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산 속의 두 수행자

醉月 2009. 8. 28. 05:07

산 속의 두 수행자
출처 : http://jungmin.hanyang.ac.kr/

산 속에 두 사람의 수행자가 있다. 그들은 서방 정토를 향한 서원(誓願)을 세워 구도의 길에 몰입한다. 하지만 수행 상의 상이한 태도로 인해 깨달음에 선후가 있게 되고, 마침내는 함께 달빛을 타고 올라 궁극의 길로 떠난다. 문무왕대 광덕과 엄장이 그렇고, 성덕왕대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그러하다. 포산에도 관기와 도성이란 두 산 속 수행자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왜 하필 두 사람인가? 이들의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가? 세 이야기는 어째서 모두 미타신앙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도의 열정이 신라인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는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연이 들려주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함께 살펴보자.


 광덕과 엄장, 같은 꿈 다른 길
먼저 살필 글은 『삼국유사』 권 5, 감통편에 실려 있는 「광덕엄장」조의 이야기다.

문무왕대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라는 두 승려가 있었다. 두 사람은 친한 벗이었으므로 밤낮으로 약속하며 말했다.
“먼저 안양(安養) 즉 서방정토로 귀의하는 사람이 모름지기 알려주기로 하세.”
광덕은 분황사(芬皇寺) 서쪽 마을에 살았다.[어떤 이는 황룡사에 있는 서거방(西去房)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신 삼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화전을 일궈 밭을 갈았다. 하루는 해 그림자가 붉게 퍼져 솔 그늘이 가만히 저무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나며 알려주었다.
“나는 이미 서방으로 가네.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나.”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서 살펴보았다.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 소리가 들리고, 광명이 땅으로 이어졌다. 이튿날 그 거처로 찾아가 보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었다. 이에 그 부인과 함께 유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일을 마치고 나서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하오?”
부인은 좋다고 하고는 마침내 머물렀다.
밤에 자려할 때 관계하려 하니 부인이 그만 두게 하며 말했다.
“스님이 정토(淨土)를 구함은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찾는 격이라 말할 만합니다.”
엄장이 놀라서 물었다.
“광덕은 이미 그러했는데, 나는 또 어찌 안 되는가?”
부인이 말했다.
“남편과 나는 십여 년을 함께 살았지만 하루 밤도 한 침상에서 잔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더러운 짓을 하였겠습니까? 다만 매일 밤 몸을 단정히 하고 바로 앉아 한결 같은 소리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웠을 뿐입니다. 혹은 십육관(十六觀)을 행했는데, 십육관을 이미 체득한 뒤에는 밝은 달이 창문에 들면 이따금 그 빛에 올라가 그 위에 가부좌로 앉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성을 다하였으니, 비록 서방으로 가지 않으려 한들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한 걸음으로 살필 수가 있습니다. 이제 스님의 관(觀)은 동쪽으로 가는 것이지, 서쪽은 알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은 사문(沙門)이었다. 광덕은 신발을 만드는 구두쟁이였고, 아내가 있었다. 엄장은 남산에 암자를 짓고 화전을 일구며 사는 화전민이었다. 신분이 낮았음에도 이들은 밤낮으로 안양(安養)을 향한 꿈을 품었다. 안양(安養)은 어디인가?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 즉 서방정토의 다른 말이다. 안양계(安養界) 또는 안양정토(安養淨土)라고도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 하권에도 “안양국에 왕생하여 오악취(五惡趣)를 딱 끊으리.(往生安養國, 橫截五惡趣)란 구절이 있다. 이들의 신앙이 아미타 신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암시한다.
어느날 석양 무렵, 방안에 있던 엄장은 먼저 서방정토로 떠나니 속히 따라오라는 광덕의 소리를 들었다. 먼저 가는 사람이 알려주기로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뛰어나간 엄장은 구름 밖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음악을 들었다. 환한 광채가 천지를 비추었다.
이튿날 엄장은 광덕이 과연 육신의 허물만 남기고 서방 정토로 떠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 친구의 의리를 지켜 그의 아내와 함께 살 작정을 한다. 태도로 보아 돌보아 주려 했던 것이지, 다른 욕심 때문은 아니었던 듯하다. 하지만 밤중에 그녀와 관계를 맺으려던 엄장은 뜻밖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엄장은 그녀의 입을 통해 비로소 광덕이 자신보다 일찍 서방으로 가게 된 연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둘째, 매일 밤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을 염송했다. 셋째, 십육관법(十六觀法)을 행했다. 앞의 둘은 알겠는데, 세 번째 십육관법이 궁금하다. 십육관법만 체득하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 위로 올라타 가부좌를 하고 허공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광덕이 깊은 산 속이 아닌 분황사 서쪽 마을에서 신발을 만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이 같은 결과를 이룬 것은 실로 경이롭다.


십육관법은 아미타불이 서방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 수행한 16가지 관법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나온다. 관법은 마음으로 진리를 관(觀)하고 염(念)하는 명상 수행법이다. 마음의 일렁임을 가라앉혀 지혜의 눈으로 제법(諸法)의 실상을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16관은 일상관(日想觀)․수상관(水想觀)․구상관(九想觀)처럼 구체적 상을 마음에 떠올려 깨닫는 초보적 단계에서, 깊은 교의나 천리, 부처와 정토를 관하는 화좌상관(華座想觀)․상상관(像想觀)․보관상관(普觀想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일상관은 노을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극락정토를 관상하는 것이다. 석양빛의 아름다움을 보며 몰아의 경계에 빠져 극락을 체험하는 관법이다. 화좌상관은 8만 4천개의 연잎과 백 억개의 마니보주로 꾸며진 아미타불의 대좌를 관상한다. 보관상관은 자신이 정토에 왕생하는 모습을 관상하는 것이다. 『관무량수경』은 이 하나하나의 관법을 자세히 설명한 경전인데, 관법은 또렷하기가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분명할 때까지 보는 것이다.
엄장은 광덕의 아내를 통해 광덕의 수행이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음을 확연히 알았다. 다음 단락은 부끄러움에 직면한 엄장의 대응을 다룬다.

엄장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져서 물러났다. 그리고는 문득 원효법사의 거처로 나아가 깨달음으로 건너가는 요체를 간절히 구하였다. 원효가 정관법(淨觀法)을 지어 이끌어 주었다. 엄장이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꾸짖으며 한 뜻으로 관(觀)을 닦아, 또한 서방에 오름을 얻었다. 관(觀)은 원효스님의 본전(本傳)과 『해동고승전』 가운데 실려 있다. 그 부인은 분황사의 여종이었는데, 19응신(應身)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났다. 그도 애초에 육체의 욕망을 탐하던 속물은 아니었다. 다만 안이한 수행에 젖어 있었던 것뿐이다. 그는 발심하여 원효법사를 찾았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법을 간절히 묻는 그에게 원효는 정관법(淨觀法) 또는 삽관법(鍤觀法)이라고 하는 관법으로 가르쳤다. 가르침을 받은 엄장은 몸을 정결히 하고, 잘못을 뉘우쳐 꾸짖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관을 닦았다. 그 결과 그도 서방정토로 올라 갈 수 있었다.
원효의 정관법은 그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다. 일연은 본전과 『해동고승전』에 원효의 관법이 실려 있다고 했지만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실린 「원효전」에도, 고려 때 승려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에도 관련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의해(義解)편의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원효가 『화엄경』에 있는 구절에서 따온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고, 이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해서 무지한 무리들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나무아미타불을 읊게 되었다고 한 내용이 보인다.

