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에 걸린 절집 ‘화려강산’이 되다
▲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 바로 아래 암봉에 들어선 약사암. 어찌 저런 곳에 절집을 앉힐 생각을 했을까. 우람한 암봉 아래 위태롭게 매달린 절집을 바라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암자 건물은 1985년에 지어진 것이지만, 절터의 내력은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풍경’을 가려내는 손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 바로 공중파 TV의 방송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시간에 흘러나오는 애국가의 배경 화면을 찾아보는 겁니다. 장엄한 애국가의 선율 속에서 동해의 추암 촛대바위나 거제 해금강의 사자바위, 제주의 한라산 윗세오름 등의 절경이 화면 가득 펼쳐집니다.
대개는 명성이 알려진 익숙한 곳들인데, 어느 날부터 화면에 낯선 풍경 하나가 끼어들었습니다. 기운차게 솟아 있는 암봉 아래 암자가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는 풍경. 암자 아래쪽으로 구름다리가 걸려 있고, 구름다리 끝의 위태로운 암봉 위에는 종루가 앉아 있습니다. 과연 저곳이 우리나라가 맞을까 싶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전경입니다.
그곳이 바로 경북 구미 금오산의 약사암입니다. 돌탑을 쌓아놓은 건너편 봉우리에 올라서 약사암을 내려다봅니다. 우람한 암봉과 절집, 그리고 멀리 그 뒤로 펼쳐지는 마을의 모습이 어찌나 빼어나던지요.
하기야 약사암이 아니더라도 금오산에는 우렁차게 쏟아지는 대혜폭포도 있고, 깎아지른 암봉의 비탈면을 아슬아슬 다듬어 만든 길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도선굴도 있습니다. 모두 다 빠뜨리면 아쉬울 곳들이지요. 하지만 이런 풍경을 보자면 장딴지 근육이 제법 뻑뻑해지는 가파른 산길을 차고 올라야 한답니다. 금오산은 해발 976m에 불과하지만, 길이 바짝 일어서 있어 숨이 턱까지 차오릅니다.
아마도 애국가 배경 속의 약사암이 사람들 사이에서 덜 알려졌던 것도 이런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구미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단어는 ‘공단’입니다. 일찍이 1970년대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섰을 정도로 산업화된 공업도시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구미나들목 부근을 지날 때마다 도시 한복판을 흘러가는 낙동강의 정취보다, 줄지어 늘어선 대규모 공단의 일사불란함과 공단 일대의 황량함에 먼저 눈이 가곤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행지로는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지요.
하지만 막상 구미로 들어서 보니 의외로 목가적인 풍경들이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한적한 들판에는 이삭이 막 팬 벼들이 물결치는 논들이 펼쳐져 있고, 돌담에 가지런히 깻단을 말리는 농가들에서는 청정한 가을 냄새가 짙었습니다. 비록 거친 개발의 공간과 이웃하고 있으되, 경관이 빼어난 명소들도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구미는 신라시대에 찬란한 꽃을 피웠던 해동불교가 시작된 곳이고, 영남 사림파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공단의 뒤편에 가려져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구미의 숨은 멋을 찾아 나섰습니다.
대개는 명성이 알려진 익숙한 곳들인데, 어느 날부터 화면에 낯선 풍경 하나가 끼어들었습니다. 기운차게 솟아 있는 암봉 아래 암자가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는 풍경. 암자 아래쪽으로 구름다리가 걸려 있고, 구름다리 끝의 위태로운 암봉 위에는 종루가 앉아 있습니다. 과연 저곳이 우리나라가 맞을까 싶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전경입니다.
그곳이 바로 경북 구미 금오산의 약사암입니다. 돌탑을 쌓아놓은 건너편 봉우리에 올라서 약사암을 내려다봅니다. 우람한 암봉과 절집, 그리고 멀리 그 뒤로 펼쳐지는 마을의 모습이 어찌나 빼어나던지요.
