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려성 “무서운게 없습니다, 춤 말고는”
이 땅에 그들이 살고 있다. 오랜 세월 춤꾼으로 살아오면서 재기(才氣)를 갈고 닦던 한국춤의 보석들이 살고 있다. 풍류를 생활로 이어오던 그들에게 춤은 인위적인 멋이 아니고 자연환경이었다. 삶, 그 자체였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공연은 극히 일부분이다. 춤만 추며 살아온 그들은 풍경을 남기지 않는다. 그저 흥에 겨워 춤추면 그뿐. 강을 건널 때 벗이 되는 징검다리처럼 한 세월 이어가는 낙이 그들의 춤이었다. 경향신문은 ‘춤과 그들’을 통해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들을 비롯, 맥이 끊긴 전통춤의 지킴이들까지 발굴해 추적한다. 세상을 살아내며 다듬어진 춤꾼들의 숨결과 예술혼을 지켜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의 삶과 춤에 대한 집념을 뜨겁게 보듬는다.
# 최초로 수출된 한국문화상품
1964년 여름 영국 보컬그룹 비틀스는 처음 방문한 미국을 팝송으로 완전 정복했다. 같은 해 봄날 미국 뉴욕. 5척 단신의 한국무용가가 미국 정복에 나섰다. 우리나라에서 ‘수출의 날’을 제정한 그 해, 64년에 이뤄진 한국무용 수출현장으로 가보자.
뉴욕 콜럼비아 아티스트 페스티벌사 회의실에 권려성 아리랑 민속예술단 예술감독과 남편인 김생려 아리랑 민속예술단장이 공연 계약을 앞두고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하버드 팍스 콜럼비아 부사장과 마주한 그들은 해외무대를 위해 쏟아부은 지난 1년의 노력을 셈해본다. 50명의 단원은 똘똘 뭉쳐 연습만 했다. 고단한 땅에서 홀로 핀 꽃들은 불꽃처럼 뜨겁고 눈부시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57년부터 61년까지 초대 서울시향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김생려 단장은 미국과 프랑스 매니지먼트사 대표들을 한국에 초청, 워커힐 호텔 극장무대에서 아리랑 민속예술단 공연 상품을 선보였다. 일종의 견본시장. 성공이었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콜럼비아 아티스트 페스티벌사와의 계약은 한국공연사의 최대 ‘사건’이었다. 다시 수출현장. 이날 이수영 당시 주미대사는 “건국사상 최초로 한국무용이 해외에서 장기공연된다”고 기뻐했다. 주미대사가 투입된 작전은 국가차원의 문화총력전이었다.
한국무용가 권려성(75). 그는 해방공간 시대 한국무용계의 신데렐라였고 1964년부터 미국에 우리춤의 아름다움을 알려온 주인공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43년 동안 미국에서 한국춤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외국여행이 힘들던 당시 50명의 예술인들이 3년 동안 미국에서 공연한다는 건 빅뉴스였다. 미국 현지에서도 공연평론가들이 흥분을 접지 못한 채 쓴 글들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64년 9월1일 하와이 공연을 시작으로 미국과 캐나다 62개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문화를 알리고 공연사상 최초로 외화벌이에 앞장섰다. 미국명도 지었다. 스텔라 권. ‘별’이라는 의미였다.
권려성은 말한다. “무서운 게 없습니다. 춤말고는.” 미국 최고의 무대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터. “당시 서울 충무로 3가와 재동에 있는 집 두 채를 팔아 비행기표를 구입했습니다. 한국춤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려면 일단 미국까지는 가야 하잖아요.”
64년 미국공연은 한국 단체로는 최초, 개인으로는 37년 최승희 공연후 두번째다. 아리랑 민속예술단은 10년 동안 미국공연을 강행한다. 공연이 많아져 귀국이 연기됐고 향수병에 걸린 단원들은 3년 계약기간이 끝난 후 교대로 귀국했다.
# 1956년부터 시작된 권려성의 해외공연
“장기간 미국공연이 가능한 배경은 1960년 여름 프랑스 파리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춘향전’의 성공 때문입니다. 영화제작자인 김관수씨가 한국무용을 외국에 소개해야 한다며 32명의 한국무용가를 선정해 ‘춘향전’을 제작했죠. 무대감독은 이해랑, 안무는 임성남씨가 맡았어요. 그때…말도 마세요. 요즘 말로 너무 잘 나가던 무용가들만 뽑아놓았으니 춘향이 캐스팅을 둘러싸고 어땠겠어요?” 캐스팅 발표날. 난리가 났다. 춘향이 역은 권려성에 돌아갔다. 이도령은 조용자, 향단이 강선영, 방자 김문숙, 춘향모 김순성. 초호화 캐스팅이었다. 현재 강선영(82)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예능보유자이고 김문숙씨(79)는 예술원 회원이다.
이들은 국립무용단 창단주역이기도 했다. 62년 서울 소공동 당시 중앙공보관에서 창단식을 가졌다. 단장은 고(故) 임성남. 부단장이 김백봉(현 서울시립무용단장)과 송범(캐나다 거주·전 국립무용단장)이었다. 단원도 모두 주연급 스타들이었다. 권려성 김문숙 김진걸 이원영 이인범 정인방 조용자 주리 진수방 등 13명. 국립무용단 창단공연은 임성남 안무의 ‘백의 환상’ ‘쌍곡선’. 송범 안무의 ‘영은 살아있다’ 등 세 편이었다.
권려성의 춤인생은 화려했다. 56년 서울 시공관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후 그해 홍콩, 대만, 베트남에서 순회공연을 이어갔다. 59년 제2회 개인 무용발표회. 60년 파리에서 춘향이로 열연한 후 61~63년 5·16쿠데타 이후 김종필씨가 한국문화문예진흥을 위해 창단한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으로 전국순회공연에도 나섰다. 그러나 단원이 200명이나 되는 예그린악단이 해체되자 권려성과 남편 김생려는 예그린악단의 예술정신을 수출해야 한다고 결심했고 64년 아리랑 민속예술단 창단후 해외공연에 눈을 돌렸다.
65년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9주 동안 2만명의 관객에게 한국전통춤과 창작춤을 선보였고 8개월의 유럽공연에 이어 67년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 박람회에서 4주동안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권려성은 30여편의 무용을 안무하고, 무용 합창 연주로 구성된 공연을 연출했다. 고 홍연택이 합창단을 지휘했다. 무대장치 조명 소도구 등 최고급만 고집했다. 한복의상도 프랑스 디자이너 로멘 어테와 한국의 ‘미스박’ 의상실이 만들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던 때였는데, 우리는 시즌티켓 공연명단에 선정됐지요. 당시 라디오시티 뮤직홀은 세계적으로 검증된 아티스트만이 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술단원중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에는 병역기피자가 많아 외국공연이 힘들었는데, 정부에서 국위 선양하는 예술단이라고 출국을 허락했답니다.”
# 춤인생 70년
권려성은 1932년 흥남에서 1남3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에서 반대하는 춤이었지만 타고난 재주를 어찌할 수 없었다. 48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3년 동안 평양에서 최승희를 사사했다. 피란후에는 남에서 덕성여대 가정과를 졸업했지만 춤을 계속 익히며 덕성여고 무용교사로 활약했다.
당시 권려성은 최승희의 동서인 김백봉보다 5살 연하였지만 김백봉을 스승으로 따랐다. “김백봉 선생과는 충무로 4가에 있던 저의 무용학원에서 묵정동 김백봉 무용연구소까지 손잡고 밤새 왔던 길을 되걸으며 춤에 대한 열정을 나누곤 했어요. 그런데 공연을 앞두고는 사람이 달라져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예술가의 마음, 있잖아요!” 김백봉과는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는 사이지만 2년 전 서울시립무용단장 부임 후부터는 바쁜 일정을 알기에 전화를 삼간다고 했다.
“우리 젊을 때는 눈물 쏙 빼게 혼나면서 배웠어요. 요즘 무용인들은 눈물 빼며 배울 일도 없고…. 너도 나도 인간문화재 춤만 배우려 하지, 창작춤에 시들하죠. 전통을 익혀 제자양성을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예술이 진화하려면 새로운 춤들이 나와야 합니다. 전통만으론 무용이 정지하고 말아요.”
그는 부채춤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전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개막식때 보여준 김백봉의 부채춤이 유명한데, 저는 65년 라디오시티 공연 프로그램으로 부채춤을 안무했습니다. 그때 유명 TV쇼인 에드설리번 쇼에도 두 차례 출연해 양손에 든 부채 두 개를 모아서 돌리는 꽃모형 부채춤을 추었는데, 지금도 LA 에드설리번 도서관에 가면 그때의 녹화 테이프를 보실 수 있어요.”
결혼도 권려성의 열정으로 이룬 결실이다. 56년 동남아시아 공연 당시 고(故) 김생려와의 ‘몰래한 사랑’은 유명한 러브스토리다. 서울시향을 창단한 김생려와 권려성의 나이차는 20년. 오케스트라 단장과 무용단원이 동남아 순회공연을 떠난 배에서 맺은 사랑은 한국 잡지 ‘야담과 실화’에 대서특필됐다. 표지사진은 두 사람의 포옹장면이었고 제목은 ‘남십자성에서 맺은 사랑’.
95년 타계한 김생려는 라스베이거스 묘지에 안치됐다. 권려성이 39세에 낳은 아들 해롤드 킴(37·한국명 김현모)은 워싱턴 D.C 사법부 공무원이고 미국인 부인 에미 킴(35·변호사)과 두 아들을 두고 있다.
67년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한 권려성은 2002년 라스베이거스 무용원을 개원하고 지난해 12월 ‘우봉 권려성 춤 70년 기념 공연’을 갖는 등 꾸준히 춤활동을 하고 있다. 건물임대업으로도 성공했다. 한국에서 활동했으면 한국무용사를 달리했을 사람. 다른 욕심은 없다. 한국에서 무용 공연 갖는 게 마지막 소원이다. 고국 무대에서 지나온 시간을 밟으며 박제된 외로움을 풀고 싶을 뿐이다.
▲ 권려성 ?
권려성의 춤인생은 화려했다. 56년 서울 시공관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후 그해 홍콩, 대만, 베트남에서 순회공연을 이어갔다. 59년 제2회 개인 무용발표회. 60년 파리에서 춘향이로 열연한 후 61~63년 5·16쿠데타 이후 김종필씨가 한국문화문예진흥을 위해 창단한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으로 전국순회공연에도 나섰다. 그러나 단원이 200명이나 되는 예그린악단이 해체되자 권려성과 남편 김생려는 예그린악단의 예술정신을 수출해야 한다고 결심했고 64년 아리랑 민속예술단 창단후 해외공연에 눈을 돌렸다.
65년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9주 동안 2만명의 관객에게 한국전통춤과 창작춤을 선보였고 8개월의 유럽공연에 이어 67년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 박람회에서 4주동안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권려성은 30여편의 무용을 안무하고, 무용 합창 연주로 구성된 공연을 연출했다. 고 홍연택이 합창단을 지휘했다. 무대장치 조명 소도구 등 최고급만 고집했다. 한복의상도 프랑스 디자이너 로멘 어테와 한국의 ‘미스박’ 의상실이 만들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던 때였는데, 우리는 시즌티켓 공연명단에 선정됐지요. 당시 라디오시티 뮤직홀은 세계적으로 검증된 아티스트만이 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술단원중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에는 병역기피자가 많아 외국공연이 힘들었는데, 정부에서 국위 선양하는 예술단이라고 출국을 허락했답니다.”
# 춤인생 70년
권려성은 1932년 흥남에서 1남3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에서 반대하는 춤이었지만 타고난 재주를 어찌할 수 없었다. 48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3년 동안 평양에서 최승희를 사사했다. 피란후에는 남에서 덕성여대 가정과를 졸업했지만 춤을 계속 익히며 덕성여고 무용교사로 활약했다.
당시 권려성은 최승희의 동서인 김백봉보다 5살 연하였지만 김백봉을 스승으로 따랐다. “김백봉 선생과는 충무로 4가에 있던 저의 무용학원에서 묵정동 김백봉 무용연구소까지 손잡고 밤새 왔던 길을 되걸으며 춤에 대한 열정을 나누곤 했어요. 그런데 공연을 앞두고는 사람이 달라져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예술가의 마음, 있잖아요!” 김백봉과는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는 사이지만 2년 전 서울시립무용단장 부임 후부터는 바쁜 일정을 알기에 전화를 삼간다고 했다.
“우리 젊을 때는 눈물 쏙 빼게 혼나면서 배웠어요. 요즘 무용인들은 눈물 빼며 배울 일도 없고…. 너도 나도 인간문화재 춤만 배우려 하지, 창작춤에 시들하죠. 전통을 익혀 제자양성을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예술이 진화하려면 새로운 춤들이 나와야 합니다. 전통만으론 무용이 정지하고 말아요.”
그는 부채춤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전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개막식때 보여준 김백봉의 부채춤이 유명한데, 저는 65년 라디오시티 공연 프로그램으로 부채춤을 안무했습니다. 그때 유명 TV쇼인 에드설리번 쇼에도 두 차례 출연해 양손에 든 부채 두 개를 모아서 돌리는 꽃모형 부채춤을 추었는데, 지금도 LA 에드설리번 도서관에 가면 그때의 녹화 테이프를 보실 수 있어요.”
결혼도 권려성의 열정으로 이룬 결실이다. 56년 동남아시아 공연 당시 고(故) 김생려와의 ‘몰래한 사랑’은 유명한 러브스토리다. 서울시향을 창단한 김생려와 권려성의 나이차는 20년. 오케스트라 단장과 무용단원이 동남아 순회공연을 떠난 배에서 맺은 사랑은 한국 잡지 ‘야담과 실화’에 대서특필됐다. 표지사진은 두 사람의 포옹장면이었고 제목은 ‘남십자성에서 맺은 사랑’.
95년 타계한 김생려는 라스베이거스 묘지에 안치됐다. 권려성이 39세에 낳은 아들 해롤드 킴(37·한국명 김현모)은 워싱턴 D.C 사법부 공무원이고 미국인 부인 에미 킴(35·변호사)과 두 아들을 두고 있다.
67년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한 권려성은 2002년 라스베이거스 무용원을 개원하고 지난해 12월 ‘우봉 권려성 춤 70년 기념 공연’을 갖는 등 꾸준히 춤활동을 하고 있다. 건물임대업으로도 성공했다. 한국에서 활동했으면 한국무용사를 달리했을 사람. 다른 욕심은 없다. 한국에서 무용 공연 갖는 게 마지막 소원이다. 고국 무대에서 지나온 시간을 밟으며 박제된 외로움을 풀고 싶을 뿐이다.
▲ 권려성 ?
