '식민지 평화'는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으니, 신도 식민지 정책에는 반대했다고 봐야겠다.

동양 여자 세 명(그 중 한 명은 대퉁령궁에서 나를 쳐다보던 여자였다)이 나에게 카메라를 건냈다.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치즈"라고 외치니 뭐가 재미있는지 깔깔대며 웃는다. 발음이 안 좋았나. 'Ch'발음에 힘을 주고 장모음 'EE'발음을 길게 해서 다시 한번 "치즈"라고 외쳤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여자 셋의 사진을 찍어주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봤다. 생각보다 넓었다. 아치 모양인 천장은 높았고 길이도 깊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10여 명의 신자들이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할 사람은 기도하고 관광할 사람은 관광을 했다. 나를 포함한 철부지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고 여기 저기 돌아봤다. 스테인글라스와 성모 마리아 조각상 그리고 밝게 빛나고 있는 촛불을 충분히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중앙 우체국을 보고 다시 데탐 거리로 돌아가야했다. 동코이 거리에서 좀 더 있다가 가고 싶어서 가이드에게 따로 가겠다고 했더니 그러란다. 악수하면서 고맙다고 했더니 "굿 럭"이라고 하면서 남은 여행 잘 하라는 덕담을 해줬다. 영어 발음이 내 귀에 안 맞아서 그렇지 마음은 따뜻한 가이드였다. 다른 관광객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어디로 흩어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성당을 등지고 걸었다.

성당 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

우체국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먼저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앞으로 10m 정도 걸었을까. 반가운 간판을 발견했다. 일병 '콩다방'이라고 불리는 '커피빈' 커피숍이 호치민에 있을 줄이야. 신기했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 커피숍 으로 향했다. 커피숍은 은행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예상대로 에어컨이 빵빵하게 잘 나왔다. 마치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를 만난 순례자처럼 기뻐했다.

등에 딱 달라붙은 티셔츠를 손으로 떼어내며 주문대 앞으로 가서 가격표를 바라봤다. 이럴 수가. 커피 가격은 비쌌다. 아이스 커피류가 5만5천동 정도. 뭐, 사실 한국에서 마시는 커피 가격과 비슷하니 대범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침에 마신 1만동짜리 아이스 밀크 커피와 비교하면 많이 비쌌다. 간사한 사람의 마음. 기쁜 마음이 급격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스테인 글라스와 촛불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여인.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점원에게 굳은 얼굴로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보니 이 커피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럭셔리해 보였다. 내 앞 예쁜 원피스를 입은 여자 세 명이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내 뒷편에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녀가, 옆에는 옷차림이 범상치 않은 여자 두 명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가격도 그렇고 인테리어도 그렇고 한국과 다를 게 없었다. 당연했다. 거대한 커피 체인이 지역마다 생김새가 다르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니까.

성당 맞은편 은행 건물 1층에 커피빈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눈길이 갔던 게 있었다. 바로 커피 포장. 한 여자 손님이 마시다가 남은 커피 두 잔을 카운터로 가져가니까 점원이 커피를 밀봉해 비닐봉지에 넣어줬다. 또 다른 손님도 그렇게 남은 커피를 봉지에 넣어 들고 나갔다.

그냥 들고 나가면 될 텐데 왜 굳이 봉지에 넣어갈까. 또 왜 봉지에 넣어줄까. 아마 오토바이 때문인 것 같았다. 운전하느라 손으로 커피를 들 수 없으니 오토바이에 걸기 위해 커피를 봉지에 넣어 가는 게 아닐까.

오아시스는 잠시 머무는 곳일 뿐, 이제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이었다. 컵에서 조용히 녹고 있던 얼음까지 입에 다 털어 넣고 밖으로 나왔다.

남은 커피를 비닐봉지에 넣어 포장해주는 커피빈 점원.

6월의 늦은 오후, 호치민은 여전히 뜨거웠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원한 오아시스를 떠나 다시 사막으로 걸어가는 사람들도 이런 심정일까. 하긴 그 사람들은 낙타를 탄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낙타 등에 오르는 것이리라. '다시 오아시스 안으로 들어가자'는 인간적인 속삭임을 겨우 무시하고 거리로 나왔다.

길을 건너려는데 저쪽에 베트남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살펴보니, 목욕탕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여인들이 시원한 쥬스부터 쌀국수까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가 거리에서 '김떡순'을 즐기듯이. 글로벌 체인 커피숍 '커피빈' 바로 건너편에 '거리 가게'라. 새삼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여인들 틈에 끼어앉아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용기도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동코이 거리를 둘러봐야 했기 때문이다.

'커피숍 대신 여기서 쉴걸' 하는 후회를 하며 중앙 우체국 쪽으로 몸을 돌렸다. 중앙 우체국도 성모 마리아 성당과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 프랑스 식민지 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1891년 완공된 중앙 우체국은 살구색 벽에 흰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옆으로 길게 누운 건물 모양과 가운데 걸려 있는 시계를 보면 우체국보다는 기차역이 더 어울려 보였다.

호치민의 초상화만 '여기는 베트남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간식을 즐기고 있는 베트남 여인들.

건물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단체 관광객들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와우!' 라는 감탄사가 입 속에서 새어 나왔다. 성모 마리아 성당처럼 예뻤다. 높은 천장은 바둑판 모양이었고 벽면에서는 고전미를 느낄 수 있었다. 천장과 바닥은 역시 아치로 이어졌다.

이 건물이 우체국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마치 유럽의 한 박물관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편지를 부치러 온 사람들보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눈 앞에 보이는 호치민의 대형 초상화만이 '여기는 베트남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이 유명한 관광코스가 된 현실을 호치민이 살아 돌아와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체국에 걸려 있는 그림 속 호치민, 호 아저씨는 온화해보였다.

기차역처럼 보이는 호치민 중앙 우체국.

우체국에서는 엽서를 사고 편지를 부치는 것 이외에 전화카드도 구입하고 국제전화도 걸 수 있었다. 여자친구와 집에 안부전화를 못했던 터라 우체국 직원에게 전화카드를 사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전화를 거는 지 몰라서 전화부스와 가까운 곳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봤다. 두꺼운 안경을 낀 아주머니라서 말이 안 통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주머니는 얼굴빛 하나 안 변한 채 눌러야 하는 번호를 친절하게 영어로 설명해줬다. 아주머니는 영어를 잘 못할 거라는 편견은 버리자. 큰 소리로 "땡큐"를 외치고 부스 안으로 들어와 수화기를 들었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여자친구가 "여보세요"하니까 뭐라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오빠야"라고 해놓고 멋대가리 없는 말만 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단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15일이라는 긴 휴가를 말없이 보내준 고마운 여자친구다. 타지에서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주변머리 없이 "잘 지내, 보고싶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또 전화할게"하고 끊었다. 에구구, 끊고 나서야 사랑스러운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중앙 우체국 실내 모습.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간사하다. 집 떠난지 겨우 이틀째인데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나 집에 가고 싶었다.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내 체형에 맞게 길들여진 침대에 눕고 싶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고, 'sweet home'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이상하다. 벌써 9년이 흘렀건만, '고생 많지? 밥 잘 먹고 다니냐'는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는 서러웠던 군대 이등병 시절 듣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별로 덥지도 않고, 밥도 잘 먹고 있다'는 말로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서른 살 넘게 나이를 먹었어도 어머니 앞에서는 아직어린 애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우체국 밖으로 나오니 해가 많이 기울어졌다. 바람도 약간씩 불었다. 동코이 거리를 따라 내려가는데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깔끔한 기념품 가게와 화려한 레스토랑 그리고 해외명품숍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세계적인 호텔도 동코이 거리에 몰려 있었다. 배낭족이 모이는 데탐 거리와는 '격'이 달랐다.

고개를 돌려가며 호치민의 화려한 거리를 구경하다가 인민 위원회 청사와 마주쳤다. 이 건물도 유럽풍이다. 19세기 후반 당시 사이공에 머물렀던 프랑스 사람들을 위한 공회당이었단다. 성모 마리아 성당과 중앙 우체국보다 화려했다. 흰 대리석 장식과 수많은 아치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매일 밤 파티를 열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호치민에 '동양의 파리'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역시 청사 앞쪽에 자리잡은 호치민 동상이 이곳이 베트남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지만.

샌들을 닦으라는 아저씨

화려한 인민 위원회 청사와 호치민의 동상.

인민 위원회 청사를 등지고 왼쪽으로 걸어내려가니 시민 극장이 나왔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오페라 하우스로 쓰였다는 아시민 극장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더티 슈. 클린 슈~"
"노, 노, 아임 오케이"

 

구두를 닦아주는 아저씨였는데 내 샌들을 보고 더럽다며 닦으라고 했다. 구두도 아닌 샌들을 왜 닦으라고 할까. 너무 억지다. 괜찮다고 돌아서는데 막무가내다. 아예 내 팔을 붙잡고 안 놓아준다. 갑자기 기분이 상해서 '노'라고 성질을 부리니까 아저씨는 그제서야 내 팔을 놔준다. 그러더니 내가 못 알아듣는 말로 뭐라고 한마디 하고 저쪽으로 가버린다. 참 거절하기 힘들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시민극장.

기운이 빠져서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현대식 고층 건물을 몇 개나 지났을까. 눈 앞에 잔잔한 강이 보였다. 사이공강이다. 강에 못 미쳐서 메린 광장과 사이공 강을 향을 바라보고 있는 쩐흥다오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쩐흥다오 장군은 13세기 후반 소수의 병력으로 몽골대군의 칩임을 막아낸 영웅이라고 한다. 사후에 신격화됐다고 하더니 멀리서 쉽게 볼 수 있게 동상은 높은 곳에 놓여 있었다.

사이공 강 앞에 가보니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커플이 벤치에 다정스럽게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데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 외로운 관광객의 속을 뒤집어 놓는 장면은 피해야 했다. 강을 건너온 배에서 오토바이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카메라에 몇 장 담고 나서 바로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똥배짱으로 베트남어를 한 마디도 알아오지 않았을까

현대적인 호치민 동코이 거리.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동코이 거리의 상점들이 불빛을 하나 둘씩 켤 때쯤 내 배에서는 'EMPTY'라는 경고등이 켜졌다. 아까 여인들이 많았던 곳까지 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나의 경고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쓰러지기 전에 식당을 찾아야했다. '오늘 저녁은 거리에서 먹어야지'라는 작정을 하고 주위를 살피는데 다행히 건너편 거리에서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가 빈 자리에 앉았는데 메뉴판을 주지 않는다. 어색하게 혼자 앉아 있다가 어색하게 '익스큐즈 미'라고 손을 들었다. 한 청년이가 와서 내 앞에 섰는데 이 청년도 참 어색해보였다. 어색한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으니... 난 무슨 똥배짱으로 베트남어를 한 마디도 알아오지 않았을까.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이 볶음밥을 먹고 있었다. 손으로 볶음밥을 가리키며 밥을 떠서 입에 넣는 바디랭기지를 보여주고 나서야 청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면서 '치킨'이라고 했더니 청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볶음밥 설명하기 참 힘들다.

베트남 커플들의 데이트 장소 사이공강 벤치.

왼쪽 테이블에는 유니폼을 입은 여자 둘이 스테이크 같은 것을 먹고 있었다. 호치민은 프랑스의 영향으로 스테이크를 잘 먹는다고 하던데... 직접 보니 맛있어 보였다. '저걸 가리키면서 주문할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낮에 찍은 사진을 한 장씩 확인하고 있는데 기다리던 저녁식사가 나왔다.

