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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_차문화사_08

醉月 2009. 8. 12. 04:40

박영보의 「남차병서(南茶幷序)」와 「몽하편(夢霞篇)」

 

금령(錦舲) 박영보(朴永輔, 1808-1972)는 보림사의 죽로차(竹露茶)를 장시로 노래했던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초의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로 지목했던 사람이다. 그가 초의차를 맛보고 환호작약하여 쓴 「남차병서(南茶幷序)」시는 초의차를 세상에 알린 직접적 계기가 된 작품이다. 두 사람의 교유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작품인 「증교(證交)」 및 「몽하편(夢霞篇)」과 함께 읽어 본다.

초의와의 첫대면과 「남차병서」
1830년 9월, 초의(艸衣)는 스승인 완호(玩虎) 스님의 삼여탑(三如塔)을 세운 후, 명(銘)과 서문을 받기 위해 서울 걸음을 했다. 이때 폐백으로 초의가 들고 온 것은 보림사 죽로차(竹露茶)였다. 초의는 다산의 제자였다. 시문에 능했으며, 유가 경전에도 해박했다. 선(禪)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고, 그림마저 능했다. 이런 그가 1830년 직접 만든 차까지 들고 서울에 나타나자, 경화벌열 귀족들 사이에 돌연 초의 신드롬이라 해야 마땅할 열풍이 불어 닥쳤다.
박영보는 이때 우연히 다른 사람을 통해 초의의 수제차를 얻어 마셨다. 그리고는 그 맛에 반해 20운에 이르는 장편의 「남차병서」시를 지어 초의에게 인사를 청했다. 초의차가 경화세족들 사이에 단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남차병서」는 초의차 뿐 아니라 당대 차문화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자료다.
「남차병서」는 몇 가지 다른 계통의 필사가 존재한다. 먼저 박영보가 친필로 써서 초의에게 보낸 원본이 있다. 박영희의 『동다정통고』 부록에 사진이 실려 있다. 신헌(申櫶, 1811-1884)의 『금당기주(琴堂記珠)』에도 초의가 소장하고 있던 원본을 전사(轉寫)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박영보의 문집에 수록된 수정본이다.
그런데 친필본과 문집본 사이에는 수십 자 이상의 출입이 발견된다. 처음 초의에게 직접 써준 뒤, 나중에 문집에 옮겨 적으면서 박영보 자신이 상당부분 손질하여 개고한 것이다. 병서 부분도 두 본이 사뭇 차이가 있다. 먼저 친필본의 병서 부분을 읽어 보자.

남차는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 난다. 초의 선사가 그 땅을 구름처럼 노닐었다. 다산 승지와 추사 직각과 모두 시문으로 교유함을 얻었다. 경인년(1830) 겨울에 서울 지역을 내방하며 수제차 한 포로 예물을 삼았다. 이산중이 이를 얻어 돌고 돌아 내게까지 왔다. 차가 사람과 관계됨은 금루옥대(金縷玉帶)처럼 또한 이미 많다. 맑은 자리에서 한 차례 마시고 장구(長句) 20운을 지어 선사에게 보내니, 혜안으로 바로 잡고, 아울러 화답해 주기를 구한다.
南茶湖嶺間産也. 草衣禪師, 雲遊其地, 茶山承旨及秋史閣學, 皆得以文字交焉. 庚寅冬, 來訪于京師, 以手製茶一包爲贄. 李山中得之, 轉遺及我. 茶之關人, 如金縷玉帶, 亦已多矣. 淸座一啜, 作長句二十韻, 以送禪師, 慧眼正之, 兼求郢和.

시 끝에는 “경인 11월 15일 금령 박영보가 손을 씻고 삼가 드림(庚寅十一月望日 錦舲 朴永輔 盥手和南)”라는 구절이 덧붙어 있다. 화남(和南)은 선가(禪家)의 표현으로 상대에게 공경하여 예를 표한다는 말이다. 「남차병서」는 1830년 11월 15일에 지은 것이다.
박영보의 『서령하금집(西泠霞錦集)』(필사본, 『아경당초집(雅經堂初集)』 권4) 장 4a에 실린 문집본에는 위의 병서 대신 「남차는 호남과 영남의 사이에서 난다. 초의선사의 수제차를 우연히 얻어 한번 마시곤, 이를 위해 장구(長句) 20운을 지었다.(南茶産湖嶺間. 草衣禪師手製茶, 偶得一啜, 爲作長句二十韻.)」의 줄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제 살필 작품의 원문은 박영보가 최종 수정해서 문집에 실은 것이다.