1932년 함경남도 흥남 태생
1952년 부산 권려성 무용연구소
1953~60년 서울 권려성 무용연구소
1956년 덕성여대 졸업·제1회 개인발표회
1956년 동남아 해외공연
1959년 제2회 개인발표회
1960년 한국무용협회 고전무용분과위원장·프랑스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춘향역
1961~63년 예그린악단 무용부장
1964년 아리랑 민속예술단 창단후 미국과 유럽공연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박람회 공연
2002년 권려성 무용연구원 개원
현재 권려성춤보존회 이사장
◇주요 안무작: 회상 일심 간난이의 하루 양귀비 장고춤 인도무 초립동 무당춤(이상 1956년), 낙엽 야광화 산조(이상 59년), 탈춤 춘향전 (이상 60년), 승무 오고무 농악 설장고(이상 61년), 검무(64년), 부채춤 화관무(이상 65년), 시집가는 날·견우직녀(이상 80년), 황진이·다시 나비가 되어(이상 2004년)
1952년 부산 권려성 무용연구소
1953~60년 서울 권려성 무용연구소
1956년 덕성여대 졸업·제1회 개인발표회
1956년 동남아 해외공연
1959년 제2회 개인발표회
1960년 한국무용협회 고전무용분과위원장·프랑스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춘향역
1961~63년 예그린악단 무용부장
1964년 아리랑 민속예술단 창단후 미국과 유럽공연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박람회 공연
2002년 권려성 무용연구원 개원
현재 권려성춤보존회 이사장
◇주요 안무작: 회상 일심 간난이의 하루 양귀비 장고춤 인도무 초립동 무당춤(이상 1956년), 낙엽 야광화 산조(이상 59년), 탈춤 춘향전 (이상 60년), 승무 오고무 농악 설장고(이상 61년), 검무(64년), 부채춤 화관무(이상 65년), 시집가는 날·견우직녀(이상 80년), 황진이·다시 나비가 되어(이상 2004년)
이매방이 기억하는 ‘권려성’
우봉 이매방(80)은 서울 낙원동에서 무용연구소를 차리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권려성을 ‘춤 잘추고 예쁜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전통무용을 추려면 키가 작아야 해요. 여자는 키 155㎝를 넘으면 매력없어요. 려성씨는 무용에 소질있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키도 아담하고. 그런데 북가락만 타면 팔이 길어서인지 그렇게 춤사위가 크고 에너지가 넘칠 수 없었죠. 다른 여성 무용인과 확실히 달랐어요. 그러니까 ‘춘향전’ 주인공을 맡았겠죠. 나하고는 다섯살 차이밖에 나지 않고, 각각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는데도 내 춤을 배우는데 열심이었어요. 예술을 익히는데 위아래가 어딨냐고 하더군요. 다른 이들과 함께 배우지 않고 독(獨)으로 배웠죠.”
권려성은 결혼 후인 60년대초 이매방의 설장고와 오고무를 배우고 싶었지만 하루종일 제자들이 들락날락거리는 서울 서대문 이매방 무용연구소에서 우봉을 독차지해 춤을 사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자신도 무용학원을 경영하느라 바쁘지 않은가. 궁리 끝에 택한 방법이 술상과 함께하는 교육현장. 자신의 학원에서 오고무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낙원동 무용연구소에 술상을 차린 권려성은 술맛에 취한 이매방의 북소리를 기다렸다. 이매방이 북가락 한번 때리면 그 가락을 외우고, 또 술 몇 잔 마신 뒤 애절한 북소리 몇가락이 터져나오면 그 가락을 외우고 배우며 열흘 만에 오고무를 마스터했다.
권려성은 결혼 후인 60년대초 이매방의 설장고와 오고무를 배우고 싶었지만 하루종일 제자들이 들락날락거리는 서울 서대문 이매방 무용연구소에서 우봉을 독차지해 춤을 사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자신도 무용학원을 경영하느라 바쁘지 않은가. 궁리 끝에 택한 방법이 술상과 함께하는 교육현장. 자신의 학원에서 오고무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낙원동 무용연구소에 술상을 차린 권려성은 술맛에 취한 이매방의 북소리를 기다렸다. 이매방이 북가락 한번 때리면 그 가락을 외우고, 또 술 몇 잔 마신 뒤 애절한 북소리 몇가락이 터져나오면 그 가락을 외우고 배우며 열흘 만에 오고무를 마스터했다.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 공연후(1965). 왼쪽부터 김생려 단장, 한사람건너 라디오뮤직홀 사장, 권려성,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 리엔도프 라디오시티 뮤직홀 아트디렉터. |
두 사람은 이름 앞에 붙는 호도 ‘우봉’으로 같다. 권려성의 경우 호라기보다 당시 춤을 잘 추는 무용가에게 붙여주는 일종의 작위 개념인 명칭이 ‘우봉’이었다.
마지막 동래한량 ‘문장원’
남자가 춤은 무슨…. 천만에.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수는 남성이었다. 바로 신라시대 ‘처용무’의 주인공인 처용아비다. 실록을 보자. 연산군(1476~1506)이 추던 처용무는 세계 최초의 무용수로 기록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1638~1715)보다 훨씬 앞서 있으니… 이 땅의 진정한 춤꾼은 남성이었다.
# 15살때부터 기방출입하며 배운 춤
문장원옹(90·동래야유보존회장)은 춤의 본향 동래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량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유’ 예능보유자이며 버선발 하나만 척 들어도 멋이 줄줄 새는 동래 입춤의 보루다. ‘야유(野游)’는 ‘들놀음’의 한자로 ‘탈놀이’를 뜻한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귀가한 한밤중에 야유를 시작, 술잔을 돌리고 춤기운을 다져가며 새벽까지 놀곤 했다. 동래 사내들뿐이겠는가. 전국 한량들은 동래 온천에 모여들고 예기들은 춤실은 노래와 웃음을 흩날렸다. 옛말이 있다. ‘평양기생 치마폭은 벗어나도 동래기생 치마폭에는 묻히고 만다’ ‘일본형사 앞에서는 서 있어도 동래기생 앞에서는 무릎꿇고 만다’는. 문장원은 30여년동안 예기들과 놀며 ‘춤’을 얻었다. 같이 춤추고 소리하던 동래기생 200명의 이름을 기억해 명단을 작성할 만큼 진하게 한 시절 누렸다.
문장원의 동래입춤. |
이제 와서 못할 말이 무어란 말인가. 예기들에게 춤을 배우고 춤교정도 받았다. 다른 한량들은 예기에게 돈 주며 놀았지만 유독 그는 예기들에게 돈 받으며 놀았다. 이젠 더 이상 추억속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저 돌아볼 수 있을 뿐. 이제 추억의 통로를 불밝힌다.
봄날 부산 금정산 금강공원내 동래야유보존회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문옹은 고백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춤을 추지 몬한다카이.” 마지막 동래한량이 한량춤을 추지 못하다니. “무르팍이 아프다보이 발을 들지 몬해. 기교를 부리지 몬하니 춤출 수 없는 게지….” 대쪽 같은 기개가 서려있던 동래 한량의 신체. 그 몸에서 부드럽고 장엄한 춤사위가 뻗쳐 나왔건만 이젠 그 춤을 보기 어렵다니….
75년동안 춤을 춰온 그는 보청기 없이도 잘 듣는 대신 무릎 신경통을 달래는 파스와 입이 마를 때 위안이 되는 은단을 챙겼다. 1990년 뇌경색증으로 입원했어도 춤을 추었는데 이젠 아니다. 그저 집에서 식사를 챙겨주는 아내가 고맙다. 27세되던 1943년 결혼한 부인 김계관씨(83)와는 50세때부터 각 방을 써왔다. 기생과 노는 남편이 미워 아내가 내린 처방. 지난날이 미안해 아내의 결정에 두말않고 따랐다.
# ‘못된 소질’이 있던 마지막 동래한량
문익점의 26대손 문장원은 15세에 동래 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신의 운명이 춤에 닿을 줄 꿈에도 몰랐다. 아니, 풍류에 휘말린 동래 남정네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제일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 과정) 졸업후 당연히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재수학원격인 동래학술강습소 고등과를 다녔는데, 영어·수학·국어·국사 등 좋은 머리로 열심히 했지만 또 낙방. 진학이 뜻대로 되지 않자 15세에 동래야유를 배웠고 그것으론 신에 안차 이천석꾼인 두살 위 사돈 최종욱과 기방출입을 시작했다. 기운뻗치던 17세. 술값은 주로 최종욱이 댔다. 1930년대 일류요정을 휩쓸고 다니다보니 그 역시 동래고교를 중퇴했다. 동래에선 한 상에 3원, 5원, 7원, 10원으로 나뉘는 술상을 정하고 기생을 호명한 후 목욕탕에서 화투 몇판 돌리다보면 상이 들어왔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6원. 기생은 한시간에 1원20전을 받았고 2시간째부터는 80전. 춤추고 노래하다 보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놀았으니 가무 잘 하는 예기는 한달에 300시간 이상 일했다. 한국인이 주인인 내선관을 비롯, 일본인이 주인인 동래관·봉래관·시즈노야·와끼·아라이 등이 그런 곳이었다.
당시 권번에 모여 손님을 기다리던 기생들은 동래관·봉래관 등 고급 요정으로 불려가 한량들을 위해 권주가를 불렀고 남정네들도 소리 한 자락씩하며 흥을 일구다 예기들의 노래가락에 맞춰 일어나 춤을 추곤 했다.
“놀았던 70년 세월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이 바로 그때입니다. 가장 못되게 놀았어요. 그때부터 못된 소질이 있었던 게야.”
다른 이들이 예쁜 기생을 부를 때 그는 나이든 예기를 지명했다. 술과 춤에 취해 요정에서 잠들고 그 다음날도 바깥출입없이 요정에서 놀았다. 그렇게 20일동안 1000원을 탕진한 적도 있다. 한달의 절반은 거의 동래 온천에서 살았고 절반은 부산에서 놀았다. 광복동·서면·중앙동·완월동 등 댄스홀에 양복입은 그가 뜨면 여급들이 달려들었다. 트로트·블루스·왈츠·탱고·지르박·트위스트… 못추는 춤이 없었다. 여름엔 노는 물이 달랐다. 예기들과 수영해변과 송도해수욕장으로 나가 놀았다. 해변에서 모래를 밟으며 한과 흥이 담긴 팔사위를 담아갔다.
봄날 부산 금정산 금강공원내 동래야유보존회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문옹은 고백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춤을 추지 몬한다카이.” 마지막 동래한량이 한량춤을 추지 못하다니. “무르팍이 아프다보이 발을 들지 몬해. 기교를 부리지 몬하니 춤출 수 없는 게지….” 대쪽 같은 기개가 서려있던 동래 한량의 신체. 그 몸에서 부드럽고 장엄한 춤사위가 뻗쳐 나왔건만 이젠 그 춤을 보기 어렵다니….
75년동안 춤을 춰온 그는 보청기 없이도 잘 듣는 대신 무릎 신경통을 달래는 파스와 입이 마를 때 위안이 되는 은단을 챙겼다. 1990년 뇌경색증으로 입원했어도 춤을 추었는데 이젠 아니다. 그저 집에서 식사를 챙겨주는 아내가 고맙다. 27세되던 1943년 결혼한 부인 김계관씨(83)와는 50세때부터 각 방을 써왔다. 기생과 노는 남편이 미워 아내가 내린 처방. 지난날이 미안해 아내의 결정에 두말않고 따랐다.
# ‘못된 소질’이 있던 마지막 동래한량
문익점의 26대손 문장원은 15세에 동래 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신의 운명이 춤에 닿을 줄 꿈에도 몰랐다. 아니, 풍류에 휘말린 동래 남정네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제일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 과정) 졸업후 당연히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재수학원격인 동래학술강습소 고등과를 다녔는데, 영어·수학·국어·국사 등 좋은 머리로 열심히 했지만 또 낙방. 진학이 뜻대로 되지 않자 15세에 동래야유를 배웠고 그것으론 신에 안차 이천석꾼인 두살 위 사돈 최종욱과 기방출입을 시작했다. 기운뻗치던 17세. 술값은 주로 최종욱이 댔다. 1930년대 일류요정을 휩쓸고 다니다보니 그 역시 동래고교를 중퇴했다. 동래에선 한 상에 3원, 5원, 7원, 10원으로 나뉘는 술상을 정하고 기생을 호명한 후 목욕탕에서 화투 몇판 돌리다보면 상이 들어왔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6원. 기생은 한시간에 1원20전을 받았고 2시간째부터는 80전. 춤추고 노래하다 보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놀았으니 가무 잘 하는 예기는 한달에 300시간 이상 일했다. 한국인이 주인인 내선관을 비롯, 일본인이 주인인 동래관·봉래관·시즈노야·와끼·아라이 등이 그런 곳이었다.
당시 권번에 모여 손님을 기다리던 기생들은 동래관·봉래관 등 고급 요정으로 불려가 한량들을 위해 권주가를 불렀고 남정네들도 소리 한 자락씩하며 흥을 일구다 예기들의 노래가락에 맞춰 일어나 춤을 추곤 했다.
“놀았던 70년 세월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이 바로 그때입니다. 가장 못되게 놀았어요. 그때부터 못된 소질이 있었던 게야.”
다른 이들이 예쁜 기생을 부를 때 그는 나이든 예기를 지명했다. 술과 춤에 취해 요정에서 잠들고 그 다음날도 바깥출입없이 요정에서 놀았다. 그렇게 20일동안 1000원을 탕진한 적도 있다. 한달의 절반은 거의 동래 온천에서 살았고 절반은 부산에서 놀았다. 광복동·서면·중앙동·완월동 등 댄스홀에 양복입은 그가 뜨면 여급들이 달려들었다. 트로트·블루스·왈츠·탱고·지르박·트위스트… 못추는 춤이 없었다. 여름엔 노는 물이 달랐다. 예기들과 수영해변과 송도해수욕장으로 나가 놀았다. 해변에서 모래를 밟으며 한과 흥이 담긴 팔사위를 담아갔다.
1935년 여름 부산 수영해변에서 예기들과 함께한 동래한량 문장원옹(왼쪽에서 여섯번째). |
“그때 동래·초량·부산 등 3개의 기생조합이 있었는데, 내가 기생들 끌고 다니다가 이렇게 됐어요. 물론 여자들과 놀아도 동래야유에 남은 인생을 걸기까지의 서러움은 말로 못하지만….”
요정과 댄스홀을 섭렵하면서 34년 음력 정월대보름부터는 동래야유에 참가했다. 17세 문장원은 8선녀를 태우고 가는 마부역이었다. 누가 춤을 가르쳐주진 않았다. 같이 놀던 판에서 눈썰미로 익힌 춤을 갈고 닦았다.
돈벌이도 급했다. 1940년 25세에 중국 OK레코드사 외판 직원이 됐다. 회사는 조선부·중국부·일본부로 구성됐는데 그는 조선부였다. 다롄 본사에서 견본으로 나온 수십장의 새 음반을 들고 한 달에 25일동안 중국 국경인 소만·호림·호두·목단강을 돌고 옌볜과 두만강, 소만 국경, 지린성, 옌지의 레코드 대리점에서 주문을 받았다. 그리곤 다시 다롄에서 닷새간 출장준비를 하고 25일동안의 출장을 떠났다. 한달 출장비는 400원이고 월급은 63원. 당시 우체국 직원 월급이 15원이니 좋은 보수였다.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유행했는데, 그 노래를 들으며 밤에는 여성을 품에 안았지요. 남자 혼자 외지를 떠도니 별 수 있나. 중국여성보다는 한국여성과 만났고….”