계란 볶음밥에 닭다리 하나가 통째로

내 생각과 달랐던 치킨볶음밥.

이런... 순간 당황했다. 내가 생각했던 그 밥이 아니었다. 치킨이 나오기는 나왔는데 닭고기가 밥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았다. '따로 치킨볶음밥'이라고나 할까. 계란 볶음밥에 닭다리 하나가 통째로 담겨져 있었다. 치킨이라는 말을 알아듣기에 당연히 닭고기를 잘게 썰어 밥과 함께 볶은, 그동안 줄곧 잘 먹어왔던 볶음밥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닭고기는 같이 나온 배추와 토마토 조각처럼 반찬 개념이었다.

뭐라고 물어볼 수도, 따질 수도 없는 상황.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맛있게 먹는 것 뿐이었다. 밥을 한 숟가락 먹고 젓가락으로 닭다리살을 뜯어서 입에 넣고, 또 한 숟가락 먹고 닭다리살을 뜯고. 조금씩 조금씩 내 입 속에서 나만의 치킨볶음밥을 만들었다.

여성들이 먹고 있던 스테이크가 더 맛있게 보였다.

'따로 치킨볶음밥'을 깨끗이 먹고 밥값 2만 5천동을 냈다. 바가지일 것 같아서 어깨를 으쓱하며 비싸다는 시늉을 해보였지만, 점원은 아무 반응이 없다. 역시 무플이 제일 무섭듯이 무반응, 무표정이 최고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였지만, 내공이 대단하다. 뭐, 그냥 달라는대로 주는 수밖에.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넣고 식당 앞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누가 나를 툭툭 친다. '아까 구두닦기 아저씨 아냐? 여기까지 따라왔나?'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지못해 뒤를 돌아보는데 아까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가 뭐라고 하면서 카메라를 내민다. 앗, 내 카메라! 아까 닭다리가 통째로 나온 볶음밥 사진을 찍고 식탁 위에 두고 나왔나보다.

얼마나 닭다리에 놀랐으면 카메라까지 잊었을까. 그 카메라를 밥 먹다 말고 갖다준 아저씨가 너무 고마웠다. 고개를 숙이면서 '땡큐'라고 했더니 아저씨는 수줍게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베트남의 인심은 착했다. 카메라를 도둑맞는 여행자들도 많다던데 놓고 간 카메라를 갖다준다.  카메라를 잊어 버렸으면 그동안의 사진도 날리고 앞으로 사진 찍을 일도 막막했을 텐데. 정말 운이 좋았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가방 안에 넣었다.

호치민의 밤거리를 누비는 택시.

날이 저물자 동코이 거리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오토바이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로 위를 달렸다. 택시는 사람들을 태우고, 토해냈다. 화려한 불빛이 뜨거운 햇빛을 대신했다. 시원해진 거리는 활기를 띄었지만, 정작 나는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다. 아침 일찍부터 더운 날씨에 돌아다녔던 터라 피곤하기도 했다. 아직 13일이나 남은 여행이다. 피로는 여행의 적. 숙소로 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기분이 상했나?

베트남 전쟁 사진.

'택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도요타 마크가 찍힌 흰색 택시를 얼른 잡아탔다. '데탐거리 플리즈'라고 한 마디 하고 머리를 의자에 기대로 앉았다. 택시기사가 나를 힐끔 보더니 '코리아?'라고 묻는다. '예스'라고 대답하고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저씨는 말이 없다.

더 이상의 영어를 알지 못하나? 아니면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기분이 상했나? 침묵을 지키는 아저씨의 뒷통수가 싸늘하게 보였다. 아버지, 아니 형제나 친척이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의 총탄에 쓰러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들에게 용맹한 한국군은 잔인한 한국군이리라.

우리는 베트남에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 군인들은 미군의 용병으로 팔려와 베트콩들에게 총질을 했고, 아무 죄 없는 마을 사람들도 죽였다. 그래, 베트콩들을 죽이는 영화 속 국군 아저씨들에게 환호했던 나도 동범이었다. 멍청이, 바보였다. 빨갱이, 베트콩은 모두 씨를 말려버려야 하는 줄 알았으니까. 낮에 본 전쟁 박물관의 사진이 떠올랐다. 고문, 학살, 화상 입은 아기, 고엽제 후유증으로 허리가 휘어버린 여성들... 우리는 베트남에게 빚을 지고 있다.

기본요금 1만 9천동이 찍혀있던 미터기가 3만동을 넘어설 때쯤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요금을 건네며 '땡큐'라고 해봤지만, 여전히 말이 없다. 저 쪽으로 사라지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숙소로 향했다. 동코이거리보다 데탐거리가 더 시끄러운 것 같았다. 어제보다 바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더 컸다. 거리에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오늘도 데탐거리는 흥겨웠다.

총질 대신 돈질을 하며 '싸고,  좋아'를 외쳐댄다.

호치민 데탐거리의 모습.

'밤문화'를 체험하고 오라는 친구들의 당부가 있기는 했다. 한 친구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자세한 경로까지 이야기해줬다. '싸고, 좋아'라며 씨익 웃던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오늘밤도 호치민의 어딘가에서 한국 남성들이 '싸고, 좋아'라고 외치고 있겠지. 총을 들고 베트남 땅을 밟았던 한국 남성들은 총대신 돈을 들고 베트남에 놀러온다. 그리고 총질 대신 돈질을 하며 '싸고,  좋아'를 외쳐댄다.

난 '싸고, 좋아'를 외치기 싫었다. 그렇다고 혼자 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홀짝 홀짝 거리기는 것도 별로였다. '소심한' A형보다 더 소심한 AB형이라서 그렇다. 마트에 들려 타이거 맥주 한 캔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 아주머니가 웃으며 맞아준다. '굿 나잇', 눈인사를 하고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외로운 밤이다. 낮에 만난 조셉하고 만나자는 약속이라도 할 걸 그랬다. 내일이면 싱가포르로 다시 돌아간다던데 석별의 정이나 나눌 걸. 폭탄주라도 한 잔 만들어줄 걸... TV를 켜고 한참 동안 이리 저리 채널을 바꾸어봐도 허전함은 그대로였다. TV를 끄고 맥주를 마시면서 일기를 적고 여자친구에게 줄 엽서를 썼다. 제길, 더 그립다. 모든 게 그리웠다. 특히 사람이. 어젯밤과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혼자 여행을 몇 달, 몇 년씩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버틸까'라고.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내일 호치민을 떠난다. 호치민에서의 이틀.  짧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호치민을 본 것 같아 찜찜했다. 아직 볼 게 더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이틀동안 호치민의 음식을 먹고 거리를 걷고 건물을 보고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옛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의 상처까지 봤다. 그리고 혼자하는 여행의 참을 수 없는 외로움도. 호치민을 위하여, 혼자 하는 여행을 위하여 건배!

 

 

오늘도 시끄러운 오토바이 엔진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30분은 더 잘 수 있었는데...' 억울했다. 밖으로 뛰쳐나가 오토바이들에게 '내 꿈나라를 돌려달라!'는 시위라도 하고 싶었다. 오토바이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내 숙소 앞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호치민에서 몇 달만 지내면 동화 속의 이야기로만 느껴졌던 '새나라의 어린이'가 진짜로 될 수 있겠다. 누구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를 저절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달콤한 꿈나라는 사라지겠지.

배낭을 탈탈 털어 다시 짐을 쌌다. 겨우 스카프 몇 장 샀을 뿐인데 그사이 배낭은 더 뚱뚱해졌다. 나 몰래 맛있는 거라도 먹었나. 앗, 어제 샤워하면서 빨았던 양말과 속옷이 거의 안 말랐다. 축축한 채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군대에서 전역한 이후 거의 처음으로 한 빨래였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볕이 좋은 낮에 빨래를 널어뒀어야 했는데 방심했다. 선풍기 앞에 걸어두면 웬만큼 마를 줄 알았는데 마르키는 커녕 선풍기 바람을 못 이기고 사방으로 날아가버렸다. 연약한 빨래같으니라고! 묵직한 빨래를 비닐봉지 안에 모아 배낭 옆구리에 쑤셔넣었다. 덕분에 배낭은 더 후덕해졌다.    

아래로 내려가 숙박비를 계산하고 여권을 돌려 받았다. 인상 좋은 주인 아주머니에게 '그동안 잘 쉬었다 간다'고 이야기 하니 아주머니는 가만히 미소를 짓는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데 문 앞까지 나와 배웅해준다. 몇 번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정이 많은 아주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음, 자식이 항상 건강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달랏행 오픈투어 버스

한 여행사의 오픈투어 버스 티켓.

호치민의 아침이 좋다. 시원한 느낌이 드는 서늘함과 잠에서 막 깨어나 활기차게 움직이는 거리.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은 기분 좋은 파란색. 오늘은 어제보다 더 상쾌했다. 아, 가기 싫다. 막상 떠날 때가 되니까 떠나기 싫어진다. 한증막 같은 호치민의 열기마저도 다시 느끼고 싶어진다. 미련이 남는다. 내 앞에 무한한 가능성과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익숙해진 자리에 그냥 머물고 싶은 것처럼. 그동안 인생길 위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고 몇 번이나 주저앉았던가.

아침식사로 어제처럼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들고 오픈투어 버스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건너온 이 버스는 달랏으로 간다. 7시간 30분이 걸린단다. 오전 7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니까 3시나 되어야 버스에서 내릴 수 있는 거다. 길다. 버스여행이 길기는 하지만, 아까 충분히 구경하지 못한 꿈나라를 실컷 볼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승객이 반도 안 찬 버스는 몸이 가벼운지 기세 좋게 도로 위를 달렸다. 용감하게 오토바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다. 거리 위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을 집에서 먹지 않는다고 한다.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한 쌀국수, 스테이크, 바게트를 사먹는단다. 그리고 차나 커피를 마시며 친구나 동료들과 담소한다. 참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저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왜 우리에게는 저런 여유가 없을까.

일가족이 오토바이 한 대로 드라이브

한국에서 건너온 중고 건설기계와 차량.


3, 40분쯤 달렸을까. 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의 키가 작아지더니 이제 띄엄 띄엄 보인다. 황량한 풍경 사이로 우리나라 기업 이름이 붙어 있는 건설기계가 자주 보였다. 우리나라의 땅을 파던 기계들이 이제 베트남의 땅을 파고 있다.


 

외곽으로 나와 고속도로로 올라온 것 같았는데도 버스는 그다지 속도를 내지 않았다. 놀랍게도 오토바이도 계속 도로 위에 있었다. 오토바이는 시내용인 줄 알았는데 시외까지 타고 다니나보다. 도로 표지판에는 차로마다 통행할 수 있는 차량 종류가 표시되어 있다. 오토바이도 한 차선을 배정받은 거 보니 불법은 아니었다.

네 가족이 한 오토바이에 타고 있다.

말 그대로 베트남의 패밀리 오토바이!

꿈나라로 가지 못하고 무료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잘못봤나. 졸린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봤다. 와우, 정확히 봤다. 크지 않은 오토바이에 네명이나 탄 것을. 맨 앞에는 아이가, 운전석에는 아버지, 그리고 그 뒤에 어머니가 어린 아이와 함께 있었다. 일가족이 오토바이 한 대로 드라이브에 나선 것이다. 말 그대로 '패밀리 오토바이'였다. 온 가족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가르는 기분도 신나겠다. 패밀리 오토바이는 한참을 우리 버스 옆에 있다가 오른쪽 도로를 타고 사라졌다.


