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는 유전자’ 로 튄 매클린톡 |
근대과학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는 ‘객관성’이고, 이는 절대 진리를 표방하는 근대과학이 정당성을 갖는 최고의 근거였다. 또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합해 평균치를 찾는데, 평균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예외로 처리하는 통계학적 이해는 대단히 효율적인 방법론으로 통용되었고, 이들을 다시 간단한 식으로 요약하는 재주를 발휘하는 사람은 훌륭한 과학자로 추앙받았다.
평균치는 곧 보편성이 되고, 여기서 어긋나는 개체는 왕따시킨다. 여기에 딴지를 걸다 왕따당하고 30년 넘는 세월을 ‘맛이 간 여자’로 살다 1983년 생리·이화학 분야에서 여성 단독으로는 노벨상을 처음 받은 그녀의 이름은 바버라 매클린톡(1902∼9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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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 진정으로 객관적이기 위해 ‘스스로를 잊는 연습’을 열심히 하던 매클린톡은, 학기말 시험 답안을 작성하다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객관성의 훈련’에 매진했다. 엉뚱하게도 ‘관찰하는 대상과 하나되기’의 경지에 빠져들곤 했던 그녀의 독특한 체험들은, 관찰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완전한 분리를 표방하는 근대과학적 방법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현미경을 통해 무언가를 보고 싶을 때, 분명 거기 존재하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내 안의 다른 것이 내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매클린톡은 주장했다. 그래서 먼저 내 안의 문제를 치워버리고, 다시 말해 진정으로 객관성을 확보한 뒤 다시 현미경을 들여다보면, 비로소 그 미세한 존재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더라!
“너무 낯설어서,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은 현상이라 해서 예외나 이탈 혹은 오염 정도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비밀을 푸는 열쇠들이 실은 거기 담겨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중요한 비밀은 늘 그런 곳에 숨어 있어요.”
그녀의 업적은 옥수수 세포 속의 유전자 중 원래 자리를 이탈해 옮겨다니는 ‘튀는 유전자’(jumping genes)에 대한 상세한 보고였다. 유전자는 중앙정보부 사령실에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며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존재라고 확신하던 사람들에게 “생명은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스스로를 조절한다”며 시시콜콜한 사연을 늘어놓는 그녀의 이야기는, 한동안 무시하는 게 상책인 ‘미친 소리’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유전자의 ‘자리바꿈’은 모든 생명에서 벌어지는 현상임이 그녀가 작업을 완료한 지 30여년이 흐른 뒤 확인된 것이다.
평소의 누추한 차림 그대로 노벨상을 받으러 온 그녀, 평생 독신이었지만 누구보다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여든한살 할머니 매클린톡은 또 한번 ‘그녀다움’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나 같은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건 참 불공평한 일입니다. 옥수수를 연구하는 동안 나는 모든 기쁨을 다 누렸습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였지만, 옥수수가 해답을 알려준 덕에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거든요.”
침대 매너를 바꾼 여자, 슈바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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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있고 미국에 <미즈>(Ms.)가 있다면, 독일엔 <에마>(Emma)가 있다. <에마>의 고향 쾰른은 그 이름부터 식민지란 뜻이다. 로마제국에서 특히 탐을 냈던 곳이다. 파리로 가는 중간기점이며 유럽공동체 본부가 있는 브뤼셀로도 바로 통하는 라인 강변의 요충지로, 여기서 로마제국 군사들은 원주민인 게르만 군사들과 대치하며 수시로 접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이때 생겨난 전설이 있다. 쾰른에 있는 열댓개 성채 중 ‘바이엔 탑을 점령한 자가 쾰른을 차지한다’.
