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정민_차문화사_10

醉月 2009. 8. 29. 10:09

남연군 묘자리 가야사 탑에서 나온 700년 된 용단승설차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은 추사의 제자다. 그가 남긴 차시와 차생활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쓴 바 있다. 앞의 글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이상적은 고려 때 조성한 석탑에 봉안되었다가 우연히 발견된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에 대한 소중한 증언을 남겼다. 최근 필자는 이 용단승설차에 관한 두 기록을 더 찾아냈다. 함께 묶어 소개한다.


이상적의 「기용단승설(記龍團勝雪)」
먼저 이상적이 남긴 글을 읽어보자. 우연히 고려 때 고탑에서 나온 용단승설차를 얻은 뒤 문헌 고증을 통해 그 차의 연원을 추적한 내용이다.

 

사진]남연군의 묘


용단차 한 덩이는 한면에 용의 형상을 만들어, 비늘과 수염이 은은히 일어났다. 옆에는 ‘승설(勝雪)’이란 두 글자가 있는데 해서체의 음각문이다. 건초척(建初尺)으로 가늠해서 사방 한 치이고, 두께는 그 절반이다. 근래 석파 이공(李公)께서 호서의 덕산현에 묘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시대의 옛 탑을 찾아가 소동불(小銅佛)과 니금경첩(泥金經帖), 사리와 침향단(沈香檀) 및 진주 등과 용단승설(龍團勝雪) 4덩이를 얻었다. 근래 내가 그 중 하나를 얻어 간직하였다.
구양수(歐陽修)의 ?귀전록(歸田錄)?를 살펴보니, “경력(慶歷) 연간에 채군모(蔡君謨)가 처음으로 소품용차(小品龍茶)를 만들어서 바치면서 소단(小團)이라 하였다”고 했다. ?잠확류서(潜確類書)?에는 “선화(宣和) 경자년(1120)에 조신(漕臣) 정가간(鄭可簡)이 은선빙아(銀線氷芽)를 처음 만들었다. 사방 한 치의 새 덩이차를 만들었는데, 작은 용이 그 위에 꿈틀꿈틀 서려 있어 이름을 용단승설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또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살펴보니, “고려의 토속차는 맛이 쓰고 떫어 도무지 마실 수가 없다. 다만 중국의 납차(蠟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만을 귀하게 여긴다. 직접 하사품으로 받은 것 외에 장사꾼도 통상하여 팔므로 근래 들어 자못 차 마시기를 좋아하고, 또한 차도구도 갖추었다”고 했다. 대개 인종 때에는 이미 소용단(小龍團)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승설(勝雪)이란 이름은 송나라 휘종 선화(宣和) 2년(1120)에 비롯되었다. 하지만 서긍(徐兢)은 선화 5년 계묘(1123)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이다. 중외의 풍속과 물산에 대해 이미 낱낱이 다 듣고 보았던 까닭에 이처럼 말했던 것이다.


또 고려의 승려 의천(義天)과 지공(指空), 홍경(洪慶)과 여가(與可)의 무리가 앞뒤로 바다를 건너 도를 묻고 경전을 구하려고 송나라를 왕래한 것이 계속 이어졌으니,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때 이들의 무리가 반드시 다투어 이름난 차를 구입해서 불사(佛事)에 바쳤고, 심지어는 석탑 안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7백여 년이 지나서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또한 기이하다 하겠다. 하지만 무릇 물건 중에 가장 쉽게 부패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음식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두강차(頭綱茶)의 한 종류가 우리나라 땅에까지 흘러 전해져서, 그 수명은 흰 매를 그린 그림과 나란하고, 보배로움은 수금천보(瘦金泉寶) 보다 더 낫다.[내가 전부터 선화 연간의 매 그림과 숭녕중보(崇寧重寶) 몇 매를 소장하고 있는데, 바로 휘종 황제가 직접 쓴 수금체(瘦金體)다.] 지금에 이르러 예림(藝林)의 훌륭한 감상 거리가 되니, 어찌 신물(神物)이 이를 지켜 남몰래 나의 옛 것 좋아하는 벽(癖)을 도우심이 아니겠는가? 이에 전거를 뒤져서 동호인에게 공개한다.


