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어느 된장 장사의 파란만장한 인생

醉月 2009. 9. 4. 09:02
어느 된장 장사의 파란만장한 인생


1988년 겨울 젖먹이 아들과 아내와 함께 부산역에 도착한 사내 이정림의 호주머니에는 7만원이 들어 있었다. 트럭 몇 대씩 굴리면서 인천에서 남 부럽지 않게 살던 유통업자. 하지만 친구에게 수표 잘못 떼 줬다가 부도나는 바람에 야반도주한 서른다섯 먹은 가장이다. 그 뒤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세월이 흘러 1998년, “돈 넣을 데가 없어서 푸대자루에 그냥 꾹꾹 눌러 담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남들은 IMF 구제금융 상황에 신음하고 있는데 이정림은 떼돈을 벌었다. 된장, 오로지 시커먼 된장 한 덩이씩 팔아서 번 돈이, 놀라지 마시라, 20억 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꿈꾸고 누구나 부러워할 성공 스토리. 그런데 세월이 또 흘러 2008년, 그러니까 작년에 20억 부자 이정림이 쫄딱 망했다. 물론 7만원 들고 야반도주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난 10년 세월이 어디 가버렸나 할 만큼 감쪽같고 허망하게 금은보화가 사라졌다.

그런데 이 된장장사가 웃고 산다. 위선의 미소가 아니라 진정성이 담긴 맑은 미소다. 왈(曰), “희망을 버리면 아니 되겠으나, 욕심은 버려야 한다는 걸 깨우쳤고, 욕심을 버리고 나니 내 마음이 그렇게 부자다.” 자, 부지런한 된장장사 이정림(56)의 파란만장한 일생.

쌀 한 줌, 된장 한 덩이, 연탄 한 장.

어릴 적 별명이 ‘계집애’였다. 목소리도 그러했고, 행동거지도 그러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소심하고 신중하게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금세 트럭 몇 대 굴리는 중견회사 경영자가 되었다. 잘 나갔다.

돈이 생기면 사람이 모인다. 인생의 철칙이다. 남 주기 좋아하는 성미에, 누군가 내미는 손에 수표 한 장 떼서 줬다. 그게 부도가 났다. 이리저리 막아봤지만 터진 봇물처럼 밀려오는 채무에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몇 남지 않은 세간도 팽개치고 야밤에 아들 들쳐 업고 아내와 함께 열차를 탔다. 1988년 겨울이었다. 내려보니 부산역이었고 호주머니에는 꾸깃꾸깃한 1만원 권 일곱 장이 들어 있었다. 살아낼 방도가 없었다.

남편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전국을 떠돌았다. 그 사이에 아내는 파출부로 일했고 남편은 남의 집 과수원 과일을 솎고 밭일을 했다. 전북 부안의 내소사에 있는 한 스님이 이정림을 딱하게 보고 절 방 한 칸을 내줬다. 몇 년 만에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

절에서는 부지런하고 딱한 이정림 가족에게 경내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해줬다. 토마토도 지어 팔고, 돈 되는 건 뭐든지 팔았다. 그때 절에 있던 스님이 뭔가를 들고 왔다. “조선사람은 쌀 한줌, 된장 한 덩이, 연탄 한 장만 있으면 살 수 있다. 용기를 내시게.” 고시 공부하러 절에 와 있던 학생 하나가 그에게 아무 조건 없이 200만원을 줬다. 그래서 내소사와 된장 한 덩이의 소중함과 용기를 가르쳐준 그 분, 그 학생을 평생 잊지 못한다.

어깨 너머 배운 죽염 제조법으로 죽염을 만들었다. 학생이 준 200만원으로 죽염을 만들어 팔다가 TV에서 죽염 몸에 나쁘다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또 망했다. 그리하여 흘러 흘러 가게 된 곳이 해발 350미터 고원지대 충청북도 괴산군 청원 땅이었다. 잘 알고 지내던 스님 한 분이 점지해준 땅이 있었다. 부자가 될 땅이라고, 그리고 짓는 농사마다 뭐든 잘 되는 그런 땅이라고. 1997년이다.