현재 이 탑을 점령한 세력의 두목은 알리스 슈바르처다. 독일 여성운동의 대모이자 <에마>의 편집장인 슈바르처가 치른 숱한 전투 중 가장 혁혁한 성과를 이룬 두 전투로 일명 ‘슈테른 사건’과 ‘아주 작은 차이’를 꼽을 수 있다. 유명 여류인사 28명의 사진을 <슈테른>이라는 주간지 표지에 싣고 ‘우리는 낙태한 여자들’임을 세상에 공표한 1971년의 이 대형 스캔들을 계기로 독일 여성들은 몸에 대한 권리에 눈을 떴고, 제 몸에 대한 권리와 자의식을 확립한 여성들은 남녀관계의 새로운 이해를 구하며 가정과 사회의 부당한 관습에 대항했다. 왜곡된 인간관계의 본질을 바꾸는 시도를 통해 절대 바뀔 수 없을 것 같던 사회의 관행, 일상의 습관들도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차이>는 독일보다 25년 늦게 한국에도 소개됐지만, (유럽 남자들의 침대 매너를 바꿔줬다는) 소문이 퍼진 탓인지 독일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내내 이 분야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책에 쏟아진 언론의 비난 혹은 찬사는 슈바르처를 스타로 띄워주었다. ‘여자의 오르가슴을 위해 싸우는 여자’ ‘행복한 가정에 파탄의 씨앗을 뿌리는 여자’ 등으로 그녀가 퍼뜨리는 성에 대한 거짓 혹은 진실에 대부분의 언론이 시비를 걸어왔다. 스웨덴에서 알제리를 거쳐 한국에서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의 ‘개인적 운명’이라는 것이 가부장 사회가 유도하는 ‘보편적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그녀의 정치적 소신을 확인시켜준 실증적 실험이기도 했다.
어느덧 이순이 넘은 슈바르처는 상업학교 출신으로 지역신문의 프리랜서를 거쳐 독일 최고의 저널리스트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자 ‘여성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성’답게, 그녀가 거처하는 바이엔 탑 입구에는 “‘우리 알리스’를 만나야 한다”며 초인종을 누루는 인파가 하루에도 스무명 이상 몰려와 줄을 선다. 그녀의 한 말씀이면 국회에 입성할 수 있다니 어떻게든 그녀와 줄을 대려는 정치 지망생도 상당수 끼어 있다고 한다.
알리스가 지금 벌이는 전투? 가부장제 최후의 신경증으로 그녀가 진단한 포르노 산업, 왜곡된 ‘성 해방’과 상업주의가 결탁한 이 여성 학대의 최전선에서 그녀는 오늘도 여자와 남자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명의 땅을 확보하겠노라 호언하며 맹렬히 싸우고 있다.
‘바우덕이’ 신기에 자지러져요
오래전 입담 좋은 이웃 할머니한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어린 시절 남사당패가 들어오면 마을이 얼마나 떠들썩하고 신이 났던지. 하지만 그 패거리는 워낙 짐승이나 다름없는 족속이라 아이들을 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니 가까이 가면 큰일 나는 거였다고. 이들은 특히 지배층의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에서 풍속을 해치는 패륜집단으로 묘사되는데, 그야말로 불가촉천민인 동시에 요즘 말로 한류 스타의 잠재 세력이기도 했던 것 같다.
1848년 유럽 대부분의 큰 도시에서 혁명이 발발해 수많은 왕조가 무너지고 코뮌이 수립됐으며 바리케이드 곳곳에서 인간의 평등이 제창된 해, 레닌과 마오쩌둥, 호치민과 카스트로에서 체 게바라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숱한 혁명가들의 심장에 불을 놓았던 인류 역사상 가장 도발적이고 선동적인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해, 세도정치가 극성을 떨던 조선왕조의 얼굴 없고 이름 없는 천민으로 출생한 우리들의 언니 바우덕이는 경기도 안성의 청룡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던 중 다섯살 때 누가 잡아갈 것도 없이 머슴이던 아비가 병이 나 남사당에 넘겨졌는데, 스님들 어깨 너머로 배운 염불을 외면 구경꾼들이 자지러지며 넘어갔다니 타고난 끼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바우덕이는 열다섯 나이에 여자로는 처음으로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어 외줄을 타는 허궁잡이 인생을 살기 시작해 데뷔 3년 뒤인 1865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기예를 뽐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 당상관 벼슬에 해당한다는 옥관자를 받을 만큼 꼭두쇠치고는 최고의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한다. 뛰어난 미모와 기량으로 남사당패의 전성기를 이끌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의 신기에 가까운 끼와 재능 그리고 애잔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남사당 풍물놀이는, 세월만 잘 탔으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진출해 장나라나 보아 정도의 몫은 너끈히 해냈을 터다. 허나 전국을 무대로 공연하며 떠돌다 스물셋 되던 해, 그녀는 폐병을 얻어 요절하고 말았다. 2000년부터 안성시에선 매해 10월 ‘남사당패’란 이름을 ‘바우덕이’로 바꿔버렸던 그녀의 예술혼을 기리는 바우덕이 축제를 열고 있다. 옛부터 흘러온 노랫가락은 애간장을 녹인다. “덕아 덕아 바우덕아, 바람에 손목 잡혀 이 세상에 왔느냐/ 길 따라 가도 편히 못 가는 인생, 어찌하여 너는 외줄을 타려 하느냐/ 청룡사 푸른 하늘 멍텅구리 구름같이, 갈 곳 없어도 남사당이 좋아/ 바람 부는 청춘아….”