龍團一銙, 面作團龍形, 鱗鬣隱起, 側有勝雪二字, 楷體陰文. 度以建初尺, 方一寸厚半之. 近者石坡李公省掃于湖西之德山縣, 訪高麗古塔, 得小銅佛泥金經帖舍利子沈檀珍珠之屬, 與龍團勝雪四銙焉. 近余獲其一而藏之. 按毆陽公歸田錄, 慶歷間, 蔡君謨始造小品龍茶以進, 謂之小團. 潜確類書, 宣和庚子, 漕臣鄭可簡創爲銀線氷芽. 以制方寸新銙, 有小龍蜿蜒其上, 號龍團勝雪. 又按高麗圖經, 高麗土俗茶味苦澁, 不可入口. 惟貴中國蠟茶幷龍鳳賜團. 自錫賚之外, 商賈亦通販. 故邇來頗喜飮茶, 亦治茶具. 盖仁宗時, 已有小龍團. 惟勝雪之名, 昉於徽宗宣和二年, 而徐兢卽宣和五年癸卯, 奉使東來者. 其於中外俗尙及物産, 固已殫見洽聞. 故言之如是. 且麗僧義天指空洪慶如可輩後先航海, 問道求經, 往來宋朝者, 項背相望, 文獻有徵. 于時此類必爭購名茶, 以供佛事. 甚至錮諸石塔, 歷七百有餘年而復出於世, 吁亦奇矣. 然凡物之最易腐敗澌滅者, 莫先於飮食之需. 而迺有頭綱一種, 流傳東土, 壽齊白鷹之畫, 珍逾瘦金之泉.[余舊藏宣和畵鷹及崇寧重寶數枚, 卽徽宗御書瘦金體者.] 至今爲藝林雅賞, 豈有神物護持, 陰相余嗜古之癖歟. 爰證故實, 以公同好.

이상적은 용단승설차의 외양을 설명하고, 이 물건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과정을 적은 후 옛 기록을 두루 인용하여 제작 연대와 탑에 봉안된 연유를 추정했다.
당시 발견된 용단승설차는 단차(團茶)로 표면에 용의 형상을 새겼다. 용의 비늘과 수염이 은은히 일어나고, 옆면에는 해서체 음문(陰文)으로 ‘승설(勝雪)이란 두 글자가 찍혀 있었다. 700년의 세월에도 차는 조금도 썩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크기는 건초척(建初尺)으로 사방 한 치, 두께는 그 절반이라고 했다. 건초척은 기원 81년 후한의 장제(章帝)가 제정한 것이다. 한 척이 23.58cm이고, 한 치는 2.35cm 가량이다. 사방 2,35cm, 두께 1.2cm 정도 크기의 네모난 떡차였다.
이상적은 떡차의 출현 과정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하게 적었다. 흥선대원군이 충청도 덕산현으로 묘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 때 세워진 옛탑에서 찾았다고만 했다. 구체적인 절 이름도 없고, 탑에 대한 설명도 따로 없다. 다만 덕산현에 있던 어느 절의 5층 석탑에서 소동불(小銅佛)과 니금경첩(泥金經帖) 및 사리와 침향단(沈香檀), 그리고 진주가 무려 700년이나 묵은 고려 때 용단승설차 네 덩이와 함께 나왔다고 적었다. 대원군에게서 그 중 하나를 얻게 된 이상적은 여러 문헌을 꼼꼼히 고증하여 이 차의 가치를 밝혔다.
이어 이상적은 송나라 구양수(歐陽修)의 ?귀전록(歸田錄)?과 명나라 진인석(陳仁錫)의 ?잠확류서(潜確類書)?, 그리고 고려 때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등 관련 문헌을 차례로 인용하여, 이 차가 송나라 휘종 선화 2년(1120)에 중국에서 정가간(鄭可簡)이 만들어 바친 바로 그 용단승설차임을 고증했다. 어떻게 송나라에서 황제께 바친 차가 우리나라 탑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당시 중국에 유학했던 의천(義天)과 지공(指空) 같은 고승이 중국에서 어렵게 구해 와서 부처님 전에 바치고 석탑 안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했다.
송나라 웅번(熊蕃)이 찬한 ?선화북원공차록(宣和北苑貢茶錄)?에도 용단승설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선화 경자년(1120)에 조신(漕臣) 정가간(鄭可簡)이 처음으로 은선수아(銀線水芽)를 만들었다. 대개 장차 이미 익혀 비빈 차싹을 다시 벗겨내어 다만 그 속 심지 한 줄기만 취하여 진귀한 그릇에다 맑은 샘물을 담아 이를 적시면 환하게 빛나고 결백한 것이 마치 은실과 같다. 그 제법은 사방 한 치의 신과(新銙)로 작은 용이 그 위에 꿈틀대고 있었으므로 이름하여 용단승설이라 하였다.
宣和庚子歲, 漕臣鄭公可簡, 始創爲銀線水芽. 盖將已揀熟芽再剔去, 秪取其心一縷, 用珍器貯淸泉漬之, 光明瑩潔, 若銀線然. 其製方寸新銙, 有小龍蜿蜒其上, 號龍團勝雪.