하기야 약사암이 아니더라도 금오산에는 우렁차게 쏟아지는 대혜폭포도 있고, 깎아지른 암봉의 비탈면을 아슬아슬 다듬어 만든 길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도선굴도 있습니다. 모두 다 빠뜨리면 아쉬울 곳들이지요. 하지만 이런 풍경을 보자면 장딴지 근육이 제법 뻑뻑해지는 가파른 산길을 차고 올라야 한답니다. 금오산은 해발 976m에 불과하지만, 길이 바짝 일어서 있어 숨이 턱까지 차오릅니다.
아마도 애국가 배경 속의 약사암이 사람들 사이에서 덜 알려졌던 것도 이런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구미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단어는 ‘공단’입니다. 일찍이 1970년대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섰을 정도로 산업화된 공업도시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구미나들목 부근을 지날 때마다 도시 한복판을 흘러가는 낙동강의 정취보다, 줄지어 늘어선 대규모 공단의 일사불란함과 공단 일대의 황량함에 먼저 눈이 가곤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행지로는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지요.
하지만 막상 구미로 들어서 보니 의외로 목가적인 풍경들이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한적한 들판에는 이삭이 막 팬 벼들이 물결치는 논들이 펼쳐져 있고, 돌담에 가지런히 깻단을 말리는 농가들에서는 청정한 가을 냄새가 짙었습니다. 비록 거친 개발의 공간과 이웃하고 있으되, 경관이 빼어난 명소들도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구미는 신라시대에 찬란한 꽃을 피웠던 해동불교가 시작된 곳이고, 영남 사림파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공단의 뒤편에 가려져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구미의 숨은 멋을 찾아 나섰습니다.
벼랑 위… 절벽 옆… 山寺서 사바세계를 굽어보다 구미에서찾은 ‘숨은풍경들’
# 구미에서 공단의 시간 속도와 다른 쪽의 모습을 만난다 경북 구미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단어는 ‘공단’이다. 구미에는 일찍이 1970년대 초반 섬유와 전자산업의 국가산업공단이 건설되면서 포항, 울산과 함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발돋움했다. 압축성장 시기에 구미는 앞서가는 세련된 도시였다. 경제적인 발전도 그렇지만, 여가문화도 다른 도시에 훨씬 앞서 갔다. 1970년대 중반에 금오산에 케이블카가 놓였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선 공장들과 출퇴근 시간이면 근로자들로 도시 전체가 북적이는 곳, 생산과 소비가 빠르게 이뤄지는 곳. 구미의 이미지는 이렇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구미의 한쪽 모습일 뿐이다. 구미에서는 도심만 벗어나면 시간의 속도가 다르다. 이제 막 이삭이 팬 벼들이 물결치는 논이 있고, 금빛 모래로 가득한 낙동강이 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신라 불교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도리사가 있고,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여기다가 구미의 진산으로 꼽히는 금오산(976m)의 절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구미에서는 금오산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구미의 역사와 경관은 금오산에서 시작해 금오산에서 끝난다. 금오산은 1970년 국내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 1974년에는 산 중턱의 해운사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됐다. 본격 등반이 아닌 케이블카를 타고 해운사가 있는 중턱까지 가는 행락만으로도 금오산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면 깎아지른 암벽의 자연동굴인 도선굴 입구와 까마득한 높이의 대혜폭포와 마주친다. 도선선사가 득도했다는 도선굴로 가는 길은 비탈면의 바위를 깎아 만들어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정도로 좁다. 