주사도 맞곤 했다. 창피한 기억. 비아그라 기능의 주사인데 1년동안 중독됐었다. 그러나 여동생이 아프다는 전갈을 받고 동래로 돌아가기 전 주사를 끊었다. 43년에는 울산 경남여객 중역의 딸인 김계단과 결혼했다. 27세 무직의 남성. 사돈 최종욱과 다시 어울려 기방에 다녔다. 문옹의 5촌 숙모가 최종욱의 고모였다. 밤새 놀고 점심때 일어나 소머리국밥과 파전잘 부치는 동래 진주집에서 해장을 했다. 식당주인이 진주 예기출신이었다. ‘못된 소질’은 시절도 피하지 못했다
# 인생은 한바탕 엇박자 춤이거늘
아내와는 4형제를 두었다. 요즘은 부동산업을 하는 막내아들의 34평 아파트(온천 1동)에서 문옹부부만 살고 있다. 결혼전인 19세에는 한살 아래인 경주출신 예기 이씨와 정을 나누며 2남2녀를 두었는데, 그 중 딸 하나만 생존해있다.
44년에는 부산시청 노동과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상사가 그에게만 유난히 힘든 일을 시켰는데 이에 반발하자 오사카 제련소에서 10개월동안 강제노역을 시켰다. 공습경보후 폭탄이 떨어지면 지면에 100m 지름의 구멍이 날 만큼 강력했고 모두 정신을 잃곤 했다. 죽고 싶은 날들. 45년 8월12일 제련소를 탈출했다. 47년에는 부산 세무과 임시직원으로 입사후 이듬해 정식직원이 됐다. 6·25전쟁때는 예기 이씨의 언니 애인인 남자가 월북하는 바람에 방첩대에 연행돼 죽을 고생을 하기도 했다. 사랑했던 기생 때문에 고초를 겪었는데도 고단한 시대의 남정네는 밤마다 요정으로 출근했다.
51년부터는 정미소와 제재소를 운영하는 동래산업주식회사 상무로 취직했고 54년 가마니 멍석 새끼줄을 생산하는 기간산업회사인 경남고공품회사 경남지사장으로 활약했다. 56년에는 한국고공품주식회사 부사장이었다. 그의 업무는 출입기자를 만나는 일. 요정에서 그는 다시 사교계의 왕자로 군림했다.
58년 문장원에겐 제2의 인생이 열렸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각 지역의 민속놀이가 대통령상을 돌아가며 받고 있었는데, 동래야유가 못받을 이유가 없다는 분위기였다. 주위에서 뭐라해도 남은 인생은 동래춤에 걸겠다고 결심했다. 65년 동래민속연구회가 설립되고 문옹은 원양반역할을 맡아 대통령상을 거머쥔다. 67년에는 동래야유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동안 묵힌 한이 치유됐다.
문옹은 요즘 춤을 출 수 없게 되자 후학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하다. “무용전공인데도 무슨 이유로 일정한 동작이 형성되는지 이해하지 못해요. 동래야유도 각 역할의 성격을 분석해야 하는데 무조건 선생이 시키는대로 추기만 하니…. 예기들이 버선신은 八자 걸음으로 엇박에 맞춰 춤출 때 풍류객은 그 발맵씨까지도 놓치니 않는 법이죠. 팔만 들어도 멋이 흘러야지…예술은 그런 깊은 맛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모양만 만들어 추니 원….”
문옹은 입춤을 최고로 쳤다. 83년에 이어 2002년 서울에서 동래입춤을 출 때 그는 지팡이를 들고 나와 무대앞에 내려 놓고 서서히 박자를 타며 즉흥 입춤을 선보였다. 춤의 기본인 입춤이야말로 단아함과 절제미의 최고봉이며 슬쩍슬쩍 보여주는 엇박자타기의 묘미야말로 몰아쉬는 호흡의 속도감을 공간미학으로 연결시켰다.
“후회는 없어요. 한바탕 춤추듯 인생이 후딱 지나갔어. 단, 부모님께 잘못한 게 후회막급이지. 월급을 많이 탔는데도 집에 한푼 보내지 않았거든. 댄스홀가서 춤추느라…. 요즘도 가끔 요정가서 놀지. 갈 때 됐어도, 나, 아직 남자야.”
▲ 문장원옹 ?
1917년 부산 동래출생
44년 부산시청 노동과 입사
47년 부산 세무과 입사
51년 동래산업주식회사 상무
54년 경남고공품회사 경남지사장
56년 한국고공품주식회사 부사장
65년 동래민속연구회 설립·제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74년 동래민속관 완공
89년 ‘동래놀음’ 발간
96년~현재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장
99년 옥관문화훈장
2000년 자랑스런 부산시민대상
부산 전승 탈놀이 ‘동래야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된 동래야유(사진)는 부산 동래구에 전승되는 탈놀이다. 수영야유의 영향으로 187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에서는 ‘야유(野遊)’를 ‘야류’라고 부른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연희되며 그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의 하나인 동부 마을과 서부 마을의 줄다리기 놀이와 겸해 놀았다. 모두 4과장인데 문둥이과장, 양반과장, 영노과장, 할미·영감과장으로 구성된다. 문둥이의 원한과 슬픔을 표현한 문둥이과장에 이어 두번째부터 넷째과장까지는 양반에 대한 조롱이다. 원양반·치양반·모양반·넷째양반·종가도령이 하인 말뚝이를 데리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우쭐거리며 등장해 덧뵈기춤을 추는 양반과장, 가상의 동물인 영노가 나타나 양반을 조롱하다 잡아먹는 영노과장, 영감을 찾아 팔도를 도는 할미가 첩 얻어 사는 영감을 보고 홧병으로 죽음에 이르는 할미·영감과장이 이어진다. 이 놀음에는 농염한 베드신(?)이 있어 야한 탈춤으로 알려져 있다.
반주는 북, 장구, 해금, 젓대, 피리, 꽹과리, 징 등을 사용했는데 요즘은 타악기만을 연주한다. 탈놀이를 시작하기 전 춤꾼들은 학춤, 문둥춤, 곱추춤, 병신춤, 홍두깨춤, 엉덩이춤 등을 추며 흥을 북돋운다. 이때 구경꾼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가 자신이 만든 탈을 쓰고 재주를 자랑할 수 있다. 이 군무(群舞)는 탈놀이가 시작되는 새벽 1시께까지 계속된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부터는 놀이가 중단됐었다. 양반계급에 대한 풍자가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였다.
한편 동래야유의 문화재지정을 시작으로 동래 옛 풍류들이 문화재로 지정받기 시작했다. 72년 동래학춤, 77년 동래지신밟기, 93년 동래고무 등 춤의 본향 동래가 재인식되면서 동래춤들이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로 각각 지정받았다. 물론 그 배경에 74년 완공된 동래 민속관을 터전으로 한 문옹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69년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의 예산을 청하고 부산 시장이 4번 바뀔 동안 꾸준히 극성을 부려 평생 역작인 동래민속관을 탄생시켰다.
한편 동래야유의 문화재지정을 시작으로 동래 옛 풍류들이 문화재로 지정받기 시작했다. 72년 동래학춤, 77년 동래지신밟기, 93년 동래고무 등 춤의 본향 동래가 재인식되면서 동래춤들이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로 각각 지정받았다. 물론 그 배경에 74년 완공된 동래 민속관을 터전으로 한 문옹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69년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의 예산을 청하고 부산 시장이 4번 바뀔 동안 꾸준히 극성을 부려 평생 역작인 동래민속관을 탄생시켰다.
민살풀이춤의 유일한 전승자 ‘장금도’
“살풀이춤은 격식이 없어야해”
‘시끄러운 과거.’ 민살풀이춤(수건없이 추는 살풀이춤)의 유일한 전승자 장금도(79)는 군산 예기(藝妓)였다. 그는 50년동안 자신의 시끄러운 과거를 꼭꼭 묻어두고 살았다. 아들부부, 손자들에게 숨기고 또 숨겼던 기생의 ‘지난 날’이 여기 있다. 기자에게 60여년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금도 할머니. 옛날 추억의 거울을 꺼내어 입김으로 호호 불며 뿌연 먼지를 닦았다.
권번 소속 예기들은 저녁마다 화장을 새로 했다. 집에서 일본제 우데나 영양크림과 미제 코티분으로 곱게 화장하고 기다리면 요리집에서 보낸 인력거가 왔다. 요리집에 온 손님들이 예기(藝妓) 명부를 보고 예기를 택하면, 요리집에선 권번 소속 예기양성소에 연락하고 권번에선 호명된 예기집에 인력거를 보냈다. 장금도가 한복 곱게 차려입고 인력거타고 나가면 사람들이 그 얼굴 한번 보려고 인력거 안을 기웃기웃했다. 장금도를 비롯, 요리집에 먼저 도착한 예기는 손님방에 같이 들어갈 예기들을 기다렸다.
보통 두세명의 예기들이 한 방에 들어가 신고식 겸 손님들에게 단가를 불러주었다. 판소리도 한대목씩 했다. 이때 예기들은 서로의 소리에 북이나 장구로 반주를 쳐주었다. ‘아리랑’ ‘흥타령’ 등 소리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춤도 추었다. 방에선 주로 ‘살풀이춤’을 추었고 더러 ‘소고춤’도 추었다.
“한두시간 놀고도 10시간을 달아주는 손님이 있고, 20시간 논 값을 셈해주는 분도 있었응게. 처음 한시간은 1원50전이고 두시간째부터는 1원씩 받았네(당시 쌀 한가마니가 6원). 군산시내 중국요리집인 동해루·쌍설루 등에도 불려갔는데, 주로 한식집인 명월관·만수장·천수각 등에 갔으요. 한번은 서울서 온 손님이 한시간쯤 있다 나에게 돈봉투를 건네더니 잘 놀았으니 가보라는 거여. 자존심은 상했지만, 얼른 집에 가분게 좋더구먼. 글고는 다른 요정에서 청한 인력거 타고 돈벌러 다시 나갔제. 근디 나중에 알고본게 나가 그 사람이 나허고 같은 인동 장씨여 그랬다는기여. 아니 결혼할 것두 아닌디….” 그랬다. 예기를 대하는 손님들의 순수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 열두살에 기생수업
장금도는 전북 군산시 개복동에서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8명의 가족들은 병든 큰 오빠에게 의지했다. 누군가 부양을 떠맡아야 했던 상황. 장금도는 12살에 소화권번(권번장 박재효)에 입적했다. 가야금병창을 잘하던 예기 이영주가 수양어머니가 되어 기생수업비를 댈 테니 훗날 예기가 되면 곱으로 갚으라 했다. 1928년 군산에 설립된 소화권번은 37년 주식회사로 전환됐는데, 4년학제에 성적미달이면 학년을 오르지 못했다.
권번에선 오전에 시조·판소리·일본어를 배웠고 오후는 소리연습과 소리수업을 했다. 시조와 단가는 김창윤에게 배웠다. 이기권·김창용에게 ‘심청가’를, 김준섭에게 ‘심청가’와 ‘춘향전’을 사사했다. 집에서는 독과외를 했다. 김준섭에게 ‘심청가’와 ‘춘향가’를, 민옥행에게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를 배웠다. 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섭렵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예기양성소에서 4년동안 기를 쓰고 배웠다.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이 좋다고 가야금병창을 하지 말라대요. 가야금연주하면서 소리하면 목이 가벼워지고 흩어져 못승게요. 그란디 지는 춤이 젤로 좋았어요. 학채(교습비)를 내고 최창윤에게 ‘승무’를, 김백용에게 ‘검무’ ‘화무’ ‘포구락’을 배웠어요.”
지금도 수줍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는데 당시엔 오죽했을까. 42년 15세의 나이로 군산극장에서 열린 ‘수해민 구제 예기연주회’에서 ‘승무’를 추었는데, 모두들 그의 춤을 최고로 뽑았다. 최승희와 친했던 도금선(1909~1979)은 그 공연을 본 후 ‘멋대로 추어보라’ 권했고 장금도는 승무나 검무의 동작들을 나름대로 풀어 자신만의 춤으로 만들어갔다.
권번 소속 예기들은 저녁마다 화장을 새로 했다. 집에서 일본제 우데나 영양크림과 미제 코티분으로 곱게 화장하고 기다리면 요리집에서 보낸 인력거가 왔다. 요리집에 온 손님들이 예기(藝妓) 명부를 보고 예기를 택하면, 요리집에선 권번 소속 예기양성소에 연락하고 권번에선 호명된 예기집에 인력거를 보냈다. 장금도가 한복 곱게 차려입고 인력거타고 나가면 사람들이 그 얼굴 한번 보려고 인력거 안을 기웃기웃했다. 장금도를 비롯, 요리집에 먼저 도착한 예기는 손님방에 같이 들어갈 예기들을 기다렸다.
보통 두세명의 예기들이 한 방에 들어가 신고식 겸 손님들에게 단가를 불러주었다. 판소리도 한대목씩 했다. 이때 예기들은 서로의 소리에 북이나 장구로 반주를 쳐주었다. ‘아리랑’ ‘흥타령’ 등 소리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춤도 추었다. 방에선 주로 ‘살풀이춤’을 추었고 더러 ‘소고춤’도 추었다.
“한두시간 놀고도 10시간을 달아주는 손님이 있고, 20시간 논 값을 셈해주는 분도 있었응게. 처음 한시간은 1원50전이고 두시간째부터는 1원씩 받았네(당시 쌀 한가마니가 6원). 군산시내 중국요리집인 동해루·쌍설루 등에도 불려갔는데, 주로 한식집인 명월관·만수장·천수각 등에 갔으요. 한번은 서울서 온 손님이 한시간쯤 있다 나에게 돈봉투를 건네더니 잘 놀았으니 가보라는 거여. 자존심은 상했지만, 얼른 집에 가분게 좋더구먼. 글고는 다른 요정에서 청한 인력거 타고 돈벌러 다시 나갔제. 근디 나중에 알고본게 나가 그 사람이 나허고 같은 인동 장씨여 그랬다는기여. 아니 결혼할 것두 아닌디….” 그랬다. 예기를 대하는 손님들의 순수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 열두살에 기생수업
장금도는 전북 군산시 개복동에서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8명의 가족들은 병든 큰 오빠에게 의지했다. 누군가 부양을 떠맡아야 했던 상황. 장금도는 12살에 소화권번(권번장 박재효)에 입적했다. 가야금병창을 잘하던 예기 이영주가 수양어머니가 되어 기생수업비를 댈 테니 훗날 예기가 되면 곱으로 갚으라 했다. 1928년 군산에 설립된 소화권번은 37년 주식회사로 전환됐는데, 4년학제에 성적미달이면 학년을 오르지 못했다.
