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제일의 만능엔터테이너 ‘김수악’
강산 최고무(最高舞)는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쇠잔한 육체에서 자꾸만 춤이 터져나오니, 병상에 누운 몸은 어쩌란 말인가.
병원과 집을 몇 달 걸러 오가며 몸을 추스르지만 무대와는 점점 멀어지는데, 입에선 소리가 터지고 두 팔과 가슴은 소리에 맞춰 벌써 가락을 타고 있지 않은가.
# 70년을 해도 족함이 없는 전통춤
춘당(春堂) 김수악(81)을 몇 번의 전화 약속 끝에 만났다. 진주 엠마우스 요양병원에서 만난 그는 서울에서 내려간 제자들의 문안을 받고 있었다. 춤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당부로 부족했던지 원미자씨(김수악 전통춤 보존회장)에게 손수건을 달라 했다. 꽃무늬 손수건은 제자 김경란씨의 손에 들려졌고 침상의 스승은 구부러진 등을 추슬렀다. 긴장하는 제자. 스승은 컵라면용 나무 젓가락을 쫙 갈라 양손에 쥐고 침대에 놓인 식탁을 두드리며 슬그머니 장단을 잇는다. 즉흥 레슨이다. “띠리리 릿띠~ 허이 두드드 둥둥” 앞 소리는 젓대고 뒷소리는 가야금 선율. 스승은 악기 소리를 흉내내는 구음으로 엄격한 장단을 더했다. 어쩌랴. 제자, 쑥스러워하면서 병실에 한바탕 굿거리춤을 풀어놓는다. 이제 스승의 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스승의 한 마디 구음, 한 자락 춤사위가 나올 때마다 제자들은 안타까운 마음만 더하다.
“선생님께 배우기 힘들어요. 한 동작 한 동작 다듬어 정형화하시지 않고, 순간순간 감정이 터져나오는 대로 즉흥춤을 추시니까 저희는 매번 달라지는 춤을 따라해야 하거든요. 물론 다양한 춤사위를 배울 수 있어 좋긴 하지만….”
‘김수악 앞에만 갔다오면 춤이 달라진다’는 말이 그냥 떠도는 말이 아니다.
아들 김인권씨(54·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장)의 귀띔. “10년 전 오른쪽 골반을 다치셨는데, 지난해 10월에는 춤추며 앉는 순간 왼쪽 골반을 다쳐 5개월 동안 입원하셨죠. 이번에는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하셨습니다. 치아도 상태가 좋지 않아 틀니를 하셔야 해요.” 무역업을 하던 아들은 노모 수발을 들기 위해 사업을 접고 ‘춘당 김수악 전통춤보존회’ 실무위원장을 겸하는 등 남은 인생을 전통춤에 걸었다. 다시 아들의 증언. “어머님께선 예술가의 자존심을 제일로 치십니다. 얼마 전에는 TV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중계방송차가 몇 시간 동안 집 앞에서 대기 중인 데도 사전에 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대문을 열지 않으셨어요. 결국 중계방송차는 돌아갔고요.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모두 쏟아야 하는데, 갑자기 춤을 출 순 없다는 주장이셨죠. 무대에서 10분 동안 춤추기 위해 5시간 동안 단장하고 무대에 서시는 분이니까요.”
기자가 병상의 기수악을 촬영하려 하자 춘당(春堂) 김수악은 ‘사진 찍지마’ ‘안돼’ 하면서도 연방 머리를 매만진다. ‘5시간 단장’의 습관이 무섭다.
# 강산 제일의 춤, 강산 제일의 구음-가무악 일체의 만능 엔터테이너
김수악은 함양군 안의읍에서 김종옥과 유몽길의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순녀. ‘수악’은 집에 들른 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린 순녀를 본 후 명이 짧다며 ‘목숨 수, 뫼뿌리 악’으로 개명해주었다. 큰 언니 김취란은 가야금의 명인이며 황병기의 스승으로 유명한 예인이다. 순녀의 아버지는 만석꾼 집안의 장남이었다. 대를 이어야 할 큰 아들. 한량인 아버지는 결국 재산을 떼어받고 본가를 나왔다. 집에선 늘 유성기판을 틀어놓고 거문고와 피리도 수준급이었다. 집에 찾아오는 풍류객들의 분위기가 어린 순녀의 몸에도 익숙했다. 어느날 손님이 안겨준 양금은 여섯살 순녀가 김수악으로 변신한 계기였다. 순녀는 처음 만져보는 양금을 3개월도 안돼 익혔다. 남들은 7개월 걸려야 타는 악기였다.
일곱살에 진주로 이사한 순녀는 9살부터 진주권번에서 본격적으로 춤, 소리, 악기를 배웠다. 판소리는 유성준·정정렬·이선유·김준섭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다섯 바탕을 사사했다. 구음은 전두영에게 배웠고, 강태홍·김종기·박상근 등에게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춤은 김옥민을 시작으로 한성준의 ‘검무’, 최완자의 ‘굿거리춤’ ‘검무’ ‘입춤’을 물려받았다. 순녀는 ‘여란(麗蘭)’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모두 ‘애란’이라 불렀다. 진주의 애란은 영남 제일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가야금병창, 장구, 구음, 검무, 굿거리춤 등 다재다능했다. 애란이 끼지 않으면 예능이 될 수 없었다.
“젊을 때 내 얼굴 보기 힘들었어요. 중요한 자리에는 인력거가 날 데리러 왔어요. 내 창과 춤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당시 ‘검무’는 4명이 추었는데 스승 최완자, 박국엽, 홍채자, 이현이 추다 그후 ‘사 검무’는 김수악을 비롯해 최예분, 이윤례, 김채옥이 함께 했다.
노랫말도 구성지게 만들었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어이하리 어이할꺼나 부모님께 불량하여~”로 시작하는 ‘논개의 얼’을 작곡·작사하기도 했다.
8년 연상인 김영조(진주 청과조합장 역임)와 결혼 후에는 춤을 접었는데 조용한 세월은 얼마가지 못했다. 1946년 의기 논개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 ‘대춘향전’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49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 연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냥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6·25 전쟁 후 아비를 잃고 60년대 초반 남편을 잃은 후 시골 판에 묻혀 살던 그에게 나라에서 인간문화재가 될 것을 권유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권번에서 배웠던 ‘검무’를 복원·계승하라고 했다. 과거를 알리기 싫었지만 전통춤 계승이라는 정부측 대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967년 당시 월 3만원씩 줄 테니 ‘검무’로 문화재지정을 받으라는 거예요. 그때는 문화재고 뭐고 귀찮기만 해서 싫다고 했죠. 결국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됐지만, 나는 손에 칼을 비롯, 뭘 들고 추는 게 재미없어서 그리 반갑지 않더라고요.”
69년부터 목포 유달국악원, 71년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고 73년 진주 민속예술원을 설립했다. ‘강산 제일무’라는 별칭은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교방굿거리춤’을 추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최완자의 ‘굿거리춤’에 김녹주류의 ‘소고춤’을 이어붙여 만든 김수악만의 브랜드 ‘진주교방굿거리춤’. 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고 김수악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굿거리춤은 발디딤과 손놀림 등 모든 춤의 원동력이라 그것부터 배워야 해요. 교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생춤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마당에서 추는 군무와 달리 실내에 서서 추는 입춤이어서 동작이 아담하고 기교가 뛰어나죠.” S라인의 손목사위도 김수악 굿거리춤의 특징이다.
#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
26세와 33세에 남매를 낳았지만 춤이 더 귀했다. 아들도 개천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만큼 춤내림을 했는데, 어미가 아닌 이모에게 춤을 배울 만큼 어미는 바빴다. 다재다능한 게 죄였다.
“60년대부터 춤을 가르치는데, 녹음한 곡은 다양하지도 않고 듣기도 민망할 만큼 시원치않았어요. 그렇다고 악사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호남에는 소리꾼과 악사들이 많은데 영남은 사정이 달랐어요. 결국 제가 장구치고 입으로 소리 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려니 악기 특성별로 소리도 달리 내야 했어요. 어릴 때 판소리 다섯바탕을 남선생에게 배우면서 호방한 동편제를 익혔기 때문인지, 장조와 단조의 구음을 자유롭게 구사했지요.” 춤은 경상도, 소리는 전라도라 했지만, 본향의 최고 소리꾼들도 김수악의 구음을 제일로 쳤다.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지 않는가. 어떤 이들은 김수악이 유성준의 동편제 판소리로 인간문화재가 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국에서 공연되는 굿거리춤에는 녹음된 김수악의 구음이 단연 최고다.
개천예술제에서 매년 논개를 기리기 위해 공연되는 ‘논개 살풀이춤’도 김수악의 작품이다. 왜장을 상징하는 빨간 수건과 민중을 의미하는 노란 수건을 양손에 들고 추는 논개 살풀이춤은 기존 살푸리춤과 다른 춤사위를 자랑한다. 논개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에 춤의 원형대로 계승되는 한성준의 살풀이춤과 달리 김수악의 창작 춤사위가 중심을 이룬다.
“예술은 마음, 정신, 인내, 공력, 한(恨), 멋, 혼이 어우러져야 해요. 춤도 내가 추는 게 아니고 몸이 추도록 해야 합니다. 맺고 푸는 호흡의 예술이 춤이니까요.” 명무는 춤이야기에 빠져 아픈 줄도 모른다. 침대에 앉은 채 두 팔을 올려 연꽃 사위를 직접 시연하며 제자들을 가르친다. “제 의상의 대부분이 연분홍색이에요. 분홍색을 좋아하면 마음 약한 사람이라는데….” 그러나 약하고 곱기만 한 건 아니다. 춤과 소리에 엄격하지 않았다면 병상에서 제자들에게 손수건을 들릴까. 스승은 누누이 강조한다. “무겁게 추되 발디딤을 살랑살랑하면서 속은 깊으게. 몸에 알뜰한 멋이 들어야만 알뜰한 예술이 나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스승의 마음이 깊고도 알뜰하다.
▲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중 둘째로 출생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
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
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
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
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
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
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
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
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유인화 선임기자|진주에서 rhew@kyunghyang.com〉
-‘제자들과 함께’ 병실에서-
# 풍경1
병실에서 아들 김인권씨의 보살핌을 받는 김수악 명인.
병실에서의 화제는 얼마 전 김수악이 승소한 소송건이었다. 김수악 측과 김수악의 제자 정모씨가 고소인과 피고소인으로 맞선 재판이었다. 정모씨가 김수악에게 알리지 않고 진주교방굿거리춤보존회를 조직 후 진주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자격증을 발행한 사실이 드러난 것. 김수악 측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김수악 제자들로 구성된 김수악 전통춤 보존회는 정씨의 진주교방굿거리춤보존회를 무효화하고 정씨가 이수자 자격증을 주지 못하도록 소송을 냈다. 정상적으로는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김수악이 인정하는 제자에게 김수악의 도장이 찍힌 이수자 자격증을 주어야 한다. 김수악에게 굿거리춤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김수악의 굿거리춤 이수자 자격증을 받는다는 건 비상식적인 일. 그런데 정씨는 김수악의 허락없이 김수악 도장을 위조해 7명의 이수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 풍경2
김수악 병상 옆에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스승 김수악과 정답게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강금실 전 장관은 부산지법 판사 시절부터 20년 넘게 김수악의 제자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김수악에게 굿거리춤과 살풀이춤을 배웠다. 김수악은 “춤을 계속 했으면 성격이 차분하고 성실해 대단한 춤꾼이 됐을 것”이라고 상찬했다. 오죽하면 스승이 ‘검사 하지 말고 나하고 춤추자’고 권했을까. 강전장관은 요즘도 안부 전화를 자주 한다고 한다. 2005년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열린 명무전 ‘전무후무’ 공연 때는 법무장관이던 강전장관이 스승이 춤추는 토월극장에 오느냐 못 오느냐가 화제였다. 세간의 관심을 의식한 법무부 측에선 ‘바쁘신 분이니 알아서 하시도록 두라’는 전언을 공연 주최 측에 했다고. 그러나 그는 스승의 분장실을 찾았고 스승은 화답이라도 하듯 노약한 몸을 잊은 듯 살푸리춤에 소고춤을 엮은 ‘교방굿거리춤’으로 무대를 들었다 놓았다.
# 풍경 3
서울 제자들이 전한 내용. 역시 2005년 여름이었다. 노스승은 운신할 수 없을 만큼 기진한 상태인 데도 매년 진주에서 열리는 김수악 전통춤 워크숍을 진행했다. 또한 워크숍 기간 중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진주 남강 앞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자 강미선씨(한국체육대 무용과 교수)의 공연을 보러 갔다. 피날레에서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오른 춘당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 꽹과리를 잡자마자 거장의 예혼을 객석에 뿌렸다. 등은 구부러지고 기력이 없는 데도 무대 오른편에 앉은 사물놀이팀 악사를 어르며 맞대화를 펼쳐나갔다. 춘당은 전했다. “좋은 선생에게 올바로 배운 제자들”임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피날레를 사양하지 않았다고 했다.
최초로 훈령무 발굴 ‘남재 송준영’
# 남도 유일의 남성 한국무용교수, ‘훈령무’로 전국을 접수하다
그에겐 ‘최초’ ‘단독’ 등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알리는 수식어들이 따라 다닌다. 최초의 ‘훈령무’ 발굴자, 1972년 지역 최초로 설립된 대학 무용과 교수, 호남지역 유일의 남성 한국무용 교수, 성균관대학교 최초의 남성무용수, 부산 최초의 발레단 ‘프리마 발레단’ 창단 등…. 전라도를 대표하는 남성무용가로서 경상도를 아우르며 활발한 창작춤 활동을 펼친 무용가는 송준영이 단연 으뜸이다.
남재 송준영은 호남 유일의 조선대 무용과에 한국무용의 터전을 이룬 주인공이기도 하다. 1973년 전임강사로 조선대에 부임했을 당시 조선대 무용과는 한국무용불모지였다. 송준영의 고민은 시작됐고, 80년대 초반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등 전공별로 학생을 선발하면서 한국무용의 부흥을 일구었다. 현재 광주를 비롯, 호남지역의 무용을 조선대 무용과 출신이 점령(?)하게 된 배경도 송준영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는 남성무용수가 없었습니다. 저보다 8년 위인 이상준 선생이 작고하신 후 저뿐이었습니다. 뿐인가요. 남성, 여성을 통틀어 한국무용 전공생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조선대 전임으로 첫 출근했을 때 한국무용 전공생은 2학년에 2명, 1학년에 5명뿐이더군요. 한국무용을 활성화시켜야겠다는 책임감뿐이었죠. 제 호가 바로 ‘남쪽 집’아닙니까. 춤집요!” 조선대 출강을 위해 미국 워싱턴발레스쿨에서 연출 공부하려던 꿈도 접었다. 유학 서류를 완전히 갖추고 워싱턴발레스쿨에서 주 1회 장구춤을 지도하면 강의료를 지급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았었다.
# ‘자네가 춤추면 계집이 수만명 꼬일 운명이야’
송준영에게 한국무용은 호(‘남재’)처럼 몸과 영혼의 위안처인 ‘집’이고 거룩한 종교로 존재한다. “제 호는 장인어른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남녘에서 무용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니 제 운명을 대신하는 키워드이기도 하고요.”
장인 조갑환과 송준영의 부친 송경섭(고흥지역구 3대 국회의원 역임)은 같은 한학자로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다. 송준영이 부산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33세. 부친은 ‘서른을 넘겼으니 결혼해야 한다’고 했고 모친도 ‘손자 좀 보자’고 잔소리를 보탰다. 어차피 연애하긴 늦었고. 춤춘다고 싫은 소리만 들어왔던 장남은 부모가 정해준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편지를 고흥 본가에 보냈다. 일생 처음 하는 효도였다.
“장인 될 분이 직업을 물으시기에 ‘부산에서 무용을 한다’고 했는데, ‘부산에서 무역을 한다’고 잘못 들으시곤 그냥 넘어가시는 거예요. 우스운 상황인데 다시 말하기도 뭣하고…장인은 제 얼굴을 보시고 ‘한번 보고 사람 됨됨이를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자네가 춤추며 전국을 돌아다니면 계집이 수만명 꼬일 운명이야’ 하셔서 제가 얼마나 웃었는지….”
보름 후 고흥집에서 부산 아들에게 날아온 전보. ‘화순 정혼 급내 고흥.(처가에서 정혼하자니 빨리 고흥으로 와라)’ 7녀3남 중 넷째딸인 조기매와의 혼인 날은 1968년 12월20일이었다. 부친은 여산 송씨 집성군인 고흥의 족장으로 문중의 존경을 받았으니 결혼식은 성대할 수밖에 없었다.
# 신부 얼굴도 못 보고 치른 혼례식
바보 같은 망설임. 그녀는 예뻤다. 자랑스러운 며느리였다. 부친은 비녀 꽂는 며느리를 위해 결혼예물로 금비녀를 주었고, 경호를 핑계삼아 며느리 뒤에서 걷곤 했다. 지난 82년 1월 81세의 시부가 세상을 뜨자 며느리는 머리를 잘랐다. 시모 박미석도 그 해 12월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여섯살 아래인 아내와 싸운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이런 적은 있지요. 제가 50대 후반일 때 집사람이 며칠 동안 저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 거예요. 어떤 여성이 아내에게 송준영을 존경하고 사모한다고 했대요. 무용하는 남편을 두었으니 불안했겠지만, 사실 저는 집사람이 해주는 밥이 먹고 싶어 저녁때도 일찍 집에 들어가곤 했는데….”