그의 정관법이 급속도로 널리 퍼져나간 정황을 짐작케 한다.


광덕은 자신만 깨달아 서방정토로 건너가는데 그치지 않고, 친구 엄장을 이끌어 함께 건너갔다. 그 표양을 본 여러 사람도 함께 건넜다.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을 실천한 것이다. 널리 베푼 덕을 칭송해서 광덕(廣德)이란 이름을 얻었다. 엄장(嚴莊)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남산 골짜기에서 홀로 암자 짓고 화전을 일궈 살았다. 속세와 멀리 떠나 고행으로 수도했던 사문이었다. 친구의 아내에 대한 연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가혹할만큼 엄격하게 변했다. 그래서 마침내 처음 뜻을 이루었다. 광덕도 대단하지만 엄장은 더 대단하다. 그 장엄한 엄격함을 높이 산 것이 그의 이름으로 남았다.
대단한 사람이 하나 더 있다. 광덕의 아내다. 그녀는 분황사(芬皇寺)의 여종이었다. 일연은 그런 그녀가 사실은 19응신(應身) 중의 하나였다는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을 덧붙였다. 관음보살이 세상에서 교화할 때 모두 32가지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경우가 19번이었는데, 그녀가 그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법화경(法華經)』 제 25품, 「보문품(普門品)」에는 관세음보살이 32상으로 현현하여 중생을 제도한 내용이 실려 있다. 관음보살은 우파이(優婆夷), 비구니, 장자녀(長者女), 거사녀(居士女) 등 16가지 형상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광덕의 아내가 관음보살의 십구응신 가운데 하나였다는 말은 그녀가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관음보살이 광덕의 곁에서 분황사 여종의 모습을 하고 그의 극락왕생을 도와주었고, 나아가 엄장의 왕생도 인도하였다는 뜻이다.
기사는 이렇게 끝난다.

광덕이 일찍이 노래가 있었는데 이러하다.

달아! 이제 月下伊底亦
서방까지 가십니까? 西方念丁去賜里遣
무량수불 전에 無量壽佛前乃
알려 사뢰 주소서 惱叱古音多可支白遣賜立
다짐 깊으신 존(尊)을 우러러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두 손 모두어 사뢰나니 兩手集刀花乎白良
원왕생, 원왕생 願往生願往生
그리는 이 있다고 사뢰주소서. 慕人有如白遣賜立
아아, 이 몸 남겨두고 阿邪此身遺也置遣
48 대원(大願)을 이루겠습니까? 四十八大願成遣賜去

10구체의 향가다. 이 노래의 작가를 두고 여러 주장이 갈렸는데, 광덕의 처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면, 이 노래의 작가는 두말할 것 없이 광덕일 수 밖에 없다. 둥두렷 중천에 걸린 달빛이 서방 정토를 향해 떠간다. 그 달빛을 보며 간절히 염불하고 관상(觀想)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그 달빛을 인격화하여, 달님께 저 서방정토로 가거든 무량수불 아미타 부처님께 언제나 두 손을 모두고 원왕생 원왕생 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고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광덕 자신이다. 9.10구에서는 이 몸을 남겨두고서야 어찌 48대원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48 대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 육신의 허물 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던질 수 있겠다고 말한 것이다.
48대원(大願)은 또 무언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아미타불의 전생이었던 법장보살(法藏菩薩)이 부귀와 지위를 다 내던지고 세운 48가지의 서원이다. 그것은 모두 남을 위하는 이타행(利他行)으로 가득하다. 극락의 모습과 아미타 부처님의 공덕, 그리고 왕생 극락의 자격과 왕생한 이가 누리는 지복(至福)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광덕은 이러한 열망을 품고 끊임 없이 염불하고 십육관법을 행하며 기도하다가, 마침내 노래에서 소원한 대로 달빛에 올라타고 육신을 버린 채 극락왕생하여 48대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살아서 부처가 된 두 사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번 째는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의 이야기다. 『삼국유사』 권3, 탑상편에 실려 있다. 남백월산은 경남 창원시 북면 월촌리에 있다. 서사가 꽤 길다. 글은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의 인용으로 시작된다. 백월산이 신라 구사군(仇史郡)의 북쪽에 있으며, 산세가 수백리에 뻗어있는 진산(鎭山)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로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전설을 소개했다.

옛날 당나라 황제가 연못을 하나 팠다. 매달 보름 전에는 달빛이 휘황하게 밝았다. 그 가운데 산 하나가 있는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의 그림자로 은은히 비쳐 못 가운데 드러났다. 황제가 화공에게 그 형상을 그리게 하여 사신을 보내 천하에서 찾아보게 했다. 해동에 이르러 이 산을 보니, 큰 사자암이 있고 산의 서남쪽으로 2천보 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을 화산(花山)이라 하였다.[그 산은 한 몸체에 머리가 셋인 까닭에 삼산이라 한다.] 그림과 서로 비슷했으나 진위를 몰라 사자암의 꼭대기에 신발 한 짝을 매달아놓았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니, 신발 그림자가 또한 못에 비치는 지라 황제가 기이하게 여겨 백월산(白月山)이라고 이름을 내렸다.[보름 전에 흰 달의 그림자가 비치므로 이름 지은 것이다.] 그런 뒤에야 연못 속에 그림자가 없어졌다.

