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암 이야기
일지암(一枝菴)은 초의가 중년에 건립하여 만년까지 기거했던 공간이다. 우리 차문화사의 한 성지(聖地)다. 초의는 왜 일지암으로 들어갔고, 일지암이란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일지암은 언제 건립되었고, 공간 배치와 그곳에서의 일상은 어떠했을까? 이글에서 살펴보려는 내용이다.
‘일지(一枝)’에 담긴 뜻
초의는 당시 대둔사의 촉망 받던 학승이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일지암을 짓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을까? 거처에 내건 일지암(一枝菴)이란 편액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신헌(申櫶)의 「금당기주(琴堂記珠)」에는 여러 곳에 초의의 인적사항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 가운데 초의의 계통에 대한 언급은 이렇다.
사문 의순(意洵)은 자가 중부(中孚)다. 무안현 장씨(張氏) 집안에서 태어나 운흥사(雲興寺) 민성(珉聖)의 방에서 머리를 깎았다. 연담(蓮潭)을 사숙하여 불법을 얻었다. 다산에게 몸소 가르침을 받아 도를 전함을 들었다.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
沙門意洵, 字中孚. 托胎於務安縣張氏之家. 薙毛於雲興寺民聖之房. 私淑於蓮潭, 得佛法. 親炙於茶山, 聞傳道. 冥會於寒山拾得.
다른 내용은 그렇다 치고, 끝에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 대목이 주목된다. 한산과 습득은 당나라 때 천태산에 살았다는 전설적 은자(隱者)다. 현재 남은 한산의 시는 그가 천태산의 나무와 바위에 써놓은 것을 국청사(國淸寺)의 승려가 수습해 편집했다는 것이다. 초의가 한산과 습득의 시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금당기주」에는 이를 증명하듯, 한산시를 화두로 스승 다산과 주고 받는 4칙의 문답이 실려있다. 그중 한 칙을 함께 읽는다.
群女戱夕陽 석양 무렵 여인네들 놀이 하는데
風來滿路香 바람 불자 길에 가득 향기 이누나.
綴裙金蛺蝶 치마엔 금빛 나비 수를 놓았고
揷髻玉鴛鴦 머리엔 옥원앙 비녀 꽂았네.
角婢紅羅縝 계집종도 붉은 비단 옷을 해입고
閹奴紫錦裳 하인조차 자줏빛 비단 치말세.
爲觀失道者 도를 잃은 사람을 살펴보자니
鬢白心惶惶 터럭 희면 마음마저 허둥댄다네.
순(洵)운: “이것은 전생의 선과(善果)가 아닐런지요?”
사(師)운: “저것은 바로 미래의 악인(惡因)이니라. 덜렁쟁이 수좌(首座)야. 공과(功課)를 만들어서 밤낮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그 의미를 살펴보아라. 민첩한 강주(講主)야. 열심히 지도해서 불자(拂子)를 세워 불경을 담론하며 징험해 보아라. 편한 곳을 얻으면 편한 데서 멀어지고, 인연을 잃고 나야 인연이 모이느니.”
순(洵)운: “세간에서 어떻게든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까?”
사(師)운: “횃불 들어 허공을 태우고, 물을 움켜 달을 붙들어라.”
(洵云: “這箇是前生善果否?” 師云: “那箇是未來惡因. 邋遢首座, 要做功課. 晝夜擊鐸數珠, 細察其情飯也. 敏捷講主, 要行指導, 夏臘竪拂譚經, 密驗其飯也. 得便宜處落便宜, 失機緣處湊機緣.” 淳云: “世間只有恁麽持守否?” 師云: “擧火焚空, 撈水捉月.”
