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각다고(榷茶考)」론
이덕리의 차무역론에 이어 다산의 「각다고」를 살펴보겠다. 각다(榷茶)의 각(榷)은 도거리한다는 뜻이니 국가에서 차를 전매(專賣)하여 그 이익을 전유함을 말한다. 다산은 『경세유표』 권 11, 지관(地官) 수제(修制) 부공제(賦貢制) 5에 「각다고(榷茶考)」란 논문을 실었다. 역대 중국에서 시행한 술, 소금, 철 등 각종 전매제도를 검토한 일련의 논문 가운데 하나다. 이를 통해 각다에 대한 다산의 생각을 알아보기로 한다.
전대의 각다 논의
다산에 앞선 각다 논의는 지난 호에 살펴 본 이덕리의 논의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먼저 볼 것은 『세종실록』 12년(1430) 12월 8일의 기사다.
경연에 납시어 강(講)하다가 차를 전매하는 법[搉茶法]에 이르러 말씀하셨다. “중국에서는 어찌 차를 좋아하면서 엄히 금하는가? 우리나라는 궐내에서도 차를 쓰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이 각각 다르기가 또한 이와 같구나.” 시강관(侍講官) 김빈(金鑌)이 아뢰었다. “중국 사람은 모두 기름진 고기를 먹는 까닭에 차를 마셔서 기운을 내려가게 합니다. 또 손님을 접대할 때면 반드시 먼처 차를 낸 뒤에 술을 내옵니다.”
御經筵, 講至搉茶法曰: “中國何好茶, 而嚴其禁乎? 我國闕內, 亦不用茶, 好尙各異, 亦如是也.” 侍講官金鑌曰: “中國之人, 皆食膏肉, 故飮茶令下氣. 且當對客, 必先茶後酒.”
세종은 중국에서 역대로 각다법을 시행한 것을 의아해했다. 우리는 대궐에서도 차를 마시지 않는데, 중국은 어째서 국가가 법으로 금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차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시강관 김빈은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기름진 음식을 차를 즐겨 마시는 이유로 들었다. 벌써 조선 초만 해도 고려 때 흥성했던 차문화는 이렇듯 퇴조해버렸던 것이다. 이 글은 각다에 대한 언급이기 보다는 중국에서 그토록 차문화가 흥성한데 대한 왕의 의문을 적고 있어, 당시 우리 차 문화의 실상을 증언한다.
이후 『선조실록』 29년(1596) 11월 4일자 기사에 호마(胡馬) 무역에 대한 사복시(司僕寺)의 언급이 있다.
이제 제주목사의 보고를 보니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요청한 말 50필은 구해 뽑아내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근년 들어 제주의 마필은 많은 숫자를 반출해 와서 그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 비록 다시 공문을 보내 숫자를 더해 뽑아내게 해도 반드시 쓸만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전대에 중국에서는 차를 가지고 오랑캐의 말과 교역하였고, 지금 중국 조정 또한 개시(開市)에서 무역으로 교환하니, 진실로 우리에게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고 저들의 날랜 말과 바꾼다면 전장(戰場)에 보탬이 되고 무공(武功)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今見濟州牧使啓本, 都體察使行移, 五十馬艱得以捉出云云. 近年濟州馬匹, 多數出來, 其勢然矣. 今雖更爲行移, 加數捉出, 必無可用之馬矣. 前代中國, 以茶易虜馬, 今中朝亦開市貿換, 誠以吾無用之物, 易彼追風之足, 可以資戰場而收武功也.
