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영남대로 첫 관문 문경새재

醉月 2009. 8. 26. 08:57
영남대로 첫 관문 문경새재 ‘조선의 고속도로’에 서다
길이 열리다, 聞慶
 

문경새재 제3관문.

‘신택리지 제1호’ 왜 문경인가

[택리지]는 문경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상)우도에는 조령 밑에 문경이 있다. 북쪽에는 우뚝하게 솟은 주흘산이 있고, 남쪽에는 대탄(大灘, 큰 강)이 있다. 서쪽에는 희양산과 청화산이, 동쪽에는 천주산과 대원산이 있다. 사방 산속이나 들판이 제법 넓게 펼쳐져 영남 경계의 첫 고을이고, 남북으로 통하는 큰 길이 닿아 있다.

임진년에 왜적이 북쪽으로 쳐올라오다 대탄에 이르러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지키는 사람이 없음을 염탐한 다음 비로소 지나갔고, 조령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지대가 높은 고을이면서 매우 험한 산속이어서 살기를 조금은 벗었다고 풍수를 보는 김여가는 말한다.”

문경이 천연의 요새(要塞)임을 강조한 대목이다. 그런 만큼 풍수의 기운이 드셀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교통이 좋고 전쟁이 잦은 곳은 변화에 예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합리적이며 삶의 전환도 과감하다. 문경의 기질은 문경을 바꿔나가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문경은 근대화 과정에서 성쇠(盛衰)의 청룡열차를 탔다. 1970년대 지하자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문경은 석탄과 시멘트로 부자도시가 됐다. 그러나 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였기에 외부 상황의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채광의 경제성이 낮아짐에 따라 차츰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문경은 갑자기 가난한 농촌도시로 변했다.

가장 큰 문제는 주민들의 절망감이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면서 많은 이가 이곳을 떠나 인구가 급속도로 줄었고, 도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지역으로서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그 무렵 지방자치제가 시행됐고, 이 지역의 행정을 맡은 민선시장들은 ‘도시의 체질’을 바꾸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런 고투의 시간이 15년 흘렀다. 문경은 많이 변했다. 제주도에 사는 공무원이 고향 문경을 위해 애를 쓸 만큼 이곳 출신들의 애향심은 대단하다. 탄광보다 더 돈이 되는 ‘먹고 살 길’을 찾아내고 있다. 문경은 대한민국에서 지방자치제도가 정착해가는 모습을 농축한 생생한 모델이다.

백두대간이 허리를 틀며 서남쪽으로 굽이치듯 자신의 길을 바꿔가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문경시의 ‘자기혁신’을 살피는 일은 그래서 흥미롭다. ‘신택리지 제1호’로 이 작은 도시를 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이 먼저인지 길이 먼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경새재. 수천 년 전 한 사람이 백두대간 위에 섰을 때, 그 뒤에는 인간의 첫 발자국이 찍혔다.

한반도를 내리지르는 그 길에는 긴 세월 동안 무수한 인간이 지나갔다. 황금 알덩이 같은 반도 중심부를 노리는 패자(覇者)에게는 전쟁의 길이었다. 과거 보러 가는 지방 선비에게는 출세의 길이었다. 억울함과 부당함을 항의하는 기개 있는 자에게는 상소의 길이었다. 한양에서 내려오는 그 길은 왕명과 법령을 전하는 국가 기강의 길이었고, 세금을 징수하는 서슬퍼런 치(治)의 길이었다.

한편 쫓겨나는 자에게는 더없이 길고 서러운 유배의 구절양장이었다. 길은 사람이고, 길은 욕망이며, 길은 눈물이기도 했다. 문경은 그 고갯길 너머에 있었다. 수십 년 전 흥청대던 탄광의 도시에서는 넘치는 인간의 웃음소리가 새재까지 메아리쳤다. 지금 다시 전혀 새로운 길을 여는 도시의 힘찬 소리를 문경새재는 귀를 열어 듣고 있으리라.

고산자 김정호(?~1866)는 대동여지도 목판에 부치는 글에서 “천하의 형세를 산천에서 본다(天下之形勢視乎山川)”고 말을 꺼낸다. 산천(山川)은 산과 물이다. 산수·산하·강산 또한 모두 산과 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사람은 땅을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 인식하고, 그것의 뼈대는 산이요 핏줄은 물이라고 생각했다.


고모산성의 성곽길.