초의는 왕공귀족 여인들의 호사스런 생활을 묘사한 뒤, 비록 이렇게 화려한 삶을 살아도 마음에 도를 잃고 나면, 젊음이 스러짐과 동시에 마음도 빈쭉정이가 되어 허둥대는 법이라고 한 한산시를 인용했다. 이어 그들이 금생에 이토록 복을 누리는 것은 전생의 선과(善果)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승은 미래의 악인(惡因)일 뿐이라고 대뜸 무찔러 왔다. 그리고는 이 말의 의미를 참구(參究)해 보라고 했다. 다시 가르침을 청하자, 횃불로 허공을 태우고 물을 움켜 달을 잡으라는 비유로 허상의 집착을 버리라고 주문했다. 일종의 선문답이다.
이와 비슷한 3칙의 문답이 더 있다. 이런 문답을 다산과의 사이에 주고 받은 것은 몹시 흥미롭다. 다산은 초의에게 시 공부의 일환으로 한산 습득의 시를 읽게 하면서, 선문답을 주고 받았다. 앞서 초의가 한산과 습득의 시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 말은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일지암의 ‘일지(一枝)’는 한산시에서 따온 말이다.
琴書須自隨 모름지기 금서(琴書)가 홀로 따르니
祿位用何爲 작록이나 벼슬이야 어디다 쓰리.
投輦從賢婦 벼슬 던져 어진 아내 말을 따랐고
巾車有孝兒 가마를 멘 효성스런 자식도 있네.
風吹曝麥地 보리 쬐어 말리는 땅 바람이 불고
水溢沃魚池 물이 넘쳐 고기 못에 넘실대누나.
常念鷦鷯鳥 언제나 저 뱁새를 생각하노니
安身在一枝 한 가지만 있어도 몸 편하다네.
뱁새는 제 몸을 깃들이는데 일지(一枝) 즉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다. 예전 초나라 왕이 자종(子終)을 정승으로 발탁하려 했다. 거문고와 책을 벗 삼아 신이나 삼으며 편안히 사는 것이 낫지 왜 초나라의 근심을 다 지려 하느냐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자종은 아내와 함께 달아나 숨었다.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여산(廬山)으로 갈 때 아들 둘이 아버지의 가마를 매고 앞장을 섰다. 모두 안분낙도(安分樂道)로 욕심 부리지 않고 한 세상을 건너갔던 이들이다. 가난한 살림에 보리를 널면 바람은 불어와 이를 말린다. 연못에 물이 말라 근심하자 큰 비가 내려 못물이 가득 넘친다. 인간과 자연의 삶이 조화롭지 아니한가. 그러니 나도 이를 본받아 나무 한 가지로 부족함이 없는 뱁새의 ‘안신(安身)’을 누리겠노라고 했다.
초의의 일지암은 바로 이 8구의 ‘일지(一枝)’에서 따온 말이다. 『장자(莊子)』 「소요유」에도 “뱁새는 깊은 숲에 둥지를 틀지만 한 가지를 차지하는 데 불과하다. 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고 했다. 일지암은 곧 초의의 소박하고 욕심 없는 삶의 자세를 상징하는 이름인 셈이다.
한편 『금당기주』의 기록에는 초의의 입산 경위를 이렇게 증언한다.
국조 중엽 이래로 교강(敎講)이 성해지고 선강(禪講)이 시들해졌다. 똑똑한 자는 오로지 교학(敎學)에만 힘을 쏟아, 글 뜻이나 지리하게 풀이하고 훈고나 하려 들며, 학구(學究)가 되어 경전으로 살아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멍청하고 답답한 무리들이 만년에는 모두 수좌로 일컬어진다. 의순은 이를 병통으로 여겨, 배움이 이루어지자 이를 버리며 말했다. “무당 할멈이 우리 부모를 그르쳐서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으니, 이미 한 차례 죽은 셈이다. 또 누가 능히 목을 꺾고 고개 숙여 책 속으로 나아가 좀벌레로 죽고 반딧불로 마르게 하겠는가?” 이에 책 상자를 뒤져 여러 소(疏)를 초한 것과, 풀이를 베껴 쓴 것을 죄다 불살라 버렸다. 다만 『선문염송집』과 『전등록』 2부와 한산과 습득의 시 각 1권, 고려 진정국사 천책의 시 등 모두 몇 권만을 취하여 동학들과 더불어 작별하고, 해남현 두륜산 속으로 가서, 넝쿨과 바위가 쌓인 가운데 집 한 채를 얽고서 일지암이란 편액을 달았다.