 

버스 위 지붕에는 오토바이

도로 위에서 멈춘 휴게소. 간식거리를 많이 판다.

휴게소에 내리는 사람들에게 책 등을 파는 아주머니들.

버스는 조금 더 달리다가 한 주유소에 섰다. 그곳은 주유소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간식거리도 파는 곳이었다. 버스가 주유를 할 동안 승객들은 버스에서 먹을 간식을 샀다. 이곳에도 호치민의 데탐거리처럼 책이나 담배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외국인들을 따라다녔다. 기름을 다 넣은 것 같은데 버스는 출발할 생각을 안 했다. 마트에서 물과 과자를 사고 나니까 할 일이 없다.

 

우리 버스 옆에 서 있는 버스는 현지인들만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버스도 한국에서 건너왔다. 거의 대부분의 버스가 '메이드 인 코리아'다. 베트남에 온 첫날은 신기했는데 이제는 그런가보다 한다. 이때 신기한 것 한 가지. 버스 지붕에 오토바이가 누워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도 오토바이를 타기 위한 것이겠지. 정말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는 'must have' 아이템이다.

버스 위에 오토바이가 실려 있다.

버스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드디어 버스가 시동을 걸었다. 배를 채운 버스가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하얀 구름이 파란 하늘을 가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비가 내린다. 베트남은 전형적인 열대기후로써 더운 날씨에 소나기가 자주 내린다고 한다.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비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미운 비겠다. 그래도 절대 굴하지 않는다. 창 밖 오토바이 라이더들은 하나같이 비옷을 걸치고 계속 달리고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주차관리원.
피서를 가는 아이들.


 
 

느끼한 돼지고기 백반.

양념 돼지고기 백반
비가 그칠 때쯤 또 다시 휴게소에 버스가 멈췄다. 이번에는 버스가 아니라 사람의 배를 채울 차례. 1시간 남짓 시간을 주면서 밥을 먹고 오란다. 나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갔다. 다행히 메뉴가 영어로도 표기되어 있는 것은 물론, 음식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양념된 돼지고기가 포함된 밥을 시켰다. 역시 메뉴 그대로 밥에 돼지고기 그리고 샐러드와 국이 나왔다. 먹다보니 고추장과 김치 생각이 간절하다. 입 안이 까칠한 데다가 고기가 느끼해서 결국 조금 남기고 말았다.


 

휴게소 입구 쪽에 갔더니 공짜 커피와 차를 준다. 커피를 받아 들고 근처 테이블에 앉았다. 주위에 할머니부터 아이들까지 놀러가는 베트남 사람들이 많았다. 방학을 맞아서 아이들과 피서를 가나보다. 후텁지근한 남쪽을 떠나 시원한 곳을 찾아 가는 것. 내가 가는 달랏도 베트남 중부의 시원한 고원지대로써 인기 있는 피서지였다.

 

 

 

 

긴소매 옷 위에 비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로비로 내려오니 아까 방을 안내해줬던 여종업원이 카운터에서 눈인사를 한다. 지나치면서 "수고하세요"라고 하니까 알아 들었는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다.

거무스름한 구름이 뿌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도로 위에는 오토바이가 바람을 가르며 어디론가 향해 달렸고, 거리 양쪽에는 세로가 긴 건물들이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인도 중간 중간 자리를 잡은 노점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국수, 쥐포, 커피, 두유 등을 파는 노점에는 우산을 들거나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쉬고 있었다. 쌀쌀한 느낌을 떨쳐내려고 일부러 빨리 걸었더니 금세 달랏시장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왔다. 

비오는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시장 주변은 별로 붐비지 않았다. 시장 특유의 생동감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재래시장보다 조용한 것 같았다. 달랏에도 대형 마트가 들어섰나?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마트를 찾아봤지만 헛수고. '이런 곳에 마트가 있을 리가 없지' 시장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호치민에서 봤던 사람들보다 표정이 밝았다

비오는 평일 오후 달랏시장의 모습.

제일 커다란 왼쪽 건물로 들어가보니 밖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꽤 있다. 바깥은 날씨 때문에 한산했었나보다. 널따란 공간에 가게들이 물건을 쌓아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없는 게 없어 보였다.

시장에는 가족단위 손님들이 많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보는 어머니, 어린 아이를 한 손에 안고 한 손에는 물건을 든 아저씨가 스쳐지나갔다. 모두들 입가에 웃음꽃이 피어 있다. 호치민에서 봤던 사람들보다 확실히 표정이 밝았다. 일상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표정이랄까.

베트남 달랏시장.

나 역시 정신없는 생활에서 벗어나 달랏까지 왔는데... 내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을까. 마음 속으로 '스마일'하면서 양쪽 입꼬리를 쭉 올려봤다. '이제 나도 저들처럼 밝아 보이겠지?'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둘러보는데 웬걸 입가에 경련이 일어난다. 에구구, 얼굴 표정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나보다.

달랏은 딸기와 커피가 유명하다. 달랏에 오면 꼭 딸기잼과 커피를 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런 여행자들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가게에 딸기 제품이 많이 보였다. 촘촘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가게들은 우리나라 버스 정류소 주변에 있는 가게들처럼 규격화돼 있었다. 규격화된 가게 안팎으로 빼곡히 물건들이 들어찼다. 주인들은 가게 안에 앉아서 통로쪽을 내다보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자장면만 안 드셨어도

달랏시장 건물 1층. 잼과 젤리 등이 많이 보였다.

몇 군데 돌아보다가 잼은 떠나기 전에 사기로 하고 간식으로 딸기 젤리 한통을 샀다. 가게 주인과 영어가 잘 안 통해 답답해 하고 있는데 옆집 주인이 내 말을 알아 듣고 계산을 해줬다. '땡큐'라고 했더니 자신은 내가 베트남 사람인 줄 알았단다. 이럴 수가. 며칠 만에 현지인이 되다니.

"생긴 게 베트남 남자 같아요."
"정말요? 처음 듣는데..."
"까만 피부도 그렇고.. 하하하"
"하하하..."

비가 내려서 건물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역시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이었구나.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자장면만 안 드셨어도 '우유빛깔 박정호'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부시맨'으로 불렸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내 피부 색깔이 미치도록 싫었다. 어린 마음에 '왜 나를 이렇게 나았냐'고 어머니에게 짜증도 부리고 나를 놀리는 애들을 못살게 굴기도 했었다.  

하지만 뭐, 나쁠 건 없다. 현지인에게 바가지는 안 씌울 테니까. 내 자신을 '위로'하면서 시장을 둘러보는데 한 여인이 다가와 엽서를 내민다. 석장에 1만동이란다. 어차피 여자친구에게 보낼 엽서가 필요했던 터라 군말 없이 엽서를 샀다. 순순히 엽서를 사는 내 모습에 여인은 놀란 눈치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카메라를 들면서 '사진 한장 찍어도 되냐'고 했더니 베트남 말로 뭐라고 하며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으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내게 엽서를 판 여인.

마음 같아서는 다 사주고 싶었는데

딱 그때까지 좋았다. 엽서를 들고 돌아서는데 주변 반응이 심상치 않다. 갑자기 주위 행상들이 나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선뜻 엽서를 사는 내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게 분명했다. 나를 마음씨 좋은 부잣집 도련님쯤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자두 같은 과일을 든 여인과 담배를 건네는 아주머니, 빵을 사라고 하는 아저씨.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나를 따라 붙었다. 마음씨 좋은 표정으로 'no, no'를 외치다가 결국 제일 가격이 저렴한 3천동짜리 빵을 하나 사고 말았다. 그걸로 잠잠해질 줄 알았느데 물건을 팔지 못한 아주머니들은 더 열이 올랐나보다. 목소리의 톤이 더 높아졌다. 화를 낼 수도 없고, 다 사줄 수도 없어서 그냥 건물 밖으로 뛰쳐 나왔다. 

미안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사주고 싶었는데... 그러고보니 호치민에서 환전했던 베트남 동이 거의 다 떨어졌다. 아낀다고 아꼈는데 오픈 투어 버스를 끊느라 목돈이 나갔다. 굵어진 빗줄기를 맞으며 계단 위쪽에 있는 은행을 찾아 갔다.

100달러를 10만동 18장으로 바꾸어 나오는데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베트남 아저씨가 말은 건다. 영어다. 그것도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유창한 영어.


 

"안녕하세요~ 어디서 왔어요?"
"아, 한국에서 왔어요."
"아, 태권도? 반갑습니다. 혹시 이지 라이더에 대해서 알아요?"


 

이지 라이더를 만나다

좁은 통로 사이에 들어선 가게들.


이지 라이더? 론니플래닛에 나와 있는 그 이지 라이더? 이지 라이더는 한마디로 오토바이 관광을 시켜주는 가이드를 뜻한다. 여행사 버스가 가지 않는 농촌과 산간 지역을 갈 수 있어서 베트남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설명을 본 기억이 있다. 중부 베트남을 오토바이로 돌아보는 코스가 인기라고 한다.


 

"네, 들어봤어요."
"저는 이지 라이더 '한'이라고 합니다. 달랏 구경 어떻게 할 거예요?"
"여행사 투어를 할까 하는데요."
"아, 그건 너무 안 좋아요. 이지 라이더를 이용하면 오토바이를 타고 구석 구석을 다닐 수 있어요. 한나절이면 달랏 주변을 돌아 볼 수 있어요."


 

한이라는 아저씨는 달랏 주변 농장을 돌아보고 하이킹을 하는 게 더 기억에 많이 남을 거라고 나를 꼬셨다. 가격은 20달러. 여행사 투어보다 많이 비쌌다.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비장한 표정으로 노트를 꺼내 펼쳤다.

'강추 노트'에 KO 당하다

달랏시장 위쪽 모습. 더 위로 올라가야 은행이 있다.

음, 노트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의 이지 라이더 후기가 적혀 있었다. 귀가 얇은 나에게 꼭 맞는 미끼를 꺼낸 셈이었다. "정말 환상적인 경험이었어요" "안 하면 후회합니다" "한 아저씨 정말 친절하고 좋아요" 여행자들의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방은 한국에서 온 한 남자가 남긴 한마디.

"이지 라이더 안 탔으면 '베트남 여행했다'고 하지 마세요, 강추입니다."

'강추 노트'에 'KO 당한' 나는 아저씨와 내일 오전 10시 30분에 호텔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어디 가서 '베트남 여행했다'고는 해야 하니까... 

이지 라이더 아저씨는 앞에 세워둔 자신의 오토바이에 오르면서 계단 끝에 싸고 맛있는 식당이 있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보자고 인사했더니 아저씨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한번 들었다 내렸다.

아저씨는 오토바이 시동을 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저만치 내려가버렸다. 꽤 빨랐다. 내일 내가 탈 오토바이가 점으로 보일 때까지 서 있다가 식당을 찾아나섰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가벼운 흥분이 고개를 들었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사실에.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토바이를 한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무서웠다. 바람을 온 몸으로 맞아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자동차와 함께 달려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몇 번 타려고 시도를 해봤는데 잘 안 됐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곧잘 어울리던 동네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목숨을 잃은 뒤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혐오하게 됐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던 것같다. 실없는 농담인 줄 알았던 친구의 부음. 친구를 잃는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때 알았다. 그런데 나는 가슴이 떨려 친구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안 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의리 없는 내 행동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아직도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

먹음직스러운 치킨 쌀국수와 사이공 맥주.