아내는 61세인 2002년 췌장암으로 작고했다. 부부는 1남4녀를 두었고 다섯 손자와 네 손녀가 있다.
피아노와 춤은 고흥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배웠다. 음악교사로 부임한 노총각이 송준영의 춤인생을 있게 한 사람이었다. “외모는 베토벤처럼 곱슬머리인 성악가였습니다. 눈 하나는 의안이고 다리 하나가 짧았어요. 또 치질 때문에 엉덩이에 손을 얹고 다니셨죠. 그런데 수업시간에 부르신 ‘보리수’는 천사의 소리였어요.”
‘베토벤’은 송준영에게 합창반을 권했고 피아노도 가르쳤다. 또 자신은 조택원 같은 무용가가 되고 싶었는데, 신체적 결함으로 꿈을 접었다며 잘 생긴 송준영이 조택원처럼 춤춰야 한다고 했다.
베토벤은 적극적이었다. 학예회가 되면 가사선생에게 송준영의 무용의상을 만들어 달라 하고 자신이 부르는 ‘노들강변’ ‘도라지’에 맞춰 송준영을 춤추게 했다. 사춘기의 준영은 춤추는 게 너무 좋았다. 집에 가면 아버지의 불편한 심기가 담긴 기침소리에 와락 겁도 났지만, 베토벤과 춤연습을 할 때가 좋아 자꾸만 춤에 빠져들었다.
광주고교로 진학 후 제일 처음 한 일도 춤학원 수소문이었다. 그러나 춤을 배울 만한 곳은 없었다. 결국 신생문화연구소 산하 신생유치원 무용 강사인 고 이봉래 교사를 만나게 된다. 고1때는 정병호(당시 전남여고 무용선생)의 제1회 무용발표회에 출연해 ‘천하대장군’을 추기도 했지만 정병호가 서울로 이주하면서 춤스승을 찾을 수 없었다. 성대입학 후에야 서울 을지로 소재 송범무용학원에 다니며 그의 제자가 됐다.
대학. 피아노 전공으로 음악과를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친이 ‘예술학과만 가지 않으면 된다’고 말려 1년 뒤 성균관대 국문과 55학번이 됐다. 부친이 성균관대 부관장이었고, 예술대가 없는 성대에서 춤과 가장 가까운 전공인 문학인 것 같아 국문과를 택했다.
당시 송준영은 캠퍼스 최고의 킹카였다. 남성무용수가 부족해 많은 공연에 출연하며 강의를 들어야 했는데, 낮공연 후 분장도 지울 틈 없이 극장을 빠져나오면 아버지의 지프를 타고 학교에 들렀다 다시 저녁공연에 서곤 했다. 출연료는커녕 의상도 자비부담으로 부모 몰래 무대에 섰는데, 그저 춤추는 게 좋았다.
“필수교양과목인 ‘철학개론’ 시간을 잊지 못해요. 지도교수가 4년 동안 학점을 안 주었거던요. 수업도 빼먹지 않고 시험도 쳤는데 왜 학점을 주지 않느냐고 물으니 교수의 답이 기가 막혀요. ‘학점은 내 마음대로 준다’며 ‘남자가 왜 춤추고 다니냐’고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지우지 않은 분장을 감추려 선글라스를 끼고 강의실에 들어서는 181㎝ 키의 얼짱을 상상해보라. 여학생들에겐 인기 차트 1순위였지만 대학졸업 때까지 춤밖에 몰랐다.
# 부산에서도 인기짱인 호남얼짱
대학졸업 후에는 부산 무용계로 진출했다. “부산일보 주최 사라호 태풍 수해민모금공연에서 부산무용인들과 춤춘 후 부산에 눌러 앉았죠. 잠시 서울 명동에 있던 김백초학원을 제가 인수했는데, 경험 미숙으로 문을 닫았어요. 자그마한 아파트 한 채 날린 셈이죠.” 다시 부산. 60년 김혜성과 함께 부산 최초의 발레단 ‘프리마’를 창단했다. 한국무용가 황무봉과도 친했다. “처음엔 황무봉이 저를 전라도사람이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조카가 월남에서 전사한 후 제가 위로하고 도와주다 친해졌고 그때 ‘전라도 것’이라고 욕한 걸 공식사과하더군요.” 부산시립무용단 창단도 황무봉과 함께 했다. 훈련장 송준영, 안무장 황무봉, 단부장 손세란, 연출 고 강이문의 화려한 구성. 무용수들은 무보수로 1년 이상 출연했다. 창단 2년 후 조선대에서 전라도 출신 남자교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사실 67년 추석 때 부산에서의 쓰린 추억 때문에 광주행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부산 광복동에 학원을 냈는데, 적자를 면치 못했어요. 추석인데 가진 돈이 없어 집에 갈 차비도 안되고…혼자 국수를 사 먹고 용두산 공원에서 목놓아 울며 고향에 가고픈 마음을 달랬죠.” 송준영 일생 중 가장 참담했던 시기였다.
# 만주벌판 수숫대처럼 호남 무용판에 우뚝 서다
남재의 고백. “춤추는 사람이 춤 못 추고 오래 사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일흔살 무렵부터 에너지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끼는데, 춤추는 이에겐 가장 치명적이죠. 춤을 못 춘다면 살아갈 의미가 없죠. 이제 춤은 오래 못 출 것 같습니다. 지난 3월 서울 예악당공연 후 5월부터 예정된 두 번의 공연을 취소했어요. 기운이 없어 춤을 못 추었습니다. 물론 적당히 추면 되는데 성질이 그렇지 못해서…”
고 한영숙은 그에게 만주벌판의 수숫대라고 놀렸지만 그만큼 무용계에서 독보적인 신체와 춤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자랑삼아 부른 별명이었다. 남재. 춤을 끊고 살 수는 없다. 그에겐 춤의 금단현상처럼 무섭고도 달콤한 게 없다.
▲ ‘훈령무’는?
‘훈령무’는 군대를 지휘 감독하는 장군의 모습을 춤사위로 형상화한 전통춤. 고 한성준이 만든 작품인데, 그 손녀인 고 한영숙 선생의 고증에 의해 송준영이 1978년 재안무했다.
“조선대 교수로 부임하고 보니 창작 레퍼토리가 별로 없더군요. 특히 남자들의 춤이 없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황무봉과 함께 한영숙 선생님을 찾아가 ‘살풀이나 승무 말고 한성준 선생이 추었던 남성다운 춤이 없느냐’고 물으니 할아버지가 ‘훈련대장’이란 춤을 추셨대요. 그래서 무용 의상을 제작하는 정선과 다시 한선생을 찾아가 태평무 가락에 맞춰 진두지휘하는 사또 복장의 장군 춤사위를 추적했습니다.”
후에 송준영은 장군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길군악을 보충하는 등 대여섯번의 음악 구성과 춤 동작 정리 후 송준영의 ‘훈령무’를 재탄생 시켰다. 발굴의 개념이다.
사실 대학 졸업 직후 한영숙에게 어리광(?)을 부려 춤을 받아냈지만, 남도 정서가 담긴 춤을 추고 싶은 건 거역할 수 없는 내림이었다. 한영숙 춤은 궁중정재의 영향을 받은 중부 지역 춤이어서 남도 지역 특유의 몸짓을 발굴하고 싶었던 것. 그러나 남도의 춤은 찾기 쉽지 않았다. 학교 강의 외에 시간이 날 때마다 광주공원에 가서 동네 어르신들의 어깨 춤을 보며 많은 춤사위들을 연구했다.
“날씨가 좋으면 나이 드신 분들이 여가를 즐기는데, 막걸리 한 잔씩 받아놓고 판소리나 민요, 가야금산조나 농악 등을 틀어놓고 춤추는 분이 많았어요. 남도의 신명이죠. 공원에 앉아있으면 다듬어지지 않은 몸짓들이 발견됩니다. 그런 사위들을 훈령무에 넣었죠. 한영숙의 춤은 부드럽고 우아하기만 해 남자춤 만들기에 많은 고민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송준영의 ‘훈령무’는 79년 서울 공연후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전국시립무용단 축제공연 중 목포시립무용단 공연 찬조출연자로 훈령무를 추었는데, 모두 이 춤에 관심을 가졌다.
현재 송준영의 ‘훈령무’를 잇는 제자는 부산시립단 안무가 홍기태, 삼성무용단 이정수 등 네 사람. 그중 40대 남성 제자는 이 두 사람이다. “무조건 내 작품을 주기보다 내 작품을 받고 싶어하는 제자에게 물려 주는 것뿐입니다.”
1951년 신생문화연구소 입소
1954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1959년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1971년 부산 송준영 무용학원 개원
1973년 부산시립무용단 상임훈련장
1974~2001년 조선대 무용과 교수
1989년 조선대 교수협의회 의장
1992 춤의 해 운영위원 및 지방분과위원장
1994 제2회 전국무용제 운영위원장 및 집행위원장
1997 제19회 서울국제무용제 운영위원장
〈현재〉 광주한국춤연구회 이사장, 조선대 무용과 명예교수, 광주문화예술회과 운영위원
〈안무작〉 ‘열녀문’(1982년), ‘바다는 바다는 울고 있드라’(1983년), ‘미리내 가시버시’(1990년), ‘소쇄원의 48영’(2002년) 등 다수
〈저서〉 ‘정재무도홀기’(1998년), ‘무용의 이해’(1999년)
〈수상〉 제6회 대한민국무용제 안무상(1984년), 제12회 서울무용제 연기상(1990년), 대한체육회장 공로패(1993년), 금호예술상(1997년), 국무총리 표창장(2001년), 광주문화예술상("), 한국무용협회 무용대상 특별공로상(2003년), 제17회 한국예총 예술문화상 공로상 수상(2002년), 지역문화예술 유공자 포상(2004년) 등 22차례
# 오빠 무동타고 사자놀이에 빠지다
이근화선은 부친 이시춘과 모친 주쌍가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었다. 깜찍한 동생 근화선은 오빠의 어깨 타는 맛에 오빠가 노는 북청사자놀음에 끼곤 했다. 이제 오빠는 없고 옛 풍류는 사라졌지만 막내가 그 뒤를 이어 남한에서 북한의 민속놀이를 이어가는 인간문화재가 됐다. 오빠는 북청사자놀음의 양반역을 맡았고 막내는 북청사자놀음을 하는 마을사람들 어깨 위에 서서 춤을 추었다. 무섭기는커녕 재미있었다. 듬직한 어깨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서너살 꼬마에게 환상의 세계였다. ‘삘리리 삘리리…’ 연주도 신났다. 무동은 4살부터 했다. 중학생부터는 사당, 거사, 애원성, 넋두리, 승무 등을 추었다. 남성들이 추는 양반꼭쇠, 사자만 빼고 다 했다. 한번 놀음에 적어도 6가지 역할을 해 연희시간 40분 내내 바빴다.
“동네사람들이 함께 모여 북청사자놀음을 했기 때문에 춤기술 없이도 마을사람이면 누구나 놀았습니다. 당시 농사짓던 우리 오빠를 비롯해 마을 청년 대부분이 사자탈을 쓰거나 양반, 길잡이 등 역할을 했죠. 마을사람들은 밥을 들통으로 가져와 함께 먹으며 축제를 즐겼습니다.”
게다가 마을은 집성촌이었다. 700가구 모두 단양 이씨 집이었다. 남녀가 섞여 놀아도 친척끼리여서 흉이 아니었다.
“우리집, 잘 살았어요. 아버지가 농사짓는 동네분들의 왕초 역할을 하셨는데 ‘어른’으로 존경받았죠. 우리집의 일꾼 두 명이 우리 땅에 농사를 짓고 다른 집 농사도 지었습니다. 공출일에 우리집에서는 100가마의 쌀을 바쳤는데, 동네에서 가장 많은 양이었죠.”
사자놀이와 함께 이북 5도 문화재인 ‘돈돌나리’ 놀이도 있다. 동네 아낙네들이 북과 징을 치며 명절과 잔치 때마다 놀았다. 노래 가사 ‘왜놈들 내쫓고 우리가 차지한다. 돈돌나리돈돌나리. 왜놈들 나가고 우리가 해방된다’는 내용 때문에 놀이가 금지됐지만 숨어서 놀았다.
# 57년 동안 행방불명된 남편을 기다리다
20세. 사촌올케의 소개로 북청군 토성면에 시집갔다. 5살 연상이 남편 이구섭은 4형제 중 셋째. 북청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근화선은 결혼한지 1년이 못 돼 남편을 따라 서울로 간 후 서울집에선 시부를 모셨다. 시모는 북청 집을 지켰다.
딸이 4살, 아들이 1살 때까지 서울 종로5가에서 재미있게 살았다. 애키우고 살림만 했는데 재미있었다. 이듬해 해방이 됐다.
“사촌 큰시숙이 광산업을 했는데, 남편은 충청도 부석광산에 근무하다 서울로 왔죠. 6년 동안 남편 그늘에서 살았었죠. 참 잘해줬어요. 그런데 6·25전쟁이 문제였어요. 1·4후퇴 피란길에 남편을 잃어버렸습니다. ‘조금있다 인천에서 다시 보자’며 잡았던 손이 마지막이었어요. 아직도 기가 막힙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 부산행 배를 타기 위해, 남편과 제가 남매를 각각 업고 인천행 트럭을 기다렸죠. 여자들과 아이들이 먼저 인천행 1차 트럭을 타고 남편들은 2차 트럭으로 뒤따라오기로 했는데, 안오는 거예요. 남자들이 탄 트럭은 보국대로 끌려간 듯해요.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아이들과 함께 부산가는 마지막 배를 탔습니다. 정말 타기 싫었습니다. 눈보라 치는데 아들을 업고 딸은 한 손으로 잡고… 아는 이도 없고 처음 가는 부산에서 죽도록 고생했죠. 다급하니 창피한 것도 모르겠더군요.”
남편의 행방불명으로 닥친 시련. 돈은 많았다. 남편이 사업해 번 돈을 이불 보따리에 숨겨 오느라 피란짐이 남보다 무거웠다. 사람들 눈이 무서워 여간 고생을 한 게 아니다. 이 대목에서 이근화선을 보고 배부른 고민이라고 손가락질할 터. 당시 2만원으로 영도에 방을 얻었다. 애를 업고 애 하나를 손에 들려 지물포에서 산 종이에 ‘남편 이구섭을 찾는다’고 적은 후 부산 시내 여기저기에 붙였다. 남편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이북에서 피란 온 친척들이 그를 찾아와 짐이 됐고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 영도에 ‘하꼬방’을 지어 식구들을 거두었다. 가진 돈을 마냥 허비할 수만은 없었다. 또순이는 아이들을 시숙에게 맡기고 근처 미군부대에 취직했다.
“당시 한국 해군들은 그릇을 씻으러 영도에 왔는데 그들이 먹고 남은 생선, 밥, 고기 등을 제게 주면 그 음식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밥을 말려 고추장을 만들었죠. 저는 미군부대 작업반장이어서 출석점검 후 레일로 물건 실어나르는 일만 했습니다. 일이 별로 없어 좋았죠. 그때 피란민들은 미군부대에서 훔친 레이션 박스를 밖으로 내던져 돈을 버는데, 전 못했어요. 그나마 편한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죠. 아들이 학질에 걸려 죽을 판이라 미군부대를 그만두었습니다.”
# 불붙듯 거침없이 사업에 성공하다
“이근화선 이름 넉자가 적힌 수표는 보증수표 그 자체였죠. 부자였고 신용도 최고였어요. 불붙듯 잘된다는 게 바로 저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1950년대 초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이근화선’ 넉자 수표는 보증수표였다. 약 20년 동안 그랬다.
# 사업하다, 춤추다, 부도나다
이북 5도청은 장사하는 이근화선을 그냥 두지 않았다. 58년 북청사자놀음 보존회의 고 변영호 회장이 찾아왔다. 북청 토박이 이근화선에게 발굴과 재현을 부탁했다. 어릴 때 추던 춤의 기억. 어쩔 수 없는 흔들림. 동대문에서 가게를 경영하며 북청사자놀음과 창작춤도 열심히 추었다. 30대 초반에 추만영에게 6년 동안 수건춤 등 한국무용을 사사했다. 40대 초반에는 이소애(당시 30대 초반)로부터 6개의 안무작 ‘여심’ ‘화랑도’ ‘승무’ ‘아리랑’ ‘노들강변’ ‘도라지’를 사사하고 무대에 섰다. 공연 잘한다고 상도 많이 받았다. 춤 욕심이 더해갔다. 종로3가 세운상가 옆에 70평 전세를 얻어 무용학원을 차렸다. 사업에 학원까지. 바빴다. 학원은 인간문화재가 된 후 그만두었다. “학원 40평은 제가, 30평은 소리하는 이은관에게 무료로 빌려주었습니다. 당시 외국공연 나가는 이들은 우리 학원에서 배워 나갔죠.”
30여명이 출연하는 북청사자놀음 연습은 이근화선의 동대문 사무실에서 했다. 사업도 불처럼 일었다. 그런데 운명은 이럴 때 사람을 편하게 두지 않는가 보다. 부도가 났다. 주위에선 밀어줄테니 다시 사업을 일으키라 했지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제가 사자놀음에 미쳐 부도가 났습니다. 결국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입원했는데, 69년 사자놀음 회원들이 석달 동안 입원해 있는 저에게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는 기사를 보여주며 다시 사자놀음을 하라더군요. 그때 을지로2가 5도청 건물창고에서 사자탈과 의상을 찾았는데, 썩은 것밖에 없어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 돈으로 새로 맞추었어요.”