自國朝中葉以來, 敎講盛而禪講度. 俊慧者專治經敎, 支離文義, 徼繞訓詁, 作學究, 經生模樣. 推鹵捆屨之輩, 晩年皆稱首座. 洵病之, 學旣成, 棄之曰: “巫婆兒誤我爺娘, 薙髮毛爲僧, 旣一死矣. 又誰能摧眉屈首, 就書卷裏, 蠹死螢乾?” 搜其笈, 凡疏鈔箋釋之抄取者, 悉焚之. 唯取拈頌․傳燈錄二部․寒山拾得詩各一卷․高麗眞靜國師天頙詩共幾卷, 與同學人作別, 赴海南縣頭輪山中, 於藤蘿磧石中, 縛一廬, 扁之曰一枝庵.
초의의 출가가 무당의 요설에 부모가 미혹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말한 점이 흥미롭다. 또 일지암으로의 입암(入菴) 동기를 교종이 성하고 선종이 쇠미해진 교단의 상황과, 가짜 돌중들이 엉터리 공부로 저마다 수좌를 일컫는 풍조를 혐오해서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도 초의가 특별히 선택한 몇 종의 책 가운데 한산과 습득의 시집이 포함된 것을 본다.
일지암 건립 경과
일지암은 언제 처음 지었을까? 『초의시집』 중 일지암이 처음 나오는 것은 1830년에 지은 「중성일지암(重成一枝菴)」이란 작품에서다.
烟霞難沒舊因緣 안개 노을 묵은 인연 숨기기가 어려워서
甁鉢居然屋數椽 탁발승이 어느새 몇 칸 집을 지었구나.
鑿沼明涵空界月 못을 파서 허공 달빛 해맑게 깃들이고
連竿遙取白雲泉 대통 이어 구름 샘을 저 멀리서 끌어왔네.
新添香譜搜靈藥 『향보(香譜)』를 새로 뒤져 영약을 찾아보고
時接圓機展妙蓮 깨달음 얻게 되면 묘련(妙蓮)을 펼치노라.
礙眼花枝剗却了 시야 막는 꽃가지를 잘라내어 없애니
好山仍在夕陽天 석양 하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
제목에서 ‘중성(重成)’이라 한 것은 전에 지은 것을 다시 고쳐지었다는 의미다. 다만 1구에서 안개 노을이 제 아무리 숨기고 감추어도 해묵은 인연을 다 파묻을 수는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일지암이 예전 허물어진 암자터를 닦아 다시 세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연못을 파고, 대통을 이어 먼 데 샘물을 끌어온 것은 다산초당의 그것과 같다. 『향보(香譜)』를 살펴 주변의 약초를 캐고, 깨달음이 오면 설법으로 이를 펼친다. 시야를 가리는 꽃가지를 쳐내자, 좀 전까지 보이지 않던 앞산 묏부리가 석양빛을 받아 환하게 다가선다.
이 작품 이전에 지은 시에서도 초의는 자신의 거처에 대해 노래한 바 있다. 한 해 전인 1829년에 지은 「도암십영(道菴十詠)」은 도암(道菴)을 새로 짓고 주변의 풍광을 10경으로 정리한 것이다. 첫째 수, 「도암신성(道菴新成)」을 먼저 읽는다.
靈境幽閒淨侶空 영경(靈境)은 한갓지고 스님네도 다 떠난 채
幾年冷鎖翠烟重 푸른 안개 짙은 속에 몇 년이나 잠겼던고.
白雲更得靑山主 흰 구름이 다시금 청산 주인 얻고 보니
物色懷新逞舊容 물색도 새로워라 옛 모습 드러내네.