치킨 쌀국수와 사이공 맥주

길가에 있는 식당은 찾기 쉬웠다. 문 앞에 혼자 앉아 뻘쭘하게 있는데 그제서야 이마가 넓은 남자 종업원이 다가와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동작으로 내 앞에 메뉴판을 놓았다. 메뉴판을 펼쳤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혹시 영어 메뉴판이 있냐고 했더니 고개룰 갸우뚱 거리며 가져다 줬다. 또 베트남 사람인 줄 착각해나보다.

치킨 쌀국수에 사이공 맥주를 주문했다. 쌀국수는 면이 호치민 보다 얇았는데 맛은 더 좋았다. 몇 젓가락 먹는 동안 썰렁했던 식당에 손님들이 밀려 들어왔다. 모두 베트남 사람들이다.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걸 정말 맛집이가보다. 아기부터 할머니까지 손님 대부분이 대가족들이었다. 테이블 여기 저기가 떠들썩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신날 수밖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국수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남아 있는 맥주를 입에 다 털어 넣었다.

저녁을 먹고 나와 호수쪽으로 걸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저녁, 길가에 늘어선 호텔과 카페의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은 비 그친 저녁의 상쾌함을 즐기고 있었다. 조금 더 걷다가 한 카페에 들어갔다. 테라스에서 달랏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카페였다.

커피에 설탕을 탄 건지 설탕에다 커피를 탄 건지

불을 밝힌 달랏 시장 근처의 모습.

카페에서도 나를 베트남 남자로 생각했다. 두꺼운 안경을 낀 여종업원이 베트남말로 뭐라고 하면서 자리를 안내했다.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손님들 중에 외국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이 카페도 맛집인가보다. 종업원에게 영어로 메뉴판을 달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어디서 왔냐고 물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반갑단다. 한국을 좋아하냐고 했더니 영화(아마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했다.'아직 한류가 남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진한 커피맛을 느낄 수 있는 블랙 커피를 주문했다.

거리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두명씩 다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삼삼오오, 가족 단위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운동 삼아 산책을 나온 것이겠지. 모두 행복해보였다.

바로 커피를 내려서 마셨다.


사람 구경에 싫증이 날 때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내가 알고 있던 커피가 아니었다. 예사롭지 않았다. 커피잔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위에 은색 양철 컵까지 놓여 있었다.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종업원이 뚜껑을 열고 설명을 해준다.


 

"커피를 양철 컵에 담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 아래 커피잔으로 받는 거예요.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커피죠. 맛있게 드세요."

시키는 대로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다. 코에 닿는 커피향은 너무 강하지 않았지만, 맡기 좋았다. 베트남에서는 커피를 한 번에 내리지 않고 원두를 갈아 때마다 내려 마신다고 하더니 과연 그랬다. 물을 부을 때마다 조금씩 커피가 잔에 차는 방식은 공기를 압축해 불과 몇십 초만에 에스프레소를 뽑아 내는 방식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베트남 커피는 길게 줄을 서서 주문한지 1,2분 만에 받아 드는 '별다방', '콩다방'의 에스프레소 커피보다 더 정겹다. 삶의 여유가 묻어나는 느긋한 베트남과 잘 어울리는 '커피 내리기'다.

잔에 커피가 찼다. 입맛을 다시면서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정말 썼다. '캬~'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진했다. 커피 전문점에서 마시던 아메리카노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한 원액의 맛이었다.


 

인상을 찡그리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지켜보던 여종업원이 피식 웃는다. 그는 설탕을 넣어서 먹으라고 충고했다. '누가 이렇게 쓸 줄 알았나, 진작 말해주지'라는 속말을 하며 설탕을 몇 숟가락 탔는데도 특유의 쓴 맛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집에서 커피믹스 좀 가져올 걸 그랬나보다. 종업원이 다른 손님들을 받는 동안 몰래 설탕 몇 숟가락을 더 탔다. 맛보고 설탕 조금, 또 맛보고 설탕 조금... 이건 완전히 커피에다 설탕을 탄 건지 설탕에다 커피를 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 진해 설탕을 많이 탔다.

"달랏의 날씨가 변덕스러워서요"
끈적해진 커피를 홀짝대고 있는데 종업원이 내 주위를 왔다갔다 한다. 말동무가 필요한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손으로 어깨를 감싸면서 '달랏은 너무 춥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비 때문'이라고 억울해 한다.


 

"비가 내린 후라서 조금 추운 거예요. 날이 맑으면 이 정도는 아닌데..."
"한국은 안 추워요?"
"겨울에는 춥지만 요즘은 더워요. 내일 비 올 것 같아요? 이지 라이더 하기로 했거든요."
"저야 모르죠. 달랏의 날씨가 변덕스러워서요. 이지 라이더? 아, 오토바이 타는 거요? 그거 사람들이 좋아해요."
"제발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손님이 들어와서 종업원이 쪼르륵 손님에게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공기는 점점 차가워져갔다. 춥다. 한증막 같은 호치민에서 땀을 빼던 날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이놈의 추위를. 그러고 보니 거리를 뒤덮은 인파는 점퍼는 기본으로 챙겨 입었고 몇몇 사람들은 그 위에다 목도리를 하고 털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비가 그친 달랏의 모습.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뜨겁던 커피도 온기를 잃은지 오래. 긴소매 옷만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돌아다니려면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더 챙겨 입고 나와야 했다. 너무나 귀찮았지만, '박정호! 외국까지 와서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 감기에 걸릴 수는 없잖아!'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오직 내 눈 앞에서 윙윙거리는 모기 한 마리만이 지금이 여름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호텔 방에서 얇은 윈드 브레이커를 꺼내 입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밤은 깊어 가는데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달랏시장으로 가는 길 양편에 음식 파는 곳도 더 늘었다. 아주머니들이 꼬치를 굽고 있었다. 오징어, 쥐포를 구워주는 가게도 있었다. 노점에는 남녀가 쌍쌍으로 사이공 맥주에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이들도 신났다. 부모님을 따라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뭘 사달라고 인상을 쓰기도 하고, 귀엽게 웃기도 한다. 도톰한 실로 만든 딸기, 꽃 모양의 열쇠고리가 쌓여 있는 좌판 앞에서 한 아이가 야단이다. 아이의 손은 벌써 열쇠고리 앞에 가 았다. 부모가 어떻게 하나 가만히 지켜봤더니 '안 된다'며 아이들의 손을 잡아 끄는 엄마 몰래 아빠가 아이 손에 열쇠고리를 쥐어준다. 아이는 열쇠고리를 들고 펄쩍 펄쩍 뛴다. 자식에게 져주는 부모의 마음은 어디서나 똑같나보다. 참 정겹다.

달랏시장 북쪽 계단 위에는 꽤 큰 야시장이 열렸다. 시장은 윗쪽부터 호숫가 길까지 쭉 이어진 것 같았다. 밤에 더 활기를 띄는 시장의 모습은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과 비슷했다. 상인들은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처럼 바닥에 옷을 쏟아 놓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청바지, 점퍼, 스웨터, 티셔츠 등 여러 가지 옷이 좌판에 깔렸다. 그 아랫쪽에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지갑과 가방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골라 골라'라고 외치는 상인들

시장에는 정말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았다.

시장에는 정말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았다. 좌판에 바짝 붙은 손님들은 경쟁하듯 손으로 옷 무더기를 헤집으며 'A'급 찾기에 나섰다. 먼저 집으면 임자다. 상인들은 손님들의 손놀림을 도와주면서 뭐라고 쉴새 없이 외쳤다. 주문을 외우는 듯한 외침은 '골라 골라'의 베트남 버전 같았다.

길게 늘어선 시장 구경을 하는데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고원지대인 달랏이 시원하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초겨울 수준이다. 아이들의 목도리와 털모자에 비하면 내가 입고 있는 윈드 브레이커는 너무 왜소해 보였다.

밤이 되자 비가 오는 낮동안 한산했던 달랏시장에 활기가 넘쳤다.

조금 더 움직여 보기도 했다. 달랏시장을 지나 호수까지 걸어갔다. 낮에 봤던 조용한 달랏시장은 활기를 더해갔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점에서 흥정하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나도 목도리나 하나 살까 해서 가격을 물어보니 2만5천동이란다. 1달러가 조금 넘는 가격이다. 망설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이나 걸었을까.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웬 일인가 싶어서 쳐다보니 베트남 말로 뭐라고 한다. 길을 물어보는 것 같았는데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영어로 말해달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면서 막 웃는다. 그러더니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윗쪽으로 올라간다. '이제 베트남 사람들이 길까지 물어볼 정도구나, 그만 받아들이자.' 현지 적응력이 너무 뛰어나다고 내 자신을 칭찬해줬다.


 

따끈한 두유. 참 구수했다.

달콤하고 구수한 두유

시장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먹을거리.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 족발이나 국수, 떡볶이를 팔듯이 이곳에서도 먹을거리 장터가 열렸다. 국수, 볶음밥, 빵 등이 주메뉴였다. 음료는 두유가 인기다. 나도 사람들 사이에 앉아 두유를 한잔 마셨다.

주인 아주머니가 따끈따끈한 두유에 흰설탕을 조금 넣어줬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 아주머니가 건넨 컵을 두 손을 잡았다. 아, 따뜻해. 우선 굳은 손을 조금 녹인 다음에 한 모금 마셔보니 생각보다 맛있었다. 달콤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많았다. 앉을 자리가 없어 비닐봉지에 넣어 '테이크 아웃'을 해가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두유집은 인기가 있었다.

호숫가에서도 인파가 몰려 다녔다. 2인용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를 도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환했고, 호수를 바라보고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아이를 무등 태워 뛰어다니는 아빠, 친구들끼리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 노점에서 국수를 먹여주는 연인, 사람 구경 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초상화를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도 눈에 들어왔다. 뒤에서 살짝 보니 솜씨가 꽤 좋다.

옷을 살펴보니 대부분 한국에서 건너온 중고 의류

사람들이 모여 앉아 두유를 마시고 있다.

호숫가 주변에 둘러 앉아 늦은 잔치를 벌이는 가족들도 있었다. 예닐곱 사람이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함께 먹으며 담소했다. 블루워터 레스토랑이라는 그럴듯한 식당이 호숫가 한쪽을 차지했지만, 이렇게 호수 바로 옆에 둘러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더 부러웠다.

내가 졌다. 윈드 브레이커로도 한기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결국 옷을 하나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빠듯한 예산에 '의류 구입'이라는 항목은 없었지만, 긴급 예산을 편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다. 호숫가에서 다시 시장 쪽으로 올라오다가 시장 뒷편 옷을 파는 노점이 몰려 있는 곳을 돌아봤다.

초상화를 그리는 거리의 화가.

이럴 수가! 옷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잘못봤나' 내 눈을 의심했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옷의 대부분이 눈에 익은 상표를 달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던 그 상표. 신기하게도 내가 만지고 있는 옷은 한국에서 건너온 중고 의류였다. 학창시절에 즐겨 잆던 국내 브랜드도 있었고, 우리나라로 수입됐던 해외 유명 브랜드도 보였다. 세탁소 딱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옷도 있었다. 베트남 시장에서 우리나라 옷을 고르고 있다니. 누가 들으면 열렬한 애국자인 줄 알겠다.