알렉산드라, ‘여성 여행’에 살다
독일 녹색당의 상징이던 페트라 켈리가 비운의 죽음을 맞았을 때,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1868∼1969)의 전기가 꽂혀 있었다. 1924년에 티베트 라싸를 찾은 최초의 서양 여성 알렉산드라는 어려서부터 어딘가로 떠나는 걸 좋아해 20대 때 인도를 시작으로 평생 구도의 여행을 계속했다. 무정부주의자, 아니 국가 권력의 폐해를 혐오하는 평화주의자였던 그녀는 파리와 브뤼셀 등에서 동양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고 인도·티베트·터키·중국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 수많은 글과 책을 쓰는 한편,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는 등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며 철학적 이상을 꿈꾸었다.
요즘은 길 떠나는 여성이 많아져 ‘여성 여행’은 새로운 문화로 정착되고 있다. 여성 여행사에서는 여성 전용 순례지를 개발해 안내하고 여성 전용 호텔에서는 아이를 맡아 돌봐주는 등 친절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런 ‘여성의 여행’은 바로 그녀에게서 시작됐다는 생각이 든다. 영웅호걸을 따르거나 민족의 대이동을 따라 간 여행들은 대부분 뭔가를 손에 얻기 위한 정복의 목적을 가진 것인 데 견줘, 그녀의 여행은 버리고 사는 삶의 자유와 그것의 고귀함을 깨닫는 작업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3년 넘은 사람은 평생 치유할 수 없는 향수병에 걸리고 만다. 평생 나그네처럼 떠돌았던 알렉산드라는 100년 하고도 10개월을 살았으니, 80년 가까운 세월을 향수병에 시달렸을 것이다. 외로움과 두려움을 여정 삼아 그녀가 유럽에서 아프리카, 인도에서 중국으로 헤매다 드디어 영원한 그리움의 원천, 티베트로 발길을 돌린 까닭도 이런 향수병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50대 중반 그녀는 일본을 거쳐 합천 해인사와 금강산까지 먼 길을 돌아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금단의 땅 티베트에 발을 들인다. 당시만 해도 티베트는 외부 세계와 교류가 없던 터라 10여년에 걸친 5번의 시도 끝에 그녀가 여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파리 센 강변에 모여 살던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흥분시켰다.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은 ‘서양의 뿌리인 인도와 동양의 뿌리인 티베트’라는 식으로 요약돼 알렉산드라가 물꼬를 튼 순례의 길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행에서 즐거운 일 중 하나는 ‘변장’을 통해 나를 실험하는 행사다. 망명 중인 정치범이라고 둘러대거나 실성한 사람 노릇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탁발 순례를 나선 시골 노파 행세를 하며 3천km나 되는 길을 걸어서 여행했다. 여행 중에 간혹 장난기가 발동되면 그녀는 큰 소리로 다음 구절을 읊었다 한다. “직 메 날졸마 가.”(난 두려움을 모르는 여성 수행자)
레즈비언의 큰언니, 사포
사포는 남성 중심의 그리스 사회에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여성 중 하나다. 기원전 617년 레스보스섬에서 태어나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을 소유한 부모님 밑에서 다양한 재능을 키운 그녀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정치적인 소요에 휩쓸려 시실리섬으로 귀양을 떠나게 됐다. 20대 후반 고향에 돌아와 사투리로 글을 쓰기 시작한 한편 소녀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자신과 딸아이의 생계를 꾸린 듯하다. 기타리듬에 운율을 맞춰 선생님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달콤하고 열정적인 서정시를 낭송하면 소녀들은 온몸을 떨고 환호하며 자신들의 감성과 지성을 깨우치고 고양되었을 터다.