바위에 철근을 박아 난간을 만들어 놓긴 했으되, 그 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굴은 난리가 있을 때면 인근 주민들이 숨어들어 피란생활을 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지금이야 영험하다는 ‘기도발’을 찾아나선 할머니들이 난간을 붙잡고 오르내리지만, 길이 다듬어지지 않고 난간도 없던 시절 목숨을 걸지 않고서야 어찌 까마득한 높이의 직벽에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까지 당도할 수 있었을까. # 기암의 벼랑에 들어선 절집 뒤로 아득한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다 금오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해 주등산로를 따라 정상인 현월봉까지는 3.8㎞ 남짓. 케이블카를 타면 두 발로 디뎌 오르는 길은 2.1㎞로 줄어든다. 길지 않은 거리라고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 등산로는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다. 숨은 턱까지 차고 장딴지는 뻑뻑하다. 해운사에서 도선굴과 대혜폭포를 지나 나무데크에 올라서면 ‘할딱고개’가 시작된다. 등산로는 짧은 대신 가파르게 일어서 있어 오르막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금오산에서는 따로 이름을 정하지 않아도 전 구간이 ‘할딱고개’인 셈이다. 금오산의 백미는 정상 바로 아래 암봉에 자리잡고 있는 약사암의 풍경이다. 정상 직전의 갈림길에 느닷없이 ‘동국제일문(東國第一門)’의 현판을 붙인 일주문이 나타나고 암벽 틈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암봉 아래 암자 약사전과 삼성각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손바닥만 한 약사전 마당에서 출렁다리로 연결된 범종각의 앉음새도 범상치 않다. 그러나 약사암은 암자에 들어서 보는 풍경보다 현월봉을 넘어 반대편 봉우리쪽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훨씬 더 빼어나다. 정성껏 쌓아 올린 돌탑 사이에 앉아 우람한 봉우리와 제비집 같이 매달린 절집, 그리고 그 뒤로 아득하게 물길을 따라 도시를 내려다보는 맛은 힘든 산행을 너끈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암자는 근래에 새로 지어진 것이지만, 절집의 내력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희미한 숲길을 따라 반대편 봉우리에 올라 빼어난 암자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경탄하듯, 처음 절집을 앉힌 이도 이쪽 봉우리에 먼저 올라 절집의 앉음새를 정했을 것이 틀림없지 싶다. 어찌 저런 곳에다 절집을 앉힐 생각을 했을까. # 신라 불교의 뿌리, 도리사에서 아도화상의 자취를 찾다 경관이 빼어난 절집으로는 금오산의 약사암이 구미에서 으뜸이지만, 시간의 깊이를 따지자면 단연 선산의 도리사를 꼽아야 한다. 신라에 불교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곳이 바로 선산이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선산의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 기거하면서 불교를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도리사가 있는 도개(道開)란 마을 이름도 ‘도를 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의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아도화상이 쌀 1000섬을 시주받아 지은 절집이 바로 신라 최초의 절집이자 ‘해동 최초의 가람’으로 불리는 도리사다. 도리사는 이즈음 가파른 진입로의 경사를 누이는 작업으로 번잡스럽다. 중장비들이 쿵쾅거리는 탓에 고즈넉하다는 진입로의 정취를 느낄 새가 없다. 건물들도 잇단 불사로 새로 지어진 것이어서 좀처럼 옛맛이 풍기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 지은 요사체를 지나 절집 안쪽으로 깊이 들어 극락전에 당도하면, 비로소 오래 묵은 절집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3칸짜리 극락전은 절집의 규모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작아서 오히려 짜임새가 느껴진다. 극락전 앞마당에 서면 마치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에서처럼 남쪽으로 낙동강변의 산자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마당 옆으로 나 있는 샛길을 따라 내려가면 ‘아도화상 좌선대’가 있다. 아도화상이 좌선했다는 널찍한 바위에 꼭 올라앉아 보자. 바위에 올라앉으면 나무를 스치는 산중의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구미에서 찾아봐야 할 또 하나의 절집으로는 문수사를 빼놓을 수 없다. 깎아지른 절벽의 동굴에 암자를 반만 지어 붙여 ‘반쪽 절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문수사의 대웅전은 평범한 농가와 다름없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뒤편 산길로 170m쯤 오르면 바위 절벽에 세운 반쪽 절집인 사자암이 있다. 