古有飮茶而登仙 옛날엔 차를 마셔 신선 되어 올랐거니
下者不失爲淸賢 못 되어도 청현(淸賢)됨을 잃지는 않았다네.
雙井日注世已遠 쌍정차(雙井茶)와 일주차(日注茶)는 세대가 이미 멀고
雨前顧渚名空傳 우전차(雨前茶)와 고저차(顧渚茶)는 이름만 전해온다.
花瓷綠甌浪飮濕 화자(花瓷)와 녹구(綠甌)로 마구 마셔 적시니
眞味南商已經煎 참맛은 남상(南商)들이 이미 달여 보았다네.
東國産茶茶更好 우리나라 나는 차는 차맛이 더욱 좋아
名如芽出初芳姸 그 이름 싹 나올 제 첫 향기 고운 듯 해.
早或西周晩今代 빠르기는 서주(西周)부터 늦게는 지금까지
中外雖別太相懸 중외(中外)가 같지 않아 큰 차이 서로 나네.
凡花庸草各有譜 보통의 화초에도 각각 화보(花譜) 있다지만
土人誰識茶之先 토인이야 그 누가 차가 먼저임을 알리.
鷄林使者入唐日 신라 땅의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간 날
携渡滄波萬里船 만리 배에 차씨 지녀 푸른 바다 건너왔지.
康南之地卽建岕 강진과 해남 땅은 복건(福建) 나개(羅岕) 한 가진데
남방의 바다와 산 사이에 차가 많이 있는데, 강진과 해남이 특히 성하다.(南方海山間多有之, 康津海南尤盛.)
一自投種等棄捐 씨 한번 뿌린 뒤론 내던져 둠 같았었네.
春花秋葉抛不顧 봄 꽃과 가을 잎을 버려두고 돌보잖아
空閱靑山一千年 푸른 산서 일천 년이 쓸데없이 지나갔다.
奇香沈晦久乃顯 기이한 향 묻혀있다 오랜 뒤에 드러나니
採春筐筥稍夤緣 봄날이면 광주리에 따온 것이 인연됐네.
天上月團小龍鳳 하늘 위 달님인듯 용봉단(龍鳳團) 작게 빗자
法樣雖麤味則然 법제는 거칠어도 그 맛은 훌륭하다.
草衣禪師古淨業 초의 선사 정업(淨業)에 힘 쏟은 지 오래인데
濃茗妙悟參眞禪 짙은 차로 묘오(妙悟) 얻어 참된 선(禪)을 깨달았네.
餘事翰墨今寥辨 한묵(翰墨)이야 여사(餘事)여서 이제 다만 분별해도
一時名士香瓣虔 한 때의 명사들이 공경하여 우러르네.
出山甁錫度千里 병석(甁錫)으로 산을 나서 천리 길을 건너오며
頭綱美製携團圜 두강(頭綱)으로 잘 만든 단차(團茶)를 가져왔네.
故人贈我伴瓊玖 오랜 벗이 나에게 옥돌과 함께 주어
撒手的皪光走筵 희고 곱게 흩뿌리자 자리가 환해진다.
我生茶癖卽水厄 내 삶은 다벽(茶癖)에다 수액(水厄)을 더했는데
年深浹骨三蟲堅 나이 들어 뼛속까지 삼시충(三尸蟲)이 박혔다네.
三分飡食七分飮 열에 셋은 밥을 먹고 일곱은 차 마시니
沈家薑椒瘦可憐 집에 담근 강초(薑椒)마냥 비쩍 말라 가련하다.
伊來三月把空盌 이제껏 석 달이나 빈 찻잔 들고 있다
臥聽松雨流饞涎 송우성(松雨聲) 누워 듣자 군침이 흐르누나.
今朝一灌洗腸胃 오늘 아침 한 탕관(湯灌)에 장과 위를 씻어내니
滿室霏霏綠霧烟 방 가득 부슬부슬 초록 안개 서리누나.
只煩桃花乞長老 도화차(桃花茶) 심어 달라 장로에게 청하노니
愧無菊虀酬樂天 백낙천(白樂天)에 국화 나물 대접 못함 부끄럽다.