당시 50세 이상의 인간문화재에겐 월 2만원(쌀 한가마에 3000원)이 지급됐는데, 45세여서 그 돈을 받지 못했다고.
그는 39년 동안 북청사자놀음 인간문화재로 활동하며 교육에 힘쓰고 있다. 요즘은 남양주 오남중학교와 양지초등학교를 10년째 가르친다.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니다. 생전에 더 많이 가르치고 싶어서이다.
“중·고·대학교를 다니며 북청사자놀음 공연 계약을 맺고 연 150회 공연을 했습니다. 대학은 오후 7시, 중·고교는 하루 2~3번, 한번에 2시간씩 교육했습니다. 거의 매일 점심때는 중·고교, 저녁에는 대학교에서 공연했어요. 축제 때는 봉산탈춤반을 한두달씩 가르쳐주기도 했죠. 그렇게 40년을 했어요.”
피가 무섭다. 딸 이정숙(60)은 배화여중 1년 때부터 사자놀음을 했고 그의 막내딸이 대를 잇고 있다. 아들 이건홍(57)도 고3 때 모친이 부도를 냈지만 고려대 상대를 합격했고, 고대 경영대 대학원 졸업 후 번창하던 등대제작업을 접고 북청사자놀음 업무를 돕고 있다. 30대 초반인 그의 두 딸도 사자놀음에 참여한다.
“25세에 홀로 된 후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죠. 사자놀이와 사업으로 바빠 연애할 시간도 없는데 중매소리가 들렸겠어요? 아이들이 재혼을 싫어했고. 저도 바보처럼 남편만 기다렸어요. 남북 이산가족상봉 때도 찾았지만 소용 없었고, 편지도 돌아오고…”
아직도 남편을 기다린다. 꿈에서만 보는 남편. 만나면 꼭 할 말이 있다. 돈도, 장사도… 아무 것도 모르던 철부지 근화선이 늙고 힘없어도 사자놀음을 끌어 나간다고. 사자놀음의 애원성춤은 당신을 생각하며 추는 춤이라고. 57년 동안 기다려온 남편. 종로5가 신혼집에서 사랑했던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잡았던 손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다면.
▲ 이근화선 약력
41년 북청군 신북청 여자중학교 졸업
56년 신일섬유 서울상회 경영
6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사자’역으로 참가
64년 이근화선 무용학원 경영
69년 북청사자놀음 보존회 입회
70년 북청사자놀음 무용부문 지정
93년 제3대 북청사자놀음 보존회장
97년 제5대 북청사자놀음 보존회장
2007년5월까지 이스탄불 이란 러시아 일본 등 해외공연
〈수상〉 이북5도청 공로패(1966년), 문예진흥원장 공로패(71년), 북청사자놀음보존회 공로패(80년)·함경남도 도지사 공로패(80·85년), 이북5도청 문화상(89년), 함경남도 도지사 표창장(98년) 등 다수
-북청사자놀음?-
북청사자놀음은 함남 북청군 일대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며칠 동안 연희된 사자놀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됐다. 기능보유자는 동성영, 여재성, 이근화선 등 세 명이다.
대보름날 잡귀를 몰아내는 사자를 주인공으로 북청사자놀이를 하면 동네에 평화가 온다는 믿음으로 화려하고 길게 놀았다. 보름 전날 밤 저녁밥을 먹고 동네사람들 모두 뒷산으로 횃불 들고 올라가 꽹과리, 징, 장구, 퉁소 등을 연주했다. 또 사자탈을 쓰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모래 가득한 개울에서 편을 갈라 사자싸움을 하고 승리한 쪽은 밤새 놀았다. 겨울의 대보름밤은 추수한 너른 들에서 창백하게 밝은 달을 배경으로 밤새 술 마시며 놀 수 있는 면책의 공간이었다.
이근화선의 증언. “대보름날 아침에는 마을 각 집을 돌며 사자가 놀아주었다. 사자가 그 집의 잡귀를 없애주고 잘 살게 해준다며 각 집마다 쌀이며 돈을 내놓았고 사자가 그 집 손자를 태워 집을 돌면 손자가 무병장수한다하여 쌀을 더 퍼 내오곤 했다.”
당시 그 돈과 쌀을 모아 도청과 사당을 지었지만 이근화선의 고향에선 새마을 운동이 없을 때인데도 노인과 가난한 이들을 돕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선행을 펼쳐 북청사자놀음은 이래저래 유명했다.
북청사자놀음의 내용은 애원성·마당놀이·사자춤 등으로 구성된다. 먼저 쾌자(快子)를 입은 여인이 경복궁춤·애원성춤·성주풀이춤을 추고, 양반과 하인(꼭쇠)이 등장하는 마당놀이로 넘어가는데 양반의 명령에 따라 사당춤·무동춤·곱사춤 등이 추어진다. 그 후 사자가 등장해 여러가지 재주와 춤을 보이다 기진해 쓰러진다. 대사가 등장하여 사자를 살리려고 반야심경을 외우지만 살아나지 않고, 의원이 등장해 침을 놓으면 사자가 다시 일어나 춤을 춘다. 이때 사당춤·상좌(上佐)의 승무 등이 어울리는데, 사자가 퇴장하면 동네 사람들이 ‘신고산타령’을 부르며 춤춘다.
# 화려한 세계를 탐한 3대 독자
김진홍은 김종명과 강매결의 3대 독자로 부산 범일동에서 출생했다. 4살 위인 누나 김연홍과 남매였다.
출생 직후 가족은 일본 오사카로 이주했다.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모친은 하숙을 쳤고 아버지는 고물상을 했다. 밤에는 가족끼리 공연장에 갔다. 김진홍의 고백. “그런데 아들이 춤추는 건 싫어하셨습니다. 예술을 업으로 하면 가난해진다며 못하게 하셨어요. 6·25전쟁 당시 제가 출연하는 공연초대권을 부모님께 드렸는데, 무대에서 춤춘 이가 저인 줄 모르고 ‘젊은 남자가 춤을 잘추더라’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이매방 선생이 부모님께 ‘그 남자가 아드님이셨다’고 알렸죠. 아버님께선 그때 당신의 꿈을 포기하시고 저를 놓아주셨습니다.”
다시 3살의 김진홍. 일본 다카라스카 소녀가극단 공연을 봤는데, 무대 위 선녀가 옆으로 누워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고 진홍은 신기하기만 했다. 프랑스 영화 ‘백조의 죽음’을 비롯해 발레 영화 ‘빈사의 백조’, 일본 가부키, 악극단의 버라이어티쇼 등…. 어린 진홍은 남들이 일생 해도 못할 문화를 누렸다.
“한살부터 일곱살까지 멋진 구경만 하다 한국에 오니, 아이들 옷소매는 콧물을 닦아 반질반질 딱딱하고, 전차 밑바닥은 구멍이 나있어요. 현실을 잊고 싶어 공연보러 많이 다녔죠.”
부산 동아중학교 입학 후에는 영화감상과 노래가 취미였다. ‘카라반’ ‘카르멘’을 보고 급우들에 둘러싸여 영화이야기를 하면 담임선생에게 고자질하는 친구가 있었다. 중학생에겐 금지된 영화관람. 진홍은 복도에 손들고 벌 서면서 ‘예술을 아는 애’로 유명해졌다.
“학예회때 ‘산타루치아’ 등을 부르면 인기가 좋았습니다. 음악부 선배들이 손수건에 귀한 양과자를 싸주면서 음악부에 가입하라고 꼬드기곤 했어요. 그런데 변성기로 노래를 못부르게 되자 상급생들이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라고 하대요. 저를 가만두지 않더군요. 하하하….”
# 남방춤에 빠진 일급 타자수
피아노를 연습할 때 6·25전쟁이 터졌다. 등교한 진홍이 복도를 지나가는데 교실마다 피란민들로 꽉 차있어 전쟁난 걸 알았다. 학교가 문을 닫자 손가락을 쉬게 하지 말라는 선배들의 충고로 타자를 배웠다. 타자솜씨가 좋은 그는 미군부대 타자수로 취직, 목공부들 출퇴근 일수에 따라 액수가 정해지는 급여봉투를 작성했다. 소문은 빨랐다. 부대에서 타자를 가장 빨리 치는 미군과 진홍의 대결. “제가 영어는 몰라도 알파벳을 보는 대로 빨리 쳤더니 미군 타자수와 비겼어요. 그날 저녁 목공부 담당 미군장교와 장교클럽에서 돈가스를 먹었습니다. 일본에서 먹었던, 귀한 음식이었죠. 그때 미8군 쇼도 보았어요.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도 한국노래와 영어노래를 부르고 그 아들과 딸로 구성된 8명 밴드도 출연해 노래하더군요.”
“1951년 범일동 3·1극장에서 무용콩쿠르가 열린대요. 참을 수 없더군요. 남방춤을 추려고 누나에게 하늘하늘한 인조천으로 밑이 퍼지는 바지를 만들어달라 하고 초록색 셔츠에 허리끈을 묶고 그물같은 천으로 터번을 만들어 썼습니다. 뿐인가요. 미군부대 통조림 깡통을 동그랗게 오린 후 실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고 춤을 추었죠. 사실 춤은 신경쓰지 않았어요. 그저 타부음악 멜로디에 빠져 춤을 추었죠. 입상했어요. 기대도 안했는데….”
콩쿠르가 ‘문제’였다. 해병대 군악대도 진홍에게 연락을 취해 전방순회공연을 가자고 했다. 그는 더 이상 일급 타자수가 아니었다. 춤추며 전방을 돌았다. 산중에서 얼음 깨어 세수하고 머리감는 데도 춤이 좋았다.
#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이룬 김진홍류 명무
당시 진홍의 춤을 본 악사들은 ‘군예대에서 활동하는 이매방과 진홍이 많이 닮았다’며 이매방을 아느냐고 묻곤 했다. 휴전후 김진홍은 이매방을 만났다. 이매방은 부산 영주동에서 2층 다다미방을 개조해 무용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부산진시장 가설무대에서 펼쳐진 명인명창대회의 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출연자 대기실에서 명창 임방울과 환담을 나누던 이매방. 그저 놀러 온 줄 착각할 정도로 긴장감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진홍에게 ‘잠깐 있어라’ 하더니 학원에서 의상을 가져와 입고 무대에 오르는데,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흰 장삼, 흰 고깔, 흰 버선, 흰 바지저고리 차림에 홍가사를 걸치고 ‘승무’를 추시는데, 발 맵시가 너무 멋져요. 장삼을 뿌리지 않고 가만히 놀리는 정중동의 느낌도 학처럼, 하얀 나비처럼 고고했습니다. ‘아, 내가 기다리던 춤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감동에 겨워 이매방춤을 적극적으로 배우게 됐죠.”
동네 엄마들을 모집해 이매방 학원에서 춤을 배우게 하고 방학에는 여교사들에게 춤강습을 권했다. 대신 김진홍은 무료로 이매방을 사사했다. 6·25직후에는 친구처럼 지냈다. ‘고향벗은 5년, 객지벗은 10년’이라고, 술을 함께 마시고 담배도 같이 피웠다.
“이매방 선생에게 승무와 살풀이를 배우고 부산 무용평론가 고 강이문에게 3년동안 무대 공간구성, 연극적 요소, 작품구성 등 무용이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춤공부만 했다. 춤 이외에는 알아야 할 것도, 알 필요도 없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이유. 너무 단순하다. 무대에서 춤춰야 하는데 빡빡대머리로는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진학도, 결혼도 하지 않고 춤만 추었으니 교류하는 이가 없지요. 여기서(범일동 무용학원) 30년 살아도 아는 이가 없어요. 그래도 고독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있고, 음악듣고 소설과 시를 읽고….”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살풀이춤’, 제97호 ‘승무’ 이수자이며,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이매방의 예혼을 잇는 제1호 제자이다. 스승 이춘우의 춤기본과 산조춤, 문장원의 동래 한량춤과 동래 입춤, 박동진·김소희의 소리도 배웠다. 김소희는 ‘예술은 모방이 아니다. 스승을 따라하면 원숭이지 예술이 아니다’라고 했었다.
이매방의 최고 제자임에도 이매방의 춤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춤향기를 품게 된 후 그는 김진홍류 승무와 살풀이 춤을 집대성했다. 스승으로부터의 독립.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자신만의 춤길을 찾게 됐다. 무용평론가 채희완은 그의 ‘승무’를 ‘하늘과 내통하는 장삼자락의 춤’이라 평했다. 그의 살풀이춤은 정중동의 춤. 추는 듯 안추는 듯, 춤 혈은 흐르듯이, 춤 맥은 일정한 끊어짐으로 엮어져 있다.
1979년에는 동래에서 문장원의 춤을 보고 무용선비의 경지를 느낀 그는 문장원의 ‘동래한량춤’에 몰입했다. 부운의 한량춤은 활발하면서도 젊잖다. 겸손하면서도 은근하다. 현재 그는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지정을 신청한 상태이다.
# 하늘과 닿아있는 무심의 춤
부운의 춤 키워드는 ‘무심(無心)’이다. ‘김진홍춤에 격이 살아있다’는 평. 생각하며 추는 춤이 아니고, 생각없이 마음을 비우고 추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의 ‘무심’은 삶의 체험과 통한다. 고상한 춤을 추기 위해 뽕짝이나 팝송을 거부하는 건 안될 일. 고통, 배고픔, 슬픔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무심의 춤과 만나야 예술이라고 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하는 잔소리에도 ‘무심’이 화두로 담겨 있다. ‘추는 춤 말고 추어지는 춤’을 추라고 강조한다. 몸에서 우러나오는 춤을 추라고 잔소리한다. 같은 춤을 추어도 일곱, 여덟번은 추어야 자연스러운 감정이 살아난다고 했다.
“감정표현을 위해 한국무용가들은 아래로 시선을 두는데 외국 영화에선 배우들이 시선을 위로 하더군요. 저도 시선을 하늘쪽에 두고 춤춥니다. 그리고 대부분 웃거나 슬픈 표정 등 얼굴에 표정을 많이 두는데 저는 내면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고 무표정한 채 춤추는 걸 좋아합니다.”
무표정한 무대 위 얼굴처럼 그는 ‘무뚝뚝하고 사교성은 제로’라고 고백한다. 이사람 저사람 비위 맞추다보면 춤출 때 에너지를 모을 수 없어 그렇다고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혼자 하늘을 향해 시선을 주다보니 호를 작명하는 분이 제 호를 ‘부운’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이름도 원래 김자홍인데 그 분이 제 관상을 보고 김진홍(眞弘)으로 하래요. 호적도 고쳤죠.”
그런데 요즘처럼 몸이 지치다 보면 이름을 고쳐도 소용없는 듯하다. 왼쪽 무릎뒤 신경통 때문에 허리까지 아프다. 물리치료를 받는데 나이 때문인지 큰 차도는 없다.
“이상하지요. 죽기살기로 무대에 나가면 아무도 아픈 사람인 줄 모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이 아픈데 춤추면 잊어요. 나 원 참….”
춤도 인간의 일이어서 고단하련만… 부운은 그저 무심의 춤을 고집한다. 삶의 체험을 무심으로 보듬고 춤추기. 참 힘들다. 그래도 가장 높은 곳에 뜬구름이 어두운 밤에는 가장 빛나기에 부운의 춤여정, 아름답다.
-30년 넘게 학원서 숙식 “자는 시간이 아까워요”-
부운 김진홍에겐 제자들과 함께 춤을 연습하고 춤을 창작하는 범일동 무용학원이 유일한 자랑거리다. 김진홍 전통춤 연구회가 자리한 춤 공간인 만큼 그의 전부이기도 하다.
무용학원은 1955년 부산 범일동에서 시작했다. 학원 정식인가가 난 62년부터는 부산 교통부에 학원을 개설했다. 그후 70년대 중반 부산 진시장으로 학원을 옮겼고, 다시 범일동 자유시장에서 학원을 경영하며 고 강이문에게 춤 이론을 배웠다. 지금의 학원은 70년대 후반 위치가 좋아 입주했다. 요즘처럼 공구상 골목이 아니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 냉·난방비가 절약됐다. 학원 전체 규모는 48평. 춤 연습하는 마루 면적은 20평 남짓이다. 부운 김진홍은 30년 이상 20평 마루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겨울밤에는 옷 좀 껴입고 자면 되고…’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았다.’ 그는 30여년 전부터 조방(조선방직)터를 맴돌고 있는 셈이다.
김진홍 무용학원은 동네 무용교습소처럼 초보자나 아마추어 무용가들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무용 교사들과 전문 무용수들이 전통춤을 연마한다.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학원에 찾아갔을 때도 김갑용씨(42)와 김필분씨(51)가 스승의 춤을 연마하고 있었다. 부운은 미혼으로 혼자 살아왔지만 제자들이 자식이다. 13살부터 30년 동안 스승을 아버지로 존경해 온 양아들 김갑용씨와 며느리 서정숙씨(41·부산시립무용단 총무)가 한국무용을 전공했고 서정숙씨의 올케 두 명도 한국무용가이다.