이로 보면 예전 버려진 암자터에 1829년에 먼저 도암(道菴)을 세워 거처를 마련했다가, 이듬해 1830년에 다시 좀더 규모를 갖춰 지어 일지암이란 현판을 달고 준공을 보게 된 전후 사정이 드러난다. 앞서 ‘중성(重成)’이라 한 것도, 전 해에 ‘신성(新成)’한 도암을 염두에 둔 말이다. 나머지 9수에는 일지암 주변의 풍경과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관을 노래했다. 제목만 열거하면 장봉명월(藏峯明月)․북산석정(北山石鼎)․용암세우(龍巖細雨)․응산초가(鷹山樵歌)․성암모종(星菴暮鍾)․마산석봉(摩山夕烽)․나산춘설(拏山春雪)․양포귀범(梁浦歸帆)․완산송취(莞山松翠) 등이다. 장봉과 북산, 용암과 응산, 그리고 성암 등은 모두 그곳에서 보이는 대둔산의 봉우리와 암자 이름이다. 멀리 달마산의 저녁 봉화나 드물게나마 맑은 날에는 봄눈 쌓인 한라산도 보인다고 했다. 또 아래쪽으로는 바닷가를 오가는 돛단배도 눈에 들어온다.
1833년에 초의는 일지암 주변에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종죽(種竹)」은 이때 지은 5언 122구 610자에 달하는 긴 시다. 다 인용할 수는 없고, 띄엄띄엄 건너뛰며 읽어본다.
憶昔結茅處 그 옛날 띠집 얽어 머물던 곳은
金剛最幽境 금강곡(金剛谷)의 가장 깊은 골짝이었지.
巖障嵩俊秀 병풍 바위 우뚝이 솟구쳐 있고
水鏡澄虛冷 물 거울은 해맑고 차가왔다네.
森森羅佳木 빽빽이 좋은 나무 무성했지만
未與此君倂 대나무는 이곳에 있지 않았지.
移栽赤蓮傍 적련암(赤蓮菴) 곁에서 옮겨 심으니
困觸非俄頃 한동안 몸살하며 시들했었네.
雅感主人眷 주인의 아낌을 느껴서인지
不辭踰重嶺 산마루 몇 개 넘음 마다 않았지.
첫 대목이다. 초의는 자신이 일지암을 짓기 훨씬 전에 금강곡(金剛谷)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고 말했다. 당시 주변은 병풍 바위가 우뚝 솟고, 맑고 찬 물이 흘렀으며, 온갖 나무가 무성했다. 다만 대나무만 없는 것이 서운해서 적련암(赤蓮菴) 곁에 있던 대나무를 옮겨 싶었다. 대나무는 손을 잘 타 아무 때나 옮겨 심으면 죽는다. 그래서 처음엔 시들하던 것이 정성을 쏟자 점차 무성해졌다고 했다.
초의가 일지암을 짓기 전에 거처했다는 금강곡의 초암(艸菴)은 1823년에 지은 여러 시에 분명하게 나온다. 「금강골 바위 위에서 언선자와 함께 왕유의 종남별업 시에 화운하다(金剛石上與彦禪子和王右丞終南別業之作)」는 금강골에서 철경 스님와 함께 왕유(王維)의 「종남별업(終南別業)」시에 차운하여, 이곳에 길이 머물고 싶은 바람을 노래한 내용이다. 이후 초의는 그 결심을 당장 실천에 옮겼다. 잇따라 실려 있는 「우념왕람전운(又拈王藍田韻)」의 첫 부분에는 “스스로 맑은 골짝 은자가 되어, 아득히 세상과 소원해졌네. 송라(松蘿) 묶어 성근 울을 세워 만들고, 바위에 기대어 띠집 얽었지. 自成淸谿隱, 邈與世相疎. 緣蘿制疎㰚, 依巖結茅廬”라 하여 금강곡 바위 절벽 밑에 띠집을 얽어 거처를 옮긴 일을 적고 있다. 역시 1823년에 지은 「도촌견과초암(道邨見過艸菴)」은 도촌 김인항(金仁恒)이 지나는 길에 초암에 들렀을 때 쓴 시이다. 도촌이 초의의 초암(艸菴)이 조용하다는 말을 듣고 구름을 헤쳐 송헌(松軒)을 찾아왔으므로, 샘물을 떠서 뇌소차(雷笑茶)를 함께 마시고, 향을 사르며 도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다시 「종죽(種竹)」시를 계속 읽어 보자.