군사력 강화를 위해 꼭 필요한 말을 제주 목장의 말로는 더 이상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이를 보충할 방법으로 호마(胡馬) 무역 방안을 제안한 내용이다. 중국에서는 차와 말을 교환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그다지 쓸모없는 물건을 말과 바꿔 무역할 것을 제안한 내용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단천(端川) 지역에서 나는 은자(銀子)나 인삼(人蔘) 등과 말을 교역할 것을 말했다. 이때만 해도 우리 땅에서 나는 차를 제품으로 만들어 말과 바꿀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덕리에 의해 최초로 각다 주장이 구체적 세부 지침과 함께 본격적으로 펼쳐졌고, 이를 이어 다산이 중국 역대의 각다 정책을 검토하는 논문을 제출했다. 다산은 「각다고」에 앞서 『경세유표』 권 2, 「동관공조(冬官工曹)」 중 임형시(林衡寺) 항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피건대, 남쪽 여러 고을에서 나는 차는 매우 좋다. 내가 본 바로는 해남과 강진, 영암과 장흥 등 바닷가 여러 고을에는 차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나는 말한다. 무릇 차가 나는 산은 지방관으로 하여금 다른 것을 심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이 나무하지 못하게 한다. 이윽고 무성해지기를 기다려 해마다 차 몇 근씩을 임형시(林衡寺)로 옮겨, 만하성(滿河省)에 보내 좋은 말을 사와 목장에 나눠주게 한다면 또한 나라에서 쓰기에 충분할 것이다.
案南方諸縣, 產茶極美. 臣以所見海南康津靈巖長興, 凡沿海諸邑, 莫不產茶. 臣謂凡產茶之山, 令地方官封植, 禁民樵牧, 待其茂盛, 歲以茶幾斤輸于林衡, 送于滿河省, 以市良馬, 頒于牧場, 亦足以贍國用也.
이른바 차 무역 제안을 한 셈인데, 앞서 본 이덕리의 차무역론에 비해서는 구체성이 떨어진다. 다산이 차 무역의 효용성에 대해 인식한 것만은 분명한데, 『경세유표』를 적을 당시까지 다산은 아직 이덕리의 『동다기』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만일 다산이 이때 『동다기』를 읽었다면, 「각다고」 등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이덕리의 다른 저작인 『상두지』는 2차례 인용한 바 있다.
각다고(榷茶考)의 내용
「각다고」는 『경세유표』 지관(地官) 부공제(賦貢制) 속에 들어 있다. 국가에서 관장하는 각종 세수(稅收)와 관련된 내용을 논하면서 중국 역대 왕조에서 각다, 즉 차 전매정책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왔으며, 그 규모와 이익, 그리고 폐해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살핀 것이다. 내용은 먼저 왕조 별로 시기와 법령 시행 내용을 밝힌 본문이 있고, 본문 아래 보충 설명을 역대 문헌의 인용으로 추가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이에 대한 자신의 안설(按說)을 제시하였다. 본문은 모두 10조목이다. 당대(唐代) 3조목, 송대(宋代) 4조목, 원대(元代) 1조목, 명대(明代) 2조목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대의 각다 정책을 정리해 보자. 본문 3조목 4단락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덕종(德宗) 건중(建中) 원년(780)에 차와 칠(漆), 대나무 등에 10분의 1 세금을 거두어 상평본전(常平本錢)을 삼음.
과도한 군비 충당을 위해 시행했으나 얼마 못가 혁파함.
2. 덕종 정원(貞元) 9년(793)에 다세(茶稅)를 복원시킴.
3. 목종(穆宗, 820-823) 때 천하 차세(茶稅)의 비율을 100전(錢)에서 50전씩 증액하고, 차는 근량을 더해 20량까지 이름.
4. 문종(文宗, 827-839) 때 각다(榷茶)를 재설치 해 직접 관장함. 백성의 차나무를 관장(官場)으로 옮겨 심고,
그동안 저축한 것을 전매하자 천하가 크게 원망함.
최초로 각다정책이 시행된 것은 당 덕종(德宗) 원년(780)의 일이다. 군비(軍費)의 갑작스런 증가로 경상세(經常稅)로는 도저히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차와 칠, 그리고 대나무와 재목에 10분의 1 씩 세금을 거두어 상평본전(常平本錢)으로 삼은 것이 그 출발이다. 덕종은 이 제도의 시행을 바로 후회하고 철회했다. 하지만 덕종은 13년 뒤에 염철사(鹽鐵使) 장방(張滂)의 건의를 받아들여 차세(茶稅)를 복구시켰다. 이를 통해 해마다 40만 관(貫)의 세수(稅收)를 거두었다. 그 방법은 차가 생산되는 고장과 차 상인이 왕래하는 길목에서 10분의 1의 세금을 거두는 방식이었다.