바로 여기서 말한 용단승설차의 실물이 탑 속에서 7백년을 견디다가 네 개나 한꺼번에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특히 위 기록은 용단승설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먼저 용단(龍團)은 네모난 단차에 용 무늬를 찍어서 붙은 이름이다. 승설(勝雪)은 눈 보다 희다는 뜻인데, 엄선한 차싹을 비벼 익힌 뒤 중심의 은실처럼 흰 줄기만 취해 만들었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위 문헌의 ‘수아(水芽)’는 ‘빙아(氷芽)’가 맞다.
이 용단승설은 고려 중기 차문화의 융성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7백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19세기 후반에 고탑에서 발견된 용단승설차 네 덩이의 존재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 당시에 크게 회자되었던 듯 하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보이는 기록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에도 이 차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위 이상적의 글이 용단승설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매천야록』은 흥선대원군이 선대의 이장(移葬)을 위해 절과 탑을 불태우던 일의 시말을 자세히 적었다. 이 두 기록을 합칠 때 비로소 앞뒤 맥락이 소연해진다. 조금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남연군 이구(李球)는 아들이 넷인데, 흥선(興善)이 막내다. 처음에 남연군이 세상을 떴을 때, 흥선은 나이가 18세였다. 지사(地師)을 따라 덕산(德山)의 대덕사(大德寺)에 이르자, 지사가 한 오래된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큰 길지입니다. 귀함을 말로 할 수가 없지요.” 흥선이 즉시 돌아와 재산을 다 팔아 돈 2만냥을 얻었다. 그 절반을 가지고 절의 주지승에게 뇌물로 주고, 그에게 불을 지르게 했다. 이에 절이 다 타버렸다. 흥선이 상여를 모시고 와서, 재를 쓸고서 멈추었다.
한 밤중에 여러 형들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꿈 이야기를 했다. 흰 옷을 입은 늙은이가 성이 나서 나무라며 말했다. “나는 탑의 신이다. 네가 어찌 내 거처를 빼앗느냐? 만약 끝내 장사 지낸다면 삼우(三虞)가 끝나기도 전에 4형제가 폭사하리라. 속히 떠나거라.” 세 사람이 같은 꿈을 꾼 것이었다. 흥선이 흥분하여 말했다. “과연 그렇다면 진실로 길지(吉地)올시다. 운명은 주장함이 있으니, 탑신 따위가 어찌 능히 빌미가 되겠습니까? 게다가 종실이 날로 쇠퇴하여 우리 형제가 빌빌대고 있으니, 차라리 장김(壯金)의 문하에서 소매를 끌며 아첨하여 빌붙어 구차히 살기를 바라느니, 어찌 단번에 통쾌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형님은 모두 자식이 있고, 한 점 혈육이 없는 사람은 저 뿐입니다. 그럴진대 죽는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여러 형님들 많은 말씀 마십시오.” 이튿날 아침 탑을 부수니, 밑바닥이 모두 바위였다. 도끼로 찍게 하자 도끼가 문득 절로 튀어 올랐다. 마침내 스스로 도끼를 메고서 허공을 향해 크게 외치자, 도끼가 다시는 튀지 않았다.
묻고 나서는 훗날 혹 이장을 할까 걱정되어, 쇠 수 만근을 녹여 봉해버렸다. 거기에 다시 사토(沙土)까지 더했다. 인하여 승려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수원의 대포 나루를 건널 때였다. 중이 배 가운데서 갑자기 큰 소리로 ‘불이야!’하고 외치더니만, 머리를 감싸며 불이 붙는 시늉을 했다. 좀 있다가 물에 뛰어 들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이 남연군의 묘는 꿩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일컬었다. 14년 뒤에 지금 임금께서 태어나셨다. 갑자년(1864, 고종 원년) 이후 나라 돈으로 대덕사 북쪽에 절 하나를 창건하고, 보덕사(報德寺)라고 하였다. 토목과 단청이 지극히 장려하였다. 땅과 밭과 재물과 법보를 하사함이 몹시 후하였다. 병인년(1866) 겨울에 서양 오랑캐가 강화도로 숨어들자, 우리 백성 중에 사학(邪學)에 물든 자가 이를 인도하여 덕산에 이르러 무덤을 파헤치려 하였다. 하지만 단단해서 무덤을 열 수가 없게 되자, 다만 무덤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대원군이 일찍이 이건창(李建昌)에게 장례 지낼 때의 일을 말해주었다. “탑을 무너뜨리자, 그 속에 백자 2개와 단차(團茶) 2병(缾), 사리 구슬 3매가 있었네. 구슬은 소두(小豆) 만했는데, 몹시 밝고 투명했지. 물에 담궈 머금게 하자 푸른 기운이 마치 실낱이 환히 뻗친 것처럼 물을 꿰뚫더군.”