산의 속성은 큰 줄기에서 비롯해 작은 줄기로 갈라져 천하로 흩어지는 것이요, 물의 속성은 천하의 곳곳에서 작은 줄기로 시작해 큰 줄기로 모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은 큰 줄기인 백두산에서 출발해 내려오면서 갈라진다. 백두 1대간(大幹)에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이 그것이다.

태백산맥·소백산맥 따위의 말은 일본인이 자의적으로 만든 허튼 명명(命名)일 뿐이다. 백두대간이 꿈틀거리며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금강·설악·오대산에서 솟구쳐오르다 삼척쯤에서 슬쩍 몸을 틀어 내륙으로 성난 듯 가로지른다. 그 서슬에 서남쪽으로 뻗으며 태백·소백·도락·황정산을 낳고는 다시 머리를 돌려 서북으로 오른다. 그러다 물을 만난다.

남한강이 단양에서 홱 틀어 서쪽으로 흐르는 기세에 접하여 드디어 산의 기운과 물의 기운이 드잡이하는 대협곡지대를 이룬다. 월악·주흘·조령·희양·백화산과 이만봉·군자·속리·덕유·민주지산이 와글거리고 남한강·금강·낙동강·섬진강이 달려들어 오글거리니 그야말로 산전수전(山戰水戰), 에너지가 넘치는 산수도(山水圖)다.

길은 산을 만나면 고개가 되고, 물을 만나면 나루가 된다. 길은 저 와글거리고 오글거리는 산과 물 사이를 넘고 건너면서 사람을 실어 나른다. 길은 산을 한 번 만나면 그 뒤에 물을 만나기 쉽고, 물을 만나고 나면 다시 산을 만나게 마련이다. 이 땅의 모든 길은 고개 한 번 넘고 나루 한 번 건너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충주의 미륵리에서 월악나루를 건넌 길은 하늘재를 타고 올라와 고갯마루에서 숨을 몰아쉰 뒤 문경의 관음리로 내달린다. 미륵에서 올라 관음으로 내리니 57억 년 시간을 거스르는 길인 셈이다. 그 길이 영남대로의 첫 길이다. 영남대로! 조선의 여섯 대로(大路) 중 하나이며, 한양에서 부산 동래까지 내달리는 중심 길이다.

이를테면 수백 년 전의 ‘경부고속도로’다. 삼남·의주·경흥·관동·강화대로가 있지만, 백두대간 이쪽과 저쪽의 서울과 영남을 잇는 이 길은 이 땅을 내리지르는 직선로로 조선의 큰 자부심이었다. 치수(治水)만큼이나 중요했던 치도(治道)에서 영남대로는 그야말로 관치(官治)의 위엄이며 국가의 유통 속도였다.

치수는 농작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었고, 치도는 생산한 농산물을 중앙으로 거둬들이는 세수(稅收)의 핏줄이었다. 또 길은 지방 수령을 발령받은 이가 들어가는 행차길이기도 했다. 대로는 수레 2대가 서로 교차해 지나갈 수 있는 왕복 2차로 도로였다. 도(道)는 원래 큰 수레 2대가 지나가는 길이며, 로(路)는 큰 수레 3대가 지나가는 길을 말한다.

대로 중에서 중요한 지점에는 박석(薄石)을 짜임새 있게 박아 수레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했다. 박석고개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온 것이다. 한 사람이 지게에 져 나를 수 있는 양을 1이라고 할 때 소와 말의 길마를 이용하면 2를 나를 수 있고, 수레를 이용하면 15를 나를 수 있다.

그리고 배를 이용하면 100을 나를 수 있다. 수레는 육로 유통의 핵심이었다. 영남대로의 최대 관문은 문경새재다. 한양의 왕도(王道)가 백두대간을 넘으면서 남쪽 먼 바다를 바라보는 자리로 달려가려는 거기에 천하의 목구멍(咽喉之地)처럼 목젖을 들썩이는 곳이 이곳이다.

‘새재’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는다. 지명에 대한 스토리도 여러 갈래로 벋어나가 풍부한 함의를 이룬다. 새의 고개라는 조령(鳥嶺)은 조선시대 초·중반에 생겨난 이름이다. 새들도 쉬어가는 고개라고 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태백의 시에 ‘조로서도(鳥路鼠道·새의 길, 쥐의 길)’라는 말이 나오는데, 높은 곳은 새의 길이며 낮은 곳은 쥐의 길이다.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한 구간으로 알려진 ‘토끼벼루’.