권번에선 오전에 시조·판소리·일본어를 배웠고 오후는 소리연습과 소리수업을 했다. 시조와 단가는 김창윤에게 배웠다. 이기권·김창용에게 ‘심청가’를, 김준섭에게 ‘심청가’와 ‘춘향전’을 사사했다. 집에서는 독과외를 했다. 김준섭에게 ‘심청가’와 ‘춘향가’를, 민옥행에게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를 배웠다. 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섭렵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예기양성소에서 4년동안 기를 쓰고 배웠다.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이 좋다고 가야금병창을 하지 말라대요. 가야금연주하면서 소리하면 목이 가벼워지고 흩어져 못승게요. 그란디 지는 춤이 젤로 좋았어요. 학채(교습비)를 내고 최창윤에게 ‘승무’를, 김백용에게 ‘검무’ ‘화무’ ‘포구락’을 배웠어요.”
지금도 수줍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는데 당시엔 오죽했을까. 42년 15세의 나이로 군산극장에서 열린 ‘수해민 구제 예기연주회’에서 ‘승무’를 추었는데, 모두들 그의 춤을 최고로 뽑았다. 최승희와 친했던 도금선(1909~1979)은 그 공연을 본 후 ‘멋대로 추어보라’ 권했고 장금도는 승무나 검무의 동작들을 나름대로 풀어 자신만의 춤으로 만들어갔다.
“43년에는 군산 최대요정인 명월관에서 예기 허가증 취득을 위한 시험이 있었어요. 심사관은 일본인 경찰서장, 조선인 군수, 몇몇 지역유지들과 권번장 등이었죠. 심사관들은 40명의 동기들에게 차례로 지시사항이 적힌 종이를 주었어요. 일본어로 써있는 내용을 이해하면 일본어 시험은 자연스레 합격이니까요. 소리시험을 보고나선 ‘승무’로 춤시험을 보았어요. 춤시험은 40명 중 10명만 봤고요.” 장금도는 소리와 춤시험에서 수석이었고 예기 1급 허가증을 받았다. 그때부터 가족부양은 그의 차지였다.
‘춤추는 장금도’는 잘 나가는 예기였다. 화장한 얼굴로 공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런데 44년부터 정신대 처녀 공출이 시작됐고 장금도는 45년 17세에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10살 연상의 부여 부잣집 막내아들 후처로 시집갔다. 죽은 전처소생 6남매를 키웠다. 남편과는 정이 없었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밤이면 마루에서 남편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날 밤 마루 앞으로 지나가는 짐승이 동네집 개가 아니고 여우라는 것을 알고는 기절하며 남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밤 누워있던 남편은 어땠을까. 장금도 할머니의 말 한마디. “좋아합디다.”
임신이 됐다. 친정에서 산후조리하고 오니 어떤 여성이 와 있었다. 죽었다던 전처였다. 늑막염을 앓던 전처는 친정에서 요양하다 후처를 보러 온 것이었다. 80살된 예기는 무심하게 당시를 기억하지만 18살의 어린 금도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선연하다. 전처는 결국 얼마 못 살고 늑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8·15 해방. 장금도에겐 어려운 살림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친정식구들을 돌봐준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큰오빠가 죽고 학도병 나간 남동생이 전사했다. 장금도는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조카 등 10명을 부양해야 했다. 다시 군산 요정에 나갔고 19세에는 서울로 진출했다. 요정 ‘금정’에서 춤과 소리를 했고 일주일에 두세번 ‘명월관’에도 나갔다.
“물론 연애거는 손님도 있었죠. 저보고 다방으로 나오라고 전갈을 넣어요. 저는 요정으로 오라고 했죠. 요정은 돈 없으면 못오니까 저를 쉽게 만날 수 없잖아요. 막말로 연애하자, 같이 살자하는 건, 말이 안되죠. 내가 창녀인가? 나는 기생인디.”
요정에선 주로 ‘살풀이춤’을 추고 환갑집 등 잔칫집에 가서는 악사가 많이 동원되는 ‘승무’를 추었어요. 53년에 군산에서 3일씩 계속되는 환갑잔치에 불려갔죠. 손님들이 바뀔 때마다 명창 임방울이 ‘쑥대머리’와 자작곡 ‘추억’을 부르고 내가 ‘승무’와 ‘살풀이’를 추는 프로그램인데 하루에도 몇번씩 똑같은 프로그램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임방울씨가 ‘금도야, 니하고 나는 앞으로 1년동안 쉬어도 되것다. 원없이 추고 원없이 했다’고 웃곤 했어요.”
임방울뿐이 아니었다. 국립창극단 창단의 시금석이 된 김연수도 장금도를 탐냈다. 당대 소리의 쌍벽을 이루는 두 명창이 한결같이 그의 파트너로 한 무대에 서기를 열망했다.
# 아들을 위해 춤을 끊다
장금도는 아들이 10살 되던 29세까지 예기로 활동하며 군산의 한량들에게 사랑받았다. 댄스홀 여급들의 3배 되는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한량들은 그를 호명했다. 흥겨운 판에는 장금도춤이 있어야 했다.
장금도는 악사들에게도 인기 캡이었다. 손님에게 받은 팁을 악사들에게 모두 내주다보니 악사들마다 장금도가 노는 방에 들어가길 원했고 반주도 최고로 쳐주었다. 하룻밤에 서너방씩 돌 때는 “전화받고 오겠다”며 나가 다른 방으로 갔다. 짬짬이 요정 한쪽에서 유모품에 안겨있는 아들에게 젖도 물려야 했다. 29살까지 눈치보며 번 돈으로 집도 두채 사고 친정 조카들 학비까지 대며 친정부양을 계속했다. 여러 사람에게 돈을 떼고도 생활이 풍족했다. 그런데도 가족들은 그의 과거를 금기시했다. 치마도 입지 말라고 했다. 기생처럼 보인다고 “제발 ‘쓰봉’ 맞춰입으라”고 닦달했다. 2005년 ‘전무후무’ 공연때 아들이 어머니의 시끄러운 과거를 포용하기까지 그랬다. 요즘은 월남파병으로 고엽제 환자가 된 아들(62)·며느리(60)와 셋이 산다.
“나이든 이들이 혹시 나를 알아볼까봐 노인정에도 못가고, 시끄러운 과거가 생각날까봐 국악프로그램도 못봤어요.” 83년 ‘한국명무전’에 출연한 후 춤배우러 오겠다는 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무서워 깊이 숨어있기도 했다. 또 지난달에는 ‘진옥섭의 예인명인-노름마치’(생각의 나무)를 받자마자 ‘내가 기생이었다고 쓴 내용이 있겠지!’ 싶어 책을 얼른 장농밑에 숨겼다고 한다.
지워도 남아있는 흔적. 요즘은 국민학교(‘예기양성소’의 은어) 친구들도 하나둘 타계해 같이 민화투치며 옛 얘기하던 기생 친구도 없다. 그러나 무대에 설 때가 되면 행복하다.
“내 춤은 싱겁고 무거워 재미없어요. 그런데 요즘 춤은 너무 정신없어 못보것두만. 제자들에게 제 춤을 원하는 대로 가르쳐도 그대로 따라 못해요. 살풀이춤은 격식없이, 춤추는 이의 마음과 멋이 가는 대로 가락이 나와야 하는디, 배운 대로 요지부동으로 서고 손가락은 요란스레 꼬고 난리니….”
순간의 아름다움을 살려 즉흥으로 마음을 전하는 게 춤이라고 했다. “왜 자꾸 옛날 얘기 나오게 허요. 그려도 할말은 허야지. 나중에 죽을 망정 춤추는 순간이 좋응게, 춤을 간볼 때가 좋아….” 할머니는 옅적게 웃었다.
군산을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거슬러 올라간 시간의 바닷물 속에서 그 옛날 던져진 예기 장금도의 깨어진 꿈을 찾을 수 있다면.
▲ 장금도?
1929년 전북 군산에서 장영운과 서예쁜의 6남매 중 셋째 출생
1939년 4년제 학제의 소화권번에 입소
1942년 종합 1등으로 예기허가증 취득
1944년 결혼 후 잠시 활동중단
1947년 서울에서 활동재개
1950~56년 군산에서 활동·아들 때문에 소리와 춤을 끊음
1983년 사진작가 정범태의 추적으로 ‘한국 명무전’ 출연
1998년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중 ‘명무초청공연’ 출연
2004년 ‘여무, 허공엔 그린 세월’ 출연,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특별출연
2005년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중 ‘전무후무’ 출연
2006년 ‘전무후무’ 프랑스 초청공연 출연
1939년 4년제 학제의 소화권번에 입소
1942년 종합 1등으로 예기허가증 취득
1944년 결혼 후 잠시 활동중단
1947년 서울에서 활동재개
1950~56년 군산에서 활동·아들 때문에 소리와 춤을 끊음
1983년 사진작가 정범태의 추적으로 ‘한국 명무전’ 출연
1998년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중 ‘명무초청공연’ 출연
2004년 ‘여무, 허공엔 그린 세월’ 출연,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특별출연
2005년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중 ‘전무후무’ 출연
2006년 ‘전무후무’ 프랑스 초청공연 출연
2005년 ‘전무후무’ 공연날 아들에게 들통 눈물바다
2005년 10월8일 장금도가 출연한 ‘전무후무’ 공연날은 장금도의 삶에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날이었다. 50년전 이야기. 장금도는 아들이 열 살 되던 해 기생일을 접었다. 하교해 집에 들어오며 아들이 하는 말. “엄마가 기생이야? 친구네 할아버지 환갑잔치에서 춤을 추었다믄서?”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심장이 갈래갈래 찢어졌다. 어린 외아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 아무리 춤이 좋아도 안 될 일이었다. ‘다시는 춤을 안 춘다.’ 그 맹세를 지키려 몸 속의 아우성들을 후려치며 50년을 참았다.
장금도는 지난 50년 동안 기생이었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서러워하지 않았다. 치열한 예(藝)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했다. 춤이 좋아 춤만 생각하고, 춤만이 그의 자부심이었다. 물론 아들 때문에 춤을 끊은 후 장롱 속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50여벌의 꽃무늬 블라우스도 입지 못했다. 옛날 사진들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과거를 지워야 했다.
그러나 아들을 4번 속였다. 1983년 정범태 사진작가의 청으로 한국명무전 출연 후 98년 ‘명무초청공연’, 2004년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2005년 ‘전무후무’까지… 무용계 인사들이 찾아와 조르면 춤추겠다고 덜컥 허락하곤 했다. 매번 집앞 세탁소와 한복집에 공연의상을 맡겨놓고, 며느리에게는 ‘온천 놀러갔다온다’ 하고 서울 무대에서 춤추었다. 며느리와 아들은 온천까지 가서 놀고온 어미의 얼굴이 왜 그리 고단해보이는지 영문을 알지 못하고 답답하기만 했을 터였다.
그런데 2005년 ‘전무후무’ 공연에서 장금도의 밀행이 들통난 것이다.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한 진옥섭씨가 4년동안 공들여 아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를 위해 꽃다발까지 준비했다. 공연후 화장실을 다녀오는 그에게 아들부부는 ‘봤어유’ 한마디만 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장금도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어쩌다 아들이 알아버렸는지, 속상할 뿐이었다.
“아들에게 거짓말하는 게 제일 나쁘다고 가르쳐놓곤, 내가 50년동안 거짓말을 했으니….”
아들·며느리와 손자부부, 증손녀들, 작전사령관(?) 진옥섭씨도 함께 울었다. 환갑을 넘긴 아들은 자신을 위해 춤을 버렸던 기생어머니에게 그저 미안할 뿐. 말없이 어미를 품었다. 예기 장금도.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춤만 생각한다.
일제때 잘못된 궁중무용 그대로 전승 ‘답답’
“일제강점 당시 이왕직 아악부는 원전대로 궁중의식을 치르지 못하고 총독부 정책에 따라야했습니다. 일제는 우리 고유의 음양사상이 녹아있는 의식을 없애고, 왕권을 극소화하며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동작들을 궁중무용에 첨가했지요. 그런데 요즘도 일제강점하의 궁중무용이 전승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잘못된 건 빨리 바로잡아야죠. 시대별 의식무를 홀기별로 기록된 내용을 정리하다보니 원전과 일제강점기의 춤이 너무나 다르더군요.”
중국 청나라의 ‘공자 대제’ 무보를 설명하는 이흥구씨. |
‘처용무’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인 이왕직 아악부때 너무도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왕직 아악부 의식에는 무용수들이 마주 절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전인 악학궤범에는 무용수들이 마주 대한다고만 기록됐을 뿐 서로 절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 이는 임금에게만 절하는 예도를 무시하고 무용수끼리도 절하도록 해, 임금이 무용수와 같은 신분임을 강조한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이었다.
또 고려시대 ‘헌선도’에는 무용수들의 ‘선내족 후외족’ 부분, 즉 음양이 교차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왕직 아악부때부터 음양의 강조없이 무조건 왼발부터 내딛는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우리 고유의 음양이치를 말살하는 정책이라는 것. 이흥구는 이런 춤들이 제대로 고쳐지지 않고 공연되는 실정에 흥분했다.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이 앞장서 시정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교방살풀이춤’도 마찬가지. 궁중의 교방에서 추던 춤은 ‘교방무’이나 일제강점기 후 권번에서 추어진 춤은 ‘기방춤’이라는 것. 게다가 살풀이춤은 민속춤이지 궁중무용이 아니므로 살풀이 앞에 ‘교방’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춤이론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또 고려시대 ‘헌선도’에는 무용수들의 ‘선내족 후외족’ 부분, 즉 음양이 교차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왕직 아악부때부터 음양의 강조없이 무조건 왼발부터 내딛는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우리 고유의 음양이치를 말살하는 정책이라는 것. 이흥구는 이런 춤들이 제대로 고쳐지지 않고 공연되는 실정에 흥분했다.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이 앞장서 시정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교방살풀이춤’도 마찬가지. 궁중의 교방에서 추던 춤은 ‘교방무’이나 일제강점기 후 권번에서 추어진 춤은 ‘기방춤’이라는 것. 게다가 살풀이춤은 민속춤이지 궁중무용이 아니므로 살풀이 앞에 ‘교방’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춤이론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흥구 “춤 고유의 냄새를 되찾아야해요”
매일 담배 3갑씩을 피웠다. 요즘은 하루 반갑으로 줄였지만. 점심도 절반 이상 먹지 않는다. 이흥구(67·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연화대합설무 기능보유자)가 담배에 집착하는 건 우리 전통을 향한 갈증때문일까. 스러져가는 전통을 마주한 초조감 때문일까. 우리 무용사 추적이 하루 일과다. 궁중정재 기록에 심취한 그를 만났다.