이를 이어 목종은 차세를 50%나 인상했다. 차의 부가가치가 높아지자 약탈과 각종 간사한 범죄가 연이어 일어났다. 문종 때 정승 왕애(王涯)는 이사(二使)를 맡고 다시 각다(榷茶)를 설치했다. 차와 관련된 범죄를 처벌하는 각종 법률이 만들어져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그래도 이익이 워낙 컸으므로 사매(私賣)의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육우(陸羽)는 이 시기에 『다경(茶經)』 3책을 써서 차 마시는 법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볼 때 당나라는 처음 차에 차세를 매긴 이후 불과 50년도 되지 않아, 이를 통한 세금 수입이 40만 관에 이르렀고, 차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크게 달라져 사매가 횡행하고, 차 마시는 법이 보급되는 등 순식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다음은 송․원대를 합쳐 각다 정책에 대한 본문 5조목, 6항목의 정리다.
1. 송 태조 건덕(乾德) 2년(964)에 세금으로 내는 차 외에는 모두 관에서 수매하고, 감춰두거나 사사로이 판매하는 자는 몰수하고
죄 주는 조처를 취함. 관리가 관차(官茶)를 일정량 이상 사무역하거나 판매하다가 적발되면 사형에 처함
2. 순화(淳化) 3년(992) 관차를 10관 이상 훔쳐 팔다 적발되면 얼굴에 자자(刺字)하고, 감옥에 보내는 조서를 내림.
3. 인종(仁宗) 초년(1022)에 차에 대한 업무 규정을 두고 해마다 크고 작은 용봉차(龍鳳茶)를 제조함. 정위(丁謂)가 시작해서
채양(蔡襄)이 완성함.
4. 신종(神宗) 희령(熙寧) 7년(1074)에서 원풍(元豊) 8년(1085)까지 촉도(蜀道)에 다장(茶場) 41개소, 경서로(京西路) 금주(金州)에 6개소,
섬서(陝西)에 332개소가 있었음. 이직(李稷) 때에는 세수(稅收)가 50만냥이 되고, 육사민(陸師閔) 때에는 100만냥에 이름.
5. 남송 효종(孝宗) 건도(乾道, 1165-1173) 말년부터 이전까지 거친 차와 오랑캐의 말과 교역하던 것을 바꿔 차음으로 세다(細茶)를 줌.
성도(成都) 이주로(利州路) 12 고을에서만 좋은 차가 2천 1백 2만근이 생산됨.
6.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 17년(1280)에 강주(江州)에 각다도전운사(榷茶都轉運司)를 설치하여,
강ㆍ회ㆍ형ㆍ남ㆍ복ㆍ광(江淮荊南福廣)지방의 세(稅)를 총괄케하니, 말차(末茶)와 엽차(葉茶)가 있었음.
송대로 들어와서도 차의 국가 전매는 더욱 강화되었다. 관리도 엄격해져서 각종 규제와 처벌이 까다로와졌다. 다산의 안설은 이렇다.
송나라 제도는 차를 전매함에 강릉(江陵)과 기주(蘄州) 등에 6무(務)를 두고, 기주(蘄州)와 황주(黃州) 등에 13장(場)을 두며 차 수매처(收買處)를 강남(江南)․호남(湖南)ㆍ복건(福建) 등 모두 수십 곳에 두었다. 산장(山場)의 제도는 원호(園戶)를 통솔하여 그 세금을 거두고, 나머지는 모두 관에서 사들였다. 또 따로 민호절세과(民戶折稅課)란 것이 있었다.
宋制榷茶有六務, 江陵蘄州等. 十三場, 蘄州黃州等. 又買茶之處, 江南湖南福建總數十郡. 山場之制, 領園戶, 受其租, 餘悉官市之. 又別有民戶折稅課者.
당시 국가의 차 관리가 한층 세부 조직을 갖춰 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송대에는 차의 종류도 당대와는 달리 다양하게 발전했다. 다산의 설명을 보자.
무릇 차는 두 종류가 있는데 편차(片茶)와 산차(散茶)가 그것이다. 편차는 쪄서 만든다. 모양틀에 채워서 가운데를 꿴다. 다만 건주(建州)와 검주(劍州)에서는 찐 뒤에 갈아서, 대로 엮어 격자를 만들어 건조실 안에 두므로 가장 정결하다. 다른 곳에서는 만들 지 못한다.
