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풍류의 향기_송강 정철

醉月 2009. 8. 3. 04:18
송강 정철, 두주불사 가사문학의 거봉… 선조도 "하루 한 잔만" 절주령
풍류의 향기 당쟁 회오리에 휩쓸려 부침 거듭, 국문학사에 불멸의 업적 남겨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어지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 사람이 울며 가나

 

평생 술을 좋아했던 풍류가객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권주가 ‘장진주사(將進酒辭)’의 한 구절이다.

조선 선조 때의 사람인 송강은 당쟁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부침을 거듭한 정치적 풍운아였다. 타협을 모르고 융통성 없는 격렬한 성품은 서인의 영수로서 영욕으로 얼룩진 무상한 정치가의 길을 걷게 했지만, 그는 남달리 따스한 눈빛으로 자연과 인간사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때로는 꽃과 나무를 가꾸고, 때로는 낚싯대와 가야금을 벗 삼고, 또 그보다는 술을 더욱 즐겼던 정 송강,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준수한 자태에 도도한 언변으로 한 시대를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간 송강이야말로 우리나라 풍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인이었다.

송강은 구슬같이 영롱하고 별빛처럼 아름다운 수많은 시가를 남김으로써 국문학사에 불멸의 업적을 세운 위대한 문인이었다. 송강가사(松江歌辭)가 없는 국문학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의 문학작품이 빼어나고 값진 까닭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갈고 다듬어 더욱 빛낸 데에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가사문학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순탄치 못한 벼슬살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관동별곡’,‘사미인곡’,‘성산별곡’으로 대표되는 그의 걸작 대부분이 좌천과 유배와 은둔시절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정철은 중종 31년(1536) 음력 12월 6일에 현재 서울 자하문 밖인 장의동에서 영일 정씨(迎日鄭氏) 유침(惟沈)과 죽산 안씨(竹山安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함(季涵). 태어날 때 부친은 영돈령판관이었고, 위로 자(滋), 소(沼), 황(滉) 세 형과 두 누이가 있었다.

큰누이는 인종의 후궁인 숙의였고, 작은누이는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다. 따라서 송강은 철부지 소년시절엔 누나를 만나러 대궐에 들어가서 자주 놀았다. 대궐에 들어가면 세자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慶原大君)의 소꿉친구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

그렇게 철없이 즐겁기만 하던 어린 시절은 어느새 지나가버렸다.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일어난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정철의 매형 계림군이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계림군은 함경도 안변으로 도망쳐 숨었다.

그때 송강의 부친은 사온령, 맏형은 이조정랑이었는데 죄인의 장인과 처남이라고 해서 잡혀 들어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계림군이 도망쳐 숨은 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한 달이 넘게 부자가 함께 고문을 당하는데 계림군이 붙잡혀왔다. 고문 끝에 계림군은 없는 죄를 자백하고 능지처참 당했다. 그리고 정철의 부친은 함경도로, 형은 전라도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 가을 양재동에 문정왕후와 소윤을 욕하는 괘서, 요즘으로 치면 대자보가 나붙어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몰아쳤다. 정철의 부친은 이번엔 경상도 영일로, 광양에서 귀양 살던 형은 함경도 경원으로 끌려갔다.

정철은 다정다감하고 감수성 예민하던 어린 시절을 그렇게 귀양살이하는 부친을 따라 함경도로 경상도로 오르내려야 했다. 그의 타협을 모르는 가열한 성품은 아마도 이때 형성된 듯하다. 부친이 풀려난 것은 명종 6년(1551). 정철이 16세 때였다.

그러나 형은 이미 유배지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벼슬길도 서울 생활에도 모두 환멸을 느낀 부친은 남은 가족을 이끌고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내려갔다.

 

담양서 10년간 학문연마, 풍류즐겨

 ▲ 충주 진천 송상사 경내의 송강시비. '사미인곡' 일부를 새겼다.

이곳에서 정철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의 눈에 들어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뒷날 그의 외손자사위가 되었다. 김윤제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종조부로서 그곳에 환벽당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정철은 김윤제의 조카뻘이며 자신에게는 처외재당숙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과 함께 김윤제에게 글을 배우다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을 스승으로 모셨고, 이어서 고봉의 스승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한테서도 학문을 익히고 시를 배웠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대학자요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며 인품이 고매한 풍류고사였다. 정철은 기대승이 불과 9년 연상이지만 깍듯이 스승으로 존경하며 섬겼고, 기대승도 정철의 비범한 자질과 성품을 아껴주었다.

어느 날 기대승이 제자들과 더불어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갔는데 누군가가 물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인품이 이 경치에 비길 만한 훌륭한 이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기대승이 이내 이렇게 대답했다. “정철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정철이 성산(별뫼) 앞을 흐르는 맑은 시내 이름을 따서 송강이란 호를 지은 것이 그 무렵이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등과 교분을 맺은 것도 그 때였다.