춤을 추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사실 그는 태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충남 보령 주포면 뒷골 농가에서 6남매 중 다섯째. 위로 누나 두 명과 형 두 명을 낳은 어머니. 그를 임신하자 뱃속 아이를 지우려고 산에서 구르고 높은 곳에서 힘껏 뛰어내리며 자신의 몸을 학대했지만 질긴 생명력을 어찌하리. 45세 어머니는 그를 낳았다. 그리고 3년후 여동생을 봤다. 집에서 대천초등학교까지 40리(16㎞). 걸어 다녔다. 짚신은 왜 그리 빨리 닳는지. 딱 한 번. 어머니가 사준 ‘깜장고무신’도 신어보긴 했다. “9살에 입학했어요. 보통 8살에 하는데 가정형편 때문에… 1955년 졸업후엔 공부하고 싶어서 연고도 없는 서울행 새벽열차를 탔죠. 어둠이 내린 서울역에 도착하니 막막했어요. 무조건 길건너 허름한 여인숙에 묵었죠.” 먹고살기 위해 한달 가까이 시장골목을 누비며 할 일을 찾았다. 먼 친척을 만난 건 기적이었다. 일거리를 찾다 서울시청 앞에서 10촌보다 먼 아저씨를 만났다. 구 황실재산관리국장인 이호성씨. 아저씨의 제안으로 서울 운니동 아저씨집에서 국악사 양성소 중학과정 2년까지 다녔고 이후 자취를 했다.
1기 동기생은 30명. 18명이 졸업했다. 교과서와 학용품이 무료 지급됐고 매달 장학금도 주었다. 최근까지 활동하는 이는 몇명 되지 않는다. 김중섭(대금), 최충우(가야금), 이규석(해금) 등 세 명이 서울에서 활동중이고 미국 LA에 이예근(피리), 박영안(해금)이 있다. 사실 당시에는 춤추는 남자가 별로 없었다. 이흥구도 해금으로 입학했는데, 고교 2년때 한국 민속무용 과목을 지도하던 김보남의 권유로 춤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무용은 필수 교양과목. 김보남은 “해금 그만하고 나하고 춤추자. 1기생 중에 무용 전공자가 배출되어야만 한국 전통무용이 올바로 계승될 수 있다”고 춤을 권했다. 사실 김보남은 초조했다. 국악사 양성소에서 전통무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궁중에서 추어지던 정재는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위기감. 이흥구의 신체조건이나 춤태가 가장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해금 전공자가 전공을 포기하면 학과 낙제가 되어 국비생으로 졸업할 수 없는 것. 결국 김보남은 당시 이주환 국악원장에게 읍소해 무용 전공생인 그를 졸업시켰다.
김보남 외에도 김천흥을 사사했다. “당시 여학생들만 배우러 왔는데, 100명쯤 됐습니다. 그 중에 딱 한 명의 남학생이 무용을 배우겠다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춤추니 죄다 웃는 거예요.”
잃어버린 무용원고
김보남은 춤을 가르치고 춤을 기록으로 남기고픈 열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던 스승이었다. “선생님은 식사를 안하시고 주로 맥주만 드셨어요. 숙직을 도맡아 하시곤 했는데, 숙직하실 때마다 맥주를 짝으로 놓고 안주도 없이 드셨어요. 결국 단명하셨죠.” 김보남은 국악사 양성소 근처인 원서동에서 부인·외동딸과 살았는데, 작고후 모녀의 행적이 묘연하다. 국악사 양성소 졸업후 무용연구소를 차리자던 김보남과의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다. 61년 졸업후 김천흥이 무용부장이던 대한민속예술원(서울 종로 3가)에 한국무용 강사로 나갔는데, 다음해 김보남이 40대 후반의 나이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제가 넋이 나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선생님이 작업중이던 국내 최초의 한국무용이론서 집필을 제가 도왔는데, 돌아가신 후 초안 원고가 사라진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온 집안을 다 뒤질 수도 없고… 참으로 귀한 내용들이 수록됐는데… 지금도 행방은 미스터리입니다.” 김보남의 책이 빛을 봤다면 국내 최초의 한국무용 입문서가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한다.
첫 맞선 1주일 만에 결혼
김보남 작고후 65년부터는 김천흥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가르쳤다. 좋은 시절. 그러나 간첩 김신조가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68년 크리스마스. 술로 밤을 지새우며 진하게 파티를 마친 그에게 닥친 시련. 사실 몸무게 45㎏ 미만이어서 군면제였는데 12월26일, 김신조 사건으로 나이 서른을 앞두고 입대했다. 인제 관대리 3군단사령부 작전상황실 배치. 다음해에 육군본부 국악군악대가 창립됐고 이흥구를 비롯, 40여명이 투입됐다. 춤추는 이는 이흥구뿐이었다.
결혼은 71년 12월 제대후 번갯불에 콩볶듯 이뤄졌다. “제대후 안비취 선생의 한국민요연구회 총무로 활동하며 한국무용을 가르쳤어요. 당시 서울 충무로 3가 스카라극장 뒤 건물 3층이 학원이었는데, 건물 청소부 아주머니가 4층 사무실에 근무하는 아가씨를 소개시켜 주었죠. 데이트랄 게 있나요. 첫날 정릉에 놀러가고 며칠후 우이동 계곡에 갔어요. 1주일 동안 두 번 만나고 다음주에 결혼했습니다. 전 몸도 마르고 돈벌이도 시원치 않아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데, 하하하…”
부인 최경녀씨(57)와 결혼한 후 17번 이사해 서울 잠실 주공 2단지 13평 아파트를 구입했다. 당시 스승 김천흥의 집이 잠실이어서 근처에 집을 구한 것이다. 사실 이흥구는 돈과 거리가 멀다. 그나마 잠실 주공단지가 재개발되어 다소 넓은 아파트에 살게 되지만 그 집을 팔 것도 아니니. 남매를 두었는데 큰딸 명희씨(33)는 국립국악원 무용단원이고 아들 종우씨(30)는 삼성전자에 다닌다.
궁중무 기록의 교두보
그는 요즘 춤을 추지 않는다. 저술 작업 등 기록보존에 온 정열을 쏟고 있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전국을 돌며 지역마다 다른 춤사위를 채보했다. 국립국악원 재직 시절인 86년부터 95년까지 홀로 궁중무용 58종 가운데 36종을 채집·재현했다. “궁중무보는 시대적으로 변화가 많았어요. ‘정재무도홀기’ 등 한문 홀기를 한글로 풀고 춤동작으로 만들어 재현하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김보남에게 ‘장생보연지무’ ‘춘앵전’ 등을 배운 그는 ‘궁중무를 익히며 스러져 가는 궁중무용을 원형대로 보존하겠다’는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궁중무용 기록서가 후학들의 공부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현재 잘못 전해지는 궁중무용이 많은데, 그걸 바로잡아야 해요. 그래서 제가 나선 겁니다. 삼국시대 무용은 기록이 없어요. 고구려춤은 무용총의 벽화를 통해 짐작할 뿐이고 신라시대와 백제시대도 문헌에 전해지는 게 고작입니다. 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이왕직 아악부 시대까지의 무용사, 즉 한국궁중무용총서 전 48종을 모두 책으로 낼 겁니다. 올해에는 고려 후기춤이 책으로 나오고요.”
요즘은 고려시대 무보 ‘헌선도’를 완성하고 내년말까지 고려시대 의식무기록서 8종 전권을 완성한다. 문헌 그대로 모두 남기고 싶어 한문홀기를 한글로 해석한 후 무보도 그려넣었다.
“신라시대 궁중무용인 ‘선유락’의 경우 고려 후기부터의 기록만 전해지고 있어 안타깝죠. 그 이전의 기록을 찾으려 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답니다. 요즘은 외교통상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의 한국무용을 소개하는 책자를 제작 중입니다. 제가 이룬 작업에 후학의 노력으로 또 다른 내용이 추가되어야죠. 저는 그저 틀만 잡아놓는 사람입니다.”
궁중무용 관련 문헌을 중국에서 구입하기도 한다. 재작년에는 당나라 문헌을 굉장히 비싼 가격에 구입했다. 사실 중국고서점에서 책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우리와 관련된 문헌을 찾다보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보통 한권에 20만~30만원 하기 때문에 700만~800만원 정도 있어야 한다. 그나마 요즘은 각 고서점에서 그에게 좋은 물건이 나왔다고 연락을 해주어 발품파는 일이 수월해졌다고.
우리나라에서 궁중무용을 연구하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포스트 이흥구가 없다는 대목이 안타깝다. 특히 궁중무용을 지키는 남성춤꾼이 드물어 김보남·김천흥-이흥구로 이어지는 궁중무용은 이제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
“김보남 선생은 궁중무용 동작을 설명한 후 춤 고유의 냄새를 품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춤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언제 오셨는지 장구채를 우리에게 던지셨어요. 우리는 몸에 맞고 떨어진 장구채를 다시 집어 스승께 드리고 ‘너는 왜 그것밖에 못추냐’는 호통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젠 그런 스승이 없어요.”
이흥구는 96년 ‘무산향’을 춘 후 무대에 서지 않는다. 연 1회 열리는 인간문화재 공연에만 출연한다. 10년후 궁중무용총서 작업이 완료되면 각 지역의 춤을 집대성할 예정이다. 돌아갈 순 없지만 돌아볼 수 있는 춤의 역사를 빨리 품고 싶은 사람. 스러져가는 춤 고유의 냄새를 되찾고 싶을 뿐이다.
▶이흥구?
1940년 충남 보령 주포면 뒷골 6남매중 다섯째 출생
1955~61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 1기 졸업
1972~80년 고려민속예술학원 운영
1980~99년 국립국악원 근무
199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연화대합설무 기능보유자 지정
1999~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현 사단법인 대악회 이사장, 한국종합예술학교 객원교수
김보남·김천흥·한영숙 사사, 2006년 보관문화훈장
저서 ‘조선궁중무용’ Ⅰ·Ⅱ, ‘학연화대합설무’ ‘처용무’ 등
▲학연화대합설무?
애초 궁중에서 악귀를 쫓는 행사때 공연된 학무·연화대무·처용무 3가지 춤을 함께 붙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1971년 ‘처용무’와 ‘학무’가 따로 지정됐고, 93년 ‘학무’는 ‘학연화대합설무’로 명칭이 변경됐다. 두 마리 학이 춤추다 지당판의 연꽃을 쪼고 이어 연꽃이 열리면 두 동녀가 나와 연화대무를 추는 구성.
산조춤 유일한 계승자 김온경
산조춤 명인 ‘김진걸’
-“정신의 각혈 수없이 되풀이 했죠”-
정신의 각혈(각血)을 수없이 되풀이한 후 춤을 품을 수 있었다. 김진걸(81)의 각혈은 거룩한 제의(祭儀)였다. 오랜 세월 민족의 몸속에 켜켜이 쌓여 흐르는 피와 몸짓, 탄식과 웃음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구도의 길이었다.
# 누구도 하지 못한 무보작업을 고집하다
김진걸의 분신. 산조춤이다. 그는 1989년 후학을 위한 작업으로 ‘김진걸 산조춤 무보’를 제작, 일생의 역작을 이루었다. 당시 무용계에는 이렇다할 무보가 없었다. 특히 김진걸의 무보는 무보를 체계적으로 배운 무용이론가가 아니고, 40여년 동안 춤만 춘 명인이 결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무용계 최대 뉴스였다. A4용지 크기 403쪽 분량의 무보에는 수백 종류에 달하는 동작마다 사진과 기호를 연결하고 각 동작관련 설명·음악·시선방향·손과 발의 움직임·신체 방향 등이 자세히 기록됐다. 물론 엇동작이나 농현에서 오는 움직임, 호흡의 변화, 연결되는 동작들에 대한 표기는 자세히 표기할 수 없지만 3년동안 재 수정작업을 펼치며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산조춤을 기록한 작업은 무용사의 한 대목을 차지한다.
김진걸 무보작업의 열정은 춤을 반대한 집안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막으면 더한다지 않는가. 26년 9월 서울 적선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진걸은 두살때 어머니를 따라 황해도 백부집으로 갔다. 위로 6남매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셋째 형은 양자로 갔기에 홀로 성장했다. 아버지 김한승은 배재학당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였는데 경제력이 없어 황해도 군수인 백부 손에 자랐다. 그나마 다섯살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식 후 50년대 후반 부친을 따랐다.
# 끼로 똘똘 뭉친 반항아
10살까지 황해도에서 보낸 유년기는 부유했다. 군수집에선 잔치가 많았다. 백모는 동네사람들이 모이면 유성기에서 돌아가는 이동백 창에 맞춰 귀염둥이 진걸이 추는 춤을 자랑했다. 외갓집에 놀러가면 근처 굿당에서 무당들이 들고 추던 방울과 부채를 들고 놀았다. 재롱둥이는 10살까지 황해도 심상소학교에 다니며 학예회 사회를 보고 연극과 노래로 전교생의 인기를 독차지 했다. 정식 춤은 관직을 그만두고 서울 성북동으로 이주한 백부를 따라 서울 개성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배웠다. 연극반 교사 겸 담임인 이일권의 권유로 마스게임 시간에는 교단위에서 시범을 보였고 매주 한번씩 중앙방송국(덕수궁 근처) 아동극에 출연했다. 고려영화사가 제작한 ‘집없는 천사’의 주인공으로 뽑혔지만 학교측 반대로 출연이 무산되기도 했다. 당시 연극계 대부 황철은 그를 아들처럼 예뻐해 연극인들의 아지트였던 정릉 청수장에 데려가 그의 재능을 자랑했다. 누구의 피를 물림한 것일까? 어린 아이는 동양극장에 거의 매일 연극구경을 갔고 현 예총 자리의 곡마단 공연도 자주 갔다. 집에 돌아가면 그날 본 연극장면과 곡마단 춤을 거울보며 흉내냈다. 백부와 백모는 그런 아이를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 연극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3원하는 전차를 타지 않고 돈암동에서 서대문까지 걸어다녔다. 노동판에서 일당도 벌었다.
학업에 뜻이 없고 밖으로만 나도는 그는 집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백부는 불교, 백모는 천주교, 부친은 기독교 목사, 모친은 미신을 믿으며 집안의 갈등이 심해지니 진걸은 이래저래 집이 싫었다.