我時適遠遊 이때 마침 먼 길을 떠나게 되니
林室被灾眚 숲속 집은 불이 나서 타버렸다네.
灰場誰復掃 잿더미를 뉘 다시 쓸었으리오
遙遙滯雲頂 아득히 구름 속에 잠겨 있었지.
十年歸不得 십년을 돌아옴 얻지 못하여
悵別此君永 구슬피 대나무와 영이별 했네.
昨來營芋社 작년에 와 우사(芋社)를 경영하는데
金剛拒不夐 금강곡과 거리가 멀지 않길래,
徑往看此君 서둘러 가 대나무를 살펴봤더니
古路艸暝暝 옛길엔 풀덤물만 무성하였네.
위 인용 부분에서 작년에 와서 ‘우사(芋社)’를 경영했다는 말이 보인다. 1830년 일지암을 완공한 후, 초의는 바로 스승인 완호(玩虎) 대사의 삼여탑(三如塔)에 새겨 넣을 게(偈)와 서(序)를 받으러 서울 걸음을 했고, 여기서 해를 넘기며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1831년 가을에야 돌아와 다시 ‘우사(芋社)’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우사는 일지암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가 초의를 위해 지어준 「원몽(圓夢)」 4수의 병서(幷序)에는 “해남현 대둔사 승려 초의는 이름이 의순인데 시승(詩僧)이다. 새로 두륜산 서쪽 기슭에 띠집을 얽었는데, 이름하여 ‘구련사(九蓮社)’라 하였다. 海南縣大屯寺僧草衣, 名意洵, 詩僧也. 新結茅頭輪山西麓, 號曰九蓮寺.”고 적혀 있다.
일지암의 다른 명칭에 ‘우사(芋社)’, ‘구련사(九蓮社)’ 등이 있었음을 알겠다. 일지암은 초의 자신의 거처를 지칭함이요, 우사와 구련사는 이곳에서 이루어진 강학의 결사(結社)를 가리켜 쓴 표현으로 구분하면 된다. 모두 고려 말의 백련결사(白蓮結社)의 정신을 계승코자 하는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또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자우산인(紫芋山人)이란 칭호를 쓴 것이 있다. ‘우사(芋社)’란 명칭과 무관치 않다. 현재 일지암에는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밖에도 일지암은 일지선방(一枝禪房) 또는 죽향실(竹香室) 등 다양한 별칭으로도 불렸다.
다시 시로 돌아가면, 초의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잿더미로 변한 금강곡의 초암(艸菴)을 오래 잊지 못했다. 1833년 다시 돌아와 일지암의 주변 조경에 힘 쏟는 과정에서 일지암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초암터를 다시 찾는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가시덤불과 칡넝쿨이 길을 막고 있는 버려진 곳이었다. 이에 그는 음력 5월 13일, 대나무를 심으면 잘 산다는 죽취일(竹醉日)을 맞아 초암 터의 대나무를 일지암으로 옮겨 심었다. 초의는 대나무를 옮겨 심은 후 휑했던 초당 주변의 확 달라진 풍광을 이렇게 계속 읊었다.
艸堂頓改觀 초당이 갑작스레 확 달라지자
物意俱欣慶 사물도 온통 모두 기뻐하는 듯.
