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15

醉月 2009. 8. 1. 15:11

尹東柱「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1939년 9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노래한 작푸믄 옛날부터 있어 왔다. 냇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서 열렬히 사랑을 했다는 나르시스(수선화)의 희랍 신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향가에도 구리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죽은 자기 짝인줄로만 알고 부리로 쪼며 그리워하다가 죽었다는  앵무가 가 있었다고 전한다.


  윤동주의  자화상  역시 그와같은 경상(鏡像) 모티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나르시스 신화나  앵무가 의 경우처럼 완전히 남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 

자화상 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으면서도 우물속에 비친 그의 모습을  나 가 아니라  한사나이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映像을 하나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 같다.

윤동주는 마치 그  사나이 가 우물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자화상 은 나르시스의 얼굴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바슐라르 는  물과 몽상 에서 나르시스의 신화를 낳은 그 물의 물질적 이미지를  밝은 물, 봄의 물과 흐르는물,

나르시시즘의 객관적 조건, 사랑하는 물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거울 속에 익사한 사람까지 많았다 라는  세르나 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람의 얼굴을 반영하는 물과 거울을 같은 이미지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자화상 의 물질적 이미지는  바슐라르 가 제시한 그것들과는 정반대이다. 

밝은 물 은  어두운 물 로, 그리고  흐르는 물 이라고 한 것은  고여 있는 물 로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객관적 조건 은 오히려  주관적 행동 으로 현시되고,  사랑의 물 은  미움의 물 로 설정된다.
  그러한 차이는 윤동주의  자화상 이 나르시스와 같은  시냇물 이 아니라 (혹은 거울이 아니라)  우물물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꾸면 윤동주의  자화상  읽기에서 가장 중심적인 코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우물 이라는 이야기다.
소설 같으면 발단부라고 할 수 있는  자화상 의 첫행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로 시작된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우물물의 물질적 이미지는 얼음이 막 풀린 봄의 냇물가에 피어나는 수선화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우물물 속에 갇힌 영상은 오히려 짝잃은 앵무새의 새장 속에 넣어준 구리거울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의 우물물은 임의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거울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윤동주가 설정한 우물물은 보통 우물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정된 장소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물은 들판과 산의 境界領域인  산모퉁이 를  돌아서  가야만 하는 곳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상적 삶의 장소인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우물이 아니라 논가  외딴  곳의 孤立領域에 있는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 찾아가서   들여다  보려는 의지와 행동이 없으면 그 우물도, 우물 속의  나 의 모습과도 만나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물물은 흐르는 시냇물과는 대조적이다. 그것은 한곳에 고여 있으며, 무거움과 어두움을 간직한 물이다.

단절과 비연속적인 이 물을 더욱 차별화하고 강화하고 있는 것이 산모퉁이라는 境界領域이며,

논가의 외딴 곳이라는 孤立領域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우물은 경계와 소외(고립)의 공간만이 아니라 地下에 있으면서도 天上界에 속해 있는  역설의 물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거울은 좌우가 뒤바뀐 鏡像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비해서 우물은 상하가 뒤바뀐 假想空間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화상 의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 이 있다.

 

달,구름, 바람 그리고 가을은 모두 하늘에 속해 있는 것으로 垂直 上方向에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우물은 垂直下方向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깊은 바닥에 비쳐있는 영상은 垂直 上方向에 있는 하늘인 것이다.
  높은 것일수록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우물물은 동시에 밝은 것을 어둠에 의해서 보여주는 의미론적 역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물속에 비친 하늘은 밤하늘이며, 그 계절 역시 가을로 되어있다.

태양이 있는 대낮의 봄하늘과는 상반된다. 시냇물은 공자도 탄식했던 것처럼 주야로 쉬지 않고 흘러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유동적인 물을 한 곳에 가두어 고이도록 한 것이 우물물이다. 그것처럼 윤동주의 우물속에 비치는 달, 구름, 바람 역시도 그 의미의 공통적인 요소는 다같이 물처럼 흐르는 것이지만 한 공간의 프레임 안에 유폐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 우물속에 비쳐 있는  사나이 로서 발견되는  나 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그 우물물의 물질적 이미지를 통해서 쉽게 그 코드를 해독할 수 있게 된다. 우물처럼 심층적 의식속에 가라앉아 있는 나, 그리고 시간이 정지된 원초적인 어둠의 공간인 하늘을 바닥으로 디디고 있는 나… 그것은 모태 속에 있는 나, 어둡고 무거운 생명의 양수 속에 빠져 있던 나의 映像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경계적-고립적-심층적 공간인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한 사나이 … 모태의 우물물인 그 양수 속에서 살고 있는 原人間으로서의 그  나 는 누구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나 인가. 우리가 흔히  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 는  라캉 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象徵界에 속해 있는  나 인 것이다. 상징계 속의  나 란 바로 언어로 인식되는  나 ,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제도나 법규-규범, 그리고 외부에
서 작용하는 온갖 記號作用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 인 것이다.

 

  그러한  나 는  어머니의 몸 의 일부로서 모태 속에 있었던 現實界의  나 와는 아주 딴판의  나 인 것이다.

그러나 상징계 속에 있는 우리는 언어 이전의 그 현실계 속의  나 와는 만날 수가 없다. 이 현실계와 상징계 사이에 존재하는 

나 가 바로 우물 속의 사나이로 드러나고 있는 鏡像 속의  나 인 것이다.

 

   라캉 의 이론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 시의 텍스트 속의 두  나 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면 그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나 는 우물을 찾아가 의식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 행위는 바로 모태 속의  나 와 만나서 그것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행위와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나 는 우물속을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떠나버린다. 왜냐하면 反나르시스 행위로서  나 는  그 사나이 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볼 때에는 미움이 憐憫(가엾음)으로 바뀌고, 다시 떠나면 그리움으로 변한다.

이러한 미움과 사랑의 앰비밸런스(兩價性)로서의  나 (자신의 원모습)는 결국 추억의  나 , 부재하는  나 로서 정착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닌  그림자 로서의  나 인 것이다.

 

일상적인  나와 원초적인  나 와의 끝없는 갈등, 그러면서도 그것과 결합하려는 나르시스와 反나르시스의 드라마가
윤동주의 시를 탄생시키는 자화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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