무작정 땅 주인을 찾아갔다. 돈 벌면 갚을 터이니, 믿고서 땅을 파시라고. 일이 되느라고, 땅 주인은 이정림에게 2000평 땅을 그냥 내줬다. 한때 유통업자, 그리고 대찰(大刹)의 머슴 처사로 전락한 이정림은 컨테이너 2개를 이어서 집을 올리고, 콩을 심고 죽염을 만들어 죽염된장을 담갔다. 장독 속으로 수 없이 고개 처박고 벌겋게 튼 손 부비며 담근 된장이 수천만 원어치였다.
그리고 IMF가 터졌다.


힘든 겨울이었다. 된장 짓느라고 진 빚, 그리고 10년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옛 빚쟁이들까지 괴산을 찾아왔다. 빚쟁이들은 된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돈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들고 갔다. 웃풍 휭휭 도는 컨테이너 집 문짝까지. 그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까지 다섯 가족이 이불 하나 칭칭 감고서 우는 동안 겨울이 지나갔다. 대한민국 전국민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던 겨울이었다.

재기, 황홀하고 화려했던 꿈

1998년, 세상 사람들 마음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귀농(歸農)을 꿈꾸게 된 것이 하나요, 어깨 처진 가장을 북돋우기 위해 여자들이 건강식과 유기농을 찾게 된 것이 둘이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실패한 된장장사에게 지역신문 기자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해 초 충북의 한 신문에 ‘토종 콩으로 죽염 된장을 만드는, 도시에서 온 사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걸로 “모든 것이 부활했다”고 했다.

첩첩산중을 귀신같이 찾아내 도시인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절반은 귀농의 지혜를 물었고 절반은 그에게서 된장을 사갔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2000만원, 어떤 날은 하루에 3000만원어치를 파는데, 돈이 들어오는데, 어디 둘 데가 없으니까 푸대에 돈 집어넣고 저녁에는 은행 지점장이 직접 와서 돈을 세서 가져가곤 했다. 통신판매도 엄청나서, 하루에 은행 통장 한 권씩 갈아치우곤 했으니깐.”

“손님들이 너무 많이 와서, 우리집에서 8킬로미터 아래에 질마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거기까지 도로 양편으로 주차장이 되는 거다. 경찰이 와서는 왜 경찰서에 신고도 하지 않고 행사를 해서 이런 난리를 만드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 덕에 세무조사도 두 번이나 받았다. 된장장사가.”

귀농의 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죽염 만드는 법부터 된장 담그는 법까지 세세하게 다 가르쳐줬다. 그러다 보니 TV며 신문이며 ‘귀농’하면 이정림을 찾았고 ‘된장’하면 또 이정림을 찾아갔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각종 언론 출연 기록’이 자그마치 225회다. 이 방면에 기네스 기록이 있다면 각종 명망가들 빼고는 그가 최고가 아닐까.

나라에서는 그에게 ‘신지식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줬다. 이정림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자기가 망했던 이야기, 다시 일어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람들의 수요와 언론의 공급이 서로를 증폭시키며 그는 돈과 명예를 동시에 쌓았다. 그 사이에 그는 서서히 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쌀 한 줌과 연탄 한 장으로 용기를 주던 스님을 망각했고 아무 조건 없이 거금을 내준 착한 학생을 망각했다.

IMF 이후 그가 벌어들인 돈이 20억 원이 넘었다. 그 돈으로 컨테이너를 철거하고 고래등 같은 집을 지었다. 밀려오는 손님들을 위해 식당을 만들었다. 된장 사는 손님한테 공짜로 밥을 줬다가 밥만 달라는 사람들 성화에 밥을 팔았다.