중학교를 세차례 낙방 후 백부의 도움으로 영창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미 공부는 뒷전. 최승희 전기와 니진스키 전기를 탐독하면서 무용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42년 4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시립도서관 게시판에 붙은 서울신문 한 귀퉁이 ‘무용연구생 모집’ 광고가 산조의 대가 김진걸을 만든 날. 명동성당 건너편 영보빌딩 5층에서 일본유학을 다녀온 30세 안팎의 현대무용가 이채옥의 첫번째 문하생이 됐다. 무용연구소에서 밤새고 들어오는 진걸을 집에서 그냥 두겠는가. 감금생활 끝에 이채옥의 부음이 들려왔다. 43년 계성소학교 동창인 고영숙 소개로 조택원 무용연구소에 입문했다. 같은 해 부민관에서 열린 조택원 무용발표회. ‘만종’ ‘가사호접’을 본 그는 춤만이 살 길이라 여겼다. 한국무용의 거목 조택원 집의 유리창 너머로 스승을 훔쳐보려 했지만 어린 진걸의 턱이 창턱에 닳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 조택원의 뒤를 잇는 한국무용계의 맏형
44년 백부의 뜻에 따라 재무부에 취직했지만 퇴근후에는 후암동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시끼연구소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무용을 배웠다. 46년 시공관에서 열린 장추화 무용발표회. 남방무용 ‘창조의 여신’을 본 후 신비한 춤 세계에 홀딱 빠졌다. 급한 마음에 동숭동 장추화 연구소에 등록했는데, 송범 조광 이인범이 연구생이었다. 최승희 제자로 30대 중반인 장추화는 김진걸과 송범을 똑같이 아꼈다. 두 사람(송범이 한살 위)은 거의 매일 명동 음악다방 돌체와 오아시스를 드나든 단짝이었지만 막강 라이벌이기도 했다. 달콤한 생활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장추화가 송범발표회를 마련해준다고 했다. 분했다. 샘났다. 충격을 딛고 사촌형 도움으로 연구소를 냈다. 김진걸의 고백. “송범에게 뒤지기 싫어 철없는 짓을 했어요. 연구소가 될리 없죠. 당시 스승을 잠시나마 배반했다는 죄책감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요즘은 캐나다로 이민간 송범이 너무 그립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재무부 직원이던 경력때문에 석달간 은둔생활을 했다. 그의 집을 찾아온 연극인 오사랑은 북한군에게 자신이 그 집 아들이라며 그의 생명을 구한 적도 있다. 그를 위해 과일을 사온 장주화와 송범도 잊을 수 없다.
1·4 후퇴때는 군영장이 나왔다. 송범 주축의 국방부 정훈군 소속 무용단원이 되어 대구행 피난열차를 탔다. 6일 동안 열차를 함께 탄 이들은 무용인 조동화(‘춤’발행인), 송범, 이월령, 김경옥, 양화영, 정혜옥, 주리 등이고 연극인 이해랑, 김동원, 오사랑, 최무룡, 백성희, 황정순, 복혜숙 등이었다.
무용단은 대구 키네마극장 공연후 석달동안 밤10시부터 두세시간 연습해 송범 안무의 ‘원술랑’과 김진걸의 독무를 올렸다. 공연후 김진걸은 육군 군예대 안무자겸 무용 교사로 들어간다. 그때 1~4기까지 200여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54년 대구 육군 군예대 강당에서 결혼한 부인 심영자(79)도 그중 한 사람. 중국 심양 출생인 심영자는 15세에 한국의 친지를 방문했다가 6·25전쟁으로 고향에 가지 못했다.
결혼 후 서울로 돌아오니 백부집은 파괴되고 백부와 백모도 돌아가셨다. 대구 피난시절 제자였던 배우 이빈화의 집 돈암동 2층에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당시 돈암동은 연구소의 메카. 한영숙·박귀희·김소희가 국악연구소를, 주리·정인방·김순성·강선영·박금술 등이 무용연구소를 냈다. 김진걸은 그때부터 50여년간 돈암동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했는데, 후반 30여년간은 부인이 운영했다. 한국무용협회 이사장과 한성대 무용과 교수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제자로는 임미자, 조흥동, 민준기, 이운철, 정명석, 김세일라, 문일지, 김숙자, 김경자, 심의식, 정금란, 조카딸 김수남 등 우리 무용계 중진들이 있다. 마지막 제자는 30년간 김진걸의 그림자로 춤외에 원고정리등 개인적인 용무까지 돕는 정창영이다.
# 벨벳한복을 입고 산조를 추다-한국무용계의 햄릿
57년 시공관에서 제 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무용극 ‘아들이 떠나는 날’(30분)과 ‘산조’를 추었다. 고전무용의 일대혁신이라는 평. 다음해 두번째 개인발표회에는 무용극 ‘깨어진 청자’(40분), ‘무너진 성터’, 김소월의 시를 주제로 안무한 ‘초혼’ 등을 올렸다. 한국무용과 발레를 접목하고 문학과 연극적 요소를 가미한 감각적인 공연이었다.
그의 무용생활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산조춤’은 53년 탄생됐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산조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순수하게 소통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키워드입니다. 제 산조는 여러 스승에게 배운 다양한 춤사위들을 아우른 작업인데, 승무·탈춤·무속춤 등을 모두 함축했어요. 새로운 산조를 시도하고 싶어 의상도 비로드로 만들고 버선 대신 맨발에 발레슈즈를 신고 추었습니다.”
벨벳으로 만든 한복의상은 김진걸만의 트레이드. 1960년대 초반 마음의 움직임을 고상하게 표현하고 싶어 ‘비로드’를 택했다. 한국무용사상 벨벳한복은 초유의 일. “나름의 멋이죠.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발레 ‘백조의 호수’를 보면 왕족들이 ‘비로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지 않습니까. 한국춤의 격조와 품위를 강조하기 위해 ‘비로드’가 제격이라 생각했습니다. 사계절내내 입어도 좋아요. 또 산조의 음율자체가 진중하기 때문에 비로드를 입어도 움직임이 생생히 살아있죠.”
새로운 시도는 벨벳의상뿐이 아니다. 73년 국내 최초로 한성대에 2부제 무용과를 개설해 역량있는 한국무용가들을 배출해왔다.
“집에서 ‘미친 놈’이라 욕해도 후회없이 춤혼을 불살랐어요. 아이도 낳지 않고 70년동안 춤만 추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언가 미완성인 것같고 숙제를 하지 않은 것 같아요. 번민을 잊기 위해 잠자리 머리맡에 98년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내 마음의 흐름’ 산조음악 CD와 성금련의 가야금산조 CD, 단행본 ‘우리 무용 100년’을 놓고 ‘나는 행복하다’고 되뇌입니다만…” 무대를 접은 대신 다세대 3층집 계단을 오르내리며 춤을 품고 사는 명무 김진걸.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원로가 걸어온 화려한 격정의 날들을 짐작이나 할까.
신들린 8분 ‘혼의 춤’ 아직도 생생
-故 한성준 제막식때 홀린듯 즉흥춤 새 영감 얻어-
“아니, 내가 왜 이러지! 이건 내가 아냐. 누군가 내 안에 들어왔다고!” 김진걸은 6년 전 경험한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1년 4월19일 안성 태평무전수회관 앞뜰에서 마련된 ‘고 한성준 춤비’ 제막식 현장. 우리나라 근대 전통 예술의 거목인 한성준 타계 60주년을 기념해 100여명의 문화·예술계 인사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한성준 춤비 건립을 축하하는 헌시낭독, 헌창, 축사, 경과보고 등이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사건(?)이 터졌다. 명무 한성준을 기리는 자리에 춤이 빠져서야 되겠느냐는 제안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고 축하객 중 김진걸의 헌무(獻舞)가 제격이라는 의견이 모아졌다.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축하 현장을 지키던 이들은 입을 모아 김진걸의 춤을 청했다. 마침 김진걸은 예의를 갖춘 두루마기 차림. 김진걸은 무엇엔가 홀린 듯 뜰 가운데로 나왔고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벌리고 발사위를 디뎠다.
음악반주도 기찼다. 행사 순서에 있던 오정숙 명창의 헌창을 위해 달려온 김덕수 사물놀이팀이 김진걸의 즉흥춤을 뜨겁게 받쳐주었다. 김진걸의 회상. “사전에 어떤 춤을 추겠다고 맘먹은 게 아니에요. 그저 축하손님이라 한복을 입고 갔는데…마치 신이 내린 듯, 제가 서 있던 자리에서 ‘덩더쿵’ 마음이 울리고 양 팔이 올라가더군요. 한성준의 혼령이 씌인 것처럼 말예요.” 한성준을 위해 춤을 헌정하겠다는 마음이 솟구쳤을 뿐이라고 김진걸은 고백한다. 즉흥무는 8분 동안 계속됐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보통 30분 길이의 춤인데, 그날 이후 8분 길이의 산조춤이 주 레퍼토리가 됐다. 그날의 흥분이 또 다른 산조춤 영역을 짚어 준 것이다.
‘산조’는 기악 독주라는 뜻. 1953년 성금연의 가야금 산조에서 춤 영감을 얻어 추기 시작했고 60년 ‘내 마음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김진걸류 산조를 발전시켰다. 그의 산조는 오른발과 왼팔 위주의 춤사위로 구성된다. 발사위가 은근하고 화려해 여성 무용수에게 인기. 그러나 남성 무용수는 남자답게 춤춰야 한다는 김진걸의 고집도 담겨 있다. 탈춤에서 볼 수 있는 오른쪽 다리 직각으로 세워들기와 왼팔 내뻗기 등의 사위가 그렇다.
김진걸의 산조는 40년 이상 명무로 인정받았지만 한성준의 ‘그날’ 이후 거듭 태어났다.
▲ 김진걸 약력
1926년 서울 적선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42년 이채옥 현대무용연구소 입문
1944년 길목 무용연구소 입문
1946년 장추화 무용연구소 입문
1959년 김진걸 무용연구소 개소
1951~53년 육군 군예대 무용안무
1954~75년 개인발표회 11차례
1955~56년 성신여고, 한성여중·고 강사
1961~74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1962~80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1978~83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75~92년 한성대 교수
1998~현재 전통예술원 교수
수상“ 대한민국 평화통일 문화상 대상(1983년), 제 7회 무용대상(1986년), 화관문화훈장(1987년), 예술문화 공로상(1988년) 등
피할 수 없었다. 도망치고 도망쳐도 달라붙는 운명. 왜 하필 춤인가. 아버지는 부산의 문화딜레탕트였다. 그 아버지 때문에 딸이 있었다. 김온경(69)은 아버지의 극성스러운 문화사랑을 호흡하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춤과 소리를 강요받았다. 가혹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 문중의 반대를 물리치고 기생춤을 배우다
# 문중의 반대를 물리치고 기생춤을 배우다
아버지 김동민은 양산 동면 대지주의 외아들이었다.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를 졸업했지만 대사헌을 지낸 부친의 얼을 잇기보다 풍류에 빠졌다. 할아버지 김순익은 낙동강 배에 쌀을 실어 매매하는 미곡상이었다. 아들 김동민이 가업을 이어야 했지만 ‘동경유학생’은 예인들 모셔다 소리듣고 춤을 배웠다. 동래권번과 한량들의 사랑방에 출입하며 멋쟁이 소릴 듣고, 6·25전쟁 직전 부산 최초로 민속무용연구소를 세워 문화를 공급했다. 부산에서 처음 권투를 배웠고 보성고보 학교대표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다. 일제강점기에 부산 부의원(현 시의원)을 지낸 과거가 부끄러워 그저 우리 전통춤 되살리는 일에 천착했던 것이다.
“복잡한 세상일이 싫으셨던 겁니다. 나라 잃은 한을 달래기 위해 문화계몽 운동인 국악부흥을 주창하셨습니다.” 당시 광대들 사이에선 ‘부산에 가면 김동민 집에 가서 놀아야 돈과 밥을 주고 경주에선 최부잣집에 가야 그럴 수 있다’는 말이 돌 정도.
5남매 중 맏이인 ‘온경 애기씨’는 독과외로 풍류를 익혔다. 당시 한국춤은 권번에서 기녀들이 추었다. 일반인이 추면 금방 기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큰일’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문중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온경을 한국춤에 입문시켰다. ‘한국춤=부산’이라는 등식을 이룬 주인공이니 그럴 만도 했다.
1939년부터 동래 권번에서 가야금과 춤을 가르친 무안출신 재인 강태홍(1893~1957)은 이들의 키워드였다. 권번에서 기생들과 어울리다 알게된 광대지만 아버지는 거리낌없이 집으로 불러들였다. 강태홍은 11살 애기씨에게 춤을, 마님께 가야금을 지도했다. 또한 대청마루에서 아버지가 강태홍에게 청하면 그 앞에서 춤과 소리를 하고 ‘개런티’를 받았다. 그때 강태홍은 아편중독자였다. 교습비와 개런티로 받은 돈의 용처는 뻔했다.
강태홍이 애기씨를 가르치고 집 문을 나서면 아버지가 애기씨 트레이너가 되어 그날 배운 굿거리춤, 산조춤, 승무 등을 복습시켰다. 춤을 시원치 않게 추면 매로 다스리며 훈련시켰다. 딸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춤추기만 강요했다. 아버지는 5남매에게 모두 강태홍의 춤을 배우도록 지시했지만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결국 맏딸 김온경만 남곤 했다.
“놀러가지 못하게 집에 잡아두고 춤만 추라고 하셨습니다. 하루종일 춤, 춤 하다보니 진저리치도록 춤이 싫어지더군요. 아버지께서 춤 시범을 보이면 따라하는 맛에 추었을 텐데, 저에게 연습을 강요하면서도 춤을 추지 않으셨죠. 양반은 남이 보는 데서 춤추면 안되는지….”
아버지는 온경의 춤에만 돈을 지출했다. 젊은 딸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입고 싶지만 아버지가 사주는 구제품이 전부였다. 새 옷을 입고 싶으면 어머니의 비자금으로 맞춘 옷을 친구 집에 맡긴 후 아버지 몰래 입고 다녔다. 당시 부산에서 기생 아닌 일반인으로 한국춤을 배운 이는 세사람뿐. 김온경, 동인병원 둘째딸, 음식점 주인 딸이 배웠는데, 김온경만 남았다.
# 춤추지 않기 위해 결혼 - 남편은 동생 김기수 전 검찰총장 친구
애기씨는 13살 때 춤발표회를 가질 만큼 부친의 혹독한 춤훈련을 견뎠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부친으로부터 춤 유산을 받은 그는 다시 자신의 큰 딸에게 춤물림한 것으로 모자라 조카까지 4대에 걸쳐 고단한 예술가의 삶을 물려주었다.
“춤이 있어 행복했고, 춤 때문에 아픔과 고통도 많았습니다. 1948년부터 춤을 배웠으니 이제 60년째 춤과 살아온 셈인데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회한이 있습니다. 춤 3대를 잇기 위해 운명처럼 불행의 씨앗을 받은 딸 여숙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김온경은 25세에 결혼해 3남매를 두었다. 부산 토박이지만 남편따라 10년동안 서울에 살며 윤여숙(44·한국무용가), 여정(41·패션디자이너)·여찬(37·회사원)을 낳았다.
무조건 춤만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결혼. 아버지는 결혼을 말렸지만 남동생 김기수(66·전 검찰총장)과 고려대 법대를 같이 다닌 국방부 사무관과 결혼했다. 춤에 진저리가 난 터라 아이 낳고 살림만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운명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꾸 아팠다. 위암 말기 상태로 위를 거의 모두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 잘 생긴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서울과는 연이 맞지 않는가보다’ 풍수지리를 탓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을 향했다.