 

달랏, 상상도 못했던 옷차림으로 잠자리에 드는 곳

밤이 깊어지자 슬슬 숙소로 돌아가는 사람들.

몇 군데 돌아 다니다가 아무 때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두툼한 회색 후드티를 골랐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살 수 있는 브랜드의 옷이었다. 5천동을 깎아 4만동. 2달러가 조금 넘는 셈이니 싸게 잘 샀다.

가격 대비 대만족. 밤이 더 깊어지자 사람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안고 숙소로 향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보기 좋았다. '골라 골라'를 외치던 상인들도 슬슬 옷을 다시 박스나 큰 가방에 집어넣었다. 입을 굳게 다문 상인들은 '내일은 더 많이 팔았으면 좋겠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 달랏시장에서 산 후드티를 입고 찰칵!

도톰한 후드티와 함께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따뜻했다. 내일은 털모자를 하나 살까, 목도리를 하나 살까. 이러다가 달랏에서 예정에도 없던 월동 준비를 해서 돌아갈 것 같았다.

호텔에서 씻고 침대에 쏙 들어갔다. 역시 침대 안은 포근하지 않았다. 쌀쌀했다. 다시 침대 밖으로 나와 반소매 옷 위에 긴소매 옷, 그리고 아까 산 후드티까지 겹쳐 입고 이불을 덮었다. 훨씬 낫다. 상상도 못했던 옷차림으로 잠자리에 드는 곳. 여기는 바로 '산간 피서지' 달랏이다.

눈부신 아침이었다. 늦잠을 잔 게 미안할 정도였다. 창 밖의 쏟아지는 햇살이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먹구름이 물러간 하늘은 풍덩 빠지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예쁘다.

일찍 일어나서 동네 한바퀴라도 돌려고 했는데 꾸물대다가는 이리 라이더 아저씨와의 약속 시간에도 늦겠다. 세수도 하는둥 마는둥, 옷도 어제 입었던 잠옷과 최대한 비슷하게 입고 밖으로 나갔다.

호텔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과 햇살이 싱그러웠다. 고도가 높은 달랏의 공기는 대도시 호치민의 공기와는 달랐다. 더 상쾌하고 더 신선했다. 달랏에서 두유 장사를 하며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우리날 중고의류를 수입해 '골라 골라'를 외쳐도 재미있겠다.

어깨에 올려 놓은 막대에 동그란 바구니 두개를 양쪽에 단 아주머니들이 호텔 앞을 차례로 지나갔다. 우리나라 아주머니들은 머리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잘 다니는데 베트남에서는 어깨를 쓴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짐을 어깨에 걸고 가는 아주머니.

머리에 짐을 싼 보자니가 바구니를 얹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손으로 잡지도 않고 균형을 잘 잡는 어머니가 참 대단해보였었다. 

약속 시간이 넘었는데 아저씨는 오지 않고

베트남 아주머니들의 바구니 안에는 바나나, 채소 등이 담겨 있었다. 어깨가 아플 텐데 아주머니들의 얼굴 표정은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물건을 팔아달라는 소리도 안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호텔 앞에 서서 두리번거리다보니 벌써 약속 시간이 넘었다. '길이 막히나?' 슬슬 조바심이 났다. 약속을 펑크낼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데... 내가 불쌍해보였는지 저쪽에서 한 아저씨가 다가와 오토바이 타지 않겠냐고 물어본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대꾸해줬다.

오토바이가 몇 대나 지나갔을까. '저건가, 이건가' 오토바이 관찰로 15분을 보냈다. 단념하고 아까 말을 걸었던 아저씨한테라도 가보려고 하던 찰나 내 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끽~ 하며 섰다. 이마에 땀이 맺힌 아저씨는 숨을 돌리면서 내게 '정호'가 맞나고 물어봤다.

"안녕하세요. 정호 맞죠?"
"네, 맞는데요.전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 한이 오늘 아파서 제가 대신 왔어요. 어제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렸대요."
"정말요?"
"늦어서 미안해요. 저도 10분 전에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온 거예요. 제가 대신 관광시켜드릴게요. 괜찮죠?"

머 아저씨 오토바이 뒤에 올라탔다. 바람을 가르는 이 느낌. 아~정말 좋다.

'한' 아저씨가 아플 줄이야. 뒤늦게 내 앞에 나타난 아저씨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 일인데 아저씨는 '쏘리'를 연발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뾰족한 수가 없어서 한 아저씨의 친구의 오토바이를 타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아까 내게 말을 걸었던 아저씨보다 '한' 아저씨가 소개해준 아저씨가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웃음 치는 50대 이지 라이더

아저씨의 이름은 '머'. 나이는 54세. 나이가 꽤 많았지만, 눈웃음 치는 얼굴에는 아직도 장난끼가 남아 있었다. 아저씨가 건네는 헬멧을 머리에 쓰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놀이기구를 타기 전에 느꼈던 긴장과 셀렘과 비슷했다. 아저씨에게 오토바이 타는 게 처음이라고 했더니 "왜 아직 안 탔냐"면서 신기하게 바라본다.

달랏에 있는 대학교를 지나 고고씽!

이제 떠날 시간. 이 순간에도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헬멧은 왜 이렇게 작은 거야' '겉옷을 입고 있어야 하나, 벗어야 하나' '두 손으로 아저씨의 허리를 감싸야 하나?'. 머릿속이 뒤죽박이다.

아저씨의 손목 움직임에 따라 오토바이가 목청을 가다듬는다. 몇 번 소리 치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오토바이가 앞으로 부드럽게 나간다. '와우'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바람과 내가 하나가 된 듯한 이 느낌. 바람이 내 얼굴과 몸을 어루만졌다. 이 기분 때문에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는 걸까. 하늘나라에 있는 내 친구도 그래서 오토바이와 한 몸이 됐을까. 시속 40km 정도로 달렸는데도 체감 속도는 100km를 넘었다.

불교 사원 '천년의 행복'으로

조금 '야한' 동상.

주위의 모든 게 다 아름다워 보였다. 상점들과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다. 안타깝게도 옥의 티도 있었다. 바로 나이가 들수록 겁이 많아지는 남자, 박정호. 사람들이 두 손으로 아저씨의 어깨를 감싼 내 모습을 봤으면 우리가 연인 사이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첫경험 치고는 잘 견뎌내고 있다고 자부했다. 조금 더 가다가 아저씨 어깨에서 손을 빼내 사진까지 찍었으니.

우리는 시내를 끼고 산 위로 올라갔다. 커브길을 돌아 '천년의 행복'이라는 뜻을 지닌 불교 사원에 섰다. 이미 수많은 관광객들이 사원을 점령하고 있었다. 머 아저씨는 나를 사원 앞에 내려주고 베트남의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사원 앞에 용도 있다.

"베트남 사람들 중 70%가 불교를 믿습니다. 신자들은 한 달에 두 번 사원을 찾아 기도를 하고 복을 빕니다. 베트남에는 카톨릭, 개신교, 이슬람교가 있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불교를 믿죠."

기도하는 사람들.

사원에는 부처님상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행적을 보여 주는 동상과 용 모형 등이 잘 정돈된 정원에 자리잡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전에 올라 절을 하며 복을 빌었다. 나도 눈을 감고 가족들과 친구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다.

버스 매연에 정신을 잃을 뻔하다

사원 입구 근처에서 달랏시내가 내려다보였다. 특색 있는 건물이 볼만 했다. 머 아저씨에게 사진 한 장 찍어 달라고 했더니 자기는 나이가 많아서 잘 못 찍는다고 고개를 흔든다. 아쉬운 표정으로 '알겠다'고 돌아서는데 웃으며 카메라를 달란다. 머 아저씨에게 장난끼가 남아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 아저씨도 찍어주겠다고 했더니 싫다며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공터를 가득 메운 버스 사이로 내려 가는데 왜 베트남 라이더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좁은 비포장 도로를 다 차지한 버스 뒤를 따라 가려니 시커먼 매연이 눈을 가리고 코를 막았다. 이러다가는 호흡곤란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30대 한국 남성이 버스 매연에 의한 호흡곤란으로 쓰러졌습니다' 깜짝뉴스에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머 아저씨는 의리 없게 혼자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하고 있었다. '너무해!'라며 배신감을 곱씹고 있는데 다행히 사원에 있는 부처님이 도왔는지 우리는 버스를 따라가지 않고 오른쪽 길로 내려갔다. 

사원 앞에서 내려다본 그림 같은 달랏의 모습.

내리막길을 신나게 달리다 보니 푸른 밭이 나타났다. 농부들이 머리에 모자를 쓰고 배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잠시 세우고 머 아저씨가 베트남의 농부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저도 농부사를 짓던 때가 있었어요. 정말 고되게 일을 하는데도 계속 가난했어요. 정부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아서 농부들이 알아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야 하죠. 베트남 사람들 중 약 80%가 농사를 짓고 있는데도 대접을 제대로 못 받아요."

달랏이 기후가 선선하고 비도 많이 내리지 않아 채소를 키우기 좋단다. 고랭지 농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수확물의 상태가 좋으면 외국에 수출하고 별로 좋지 않은 것은 국내에 유통시키다고 한다.

뙤약볕 아래서 땀을 흘리고 있는 농부들의 얼굴에서 미소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무표정이다. 배추를 따는 손길과 배추를 들고 옮기는 발길이 참 힘이 없어 보였다.

"농부는 흥이 나지 않아요"

배추를 수확하고 있는 농부들.

"농사 지어봤자 돈 버는 사람은 '비즈니스맨' 뿐이기 때문이 흥이 나지 않아요.

제가 농부였던 적이 있어서 농부들의 고통을 잘 압니다."

농업은 중요하고 농부들은 고마운 사람들이지만, 어디서나 홀대 받고, 어찌된 일인지 자연을 파괴하는 건설업이나 토목업이 더 대접 받는다. 자연이 아파하든 말든 어떻게든 성장률을 올리려는 권력자의 탐욕과 무지함. 또 그들의 논리에 세뇌를 당하는 국민들.

"농부는 흥이 나자 읺아요"

그만 두자. 이제는 성장보다 나눔이, 개발보다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다. 경제 성장이 안 되면 큰 일이 날 것처럼 소란을 떠는 정부는 더불어 살아가는 지속 가능한 삶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교외 쪽으로 달렸다. 아, 시원하다. 상쾌하다. 차나 오토바이가 뜸해 매연도 없다 아까부터 '왜 그동안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머 아저씨의 어깨와 허리를 잡았던 두 손을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냥 카메라만 갖다 댔을 뿐인데 찍힌 사진이 다 예뻤다. 누구나 사진작가가 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한국어를 못하는지 메아리가 없다

어느새 꼬불꼬불 산길로 접어 들었다. 커브길을 따라 왼쪽, 오른쪽으로 다이내믹하게 올라갔다. 중간쯤 올라갔을까.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웠다. 여기서 내려서 산으로 올라가서 전망을 보고 내려오란다. 자기는 저쪽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바람을 맞으며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어제 비가 내렸던 터라 스니커즈가 조금씩 미끄러진다. 낑낑대며 10분 쯤 걸었더니 구름과 꽤 가까워졌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우와~'라는 감탄사가 어색하지 않은 경치다. 구름과 산, 그리고 마을이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 좋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느꼈다. '야호'라고 소리도 쳤다. 아쉽게도 한국어를 못하는지 메아리가 없다.