단체로 오는 손님들을 수용하려고 산기슭까지 땅을 사서 황토로 기와집 ‘타운’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제일 큰 돌장승 한 쌍을 세웠다.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다. 콩밭도 넓혔고 노래방도 만들었다. 버는 돈으로 모자라 또 은행빚을 냈다. ‘호산죽염식품’이라는 어엿한 이름도 지었다.

일장춘몽, 그리고 홀연한 깨달음 ‘나눔’

2005년 어느 날 강연이 딱 끊겼다. IMF의 악몽에서 세상이 깨어나고, 귀농의 지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 사이에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토속된장 만드는 집이 생겨났다. 공급 과잉. 게다가 다시 세상이 불황으로 골머리를 썩이면서, 여행객이 급감했고 그나마 다니는 여행객들은 하나같이 먹을거리를 싸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질마재에 있는 ‘왕년의’ 된장집은 빚을 잔뜩 짊어지고서 확장을 거듭했으니, 자본주의 논리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결국 2008년 이정림은 두 번째로 왕창 망했다. 된장, 간장, 고추장이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잉투자가 원인이었다. 아니, 과잉투자로 이끈 그의 ‘망각’이 원인이었다.

“인생살이가 이렇게 허무하고 쓸쓸하고 그래요. 힘들게 살다가 부자가 됐는데 욕심이 화를 불렀어요. 너무 많이 투자해서. 오뚝이 마냥 엎어졌다 젖혀졌다 그렇게 살았는데…. 생각해보면 다 꿈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욕심은 부리면 절대 안 된다는 거 이제야 알았어요.”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제는 요만큼 범위 내, 요만큼 테두리 내에서 장사하고 없는 사람 도우며 살다가 삶 마감하려고 계획 중이오. 고아원 지으려고 애를 썼는데 지금은 꿈에 지나지 않고, 언젠가 내가 못하면 애들이 할 수 있게끔 준비 중이죠.”

강연 요청이 끊겼을 무렵부터 그는 망각의 늪에서 조금씩 빠져 나왔다. “도망 와서 살 때 쌀, 연탄, 된장 주신 분 뜻이 떠올랐다. 그 스님도 없는 분인데, 당신보다 더 없는 사람한테 물질을 나눠주고 용기를 주지 않았나. 그 스님이 너무나도 고맙고 또 고마웠는데, 한참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이정림은 봄, 가을이면 그 동네 소년소녀 가장들이랑 독거노인들한테 된장과 청국장을 나눠줬다. 소매가로 치면 3000만원어치에서 나중에는 도합 2000명, 6000만원어치로 불어났다. 420킬로그램이다. “내가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장독에서 된장 한 덩이 퍼 봤댔자 표시도 안 나. 그런데 그거 한 덩이 있으면 노인들은 반년을 살 수가 있는 거야. 줘서 기분 좋고, 받아서 기분 좋은데 이걸 왜 안 해?”

욕망은 어찌보면 일장춘몽(一場春夢), 남가지몽(南柯之夢), 한단지몽(邯鄲之夢)이다. 엄청난 부를 거머쥐면서 좋은 차도 사고 된장 빚느라 다 터지고 마디 굵어진 손 창피해서 다듬어도 봤지만 덧없다. 이정림은 “결국에는 서로 나누는 것이 버는 것”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창피해서 이 손 가리고 다녔다. 그런데 장은 결국엔 손맛이다. 맛있고 몸에 좋은 장 만들다가 이렇게 된 건데, 곱게 해서 뭐하나. 언젠가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거 아닌가. 이제는 이 손이 기쁨의 손이다, 정말.”

지난해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중단했던 된장 나누기를 올 겨울에 재개한다. 창고에는 노인들과 어린 가장들에게 나눠줄 청국장이 발효 중이다. “올해는 어떻게 장사가 잘 돼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 있게 됐어. 인생살이, 속이 많이 상했는데 기쁜 마음으로 일하니까 힘이 안 든다. 그런데 나이는 점점 먹고 세월은 흘러가고 그러네.

” 깨우친 된장장사 이정림의 전화번호는 (043)832-1388, 된장집 홈페이지는 www.ihosan.co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