병서의 내용을 보면, 박영보는 초의가 서울로 오면서 가져온 차를 벗인 이산중(李山中)에게서 조금 얻어 마셨다. 그는 초의차를 맛보고 그 맛에 반해버렸던 모양이다. 사실 중국 사신 길에 조악한 중국제 가짜차를 비싼 값 주고 들여와 찔끔찔끔 마시던 상황에서 조선 땅에서 생산된 초의의 고급 떡차는 한양의 차 애호가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박영보는 즉시 붓을 들어 일면식도 없던 초의에게 장편의 시를 지어 감사의 뜻을 전하고, 화답을 청했다.
전후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처음 6구는 중국차의 연원을 말했다. 고인들이 차를 마셔 몸이 가벼워져서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 일과, 쌍정차(雙井茶)와 일주차(日注茶), 우전차(雨前茶)와 고저차(顧渚茶) 등 역대의 명차를 들어 차 마시는 일의 연원이 오랜 것을 밝혔다. 이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도 그 못지 않은 품질을 지녔음과 신라 때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들여와 남녘 땅에 이를 심어 재배한 내용을 적었다. 호남의 강진과 해남 땅은 중국에 견주면 차의 대표적 산지인 복건(福建) 나개(羅岕)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천년 전에 차씨를 뿌린 뒤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 까맣게 잊혀진 물건이 되고 말았음을 통탄했다.
그렇듯 잊혀졌던 차를 초의 스님이 나와 소룡단(小龍團) 떡차로 빚어냈다. 봄날 대소쿠리로 채취해 온 두강(頭綱)의 첫물차를 덩이지어 만든 초의의 떡차는 외양이 크게 볼품은 없었지만 맛이 빼어났다. 박영보는 초의가 차로 묘오를 얻어 선의 경지를 참구하였다고 높였다. 차를 마시는 법은 경구(瓊玖) 즉 옥맷돌에 갈아 가루내서 끓인다고 적었다. 마시던 차가 떨어져 석 달이나 굶고 있던 터라 했으니, 박영보는 이전부터 차를 몹시 애호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밥이 3이면 차가 7이라 하여 자신의 차벽(茶癖)을 말했다.
두강(頭綱)의 첫 잎으로 만든 미제(美製) 단차(團茶)를 차맷돌에 갈아 가루로 흩는다 한 것을 보면, 이때 초의가 가져와 선물했던 차는 떡차였음이 분명하다. 다산이 마셨던 차와 다를 바 없다.

초의의 「증교(證交)」시 화답과 박영보의 답시
박영보의 시를 받은 초의는 감격했다. 며칠 뒤에 바로 「남차(南茶)」시에 화답하여 친구 하자는 뜻을 부쳐 「증교(證交)」시 두 수를 박영보에게 보냈다. 박영보도 다시 화답하는 시를 지어 초의에게 보냈다. 초의가 박영보에게 준 원시는 전하지 않는다. 다음은 박영보의 화답시다. 제목은 「초의선사가 내 「남차」시를 받고서 「증교(證交)」 2수를 맡겨 왔다(草衣禪師得余南茶詩, 委來證交二首)」이다.

草衣傳法於豹斑 초의 스님 표반(豹斑)에서 법을 전수 받았나니
太白峯前舊掩關 태백봉 앞에서 예전 문을 닫았었네.


초의는 스님의 스승인 완호 스님이 내린 이름이다. 이태백의 「태백호승가서(太白胡僧歌序)」에, “태백산 중봉에 호승(胡僧)이 있는데 풀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 한번은 싸우는 범이 있어 지팡이로 이를 떼어 놓았다.”고 했다.(草衣師之師玩虎所命號也. 李太白太白胡僧歌序, 太白中峯有胡僧, 衣以草葉, 嘗有鬪虎, 以杖解之.)


供佛茶甌白毫相 불공 올린 차 사발엔 백호(白毫)의 형상이요
轉珠詩格玉連環 구슬 같은 시격(詩格)은 옥련환(玉連環) 한가질세.
月中飛錫來千里 달빛 타고 석장 날려 천리를 건너오니
海上濃靑第一山 바닷 가 짙푸른 제일 가는 산일래라.
스님이 사는 곳인 대둔사는 바로 남해에 임해있다. (師所居大芚寺, 直臨南海)
何待葛洪川畔約 갈홍천(葛洪川) 물가 약속 어이해 기다리리
楞伽經卷悟緣還 능가(楞伽)의 경전으로 인연 옴을 깨치시네.
石甃千年綠蘚斑 돌 우물 천년 세월 초록 이끼 얼룩지니
眼中興替閱禪關 눈 속에 흥망이야 선관(禪關)을 거쳤다네.
無邊黃葉前朝恨 가없는 누른 잎은 전조(前朝)의 한이겠고
不盡靑巒佛國環 다함없는 푸른 뫼는 불국(佛國)의 고리일세.
塔影鐘聲圓舊夢 탑 그림자 종소리가 옛 꿈을 징험하니
水流花發悟空山 물 흐르고 꽃은 피어 빈 산임을 깨닫누나.
逢君半日眞緣在 반나절 그대 만남 참 인연 있음이니
四大終當付八還 이 내 몸 마침내 팔환(八還)에 부치리라.