蔭盖漣漪凉 그늘 아래 잔 물결 시원도 하고
韻參松檜淸 푸른 솔은 운치가 새틋도 해라.
魚遊得暗湛 노는 고기 가만히 즐거움 얻고
鳥語添幽靜 새 소리는 그윽함을 더해주누나.
光含夕露明 햇살은 저녁 이슬 맑음 머금고
翠交朝烟淨 푸른 산엔 아침 안개 깨끗하구나.
欣情無俗韻 기쁜 정 속된 운치 하나 없으니
悅目非艶靚 곱게 꾸며 눈 즐거운 것이 아닐세.
대나무를 옮겨 심고 가뜬해 하는 초의의 충만한 기쁨이 문면 가득 넘쳐난다. 이하 시의 긴 내용은 이곳에서의 단촐하고 뜻있는 삶을 다짐하는 각오를 담았다.
일지암의 공간 배치
일지암의 주변 공간과 내부 공간은 어떻게 배치되었을까? 관련 기록에 바탕하여 재구성해 본다.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3)는 1835년에 초의와 첫 대면한다. 먼저 볼 소치의 글은 당시 일지암의 주변 풍경과 공간 배치를 이해하는 데 소중한 기록이다.
을미년(1835)에 대둔사 한산전(寒山殿)으로 들어가 초의를 방문했다. 스님은 정성스레 나를 대접하고 인하여 침상을 내주며 머물러 묵게 하였다. 몇 해를 왕래하매 기미(氣味)가 서로 같아, 늙도록 변하지 않았다.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였다. 소나무가 빽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몇 칸 초가집을 얽어두었다. 버들은 드리워 처마에 하늘대고 가녀린 꽃들이 섬돌에 가득하여 서로 어우러져 가려 비추었다. 뜰 가운데 아래 위로 못을 파고,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절구통을 놓아두었다. 스스로 지은 시에, “못을 파서 허공 달빛 해맑게 깃들이고, 대통 이어 구름 샘을 저 멀리서 끌어왔네. 鑿沼明涵空界月, 連竿遙取濕雲泉”라 하였고, 또 “시야 막는 꽃가지를 잘라내어 없애니, 석양 하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 礙眼花枝剗却了, 好山仍在夕陽天”라 하였다. 이같은 구절이 몹시 많았는데, 청고(淸高)하고 담박해서 불 때서 밥 지어 먹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매양 눈 온 새벽이나 달 뜬 저녁이면 가만히 읊조려 흥취를 가라앉혔다. 향을 막 피우면 차는 반쯤 마셨는데[香初茶半], 소요함이 취미에 꼭 맞았다. 적막한 난간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마주 하고, 깊숙한 굽은 길은 손님이 올까 염려하여 감춰두었다. 방 가득한 책시렁에 놓은 푸른 책들은 모두 불경(佛經)이었다. 상자에 가득한 두루마리는 법서(法書)와 명화 아닌 것이 없었다. 내가 그림과 글씨를 공부하고 시를 읊고 경전을 읽은 것이 장소를 얻은 셈이었다. 하물며 날마다의 대화는 모두 속세를 떠난 높은 뜻이어서 내가 비록 속된 사람이라 해도 어찌 그 빛에 감화되어 함께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乙未年入大屯寺之寒山殿, 訪草衣. 欵曲仍借榻留寓. 往來數載, 氣味相同, 至老不改. 其住處則乃頭輪絶頂之下也. 松深竹茂處, 縛箇數楹草室. 垂柳拂簷, 玆花滿砌, 掩映交錯. 庭中鑿上下池, 榮下設大小槽. 自詩云: ‘鑿沼明涵空界月, 連竿遙取濕雲泉.’ 又曰: ‘碍眼花枝剗却了, 好山多在夕陽天.’ 此等句語甚多. 而淸高澹雅, 非烟火口氣也. 每雪晨月夕, 沈吟耐興, 香初茶半, 逍遙適趣. 寂寂小欄, 聽啼鳥而相對, 深深曲徑, 怕客來而潛韜. 連架綠袠, 盡是蓮花貝葉. 滿箱玉軸, 罔非法書名畵. 我乃工畵學筆, 吟詩解經, 得其所哉. 況日日對話, 都是物外高情, 我雖凡胎濁骨, 安得不和其光, 而同其塵乎.