『삼국유사』의 여러 설화에서 연못이나 우물은 다른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자, 연결통로다. 보름을 앞둔 연못에 달빛이 어리는 것이야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여기에 사자 바위가 있는 산이 비쳤다. 천하를 뒤져 해동에서 이 산을 찾아내, 바위 꼭대기에 신발 한 짝까지 매달아 놓고 나서야 소동이 그쳤다. 연못 속에 늘 비치던 그림자는 황제의 인정을 받자 사라졌다. 사자 바위의 비범성을 이렇게 나타냈다. 이 서사는 이제 이곳에 등장할 두 인물의 출현을 알리는 예고편 격이다.
일연은 이렇게 전제를 깔아놓고 나서야 주인공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집안과 출가 배경, 출가 장소 등에 대해 길게 설명한다

산의 동남쪽으로 3천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었다. 마을에 두 사람이 살았는데, 한 사람은 노힐부득(努肹夫得)[득(得)은 ‘등(等)이라고도 한다.]이니, 아비의 이름은 월장(月藏)이요, 어미는 미승(味勝)이었다. 한 사람은 달달박박(怛怛朴朴)으로 아비의 이름은 수범(修梵), 어미의 이름은 범마(梵摩)였다. [향전(鄕傳)에는 치산촌(雉山村)이라고 하는데 잘못이다. 두 사람의 이름은 방언이다. 두 집에서 각각 두 사람의 마음과 행실의 뛰어남과 굳센 절개, 두 가지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고, 지역을 벗어난 아득한 생각을 품어, 서로 벗으로 가까이 지냈다. 나이가 모두 약관이 되자 마을의 동북쪽 고개 너머 법적방(法積房)으로 가서 의탁하고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후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묵은 절이 있는데 진인(眞人)이 살만 하다는 말을 듣고, 같이 가서 대불전(大佛田)과 소불전(小佛田) 두 골짜기에 각자 거처하였다. 노힐부득은 회진암(懷眞庵)에서 지냈는데 양사(壤寺)라고도 한다. [지금 회진동에 옛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곳이다.] 달달박박은 유리광사(瑠璃光寺)에 살았다. [지금 이산(梨山) 위에 있는 절터가 바로 여기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주인공은 백월산 동남쪽 선천촌 사람이다. 노힐부득의 부모 이름은 월장(月藏)과 미승(味勝), 달달박박의 부모 이름은 수범(修梵)과 범마(梵摩)였다. 이름이 주는 느낌이 범상치 않다. 아미타불의 아버지는 월상전륜성왕(月上轉輪聖王), 어머니는 수승묘안(殊勝妙顔)이라고 『아미타고음성왕다라니경(阿彌陀鼓音聲王多羅尼經)』에 나온다. 노힐부득의 부모 이름인 월장(月藏)과 미승(味勝)은 월상(月上) 및 수승(殊勝)과 비슷하다. 한편 월장은 고대 인도의 보살 이름이기도 하다. 월장보살이 서방 정토에 와서 방등(方等)의 묘리를 설파한 경전은 『대방등대집월장경(大方等大集月藏經)』이다. 월장보살의 빼어난 가르침을 음미하는 것이 미승(味勝)이다.
달달박박의 부모 이름은 『미륵하생경』에 미륵보살의 부모로 등장하는 수범마(修梵摩)와 범마월(梵摩越)의 이름에서 따왔다. 범마는 인도사상에서 만유의 근원인 브라흐만(Brahman)을 신격화한 명칭이기도 하다. 아버지 수범마는 범마를 닦고, 어머니 범마월은 그 범마를 초월하여 미륵보살을 낳았다.
부모 이름대로라면 노힐부득은 아미타불이 되고 달달박박은 미륵보살이 되어야 옳다. 범상찮은 부모에게서 난 두 사람의 이름은 방언, 즉 순 우리말로 지었다. 노힐부득은 당시 음으로는 어찌 읽었을지 알 수 없다. 진평왕의 왕비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이름이 복힐구(福肹口)였고, 성덕왕 때 김지성(金志誠)의 누이 이름은 수힐매(首肹買)였던 것을 보면 힐은 조음소(調音素) 구실을 한 듯 하다. ‘힐(肹)’은 ‘흘’로 읽은 여러 용례가 있다. 득(得)은 등(等)이라고도 한다 했는데, 등(等)은 ‘들’ 또는 ‘돌’로 읽었다. 그렇다면 노힐부득은 노흘부돌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터. 『삼국유사』는 두 사람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각각 따로 풀이 했다. 노힐부득은 ‘심행등등(心行騰騰)’ 즉 마음과 행실이 우뚝하다는 뜻이고, 달달박박은 ‘고절(苦節)’, 곧 매운 절개의 의미라고 했다. 굳이 오늘식으로 푼다면 고행으로 자신의 육신을 ‘달달’ 볶고,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융통성 없이 ‘빡빡’한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한 사람은 우뚝한 행실로, 한 사람은 매운 절개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삼국유사』의 이런 명명법은 참 재미나다. 그들이 머리 깎고 중이 된 곳은 법적방(法積房)이고, 다시 옮겨 묵은 곳은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이며, 따로 거처한 곳은 대불전(大佛田)과 소불전(小佛田)이다. 노힐부득은 대불전의 회진암(懷眞庵)에서, 달달박박은 소불전의 유리광사(琉璃光寺)에서 살았다. 법이 쌓이고[法積], 법을 으뜸으로 삼는[法宗] 승도(僧道)를 지켜, 크고 작은 불전(佛田)을 일궈 회진(懷眞) 즉 진인을 그리고, 유리광(琉璃光)을 염원한다는 것이다. 유리광은 십항하사(十恒河沙)의 세계에 있는 부처님, 즉 약사여래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불전을 차지한 노힐부득이 소불전에 터전을 잡은 달달박박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이렇듯 무심한 인명과 지명 속에 이미 전체의 주제는 암시되어 있다.