반쪽짜리 암자 안에 들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절벽쪽은 따로 벽을 치지 않고 바위를 벽체로 삼은 탓이다. 법당 아래층에는 아예 바위가 집안으로 밀고 들어온 형국인데 희한하게도 바위에 큼직한 호랑이 발자국 형상의 문양 5개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 구미에서 느끼는 역사의 자취 구미의 선산은 15세기 영남 사림파의 중심지였다. 야은 길재와 김종직의 부친인 김숙자를 비롯해 이명전, 김맹성 등 난다 긴다 하는 성리학자들이 모여들었고,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의 등극을 반대하는 선비들이 이곳에 운집했다. 훗날 선산부사를 지냈던 김종직은 이를 들어 “영남 인재의 반이 일선(선산)에서 났다”고 했다. 구미가 영남 사림파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힘은 고려말 충신인 야은 길재에게서 나온다. 길재는 도리사에서 글을 배웠고, 만년에는 금오산 자락에서 기거했다. 금오산 입구의 ‘채미정’은 그의 절개를 기려 훗날 선산부사가 세운 정자다. 채미(採薇)란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오태동에는 길재의 묘소와 함께 ‘지주중류(砥柱中流)’란 큰 글자가 보는 이를 위압하는 비석이 우뚝 서 있다. ‘지주중류’는 중국 황허(黃河)강에 마치 기둥과 같은 지주산(砥柱山)이 있는데, 황허의 거센 물결 속에서 꺾임이 없으니 길재의 충절을 이에 빗댄 것이다. 앞면의 ‘지주중류’란 힘찬 글씨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의 것이고, 뒷면에 새겨놓은 유래는 서애 유성룡의 솜씨다. 이 밖에도 구미에는 곳곳에 이야기들로 그득하다. 구미의 해평과 산동에는 의구총(義狗塚)과 의우총(義牛塚)이 있다. 말 그대로 ‘의로운 개’와 ‘의로운 소’의 묘다. 의구총은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져 잠이 든 주인이 불길에 휩싸이자 개가 낙동강물에 몸을 적셔 불을 끄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의우총은 호랑이에게 쫓기던 주인을 구하기 위해 호랑이에 맞섰다가 부상한 주인이 죽자 울부짖다가 따라 죽었다는 소를 위한 무덤이다. 그렇다고 짐승에게까지 따로 묘를 썼을까. 그 이유는 의우총에 남긴 글에 단서가 있다. “단순히 의로운 소로 숭상함이 아니라 임금의 좋은 정치에 감화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사실은 의우총이 기리는 것은 ‘의로운 소’가 아니라 ‘임금의 은덕’이었던 것이다. 이 밖에 진미동 주민센터 부근에는 괘혜암(掛鞋巖)이란 글이 새겨진 선돌이 있다. 인동현감으로 있던 벼슬아치가 임기를 채우고 돌아갈 때, 아전에게 받은 짚신을 신고 있던 계집종을 불러 “이 짚신도 관의 물건이니 길가의 돌에 걸어 놓고 가자”며 신발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번잡스러운 길가에 세워진 돌 하나에서 제 것이 아닌 관의 물건을 탐하지 않는 청백리의 올곧은 정신이 느껴진다. 가는 길·묵을 곳·먹을 것 구미 가는 길=간명하게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구미나들목까지 가도 되지만, 그보다는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다시 경부고속도로로 올라서 구미나들목으로 나가는 편이 훨씬 가깝다. 더 짧게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청원분기점에서 청원-상주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낙동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다시 김천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가는 것이 낫다. 금오산으로 가려면 구미나들목으로 나가는 것이 빠르고, 도리사를 가려면 선산나들목으로 나가야 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금오산은 일찌감치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어서 도립공원 입구에 숙소가 즐비하다. 오래된 낡은 숙소들이 적잖지만, 근래 새로 지은 호텔이나 깔끔한 모텔들도 많다. 공단쪽이나 중심가에는 비즈니스호텔들도 많다. 피오레관광호텔, 예스관광호텔, 금오관광호텔 등을 추천할 만하다. 예약만 할 수 있다면 구미시에서 운영하는 옥성자연휴양림이 가족단위 숙박지로는 가장 좋다. 맛집으로는 산채정식을 내오는 금오산고향촌(054-455-3010)과 청기와한정식(054-456-5161), 칼칼한 복매운탕이 대표음식인 싱글벙글식당(054-452-4515) 등이 알려진 곳이다. 황강장어식당(054-455-4783)의 장어구이나 장수산방(054-456-0066)의 추어탕도 지역주민들이 알아주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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