처음 그는 대둔사의 한산전(寒山殿)으로 초의를 찾아간다. 앞서 초의가 한산과 습득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는데, 초의는 큰 절에 내려 와 있을 때도 한산전에서 머물렀다. 한산전은 『대둔사지』에도 이름이 보인다. 이것으로도 초의와 한산과의 각별한 관련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초의의 기거처는 일지암이었다. 위치는 두륜산 꼭대기 바로 밑이었다. 주변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했다. 몇 칸 초가집 옆에 버드나무가 넘실대고, 섬돌 곁에는 온갖 꽃들을 심었다. 마당에는 아래위로 못을 팠다. 못물은 조금 떨어져 있는 샘에서 대통을 이어 끌어왔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절구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것이 일지암의 주변 풍경이다. 방안으로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메운 서가(書架)가 눈에 들어온다. 가득 쌓인 책들은 모두 불경뿐이었다. 상자는 법서와 명화로 가득 찼다. 이것은 일지암의 내부 풍경이다.
눈 내린 새벽, 달 뜬 저녁이면 시를 읊조리며 가눌 길 없는 흥취를 가만히 가라앉힌다. 향에 불을 붙이면 어느새 차는 반쯤 마셨다. 난간에 기대자 새가 운다. 큰절로 내려가는 굽은 길은 속객이 찾아들까 염려하여 길이 없는 것처럼 일부러 가려 숨겼다. 이것은 일지암 주인의 일상 모습이다.
일지암의 풍광을 묘사한 글에 진도 사람 속우당(俗愚堂)이란 이가 쓴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菴序)」가 또 있다. 초의와 동갑이었던 그는 초의가 54세 나던 1839년에 일지암을 찾았다. 그의 글 중에 일지암의 주변 풍광에 대한 묘사 부분만 살펴보자.
탁상 위에는 금합 속에 금부처 한 분이 있다. 아침 저녁으로 여기에 공양하고, 새벽과 저물녁에 예불한다. 부지런하고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다. 이곳을 생각하고 이곳에 머물면서 물가 나무의 우거진 것과 대숲의 무성한 것에서 이를 본다. 과원(果園)은 암자 뒤에 조성하고, 채마밭은 앞에 만들었다. 맑은 물 한 줄기가 가까운 곳에서 솟아나 채마밭 앞으로 남실남실 흘러나온다. 채마밭 곁에 연못 하나를 파서 물길을 이끌어 아래로 흐르게 하니, 차고도 맑은 품이 금곡만 못지않다. 또 못 위에는 나무 시렁을 설치해서 몇 그루 포도 넝쿨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양옆 흙 계단에는 기화이초를 심었다. 옷깃이 봄빛을 희롱하노라면 마치 티끌 세상 사람들을 비웃는 것 같다. 초암 뒤편에는 바위로 된 미륵봉이 있고, 초암 앞에는 연못의 맑은 물결이 있다. 높은 데 올라가 바라보고, 물가에 임해서 더러운 것을 씻으며 요산요수한다. 오늘날의 의순은 그 옛날 사마천과 소동파의 맑은 운치를 아울렀다고 말할만 하다. 서암(西菴)에 우레가 걷히거나, 동산에 해가 떠올라 더운 기운이 사람에게 끼쳐오면, 가사를 벗고 불경을 덮는다. 정정한 늙은 스님은 왼손으로 노란 부채를 부치며, 오른 손에는 푸른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고서 양편 가장자리 사이를 소요한다. 인간 세상에서 뜻을 기름이 비록 선경이라 해도 이 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다.