남자 선생님이 남학생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전쟁에 나가서는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울 사나이가 되는 법과 열변을 토하며 대중을 사로잡는 수사법을 가르치던 시절, 사포는 비슷한 작업을 한결 에로틱하고 감성적인 방법으로 여학생들에게 행하는 한편 자신의 시를 통해 남성들까지 사로잡아 무장 해제시켰다. 시인이라면 경멸했던 플라톤조차 그녀의 시에 감동을 받고 열 번째 뮤즈라 칭송했으며, 로마의 숱한 시인을 거쳐 영국의 에즈라 파운드, 독일의 슐레겔 형제, 프랑스의 보들레르에게도 절대적 찬미의 대상이며 여신과 같은 존재로 숭앙받던 그녀에겐 한편, 여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레즈비언’(lesbian)이란 말이 따라다닌다. 이는 원래 레스보스섬 사람이란 뜻이지만, 사포가 그곳에서 여성들을 키우면서 동성애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여고동창 아줌마들이 곗돈 모아 여행 떠나는 들뜬 분위기, 유럽에서 이런 무리를 만난다면 이건 틀림없는 레즈비언 집단이지만, 우리로선 그저 정겹고 허물 없는 여자친구들일 뿐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끼리도 약속하고 몸단장 마친 뒤에야 어울림이 가능한 유럽 풍토에서, 혈연이나 지연이라도 얽힌 듯 너나 없이 어울리는 여성전용 카페나 술집, 식당이나 호텔의 분위기는 우리에겐 특히 친숙하고 동양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성적 정체성 혹은 사회적 편견으로 고민하는 레즈비언은 상당수 있고, 10여년 전부터 국내에도 레즈비언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맞서기 위해 ‘끼리끼리’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최근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 이름을 바꾸고 좀더 적극적 활동으로 ‘여성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지켜가겠노라 선언했다. 모든 차별과 억압의 종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레스보스섬의 사포는 영원한 힘의 원천이며 자랑스런 큰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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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숄, 조국을 경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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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백성 대개가 배고픔으로 고통받던 시절, 낭만과 자유와 고독을 읊조리며 정신의 풍요로움으로 그 따위 건 싹 잊으라던 베스트셀러 작가 전혜린이 팔아먹은 뮌헨의 슈바빙, 그러나 60여년 전 그 동네를 지배한 정서는 ‘끔찍한 공포’였다.
암스테르담 어느 다락방에서 열두살 먹은 소녀 안네 프랑크가 고사리 손으로 일기를 쓰며 그 공포를 기록하던 시절, 슈바빙이 시작되는 뮌헨대학 본관, 안네보다 여덟살 위였던 조피 숄 언니는 ‘히틀러 타도!’를 꿈꾸며 “네 심장을 둘둘 싼 무관심의 덮개를 찢어버려라! 더 늦기 전에 어서 마음을 굳혀라!”로 시작되는 전단을 찍어 돌렸다. 이를 지켜본 경비는 쪼르르 비밀경찰에 알렸고, 당장 사형선고를 받은 그녀는 오빠 한스와 함께 사흘간 심문 받은 뒤 처형됐다.
아인슈타인과 괴테, 빌리 브란트에 이어 가장 위대한 독일인으로 선정될 만큼 이들 남매는 나치독일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는 21세기 독일 국민의 긍지로 꽃피어, <조피 숄-희망과 저항>이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돼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의 화제작이 되기도 했다.
히틀러 유겐트의 단원이 되었다고 환호하다 금세 황당하고 엄격한 규율과 괴상망측한 말투에 질겁한 조피는 얼른 몸을 빼고 여러 궁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대입을 위한 필수과정 ‘제국근로복무’를 피해 좀더 긴 기간 농사짓고 유치원에 가서 봉사하는 대체복무 정도였다. 이 무렵 그녀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겁먹게 하는 이런 일들이… 제발 조국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호소가 적혀 있다.