“부모님 모시고 집에서 살 때도 한 달에 하루쯤 집에 들어갔을 겁니다. 제가 50줄에 접어들었을 때 부친은 78세, 모친은 81세로 돌아가셨는데…. 맘껏 춤출 수 있고 제자들에게 춤 가르칠 수 있는 학원 공간이 좋았습니다. 제 꿈이 무용학원에서 하루가 다 가도록 가르치고 먹고 자는 건데, 그 소원대로 학원에서 살고 있어요. 자다가도 춤추고 싶으면 금방 춤출 수 있잖아요. 춤과 생활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겨울에는 추워도 솜바지 입고 자면 되고요. 학원 근처에 공구상 사람들이 일 끝내고 고단함을 푸는 주점이 있고 노래방이 있어요. 주위에서 노랫소리 나고 사람들이 밤 늦게까지 다니기 때문에 저도 새벽 2시 30분쯤 잠을 청하고 오전 11시쯤 일어납니다. 사실 주위환경 탓을 하지만 솔직히 저는 그냥 자기가 싫어서 늦게 잡니다. 자는 시간이 아까워요. 물론 눈 뜨고 있어도 별로 할 일은 없는데… 그래서 몸이 많이 상했어요. 어쨌든 저는 몸이 망가져도 좋으니 춤 잘추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합니다. 다른 이들은 몸 망가질 만큼 춤 잘추게 해달라고는 기도하지 않을 거예요. 하하하….”
무용학원의 공간은 언제나 그의 요람이었다. 저녁까지 한국무용을 가르치던 공간이 밤에는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교류의 장이 되곤 했다. 학원에서 거의 격일로 술을 마셨고 마음맞는 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다. 고 황무봉, 고 강이문 등과 함께 반되들이 소주 두 병씩을 마시고도 모자라 빈대떡집 ‘만리장성’으로 몰려가곤 했다. 20여년 전 황달에 걸려 매일 한갑씩 피우던 담배와 술을 끊기 전까지 그랬다.
1935년 부산 범일동 김종명과 강매결의 3대독자로 출생
1948년 부산 부산 동아중학교 입학·51년 졸업
1962년 부산 경남고 출강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이수자
1993년 부산 경성대 무용과 출강
1993~94년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겸 상임안무자
1994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장
1996~2000년 부산민속예술보존회 이사
199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97호 살풀이춤 이수자
200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수상>
부산시장 감사장(1977년), 부산광역시 문화상(1987년), 제 9회 전주 대사습 무용부문 장원(1983년), 제 33회 진주 개천예술제 특장부문 최우수상("), 춤의해 운영위원장 감사패(199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감사패("), 국립민속박물관 감사장(1998년), 광주광역시장 공로패("), 일본 후쿠오카 남장원주지 감사장(1999년)
# 9살짜리 안무가, 26살 인간문화재 되다
원향 살풀이춤. |
부친은 경남 통영시내 금싸라기 땅인 황남동 2번지에서 한의원을 했고 작은아버지 엄지영도 서울대 약대 졸업 후 통영에서 약국을 경영했다. 엄옥자의 남동생 엄주태도 약대 졸업 후 약국을 차렸다. 부친은 통영시 무형문화재 보존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전국체전에 궁도 선수로 출전해 상도 받았다. 북·장구를 치고 피리를 불고 소리와 춤도 수준급인 풍류객이었다. 모친도 퇴기 이국희에게 춤을 배웠다. 핏줄이 무섭다. 네다섯살의 옥자는 기방에서 예쁜 한복입고 나풀나풀 춤추는 기생들에 반해 자신도 꼭 저렇게 되겠다고 다짐한다. 어린애가 웬 기방? 부자 아버지는 기방에서 손님 접대를 했고, 모친은 옥자에게 동호동 기방에 가서 아버지 모셔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때때옷 입은 기생들이 나비같더군요. 여섯살 때 설빔으로 유똥치마와 호박장식 저고리를 입었는데 내친 김에 장구도 사달라고 어머님께 졸랐죠. 결국 아버지 몰래 장구를 사주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들킬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장구를 두들겼습니다.”
정식 춤은 통영 문화유치원생인 일곱살 때부터. 모친이 퇴기 이국희에게 통영굿거리춤과 칼춤을 배우게 했다. “해치(‘소풍’의 사투리) 가서 주눅들어 앉아있는 제가 안쓰러웠나봐요. 놀이판에서 몸이라도 흔들라면서 소개한 이가 이국희 할머니죠.” 국희할머니는 150㎝ 남짓의 키였지만 성냥개비를 그슬려 눈썹을 검게 그리는 멋쟁이였다. 그는 엄옥자네 대청마루와 큰방 등에서 모녀를 가르쳤다.
여덟살. 임춘앵 김진진국극단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공연홍보차 거리에서 불던 호적소리는 엄옥자의 작은 가슴을, 어린 운명을 콩닥콩닥 설레게 만들었다.
충렬초등학교 2학년부터는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부친 몰래 한약방 2층에서 춤을 가르쳤다. “동네 평상들을 모아 키를 맞춘 후 무대를 만들고, 아이들이 가져온 엄마 옷들을 걸친 채 ‘아리랑’ ‘도라지춤’ ‘마리아’ 등을 추었습니다. 어린 애가 무얼 안다고, 하하하….”
중학교 때는 주평의 지도로 기본 굿거리인 ‘세 색시’춤을 배워 발표했다. 본격적인 춤 공부의 시작이었다. 고교 때는 교가에 맞춘 ‘우물가에서’를 학교 행사에서 추었다. 소풍날과 마을 행사 때면 ‘소녀의 기도’ ‘노들강변’ ‘우정’ ‘무당춤’ 등 수많은 작품을 구상해 공연했다.
집에선 ‘기생될 거냐. 시집 못간다’고 춤을 말렸다. 통영 오광대 따라 춤추면 ‘무당새끼처럼 펄쩍거린다’고 매도 맞았다. 그런데 춤 없이는 숨쉴 수 없었다. 훗날 엄옥자 부친의 고백. “딸에게 미안하다. 약대 진학을 종용하고 춤을 전공하지 말라고 막았다. 미안하다. 당시 예술로 돈벌기는커녕 빌어먹는다는 분위기였지 않은가!”
# 숙대 약대 합격증을 찢어버리다
집안에선 가업을 잇기 위해 약대 진학을 원했다. 당시 한 반에서 10등 이내면 학교 추천으로 명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엄옥자는 숙대 약대에 합격했다. 운명의 순간. 부모가 약대 합격증을 전달받았다면 엄옥자는 약사가 됐을 터. 그러나 엄옥자는 합격증을 직접 받자마자 찢어버렸다. 소원하던 경희대 체육과 합격증도 그가 받았다. “아버지께 경희대 합격증만 드렸더니 체대 입학을 허락하시더군요. … 너무 허약하게 무너지셨습니다.”
경희대 체육학과 무용 전공생. 도쿄대 체대 출신 교수는 ‘해님이 반짝’ ‘바람 솔솔’ 등 기초적인 동작을 가르쳤다. 이미 기생에게 진한 춤을 배운 엄옥자로선 싱겁기만 했다. 해결책. ‘김백봉’이었다. 데모(?) 끝에 김백봉을 ‘모셔왔다’. 그때의 인연으로 엄옥자는 김백봉 춤보존회를 조직했고 회장으로 활동했다. “김백봉선생님의 춤처럼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우리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김백봉 선생의 춤은 도도하면서도 멋지거든요!”
대학생 때 8개월 동안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움막 지어놓고 춤 가르치는 이동안에게도 배웠다. “발탈, 줄타기, 진쇠품, 신칼대신무 등 좋은 춤을 깊이 있게 못배워 후회 막급입니다. 그저 재미있을 뿐, 온 몸을 적셔가며 배워야겠다는 절실함을 몰랐어요. 어느날 이선생을 찾아가니, 움막집이 없어졌더군요. 문일지 선생이 서울로 모셔간 걸 나중에 알았어요.”
20대 후반 부산 한성여자 초급대학(현 경성대) 강사 시절에는 부산 범일동 지하실에서 이매방의 승무 살풀이를 배웠다. 한영숙, 김숙자, 강선영도 사사했다.
# 통영춤을 발굴해야 하는 운명
“통영 문화동 경남은행 거물을 임대해 무용학원을 열었습니다. 제가 화가 라파엘을 좋아해서 학원 이름으로 정했고요. 우리, 예술가 집안이에요! 언니는 미술을 좋아하고 저는 춤추고, 남동생은 글을 잘 쓰죠. 여동생은 피아노 치고, 그 밑에 여동생은 도예가, 막내 여동생은 숙대에서 플루트 전공했고요. 우리 아버지, 등골이 얼마나 빠졌겠어요. 아무리 부자여도!”
열정에 가득찬 통영여고 교사 시절은 엄옥자 삶의 황금기였다. 특활시간에 승전무를 가르치며 ‘지화자’를 열창해 각 학교에서 ‘지화자’ 선생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무용실이 따로 없어 책상을 뒤로 미루고 교실 창틀을 연습바(Bar)로 삼아 춤추곤 했다. 그때 영남지역 문단을 이끈 이민기 교감은 엄옥자의 ‘승전무’를 가능케 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이교감은 “이순신 장군 기념행사의 군대 행렬 때 검무의상에 머리에 전립을 쓴 8선녀 행색의 기녀가 따라가는데, 그 기녀들이 추었던 춤을 찾아 연구하라”고 했다.
엄옥자는 ‘기생춤을 발굴하라니 시집도 못 가게 하려나!’싶어 그냥 흘려들었다. 그러나 이교감은 당시의 예기를 수소문했고, 결국 유명한 한량이며 예기 정순남의 연인 김태현을 찾아낸다. 통영 서호동 마돈나 다방에서의 만남. 그 시간은 엄옥자에게 정순남을 통한 승전무 발굴의 업적을 이루게 한 운명의 시간이었다. 며칠 뒤 김씨는 연인 정순남을 데려왔지만 기생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싫어 춤추지 않았다. 결국 ‘흉잡힐 일이 아니고, 역사적인 춤을 발굴해야 한다’는 설득 끝에 정순남의 마음이 흔들렸다. 통영의 마지막 예기조합장이던 장구재비 춘당 이갑조를 비롯해 피리의 박경규, 젓대의 주봉진, 해금의 박의성, 북의 노상옥 등 통영에 흩어진 3현6각 악사들을 소집했다.
결국 1966년 통영 서호동 엄옥자의 숙부집 거실에서 ‘싱전무’(‘승전무’의 통영 사투리)는 재현됐고, 그 맥은 고 김해근-고 이국희-고 정순남-엄옥자의 계보로 이어지고 있다.
68년 통영북춤이 승전무로 정착되어 중요무형문화재 제 21호로 지정될 때 정순남, 이갑조, 주봉진, 엄옥자 등 4명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됐지만 71년 연소자를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에서 제외하는 제도가 생겨 엄옥자는 자격이 해제됐다. 기가 막힐 노릇!. 그러나 87년 북춤과 칼춤이 합설되며 준보유자로 인정되고, 96년 한정자와 함께 예능보유자로 재인정됐다.
# 뱃속의 딸이 선물한 인간문화재
인간문화재가 되기 전에 결혼도 했었다. 26살. 통영 황남동 2번지에 살 때 약국집 작은어머니 소개로 이웃에 사는 남편을 소개받았다. 선박업을 하던 남편은 미남이었다. 소개한 작은 어머니조차 ‘잘 생긴 인물값 하느라 바람 피울 것’이라며 결혼을 반대했었다. 그때 말을 들었어야 했다.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고 고모부 소개로 지금의 남편이자 당시 부산 개성여중학교 교감인 변학수(79)를 만났다. 부부는 지금 원향의 무혼을 이어받은 딸 변지연씨(39)를 비롯, 3남매를 두었다. 남편은 은은한 향을 멀리까지 전하라고 ‘원향’이라는 아내의 호도 지어주었다.
그가 정순남과 함께 인간문화재가 되던 해(1968년), 딸이 태어났다. 임신한 채 ‘승전무’를 재현하다보니 애가 거꾸로 들어섰다. 산모의 생명이 위험했다. 친정엄마의 통보. “너는 제왕절개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국내 산부인과 시설로는 불가능하고 외국으로 가야 한다.(그때는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다) 결국 가족회의 결과 아이를 포기하고 너를 살리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는 어렵사리 태어났다. 그 딸이 결국 춤을 춘다.
# 칼의 노래를 넘어서
엄옥자는 승전무 외에 전통춤과 창작춤을 병행해 공연한다. ‘원향 살풀이춤’은 이매방류 살풀이춤, 한영숙류 살풀이춤, 김숙자류 도살풀이춤의 사위 중 자신이 좋아하는 춤사위만으로 재창작한 춤이다.
2003년에는 ‘승전무’를 무용극으로 창작한 ‘칼의 노래를 넘어서’를 공연했다. 채희완(부산대 무용학과 교수) 연출, 김정자(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대본, 엄옥자 안무. ‘난중일기’에 어머니 얘기가 많은 반면 아내 얘기는 없는데, 공연을 통해 이순신의 아내 방씨가 최초로 조명됐다. 공연의 수확이었다.
원향은 계속 마음이 바쁘다. 2002년 결성된 원향춤연구회를 정년 퇴임과 동시에 사단법인 원향춤보존회로 재구성한다. 또 1989년 창단된 엄옥자 한국민속무용단은 90년부터 방학 때마다 프랑스를 기점으로 20개국을 차례로 순회공연하는데 오는 7월31일부터 8월9일까지는 터키 공연을 떠난다.
기녀들의 증언 자료를 토대로 통영의 춤 ‘배따라기’도 발굴한다. 경남 문화재위원으로서의 숙제다. 뱃놀이하며 궁녀들이 추던 ‘배따라기’는 느리고 ‘질어서(길어서)’ 재미없지만 닝만적이고 화려한 원형복원에 주력할 예정. 원향은 이미 그 가락을 토대로 ‘원향지무’를 안무했다.
내년 8월 정년 퇴임하면 통영에 원향의 삶을 마무리할 터전을 일군다. 통영의 정신 따라 뜨겁게 끓었던 피와 춤과 사랑… 힘들게 걸어온 춤길이 엄옥자의 꿈공장에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물레질된다.
엄옥자 교수는 곧 출간될 저서 ‘승전무’를 통해 승전무의 모든 것을 밝힌다. 너무 젊어 소명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전에 승전무 발굴을 이룬 경험 때문일까. 항상 투지와 의지로 불타 있다. 또한 승전무 연구는 굴레가 됐고 아픔이 되기도 했다.
문화유산의 원형 보존과 전승이 가장 중요한 작업임을 강조하는 엄옥자 교수는 “항상 승전무의 원형 보존과 전승 양상을 점검하기 위해 책을 낸다”고 했다. 또 제자들에게 역사가 흘러도 춤 동작의 정확성을 알리기 위해선 모범 텍스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교수는 책에서 승전무로 묶어진 칼춤과 북춤, 승전무의 성립, 승전무의 미학 세계, 승전무의 구성 요소(복식과 소도구, 춤사위, 승전무 음악), 승전무의 기원, 발굴 당시의 상황을 풀어놓았고, 변천 과정사, 승전무 무보를 사진과 설명 및 북한식 자모법으로 구성했다. 세계 무용계의 공통무보법인 라바노테이션으로도 승전무 무보를 기록했다. 승전무는 “어기야 어기 어기여차, 우리 우리 충무장군덕택이요” 등 소리와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 발림하며 ‘지화자’를 부르는 등 특이한 춤이다. 이충무공의 춘추향사, 생·기신제, 한산대첩 기념제전 등에 헌무되고 있다.
▶엄옥자 약력
1961년 통영여고졸업
1965년 경희대 체대 체육학과 졸업
1974년 경희대 체육대학원 무용전공 석사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21호 승전무 예능보유자 인정
1977~80년 부산대 전임강사
1990~현재 부산대 교수
1991~97년 엄옥자 한국민속무용단 예술감독
<현재>
엄옥자한국민속무용단장, 경남 문화재위원, 한국무용연구회 이사, 연무회(중고등학교 무용교사 연구회) 지도교수,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
<저서>
어느 무용가의 미관(1992) 등
<수상>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공부장관상(1968·84), 미국 시카고 렌싱대 총장 감사장(1981), 미국 LA시장 감사장(1989), 폴란드 축제최고상·체코축제 최우수상·헝가리 플라워특별상(이상 1998), 제 1회 중국 호하호특 국제민속무용페스티벌 최우수연출상·개인연기상·특별상(2001), 제 8회 아태장이앤경기대회 개폐호식 총괄안무 대통령표창장(2003) 제 48회 부산광역시 문화상(2005) 등
# 10세 소녀, 담장 너머로 탈춤을 배우다
양소운은 요즘 부쩍 기억력이 없다. 가방도 짐스러워 들고 다니지 않는다. 춤 가르치는 것 외에는 만사가 번거롭기만하다. 그래도 오른손에 낀 반지 3개 중 둘째손가락의 꽃반지는 손녀가 외국 공연 다녀오며 선물한 것이라고 자랑한다.
양소운의 춤맥을 잇는 손녀를 보고 있으면 젊었을 때 춤선생들에게 ‘영특하다’며 귀여움 받던 자신의 모습 같아 미소가 번진다. 80년 전 기억을 모두 되살릴 순 없지만 추억의 조각들을 뒤돌아보며 춤에 악착 같았던 시절을 떠올린다.
양소운은 황해도 재령에서 양희현과 배병숙 사이에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운이 어릴 때 언니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같이 놀던 기억이 없다. 오빠는 전쟁 때 함께 남하했다.