모두 처자를 데려와 살면서 생활을 꾸려 나갔다. 서로 왕래하면서 안양(安養)에 정신을 깃들이며, 방외의 뜻을 잠시도 그만 두지 않았다. 신세(身世)의 무상함을 보고, 인하여 서로 말했다.
“좋은 밭과 풍년 든 해가 좋기는 해도,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마음먹은 대로 이르고, 저절로 배부르고 따뜻한 것만은 못하다. 부녀와 집이 마음에 좋지만, 연지(蓮池) 화장(華藏)의 세계에서 천성(千聖)과 함께 노닐고,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즐기는 것만은 못하다. 하물며 부처를 배웠거든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인(眞人)을 닦았으면 반드시 진인됨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들이 이미 화려함을 버려 승려가 되었으니, 마땅히 얽매인 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무상(無上)의 도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어찌 풍진 세상에 골몰하여 속된 무리와 다름없이 지내겠는가?”
마침내 인간 세상을 침 뱉고 사절하여 장차 깊은 산골짝에 숨으려 하였다. 밤중 꿈에 백호광(白毫光)이 서쪽으로부터 이르렀다. 빛 속에서 황금색의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깨어 꿈 이야기를 해보니 서로 꼭 같았으므로 모두 한 동안 감탄하였다. 마침내 백월산 무등곡(無等谷)[지금의 남수동(南藪洞)]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음에도 처자를 데려와 생활을 꾸렸다고 했다. 앞서 광덕과 같다. 재가불자(在家佛者)였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마음 쏟은 곳 역시 광덕과 엄장이 그랬던 것처럼 안양(安養)이었다. 현세에 살면서도 생각은 늘 방외에 가 있었다.
그들은 풍년의 배부름과 의식의 풍족함을 무상(無常)으로 덧없이 여기고 천성(千聖)과 함께 노니는 연지화장(蓮池華藏)의 세계를 꿈꾸었다. 연지화장은 비로자나불이 계신 정토이자 아미타불의 정토인 연화장(蓮華藏) 세계다. 그들은 학불(學佛)하여 성불(成佛)하고, 수진(修眞)하여 득진(得眞)함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회진암(懷眞庵)에서 수진(修眞)하던 노힐부득이 이제 득진성불(得眞成佛)의 서원을 세운 것이다. 무상(無上)의 도를 얻기 위해 그들은 먼저 인간 세상을 사절하고 깊은 산골로 숨기로 다짐한다. 가족도 생업도 버리고 본격적인 정진을 쌓기로 한 것이다.
서원을 세운 그날 밤 그들의 꿈에 백호광(白毫光)이 서방으로부터 이르러 왔다. 황금색 팔뚝이 그 찬란한 빛무리 속에서 나와 두 사람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백호광은 부처님이 지닌 32가지 신체적 특징 중의 하나다. 부처님의 두 눈썹 사이에 흰 양털 같은 한 가닥 터럭이 오른쪽으로 감겨 있다. 잡아 당기면 한 길이지만 놓으면 말려서 둥근데, 여기서 찬란한 광채가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황금색 팔이 정수리를 어루만진 것은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 즉 징표다. 그들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부처님이 직접 축복해 주었으므로 용기 백배해서 백월산의 무등곡(無等谷)으로 들어갔다. 태어난 마을 근처에서 농사짓고 살던 평범했던 그들이, 앞서 중국 황제의 연못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남백월산 사자암 아래로 마침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박박 스님은 북쪽 고개 사자암을 차지해 판자집으로 여덟 자 방을 지어 살았다. 그래서 판방(板房)이라 한다. 부득 스님은 동쪽 고개의 돌무더기 아래 물 있는 곳을 차지해, 또한 방장(方丈)을 이루어 살았다. 그래서 뇌방(磊房)이라고 한다. [향전에서는 부득은 산 북쪽 유리동(瑠璃洞)에 살았는데 지금의 판동(板房)이고, 박박은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 뇌방(磊房)에 살았다고 하여 이것과 서로 반대다. 이제 살펴보니 향전이 잘못이다.] 각자 암자를 지어 살면서,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彌勒)을 구하였고, 박박은 예불하여 미타(彌陀)를 외웠다.

이들이 들어간 골짜기 이름은 무등곡(無等谷)이다. 무등(無等)은 불교적으로는 큰 깨달음을 뜻하는 무등정각(無等正覺)의 의미가 되지만 이 또한 방언이다. 광주 무등산을 서석산(瑞石山)이라 하고 무등은 ‘무돌’로 읽는다. 여기서 무돌과 서석(瑞石)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광주 무등산처럼 돌무더기 너덜겅이 있는 골짝을 무등, 무돌로 불렀던 사정이 짐작된다. 부득의 ‘득(得)’이 ‘등(等)=돌’로도 쓰였다는 사실을 잠깐 기억해 두자.
박박은 북령(北嶺)의 사자암을 차지해 사자후(獅子吼)를 토할 준비를 갖춘다. 그는 몸 하나 겨우 누울 여덟 자 판자집을 지었다. 부득은 동령(東嶺) 뇌석(磊石), 즉 돌 너걸겅 아래 물까지 갖춘 곳에 방장(方丈)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일연은 향전(鄕傳)이 부득과 박박의 거처를 반대로 혼동했다고 적었다. 향전은 박박이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 뇌방에 살았고, 부득은 산 북쪽 유리동(琉璃洞)에 살았다고 적었다. 앞서 유리광사(琉璃光寺)에 거주했던 박박이 유리동(琉璃洞)에 사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일연의 지적처럼 두 사람 관련 기록은 여기저기 뒤섞여 착종되어 있다. 아무래도 도를 먼저 깨우친 부득이 산 꼭대기 여덟 자 좁은 판자집에 살고, 박박이 동쪽 물가의 열 자 크기 뇌방에 자리 잡는 것이 합리적이다. 뒤에 나오는 처녀도 산 아래 동쪽 뇌방을 먼저 찾고, 거기서 퇴짜 맞아 북쪽 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해야 이치에 닿는다. 이렇게만 본다면 북령의 사자암을 부득이 차지했고, 동령 뇌방을 박박의 거처로 본 향전의 언급이 오히려 합당하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두 사람이 예불한 부처님이 달랐다는 점이다. 부득은 미륵 부처님을 구했고, 박박은 아미타 부처님을 외웠다. 두 사람은 함께 안양 정토에 지향을 두고, 같이 백호광이 비치는 가운데 황금 팔뚝이 이마를 어루만지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막상 둘의 지향점은 달랐다. 부득의 부모 이름은 아미타불의 부모 이름을 취했고, 박박의 부모 이름은 미륵불의 부모 이름에서 따왔다. 그렇다면 이것도 거꾸로다. 부모의 이름으로만 보면 미륵불과 아미타불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부모의 이름을 바꿔도 문제다. 뒤의 기록으로 보면 부득이 미륵불이 되고, 박박이 아미타불이 된 것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미륵 신앙과 아미타 신앙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다. 미륵 신앙은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 미륵 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을 염원하는 미륵 상생 신앙과, 아예 미륵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현세를 불국토로 만들어주기를 희망하는 미륵 하생 신앙으로 구분된다. 백제 무왕의 미륵사나 신라 황룡사는 모두 현세의 불국토를 염원한 미륵하생 신앙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꿈꾼 미륵 세상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지상에는 오로지 전쟁과 살육의 피비린내 뿐이었다. 현실에 더 이상 구원은 없었다. 여기에 중국 불교에서 서서히 힘을 얻게 된 아미타불 신앙이 전파되면서, 미륵 신앙은 점차 아미타 신앙으로 바뀐다. 아미타 신앙은 무량수불(無量壽佛)로도 일컬어지는 아미타불이 계신 서방 정토 안양 세계에 왕생함을 목표로 삼는 신앙 체계다. 그 방법도 단순해서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뜻을 지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열심히 외우면 극락왕생 할 수 있다. 염불만으로 극락왕생 할 수 있다는 이런 단순한 신앙체계가 민중들에게 급속도로 파고 들었을 것은 췌언이 부질 없다.
더욱이 아미타 신앙의 소의경전 중 하나인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과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에는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륵 보살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보인다. 선행을 행하고 악행을 짓지 않으며, 『아미타경』을 지성껏 독송하면 정토에 환생하여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전파를 미륵보살과 아난존자에게 부탁했다. 이제 하생을 염원해 마지 않던 미륵보살은 도리어 아미타 신앙을 전파하는 전파자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따로 예불했다. 이는 당시 재래의 미륵 신앙과 새롭게 대두된 아미타 신앙 사이에 어느 한 쪽으로의 급격한 쏠림 현상이 없었다는 뜻이다. 결과만 두고 보면 여전히 미륵 신앙은 아미타 신앙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이어지는 서사로 넘어가자. 박박이 먼저다.