南延君球有四子, 興善其季也. 初南延卒, 興善年方十八. 隨地師, 至德山大德寺, 師指一古塔曰: “彼大吉壤, 貴不可言.” 興善卽返, 盡賣其産, 得錢二萬兩, 携其半, 賂寺之住持僧, 使火之. 於是寺盡燓. 興善奉喪至, 掃灰而停焉. 夜半, 諸兄皆蹶起話夢, 有白衣老叟, 怒罵曰: “我塔神, 汝何奪我居. 若遂葬, 未虞卒, 四兄弟暴亡. 速可去.” 乃三人一夢也. 興善奮曰: “果爾則誠吉矣. 命有主焉, 神何能祟. 且宗室日替, 我兄弟棲棲. 與其日曳裾壯金之門, 冀添丐以苟活, 毋寧一時溘然爲快乎? 諸兄皆有子矣, 無一塊血者我而已. 然死則無畏. 諸兄毋多談.” 詰朝打塔, 則址皆石也. 使斧之, 斧輒自躍. 遂自荷斧, 向空大喝, 斧不復躍. 旣窆, 恐後或遷也, 鎔鐵數萬斤錮之, 重加莎土焉. 因携僧還京, 渡水原大浦津, 僧於舟中忽大呼‘救火’, 搶頭作灼爛狀, 須臾躍入水以死. 其與衆稱南延君墓, 爲伏雉形. 後十四年, 今上誕焉. 甲子後, 以國力刱一寺於大德之陰, 名報德. 而土木金碧, 極其壯麗. 賜與土田貨寶甚厚. 丙寅冬, 洋寇自江華遁, 我民之染邪者, 導之至德山, 欲發墓, 而錮不可開. 但火其塋而走. 大院君嘗於李建昌, 以葬時事曰: “塔旣折, 中有二白磁․團茶二缾․舍利珠三枚. 珠如小豆, 甚明瑩. 沈水以呑之, 靑氣貫水, 如縷炯.”云.