그런데 원래 이곳은 초점(草岾)이라고 일컬었다. ‘초’는 억새를 말한다. 길은 낮은 곳에서 만들어지니 계곡 옆은 흔히 길이 된다. 물가에는 억새가 잘 자라므로 ‘억새’가 자란 길이라 하여 새재라고도 한다.

또 원래 이곳에는 역사상 첫 큰길의 통로인 하늘재가 있었고, 그 옆에 죽령·이화령이 있었다.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샛길이라 하여 새재(間嶺)라고도 했다.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 156년 개척)을 가지고 있는 하늘재와 죽령(158년 개척) 길보다 더 빠른 직선길을 개척하였기에(조선 태종 때) 새로운 길이라 하여 새재(新嶺)라고도 하였다. 이 고개는 그것 중 어느 하나의 의미라기보다 그 모두 일리 있는 길임이 틀림없다.

문경(聞慶)은 한양에서 영남으로 내려오는 수령이 처음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듣는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보다 과거시험을 보러 간 이에게서 합격의 기쁜(慶)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聞) 곳이라 하여 문경이라고 한다. 또 시험을 치러 한양 가는 선비들은 인근의 추풍령과 죽령을 피해 굳이 새재를 넘었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이 찜찜했기 때문이다. 부득이 추풍령을 넘게 되면 옆에 있는 괘방령(掛榜嶺·방이 붙는 고개)을 다시 넘어 징크스를 떨쳤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갈 때 보통 문경새재를 넘으면 14일이 걸렸는데, 죽령을 넘으면 15일, 추풍령을 넘으면 16일이 걸렸다.

새재에 있는 세 개의 관문은 모두 범상치 않은 메시지를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1관문(주흘관)은 홍건적에 쫓긴 공민왕이 안동에서 문경으로 왔을 때 마침내 오랑캐가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는 곳이다. 2관문(조곡관)은 주역의 큰 봉우리인 야산(也山) 이달(1889~1958) 선생이 해방을 예언하면서 문경에 가면 기쁜 소식을 들으리라고 말하고 새재에 와서 닭춤을 추었다는 이야기를 품는다.

닭춤은 닭띠해인 1945년을 말하는 것이었다. 야산은 일제의 종말을 앞둔 1944년 선천(先天)시대가 끝나고 후천(後天)시대가 열릴 것이라면서 새 달력을 내놓는다. 야산은 정부가 시작되는 1948년을 후천시대의 출발로 삼았다. 그리고 3관문(조령관)은 바로 겨레 통일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미래의 관문이라고 한다.

문경새재를 오를수록 귀가 밝아지고 눈이 높아지고 마음이 맑아지니, 이것이 행(行)이며 이것이 도(道)가 아니던가?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길은 ‘토끼벼루(관갑천잔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1호)’다. 고모산성 진남문 아래에서 남쪽으로 성벽을 따라가면 절벽 위에 인색하게 길을 내준 아슬아슬한 곳이 있다.

산허리를 감으며 3km에 이르는 긴 길이었다(지금은 축소해서 원형을 재현해놨다). 새재의 조령천은 영강과 합수하면서 기세가 등등해졌다. 물이 바위산에 머리를 부딪쳐 바위를 깎아내 벼랑을 지었다. 신바람나게 달려오던 ‘길’은 뚝 잘린 여기서 잠깐 진땀을 흘린다. 그러다 벼랑에 길을 깎아 다는 묘안을 찾아낸다. 여기에도 전설은 피어난다.

고려 태조인 왕건이 견훤과 격전을 치르던 시절, 문득 이곳에 이르러 길이 끊겨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끼 한 마리가 왕건 앞으로 오더니 깡충깡충 뛰어 어디론가 간다. 따라가 보니 암벽에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는 다락이 나 있다.
“저 곳을 파고 잘라 길을 내라.”(신증동국여지승람).

토끼가 다니던 길(土遷·토끼벼루)은 그래서 대로의 일부가 된다. 천도(遷道)는 바위를 깎아낸 길이고, 잔도(棧道)는 바위에 사닥다리를 달아 덧댄 길을 말한다. 인간은 길이 없으면 길을 낸다. 길을 뚫고 길을 세우고 길을 넓힌다. 인간의 문화(文化)를 공간적으로 확장해온 것은 길의 힘이었다.<관련 자료제공=옛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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