세 해가 채 못 되어, 경룡(景龍) 3년 기유년(709) 4월 초파일, 성덕왕이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날이 저물려 하는데 나이가 스무살 가량인데 자태가 몹시 곱고 아름다운 향내를 풍기는 한 낭자가 갑자기 북암[향전에서는 남암이라 하였다.]에 이르러, 묵어 자기를 청하였다. 인하여 시를 지어서 주었다.

가다가 날 저물어 천산(千山)이 저물었고 行逢日落千山暮
길 막히고 성은 멀어 사방이 끊겼구나. 路隔城遙絶四隣
오늘은 암자에서 묵어 자고 가려가니 今日欲投庵下宿
자비하신 스님께선 화를 내지 마소서. 慈悲和尙莫生嗔

박박이 말했다.
“절집은 깨끗함을 지키는데 힘써야 한다. 네가 취해 가까이 할 바가 아니다. 어서 떠나 이 곳에 머물지 말라.”
그리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기(記)에는 “나는 백가지 생각이 재처럼 식었으니 혈낭(血囊)으로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스무살 가량의 절세 미녀가 고운 향내를 풍기며 한 밤 중에 찾아와 재워달라는 상황이다. 세속의 눈으로는 호박이 넝굴째로 굴러온 것이겠으되, 박박의 태도는 뜻밖에 단호하다. 「성도기(成道記)」의 언급으로 보아, 박박은 그녀의 행동을 자신을 파계시키려는 마귀의 유혹으로 판단한 것이 분명하다. 4구에서 화내지 말라고 한 것은 그녀 또한 박박이 이 상황을 못 견뎌 성낼 것을 예상했다는 의미다.
눈여겨 볼 것은 그녀가 암자를 찾은 날짜가 4월 초파일이라는 사실이다. 부처님 오신날 암자를 찾아든 어여쁜 낭자의 딱한 사정은 ‘난야호정(蘭若護淨)’ 즉 절집은 청정함을 지켜야 한다는 박박의 엄정한 논리 앞에 호소력을 잃었다. 더욱이 그는 당당하게 온갖 욕념이 사라졌으니, 육체로 나를 유혹하지 말라며 스스로 굳게 문을 닫아 걸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담긴 행동이다.

낭자는 남암(南庵)으로 가서[전(傳)에는 북암이라 했다.] 또 전처럼 청했다. 부득이 말했다.
“너는 어디로부터 이 밤중에 왔는가?”
낭자가 대답했다.
“담연(湛然)하여 태허(太虛)와 더불어 한 몸이거늘 어찌 오고 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비님의 뜻과 소원이 깊고 무겁고, 덕행이 높고도 굳세다길래 장차 보리(菩提)를 이루는 것을 도우려는 것일 뿐입니다.”
인하여 게송 한 수를 읊었다.

하루 해도 다 저문 천산 길에서 日暮千山路
가도 가도 사방 길은 끊기었구나. 行行絶四隣
대숲 솔숲 그늘 점차 깊어만 가고 竹松陰轉邃
골짝의 냇물 소리 외려 새롭네. 溪洞響猶新
길 잃어 잠 자기를 청함 아니요 乞宿非迷路
높은 스님 일깨워 주려 함일세. 尊師欲指津
원컨대 제 청을 따라 주시고 願惟從我請
무엇 하는 사람이냐 묻진 마소서. 且莫問何人

스님이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
“이곳은 부녀자가 더럽힐 곳이 아니오. 하지만 중생을 따르는 것 또한 보살행의 하나요. 하물며 궁벽한 산골에 밤이 깊으니 어찌 소홀히 볼 수 있겠는가?”
이에 암자 안으로 맞아들여 읍하고 머물게 하였다.

밤중이 되자 맑은 마음을 굳세게 다잡아 반벽의 희미한 등불로 쉼 없이 독송하고 염불하였다.

낭자의 태도는 앞서와 사뭇 다르다. 박박에게는 덮어놓고 재워달라며 글[詞]을 들이민데 반해, 부득에게는 그 품은 뜻의 심중(深重)함과 덕행의 고견(高堅)함으로 추켜 세운 후, 보리(菩提)를 이루는 것을 도우려한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부득에게 준 글도 앞서처럼 사(詞)가 아니라 게(偈)였다. 두 글은 같은 운자로 된 시인데, 하나는 7언절구이고, 하나는 5언율시다.
박박에게 준 시의 1.2구에서 ‘천산모(千山暮)’와 ‘절사린(絶四隣)’을 말한 것은 부득에게 준 게송의 1.2구에서 역시 ‘모천산로(暮千山路)’와 ‘절사린(絶四隣)’으로 되풀이 된다. 하지만 박박의 시가 이제 3,4구만 남은 데 반해, 부득의 게송은 아직도 6구가 더 남았다. 3,4구에서는 송죽의 그늘이 점차 깊어짐에도 불구하고 냇물 소리는 오히려 더 새로워진다고 했다. 5,6구에서는 이제 그 소리를 따라 온 것이니, 길을 잃어 잘 곳이 없어 재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스님에게 오히려 깨우침의 바른 길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산이 깊어질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물소리는 부득의 청정심(淸淨心)을 높인 것이다.
젊고 예쁜 여자의 이 당돌한 말에 대한 부득의 첫 반응은 ‘경해(驚駭)’ 즉 놀람 그 자체였다. 나를 믿고 부탁을 들어줄 뿐 다른 것은 묻지 말라고 쐐기를 박는 언급에, 부득은 수순중생(隨順衆生)의 보살행으로 대꾸한다. 수순중생이란 중생의 뜻에 순종하여 따른다는 말이다. 그 자신은 밤 늦도록 염송을 계속했다.