『매천야록』의 기록은 다소 오류가 있다. 절 이름을 덕산현의 대덕사(大德寺)라고 했는데, 충남 덕산현 가야산에 있던 가야사(伽倻寺)가 맞다. 흥선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1922)는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18세 때의 일인 듯이 적고 있으나, 실제 산소의 이장은 27세 때인 1846년에 이루어졌다. 원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다.
지관에게서 대덕사의 석탑 자리가 대단한 명당이란 말을 듣고, 흥선군은 가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1만냥으로 대덕사 주지를 뇌물로 매수하여 절을 불 지르게 했다. 이후 상여를 옮겨 그곳에 묘를 쓰게 된 앞 뒤 경과를 자세하게 적었다.
여러 전문에 따르면 남연군 사후 10여년이나 명당을 찾아다니던 흥선군에게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찾아와,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二代)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습니다.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흥선군은 망설임 없이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다.


지관이 지목한 묘자리는 풍수지리의 측면에서 볼 때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천하의 명당이었다. 문제는 그 자리에 고려 때 옛 절인 가야사의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야사의 폐사(廢寺)는 위 황현의 기록처럼 주지에게 뇌물을 주어 불을 지르게 했다는 설과, 당시 충청감사에게 중국산 단계연을 뇌물로 주어 강압해서 불을 지르게 했다는 설로 나뉜다. 이후 흥선군은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유해를 상여로 운구하여 이곳까지 옮겨 왔다. 이때 사용한 상여는 현재도 남연군의 묘소 옆 자락에 건물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황현은 흥선군의 형님들 꿈에 일제히 나타난 탑신(塔神)의 이야기와, 이장을 마치고 함께 상경하던 가야사의 승려가 갑자기 제 머리에 불이 붙는 시늉을 하며 배 위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을 따로 기록해 두었다.


이장 당시 흥선군은 도굴의 염려 때문에 수만근의 쇳물을 녹여 붓고, 그 위를 석회로 다시 다졌다. 그리고 나서 얻은 아들이 훗날 고종이 된다. 1864년 고종 원년에 흥선군은 가야사 북쪽에 보덕사(報德寺)란 절을 나라 돈으로 창건케 했다. 절을 허문 죄의식도 씻을 겸 임금이 되게 해준 은덕을 갚는다는 의미에서였다. 보덕사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절 앞 마당에는 가야사 옛터에서 수습해온 탑재와 석재가 적지 않다.
흥선대원군의 집정기였던 1868년에는 유태계 독일인인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이 발생하여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서구 열강의 통상 교섭 요구가 대원군에 의해 번번히 좌절되자,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그 유골을 확보 한 뒤 협상용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역시 개방을 원했던 천주교도들을 앞세워 1868년 4월 21일 밤에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석회로 다지고 쇳물을 부어 둔 묘는 하루 밤 사이에 파헤칠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조수(潮水) 때문에 이들이 철수함으로써 도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도 이로 인해 더욱 가혹하게 시행되었다.


이것이 남연군 묘에 얽힌 사연의 대강이다. 하지만 본고의 주된 관심은 『매천야록』 끝 단락의 내용에 있다. 대원군이 이건창(李建昌, 1852-1898)에게 장례 때 생긴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다. 탑을 무너뜨리자, 백자 2개와 단차(團茶) 2병(缾), 사리 구슬 3매가 나왔다. 사리 구슬은 소두(小豆)만 한 것이 밝고 투명했는데, 물에 담그자 푸른 빛이 뻗쳐 물을 꿰뚫었다고 했다.
앞서 이상적의 「기용단승설」에서는 용단승설차 네 덩이를 얻었다고 했다. 여기서는 2병(缾)이라고 다르게 적고 있다. 병(缾)는 그릇 이름이다. 귀한 차를 그릇에도 담지 않은 채 탑 안에 노출시켜 놓았을 리는 없고 보면, 그릇 하나에 용단승설차가 각 두 덩이씩 담겨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당시로서도 용단승설차는 그만큼 구하기 힘든 귀한 차였던 것이다.


