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18

醉月 2009. 8. 29. 10:08

  노천명「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대학입시에 노천명의 시「사슴」이 출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의 시구가 무슨 짐승을 가리킨 것이냐는 물음에 대부분의수험생들이 「기린」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젊은 세대들의 시적 독해력 부족에서가 아니라 전통의 단절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사슴은 학, 거북이와 함께 십장생의 하나로 한국인과는 참으로 오랫동안 친숙하게 지내온 짐승이다.

불로초를 입에 물고 있는 사슴의 그림은 신선도가 아니라도 시골 농가의 베갯모 에서도 곧잘 찾아 볼 수 있다.


  무(武)를 숭상하는 영웅형 문화에서는 사자, 독수리와 같은 힘센 생물이 찬양되고 문장같은 상징물로 등장하고 있지만,

문을 숭상하는 성자형 문화에서는 사슴, 학처럼 힘없는 짐승들이 오히려 고귀하고 신령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짐승들은 웬일인지 목이 무방비 상태로 길다. 쫓기고 잡혀 먹히는 그 약한 짐승들을 오히려 장수의 상징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여간한 역설이 아니다. 그런점에서 사슴은 약하기 때문에 강하다는 도교적 논리의 모범답안라고 할 수 있다.

목이 긴 짐승이라고 금시 기린을 생각하는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사슴만이 아니라 목이 긴 것과 슬픈 것의 상관성 역시 모르는 문제
의 하나 일 것이다. 순수한 한국말로는 생명을 목숨이라고 한다.


  생명이라고 하면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것이 목숨이라고 하면 손으로 만질 수 있듯이 가깝게 느껴진다. 「목숨」은 곧 「모가지」라는 육체성을 지니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우만은 국어 순화가 통하지 않는다.

만약 「목이 길어서 슬픈 동물이여」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할 것이다.

  노천명의 시만이 아니다.「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 모가지여」라고 네번 되풀이한 서정주의 시「행진곡」에서 우리가 처절한 생명의 절규를 듣게 되는 것도 그것이 「목」이 아니라 「모가지」이기때문이다.


  「모가지」라는 말 속에는 인간과 동물이 다같이 공유하고 있는 원 초적이고 본능적인 생명의 알몸뚱이가 들어 있다.

목이 짧으면 오히려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공격적 존재로 보이지만 목이 길면 수동성과 생명의 무력성이 드러나게 된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여인들의 초상이 조금씩 슬퍼 보이는 이유는예외없이 그 목이 길게 그려져 있는 탓이다.


  슬픔은 짐승이든 인간이든 간에 그 존재를 내면화한다. 노천명의 시적 시각으로 보면 초상집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목은 누구나 다 길어보이고 슬퍼보이고 조금씩은 정신적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노천명은 사슴의 목, 침묵 그리고 그 뿔의 순서로 묘사대상을 이행해가면서 슬픔에서 점잖음으로, 점잖음에서 고귀함으로 그 내면화과정을 심화해가고 그 차원을 높여 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슴의 속성은 「높은 족속이었나보다」의 과거형으로 묘사하고, 또 다음 연에서는 「먼데 산을 본다」라고 하여 사슴의 본래성과 현존성의 괴리를 나타내고 있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노천명의 사슴은 십장생도에 등장하는 심산유곡의 사슴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는 문명 속의 사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동물원이 아니라면 사슴목장 속의 사슴이거나 일본 나라(내량)에 가축처럼 기르고 있는 그런 사슴인 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이점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자아니 자화상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붙여서 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슴이 먼데 산을 본다는 것은 곧 그 사슴이 지금 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며 「잃었던 전설」이나 「향수」라는 말은 그 「먼산」(불로초가 있는 전설의 공간, 인간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에 있었던 때의 사슴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존하고 있는 그 사슴과는 시간도 공간도 모두 멀리 떨어져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먼데」라는 말은 지리적인 거리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거리, 의식 속의 거리를 가리키는 것이며 사슴의 본래성과 그 현존성의 괴리를 보여준다.

 

]사슴만이 아니라 「본래의 나」와 「현존하는 나」의 괴리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가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슴」을 노천명 시인의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평자들 은 그야말로 사슴을 동물원에 가둔 사육사와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시가 지닌 보편적 감동을, 그 전설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동물원 속의 사슴은 세속화한 사회, 물질 문명속에서 사육되고 있는 모든 시인의 모습이고 동시에 목에 갈기를 세우고 돌진해오는 권력자나 실리자 앞에서 슬픈 모가지를 내밀고 있는 무력한 지식인들의 초상화이기도 한 것이다. 이 천박한 시대 속에서, 상상력이 없는 목 짧은 그 사람들이 생존의 땅을 독점하고 있는 이 도시에서 몰락해 가는 모든 정신주의자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향기로운 관 뿐이다.


  사슴 뿔은 해마다 떨어졌다가는 다시 새뿔이 돋아나는 재생의 힘을 지니고 있다. 옛날 임금들이 사슴 뿔 모양의 왕관을 썼던 것도 바로 이 거듭나는 신비한 재생력과 그 영원성을 동경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누가 향기로운 관을 쓰려고 하는가. 손과 발이 머리를 압도하는 행동의 시대에 누가 머리를 장식하려하는가.

누가 재생의 신비한 의식의 가지치기를 믿으려 하는가. 사슴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먼데 산을 보는」 눈이 있는 한 그 향기로운 관은 거듭태어 나는 재생의 전설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슴의 슬픈 모가지는 먹이를 물어뜯고 포효하는 늑대의 그 이빨보다 더 오랜 세월을 시 속에서 그리고 십장생의 베갯모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호를 가다   (0) 2009.09.01
정민_차문화사_10  (0) 2009.08.29
산 속의 두 수행자  (0) 2009.08.28
영남대로 첫 관문 문경새재  (0) 2009.08.26
서울 600년을 품에 안다   (0) 2009.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