소운은 정례소학교 4학년 때 ‘춤’과 처음 만난다. 10살 여자아이는 학교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운명’을 만나게 된다. “잘 사는 집 앞을 지나가는데 집안에서 흥겨운 가락과 소리가 새어나오더군요. 담장 너머로 훔쳐봤죠. 장구가락뿐인가요. 신나게 돌아가는 몸짓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그때 담장 위에 걸린 제 얼굴을 본 선생이 손짓을 하며 들어오래요. 그러나 이내 ‘돈내고 배울 수 없으면 그냥 가라’더군요. 아무 소리 못하고 집에 돌아와 방금 전 들었던 소리를 밤새 흉내냈지요. ‘흑운이 만천, 천불견…하나둘셋…’하며 입으로 장단을 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게 바로 탈춤이었어요.”
어른도 따라하기 힘든 탈춤을 꼬마는 잘도 했다. 싸리빗자루로 전봇대를 치며 장단에 맞춰 노래하면 주위를 지나던 이들이 ‘아이고, 아까워라 어린애가 돌았구나’ 혀를 찼다.
결국 선생들이 어린 소운을 불러들였다. 돈 없다고 냉정하게 소운을 몰아내던 그들이 밤마다 이불 쓰고 소리 연습하는 꼬마의 정성과 영특함에 지고 말았다. 춤 영재 소운은 각종 경연대회에 나가 상을 탔다.
‘탈춤은 상놈이나 하는 짓’이라며 역정 내던 부친도 별 수 없었다. 단옷날 탈 춤 추던 딸을 보고 ‘잘한다’ 외쳤다. 물론 탈을 썼으니 자신의 딸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남의 딸이 잘한다며 환호했다.
“지금 생각하니, 왜 그리 애쓰며 배웠는지 몰라요. 소학교 다닐 때 일본 가기 전의 최승희와 친구처럼 지냈어요. 최승희 집은 개울 근처 우리 집과 가까웠는데 그 어머니가 딸을 성공시키려고 애썼어요. 나보다 여덟살쯤 위였는데, 일본유학후 해주극장에서 공연하는 개인발표회 초청장을 보내주기도 했죠. 그런데 제 선생님은 최승희가 신무용을 추니 그 춤을 보면 눈 버린다고 못가게 하셨어요. 그러나 저는 공연을 보러갔지요.”
소운의 집은 재령 부자였지만 소운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여자가 학교 교육을 받으면 바람난다’며 천자문 선생인 부친은 한문만 가르쳤다. 결국 모친은 소운을 친정집이 있는 해주로 데려가 삯바느질로 정례소학교에 입학시켜 중학교 1학년까지 공부시켰다. 국악선생들이 개성을 비롯, 황해도 지역 공연에 나설 때마다 천재 소녀 소운을 무대에 세웠기 때문에 학교 갈 시간이 부족했다. 1935년. 드디어 개성 독촉극장에서 ‘병신춤’으로 첫 무대에 섰다.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지팡이 짚고 장님춤도 추고, 곱추춤도 추었습니다. 꼬마가 무얼 알겠습니까?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며 박수해주니 좋아서….”
10살(1934년). 장양선에게 ‘강령탈춤’, ‘봉산탈춤’을 비롯, ‘한량춤’ ‘팔선녀무’ ‘승무’ ‘병신춤’ ‘막춤’ ‘가인전목단’ ‘포구락’ ‘성인인상무’ 등을 배웠다. 36년 정례소학교 졸업 후에는 37년까지 장양선 소개로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노기에게 노래와 ‘해주검무’를 배웠다. 김진명에게 ‘초한가’와 춤을, 양희천에게 ‘공면가’ ‘영변가’ 등 12잡가와 서도소리를, 문창규에게 ‘배뱅이굿’과 병신재담도 배웠다. 임방실과 유종철에게 판소리와 가야금도 사사했다. 양소운은 자신이 배우던 장소가 동네 사랑방겸 강습소 였다며 15명의 학생이 함께 배웠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진 학교를 다녔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일본 방직공장에 재봉사로 취직해야 했다.
# 정신대 피하려고 결혼하다
“악착같이 시집 안 가려했는데 정신대를 피해야 하니 어쩌겠어요. 시어머니는 남편 될 사람에게 ‘야, 어떻게든 쟤를 얻으라’고 했어요. 왜냐고요? 시어머니는 돈밖에 모르는 분이셨는데, 내가 술도 잘 팔았을 것이고, 공연으로 돈도 잘 벌 것이라며 결혼을 강요했죠. 저는 춤만 추고 싶었는데….” 남편 차영운(양소운보다 두살연상)은 배 두척 가진 선주였다. 잘 생겼다. 바람둥이였다.
양소운은 기자에게 약혼 사진을 보여주면서 ‘나는 남편이 싫었다’고 했다. 왜 그렇게 남편이 미웠을까. “제가 30대에 장이 아파 해주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여자를 데리고 나타난 거예요. 입원해있는 마누라에게 바람 피는 여자와 온 겁니다. 정신 있는 사람입니까? 한번뿐인 줄 아세요? 그러길 여러번이에요. 지금도 눈에 선해요. 어찌면 그리도 뻔뻔한지… 너무 미웠어요.”
믿을 수 없는 남편. 6·25 전쟁 후 대구로 피란간 양소운은 떡장사와 미제 물건 장사로 자녀를 부양했고 대구 국악원에서 서도소리도 가르쳤다. 탈춤을 다시 시작한 건 56년. 인천에 정착해 무용학원을 설립하고부터다. 그때 서울에서 봉산탈춤패를 조직한다는 연락을 받고 2년 후 제1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봉산탈춤에 출연했다.
양소운은 특히 미얄할미 역할을 좋아한다. 양반과 미얄할미와 소첩이 벌이는 삼각관계 연기를 하면 속썩이던 남편이 생각나 실감나게 할 수 있었다. “연애 건 것도 아니고 억지로 한 결혼이어서 정이 없었어요. 그리고 해주에서 공연할 때부터 바빴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오빠와 살지 않고 제 집에서 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래서 남편이 겉돈 것도 사실이죠.”
59년 속썩이던 남편이 작고했다. 배 타고 나가 객사했는데 죽은 사실을 한참 뒤에 알았다. 차남 차부회는 유복자가 됐다.
# 남한에서 북한 탈춤을 재현하다
양소운은 은율·강령·봉산탈춤을 다 이루었다. 사실 해주에서는 장교헌이 은율탈춤을 가르쳤다. 지금의 춤사위도 장교헌이 완성했지만, 체계적 춤정립을 하지 않아 장교헌의 제자인 양소운이 전과장을 이론적으로 정리해 계승했다.
양소운은 강령탈춤과 봉산탈춤 예능 보유자로 활동하다 76년 강령탈춤 보유자를 사퇴했다. 그가 사퇴하면 두 사람의 제자가 강령탈춤 보유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봉산탈춤은 고향에서 추던 이들이 모여 공연했고 이두현 교수가 재현작업으로 61년 전국민속경연대회 대통령상을 받으며 세를 확장해갔다.
“강령탈춤을 제일 좋아해요. 같이 탈춤 추던 사람들이 아기자기하게 탈춤을 잘 이끌어 갔고 소리도 많이 들어가서 화려하죠. 물론 봉산탈춤도 재미있죠. 미얄 과장이 제일 매력적이고.”
탈춤 공연에는 한 사람이 1인 다역을 해도 30여명이 필요한데, 대식구인 만큼 지방이나 외국공연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그러나 섭섭한 기억도 있다.
“외국공연 갔는데 제가 화장실에 간 동안 식당에 저만 남겨놓고 모두 차 타고 숙소로 가버렸어요. 기가막히더군요. 식당 사장이 저를 숙소로 데려다 주었지만 죽을 때까지 섭섭할 겁니다.”
양소운의 자녀들도 모친의 피를 받아 탈춤을 춘다. 2남2녀. 큰딸 차재숙(60· 해주검무 전공), 큰 아들 차재호(57·인천시청 공무원), 둘째딸 차선숙(51·국악전공 후 일본에서 거주), 막내아들 차부회씨(48·은율탈춤 보존회 부이사장)다.
막내아들은 은율탈춤을 춘다. 모자가 같은 춤을 이을 법한데, 모친은 아들이 춤추는 걸 싫어해 은율탈춤의 길을 가고 있다. 유한공전 입학 후에는 서클을 만들어 봉산탈춤을 배우기도 했다.
큰아들의 딸 세명 중 쌍둥이 차원선(25·서울대 음대 국악과 졸업)·민선(단국대 국악과 졸업·은율탈춤보존회 사무국장), 막내아들의 아들 차원철(21·인하대학교 법학과 2년)과 딸 은선(17·인일여고 3년)이 탈춤의 맥을 잇고 있다. 양소운은 막내며느리 전인순(46)의 시중을 받고 있다. ‘아들이 연애를 잘 걸었다’며 ‘며느리 없으면 죽는다’고 했다. 이 가족은 문화관광부에 국악명가지정을 신청했는데 아직 좋은 소식이 없다.
막내아들의 귀띔. “어머님께선 무섭게 가르치세요. 무대에서 모두 꼼짝 못하죠. 봉산탈춤 외에 해주검무도 가르치시는데 저는 ‘성인인상무’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날 저에게 춤 못추게 한 걸 후회하신대요.”
양소운은 86년부터 은율탈춤 전수관에서 봉산탈춤을 가르친다. “살아가면서 별 고생 다했어도 후회 안합니다.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가르쳐야 해요. 더 나이 먹기 전에.” 이젠 노여움도 기쁨도 급하지 않다. 미얄 할미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도 손으로 계속 탁자를 두들기며 장단을 타고 있었다. 그 장단가락이 오랫동안 온전하기를…그치지 않기를.
-봉산·강령·은율탈춤 재현 “해주검무 문화재 지정돼야”-
봉산탈춤은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됐다. 황해도 각 지역에선 5일장이 서는 거의 모든 장터에서 1년에 한 번씩 탈춤놀이가 벌어졌다. 그중 봉산은 남북을 잇는 유리한 지역적 조건 때문에 나라의 각종 사신을 영접하는 행사가 잦았고, 또 지방의 농산물이 모여드는 중심지여서 더욱 이런 놀이가 성했다.
약 200년 전 봉산에서 이속(吏屬)이던 안초목이 전남 섬에 유배됐다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많은 개혁을 이루었다. 그후 19세기 말기부터 해서탈춤의 대표적 놀이로 발달했다. 연희 시기는 5월 단옷날 밤에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로 원래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 단오 외에 원님 생일이나 부임 날, 사신의 영접, 탈춤대회가 있을 때도 연희됐다.
강령탈춤은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됐다. 봉산탈춤과 더불어 해서탈춤의 쌍벽을 이룬다. 해마다 5월 단오 때 단오놀이의 하나로 행해진 민속연희. 기원을 삼한시대에 두기도 한다. 놀이에 등장하는 맏양반·둘째양반·재물대감을 각각 마한양반·진한양반·변한양반이라고 한 별칭에서 유추한 것이다. 그러나 한말 해주감영 소속인 교방의 가무인(歌舞人)들이 해산되고, 통인청(通引廳)을 중심으로 한 탈꾼들이 해산되자 그 일부가 강령으로 모여 시작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은율탈춤은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됐다. 내용은 다른 탈놀이처럼 반주 음악에 춤과 몸짓, 재담과 노래를 섞어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과 조롱, 일부 처첩의 가정파탄을 담았다. 종이탈을 사용한다.
해주검무는 무형문화재 지정을 요청했지만 보류됐다. 아직까지 재심의도 없다. 양소운은 스승인 장양선에게 춤, 소리, 탈춤 등을 배울 때 해주검무도 배웠다. 1983년 해주검무를 재현했지만 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 이보영이 잡지에서 해주검무를 보고 눈물이 나왔다고 기고하기도 했지만 해주검무는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양소운과 그 두 딸이 꾸준히 공연하며 해주검무를 계승하고 있는데 박경미·장국진 등 제자들과 쌍둥이 손녀가 잇고 있다.
양소운은 자신이 죽기 전 해주검무가 완벽하게 계승되기 위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라고 있다. 또 있다. ‘배뱅이굿’도 이은관의 소리는 후편이고 양소운의 ‘배뱅이굿’은 전편이다. 각각 다른 버전인데, 문창규 선생에게 사사한 전편 배뱅이굿도 양소운이 작고하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현재 박일훈이 은율탈춤 이수자로 배뱅이굿을 잇지만 앞날이 불투명한 게 사실이다.
1924년 황해도 재령에서 3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34년 장양선에게 춤을 배우다
1936년 황해도 정례소학교 졸업
1935~37년 장양선에게 강령탈춤 사사, 김진명·양희천·문창규·임방실·유종철 사사.
1935년 개성 독촉극장에서 병신춤으로 첫 무대
1944년 차영운과 결혼
1946년 개성에서 이은관과 ‘배뱅이굿’ 합동공연
1950년 대구로 피란
1956년 인천 정착후 봉산탈춤 다시 시작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예능보유자 지정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 강령탈춤 예능 보유자 지정
1976년 강릉탈춤 보유자 사퇴
1983년 해주검무 재현
1978년 벨기에 등 6개국 첫 해외공연
2000년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양소운 배뱅이굿’ 음반제작
2004 양소운 선생 예술인생 70년 기념공연
〈수상〉
제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1961), 제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연기상(1968), 경기도 문화상(1971), 해주검무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공로상·문화부장관상·문화체육부장관상 등 1988년부터 4차례 수상.
# 불쌍한 아버지
강선영은 강병학과 박춘매의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간난이라 불렸는데 결혼 후 시집호적에 박춘배로 올렸다. 원래 8남매였지만 아들 다섯을 내리 잃고 박간난이 33세 되던 해 아들 낳게 해달라는 백일불공 끝에 강선영을 얻었다. 큰 언니와 15년, 작은 언니와 10년 차이. 강선영의 본명은 강춘자(春子)다. 예명 ‘선영’은 결혼 후 남편이 이름짓는 집에서 지어준 이름.
아버지는 후손이 없는 큰 조부 강경수의 양아들이었다. 춘자 자매는 큰 조부를 할아버지라 부르고 친조부 강정수를 작은 할아버지라 불렀다. 아버지는 배재학당 졸업 후 농사를 지었다. 큰 조부는 예인들을 뽑아 궁중에 들여보내는 궁중의전실 재인담당관이었다. 후일 스승 한성준이 춘자에게 ‘선생님’ 대신 ‘할아버지’라 부르게 한 것도 큰 조부와 한성준의 각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큰 조부가 서울에 거주하느라, 아흔아홉간 종가는 춘자의 부모가 지켰다. 얼마후 춘자 아버지는 청상과부와 눈이 맞아 양부와 친부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스트레스로 위장이 약해졌기 때문일까. 40대의 아버지는 1935년, 큰딸 집에 가려고 탄 만주행 기차에서 배탈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88세까지 살았다. 65세 딸은 숨진 어머니 앞에서 통곡했다. “일본공연 중에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귀국했죠. 사실 어머니 때문에 강선영이 존재하죠. 어머니 안 계셨으면 제가 춤 출 생각했겠어요?”
# 딸을 위해 집나온 어머니
친시부, 양시부, 남편 사이에서 마음고생하던 어머니에게 춘자는 희망 그 자체였다. 친조부는 “계집애가 무슨 학교냐”고 했지만 부모의 도움으로 양성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딸을 등교시키기 위해 아침이면 춘자를 먼저 집 밖으로 내보내고 아버지가 수챗구멍으로 책가방을 넘겨주었다. 반에서 1등만 했다.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연극 ‘신식어머니, 구식어머니’의 신식 어머니 역할이 춘자에게 주어졌다. 열심히 대사를 연습했지만 뻣뻣했다. 노래도 음치였다. 춤이나 추는 수밖에. 담임선생이 “춤재능이 뛰어나다”고 했다. 춘자의 무용인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큰 무용가가 돼야 한다”며 춘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3살. 서울의 한성준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달에 두세번 토요일에 조부 몰래 서울행 기차를 탔다. 평일에는 방에서 남몰래 연습했다. ‘그 날’전까진 그랬다. 가을의 그날. 컴컴한 방에서 승무의상을 입고 달빛을 조명 삼아 연습하는데, 그 앞을 지나던 친조부가 손녀방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문구멍으로 못 볼 장면을 보고 말았다. 문을 확 열자마자 춤추던 손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녀, 사흘 만에 빈 손으로 쫓겨났다. 다행히 어머니는 재봉틀 윗부분을 챙겨나왔다. 어머니와 형님 아우 하는 평택의 포목점 여사장이 얻어준 평택역 앞 자그마한 집에서 삯바느질하며 끼니를 연명했다.
양성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한성준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서울로 이주했다. 7~8명의 학생과 무용연구소에 기숙하며 춤을 배웠고 밤에는 종로 야간 중학교에 다녔다. 3학년 중퇴인데도 안성여고에 진학했다.
# 한성준의 유일한 생존제자
무용연구소 월 수업료는 5원(쌀 한가마니가 5원)이었다. 삯바느질과 하숙을 치던 춘자의 어머니는 수업료 외에 버선 속에 딸의 용돈 5원을 더 보냈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았다.
한성준은 하체보다 상체를 많이 움직여야 한다며 양 무릎 사이에 달걀을 끼고 춤추는 훈련을 강요했다. “처음에는 달걀이 깨질까봐 신경을 곤두세워 양 허벅지에 쥐가 나고 화장실도 못갔죠. 달걀 깨지는 꿈만 꾸다 놀라서 일어나고…, 그런데 춤에 집중하니 달걀이 제 몸의 일부가 되는거예요. 스승께선 ‘뼈 삼천마디를 모두 움직여 추어라. 장삼 자락을 걷어올릴 때는 태산을 들어올리듯 기풍이 서려야만 지상과 우주가 소통하는 춤 맛을 살릴 수 있다’고 강조하셨죠.”