산에서 내려다본 경치.

달랏 교외 풍경. 푸른 밭과 하얀 구름.

 

잠시 가만히 앉아 경치 구경을 하다가 다시 내려왔다. 머 아저씨가 반갑게 반겨준다. '구경 잘 했냐'고 물어봐서 '정말 아름다웠다'고 했더니 활짝 웃는다.

"베트남은 아름다운 곳이예요."

젊었을 때 폭주족이셨나

스피드를 즐기는 머 아저씨.


오토바이는 부르릉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제법 햇살이 따갑다. 잠시 오토바이를 세워 겉옷을 벗었다.'어제는 추웠는데 오늘은 덥다'고 했더니 아저씨가 '비가 안 오면 춥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어제 카페 종업원이 했던 말과 똑같다.

 

티셔츠 하나만 입고 오토바이를 탔더니 바람의 감촉이 더 잘 느껴졌다. 꼭 내 몸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속도를 더 내는지 더 많은 바람이 내 몸을 감쌌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두 손으로 다시 머 아저씨의 어깨를 잡았다. '화장실이 급하신가' '젊었을 때 폭주족이셨나'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머 아저씨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내 손을 모른체 하는 것 같았다. 속도 줄일 생각을 안 한다.

그렇게 20분 정도 달렸을까. 달랏 교외에 살고 있는 농부들의 일상을 계속 돌아봤다. 꽃을 키우는 비닐 하우스에 멈춰서 꽃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꽃을 따놓으면 유통업자들이 트럭에 실어 간다고 했다. 이 사람들의 생활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비닐하우스 같은 시설물에 돈이 많이 들어가고, 사람 손도 많이 가는데 돈벌이는 신통치 않단다. 꽃값이 비싸도 농부가 버는 돈은 별로 없다고 했다.

아름다운 꽃이 내 눈에는 슬퍼 보였다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농부들.

"베트남에서 꽃이 비싼 편인데요. 농부들이 받는 돈은 형편 없어요. 돈은 다 '비즈니스맨'이 벌어요."
"그럼 농부들이 직접 꽃을 팔면 되잖아요."
"그게 베트남에서는 불가능해요. 이 사람들은 생산만 하는 거죠."

트럭을 기다리는 꽃.

"한국에서는 농부들이 직접 농작물을 팔기도 하는데... 여기는 참 불공평하네요." "네, 살기 힘들어요."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돈을 버는 사람은 돈을 가진 자들이고, 농부들의 삶은 고되다. 우리가 떠받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소농들은 배제됐으니까. 규모가 크고 자본력이 있는 기업들만 배를 불린다. 정부가 나서서 소농들을 보호하고 돌봐줘야 하는데 정부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다. 농부를 쥐어박고 농업을 팽개쳤다.

참다 참다 못해 살려 달라고 모여서 시위를 해도 정부는 들은 체도 안 한다. '차가 막힌다'며 공권력으로 해산시킬 뿐이다. 아니, 해산시키는 것도 모자라 방패로 찍어 농민을 죽이기까지 했다.


 

흰꽃, 빨간꽃, 분홍꽃. 방금 수확된 싱싱한 꽃이 한쪽에 쌓여 트럭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꽃이었지만, 내 눈에는 무척 슬퍼보였다.

 

 

30여 년 전 통일이 된 이후 베트남 정부는 달랏시에 살고 있던 일부 주민들을 교외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말이 이주일 뿐, 주민들은 쫓겨나다시피 했단다. 이들은 황량한 벌판을 개척해 농토를 일구었다. 머 아저씨는 이 지역을 'New economic zone'이라고 불렀다. 새 경제 구역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고된 생활을 하는 구역으로 보였다.

비닐하우스를 떠난 오토바이는 다시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렸다. 중간 중간 아저씨가 큰 소리로 '저기가 공동묘지예요' '저기는 딸기밭'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뭐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내 귀에 닿기도 전에 심술궂은 바람이 아저씨의 목소리를 하늘 위로 날려버린다. 바람이 세다. 나는 내 목소리가 날아가 버릴까봐 아저씨의 등에 바짝 붙어 귀에다가 '네!' '정말요?' '좋네요'라는 감탄사를 들려줬다.

내리막을 내려가다가 길 위에 궁상스럽게 버티고 있는 건물 앞에 멈췄다. 아저씨는 농부의 집이라고 했다. 들어가서 '해피 워터'를 주겠다면서 장난끼 가득한 눈웃음을 또 흘린다. '해피 워터? 베트남에 그런 게 있나?'라는 생각을 하며 아저씨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술 찌꺼기를 먹고 행복해진 돼지들.

알코올 농도 65도의 '해피 워터'

집 주인과 인사도 하기 전에 악취가 먼저 우리를 맞는다. 왼쪽을 보니 커다란 돼지 두 마리가 벌러덩 누워 있다. 정신을 잃었나보다. 내 기억 속 돼지는 항상 뭔가 먹고 있었는데 얘네들은 달랐다. 누워 있는 모습이 나름 귀엽다. 자세히 보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배에 새끼돼지 네댓 마리가 맛있게 젖을 빨고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졌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가까이 다가가서 봐도 눈길 한 번 안 준다.

머 아저씨가 돼지에 '꽂힌' 나를 안쪽으로 잡아 끌었다. 순박하게 생긴 주인 아저씨와 인사를 하고 나니 머 아저씨가 웃으며 조그만 잔을 내게 내밀었다.

"해피 워터예요. 마셔봐요."

단번에 마셨다. '캬~' 술이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머 아저씨가 키득키득 웃는다. 우리 아저씨, 정말 못 말린다. 이제서야 이 지역 농가에서 만드는 술이라고 이실직고 한다. 알코올 농도가 65도. 독한 술 한 잔에 내 몸은 금세 달아올랐다. 얼굴이 빨개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뭐, 그러고 보니 머 아저씨 말대로 '해피 워터'다.

"정말 해피 워터죠?"
"네, 기분 좋아요."
"저기 있는 돼지들도 기분이 좋을 거예요. 술을 증류하고 남은 찌꺼기를 돼지들한테 먹이거든요. 먹고 난 다음에 돼지들은 하루 종일 자요. 해피하게!"

술을 증류하는 모습.

참 해피한 돼지들이다. 팔자 좋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숙취 때문에 고생은 하겠지만. 정신 없는 돼지들에게 '행복해라'라는 인사를 하고 나와 오토바이를 탔다. 술 기운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알딸딸한 상태에서 오토바이를 타니까 더 신이 난다. '머 아저씨가 나 몰래 한 잔 하지는 않았겠지?'

"한국에 돌아가면 박스에 눈 좀 담아 보내줘요"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

얼마 달리지 않아 넓은 밭 앞에 섰다. 열매가 달려 있는 조그마한 나무들이 쭉 서 있었다. 머 아저씨가 커피 나무란다. 연두빛 열매들이 나무에 달려 익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할 일이 없는지 농부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커피 나무 앞에 선 머 아저씨는 마치 선생님이 된 것처럼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커피의 종류와 맛의 차이 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꽤 자세하게 설명한 것 같은데 거의 다 까먹고 몇 문장만 기억이 난다. 이놈의 부실한 메모리. 그동안 즐긴 음주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걸까.

"겨울이 없는 베트남, 특히 달랏은 커피를 키우기에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커피를 많이 생산하죠.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커피 나무가 있는데 나무 크기에 따라서 커피 종류를 구별할 수 있죠. 로부스타, 아라비카, 모카 등의 종류가 있는데요. 로부스타는 카페인이 많이 들어 있고 좀 쓴맛이 강하고, 아라비카는 좀 부드러워요."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이 커피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의 커피 생산국이라고 하더니 달랏 주변은 커피 나무 천지다.

겨울이 없다는 아저씨의 말을 듣고 '그럼 눈을 본 적이 없어요' 물어보니 텔레비전에서만 봤단다.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 커피. 커피 나무가 많다.

아직 연두빛인 커피 열매.

"한국에 돌아가면 박스에 눈 좀 담아 보내주세요."


 

진지한 아저씨는 어느새 다시 장난끼 있는 아저씨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 머 아저씨는 못말린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해피 붓다'

'해피 워터'에 '해피 붓다', 오늘은 행복한 날

커피 열매 몇 알을 주머니에 넣고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오르막을 올라가다가 사원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머 아저씨는 큰 '해피 붓다'가 있다면서 사원을 둘러보고 뒤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또 '해피' 시리즈다.

아저씨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나만 계단을 올라 전 앞으로 갔다. 사람이 거의 없어 더 조용하다는 것을 빼고는 아까 본 사원과 다를 게 없었다. 시무룩하게 표정으로 대충 살펴보고 뒤쪽으로 갔다.

푸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졌다. 말 그대로 '해피 붓다'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부처상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었다. 눈웃음도 수준급이었다. 어찌나 해맑게 웃는지 보는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부처상에 익숙한 내게 '해피 붓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든 근심, 걱정이 '해피 붓다' 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머 아저씨에게 돌아와 웃으며 '잘 봤다'고 했더니 아저씨도 '해피 붓다처럼 항상 행복하게 웃고 살자'고 하면서 웃는다. '해피 워터'를 마시고 '해피 붓다'도 봤으니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다.


 

보면 볼수록 좋네요.^^

사원 아래에 있는 폭포를 보고 올라왔다. 폭포는 시원했지만 그곳까지 가는 과정이 힘들었다. 미끄러운 돌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낑낑댔더니 티셔츠가 땀에 젖었다. 어느새 오후 1시가 훌쩍 넘었다. 머 아저씨가 점심을 먹자면서 나를 태우고 왔던 길로 올라갔다.

5분 만에 도착한 허름한 식당 앞에는 벌써 오토바이 석대가 서있었다. 앞장 서서 안으로 들어간 머 아저씨가 점심을 먹고 있는아저씨들과 반갑게 인사를 한다. 모두 파란 이지 라이더 점퍼를 입었다. 그 옆에는 서양인들이 서툰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쌀국수를 주문하고 머 아저씨와 마주 보고 앉으니 기자 정신이 슬금슬금 고개를 든다. 어색함을 날리기에는 질문 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깊은 주름과 천진난만한 미소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아저씨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머 아저씨의 라이프 스토리

사원 아래에 있는 폭포.

머 아저씨는 1955년에 달랏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즐거운 어린시절을 보내게 해준 평화로운 달랏도 전쟁의 검은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머 아저씨는 어려서 전쟁에 나가지 않지만, 형 4명이 전쟁에 나가 그 중 1명이 미군과 함께 합동 작전을 펴다 목숨을 잃었다.

"전 잘 모르겠어요. 누가 옳은지.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했을 때 머 아저씨의 나이는 스무살. 처음 몇 년 동안은 농사를 지었다. 그는 꿈이 있었다. 아까 살펴본 농부의 고된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8년 만에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 됐다. 머 아저씨가 영어를 잘 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았다. 그 후로 그는 13년 동안 영어 선생님으로 일했다. 모두가 부러워 하는 평생 고용이 된 셈인데 머 아저씨는 이 기간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무조건 교장이나 정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교사 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선생님은 그들의 인형에 불과했죠."

이지 라이더가 되기 위한 조건

사원에서 바라본 풍경. 구름이 예쁘다.