밤이 장차 다하려 할 때, 낭자가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도 마침 출산의 근심이 있으니, 청하건대 스님께서 거적 자리를 깔아주십시오.”
부득이 슬퍼하며 불쌍히 여겨 거역하지 못하고, 등촉을 은근하게 밝혔다. 낭자는 해산한 뒤에 또 씻겨 줄 것을 청했다. 노힐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엇갈렸다. 그러나 애처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해져 그만두지 못하였다. 또 목욕통을 준비하여 그 속에 낭자를 앉히고서 불을 때서 덥힌 물로 씻겨주었다.
그러자 목욕통 속의 물에 향기가 짙어지더니 금물로 변하는 것이었다. 노힐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님도 여기서 목욕하시지요.”
굳이 권하기에 이를 따랐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하고 시원해지며 피부가 황금빛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 곁을 보니 홀연 하나의 연화대(蓮花臺)가 생겨났다. 낭자가 그에게 앉으라고 권하며 말했다.
“나는 관음보살이다.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게 한 것이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염불 소리 속에 아무 일 없이 날이 새는가 싶던 암자는 낭자의 돌연한 요청에 다시 한번 출렁한다. 젊은 여인의 해산 자리를 지키고, 목욕물을 덥혀 몸까지 씻겨주었다. 두 차례의 유혹이 더 뒤따랐던 셈이다. 그럼에도 부득이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애처롭게 여겨 한결같은 마음을 보이는 순간 목욕통의 물은 금빛으로 변하고, 함께 목욕하자 피부도 금빛으로 변했다. 홀연히 생겨난 연화대좌에 올라 앉자 낭자는 자신이 관음보살의 화신임을 밝히고 사라졌다. 이로써 마침내 부득의 대보리(大菩提)가 이루어졌다.
이 장면은 『미륵상생경』의 다음 대목을 연상시킨다. “이때 도솔천의 칠보대 안 마니전(摩尼殿) 위 사자상좌(狮子床坐)에 홀연히 화생하여 연꽃 위에 결가부좌 하시니, 몸은 염부단금(閻浮檀金)의 빛깔이었다.” 미륵보살의 화생 장면인데, 좀전 부득의 광경과 방불하다. 이제 남백월산은 도솔천이 되고, 그의 암자가 있던 사자암은 사자좌가 된다. 홀연 생겨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노힐부득은 모든 면에서 미륵보살의 현신인 셈이다. 여기서 굳이 중국 황제의 이야기까지 끌어와 백월산의 사자암을 강조한 사정이 환해진다. 앞서 사자암에 판방을 짓고 수도한 것이 박박 아닌 부득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박이 말했다.
“노힐이 오늘 밤 반드시 계율을 더럽혔을 터이니, 장차 가서 비웃어 주리라.”
이윽고 이르러 노힐이 연대(蓮臺)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명을 발하고, 몸은 단금(檀金)으로 칠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올리며 말했다.
“어찌 여기에 이름을 얻었소?”
노힐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박박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장애됨이 무거워, 요행이 큰 성인을 만나고도 도리어 알아보지 못하였구려. 대덕(大德)께서는 지극히 어지시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으셨으니, 원컨대 지난 날 교분 나눈 일을 잊지 마시고 모름지기 함께 건져 주십시오.”
노힐이 말했다. “통에 남은 물이 있으니, 다만 씻는 것이 좋겠네.”
박박이 씻자 또 전처럼 무량수(無量壽)를 이루어, 두 존사(尊師)가 서로 엄연히 마주하였다.
산 아래 마을 사람이 이를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 보며 찬탄하여 말했다.
“드문 일이다. 드문 일이야.”
두 성인은 그들을 위해 불법의 요체를 설명해주고, 온몸이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한편 박박은 쫓겨난 낭자가 부득에게 갔으리라 확신했다. 틀림없이 계율을 범했으리라고 한 것은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자못 치열했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와서 보았을 때 그가 확인한 것은 연화대좌 위에 앉은 황금빛 미륵불이었다. 어느새 박박의 부득에 대한 호칭은 대덕(大德)으로 바뀌어 있다.
부득의 권유에 의해 목욕통에 남은 물에 몸을 씻은 박박은 즉시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로 변했다. 사람들이 모여 이 희한한 일을 찬탄했다. 두 성인은 불법의 요체를 사람들에게 일러준 뒤에 전신이 그대로 구름 위로 올라가 서방정토로 가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755)에 신라 경덕왕이 즉위하였다. [고기(古記)에는 천감(天鑑) 24년 을미년에 법흥왕이 즉위한 해라고 하였으니, 어찌 앞뒤가 심하게 도착된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이 일을 듣고는 정유년(757)에 사신을 보내 큰 가람을 창건케 하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南寺)라 하였다. 광덕(廣德) 2년[고기에는 대력(大曆) 원년이라 하였는데, 또한 잘못이다.] 갑진(764) 7월 15일에 절이 이루어졌다. 다시 미륵존상을 주조하여 금당에 안치하였다. 편액에는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하였다. 또 미타상을 주조하여 강당에 봉안하였는데, 남은 금물이 부족해서 바른 것이 고르지가 않았다. 그래서 미타상 또한 얼룩덜룩한 흔적이 있다. 편액에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하였다.

이제 후일담과 논찬부가 남았다. 755년에 경덕왕이 즉위했다고 했는데, 이해는 경덕왕 즉위 원년이 아니라 재위 14년째 되던 해이니 잘못이다. 낭자가 두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709년의 일이었고, 경덕왕이 이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그로부터 무려 48년 뒤의 일이었다. 이 긴 시간의 간격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절이 완공된 것은 다시 7년 뒤인 764년 7월 15일이었다. 두 부처님의 존상을 주조하여 미륵전과 무량수전을 금당과 강당에 각각 안치했다. 차등을 둔 것이다. 두 존상을 모신 전각의 편액 앞에 ‘현신성도(現身成道)’란 관형어를 함께 붙였다. 육신을 버리지 않고 현세의 몸 그대로의 상태에서 도를 이뤄 부처님이 되었다는 뜻이다. 미륵불과 아미타불의 현신이 서방정토가 아닌 남백월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결국은 신라가 불국토요, 안양세계가 곧 신라라는 선언인 셈이다. 또 미륵불의 인도에 따라 아미타불이 함께 현신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가? 다만 미타상의 금불이 부족해 얼룩덜룩한 흔적이 남았다고 하여, 애초에 달달박박이 보여준, 자리(自利)에 머물고 이타(利他)에 미치지 못한 행동에 대한 차별만큼은 잊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논찬부를 마저 읽는다.