16세부터 26세에 과거를 보기까지 10년간 정철은 이렇게 경치 좋은 산수 간에서 학문을 닦고 시문을 공부하며 꿈 많은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절이 정철의 파란만장한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명종 16년(1561)에 진사시에 합격한 정철은 이듬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순탄한 벼슬길은 얼마 못가고 그 뒤 5년간 하위직을 전전하는데, 1568년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당시 유학(儒學)은 퇴계(退溪)가 재야에서, 율곡이 조정에서 사림을 이끌던 황금기였으나, 망국적 당쟁도 그 무렵에 시작되었다.

 

융통성 없는 강직한 성품이 산 같은 화 불러

송강의 강직한 성품은 거의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였다. 따라서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지적해야 직성이 풀렸고, 허물이 있으면 비록 절친한 친구든 벼슬이 저보다 높은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지적했다.

심지어는 임금 앞에서도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못했고, 사사로운 부탁은 임금의 부탁이라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융통성 없는 성품은 결국 수많은 정적을 만들어 뒷날 산 같은 화를 불러오게 된다.

송강은 또 술을 즐겨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끊지 못했다.‘술을 줄이고 말을 삼가라’는 동갑내기 율곡의 충고를 들을 만큼 술 때문에 실수도 많았고 일화도 많이 남겼다.

근무 중인 대낮부터 술이 취해 사모가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적도 있었고, 뒷날 선조가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고 하자 술잔을 두들겨 사발만큼 크게 늘려 마시기도 했다. 이 잔은 현재 충북 진천 송강사에 보관되어 있다.

 

 ▲ 송강사 뒤의 정철 묘(뒷쪽). 앞은 둘째아들 종명의 묘다.

선조 8년(1575) 모친의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조정에 나아가 성균관사성을 맡았을 때엔 이미 동서로 갈라진 당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고 있었다.

서인에 속했던 송강은 율곡과 합세하여 동인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붕당을 없애고자 했으나 중도 온건파인 율곡은 송강의 강경책에 반대했다. 이에 송강은 벼슬을 버리고 창평으로 내려가고, 율곡도 수습책에 실패하자 강릉으로 낙향하니 조정은 동인의 천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송강은 임금이 불러 여러 차례 벼슬을 맡겼지만 그때마다 동인의 탄핵을 당해 출사와 낙향을 무려 14년이나 되풀이했다. 송강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선조 13년(1580) 45세 때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어서였다. 동인의 끈질긴 탄핵에도 감싸주는 임금의 후의를 더 이상 마다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쟁 휘말린 정치적 풍운아 송강가사로 그 아픔 달래

 ▲ 송강 정철의 사당과 묘가 있는 충북 진천 송강사.

‘관동별곡’은 강원감사가 되어 원주감영에 부임한 뒤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을 속속들이 돌아보고 산수와 고사, 풍속과 인정 등을 읊은 송강가사 중 가장 긴 작품이다. ‘관동별곡’은 선경을 소요하는 풍류가객 송강의 면모가 전편을 관통하는 듯한데, 특히 해금강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대목은 압권이다.
 
명사(鳴沙)길 니근 말이 취선(醉仙)을 비끼 실어
바다랄 곁에 두고 해당화로 들어가니
백구야 나디마라 네 벗인지 어찌 아난....
 

또한 금강산 구룡폭포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우리말을 마치 마술처럼 자유자재로 다룬 그의 솜씨야말로 참으로 신기절묘의 극치라 할 수밖에 없다.

 

은하수 한 굽이를 촌촌히 베어내어
실같이 풀쳐서 베같이 걸었으니....

 

4년 뒤에 송강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은 멈출 줄을 몰랐다. 심지어는 술 때문에 실수한 일까지 트집을 잡았고, ‘성격이 편협하며 감정에 치우쳐 매사를 그르치는 인물’이라면서 조정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참소했다.

그때마다 선조는 송강을 두둔하며, “정철이 술 좋아하는 것은 나도 잘 알지만, 술 마시는 것까지 시비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했고, “정철은 곧은 사람이다. 단지 바른말을 잘해 미움을 살 뿐이다”고 편들었다.

그리고 아끼던 말까지 하사해 타고 다니게 하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총마어사(寵馬御使)’라고 불렀다.

 

정치적 좌절기가 문학적 전성기

선조 18년에 율곡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송강도 조정을 물러나 고양을 거쳐 담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후 4년간 전원에 은둔,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고 시짓기에만 전념했다.

50세부터 54세까지 이 시기가 송강에게는 정치적 좌절기였으나 문학적으로는 전성기였다. 온갖 세파에 부대끼면서 시인으로서도 원숙한 경지에 들어서서 ‘사미인곡’,‘속사미인곡’ 같은 가사문학의 정수와 수많은 단가를 이때에 지었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산1번지의 전남지방기념물 제1호 송강정과 남면 지곡리 산 75번지의 식영정은 송강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송강정은 본래 죽록정을 송강이 고치고 이름을 바꾸어 머물던 곳인데 그 옆에 ‘사미인곡’전문을 새긴 송강시비가 서 있다. 1955년에 세워진 이 시비는 송강의 문학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몸 삼기실제 님을 좇아 삼기시니
한생연분이며 하날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점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데 노여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사미인곡’은 송강 자신을 한 여자의 몸으로, 임금을 님으로 비유하여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고 연모하는 심정을 독백체로 읊었다.