부산으로 돌아가자 용기가 생겼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30대 중반에 이화여대 대학원 한국무용 전공. 부친의 제자였던 김매자 교수를 사사했다. 춤의 운명을 다시 몸에 붙이고 부산여대(현 신라대) 무용과 강사로 새출발했다.
“춤에서 도망치고 싶어 결혼했는데, 이혼 후 다시 춤을 찾으면서 건강도 되찾고 내 영혼도 숨을 쉬게 됐습니다. 무슨 팔자인지… 아버지는 지난 99년 89세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아버지께 무조건 복종만 하고 살아서인지 ‘좀 더 잘 해드릴 걸’ 하는 후회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2005년에 89세로 작고하셨고요.”
아버지의 강압으로 춤을 배우는 대신 대학입시는 춤과 관련되지 않은 학과를 택하고 싶었다. 마침 대학에 체육과는 있었지만 무용과가 없을 때여서 국문과를 지원했다. 6·25전쟁 때는 부산에 있던 연세대 분교에 다녔다. 그러나 연대가 서울로 되돌아간 후 ‘춤추라’는 아버지 고집 때문에 곧바로 서울유학을 강행할 수 없었고, 뜸 들이다 덕성여대 국문과를 다닐 수 있었다.
# 강태홍류 산조의 유일한 계승자
부산은 남성춤이 강세다. 특히 덧뵈기춤이 압권인데, 무용가가 추는 춤이 아니고 일반인이 출 수 있는 춤이어서 더욱 멋지다. 김온경은 강태홍에게 버선발로 추는 기방춤을 배우고, 부산 동래에서 문장원에게 덧뵈기춤을 배웠다.
그러나 이젠 한국춤의 메카인 부산에서도 한국춤이 힘을 잃고 있다. 사회적 변화로 생업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풍류꾼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일까. 기녀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기방춤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까.
“옛말이지만, 기방에선 ‘박색은 학습기생, 미인은 화초기생’이라는 말이 돌듯 예쁘기만 한 기녀보다 소리 잘하고 춤 잘추는 박색 기녀가 돈을 더 잘 벌었습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에게 옛 춤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뿐인가. 궁중무용도 전수되지 않고 사라진 춤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김온경은 85년부터 ‘동래고무’를 권번출신 김해월과 석주향에게 사사하고 93년 ‘동래고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지만, 춤미련이 많다. 당시 교방춤인 ‘동래고무’만 배우는 것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더 많은 춤을 배우지 못해 후회막급이다. 동래검무도 배우고 싶었지만, 두 스승이 모두 세상을 떠나 계승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강태홍에게 사사한 기방춤을 제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강태홍에게 굿거리춤, 입춤, 승무, 산조춤, 수건춤, 화랑무 등을 배웠다. 그중 명작무는 산조춤뿐. 살풀이춤이나 승무는 다른 사람도 추지만 강태홍류 산조 연주로만 출 수 있는 춤이 바로 산조춤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온경의 산조는 강태홍이 김온경에게만 사사한 춤이어서 의미가 각별하다. “제 유일한 스승은 강태홍 선생이십니다. 강태홍류 춤은 가야금 반주에만 맞추기 때문에 박자타기가 까다롭죠. 그런데도 악기없이 구음으로 ‘재쟁쟁, 쟁쟁…’ 소리내며 가르치셨어요.”
요즘 부쩍 스승과 아버지 생각이 절실하다고 했다. 사라지는 우리 춤을 보존해야 한다며 회초리들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그립다고 했다. “아버지께선 일제강점기의 울분을 기방에서 풀며 부러운 세월 보내셨지만, 사실 전통 지킴이로 부산지역의 춤활성화를 이루며 세상나들이 값을 하셨습니다. 선친의 유산이요? 아버지께 매맞아가며 춤을 배우고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김온경, 바로 나예요.”
김온경, 좋아서 춤춘게 아니다. 어릴 때는 참을성 많아 추었고 여자가 되고선 삶의 치유책으로 추었다. 그리고 이젠 아버지의 ‘유산’으로 남아 옛춤을 지키고 있다.
〈김온경 약력〉
“복잡한 세상일이 싫으셨던 겁니다. 나라 잃은 한을 달래기 위해 문화계몽 운동인 국악부흥을 주창하셨습니다.” 당시 광대들 사이에선 ‘부산에 가면 김동민 집에 가서 놀아야 돈과 밥을 주고 경주에선 최부잣집에 가야 그럴 수 있다’는 말이 돌 정도.
5남매 중 맏이인 ‘온경 애기씨’는 독과외로 풍류를 익혔다. 당시 한국춤은 권번에서 기녀들이 추었다. 일반인이 추면 금방 기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큰일’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문중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온경을 한국춤에 입문시켰다. ‘한국춤=부산’이라는 등식을 이룬 주인공이니 그럴 만도 했다.
1939년부터 동래 권번에서 가야금과 춤을 가르친 무안출신 재인 강태홍(1893~1957)은 이들의 키워드였다. 권번에서 기생들과 어울리다 알게된 광대지만 아버지는 거리낌없이 집으로 불러들였다. 강태홍은 11살 애기씨에게 춤을, 마님께 가야금을 지도했다. 또한 대청마루에서 아버지가 강태홍에게 청하면 그 앞에서 춤과 소리를 하고 ‘개런티’를 받았다. 그때 강태홍은 아편중독자였다. 교습비와 개런티로 받은 돈의 용처는 뻔했다.
강태홍이 애기씨를 가르치고 집 문을 나서면 아버지가 애기씨 트레이너가 되어 그날 배운 굿거리춤, 산조춤, 승무 등을 복습시켰다. 춤을 시원치 않게 추면 매로 다스리며 훈련시켰다. 딸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춤추기만 강요했다. 아버지는 5남매에게 모두 강태홍의 춤을 배우도록 지시했지만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결국 맏딸 김온경만 남곤 했다.
“놀러가지 못하게 집에 잡아두고 춤만 추라고 하셨습니다. 하루종일 춤, 춤 하다보니 진저리치도록 춤이 싫어지더군요. 아버지께서 춤 시범을 보이면 따라하는 맛에 추었을 텐데, 저에게 연습을 강요하면서도 춤을 추지 않으셨죠. 양반은 남이 보는 데서 춤추면 안되는지….”
아버지는 온경의 춤에만 돈을 지출했다. 젊은 딸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입고 싶지만 아버지가 사주는 구제품이 전부였다. 새 옷을 입고 싶으면 어머니의 비자금으로 맞춘 옷을 친구 집에 맡긴 후 아버지 몰래 입고 다녔다. 당시 부산에서 기생 아닌 일반인으로 한국춤을 배운 이는 세사람뿐. 김온경, 동인병원 둘째딸, 음식점 주인 딸이 배웠는데, 김온경만 남았다.
# 춤추지 않기 위해 결혼 - 남편은 동생 김기수 전 검찰총장 친구
애기씨는 13살 때 춤발표회를 가질 만큼 부친의 혹독한 춤훈련을 견뎠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부친으로부터 춤 유산을 받은 그는 다시 자신의 큰 딸에게 춤물림한 것으로 모자라 조카까지 4대에 걸쳐 고단한 예술가의 삶을 물려주었다.
“춤이 있어 행복했고, 춤 때문에 아픔과 고통도 많았습니다. 1948년부터 춤을 배웠으니 이제 60년째 춤과 살아온 셈인데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회한이 있습니다. 춤 3대를 잇기 위해 운명처럼 불행의 씨앗을 받은 딸 여숙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김온경은 25세에 결혼해 3남매를 두었다. 부산 토박이지만 남편따라 10년동안 서울에 살며 윤여숙(44·한국무용가), 여정(41·패션디자이너)·여찬(37·회사원)을 낳았다.
무조건 춤만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결혼. 아버지는 결혼을 말렸지만 남동생 김기수(66·전 검찰총장)과 고려대 법대를 같이 다닌 국방부 사무관과 결혼했다. 춤에 진저리가 난 터라 아이 낳고 살림만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운명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꾸 아팠다. 위암 말기 상태로 위를 거의 모두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 잘 생긴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서울과는 연이 맞지 않는가보다’ 풍수지리를 탓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을 향했다.
부산으로 돌아가자 용기가 생겼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30대 중반에 이화여대 대학원 한국무용 전공. 부친의 제자였던 김매자 교수를 사사했다. 춤의 운명을 다시 몸에 붙이고 부산여대(현 신라대) 무용과 강사로 새출발했다.
“춤에서 도망치고 싶어 결혼했는데, 이혼 후 다시 춤을 찾으면서 건강도 되찾고 내 영혼도 숨을 쉬게 됐습니다. 무슨 팔자인지… 아버지는 지난 99년 89세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아버지께 무조건 복종만 하고 살아서인지 ‘좀 더 잘 해드릴 걸’ 하는 후회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2005년에 89세로 작고하셨고요.”
아버지의 강압으로 춤을 배우는 대신 대학입시는 춤과 관련되지 않은 학과를 택하고 싶었다. 마침 대학에 체육과는 있었지만 무용과가 없을 때여서 국문과를 지원했다. 6·25전쟁 때는 부산에 있던 연세대 분교에 다녔다. 그러나 연대가 서울로 되돌아간 후 ‘춤추라’는 아버지 고집 때문에 곧바로 서울유학을 강행할 수 없었고, 뜸 들이다 덕성여대 국문과를 다닐 수 있었다.
# 강태홍류 산조의 유일한 계승자
부산은 남성춤이 강세다. 특히 덧뵈기춤이 압권인데, 무용가가 추는 춤이 아니고 일반인이 출 수 있는 춤이어서 더욱 멋지다. 김온경은 강태홍에게 버선발로 추는 기방춤을 배우고, 부산 동래에서 문장원에게 덧뵈기춤을 배웠다.
그러나 이젠 한국춤의 메카인 부산에서도 한국춤이 힘을 잃고 있다. 사회적 변화로 생업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풍류꾼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일까. 기녀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기방춤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까.
“옛말이지만, 기방에선 ‘박색은 학습기생, 미인은 화초기생’이라는 말이 돌듯 예쁘기만 한 기녀보다 소리 잘하고 춤 잘추는 박색 기녀가 돈을 더 잘 벌었습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에게 옛 춤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뿐인가. 궁중무용도 전수되지 않고 사라진 춤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김온경은 85년부터 ‘동래고무’를 권번출신 김해월과 석주향에게 사사하고 93년 ‘동래고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지만, 춤미련이 많다. 당시 교방춤인 ‘동래고무’만 배우는 것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더 많은 춤을 배우지 못해 후회막급이다. 동래검무도 배우고 싶었지만, 두 스승이 모두 세상을 떠나 계승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강태홍에게 사사한 기방춤을 제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강태홍에게 굿거리춤, 입춤, 승무, 산조춤, 수건춤, 화랑무 등을 배웠다. 그중 명작무는 산조춤뿐. 살풀이춤이나 승무는 다른 사람도 추지만 강태홍류 산조 연주로만 출 수 있는 춤이 바로 산조춤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온경의 산조는 강태홍이 김온경에게만 사사한 춤이어서 의미가 각별하다. “제 유일한 스승은 강태홍 선생이십니다. 강태홍류 춤은 가야금 반주에만 맞추기 때문에 박자타기가 까다롭죠. 그런데도 악기없이 구음으로 ‘재쟁쟁, 쟁쟁…’ 소리내며 가르치셨어요.”
요즘 부쩍 스승과 아버지 생각이 절실하다고 했다. 사라지는 우리 춤을 보존해야 한다며 회초리들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그립다고 했다. “아버지께선 일제강점기의 울분을 기방에서 풀며 부러운 세월 보내셨지만, 사실 전통 지킴이로 부산지역의 춤활성화를 이루며 세상나들이 값을 하셨습니다. 선친의 유산이요? 아버지께 매맞아가며 춤을 배우고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김온경, 바로 나예요.”
김온경, 좋아서 춤춘게 아니다. 어릴 때는 참을성 많아 추었고 여자가 되고선 삶의 치유책으로 추었다. 그리고 이젠 아버지의 ‘유산’으로 남아 옛춤을 지키고 있다.
〈김온경 약력〉
부산 초량에서 1938년 5남매 중 맏딸로 출생
1961년 덕성여대 국문과 졸업
1979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
1987년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과정 이수
1993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지정
주요 안무작 ‘학바위’ ‘삶의 집념’ ‘오작교’ ‘산절로 나도절로’ ‘날개’ ‘아름넋’ ‘광수무’ 등
1995년 동래 한량춤 발굴·재연
수상 제39회 부산광역시 문화상(1996), 제3회 신라학술상(2001),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표창장(2003), 제5회 부산예술상(2006) 등
저서 ‘경남가면무의 미적연구’ ‘한국민속무용연구’ ‘부산·경남 향토무용총론’ ‘동래고무총람’ 등
▲ 아버지 추강 김동민은
1961년 덕성여대 국문과 졸업
1979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
1987년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과정 이수
1993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예능보유자 지정
주요 안무작 ‘학바위’ ‘삶의 집념’ ‘오작교’ ‘산절로 나도절로’ ‘날개’ ‘아름넋’ ‘광수무’ 등
1995년 동래 한량춤 발굴·재연
수상 제39회 부산광역시 문화상(1996), 제3회 신라학술상(2001),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표창장(2003), 제5회 부산예술상(2006) 등
저서 ‘경남가면무의 미적연구’ ‘한국민속무용연구’ ‘부산·경남 향토무용총론’ ‘동래고무총람’ 등
▲ 아버지 추강 김동민은
1994년 생전 마지막 굿거리 춤을 추는 추강 김동민. |
추강 김동민(1910~99)은 한국의 디아길레프였다. 유럽 발레의 부흥사 디아길레프는 무용수들을 육성하고 명작발레를 만들어 발레의 르네상스를 이룬 주인공이다. 김동민도 1950년 부산 최초로 민속무용연구소(몇년후 경남국악원으로 개칭)를 개설하고 좋은 무용선생들을 수소문해 꿈나무들을 가르쳤다. 당시 1기 연구생은 남승막, 양정화, 심지영(본명 심옥자) 등이었고 김매자, 이영희 등이 뒤를 이었다. 추강은 61년부터 한국국악협회 부산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옛춤을 고증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동래야류 수영야류, 통영오광대 등 부산 경남지역에 전해지는 춤은 거의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체계화됐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 있던 이왕직아악부가 부산으로 피란갔을 때는 토성동 자신의 집에 차린 민속무용연구소에서 업무를 보도록 돕기도 했다. 그후 아악부가 용두산 공원으로 옮기면서 ‘국립국악원’ 현판을 올렸고, 추강은 당시 남성 한국무용가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고 김보남과 김천흥을 초빙해 무용강습회를 열었다. 52년 부산극장에서 무용극 ‘춘향전’을 제작해 공연했고, 53년에는 자신이 안무한 무용작품 ‘황창랑’ 무대에 성경린을 해설자로, 김천흥을 해금반주자로 초청했다. 94년에는 ‘김온경의 춤 4代展’에서 굿거리춤을 직접 추며 부산 남성춤의 백미를 과시하기도 했다. 부산시의회 의원, 국제양조장 경영, 동아조선주식회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지만 국악협회 지부장, 부산시 문화재위원 등의 직함이 그에겐 더 잘 어울렸다.