첫 수 1구에서 표반(豹斑)에서 법을 전수받았다 함은 초의의 전법(傳法) 스승인 완호(玩虎)의 ‘호(虎)’자를 염두에 둔 말이다. 범의 무늬를 이어 받은 제자라고 말한 것이다. 2구 아래 달린 주석에서 초의(草衣)란 호가 이백의 「태백호승가」에서 따온 것임은 앞의 글에서 이미 밝혔다. 1,2구는 초의가 완호의 제자면서 이백의 시에 나오는 태백호승의 후신(後身)임을 말한 것이다.
첫 수 3구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다구(茶甌)에 담긴 것이 백호(白毫)의 형상이라고 했다. 백호은침(白毫銀針)은 흰빛을 띤 바늘처럼 가는 일창일기(一槍一旗)를 따서 만든 맏물차로 중국에서 천하의 명차로 알려진 차다. 3,4구에서는 초의의 차와 시를 아울러 높였다. 7,8구는 예전 송나라 때 원택(圓澤) 스님이 이원(李源)과 헤어지면서 13년 뒤에 갈홍천 물가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고사를 끌어와, 뒷기약을 나눌 것 없이 지금 즉시 만나 귀한 인연을 확인하자고 재촉한 내용이다. 둘째 수도 초의와 자신 사이에 해묵은 인연이 있어 이렇게 마음을 나누게 됨을 기꺼워 한 내용이다.
박영보가 먼저 「남차」시를 건네 인사를 청하자, 초의는 즉각 「증교」시로 화답했다. 이에 박영보가 다시 「증교」시에 화답하면서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친구에게 얻어 마신 차가 계기가 되어, 시로 인사를 청하고 시와 차로 허교(許交)하는 광경이 아름답다.


「몽하편(夢霞篇)」에 얽힌 이야기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반갑게 만났다. 박영보를 만난 초의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 자신이 일지암 공사를 마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던 저녁에 꾼 이상한 꿈을 박영보에게 들려주었다. 꿈에 자하 신위가 나타나 편액을 써주고 방산관(方山冠)을 만들어 준 이야기였다. 박영보는 꿈 이야기를 듣고 다시 그를 위해 장편의 「몽하편(夢霞篇) 병서(幷序)」를 지어준다. 조금 길지만 초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인데다, 학계에 전문이 소개된 적이 없으므로 여기에 수록한다.
먼저 전후 사정을 설명한 병서(幷序)의 내용이다.

초의선사가 새로 두륜산 서편 기슭에 띠집을 지었다. 거처를 옮기던 저녁, 꿈에 어떤 사람이 외치기를 ‘자하도인께서 오셨다.’고 했다. 나아가 보니 나이가 마흔 남짓한 한 푸른 옷을 입은 수재가 보였다. 성을 물어도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더니 이름을 써서 보여주었다. 조금 있더니 냉금전(冷金箋)을 펼쳐서는 행초로 초당의 편액에 ‘소재(蕭齋)’라고 쓰는 것이었다. 또 예서로 ‘대내(對耐)’란 두 글자를 썼다. 글씨가 ‘내(耐)’의 ‘촌(寸)’자 부분에 이르니 초의에게 나머지를 채워 쓰게 하였다. 초의가 감히 할 수 없다며 사양하자, 마침내 다시 붓을 당겨 글씨 쓰기를 마쳤다. 장차 눈빛처럼 흰 종이로 방산관(方山冠)을 만들었는데, 사방에 엷은 먹으로 산수화를 그려 놓았다. 이름을 문수관(文殊冠)이라고 했다. 이것을 선사에게 주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상서로운 조짐이란 말인가? 초의가 금년에 서울로 왔다가 나와 마주해 이 같은 꿈을 꾸었노라고 말해 주었다. 해남 천리 길에 능히 자하를 불러 꿈속에 이르게 했으니, 한갓 자하의 선열(禪悅)이 환생한 바가 아닐진대, 선사 또한 이인이라 할 것이다. 위하여 장구(長句)를 지어 이를 기록해 둔다.
草衣禪師新結茅頭輪西麓. 移居之夕, 夢人呼曰: 紫霞道人來矣. 卽見一靑衫秀才, 年可四十許, 問姓笑不應. 而書名示之. 少頃, 展冷金箋, 行草作堂扁曰蕭齋, 又隸書作對耐二字. 書至耐字寸邊, 令草衣足之. 草衣辭不敢, 遂復援毫畢書. 且以雪色紙, 製方山冠, 四邊畵淡墨山水者, 名曰文殊冠, 以贈師. 是果何祥也? 草衣今年來京師, 對余誦以夢如此. 海南千里, 能致紫霞入夢, 非徒紫霞禪悅所幻, 師亦異人哉. 爲作長句紀之.