그리하여 그리운 님 때문에 병이 생겼으니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어서라도 님을 따르고 싶다며 끝맺는다. 한편, ‘속사미인곡’은 두 여인을 등장시켜 극적인 대화체로 구성하여 한층 애절한 사모의 정을 그려낸 송강가사의 정수이다.

 

저 가는 저 각시 본듯도 하여이다
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 다져 저문 날에 누굴 보러 가시는고.....

이렇게 시작하여 지는 달이 되어 잠시 님의 창 밖에 가서 비치는 것보다 궂은비나 되어 님에게 구슬프게 오래도록 울어보라며 끝맺는다.

 

四仙의 풍류 서린 식영정과 송강정

식영정에도 1971년에 세운 ‘성산별곡’시비가 있다. 이 식영정은 본래 김성원이 장인인 임억령에게 지어준 정자였다. 여기에 당시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 이른바 ‘식영정 사선(息影亭四仙)’이 어울려 술과 시와 거문고와 노래로 풍류를 즐겼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생 세간에 좋은 일 많건만은
어찌 한세상을 갈수록 낮게 여겨
적막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이렇게 시작되는 ‘성산별곡’은 식영정과 서하당 주변 사계절의 변화하는 정취를 묘사하고, 마지막으로 뜬구름같이 변화무상한 세상에 술 마시고 거문고 뜯으니 신선이 부럽지 않노라는 뜻의 내용이다.

식영정은 광주호 건너 장원봉을 등지고 야트막한 별뫼 언덕 끝에 자리잡고 있다. 정자 앞으로 광주호 상류 창계천이 흐르고 개울을 건너면 송강이 김성원, 고경명 등과 더불어 10년간 공부하던 환벽당이 나온다.

선조 22년(1589) 8월에 맏아들 기명(起溟)이 27세 한창나이로 죽었다. 송강은 부인 유 씨와의 사이에서 기명, 종명(宗溟), 진명(振溟), 홍명(弘溟)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54세의 아비를 두고 먼저 죽은 것이다.

담양에서 올라와 아들을 고양 원당에 묻고 머무는 사이에 정여립사건(鄭汝立事件)이 일어났다. 송강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궐로 들어가 임금을 위로하니 선조는 그의 충성심이 가상타며 그해 11월에 우의정으로 등용했다.

이때 수많은 연루자가 정철의 손에 죽어 그는 두고두고 모진 사람 소리를 들으며 유족과 자손들로부터 저주를 받아야만 했다.

 

 ▲ 송강 정철의 필적. 둘째아들 종명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그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올랐지만 적자가 없는 선조의 세자 세우는 이른바 건저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다시 파직되어 함경도 명천으로, 경상도 진주로, 함경도 강계로 남북 수만리를 오르내리며 귀양살이를 했다.

그렇게 2년간 모진 세월을 보내는 동안 송강도 어느새 57세의, 당시로서는 노인이 되어버렸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무인지경을 가듯 서울로 북상하자 멍청한 당파싸움으로 헛세월을 보내던 임금과 대신들은 백성을 버리고 몰래 피란길을 떠났다.

그 무렵에 풀려난 송강은 강계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평양에서 임금을 만나 박천, 가산으로 호종했다.

그해 9월에 전라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서울이 함락당한 판국에 어쩔 수 없이 강화도에서 형세를 살피다가 다시 소환되어 의주로 돌아갔다. 이듬해 5월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달병에 걸려 귀국했다.

전황은 소강상태였지만 조정은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 북인 간의 반목으로 당쟁이 끊임없었다. 그 와중에 또 다시 모함을 당해 송강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강화도에 칩거했다.

늙고 병든 데다가 패기조차 사라진 송강은 만사가 귀찮았다. 그저 피곤한 심신을 눕히고 쉬고만 싶었다. 그렇게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던 일세의 풍류가객 송강 정철은 선조 26년(1593) 12월 18일에 파란만장하고 중첩했던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니 그때 58세였다.

그의 묘는 처음에는 부모와 장남이 묻힌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 썼지만 현종 6년(1665)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권유로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동 환희산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소 앞의 사당 송강사는 충북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잇다.

송강사에서 묘소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는 ‘사미인곡’일부를 새긴 시비가 서 있어 일세의 풍운아 송강 정철의 위대한 풍류정신과 문학정신을 새삼 되새기게 해준다.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은 그지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흐르듯 하는고야
염냥이 때를 알아 가는 듯 고쳐오니
듯거니 보거니 늣길 일도 하도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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