교사 생활에 염증을 느낀 머 아저씨는 교사를 그만 두고 오토바이 택시 운전기사를 시작했다. 교사보다 돈도 더 벌고 무엇보다 자유로워서 좋았단다. 그러다가 그는 10년 전부터 이지 라이더 일을 시작했다.  달랏에 86명의 이지 라이더가 있다는데 숫자가 많아져서 경쟁이 치열해졌다고 한다. 이지 라이더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자격 요건이 필요했다.


 "제일 중요한 게 좋은 성품이죠. 관광객들의 친구가 돼야 하거든요. 그리고 영어 실력이 있어야 하고요. 새로운 멤버를 뽑을 때는 기존 멤버들이 투표해요.

산길을 달리는 우리 오토바이.

머 아저씨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다. 딸은 호치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아들은 대학에서 공부 중이란다. 이지 라이더가 수입이 그나마 괜찮은 편이라 먹고 사는 데에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쌀국수가 나왔다. 뜨거운 국수를 호호 불며 입에 넣는데 이번에는 머 아저씨가 질문을 한다.

"한국 시어머니들은 다 그렇게 무서워요?"
"네? 시어머니요?"
"집에서 쉴 때 한국 드라마를 자주 보는데 시어머니들이 하나같이 무섭더라고요."
"하하하, 드라마요?"

이지 라이더들의 단골집.

그러고보니 우리나라 드라마에 나오는 시어머니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드세다. 특히 아침드라마는 며느리와의 갈등이 드라마 전개의 필수 조건처럼 되어 있다. 고부 간의 갈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드라마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모든 시어머니들이 도매금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

"아뇨, 그건 드라마니까요. 다 그렇지 않아요."
"만날 화내고 소리치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 귀가 아파요."

"베트남 언론 안 믿어요"

장난끼 있는 눈웃음. 귀여운 머 아저씨.

아저씨는 내가 기자라고 했더니 자신은 베트남의 언론을 믿지 않는단다.

 

"정부가 신문기사나 TV뉴스를 다 검열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한국은 자유롭죠?"
"네, 언론의 자유가 있죠. 하지만 어디를 가나 정부는 언론을 불편해 하는 거 같아요. 그게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요. 언론에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능이 있으니까요."

 

식사를 마치고 머 아저씨에게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싶다고 했더니 '좋다'며 자신의 파란 이지 라이더 점퍼를 들고 포즈를 취해준다. 카메라 앞이라 표정이 굳었다가 나의 '스마일~'이라는 주문에 활짝 웃는다. 장난끼 있는 눈웃음도. 귀여운 머 아저씨. 이지 라이더 조건 중에 '귀여운 표정짓기'도 있나보다.

쌀국수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국물까지 다 마셔 그릇을 말끔하게 비우고 머 아저씨와 도로 위로 나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딱이다. 머 아저씨와 어디든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실없는 소리도 나온다.

"너무 많이 먹어서 오토바이 속도가 안 나면 어떡하죠?"
"하하, 걱정말아요. 그럴 줄 알고 한 달 전에 새 오토바이 샀어요."

 

머 아저씨는 센스쟁이! 달랏에서 이런 50대 아저씨를 만날 줄 누가 알았을까. 큭큭거리며 아저씨 등 뒤에서 외쳤다. Let's go!!!

겉모습만 그런 줄 알았는데 속까지 정말 새 오토바이가 맞나보다. 앞서 가는 오토바이를 차례로 따라 잡는다. 빠르다. 오후의 햇살이 꽤 따가웠지만, 바람을 가르는 우리에게는 땀이 맺힐 겨를이 없었다.

실크 공장에서는 스카프가 반값

누에고치에서 실크를 뽑고 있는 여직원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실크 공장이었다. 호치민 벤탄시장에서 본 감촉이 좋은 실크 스카프를 만드는 곳인데 실크를 만드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한 쪽에는 하얀 누에고치가 쌓여 있었고, 다른 쪽에는

누에와 고치를 분리하는 여직원.

고치에서 나온 누에가 축 늘어져 있었다. 여직원들이 누에고치를 가마솥에 삶아 누에를 빼낸 다음 고치를 물레 같은 것으로 실을 뽑았다. 기계는 '윙윙~'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쉬지 않고 돌아갔다.

"베트남 실크가 최고예요. 질이 좋아요."

기계 소리가 거슬려 머 아저씨의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가 금세 밖으로 나왔다. 입구 쪽에 실크 제품 진열장이 있었다. 날 쫓아나온 머 아저씨를 통해 실크 스카프의 가격을 물어보니 벤탄 시장에서 샀던 스카프의 거의 반값이다. 오~예! 공장이라 도매가로 파는 것 같았다. '벤탄 시장에서 사지 말 걸...' 이미 스카프를 두 장 샀던 터라 한 장만 샀다. 싸다고 무한정 살 수는 없었다.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의 서늘한 눈빛이 '겨우 한 장 사냐'며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의 새 오토바이를 타고 달랏 시내 쪽으로 달렸다. 하늘을 보니 파란색이 많았던 하늘에 제법 흰색이 많아졌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낭패다. 머 아저씨는 속도를 더 냈다. 그래도 들릴 데는 들려야지. 중간에 커피 농장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농가를 둘러봤다. 머 아저씨가 아는 사람이 집주인이란다. 그런데 다들 일하러 나갔는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당에 닭 몇마리, 집안에 고양이 한 마리만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가난한 농가에서는 낡은 오토바이가 위안

농장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농부의 집.

낡은 침대와 의자 그리고 오토바이.


발로 차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벽돌에 판자 조각, 양철 지붕이 어우러진 집이었다. 집안에는 나무침대와 탁자 하나 그리고 조그마한 TV가 다였다. 낡은 오토바이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크레이지 하우스'의 모습.

"이 집은 네 식구인데요. 애들 두 명이 공부하러 호치민으로 가서 아버지, 어머니만 농사 짓고 있어요."
"원래 농가가 이렇게 생겼나요."
"네, 이쪽 농가는 이래요. 가난하죠."

어디서나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나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헌신적으로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부모를 만나고 싶었지만, 결국 못 만나고 다시 오토바이에 올랐다.


 

꼬불꼬불 산길을 달려 다시 달랏 시내로 돌아왔다. 그동안 하늘에는 파란색이 많아졌다. 비가 안 오면 어제만큼 춥지는 않을 것 같았다. 머 아저씨는 괴상한 건물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커다란 나무에 창을 내놓은 것 같았다. 예쁜 달랏과 어울리지 않는 흉측한 모양이었다.  이름하여 '크레이지 하우스' 베트남의 두번째 대통령의 딸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지은 건물이란다. 머 아저씨 말로는 베트남을 대표할 수 있는 예술적인 건축물을 만든 거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정말 '크레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진 찍어주고 돈 달라는 아저씨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특이한 구조와 인테리어로 버무려 놓았지만,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놀이동산의 시시한 유령의 집을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단 한가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높은 지대에 있어 전망이 좋았다는 것.

'크레이지 하우스'에서 바라본 풍경

심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는데 저쪽에서 한 아저씨가 손짓을 한다.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누군가에게 내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려던 참에 잘 됐다. 아저씨 앞으로 가서 카메라를 건네 주니 바로 두 장을 연속해서 찍는다. '아니 포즈도 안 잡았는데...'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데 손을 내민다. 황당해서 가만히 있는데 떠듬떠듬 '사진 찍어줬으니 돈을 달라'고 한다. 이런 걸 '사기 당했다'고 하는 걸까. 이 아저씨를 데리고 경찰서로 갈 수도 없고 좋은 일 하는 셈치고 주머니에서 2천동짜리 지페를 꺼내 주었다.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나보다 먼저 몸을 돌려 저쪽으로 가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할까. 여기가 '크레이지 하우스'라더니 '크레이지'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풍경은 좋았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센스쟁이' 머 아저씨를 보고 나서야 기분이 조금 풀렸다. 이제 꿈같았던 라이딩을 마칠 시간. 아저씨는 나를 처음 만났던 호텔 앞으로 데려다줬다.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내가 근처 커피숍에서 조금 있다가라고 졸랐다. 외로운 30대 총각이 불쌍했는지 머 아저씨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안녕~ 머 아저씨

이번에는 밀크 커피를 주문했다. 머 아저씨는 블랙 커피. 연유가 듬뿍 깔린 밀크 커피를 즐기며 머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지 라이딩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오토바이 라이딩은 황홀했다. 바람, 자유, 햇살, 구름, 햇살.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 거기다가 귀여운 머 아저씨와의 대화, 농담, 점심도. 모든 게 지금 마시는 달달한 밀크 커피처럼 달콤했다. 언제 다시 이런 맛을 느낄 수 있을까. 머 아저씨에게 '오늘 고마웠다'고 했더니 나더러 '나도 고맙다,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선생님이었다더니 사람 다룰 줄 안다.

당초 약속했던 요금에다가 팁으로 1달러를 더 얹어주니 아저씨는 '고맙다'고 하면서 귀여운 미소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기념촬영으을 하고 다음에 또 달리자는 약속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아저씨가 또 베트남에 오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넨다. 참 어려운 부탁과 함께.

"이번 겨울에 눈은 꼭 포장해서 보내줘야 돼요!"

못 말리는 머 아저씨! 안녕히~ 

머 아저씨와 함께 찰칵!

'부릉 부릉 부르릉~'

하루 종일 경쾌하게만 들렸던 머 아저씨의 오토바이의 엔진소리가 이번에는 구슬프다. 오토바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땡볕에 아이스크림이 녹아 내리듯 몸에 힘이 다 빠져 침대 위에 주저 앉았다. 처음 타는 오토바이라 너무 긴장했었나. 몸은 긴장이 풀려 녹아내렸지만, 배는 눈치도 없이 '꼬르륵' 소리를 낸다. 이대로 뻗었다가는 일어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억지로 샤워실로 들어가 피로를 씻어냈다.

어제 산 후드티를 입고 거기로 나왔다. 저녁을 바로 먹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아 산책을 할 요량으로 달랏시장을 지나 호숫가까지 걸어 내려갔다. 사람들이 많아졌다. 호숫가 잔디에 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 오리배로 호수 위를 다니는 사람들, 가만히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이 보였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 아래 잔잔한 호수 그리고 정겨운 사람들. 평화롭다.

풍경 사진은 많이 찍었지만, 정작 내 사진이 없다. 달랏에 왔다는 증거를 남기려면 '인증샷'은 필수. 사람들에게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하기가 망설여졌다. 아까 아저씨처럼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 돈을 요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내 앞에 서양여자 세 명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돈 달라고 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내밀려 사진 좀 찍어달라고 했다. '네~'라고 흔쾌히 사진을 찍어준다. 그것도 알아서 구도를 바꿔 두장이나 찰칵!

"네덜란드 알아요?"

달랏의 평화로운 오후.

카메라를 돌려받으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내 사진을 찍어준 여자는 네덜란드, 나머지 두 여자는 캐나다에서 왔다고 했다.

"네덜란드요?"
"네덜란드 알아요?"
"당연히 알죠.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사람이잖아요."
"히딩크? 아, 축구 감독이요?"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가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 감독이었잖아요. 우리 대표팀을 4강까지 올려놔서 한국에서 참 인기가 많았어요. 영웅이어죠"
"아~ 그때 한국이 정말 잘했죠."
"히딩크 덕분에 네덜란드를 잘 아는 느낌이예요. 박지성, 이영표 선수도 네덜란드에서 뛰었었고요."
"하하하, 그렇네요."