요즘 우리는 이웃 일본에게 “독일 좀 배우라”고 입을 모으지만, 그 나라는 원래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이웃 프랑스나 폴란드나 영국에 비해 지극히 미련하고 아둔하고 게다가 얼마나 열등감이 지독했으면 히틀러란 인물이 나와 온갖 미치광이 짓을 벌여도 좀비들처럼 멍한 상태로 보고만 있었을까. 하지만 숨소리라도 함부로 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시절, 저급한 영혼들 모두 쥐가 되고 새가 돼 이른바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좀먹는 불순세력을 고발하고 색출하던 시절, 암흑 속에 촛불을 켠 저항 그룹도 있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백장미’란 이름의 독서클럽이었다.
1970년대 우리와 닮은 상황을 차분하게 전해주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책이 있다. 조피의 큰언니 잉게 숄이 기록한 이 책의 주인공인, 1921년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조피는 재주 많은 아이였다. 소설은 물론 철학도 즐겨 읽고, 음악에도 탁월했고, 그림 솜씨도 뛰어나 일기 곳곳엔 범상치 않은 스케치들도 눈에 많이 띈다. 순수하고 총명한 그녀를 모두의 자매로 삼고 싶어하는 독일 대중의 정서는 요즘 한참 뜨는 옌볜처녀 문근영을 향한 우리들의 홀림과 무척이나 닮은꼴이다.
딱한 여자, 베티 프리단
한국 주부들이 애들 밥 안 굶기고 학교 보내는 일에 허리가 휘던 1960년대, 미국 주부들은 침실을 치우고 시장을 보고 애들 과외활동을 따라다니고 집에 돌아온 남편 곁에 누워 끝없이 떠오르는 이런 물음과 싸워야 했다. “이게 정말 행복일까?”
내 선배 하나는 나이 마흔이 넘어 대학 동급생으로부터 따뜻하고도 애절한 러브레터를 받았다. 편지 쓴 이가 누구였는지 10년이 흐른 지금도 알 길이 없지만 중년이 된 자신을 20대의 ‘남성’ 하나가 ‘여성’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황홀한 충격을 계기로, 더 아름답게 자신을 돌보고 더 적극적으로 세상에 뛰어드는 쪽으로 “인생을 바꿨다” 한다.
베티 프리단에게도 이렇게 ‘인생을 바꾸는 충격’이 있었으니, 그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었다. 잘나가는 남편과 세 아이를 뒷바라지하는 행복한 주부였던 그녀는 이 책을 읽고서 침대로 기어들어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고, 파출부에게 살림을 맡긴 뒤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세상이 어떤 술수로 여성을 신비화해 길들였는지를 추적해, 마흔 무렵 <여성의 신비>라는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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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현모양처라는 중산층 여성의 지배적 문화영상을 여성의 경험으로 해부하고 비판한 이 책은 앨빈 토플러의 표현대로 “역사에 방아쇠를 당겨” 수많은 중산층 주부에게 ‘인생을 바꾸는 충격’이 되었고, 그녀는 1960년대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로 추앙받았다. 프리단이 ‘이름 없는 병’이라 부른 증세를 달래기 위한 여성들의 정체성 찾기는 교육의 확대와 취업을 위한 법률 및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고,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70년대 급진적인 혹은 세대차가 나는 후배들과 갈등을 겪던 그녀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만사가 귀찮아 혹은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 손주나 돌보는 할머니로 “나, 돌아갈래!”라는 선언을 해 많은 이들을 놀래키더니, 90년대에는 고독하고 처량한 ‘나이 듦’의 문제에 천착하며 <노년의 샘>이란 책을 펴냈다. 80을 훌쩍 넘긴 그녀의 요즘 활동을 보면, 죽음과 삶을 이분하는 유대-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정말 몹쓸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녀가 안내하는 ‘행복한 노년 삶’에는 검버섯과 주름 없애는 약을 비롯한 각종 비법을 담고 있고 나이 드는 것과 죽음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1921년 같은 해 태어났지만 스물 초반에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 독일의 조피 숄이 순수한 열정을 지닌 영원한 청춘으로 기억되는 데 견줘, 자유주의 미국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유복한 주부에서 미국의 역사를 흔드는 투사로 변신했던 그녀가 세월이 갈수록 딱해 보이는 것은 수명만 자꾸 늘리는 현대의학의 맹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연륜이 되고 지혜가 되기 위해, 우리의 인생을 바꿀 사건은 한 10년에 한번씩은 벌어졌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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