고려 때 절 가야사 5층석탑에서 700년 묵은, 그것도 송나라 휘종 황제 때 중국에서 법제한 용단승설차가 조금도 ?지 않은 상태의 원형 그대로 발굴된 것은 참으로 희유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유서 깊은 절을 자신의 야심으로 불태워 버린 것은 드러내 놓고 자랑할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상적은 이장에 얽힌 사연은 슬쩍 얼버무려 버렸고, 반대로 황현은 이장 이야기 끝에 사족으로 차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제 이 두 기록을 한 자리에 엮어 읽자 비로소 이 때 발굴된 고려 때 용단승설차의 실체와 전후 사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탑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리저리 흩어져서 이제 와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위 두 기록 외에 최근 필자는 추사의 미공개 간찰 중에서 역시 이와 관련된 언급을 새롭게 확인했다. 『석실총관(石室叢觀)』이란 표제로 된 개인소장 필첩에 실린 것이다. 다산의 제자였던 귤동 윤씨 집안에 오래 전해져온 필첩이다. 초의에게 보낸 것이 분명한 이 편지는 추사의 알려지지 않은 차 관련 내용을 담고 있다. 서체의 숙련도로 보아 추사의 친필은 아니다. 소장과 보관의 목적으로 추사의 편지를 그대로 임서(臨書)한 전사본이다. 이 편지에 고려 때 탑에서 나온 용단승설차에 관한 사연이 다시 나온다. 전문을 소개한다.

북쪽에서 돌아오니 스님과는 가까워진 듯하나 여전히 천리의 거리가 있을 뿐이오. 홀연히 또 편지가 이르니, 이 어찌 하늘 가에 떨어져 있어도 이웃과 같다는 말에 해당함이 아니겠소. 게다가 너무도 기쁜 것은 차일 뿐이외다. 다만 산중 초목의 세월이 티끌 세상의 몰골보다는 나은 듯 하니, 향훈(向熏) 스님을 데리고 한번 오실 수는 없겠소? 일로향실(一爐香室)로 거처를 옮겼다니, 기거에 몹시 편리한 점이 있겠구려. 그리움 간절하오. 천한 이몸이 은혜를 입어 돌아오매 감격스럽기 그지 없구려. 큰 눈이 왔는데 차가 마침 이르러, 눈을 끓여 차품(茶品)을 시험하려니 스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그 사이에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小龍團) 한 덩이를 얻었다오. 이는 기이한 보물이라오. 이처럼 볼만한 것이 한 둘이 아닌데, 와서 보고 싶지도 않습니까? 시험 삼아 도모해 보시구려. 껄껄. 다 갖추지 않소. 소동파 생일날에 과정(果丁)이.


自北而歸, 與師似近, 尙是千里之遠耳. 忽又書至, 是何天涯比隣之較量也. 且其喜甚者茶耳. 第山中艸木之年, 似勝於塵土形骸, 未可以携得熏衲飛錫一來耶. 一爐香室移處, 團蒲有甚方便. 念切. 賤狀蒙恩而歸, 感隕靡極. 大雪來, 而茶適至, 烹雪試品, 恨不與師共耳. 間得宋製小龍團一胯, 是奇寶也. 如此可觀, 非一二, 不欲來見耶. 試圖之. 呵呵. 不多具. 坡辰果丁.

북쪽에서 돌아왔다는 말은 1851년 7월 추사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852년 8월 13일에 해배되어 돌아온 일을 말한다. 편지를 작성한 날짜를 ‘파신(坡辰)’이라 적었다. 소동파의 생일날이란 뜻이다. 소동파의 생일은 12월 19일이다. 결국 위 편지는 1852년 12월 19일에 초의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 초의는 일로향실에 머물고 있었다. 추사 친필 원본의 소재는 지금에 알 수 없다. 필체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편지처럼 한 장에 쓴 후 협서(挾書)하지 않고 두 장에 나눠 적은 것도 이 편지가 원본이 아님을 말해준다.