베트남 산간 피서지 달랏시내의 모습.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말에 히딩크 감독 이야기를 했더니 네덜란드 여자와 금세 가까워졌다. '히딩크 매직'은 축구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리에서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잘 아는 식당이 있냐고 해서 이지 라이더가 소개해준 곳이 있다며 어제 갔던 식당으로 데려갔다.

어제 나에게 베트남어 메뉴를 줬던 식당 종업원이 이번에는 영어 메뉴를 바로 준다. 국수와 음료를 시키고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여인의 이름은 엘케. 편하게 '이'라고 부르면 된단다. 캐나다에서 온 여인들은 헤더와 메리였다. 세 사람은 오늘 호치민에서 달랏으로 오는 버스에서 만나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달랏의 선선한 밤

호수 위에 오리배, 호숫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저녁을 먹으면서 간단히 자기 소개를 했다. 공교롭게도 엘케도 네덜란드에서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헤더와 메리는 이번에 학교를 졸업하고 긴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처럼 홀로 여행을 하고 있는 엘케는 우리나라의 언론 상황에 대해서 많이 물어봤다.

"한국은 정부에서 자기들이 마음에 안드는 기사 빼라고 하지 않아?"
"아니, 큰일날 소리지. 민주주의 나라에서 기사를 빼라고 못하지."
"중국은 아직도 그렇게 하잖아. 한국도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중국은 우리와 다르지. 민주화가 안 됐잖아. 한국은 언론의 자유가 있어."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과 호수.

저녁을 다 먹고 밖으로 나오니 어제처럼 인파가 대단했다. 시장에 활기가 넘쳤다. '골라 골라'라고 느껴지는 상인들의 외침도 우렁찼다. 달랏의 선선한 밤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세 친구들도 호치민보다 시원해서 좋단다.

그냥 호텔로 돌아가기가 아쉬워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허름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맥주를 한 캔씩 들고 마셨다. 세 사람은 내일 이리 라이더를 할 예정이었다. 나는 잘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지 라이딩을 하며 하루 종일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까 빨리 오토바이를 타고 싶단다.

열쇠고리를 파는 베트남 여인.

"밴쿠버는 휴양 도시잖아"

헤더와 메리는 내가 밴쿠버에서 어학연수를 했다고 했더니 자기들도 그쪽에서 왔다며 반가워했다.

"밴쿠버는 공부할 만한 곳이 아니야. 가면 놀 수밖에 없더라고."
"하하하, 맞아 사실 밴쿠버는 휴양 도시잖아."
"그래서 나도 휴양하고 왔어."
"잘했다~!"

서로 이메일 주소도 교환했다. 엘케는 베트남에서 쓰는 휴대폰 전화번호까지 적어주었다. 우리 모두 하노이까지 가는 베트남 종단 여행을 하는 중이라 일정이 겹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케가 또 히딩크 감독 이야기를 했다.


 

"히딩크 감독에게 고마워해야겠어.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해줘서~!"
"땡큐! 히딩크!"

마음은 따뜻, 날씨는 쌀쌀

기념사진 찰칵! 왼쪽부터 헤더, 메리, 엘케 그리고 정호.

7시간이 넘는 버스 여행 때문인지 세 사람 모두 피곤해 보였고 알코올이 들어가자 나도 다시 몸이 노곤해졌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은 같은 호텔에 묶는다며 위로 올라가고 나는 아래로 내려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재미에 여행을 다니나보다. 머 아저씨, 그리고 엘케와 헤더, 메리. 참 좋은 사람들이다. 어제처럼 중무장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 날이라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했지만, 달랏의 여름밤은 여전히 추웠다.

비몽사몽으로 배낭을 쌌다. 한국에서 정성스럽게 정리해왔던 배낭 속은 달랏에 온 이후로 혼돈 그 자체였다. 빨래감들은 빨래감대로 제멋대로였고, 빨래를 한 옷은 물기를 잔뜻 머금은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저께 밤에 빨아 둔 속옷이 아직도 안 말랐으니 말 다했다. 어제 나갈 때 햇볕에 내놓았어야 했는데 급하게 나가느라 깜빡한 결과다. 속옷이 몇 개나 더 남았지? 이러다가 후드티에 이어 속옷까지 사야하는 비극이 벌어질 지도 몰랐다. 아니면 속옷이 마를 때까지 안 갈아 입을 수밖에. 아~악! 생각만해도 찝찝했다.

기분 나빠 보이는 배낭을 달래고 달래서 어깨에 멨다. 불쌍한 배낭. 처음에는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모양이 예뻤던 배낭이 시간이 지날수록 망가져가는 모습은 안타까운 일이다. 미안해. 한국가면 푹 쉬게 해줄게! 마지막으로 빠진 게 없나 둘러봤다. 어제 집을 비운 사이 개미떼가 차지한 딸기 젤리를 빼놓고는 모두 챙겼다. 아깝다. 다섯 개도 못 먹었는데...

한국어를 공부하는 직원에게 인사 좀 하려고 했더니 안 보인다. 호치민에서도 그렇고 내가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은 꼭 자리에 없다. 체크 아웃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좋다. 예전에는 '공기가 좋다'는 말이 참 구식으로 느껴졌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공기가 좋다'보다 좋은 표현이 없다는 것을. 그저 공기가 좋을 뿐이니까. 달랏의 아침은 선선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선전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국 버스.


모르겠다. 서울의 아침도 달랏 만큼이나 조화로웠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대도시의 아침은 신선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을 느낄 여유가 없다는 것. 직장으로 일터로 향하는 인파와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가 조화로울 뿐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봐야 비로소 내 일상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버스에 새겨진 '주택의 명품'

나트랑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들판.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비슷했다.

바게트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서 나트랑으로 향하는 오픈투어 버스에 올랐다. 10여 명의 승객들 중 나를 포함한 세 사람만 빼고 다 베트남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래도 버스는 나처럼 한국에서 건너왔다. 맨 앞 햇빛 가리개에 주상복합 브랜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수식어는 '주택의 명품'. 재미있게도 베트남에 와서 탄 버스가 죄다 국산이었다.

아침 7시 30분에 맞춰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는 햇살 아래 빛나는 달랏을 뒤로하고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 들었다. 달랏에 올 때와 똑같이 흰 구름이 조그마한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저 안에 들어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겠지. '주택의 명품' 버스는 내리막길이 힘에 겨운지 '끽~끽' 소리를 냈다. 버스의 소리가 잦아들 때쯤 산길을 다 내려왔다. 하늘에 있다가 땅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들판 사이 사이에 마을이 있다.

쭉 뻗은 도로 위에 올라서 버스는 신나게 달렸다. 창 밖 풍경은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과 비슷했다. 푸른 논밭과 누런 소 그리고 하얀 오리들이 차창 밖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고원지대에서 느꼈던 한기는 이미 사라졌다. 에어컨이 나오는 버스 안에 있어도 후텁지근한 느낌이었다. 간사한 박정호! 달랏에서 춥다고 툴툴거리더니 떠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립단다.

바게트 샌드위치가 소화될 때쯤 버스는 휴게소에 멈췄다. 여행사 직원이 휴게소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에 타라고 말했다. 버스 밖은 생각했던 대로 무더웠다. 선선한 날씨 때문에 바깥 구경할 기회가 없었던 땀이 이때다 싶어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크리스천과 라울을 만나다

나트랑에 진입한 버스. 한 여성이 왼쪽 다리를 오토바이에 올려 놓은 채 운전하고 있다.

어디서 밥을 먹을까 둘러보는데 저 앞에서 나와 같은 버스에 두 외국인이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보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외국인 앞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어도 되겠냐고 물어봤다. 대답은  예스.

자리를 잡고 잠깐 인사를 나눠보니 두 사람은 동행이 아니었다. 아침에 버스에서 만나 친구가 됐단다. 턱수염을 기르고 있는 남자는 아일랜드 출신의 크리스천, 눈이 크고 그을린 피부를 가진 남자는 스페인에서 온 라울이었다.

아름다운 나트랑 해변.

크리스천은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일을 하고 나서 여러 나라를 여행 중이었다. 베트남 종단을 한 다음에 라오스와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를 돌 예정이란다. 라울은 초등학교 체육교사인데 1년 계획으로 여행 중이었다. 남아메리카를 다 돌고 나서 아시아를 여행하고 있는데 역시 베트남을 종단하고 다른 아시아 나라도 구경할 거라고 했다.

"북한하고 사이가 안 좋던데 무섭지 않아? 북한에는 핵이 있잖아."
"이제부터라도 잘 해야지. 실수 한 번 하면 끝이잖아."
"그래, 대화를 통해 잘 해결해야지. 조심해!"

늦은 오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호치민에서 만났던 싱가포르 청년 조셉처럼 크리스천에게도 북한 문제가 제일 관심사인 것 같았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화약고 같은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신기해보였을 수도 있겠다. 라울의 관심사는 축구.

"2002년도에 한국이 대단했었지. 월드컵 말야."
"응. 우리가 스페인을 이겼잖아. 기억하지?"
"얘기도 하지마. 그때 얼마나 슬펐었는데... 다음에는 우리가 이길꺼야!"
"그건 모르지. 경기를 해봐야 알지~"

넓게 뻗은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영어 메뉴를 잘못보고 주문했는지 내 앞에는 엉뚱하게도 닭죽이 놓였다. 마치 일부러 시킨 것처럼 자연스럽게 닭죽 한 숟가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생각보다 맛있다. 크리스천과 라울은 쌀국수를 먹으면서도 닭죽에 눈길을 줬다. 맛 좀 보라고 했더니 괜찮단다. 보기에는 별로 먹음직 스럽지 않은가보다.

나트랑 해변, 바다도 사람도 예뻤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어울려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다 먹고 버스에 올라 우리 셋은 앞뒤로 앉아 수다를 떨었다. 뭐, 사실 나와 라울은 주로 크리스천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를 쳐줬다. 네이티브 스피커를 어떻게 당하랴. 크리스천은 자신이 경험한 호주의 워킹 홀리데이 이야기와 잡지에서 본 가십거리를 들려주었다. 나는 아일랜드가 배경이었던 영화 '원스' 이야기를, 라울은 남아프리카 여행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나트랑까지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파란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배가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해변이 아름다운 휴양지 나트랑. 8세기 당시 아시아 해상 무역의 요충지로 군림했던 나트랑은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 피서지로 거듭났고, 현재도 베트남 관광의 요충지로써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들이고 있다.

바다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

버스는 해변과 가까운 호텔 밀집 지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크리스천은 모든 일정을 예약해놓은 상태라 지정된 호텔로 가서 짐을 풀었고, 라울과 나는 삐끼를 따라 한 호텔에 묵게 되었다. 짐정리와 샤워를 하고 우리 셋은 다시 만나 해변으로 갔다.

끝이 안 보이는 해변. 해가 구름 뒤로 숨은 늦은 오후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베트남 관광객들이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파도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물장구를 쳤고 어른들은 어린 아이들을 감싸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바다에서는 파도에 몸을 실었고, 모래사장에서는 모래에 손을 담갔다. 예뻤다. 바다도 사람도 예뻤다. 물론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처럼 물 속에서 꼭 껴앉고 밀어를 속삭이는 커플들도 보였다. 흑흑,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부러운 커플들은 어딜 가나 꼭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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