의논한다. 낭자는 마땅히 부녀의 몸으로 이끌려 변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엄경』에서 마야부인(摩耶夫人) 선지식(善知識)은 십일지(十一地)에 부쳐 환술과도 같은 해탈문(解脫門)으로 부처를 낳았다. 이제 낭자가 순산한 은미한 뜻이 여기에 있다. 그 건넨 시를 보니 슬프고도 어여뻐 아낄만 한데 곡진하여 천선(天仙)의 운치가 있다. 아아! 만약 낭자가 ‘수순중생어언다라니(隨順衆生語言陀羅尼)’를 알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였겠는가? 그 끝 연은 마땅히 “맑은 바람 평상에서 날 꾸짖지 마옵소서(淸風一榻莫予嗔)”라고 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세속의 말과 같게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마야부인이 선재동자에게 자신이 어찌하여 일체보살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지 설명하는 대목에서 여환해탈문(如幻解脫門), 즉 환술과도 같은 해탈문 이야기가 나온다. 마야(摩耶)란 말 자체가 환(幻)으로 번역되니, 이는 본래 신이 인간들로 하여금 환영으로 드러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게 만드는 마술적 힘이라는 의미다. 마야부인이 일체보살의 어머니가 되듯, 낭자의 순산도 이와 같은 의미라고 설명한 것이다. 십일지(十一地)는 가장 높은 보살의 단계다. ‘수순중생어언다라니(隨順衆生語言陀羅尼)’는 『수호국계주다라니경(守護國界主陀羅尼經)』 권 1에 용례가 보인다. 결국 『화엄경』과 『다라니경』의 교의(敎義)로 낭자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끝에서는 처음에 달달박박에게 건넨 사(詞)의 제 4구 “자비하신 스님께선 화를 내지 마소서.(慈悲和尙莫生嗔)”가 제대로 된 시가 되려면 “맑은 바람 평상에서 날 꾸짖지 마옵소서(淸風一榻莫予嗔)”가 되어야 옳은데, 세속의 말과 구분을 두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임을 설명했다. 맨 끝의 찬시(讚詩) 3수는 앞에서 한 말의 반복이어서 지면 관계상 할애키로 한다.
이렇게 해서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긴 서사를 통독했다. 광덕과 엄장 곁에 관음보살의 응신(應身)이었던 광덕의 아내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두 사람 신심의 차이가 그녀를 통해 드러나고, 마침내 이를 매개로 함께 왕생극락 했던 것과 같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곁에는 관음보살의 화생(化生)인 낭자가 있었다. 두 사람의 깨달음이 차별이 있었고, 끝내 함께 정토로 건너가는 것도 같다. 말하자면 이 두 이야기는 같은 구조로 이루어졌다.
당시 신라는 미륵 하생 신앙 체계를 넘어 아미타불의 신앙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있었다. 아무나 지성스럽게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서방 극락정토로 환생할 수 있다는 지극히 민중적인 미타신앙은 수많은 재가불자들의 신심에 불을 당겼다. 그들은 가정을 꾸려가면서도 오로지 서방 정토를 향한 지향만을 품었다. 광덕과 엄장 이야기 바로 앞에 실려 있는 여종 욱면(郁面)이 분황사에서 염불하던 도중 그대로 솟구쳐 올라가 서방 정토로 가버린 이야기만 보더라도, 당시 신라에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 소리가 상하의 구분 없이 밤낮으로 울려퍼졌던 사정을 말해준다.

나무들이 고개 숙여, 관기와 도성
세 번째로 읽을 글은 『삼국유사』 권 5, 피은편 「포산이성(包山二聖)」조의 이야기다. 포산 즉 경북 현풍의 비슬산에 살았던, 활동했던 시기를 알 수 없고 행적조차 분명치 않은 두 승려의 이야기다.

신라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란 두 분의 거룩한 스님이 있었다. 어느 곳 사람인지는 모른다. 함께 포산(包山)[우리나라에서 소슬산(所瑟山)이라 하는 것은 범음(梵音)이니 이는 ‘싸다(包)’란 말이다.]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동굴에 거처했다. 서로의 거리가 십여리였다. 구름을 헤치고 달빛에 휘파람을 불면서 늘 서로 왕래하였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 싶어하면 산중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마치 서로 맞이하는 것처럼 하였다. 관기는 이것을 보고 그에게 갔다.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려고 하면 또한 똑 같이 모두 북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면 도성이 왔다. 여러 해를 이와 같이 하였다.
도성은 거처하는 곳의 뒤편 높은 바위 위에 늘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 몸이 솟구쳐 나와 전신이 허공에 올라서 갔는데 이르러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는 수창군(壽昌郡)[지금의 수성군(壽城郡)]에 이르러 유해를 버렸다고 한다. 관기 또한 뒤를 이어 진인(眞人)으로 돌아갔다. 이제 두 스님의 이름으로 그 터를 명명하였는데, 모두 남은 자취가 있다. 도성암(道成嵓)은 높이가 몇 길이나 된다. 후인이 동굴 아래에 절을 세웠다.

앞서의 두 이야기처럼 서사가 장황하지 않다. 일연은 관기와 도성 두 사람을 성사(聖師)란 최고의 극존칭으로 불렀다. 앞서 광덕과 엄장을 그저 사문(沙門)이라 한 것과 차이난다. 관기(觀機)는 하늘의 기미(機微)를 본다는 뜻이고, 도성(道成)은 도를 이루었다는 의미다. 이 번에도 두 사람은 산의 남쪽 암자와 북쪽 동굴에 따로 살았다. 세 이야기가 똑 같았던 점에서 당시 수행자들의 수행이 독행독수(獨行獨修)의 방식이었음을 짐작케한다.
앞서 본 두 글은 산 속 두 수행자의 다른 수행과 태도를 대비적으로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관기와 도성은 처음부터 깨달은 각자(覺者)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둘의 교감 방식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도성이 관기 생각을 한다. 산 속 나무들은 그 마음을 감지해서 관기가 있는 곳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관기는 그것을 보고, “아! 도성이가 부르는구나.”하며 구름을 헤치고 달빛에 휘파람을 불면서 도성을 만나러 간다. 관기가 도성을 생각한다. 또 나무들은 반대편으로 나란히 고개를 숙인다.
비슬산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짙게 깔리고, 그 위로 달빛이 가루처럼 부서지는 밤. 나무들이 소곤소곤 제 몸을 기울여 남쪽 암자에서 보내온 소식을 전하면, 관기는 구름 위를 허위허위 걸어 친구 도성을 찾아간다. 깨달음을 얻은 도사들이 서로가 보고 싶어 부르면, 그 마음이 메아리로 울려 퍼져 도미노가 무너지듯 나무들이 일제히 한 켠으로 쏠려가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온다.
그들의 행동은 일체의 구김살이 없는 무애행(无碍行)이요 자재행(自在行)이다. 도성은 늘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어느날 그의 몸은 그대로 허공으로 들려 올라가 마침내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관기도 그의 뒤를 따라서 갔다. 두 사람은 아무런 걸림 없이 낄낄거리며 한 세상을 잘 놀다가, 그냥 먼 길 떠나듯 서방정토로 돌아가 버렸다. 노힐부득이나 달달박박처럼 사람들을 모아놓고 법석(法席)을 베풀지도 않았고, 광덕과 엄장처럼 복잡한 중간의 곡절도 없었다. 그저 처음부터 걸림없이 살다가 매임없이 갔다.

태평흥국(大平興國) 7년 임오(982)에 승려 성범(成梵)이 처음으로 와서 절에 머물렀다. 만일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년 간 정성껏 애썼다. 여러 번 특별한 상서로움이 있었다. 당시 현풍(玄風)의 신사(信士) 20여명이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다 바쳤다. 매번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하여 쪼개 씻어 발[簾] 위에 놓아두었다. 그 나무가 밤만 되면 촛불처럼 빛을 발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을 사람들이 크게 보시하였다. 그 향도(香徒)가 빛을 얻은 해로써 하례하니, 이는 두 성인의 영감이요, 혹 악신(岳神)의 도움이었다. 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天王)이다.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 부처님의 유촉(遺囑)을 받았다. 본래 한 맹서가 있으니, “산 속에서 1천명이 출가하기를 기다려서 남은 업보를 받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산중에 아홉 성인의 끼치신 일을 기록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관기․도성․ 반사(㮽師)․첩사(첩(木+牒)師)․도의(道義)[백암(栢岩)에 터가 있다.]․자양(子陽)․성범(成梵)․금물녀(今勿女)․백우사(白牛師)가 그들이다.