紫霞道人今太白 자하도인 누구인가 오늘날의 이태백
草衣現身胡僧國 초의 선사 호승국(胡僧國)서 현신하여 나투신 몸.
詞客再世入翰林 사객(詞客)은 거듭 나서 한림으로 들어오고
禪師一心供佛職 선사는 일심으로 부처 직분 애쓰누나.
南海之北海南南 남해의 북쪽이요 해남의 남쪽 땅에
卓錫開山靑崱屴 푸른 산 잇닿은 곳 큰 스님이 산 열었네.
茶花十里燒眼紅 동백꽃 십리 길이 눈을 붉게 태우는데
嵐氣千年染面黑 산 이내 천년 동안 얼굴 검게 물들인다.
一缾一鉢是生涯 물 한 병과 바릿대가 생애일시 분명하고
流雲流水同棲息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며 사는 것을.
廬山忽報子瞻來 여산(廬山) 땅에 홀연히 자첨(子瞻) 옴을 알리니
歡喜人天大生色 기쁘도다 인천(人天)에 생색이 크게 나네.
四十書生慘綠衣 마흔 살 서생은 초록 옷이 짙으신데
眉宇粹朗工翰墨 미우(眉宇)는 훤칠하고 한묵(翰墨)에 능하시네.
經天之下地之上 하늘 밑을 지나와 땅 위로 내리시니
依俙記得名字畵 어슴프레 이름 글자 기억하여 두었구려.
繡口吸盡西江靑 빼어난 글 서강(西江)의 푸른 물을 다 마시고
籒文沙石寒不泐 주문(籒文)은 사석(沙石)이 추위에도 끄떡없듯.
蕭寺何妨作蕭齋 맑은 절집 소재(蕭齋) 지음 거리낄 것 무엇이랴
對境能耐見定力 경계 대해 능히 참아 정력(定力)을 보이소서.
妙鬘雲落冷金箋 묘한 붓 구름인양 냉금전(冷金箋)에 떨어지자
墨海香噀花薝蔔 묵해(墨海)에선 치자꽃의 향기를 뿜는구나.
高冠方屋米家山 방산관(方山冠)의 모난 집은 미가(米家)의 산수인데
紙光玉雪明塗餙 옥설 같이 환한 종이 밝게 발라 꾸미었네.
古或得之陳季常 옛날엔 진계상(陳季常)이 혹시 이를 얻었겠고
不然定亦來西竺 아니면 틀림없이 서축(西竺)에서 온 것일세.
蝴蝶驚散雨花天 하늘에서 꽃비 오자 호접 놀라 흩어지고
神理湊合如轉轂 묘한 이치 모여듦은 마치 바퀴 굴리는 듯.
千里缾錫漢陽來 천리라 병석(缾錫)으로 한양 길을 오시니
一時杖屨龍山側 한 때의 장구(杖屨)가 용산 곁에 모였구나.
我來傍證文字緣 내가 와서 문자 인연 곁에서 증언하니
道人禪師竟相識 도인과 선사들은 마침내 서로 알라.

자하를 한번도 만난 일이 없던 초의가 일지암이 완공되어 입주하던 날 밤 꿈에 자하와 만났다. 자하는 일지암에 ‘소재(蕭齋)’란 편액을 시원스런 행초로 써주었고, 다시 예서로 ‘대내(對耐)’란 두 글자를 써주었다. 그뿐 아니라 눈빛 흰 종이로 방산관(方山冠)을 만들어 사면에 담묵산수를 그려 문수관(文殊冠)이라며 건네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초의를 문수보살의 현신이 나투신 것으로 기린 셈이다. ‘대내(對耐)’란 두 글자의 의미는 시 속에서 ‘대경능내(對境能耐)’, 즉 어떤 경계를 만나더라도 능히 참으라는 뜻으로 풀었다.
1830년 10월 10일 박영보는 흥방(興坊)의 거처에서 마포 서강 가의 강의루(江意樓)로 막 이사했던 터였다. 이사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박영보는 당시 승려가 도성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규정에 묶여 용산 어귀에 머물고 있던 초의가 가져온 남차를 얻어 마셨다. 이어 시문 창화를 인연으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초의는 1831년 8월까지 서울에서 머물렀다. 서울 체류 기간 동안 틈날 때마다 박영보의 집을 찾아 가깝게 교유를 이어갔다. 박영보의 문집 속에는 이러한 교유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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