# 동래고무?
1986년 현 기능보유자인 김온경(金溫慶)이 발굴, 93년 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
고려 초기 여악(女樂)을 관장한 교방청(敎坊廳) 기녀들이 추었던 향악정재인 무고(舞鼓)가 동래감영의 교방으로 전래되면서 동래고무가 됐다. 진주검무·진주포구락무·승전무 등과 함께 교방무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 있던 이왕직아악부가 부산으로 피란갔을 때는 토성동 자신의 집에 차린 민속무용연구소에서 업무를 보도록 돕기도 했다. 그후 아악부가 용두산 공원으로 옮기면서 ‘국립국악원’ 현판을 올렸고, 추강은 당시 남성 한국무용가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고 김보남과 김천흥을 초빙해 무용강습회를 열었다. 52년 부산극장에서 무용극 ‘춘향전’을 제작해 공연했고, 53년에는 자신이 안무한 무용작품 ‘황창랑’ 무대에 성경린을 해설자로, 김천흥을 해금반주자로 초청했다. 94년에는 ‘김온경의 춤 4代展’에서 굿거리춤을 직접 추며 부산 남성춤의 백미를 과시하기도 했다. 부산시의회 의원, 국제양조장 경영, 동아조선주식회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지만 국악협회 지부장, 부산시 문화재위원 등의 직함이 그에겐 더 잘 어울렸다.
# 동래고무?
1986년 현 기능보유자인 김온경(金溫慶)이 발굴, 93년 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
고려 초기 여악(女樂)을 관장한 교방청(敎坊廳) 기녀들이 추었던 향악정재인 무고(舞鼓)가 동래감영의 교방으로 전래되면서 동래고무가 됐다. 진주검무·진주포구락무·승전무 등과 함께 교방무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다.
산조춤 명인 ‘김진걸’
-“정신의 각혈 수없이 되풀이 했죠”-
# 누구도 하지 못한 무보작업을 고집하다
김진걸의 분신. 산조춤이다. 그는 1989년 후학을 위한 작업으로 ‘김진걸 산조춤 무보’를 제작, 일생의 역작을 이루었다. 당시 무용계에는 이렇다할 무보가 없었다. 특히 김진걸의 무보는 무보를 체계적으로 배운 무용이론가가 아니고, 40여년 동안 춤만 춘 명인이 결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무용계 최대 뉴스였다. A4용지 크기 403쪽 분량의 무보에는 수백 종류에 달하는 동작마다 사진과 기호를 연결하고 각 동작관련 설명·음악·시선방향·손과 발의 움직임·신체 방향 등이 자세히 기록됐다. 물론 엇동작이나 농현에서 오는 움직임, 호흡의 변화, 연결되는 동작들에 대한 표기는 자세히 표기할 수 없지만 3년동안 재 수정작업을 펼치며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산조춤을 기록한 작업은 무용사의 한 대목을 차지한다.
김진걸 무보작업의 열정은 춤을 반대한 집안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막으면 더한다지 않는가. 26년 9월 서울 적선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진걸은 두살때 어머니를 따라 황해도 백부집으로 갔다. 위로 6남매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셋째 형은 양자로 갔기에 홀로 성장했다. 아버지 김한승은 배재학당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였는데 경제력이 없어 황해도 군수인 백부 손에 자랐다. 그나마 다섯살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식 후 50년대 후반 부친을 따랐다.
# 끼로 똘똘 뭉친 반항아
10살까지 황해도에서 보낸 유년기는 부유했다. 군수집에선 잔치가 많았다. 백모는 동네사람들이 모이면 유성기에서 돌아가는 이동백 창에 맞춰 귀염둥이 진걸이 추는 춤을 자랑했다. 외갓집에 놀러가면 근처 굿당에서 무당들이 들고 추던 방울과 부채를 들고 놀았다. 재롱둥이는 10살까지 황해도 심상소학교에 다니며 학예회 사회를 보고 연극과 노래로 전교생의 인기를 독차지 했다. 정식 춤은 관직을 그만두고 서울 성북동으로 이주한 백부를 따라 서울 개성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배웠다. 연극반 교사 겸 담임인 이일권의 권유로 마스게임 시간에는 교단위에서 시범을 보였고 매주 한번씩 중앙방송국(덕수궁 근처) 아동극에 출연했다. 고려영화사가 제작한 ‘집없는 천사’의 주인공으로 뽑혔지만 학교측 반대로 출연이 무산되기도 했다. 당시 연극계 대부 황철은 그를 아들처럼 예뻐해 연극인들의 아지트였던 정릉 청수장에 데려가 그의 재능을 자랑했다. 누구의 피를 물림한 것일까? 어린 아이는 동양극장에 거의 매일 연극구경을 갔고 현 예총 자리의 곡마단 공연도 자주 갔다. 집에 돌아가면 그날 본 연극장면과 곡마단 춤을 거울보며 흉내냈다. 백부와 백모는 그런 아이를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 연극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3원하는 전차를 타지 않고 돈암동에서 서대문까지 걸어다녔다. 노동판에서 일당도 벌었다.
학업에 뜻이 없고 밖으로만 나도는 그는 집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백부는 불교, 백모는 천주교, 부친은 기독교 목사, 모친은 미신을 믿으며 집안의 갈등이 심해지니 진걸은 이래저래 집이 싫었다.
중학교를 세차례 낙방 후 백부의 도움으로 영창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미 공부는 뒷전. 최승희 전기와 니진스키 전기를 탐독하면서 무용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42년 4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시립도서관 게시판에 붙은 서울신문 한 귀퉁이 ‘무용연구생 모집’ 광고가 산조의 대가 김진걸을 만든 날. 명동성당 건너편 영보빌딩 5층에서 일본유학을 다녀온 30세 안팎의 현대무용가 이채옥의 첫번째 문하생이 됐다. 무용연구소에서 밤새고 들어오는 진걸을 집에서 그냥 두겠는가. 감금생활 끝에 이채옥의 부음이 들려왔다. 43년 계성소학교 동창인 고영숙 소개로 조택원 무용연구소에 입문했다. 같은 해 부민관에서 열린 조택원 무용발표회. ‘만종’ ‘가사호접’을 본 그는 춤만이 살 길이라 여겼다. 한국무용의 거목 조택원 집의 유리창 너머로 스승을 훔쳐보려 했지만 어린 진걸의 턱이 창턱에 닳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 조택원의 뒤를 잇는 한국무용계의 맏형
44년 백부의 뜻에 따라 재무부에 취직했지만 퇴근후에는 후암동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시끼연구소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무용을 배웠다. 46년 시공관에서 열린 장추화 무용발표회. 남방무용 ‘창조의 여신’을 본 후 신비한 춤 세계에 홀딱 빠졌다. 급한 마음에 동숭동 장추화 연구소에 등록했는데, 송범 조광 이인범이 연구생이었다. 최승희 제자로 30대 중반인 장추화는 김진걸과 송범을 똑같이 아꼈다. 두 사람(송범이 한살 위)은 거의 매일 명동 음악다방 돌체와 오아시스를 드나든 단짝이었지만 막강 라이벌이기도 했다. 달콤한 생활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장추화가 송범발표회를 마련해준다고 했다. 분했다. 샘났다. 충격을 딛고 사촌형 도움으로 연구소를 냈다. 김진걸의 고백. “송범에게 뒤지기 싫어 철없는 짓을 했어요. 연구소가 될리 없죠. 당시 스승을 잠시나마 배반했다는 죄책감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요즘은 캐나다로 이민간 송범이 너무 그립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재무부 직원이던 경력때문에 석달간 은둔생활을 했다. 그의 집을 찾아온 연극인 오사랑은 북한군에게 자신이 그 집 아들이라며 그의 생명을 구한 적도 있다. 그를 위해 과일을 사온 장주화와 송범도 잊을 수 없다.
1·4 후퇴때는 군영장이 나왔다. 송범 주축의 국방부 정훈군 소속 무용단원이 되어 대구행 피난열차를 탔다. 6일 동안 열차를 함께 탄 이들은 무용인 조동화(‘춤’발행인), 송범, 이월령, 김경옥, 양화영, 정혜옥, 주리 등이고 연극인 이해랑, 김동원, 오사랑, 최무룡, 백성희, 황정순, 복혜숙 등이었다.
무용단은 대구 키네마극장 공연후 석달동안 밤10시부터 두세시간 연습해 송범 안무의 ‘원술랑’과 김진걸의 독무를 올렸다. 공연후 김진걸은 육군 군예대 안무자겸 무용 교사로 들어간다. 그때 1~4기까지 200여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54년 대구 육군 군예대 강당에서 결혼한 부인 심영자(79)도 그중 한 사람. 중국 심양 출생인 심영자는 15세에 한국의 친지를 방문했다가 6·25전쟁으로 고향에 가지 못했다.
결혼 후 서울로 돌아오니 백부집은 파괴되고 백부와 백모도 돌아가셨다. 대구 피난시절 제자였던 배우 이빈화의 집 돈암동 2층에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당시 돈암동은 연구소의 메카. 한영숙·박귀희·김소희가 국악연구소를, 주리·정인방·김순성·강선영·박금술 등이 무용연구소를 냈다. 김진걸은 그때부터 50여년간 돈암동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했는데, 후반 30여년간은 부인이 운영했다. 한국무용협회 이사장과 한성대 무용과 교수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제자로는 임미자, 조흥동, 민준기, 이운철, 정명석, 김세일라, 문일지, 김숙자, 김경자, 심의식, 정금란, 조카딸 김수남 등 우리 무용계 중진들이 있다. 마지막 제자는 30년간 김진걸의 그림자로 춤외에 원고정리등 개인적인 용무까지 돕는 정창영이다.
# 벨벳한복을 입고 산조를 추다-한국무용계의 햄릿
57년 시공관에서 제 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무용극 ‘아들이 떠나는 날’(30분)과 ‘산조’를 추었다. 고전무용의 일대혁신이라는 평. 다음해 두번째 개인발표회에는 무용극 ‘깨어진 청자’(40분), ‘무너진 성터’, 김소월의 시를 주제로 안무한 ‘초혼’ 등을 올렸다. 한국무용과 발레를 접목하고 문학과 연극적 요소를 가미한 감각적인 공연이었다.
그의 무용생활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산조춤’은 53년 탄생됐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산조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순수하게 소통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키워드입니다. 제 산조는 여러 스승에게 배운 다양한 춤사위들을 아우른 작업인데, 승무·탈춤·무속춤 등을 모두 함축했어요. 새로운 산조를 시도하고 싶어 의상도 비로드로 만들고 버선 대신 맨발에 발레슈즈를 신고 추었습니다.”
벨벳으로 만든 한복의상은 김진걸만의 트레이드. 1960년대 초반 마음의 움직임을 고상하게 표현하고 싶어 ‘비로드’를 택했다. 한국무용사상 벨벳한복은 초유의 일. “나름의 멋이죠.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발레 ‘백조의 호수’를 보면 왕족들이 ‘비로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지 않습니까. 한국춤의 격조와 품위를 강조하기 위해 ‘비로드’가 제격이라 생각했습니다. 사계절내내 입어도 좋아요. 또 산조의 음율자체가 진중하기 때문에 비로드를 입어도 움직임이 생생히 살아있죠.”
새로운 시도는 벨벳의상뿐이 아니다. 73년 국내 최초로 한성대에 2부제 무용과를 개설해 역량있는 한국무용가들을 배출해왔다.
“집에서 ‘미친 놈’이라 욕해도 후회없이 춤혼을 불살랐어요. 아이도 낳지 않고 70년동안 춤만 추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언가 미완성인 것같고 숙제를 하지 않은 것 같아요. 번민을 잊기 위해 잠자리 머리맡에 98년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내 마음의 흐름’ 산조음악 CD와 성금련의 가야금산조 CD, 단행본 ‘우리 무용 100년’을 놓고 ‘나는 행복하다’고 되뇌입니다만…” 무대를 접은 대신 다세대 3층집 계단을 오르내리며 춤을 품고 사는 명무 김진걸.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원로가 걸어온 화려한 격정의 날들을 짐작이나 할까.
신들린 8분 ‘혼의 춤’ 아직도 생생
-故 한성준 제막식때 홀린듯 즉흥춤 새 영감 얻어-
1970년대 초반 한국무용의 최고봉들이 분장실에 모였다. 오른족부터 김진걸, 이매방, 은방초, 고 한영숙, 김문숙, 강선영씨. |
음악반주도 기찼다. 행사 순서에 있던 오정숙 명창의 헌창을 위해 달려온 김덕수 사물놀이팀이 김진걸의 즉흥춤을 뜨겁게 받쳐주었다. 김진걸의 회상. “사전에 어떤 춤을 추겠다고 맘먹은 게 아니에요. 그저 축하손님이라 한복을 입고 갔는데…마치 신이 내린 듯, 제가 서 있던 자리에서 ‘덩더쿵’ 마음이 울리고 양 팔이 올라가더군요. 한성준의 혼령이 씌인 것처럼 말예요.” 한성준을 위해 춤을 헌정하겠다는 마음이 솟구쳤을 뿐이라고 김진걸은 고백한다. 즉흥무는 8분 동안 계속됐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보통 30분 길이의 춤인데, 그날 이후 8분 길이의 산조춤이 주 레퍼토리가 됐다. 그날의 흥분이 또 다른 산조춤 영역을 짚어 준 것이다.
‘산조’는 기악 독주라는 뜻. 1953년 성금연의 가야금 산조에서 춤 영감을 얻어 추기 시작했고 60년 ‘내 마음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김진걸류 산조를 발전시켰다. 그의 산조는 오른발과 왼팔 위주의 춤사위로 구성된다. 발사위가 은근하고 화려해 여성 무용수에게 인기. 그러나 남성 무용수는 남자답게 춤춰야 한다는 김진걸의 고집도 담겨 있다. 탈춤에서 볼 수 있는 오른쪽 다리 직각으로 세워들기와 왼팔 내뻗기 등의 사위가 그렇다.
김진걸의 산조는 40년 이상 명무로 인정받았지만 한성준의 ‘그날’ 이후 거듭 태어났다.
▲ 김진걸 약력
1942년 이채옥 현대무용연구소 입문
1944년 길목 무용연구소 입문
1946년 장추화 무용연구소 입문
1959년 김진걸 무용연구소 개소
1951~53년 육군 군예대 무용안무
1954~75년 개인발표회 11차례
1955~56년 성신여고, 한성여중·고 강사
1961~74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1962~80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1978~83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75~92년 한성대 교수
1998~현재 전통예술원 교수
수상“ 대한민국 평화통일 문화상 대상(1983년), 제 7회 무용대상(1986년), 화관문화훈장(1987년), 예술문화 공로상(1988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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