일연은 위의 짧은 서사에 이어, 오랜 세월이 지난 뒤 982년에 승려 성범(成梵)이 도성암 자리에 지은 절로 와서 만일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연 일을 말했다. 이름으로 보아 만일미타도량을 연 목표는 성범(成梵), 즉 범천(梵天)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50여년 간 계속된 이 만일미타도량은 수많은 이적을 낳았던 신심 깊은 법도량이었다. 현풍의 남성 신도 20여명의 결사에서 출발한 이 만일도량은 점차 고을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법도량의 성공에 관기와 도성 두 성인의 영감과 함께 악신(岳神) 즉 이 산의 산신령인 정성천왕(靜聖天王)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 점이다. 앞서 「원광서학」조에서 원광이 삼기산에서 만난 여우 귀신의 도움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더욱이 산신령은 가섭불의 시대, 즉 전불시대에 이미 부처님의 유촉으로 1천명의 출가자를 배출할 때까지 이 산속에 남아 업보를 받겠다고 맹서한 터였다고 했다. 이 말은 산신령조차 불법의 수호자를 자임하여, 자신의 업보를 일찍 끝내기 위해서라도 만일미타도량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의미다. 그 결과가 끝에서 기록한 아홉 성인의 명단이다.
당초 관기와 도성의 이야기만으로는 아미타 신앙으로 볼 특별한 근거가 없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성범의 만일미타도량으로 인해, 「포산이성」조의 이야기는 앞서 본 다른 이야기와 함께 아미타불 계열의 신앙 이야기로 자리매김 된다.
여산(廬山) 백련사에서 만일염불결사를 처음으로 행했던 중국의 혜원(慧遠) 스님 이래로 아미타불을 칭념하는 만일미타도량은 신라에서도 여러 차례 결성되었다. 「욱면비(郁面婢)염불서승(念佛西昇)」조의 첫대목에도 “선사(善士) 수십명이 서방정토를 구하려는 뜻을 품고 고을 경계에 미타사를 창건하고, 1만일을 기약하여 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아미타 신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 신라 사람들 모두의 가슴 속에 정토를 향한 염원을 낙인 찍어 놓았던 것이다.
이제 끝단락을 마저 읽는다.

찬(讚)한다.

달빛 밟고 서로 찾아 운천(雲泉)을 희롱하니 相過踏月弄雲泉
두 노인의 풍류가 몇 백년이 지났구려. 二老風流幾百年
골짝 가득 안개 노을 고목에 남아있어 滿壑煙霞餘古木
찬 그림자 누웠다 일어났다 여태 맞이 하는 듯. 偃昻寒影尙如迎

반(㮽)은 음이 반(般)이니 우리말로는 피나무[우목(雨木)]이라 하고, 첩(木+牒)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말로는 갈나무[가을목(加乙木)]라고 한다. 이 두 스님은 오래동안 바위더미에 숨어 살며 인간 세상과 사귀지 않았다.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을 삼아 추위와 더위를 넘겼으니, 습기를 막고 부끄러운 곳을 가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풍악(楓岳)에도 이러한 이름이 있다고 하니, 옛날의 숨어사는 인사가 대개 빼어난 운치가 이와 같았음을 알겠다. 다만 그대로 따라하기는 어렵다.
내가 일찍이 포산에 살 적에 두 스님이 남긴 아름다운 자취를 기록한 것이 있다. 이제 함께 적는다.

자모(紫茅)와 황정(黃精)으로 뱃가죽을 채우고 紫茅黃精축肚皮(祝아래土한 글자)
가린 옷은 옷감 아닌 나뭇잎이로다. 蔽衣木葉非蠶機
찬 솔은 소슬하고 바위는 삐죽삐죽 寒松颼颼石犖确
날 저문 숲 아래서 나무해서 돌아오네. 日暮林下樵蘇歸
깊은 밤 밝은 달빛 향하여 앉노라면 夜深披向月明坐
절반쯤 나부껴서 바람 따라 날아갔지. 一半颯颯隨風飛
헤진 자리 가로 누워 단잠에 빠져들면 敗蒲橫臥於憨眠
꿈 속 넋도 홍진 굴레 이르지 않았다오. 夢魂不到紅塵羈
구름 놀 듯 가버렸네 두 암자는 폐허되어 雲遊逝兮二庵墟
산 사슴 멋대로 놀고 사람 자취 드물다네. 山鹿恣登人迹稀

위의 찬시는 관기와 도성의 멋진 풍류를 찬탄한 내용이다. 4구에서 찬 나무의 그림자가 두 사람 마음 길의 방향에 따라 언앙(偃昻), 즉 누웠다가 일어섰다 하는 되풀이를 여태도 계속 하고 있는 듯하다고 한 것이 인상적이다. 지금도 현풍 비슬산의 도성암과 관기봉의 나무들은 그때처럼 한쪽을 향해 일제히 몰려갔다 몰려오는 형국을 취하고 있음은 필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 있다.
이어지는 글은 포산의 아홉 성인 중 또 다른 두 수행자 반사와 첩사, 두 스님에 관한 짧은 덧붙임이다. 반사는 피나무 잎으로, 첩사는 갈나무 잎을 엮어 옷 대신 입고 살았다. 말 그대로 무소유와 자재무애의 경계를 몸소 실천한 승려가 관기와 도성 외에도 이 산에서 거듭 배출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는 두 스님의 자취를 기린 시 한 수를 적었다.

이상 다소 장황해진 논의를 정리하자. 미륵의 시대가 지나고 신라에는 아미타불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진골 출신의 환희사(歡喜師) 같은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던 황룡사 옆 분황사에서도 만일미타도량이 열렸다. 계집종 욱면은 그 신심 높던 귀족들을 제치고 마당에서 법당으로 불려 들어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천정을 뚫고 서방정토로 날아가 버렸다. 산속에서는 신발 만들고 화전 일구던 수행자들이 소유와 집착을 다 버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빛을 타고 올라 극락왕생하였다. 도처에서 기적이 일어났고, 감통이 이루어졌다. 원효는 아예 염불 수행의 방법을 매뉴얼화 해서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달빛에 사뿐히 올라앉아 구름 가듯 서방정토로 떠난 사람들. 산속 나무조차 고개를 숙이던 갸륵한 마음들은 이제 그리움으로만 남았다. 암자는 폐허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은 그만큼 황폐해졌다. 그 순결한 첫 마음,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열정들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