강선영은 한성준 문하 3년 만에 졸업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매해 한성준의 생일인 음력 6월12일에 치러졌다. 강선영 한영숙 박학심이 합격했다. 연구생들은 들뜬 기분에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못하면 술마시는 벌도 받았다. 음치 강선영은 벌주를 많이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스승은 제자들을 목침 위에 세우고 회초리를 들었다. 50대씩 맞았다. 스승은 소리쳤다.
“너희는 권번기생 될 사람이 아니다. 무용가가 되어 무대에서 공연해야 하는 사람이다. 기방에서 하는 짓을 배우다니 한심하다.”
# 일본 가려고 정신대를 자원한 철부지
명가는 40년 부민관에서 첫 무대에 섰다. 한성준 타계 후 43년에는 다카라스카 가무단에서 한국춤을 배워달라고 그를 초청했지만 태평양전쟁이 극에 달했고 어머니가 걱정돼 6개월 만에 귀국했다.
“정신대를 가야한대요. 차라리 일본에 있을 걸… 어느 날 밖에 나가보니 정신대 자원하면 일본에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어요? 정신대가 뭘하는 곳인지 모르고 그저 일본 가서 상이군인을 치료하나보다 싶어 정신대를 자원했죠. 제가 참 바보예요.”
어머니는 혼절했다. 형부는 친구의 친구인 천안경찰서장에 부탁해 정신대 명단에서 겨우 처제 이름을 뺐다. 그러나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선 결혼이 상책이었다. 형부가 천안군 수신면 면장 이명구를 데려왔다. 춘자보다 10년 연상의 돈많은 홀아비라고 했다. 이판서집 아들로 형부와 동갑인 29세의 그는 천안경찰서장과 절친해 춘자를 정신대에서 빼준 사람이었다.
춘자는 정신대를 피해 일하는 할머니와 후미진 암자에 갔는데 할머니를 보호자로 믿고 있던 춘자는 음력 5월5일 단옷날 밤 이명구의 여자가 된다. 할머니는 잠자던 춘자가 ‘당할’ 때 모른 척했다. 작전이었다. 그때 임신한 딸이 45년 3월 출생한 이남복(무용의상 디자이너)이다. 임신 5개월에 결혼했다.
# 다시 찾은 춤길
춤은 점점 더 강선영의 유일한 탈출구가 됐다. 5년의 공백기. 서울 독립문 근처에 살림집 겸 강선영 고전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영화배우 고 김진규의 부인 김보애가 초기 연구생이었다. 53년에는 현 소공동 롯데백화점 옆 상업은행 자리에 터를 잡았다.
하루는 시모가 아들 바람기에 지친 며느리 위로차 청주에서 상경했다. 그러나 방마다 걸린 울긋불긋한 한복과 장구, 북, 징… 며느리가 춤추는 여자인줄 몰랐던 시모는 경악했다. 며느리가 아들을 난봉꾼으로 만들었다고 노여워했다. 남편은 바람을 피우면서도 오히려 아내를 때렸다. 57년 결혼생활은 끝났고 남편은 62년 고혈압으로 타계했다.
이혼 후 강선영의 누상동집은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강선영은 시인 구상 설창수 김광섭 고은과 5인방으로 불리며 어울렸다. 구상은 그를 ‘강서방’이라 불렀는데 “나는 5·16을 반대한 사람이니 필시 해를 당할 것이다. 그때 강서방이 내 시체를 찾아달라”는 부탁도 했었다. 문인들이 흩어진 후에 건축가 김수근, 무용가 최현·임성남과 4인방이 되어 거의 매일 만났다. 월간 ‘춤’지 발행인 조동화도 50년 지기. 정확하고 예리한 그의 무용평에 반해 내년에는 태평무전수관에 조동화 흉상을 건립할 예정이다.
# 170개국 1000여회의 해외공연
강선영만큼 해외공연을 많이 한 사람은 우리 무용사에 유일무이하다. 악착같이 무용만 일구었다. 딸은 결혼 후 뉴욕에서 살았다. 외로웠다. 사랑의 숨을 쉬고 싶었다. 78년(54세) 6세 연상인 변호사와 만났지만 하늘은 모든 걸 허락하진 않았다. 강선영이 생활비를 비롯, 그 사람 전처의 빚까지 감당해야 했다. 5년후 그 사람은 사랑할 때 헤어지자고 했다.
#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예총 회장, 국회의원
남편복은 없지만 춤복은 넘쳤다. 85년부터 6년동안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예총 회장이 됐다. 경쟁자인 첼리스트 전봉초를 152대 87로 물리쳤다. 92년에는 비례제 국회의원이 됐다. 예총후원회 조직, 남북한 음악인이 함께 한 송년 통일음악회, 남성무용수 병역문제, 예술원 상금 증액 등이 업적으로 남았다.
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안성에 태평무 전수관을 설립했다. 전수관에선 99년부터 매년 국내 유일의 전국전통무용경연대회가 열린다. 대통령상도 이 대회만의 특전이다. 지난해 8월에는 우리 무용계 최초로 70명의 강선영 무용단을 이끌고 미국 링컨센터에서 공연했다. ‘태평무’도 직접 추었다. 까다로운 평론가의 무용평이 ‘타임’지에 실린 날 모두 울었다.
“춤도 열심히 추고, 화장도 열심히 하고, 정신도 열심히 차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부지런히, 예쁘게 살고 싶어요.” 무용계 원조스타 강선영의 건강한 욕심. 아무도 못 말린다.
▲ 강선영 약력
1930년 양성초등학교 입학
1937년 한성준 고전음악무용연구소 입소
1940년 처음 무대에 서다. 한성준 무용단원으로 서울 부민관에서 공연. 일본 순회공연, 북선(개성 원산 북청 신의부)·만주 공연
1943년 ‘태평무’를 처음 추다
1951년 강선영 고전무용연구소 개설
1953년 제 1회 신작발표회. ‘법열’ 등 공연
1955년 제 2회 신작발표회. ‘목란장군’ 등 공연
1957년 제 3회 신작발표회.‘ ‘농부와 선녀’ 등 공연
1959년 제 4회 신작발표회 ‘수선화’ 등 공연
1960년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1961년 일본 순회공연·파리공연
1986~90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92호 태평무 예능보유자 지정·88서울올립픽홍보사절단 일본순회공연
1990~92년 한국예술단체 총연합회 회장
1992~96년 제14대 국회의원
2001년 한성준 춤비제막
2002년 ‘명무 강선영 평전-여유와 금도의 춤’(이세기 지음) 출간
<수상>
서울시문화상·제 12회 아시아영화제 무용부문 ‘초혼’작품상(1965), 국민훈장 모련장(197),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5) 등
강선영의 ‘태평무’는 한성준의 ‘태평무’와 다르다. 처음에는 한성준 혼자 왕으로 춤추다, 후에 왕과 왕비가 함께 춤추는 태평무를 만들었다. 손녀 한영숙을 왕으로, 강선영을 왕비로 캐스팅했다. 왕역의 한영숙은 터벌림 후 의자에 앉아있는 반면 왕비 강선영은 끝까지 모든 과정을 춤추는 안무로 구성했다.
강선영의 태평무는 왕의 춤이 없고 처음부터 왕비만 춤춘다. 자신이 추던 춤을 무대화하면서 딱딱한 춤을 화려한 모양새로 바꾸었다. 양 팔을 벌리고 서 있던 게 전부인 춤을 부드럽게 대중적으로 풀었다. 그러나 장단은 한성준이 사용한 음악 그대로다. 가락은 같되 부드럽게, 원본을 바탕으로 시대에 어울리게 구성했다. 특히 왕비가 치마를 버선발목까지 살짝 들어올리고 화려한 발사위를 보여주는 대목이 압권이다. 한성준의 발디딤새는 딱딱하고 어렵기만 한데, 강선영의 경우 한성준이 발목을 한번만 돌리는 장단에 맞춰 발목을 서너번 돌리는 디딤새로 볼거리를 화려하게 구성했다. 한국춤에 발디딤새만을 보여주는 춤이 없는데 강선영의 태평무는 발장단을 극대화했다.
1939년 한성준의 설명. “춤이라지만, 왕이 무당처럼 뛰시면서 추었겠습니까? 멋진 음율에 취해 점잖게 팔이라도 점잖게 흔드신거겠죠. 이 춤이 오늘에 와서 무당이 전한 왕꺼리가 된 겁니다. 나는 이를 ‘태평춤’이라 짓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강선영은 전한다. “할아버지(한성준)가 걸어다닐 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장단을 두드리며 걸었는데, 그 걸음이 태평무의 발딛는 춤이 됐습니다. 태평무는 신명이 넘치면서도 조급하지 않은 게 특징입니다. 춤사위의 근본은 경기도 도당굿의 진쇠·터벌림 등 까다로운 무속장단과 다양한 발디딤새로 이뤄집니다. 특히 장단이 서양박자보다 변화무쌍해 춤장단을 익히는 데만 3개월 이상이 걸리죠. 도살풀이 장단에서 어르고 감는 등 절묘한 발놀림이 확실한 이 춤을 한번 추어 보면 다른 춤은 싱거워서 추기 싫을 정도입니다. 원래 왕과 왕비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인데, 나라를 빼앗긴 춤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소망도 깃들어 있습니다.”
의상은 옥색 치마에 흰 저고리. 교방에서 기생들이 추던 복식을 재현했다. 최선은 흰 바지와 흰 저고리, 흰 두루마기차림으로 춘다.
호남살풀이춤의 완성 단계로 치는 초립도 최선의 아이디어다. 그는 4개의 초립를 소유하고 있다. 요즘은 인간문화재가 만든 초립을 쓰는데, 150만원을 호가한다. 초립 테두리가 하늘로 향한 디자인도 특이하다. 보통의 초립은 아래를 향해 살짝 굽어있는데 최선의 초립은 반대로 위를 향해있다.
최선은 춤에 관한 모든 조항에 까다롭다. 한복 의상도 세번 입으면 더 이상 입지 않고 새로 맞춘다. 제자들이 ‘밤깎듯이’ 예쁘고 정갈하게 춤추어도 어지간해선 그의 눈에 차지 않는다.
현재 호남살풀이 전수조교는 딸 최지원씨(31), 김미선(대전대 강사)·장인숙(전 전북대 무용학과 교수)씨 등 3명. 지난 15일 전주에서 열린 제7회 이수자 시험을 통해 현재 이수자는 70여명에 이른다.
최선은 호남살풀이춤 전수관을 자그맣게라도 짓고 싶어 살림집을 팔았다. 최근 구입한 전주 한옥마을내 88평 부지를 구입해 전수관을 지을 예정이다.
# 한국전쟁이 빼앗은 행복
최정철은 1935년 전북 전주에서 아버지 최한필과 어머니 김옥주의 4남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인데 현재 누나 2명과 아우 1명이 살아있다.
아버지는 전북 임실에서 여관업을 했다. 잘 살았다. 그런데 6·25가 최정철의 집안을 통째로 뒤흔들어놓았다. 여관은 망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두 아들은 인민군에 학살 당했다.
“큰 형은 대한청년연맹 부장이었고 작은 형은 경찰이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무렵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저는 어려운 생활을 했죠. 저요, 고생 징글징글하게 했어요.”
춤은 10살에 시작했다. 1945년 해방 후 전주에서 최승희의 제자 김미화가 그의 발을 떼게 해주었다.
45년 김제군 금구초등학교 3학년 때 학예회를 했는데 여학생 2명, 남학생 2명이 뽑혔다. 최정철은 그중 한 명. 학예회담당인 교생은 한국춤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유희성 동작을 지도했다.
‘방아방아, 콩콩 찧는 물방아야…’ 같은 동요에 맞춰 춤추는데 ‘정철이 제일 잘한다’고 칭찬 받았다. 어린이는 칭찬 받는 게 좋아 율동이 있는 곳만 찾아다녔다.
“시골에 극장이 어딨어요? 악극단이 오면 농협창고에 가설무대를 짓고 공연했죠. 신파극도 공연하고 서커스단도 왔는데, 집에선 어린애가 가면 안된다고 막았어요. 결국 몰래 집을 나와 공연장 담을 넘다 발목을 삐기도 했고… 5학년 2학기 때 전주 완선초등학교로 전학 가 김미화 무용연구소에서 13살까지 춤을 배웠습니다.”
# ‘착할 선’의 최선, 호남살풀이춤을 만들다
남중 2학년 때 6·25가 터졌다. 김미화는 부산으로 피란가고 전주에 남은 무용연구생들은 2층 비어있는 학원에 모여 연습을 계속했다. 그중 가장 어린 최정철은 당시 전주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던 기녀 출신 선생 추원에게 배웠다. 특히 그때 배운 수건춤은 ‘호남살풀이춤’의 바탕이 됐다.
“전주국악원 대청마루에 돗자리 깔고 발 내리고 수건춤을 추는데 추원 선생이 돗자리를 벗어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춤음악이 없어 추원이 장구치고 구음하며 가르쳤죠. 그 춤을 ‘동초 수건춤’이라 했어요. ‘동초’는 동기(쪽찌지 않은 어린 기생)와 초립동의 합성어인데, 조그만 수건이나 부채를 들고 추었어요. 수건은 입으로 물거나 손으로 뿌리며 추기도 했죠.”
6·25 직후 공연무대에 섰다. 케이피케이, 케이에이치 등 군인악극단과 무궁화 등 악극단 소속으로 전국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지방공연은 사연도 많다. 비가 많이 오면 공연이 취소됐다. 여관에선 30여명의 악극단원들이 다음 공연지역으로 갈 때까지 죽치는데, 공연을 못했으니 숙박비가 있을 리 만무. 여관 주인은 수금을 위해 악극단의 다음 공연 장소까지 따라가곤 했다.
“우리는 악착같이 뒤쫓는 여관 주인을 ‘호열자(열병)가 따라온다’고 했어요. 당시 출연료를 받지 못한 배우들은 다른 악극단으로 떠나곤 했는데, 그 배우 역할을 할 사람이 없어 우릴 따라온 여관 주인들이 대신 무대에 섰답니다. 정말 웃기는 일이죠. 당시 황해·조미령·이빈화 등이 잘 나가던 배우죠. 저도 출연료는커녕 매일 굶다 결국 집으로 도망갔죠. 어머니께선 무척 반가워하시더군요.”
‘여자 같은 남자’로 불리던 최선. 예명은 단체 공연 다닐 때 연극인 황철이 지어주었다. ‘착할 선(善)을 써라. 최선이라 지으면 그 이름이 널리 퍼지고 유명해질 이름’이라고 했다. 19세부터 ‘최선’이었다.
# 19세 예쁜 남자는 오빠부대 원조
추원이 떠난 6·25 전쟁 직후 전주에서 은방초(본명 은종협·현재 미국 거주)를 만나면서 최선의 춤사랑은 점점 깊어만 갔다.
“남중 졸업 후 고교 진학을 못하고 춤만 추고 있었죠. 그때 거리에서 6살 위 은방초형을 만났어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춤춘다기에 매일 붙어다녔습니다. 그전에는 남자선배들과 어울리며 2층 연습실에서 축음기를 틀고 춤추곤 했는데, 그들이 흩어져 허전할 때 방초형이 나타난 겁니다.”
전주에 은방초의 형수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빌려 연구소로 썼다. 전주 최초의 무용학원인 셈. 당시 영화 ‘자유부인’의 영향으로 가정부인들이 10명씩 춤 배우러 몰려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은방초와 최정철은 자유부인이 되고픈 아줌마들을 가르치느라 바빴지만, 시간만 나면 전주 시내를 손잡고 누볐다. 예쁘게 생긴 남자 두 명이 시내에 뜨면 사람들은 ‘여자냐 남자냐’ 궁금해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곤 했다. 내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돈버는 일보다 춤추는 게 좋아 열심히 가르쳤다.
3년 후 은방초가 서울 남산 소재 서라벌 예대(1기생)에 진학하느라 전주를 떠났다. 최선은 어린 데다 돈도 없어 서울에 따라가지 못했다.
돈이 없어 정인방에게 교습비를 건네지 못했지만 춤을 배웠다. 모두 어려운 시절. 굶주려가며 춤추었다. ‘학춤’ ‘무당춤(대감놀이)’ ‘심불노’ ‘살풀이춤’ ‘행상’(엿장수가 어린이들과 어울리는 춤) 등을 배우고 공연도 했다.
20살. 첫 춤발표회를 전주 국립극장에서 가졌다. ‘호남살풀이춤’ ‘승무’ ‘논개’ ‘꽃의 정’ 등 각종 춤을 추었다. 그때부터 최선에게 오빠부대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인기 짱. 30대까지 거의 매년 개인춤 공연을 가졌다.
# 혼이 없는 춤은 떠다니는 풍선
“명동 국립극장에서 ‘논개’ 공연 때 왜장인 제가 논개역의 이애주와 꼭 껴안고 진주 남강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정말 멋지게 떨어졌죠. 우리는 찰떡호흡이어서 잘 맞았어요. 하하하….”