함경도에서 과천으로 돌아왔으니, 초의와 더 가까워 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천리 길이 두 사람 사이에 가로 놓인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마 추사의 해배 소식을 뒤늦게 접한 초의가 축하 겸해서 차를 선물했던 모양이다. 특별히 차가 반가웠던 추사는 제자인 향훈(向熏)을 데리고 서울 걸음을 한번 할 것을 권했다. 일로향실로 거처를 옮겨 기거가 편해진 것을 축하하고, 때 마침 눈이 펑펑 내렸을 때 초의차가 도착해서 눈물차를 끓였는데 초의가 곁에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했다.
편지 끝에 그 사이에 얻은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小龍團) 한 덩이에 대해 적었다. 이 차가 흥선대원군이 석탑에서 얻은 처음 네 덩이 중 또 다른 한 덩이인지, 아니면 이상적에게 갔던 한 덩이가 차를 좋아하는 추사에게 다시 건네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가야사의 옛 모습
이렇게 관련 기록을 검토하다 보니 흥선대원군에 의해 불타 버린 가야사가 옛 기록 속에는 어떻게 남아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또 지난 봄 확인을 위해 직접 남연군 묘소를 찾아가보니, 묘자리는 지금도 주변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바위 투성이였다. 옛 문집 속에 가야사에 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가운데 고려 후기의 문신 사암(思庵) 유숙(柳淑, 1324-1368)이 지은 「가야사 주지 노스님의 시에 차운하다「次伽倻寺住老詩]」3수가 가장 오랜 것이다. 지면 관계상 첫 수만 읽는다.

少年歌舞醉華堂 젊은 시절 가무(歌舞)로 화당(華堂)서 취할 적엔
肯想淸遊雲水鄕 운수향(雲水鄕)서 맑게 노닒 생각이나 했으랴.
老去不堪趨綺陌 늙어가매 벼슬 길 내달림 못 견뎌서
退來隨分坐藜床 물러나 분수 따라 평상에 앉아 있네.
閑中氣味茶三椀 한가할 때 기미(氣味)는 차 석 잔에 들어 있고
夢裏功名紙一張 꿈 속의 공명이야 종이 한 장 그뿐일세.
多謝新詩慰幽獨 새 시 지어 외론 맘 달래줌 고마워라
上人深意若爲量 스님의 깊은 뜻을 어이 다 헤아리랴.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이 시에서도 한가할 때 마시는 석 잔 차의 맛을 음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도 이 절에서는 차향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유숙은 마침내 노년에 아예 이곳에 거처를 마련해 만년을 보냈고, 현재 그의 묘도 가야사 터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남아 있다.
18세기 포암(圃巖) 윤봉조(尹鳳朝,, 1680-1761)의 「달빛 따라 가야사에 올라, 또 계명의 시에 차운하다[乘月上伽倻寺, 又次季明詩」란 작품 세 수 중 첫째 수 5.6구에서는 “다리의 남쪽 가에 짙은 그늘 가시잖코, 고색도 서늘하다 탑은 몇 층이던고.濃陰不改橋南畔。古色長寒塔幾層”라고 했고, 셋째 수 3,4구에서도 “묵은 탑에 성근 별이 보계(寶界)에 낮게 떴고, 높은 다락 밝은 달은 은하수 곁 환하구나. 塔古踈星低寶界。樓高明月際銀河”라고 하여, 흥선대원군이 무너뜨린 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846년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면서 허문 고려 때 절 가야사 5층석탑에서 놀랍게도 고려의 흥성했던 차문화를 증언하는 용단승설차 네 덩이가 나왔다. 이 중 하나가 이상적의 손에 들어가, 「기용단승설」이란 증언으로 남았고, 이는 다시 추사에게 바쳐져서 초의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 속에 그 흔적이 희미하게 남았다. 그 전후 사정은 황현의 『매천야록』의 증언을 통해 더 또렷히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