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26

醉月 2009. 11. 16. 08:28

 金起林  바다와 나비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  여성 (1939년 4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孤掌難鳴)는 속담이 있다. 혼자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는 뜻이다. 의미 역시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기호론자(記號論者)들이 잘 인용하는 해골표를 두고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만약 해골 표시를 한 깃발이 길가에 꽂혀 있었다면 그것은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위험 지역이라는뜻이다.


  그러나 바다의 배에 그런 기(旗)가 달려 있었다면 해적선이라는 전연 다른 의미가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작은 병에 해골 표시가 있으면 독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함부로 먹지 말라는 것이고, 큰 상자에 그런 표시가 달려 있었다면 방사성 물질이 담겨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가 될 것이다.
  김기림(金起林)의  바다와 나비 를 읽는데 있어서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바다와 나비 라는 제목부터가 두 단어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비라고 하면  탐화봉접(探花蜂蝶) 이란 숙어대로 꽃과 관계된 의미로 굳혀져 왔다. 그러나 그 틀을 깨고 꽃을 바다로 바꾸면 바다에도 나비에도 다같이 화학작용 같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나비와 꽃 ,  바다와 갈매기  같이 굳은 살이 박힌 정형구에서는 도저히 지각(知覺)할 수 없었던 심상과 감동이 생겨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바다 와  나비 의 두 단어가  와 라는 연결 고리에 의해서 결합되는 순간이 바로 이 시가 태어나는 기점(起點)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바다와 나비를 결합시킨 것은 김기림이 처음은 아니다.  네르발 의 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종래의  꽃-나비 에서  바다-나비 의 낯선 관계항(關係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다와 나비 는 그것을 동기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나비는 그게 바다인 줄 몰랐기 때문에 바다 위를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다는 말은 그 나비가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처럼 순수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불에 덴 일이 없는 어린아이들은 불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것을 손으로 잡으려 한다. 그 무구(無垢)한 눈과 순수한 의식으로 바라본 불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그것과는 전연 다른 불꽃일 것이다. 바다의 두려움을 모르는 나비의 눈 앞에 나타난 그 바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배가 깨지고,

상어의 이빨이 번득이고, 태풍이 산호초를 뒤엎는 그런 바다가 아닐 것이다.

 

 나비가 날고 있는 그 바다는 즉물적(卽物的)인 바다, 어떤 선입견이나 관습에 오염되지 않은 의미 이전의 그 바다일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유리 바다와도 같이 투명한 바다이다. 바다와 나비의 대조 자체가 극소(極小)와 극대(極大), 점(點)과 면(面), 그리고 가벼운 공기와 무거운 물의 만남으로 초현실적인의미를 띠고 있다.
  실제로 그 나비가 철없는 어린 나비라는 것은 일련의 시를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한 다음 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어린 날개  그리고  공주처럼 과 같은 표현들은 그 나비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나비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순진한 어린 나비이기 때문에 거대한 바다 전체를 순식간에  청무밭 으로 바꿔놓을 수가 있다.
이 지구의 공간은 바다와 육지로 되어 있으며, 모든 생물 역시 그 양대 영역에 의해서 분할된다.
   칼 슈미트 는 <육지와 바다>에서  우리는 육지의 아들인가, 바다의 아들인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대립적 의미로 세계의 전 역사를 읽어간다. 그런데 김기림은  바다와 나비 에서 어린 나비 한 마리로 바다-육지의 그 거창한 대립 체계를 해체시키고 역사의 공간, 정치의 그 공간을 시적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섬[島]이란 말이 시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바다-육지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나비가 바다 위를 나는 상상은 바다 가운데 육지가 있는 섬을 생각하는 것과 닮은데 가 있다. 김기림의 나비는 극소화한 섬이며, 환상으로 변한 섬들의 파편인 것이다.
  바다와 나비의 병치(竝置)는 색채의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흰 나비와 청무밭의 백(白)-청(靑)의색깔은 청룡 백호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주를 나타내는 한국인의 오방색(五方色) 체계의 전통적 색채 대응과도 통하는 것이다. 바다-갈매기, 꽃밭-나비의 낯익은 배합이 이렇게 바다-나비로 짝이 바뀌어지면 바다에서는 온통 꽃향기로 물들고, 나비의 어린 날개에는 하나 가득 해조(海潮)의 짠바람이 배게 된다.


바다 위를 나는 나비는 꽃잎 그늘에서 쉬고 있는 그런 나비가 아니다. 파도 위에 내릴 수 없는 그 나비는 온종일 날아다녀야 하는 동적(動的)인 나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꿀을 따는 노동과는 관계 없는 무상(無償)의 비상(飛翔)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비가 꽃보다도 바다와 결합되었을 때 더욱 시에 가까워지게 되는 이유이다.  공주 는 노동하지 않는다. 공주가 지치는 경우는 오직 무도회에서 춤을 출 때 뿐이다.  공주처럼 지쳐서 라는 표현은 바로 나비의 비상을 춤에, 그리고 바다를 무도회장에 비기는 은유의 역할을 한다. 이것이 나비가 꽃밭 보다도 바다와 결합되
었을 때 더욱 그 춤이 춤다워지는 이유이다.
  나비-바다의 결합이 이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나비-하늘로 그 병치법(竝置法)이 변화한다. 뭍으로 다시 돌아온 나비가 만나게 되는 것은 여전히 꽃밭이 아니라 하늘의 초생달이기 때문이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바다와 나비의 공간은 시간적인 좌표를 얻게 된다. 그것은 그냥 바다가 아니라 3월의 이른 봄바다이다. 그리고 나비 역시 꽃보다 먼저 이 세상에 나온 철이른 나비이다. 이런 계절감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라는 종구(終句)가 현실감을 얻게 된다.


우리는 벌이나 개미허리라는 말은 들었어도 나비허리라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비의 육체성을 강조하려면 그것은 아무래도 나비의 날개가 아니라 허리여야 한다. 그리고 의상을 걸치지 않은 맨살의 느낌을 주는 것도 역시 날개가 아니라 허리이다. 그리고 그 허리는 2연의 날개와 짝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다의 물결에 날개가 저렸던 나비가 3연에서는 하늘의 초생달에 그 허리가 시린 것으로 묘사된다. 예민한 시독자(詩讀者)라면 바다가 하늘로, 물결이 초생달로, 그리고 날개가 허리로 병렬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와 밀착된 나비는 이제는 하늘과 맞닿는다. 삼월달 바다가 아니라 삼월달 밤하늘의 초생달은 얼음처럼 차갑다. 허리가  시리다 라는 촉각과 온감각은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보다도 훨씬 대상과의 접촉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봄볕과 봄바람의 따뜻한 한늘에서 나는 나비가 아니다. 새파란 초생달 빛과 그 냉기를 품고 있는 참으로 낯선 나비이다. 그래서 시적 상상력으로 채집한 언어의 나비 표본실에는 지금껏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진귀한 신종 나비 한 마리가 더 진열된 것이다.
  시가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DNA의 결합에 따라서 그 형태와 성격이 다른 무수한 생명체가 생겨나는 것처럼, 시인의 언어 역시 그 배함과 구성의 변화에 의해서 색다른 영상과 의미의 생명체를 낳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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