卓床上有金盒裡金佛一座, 朝夕供斯, 晨暮鼓鐸, 靡不勤摯. 念玆在玆, 觀諸泉樹之蓊護, 竹林之榛榛. 果園樹後, 場圃築前. 淸水一源從不間, 而溶溶流出于場圃之前. 而場邊鑿得一池塘, 灌漑流下, 冽冽淸釀, 不羨金谷. 且於池上, 設置木架, 數莖葡萄, 蔓薉其上. 左右土階, 種得奇花異草. 衿弄春色, 若笑塵人. 而菴後有彌勒石峰, 菴前有池塘淸流. 登高而望, 臨水而滌, 樂山樂水. 今之意恂, 可謂兼之於古之長卿子瞻之淸趣矣. 其若西菴電捲, 東山日出, 暑氣熏人, 則解袈裟掩經卷. 亭亭老釋, 左手賴撓黃箑扇, 右手住執碧桐杖, 逍遙於兩眉之間, 人世養志, 雖仙境無以過此.
소치 보다 4년 뒤에 쓴 글이다. 초의는 탁상 위에 금부처를 모셔두고 조석으로 예불을 올렸다. 암자 뒤편에는 과원을 조성하고, 앞쪽에는 채마밭을 일구었다. 샘물이 채마밭을 적시며 흘러나오고, 못을 파서 그 물이 고이게 했다. 못 위에 시렁을 설치해서 포도 넝쿨이 못 위를 덮고 있었고, 양옆의 화계(花階)에 온갖 기화이초를 옮겨 심었다. 암자의 위치는 북암과 남암의 사이라고 적었고, 암자 뒤에 미륵석봉(彌勒石峰)이 있었다. 초의는 개인 날이나 해 뜰 무렵, 혹은 무더운 여름이면 입고 있던 가사를 벗고 불경을 덮어 둔 채 한 손에는 부채 들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서 골짜기를 소요하였다.
한갓지고 고즈녁한 일지암의 주변 풍경과 초의의 일상이 그릴 듯이 묘사된 글이다. 초의는 화계(花階)를 조성하고 포도넝쿨을 올리며, 과원과 채마밭을 차례로 조성하면서 예전 다산이 거처하던 초당의 분위기를 하나씩 되살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남는 이야기
초의는 이후 만년까지 일지암에서 지냈다. 신헌(申櫶)이 「초의대종사탑비명(艸衣大宗師塔碑銘)」에서 “일지암 가운데서 세상을 떴다.[示化於一枝菴中]”라고 한 이래, 대부분의 초의 관련 책자는 초의가 일지암에서 세상을 뜬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초의의 법제자였던 범해(梵海) 각안(覺岸, 1820-1896)은 자신이 저술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의 「초의선백전(草衣禪伯傳)」에서 다소 엇갈린 진술을 했다.
동치(同治) 4년 을축(1865) 7월 초2일에 쾌년각에서 입적하였다. (중략) 처음에 몸을 은거할 둥지로 얽은 것은 일지암이었고, 나중에 겨우 몸 하나 들일만한 굴을 얽은 것은 용마암(龍馬庵)이며, 다시 몸을 마칠 움막으로 세운 것이 쾌년각(快年閣)이었다.
同治四年乙丑七月初二日, 示寂于快年閣. 始搆隱身之巢, 一枝庵也; 後結容膝之窟, 龍馬庵也; 復立終身之幕, 快年閣也.
이 글에 따르면, 초의는 일지암에서 오래 지내다가 나중에는 다시 규모를 줄여 용마암이란 토굴을 지었고, 마지막 세상을 뜬 곳은 쾌년각(快年閣)에서였던 것이 분명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당대 쟁쟁한 제가들의 기림을 한 몸에 받았던 대선승이 명성의 절정에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암자에서 토굴로, 토굴에서 움막으로 규모를 줄이는 철저한 무소유의 수행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선(禪)의 정신이요, 초의의 진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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