최선은 ‘최일류’만 고집했다. 명동 국립극장 시절 조명은 당대 최고인 차기봉·이우영이 맡고, 음악은 지영희·지광희·성금련·한상묵·신쾌동 등 명인들이 연주를 담당했다. 무용가들 중 강선영·한영숙·정인방·송범·김진걸·이매방·이인범(발레)·조영자 등 당대의 스타들을 초빙해 교습과 공연을 펼쳤다. 김백봉·임성남·김천흥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무용가들을 초빙했다. 지역에선 당대의 스타들을 초청하는 예가 없는데, 최선은 전주에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전주를 찾아주신 선생님들께 출연료나 강의료를 많이 못 드리고 기차표만 사드렸어요. 서울로 되돌아가시는 그분들 뒷모습을 보며 기차역에서 울곤 했습니다. 배웅하고 연구소로 돌아가면 남는 게 딱 두 가지죠. 장구와 빚! 빚쟁이에게 시달려 장구통 붙잡고 울고, 집세 내라 조르는 집주인 닦달에 못 견뎌도 춤 때문에 살았습니다.”
물자가 귀해 무용 의상 마련도 힘든 시기였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구호물자보따리를 뒤져 스팡클옷을 저렴하게 구입한 후 밤새 스팡클을 떼어내 의상에 붙였다. 족두리 등 소품도 직접 만들었다. 그 습관은 지금도 이어진다.
30대 후반 서울 홍릉에서 무용연구소를 1년여 운영했다. 은방초는 필동에서 무용연구소를 하고 있었다. 그때 최선은 은방초·한상묵(예명 한유성)과 삼총사로 지냈다. 사람들은 ‘세 자매’라 불렀다. 한유성은 장구와 가야금 연주의 최고수였다. 세 자매는 홍릉과 필동연구소에서 반되들이 소주를 들여놓고 춤을 논했다.
그러나 다시 전주로 내려갔다. 제자들이 졸랐다. 고3 수험생 이길주는 스승의 손을 잡고 경희대 무용과에 입학시험을 보러 갔다. 길을 가다 최선에게 픽업돼 무용에 입문한 채상묵도 최선을 사사하다 서라벌예대 진학을 위해 서울로 갔다.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혼의 춤을 추라’고 강조한다. 혼이 담겨 있지 않은 춤은 고무풍선이라고 한다. “고무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춤은 필요없습니다. 또 정신통일과 예의범절을 중요시하죠. 우리 학원에 처음 오는 학생들은 누구나 청소부터 해야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 정돈된 공간 속에서 혼이 담긴 춤을 추어야 바른 춤을 출 수 있는 겁니다.”
결혼은 36세에 했다. 수많은 여자 팬들이 결혼하자고 따라다녔지만 일절 거들떠보지 않았다. 춤에 미쳐있는데 무슨 여자가 필요했겠는가.
“색싯감 사진을 보니 참하고 예쁘고, 장녀라 살림도 잘 한다고 했어요. 저는 춤추는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었거든요. 가정적인 사람을 원했는데 바로 집사람이 제가 원하는 상대였어요. 처가에선 노총각이라고 반대했죠.”
부인 김숙자씨(64)는 ‘춤을 가르치는 노총각이니 분명 총각은 아닐 것이다. 아이도 있을 것’이라 추측했는데 최선을 만나본 후 생각을 바꾸었다.
최선은 2남1녀를 낳았다. 큰 아들 최석훈(35)은 대전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린 주자 겸 배재대에 출강하고 며느리 조혜련도 피아니스트 겸 배재대 강사이다. 둘째 아들 최지훈(33)은 극단 작은신화 배우. 딸 최지원은 4살 때 무용을 배웠고 호남살풀이 이수자로 활동 중이다.
최선은 79년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아내의 손을 잡고 참가했던 일을 가장 잊지 못한다. 자신이 안무한 ‘가갯골의 전설’로 최우수상 없는 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3000만원의 제작비를 들여 준비했는데, 최우수상을 받지 못하자 속상해 울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대학 입학금이 30만원선이었고, 3000만원은 집 몇 채 값이었다. “첫 무용발표회 때도 떨지 않았는데, 대한민국무용제에선 너무 긴장했어요. 집사람 손을 꼭 잡고 ‘열심히 추자’ 다짐했었죠.”
이젠 모두 옛 일이다. 요즘은 힘에 부쳐 ‘큰 일’을 자제한다. 하루종일 호남살풀이춤 전수관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매주 셋째주 토요일에는 새벽 6시40분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 제자 고선아씨의 학원에서 호남살풀이춤을 가르친다. 공연도 자주 한다. 지난 6월30일 석촌 서울 놀이마당공연에 이어 9월9일 부산에서 열리는 ‘8도 살풀이축제’, 9월13일 전주 공연이 기다리고 있다. 영남지역과 달리 춤기운이 쇠해진 호남의 한국춤을 지키고 있다.
“다시 그 시절로 가라면 가야지요. 스승께 장구채로 맞아가며 춤을 배웠지만, 선배들과 몰려다니며 춤추던 기억…, 너무 재미있었어요. 굶어죽어도 무대에서 춤추다 쓰러지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정신은 변함없어요.”
무대에서 죽는 게 바람이다. 무대에서 춤춘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끊어지는 숨. 그것만이 ‘예쁜 남자’의 소원이다.
▲ 최선 약력
199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지정
1980년 대만·일본 무용협회 초청 합동 친선공연
1985년 미국 순회공연
1986년 프랑스 세계민속무용공연에 한국 대표로 참가
1988년스위스·독일·이탈리아·프랑스 순회공연(문공부 후원)
1991년 러시아 사할린 한국동포 위문공연(문화부 후원)
1992년 동남아 순회공연(태국 국립예술대 총장 초청공연)
1998년 인간문화재 최선 춤 열린무용 대공연
1995년 최선 춤 50주년 대공연
2000년 최선 춤 대공연
2001년 캐나다 포크로라마 민속제전 초청공연
2004년 최선 춤 60년 대공연-한민족의 혼
2006년 최선 춤-목련꽃 피고 지고
〈수상〉
전라북도 문화상(1969), 한국교육무용총연합회 작품지도상(1971), 중앙대 무용공로상·조선대 안무상(1977), 전라북도 지사 감사장(1980), 전주시민 문화상(1982), 개천예술제 특상부문 대상(1984), 원광대 총장상(1990) 등
# 예술향기 가득한 집안의 피내림
아버지는 1910년대 유명한 소리꾼이며 가야금 명인. 큰오빠 재덕과 언니 매향, 사촌 오빠 상건도 예인이었다. 큰오빠는 서산 구 터미널에 풍류객들이 찾는 ‘낙원식당’을 차리고 문화 사랑방 지킴이로 살았다. 가수 심수봉이 그의 딸이다. 큰오빠는 일본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집안에 돈이 없어 포기하고 아버지의 작은부인이 사는 서울 집에 거주했다. 67년 64세로 작고할 때까지 오빠는 예인의 삶을 이었다. 심화영도 큰오빠의 낙원식당을 지나는 풍류객들에게 춤과 소리와 악기를 배웠다. 언니 심매향(본명 혜영)은 서울에서 예기로 활동했다. 아버지는 서울 사는 작은부인에게 가면서 7살 언니를 데려가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 다재다능한 언니는 20세에 위장병으로 요절했다. 작은오빠 심재민도 농사짓다 일제 징용군으로 끌려간 후 남양군도에서 숨졌다.
사촌 오빠 심상건 역시 유명했다. 가야금 병창 명인이고, 유성기 음반도 냈다. 사촌 오빠가 자기 재주를 절대 전수하지 않아 큰오빠는 사촌 몰래 유성기 음반을 듣고 독학하며 작곡도 많이 했다. 두 권의 작곡집도 냈는데 흔적이 없다. 가족들이 보관하다 돈이 아쉬워 팔아버렸다. 심화영은 자신에게 맡겼으면 그 책을 잘 간수했을 것이라며 지금도 안타까워 한다. 당시 오빠는 하루 종일 가야금을 타느라 가야금 줄이 ‘물렁물렁’해질 정도였다.
심화영은 온양 신창소학교를 다니다 2년 만에 큰오빠를 따라 서울로 갔다. 서울에 있는 학교는 일제 징용을 피한 학생들로 만원사례였다. 화영은 학교를 수소문하느라 3학년을 건너뛰고 큰오빠 소개로 이화학당 4학년이 됐다.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 1년을 다니다가 그냥 나와버렸죠. 다시 신창에서 학교를 가려니 산 3개를 넘어 걸어다녀야 했죠. 2살 아래인 조카딸 심태산과 걸어서 등하교 하는데 나무꾼들이 산길을 막고 장난치는 날이 많았어요. 기숙사는 돈이 없어 못가고…. 게다가 학생들 가운데 애 아버지들이 많아 우리들을 놀리기에 2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서산의 심화영은 똑순이었다. 글도 잘하고 생일집이나 잔칫집에 가면 춤추고 소리도 잘했다. 17세부터 방씨 성을 가진 이에게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웠고, 방영래에게 ‘승무’를 사사했다.
“양금 한 바탕을 하루 저녁에 4장씩 배웠어요. 이튿날 다시 연주하면 너무 잘한다고 칭찬만 들었죠. 책도 많이 읽었어요. 우리 집은 책 부자였거든요. 큰오빠가 책을 좋아하고 저도 천자문을 배웠죠. 그러니 제 눈에 차는 남자가 있었겠어요?”
시집가기 싫었다. 오빠의 식당에서 야채 씻고 고추 빻으면서 시조, 소리, 춤, 악기를 배웠다. 낙원식당에 드나들던 율객들과 오빠가 그의 스승이었다.
# 청진권번의 스타, 동선이
20살, 운명의 시간. 큰오빠따라 청진에 갔다. 낙원식당에 자주 오는 오빠 친구 이옥화가 청진에 권번이 생긴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심화영은 스카우트 케이스였다. 기명은 동선(東善). 청진 권번에서 소리 선생을 했고, 잘 나가는 예기로 20~33세까지 활동했다.
당시 상황이다. “요릿집마다 비밀 탐정처럼 예기들이 손님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는지 정탐하는 권번 소속 예기가 5~6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월1회 회의를 통해 수준 이하의 예기들을 추려냈습니다. 기생들의 옷맵시도 감시하고 선행상 수상자도 정하고 그런데 누가 ‘그들’인지는 몰랐어요. 비밀이니까요.”
“돈 벌러 작정하고 간 곳이잖아요. 13년을 견뎠습니다. 기생할 사람이 아니라며 ‘왜 이렇게 됐냐’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었는데…. 기생이라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 못써요. 자기를 지켜야지.”
연애하고 싶은 남자도 있었을 테지만 집에 돈부치느라 남자는 꿈도 꾸지 않았다.
“결혼해서 살 사람도 아닌데 남자 만나 연애만 하면 뭐합니까. 이름 버리고 몸 망가질 뿐! 남자는 다 도둑이야. 그때 사귄 사람도 있긴 했는데….”
청진 권번은 배우는 학생이 100여명, 전화받고 사무 보는 이들도 33명이나 됐다. 유곽과는 차원이 달랐다. 청진 권번에선 인간문화재도 배출했다. 예기들은 연1회 공연도 했다. 손님 방에 들어가 밥 먹는 건 금기였다. 갑종 기생들은 점잖았고 일류 요정에 불려갔다. 군인들을 손님으로 받는 을종 기생들과는 격이 달랐다.
“손님 방에 들어가면 시조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판소리하고 춤도 추고, 함부로 놀았다가는 쫓겨났어요. 비밀 감시요원이 권번마다 상주하니 처신을 잘해야죠.”
갑종 예기 심화영은 일류 요릿집만 불려갔다. 놀아주는 첫 시간 가격은 1원50전이고, 두번째 시간은 1원. 그 돈에서 요릿집 몫을 떼고 권번에서도 떼었다. 많이 불려간 횟수로 1등하면 금반지도 받았다.
“저는 무대나 마당 같이 넓은 곳에서 춤추었습니다. 특히 부성관처럼 2, 3층 규모의 넓은 요릿집에는 유리방도 있었습니다. 인력거 타고 거리 지나가면 동선이 인기가 최고였어요.”
청진을 떠난 건 일제 강점 말기. 일본군은 부녀자들까지 총알받이로 전쟁터에 보냈고, 기생들에게도 혹독한 사격 연습을 시켰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 땅에서 일제가 권번을 없애자 기생들은 유곽으로 몰려갔다. 예기 동선은 유곽 대신 석달간 바느질 품을 팔았지만, 일거리가 줄어들자 고향인 서산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 결혼이 전부인 줄 알았던 노처녀 예기
“일제가 물러가고 빨갱이들이 몰려드는디, 어떤 빨갱이는 교도소 문을 따고 죄인들을 죄다 풀어주질 않나, 강탈한 넘의 손목시계를 손목부터 어깨꺼정 촘촘히 차고 다니질 않나…. 외국 군대는 왜 남의 나라 땅을 뺏는지 원. 그 넘들이 안 뺏었으면 우리나라 지도가 찢기지 않잖여. 울 오빠도 굴 속에 숨어 살어 수염이 길었는디….”
해방 후 청진에서 홀로 피란 가는 마지막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열차 안팎은 사람 투성이.
33살. 서산으로 귀향한 지 넉달 만에 결혼했다. 험한 시기에 여자 혼자 살 수는 없었다. 서산에서 농악대 상쇠인 소띠 동갑내기 신랑 송운석을 구했다. 중매가 아니고 심화영이 직접 택했다. 결혼식은 못했다.
“권번에서 번 돈이 몇푼 돼야쥬. 남편은 튼튼하고 주먹이 셌어유. 사람들이 꼼짝 못했지. 함부로 내 손목 잡는 이가 없었으니께. 지금으로 말허면 깡패였슈.”
부부는 ‘우리식당’을 차렸다. 그러나 남편은 돈 버는 일에는 취미가 없었다. 집에 쌀이 떨어져야 일거리를 찾아나섰다. 심화영은 1950년대 춤 배우러 오는 이에게 1인당 300원씩 받고 한두 명씩 가르쳤다. 나중에는 1000원씩 받았다.
“그때만 혀도 춤을 드러내놓고 배우덜 못했슈. 밤에 몰래 배우는 사람들에게 강습료를 제대로 받을 수나 있나유. 남편 몰래 배우려니 얼매나 힘들어, 배우는 이나 가르치는 이나…. 그때 300원씩 댓 명 가르치면 쌀 한 되는 샀슈. 학생들은 장이 서는 날 밤 몰래 우리 집으로 찾아와 춤을 배우곤 했쥬. 지금 겉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주먹 남편’. 동네 사람들은 장구 소리가 거슬려도 싫다고 못했다. 제일 재미있던 때였다.
송우석과는 3남2녀를 낳았다. 송영우(1946년생·62), 송경자(59), 송영신(57), 송영구(55), 송경옥(52). 친손자는 4명, 외손자 4명. 그 중 막내딸의 장녀 이애리(28·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조교)가 외조모의 뒤를 잇고 있다.
심화영은 요즘 고민이 많다. 도에서 전수회관을 마련해 주기 전까지 자력으로 연습 공간을 마련해 전수생들을 지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적어도 200평의 부지가 필요한데 여력은 없다. 2000년 ‘승무’가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2003년 이애리씨가 사비로 연습실을 얻었지만 오래 견딜 순 없었다. 인간문화재라는 이유로 도청에서 받는 월70만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요즘은 사물놀이 연습실을 동냥해 문화재 전수생을 가르친다. 현재 전수조교 이애리씨를 비롯해 이수자 3명, 전수자는 6명.
“문화재 지정받고도 좋은지 몰랐슈. 너무 늦게 됐으니께. 우덜이 신청한 것도 아니고 충남 문화재위원인 심우성 관장이 핸 것 아니요. 요즘은 승무, 손춤(승무 기본 춤사위로 만든 입춤)을 가르쳐유. 승무만 배우면 모든 춤을 다 출 수 있으니께. 지는 88세까지 ‘승무’ 공연을 했는디 요즘은 안 춰유. 늙은이 춤이 제대로 추어지겠슈?”
걱정이 하나 더 있다. 병석의 아들 때문이다. 20여평 아파트에서 중풍에 걸린 큰아들 병수발을 든다. 큰며느리는 새벽에 우유와 요구르트 배달을 끝내고 오후 3~4시에 귀가한다. 대학 졸업한 큰손자은 회사원이고, 작은 손자는 취업준비 중이라 바쁘다.
“난 죽으믄 안뎌. 아들 때미, 사는 데까지 살아야 혀. 몸은 지 맘대로 안되는 거지만 말여. 그래서 힘든거여. 몸 편한 게 세상 최곤디…. 춤도 세상 사는 거랑 마찬가지여. 몸 편한 게 최고여. 맹글어 추지 말고 몸이 편하게, 맘대로 놀아야 혀.”
‘호흡으로만 추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잔소리. 목소리는 정정한데, 쇠약한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래도 아들을 위해 살아있는 것만 감사할 뿐. 간이역에서 추스른 보퉁이마다 곤한 풍경이 가득하련만 청진 권번의 스타 ‘동선이’는 힘들었던 그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새 보퉁이를 풀고 힘든 세월의 무게를 훌훌 털어버렸나보다.
1917년 충남 온양으로 이사
1924년 온양 신창 소학교 입학
1926년 서울 이화학당으로 전학
1927년 온양으로 다시 이사
1930년 서산으로 이사후 큰오빠에게 가·무·악 배움. 방영래에게 ‘승무’ 사사
1932~45년 청진 권번에서 활동
1937년 김초월(판소리 명창)과 공연
1945년 동갑내기 송운석과 서산에서 결혼
1986년 국악교습소 개설 인가
1993년 부친 심정순 기념비 서산문화원에 세움. 이날 가수 심수봉이 ‘무궁화’ 부름.
1994년 서산 문화대상 수상
2000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
심화영, 반듯하고 청아… 중고제 마지막 지킴이
심화영은 소리 명인이기도 하다. 그는 평조(平調)인 중고제(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전승된 판소리) 소리의 마지막 지킴이다. 중고제는 고상하고 담백한 소리가 특징인데, 동편제와 서편제가 판소리의 거맥을 이룰 때 충청도 사람들은 소리 맥 잇기에 큰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심화영은 예능인 심팔록의 손녀, 소리꾼 심정순의 딸, 가수 심수봉의 고모로 세습 예인의 가통을 잇고 있다. 중고제의 맥을 잇는 유일한 소리꾼이다. 심화영의 반듯하고 청아한 소리가 오죽 좋았으면 청진 권번에서 춤이 아닌 소리 선생을 했을까.
그는 요릿집에서 가야금 타며 소리했고, 부채 들고 판소리했다. 목이 좋아 청진 권번에서 익힌 서도 소리까지 했다. 누대를 거친 성음의 전통을 심화영만이 잇는 셈이다.
청진 권번 시절 이야기다. 수해기금 모금 공연이 있었는데, 악사가 없어 ‘승무’를 추진 못하고, 대신 심화영이 판소리 ‘춘향전’을 부르면 춘향·이도령·변학도로 분한 춤꾼들이 무용극을 공연할 만큼 그의 소리는 실하고 아름다웠다.
요즘도 춤보다 소리를 많이 한다. 몸이 쇠약해져 춤판에 오르지 못하지만, 자신이 서야 할 무대에 손녀 이애리씨(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존회 회장)를 세우고 손녀의 승무 사위에 자신의 소리를 얹어준다.
심화영류 ‘승무’의 장단은 염불, 자진 염불, 타령, 자진 타령, 굿거리 북치는 가락, 굿거리의 순서로 진행된다. 반주악기는 피리, 대금, 해금, 장구의 편성.
심화영류 ‘승무’는 일반적인 승무와 달리 소박하고 간결하다. 또 대부분의 승무는 엎드려서 시작하지만 그의 승무는 선 채로 시작한다. 의상도 흰색이나 분홍색이 아닌 미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다. 장삼도 흰색이 아닌 검은색이다. 큰오빠 심재덕으로부터 전해지는 가문의 예풍이다.
배명균이 끔찍하게 아꼈던 조카 배정혜. 그러나 삼촌과 조카는 1977년부터 서로 다른 작품세계를 추구했다.
그러나 76년 배정혜 단장이 선화예고 무용부장으로 재직하며 발레의 바(bar)를 이용한 기본동작을 한국무용에 시도했을 때 삼촌은 좋은 시도라고 칭찬했다. 배단장은 당시 12종류의 상체호흡과 하체호흡법으로 이뤄진 바 기본동작 훈련을 실행하면서 자신이 잘 추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게 됐다고 한다.
1년 동안 바동작을 연구한 후 탄생한 작품이 77년 공연된 ‘타고 남은 재’였다. 남성무용수들에게 바 기본동작을 가르쳐 안무한 이 춤은 당시 한국무용사의 한 획을 긋는 실험작으로 꼽힌다. 77년 그해의 최우수작품상으로 선정됐고 배정혜는 ‘춤의 건축가’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삼촌의 생각은 달랐다. 배명균은 ‘이건 춤이 아니다. 너는 망했다’고 단언했다. 30년 세월을 조카의 춤에 바친 그로선 섭섭함을 느꼈을 터. “진아(배정혜)는 망해도 내 안무작들은 건질 것”이라고 분노했다.
배정혜는 삼촌을 이해하면서도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게다가 조카에게 “이 작품(타고 남은 재)외에는 더 이상 나올 춤이 없다. 안무는 하지 말고 춤이나 추라”고 했는데, 삼촌은 배정혜의 신작이 초연될 때마다 “더 이상 나올 작품이 없다”고 샘(?)을 내곤 했다.
그러나 조카는 국립국악원 무용단 상임안무가, 서울시립무용단장, 국립무용단장을 역임했고 지난해 다시 국립무용단장에 임명되는 등 삼촌이 마련해준 춤밭을 자신의 철학으로 화려하고 알차게 다져왔다.
삼촌도 지난해부터 변했다. 조카가 안무한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소울 해바라기’를 본 후 “이제 배숙자는 완전히 지워졌다. 그 옛날의 촌티가 없어졌다”며 흐뭇했다. 삼촌은 항상 조카가 세살난 파랑새처럼 귀하고 예쁘기만하다.
▲배명균 약력
1927년 함경남도 삼방에서 배명인과 홍씨 부인사이에서 3남1녀 중 셋째로 출생
30년 외조부에게 천자문부터 명심보감까지 한문 수학
41년 신고산보통학교 졸업
44년 서울 경성상업학교 졸업후 귀향
45년 삼방보통학교에서 교편
46년 학예회에서 ‘장화홍련전’ 연출
49년 수십대 1의 경쟁률 뚫고 세무사시험 합격
52년 원주 군인극장 춤공연에 배정혜 첫 출연
53년 충주와 청주 지방순회공연
55년 제1회 배정혜 무용발표회 ‘황진이1’ ‘남아의 의지’ ‘참새춤’ ‘부채춤’ ‘장고춤’ 등 안무
58년 제2회 배정혜 무용발표회 ‘풀잎’ ‘천국과 지옥’ 등 안무
69년 제3회 배정혜 무용발표회 ‘청산별곡’ ‘각설이’ ‘주마등’ ‘백팔염주’ ‘가랑잎’ 등 안무
70년 김정만과 결혼
75년 서울 동대문에 배정혜무용학원 개원
79년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최선 안무의 ‘가잿골이야기’연출. 최우수상 수상
81년 서울 왕십리에 신일무용학원 개원
86년 광주시립무용단의 ‘심청전’ 안무
2003년까지 50년 동안 배명균류 산조인 ‘사미인곡’ ‘사랑가’ ‘수전노’ ‘어우동’등 200여편 안무
막 뒤의 50년 ‘춤 조련사’ 배명균
춤추는 사람 뒤에는 춤 조련사가 있다. 춤은 동작만 익힌다고 되는 게 아니다. 느끼고 깨달아야 하기에 춤조련사의 힘은 막강하다. 안무가 배명균(80). 우리나라 직업안무가 제1호다. 50년 동안 막 뒤에만 있었다. 무대에서 단 한번도 춤추지 않고 안무만 고집한 사람으로 유일하다. 1950년대부터 한국창작무용을 200여편 안무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인간문화재도, 언론에 알려지지도, 무용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채 춤을 짝사랑하며 살아왔다.
행복할 때는 시계를 보지 않는다던가. 춤출 때는 누구나 자신의 아름다운 세계에 빠져 춤추게 마련이다. 무대 뒤 조련사는 보이지 않는다.
무용가와 안무가의 구분이 없는 우리 무용계에서 배명균은 한번도 무대에 서지 않은 안무가이다. 특히 조카 배정혜(63·국립무용단장)의 천재성을 발견해 무용가로 키운 교육자이고, 한국창작무용사에 빛나는 연출가 겸 안무가이다. 그의 손을 거쳐 무대에 올린 작품은 기억에 남는 것만 200여편. 기록적이다.
배명균 춤은 음악과 춤의 조화가 완벽하다. 음악 종류도 다양하고 언제나 당대 최고 명인들의 연주를 고집한다.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춤 이전에 음악의 깊이와 선율에 실린 자연의 움직임을 강조한다. 또 일상적인 춤소재가 많고, 문학적이고 서정적인 색채를 띤 작품이 주를 이룬다.
기자는 늦은 무더위가 한창인 8월 어느날 배명균이 30여 년 살아온 서울 중곡동 집을 찾았다. 그는 1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었다. 거동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기자의 우려와 달리 과거의 화려한 춤활동을 소상히 말해주고 공연날짜와 장소까지 정확히 기억해냈다. 그런데 웬일인가. 어느 순간, 기자를 무용가로 착각하고 함께 춤사위를 밟아보자며 기자를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운신이 힘든 자신의 몸을 일으킨 후 직접 한발로 서서 박자를 타며 스텝을 밟는다. 기자에게 ‘나를 따라 해요’ 한다. 형광등 불빛아래서 한국춤의 박자를 타며 춤추는 노 안무가. 쌉싸름하고도 뭉클하다.
▲배명균이 없으면, 천재소녀 배정혜도 없다
배병인과 남양 홍씨부인(호적에 ‘홍씨’로 돼있음)의 3남1녀 중 셋째로 함경도 삼방에서 태어났다. 큰딸에 이어 큰아들 배석균(1999년 78세 작고), 명균, 연균(73)의 순.
원주에서 살며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배병인은 두 아이를 낳은 후 물이 좋다는 삼방으로 이사했다. 부잣집 큰아들 배석균은 동생 명균의 덕으로 결혼했다. 신고산출신 장옥녀와 중매결혼했는데, 당시 배명균의 생김새를 보고 반한 중매쟁이가 ‘큰아들도 잘 생겼을 것’으로 믿고 소개했다. 그런데 큰아들은 말랐고 키도 크지 않았다. 큰아들과 장옥녀의 딸이 바로 배정혜 국립무용단장이다.
배명균의 아버지도 외모가 출중했다. 당시 관광지인 삼방에서 관광객들에게 웃음을 팔던 기생들은 배병인을 그냥 두지 않았다. 홍씨부인은 ‘배병인과 하룻밤 운우지정을 나누면 소원이 없겠다’는 기생들의 아우성에 못이겨 남편의 하룻밤 사랑을 위한 방을 만들어주곤 했다.
토끼띠 배명균은 신고산 초등학교 졸업후 서울에서 경성상고를 졸업했다. 배정혜 단장의 아버지 배석균은 서울 한약방에 기거하며 유학했고 배명균은 하숙을 했다. 배명균은 경성상고를 졸업하자마자 삼방으로 귀향해 신고산 금융조합에서 1년동안 서기로 근무했다. 그후 삼방초등 6학년 담임을 맡아 학교 인기순위 리스트에 ‘급진입’한다. 스무살 남짓의 어린 나이에 담임선생으로 발탁된 그는 2년후 학예회를 비롯, 연극 ‘장화홍련전’ 연출 등 교내행사를 총괄책임지며 문학성을 발휘하게 된다.
당시 배명균의 장조카 배정혜는 3살임에도 ‘장화홍련전’의 파랑새역으로 출연해 삼촌이 ‘따라가 따라가’하면 무리를 따르고, ‘빠져 빠져’하면 연못에 빠지는 등 삼촌이 하라는 대로 따랐다. 삼방에서 원산으로 공연갈 때는 삼촌이 세살 조카를 품에 안아 재우며 이동했다. 그때 공연 프로그램은 ‘푸른하늘 은하수’. 같이 출연한 아이가 춤순서를 잊어버려 울며불며 막 뒤로 들어가도, 배정혜는 노래부르며 끝까지 춤추었다. 천재소녀로 불리던 배정혜의 본명은 숙자(요시코). 집에선 ‘진아’라 부르다 전국 방방곡곡에 춤으로 이름을 날리라는 의미에서 배방울로 이름을 고쳤다. 6·25전쟁 후 새 호적에는 배방원으로 명명했다. 배정혜는 25세에 얻은 이름.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배명균은 아껴 모은 용돈으로 태중의 조카를 위해 여자아기용 모자와 옷을 사곤 했다. 여아인 줄 몰랐지만 괜히 여자조카면 춤도 가르치고 좋겠다 싶었다고 한다. 배명균은 3년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해방후 서울로 이주했다.
“학생들에게 똑같이 춤을 가르쳐도 진아(배정혜)가 제일 잘하고 나머지 애들은 따라오질 못했어요. 세살난 꼬마가 무얼 안다고 파랑새 동작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때 어린 조카의 재능을 발견한 거죠. 당시 저는 서울에서 전옥을 비롯,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공연을 보러 다녔습니다. 학생은 연극공연을 볼 수 없었어요. 책가방에 사복을 넣고 다니다 극장 앞에서 교복과 모자를 벗고 얼른 사복으로 갈아입고 학생주임 눈에 띌까봐 재빨리 극장으로 들어가곤 했죠. 연극을 왜 좋아했냐구요? 무용을 가르치기위해 인접 장르인 연극공연을 많이 봤어요.” 민요에 맞춰 춤을 안무했다. 사실 그의 단점은 장단을 못 친다는 것. 장구를 치지 못하는 대신 구음을 하거나 ‘노들강변’ 등 노래에 맞춰 안무하고 노래를 부르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방 후에는 6살인 조카 배정혜의 본격적인 무용교육을 위해 서울 숭인동 장추화 무용연구소에 최연소 원생으로 입소시켰다. 당시 배명균은 중외흥업주식회사 경리과장으로 근무하다, 49년 수십대 1의 경쟁을 뚫고 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중부 세무서 간접세무과에 근무했는데 바쁜 와중에도 조카가 학원을 오갈 때마다 손수 데리고 다녔다. 그는 춤만 추지 않았을 뿐 학원에서 같이 배우고 집에선 복습시키며 조카의 독선생 역할을 했다.
6·25전쟁 후에는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원주 치악산 근처 모친의 고향인 강림면 노고소에 피신해 있다가 부산으로 이주했다. 전쟁 후 노고소로 돌아온 배명균은 초등학생인 배정혜를 데리고 치악산 고개를 넘나들며 원주에서 하루 6시간 이상 무용훈련을 시켰다. 8살 배정혜는 쌀가게 주인의 후원으로 원주극장 무대에 섰다. 당시 삼촌이 부산으로 연락해 20대 후반의 김문숙, 최희선, 고 박성옥, 고 김민자 등이 8살짜리 공연에 찬조출연하러 왔다.
그는 지역 무용가들의 작품을 안무하는 중에도 조카에게 춤을 가르쳤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조카는 장학생으로 연구소를 다녔다. 마치 심봉사가 어린 딸 젖동냥하듯 조카에게 춤을 대주었다. 1·4 후퇴 후에는 김백봉 무용학원의 첫번째 학생으로 입소했다. 성금련의 남편 지영희로부터 북 연주와 승무도 배웠다.
결국 삼촌은 각종 공연에 출연하는 조카를 위해 직장을 다니지 못하고 매니저가 되고 말았다. 무용의상도 삼촌이 디자인했다.
삼촌은 조카의 춤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중앙여중 3학년인 배정혜가 두번째 무용발표회를 할 당시 삼촌도 2년 동안 중앙여중과 중앙여고 무용강사로 활동하며 예술제를 비롯, 여러 문화행사에서 ‘춘향전’ 등 많은 작품을 안무했다. 결혼은 43살에 했다. 서울 명륜동 이현자 무용연구소에서 아홉살 아래 김정만(71)을 처음 만났다. “조카가 숙명여대 국문과 4학년일 때 명동 국립극장에서 제3회 배정혜무용발표회를 했는데, 그때 조카의 춤을 보고 홀딱 반했죠. ‘저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춤을 안무한 남자면 멋있겠다’싶어 만나기로 했어요.”
신혼여행은 울산으로 갔다. 실은 신혼여행이 아니고 한국무용가 이척의 작품을 안무해주러 갔는데, 아내는 그 사실을 모르고 따라갔다.
“신혼여행의 대부분을 혼자 있었어요. 울산에 가서야 신혼여행이 아닌 걸 알았죠. 저는 조카춤에 반해서 결혼했으니 남편의 행동이 용서됐어요.” 서울 이문동 시댁에서 시부모·큰시아주버니 내외·조카 진아와 살았고, 큰아들 돌이 지난 후 옆집으로 분가했다.
장보러 나가면 동네약국의 약사가 ‘남편이 예쁜 여자(무용가) 데리고 집에 들어갔다’고 알려주곤 했다. 그래도 샘나지 않았다. 남편이 춤추는 건 싫었지만 남편이 춤을 가르치는 건 좋았다. 남편은 아침에 나가 새벽 두세시에 들어왔지만 남편을 무용에 맡겼다. 아내는 살림하고 두 아이 키우는 게 전부였다. 남편이 안무료로 받은 돈이 생활비였다. 현재 두 아들 배중석(36)·완준(34)은 모두 삼성그룹 직원이다.
▲삼촌의 운명이 되어버린 조카
치매에 걸린 삼촌의 지난 날을 기자에게 증언하기 위해 삼촌의 보물인 배정혜 국립무용단장도 배명균의 집을 찾았다. 화장대에 배정혜 단장이 대학졸업때 찍은 독사진이 두 아들의 사진과 나란히 놓여있다. 삼촌 부부의 각별한 사랑이 절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삼촌은 무용밖에 모르시는 분이에요. 삼촌이 없었으면 저도 없죠. 2년 전에 왕십리에 있던 삼촌의 무용연구소를 닫았는데, 그후부터 치매증상을 보이세요. 월세가 부담스럽더라도 연구소를 그냥 둘 걸 그랬어요. 활동하다 그만두니까 저렇게 되신 것 같아서….”
배명균은 서울 왕십리에서 배명균 무용연구소를 30여년간 운영했다. 춤을 가르치고 안무도 했다. 무대에 오르진 않았지만 춤실력은 명인급.
노 안무가가 기자에게 한마디 한다. “발사위가 멋져야지, 안보인다고 되는대로 하면 안돼요. 발가락끝을 살짝 들어올리는 그 순간이 중요해. 그리고 발바닥처럼 손바닥의 각도도 중요하고요.” 정신을 놓칠 때마다 기자를 무용가로 착각한다. 발을 곱고 살포시 내디디라고 강조하며 투스텝을 밟는 춤의 마술사. 그 모습에 환갑을 지낸 조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삼촌의 진정한 ‘작품’이 바로 자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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