凡茶有二類。曰片。曰散。片茶蒸造。實捲摸中串之。惟建,劍則旣蒸而研。編竹爲格。置焙室中。最爲精潔。他處不能造。
차가 쪄서 모양틀에 넣어 가운데 구멍을 뚫어 꿴 편차(片茶)와 가루차인 산차(散茶)의 두 종류 차를 설명하고,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들 차가 생산되는 대표 지역을 상세하게 나열하였다. 이로 볼 때 각 지역마다 생산되는 차의 종류가 달랐고, 품질에 따른 등급도 복잡하게 매겨졌음을 알 수 있다. 각다로 인한 수익 규모도 당 덕종 때 40만 관 수준이던 것이 지도(至道) 말년(997)에는 무려 285만 2천 900여 관으로 늘어났다. 다시 천희(天禧) 말년(1021)에는 여기서 45만여 관이 증가되었다. 이제 차는 국가 경제의 기반이 되는 중요 재원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인종(仁宗) 초년(1022)에 다무(茶務)를 세우고, 해마다 크고 작은 용봉다(龍鳳茶)를 제조해서 고급차의 생산에 들어갔다. 정위(丁謂)와 채양(蔡襄)이 만들어낸 용봉단(龍鳳團) 떡차는 차 문화사에서 오래도록 수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냈다. 이후 차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정책 담당자에 따라 바짝 조이고 느슨하게 풀어지기를 되풀이 했다. 가우(嘉祐) 4년(1059)에 인종은 조서로 차금(茶禁)을 늦추어, 차로 인해 백성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6,70년이었다.
신종(神宗) 희령(熙寧) 7년(1074)에서 원풍(元豊) 8년(1085)까지 촉도(蜀道)에 다장(茶場) 41개소, 경서로(京西路) 금주(金州)에 6개소, 섬서(陝西)에 332개소가 개설되어, 차는 최대의 극성기를 맞았다. 이때부터 말차(末茶)가 성행하여 차호(茶戶)들의 말차 제조를 법령으로 금지시켜야 할 정도였고, 심지어 부족한 양을 늘이기 위해 차에 쌀과 팥을 섞어 파는 자까지 있었다. 차가 백성에게 끼치는 폐단도 점차 커져갔다.
오랑캐의 말과 차를 맞바꾸는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남송 효종(孝宗) 건도(乾道, 1165-1173) 말년의 일이다. 이전에는 차를 주더라도 품질이 낮은 것만 주었는데, 이때 와서 처음으로 고급의 세차(細茶)를 그들에게 주었다. 차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 유통되는 차의 양이 그만큼 늘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도(成都) 이주로(利州路)의 열 두 고을에서만 좋은 차가 2천 1백 2만근이나 생산되었을 정도였다. 다산은 중국에서 차마사(茶馬司)를 두어 오랑캐와의 말 교역을 관장케 한 연유를 구준(丘濬)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적었다.
후세에 차로 오랑캐의 말과 교역한 것은 여기서 처음 보인다. 대개 당나라 때 회흘(回紇)이 입공(入貢)하면서부터 이미 말과 차를 교역했었다. 대개 오랑캐 사람들은 유락(乳酪)을 많이 마시는데, 유락은 체증을 유발하는데, 차의 성질은 순조롭게 통해 깨끗하게 씻어주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차마사(茶馬司)를 만들었다.
後世以茶易虜馬, 始見於此. 蓋自唐世, 回紇入貢, 已以馬易茶. 蓋虜人多嗜乳酪, 乳酪滯膈, 而茶性通利, 能蕩滌之故也. 宋人始制茶馬司.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 17년(1280)에도 강주(江州)에 각다도전운사(榷茶都轉運司)를 설치해서, 강ㆍ회ㆍ형ㆍ남ㆍ복ㆍ광(江淮荊南福廣)지방의 세(稅)를 총괄케 하였는데, 당시 차의 종류로는 말차와 엽차(葉茶)가 있었다.
이렇듯 당송을 거쳐 원나라에 이르는 동안 차는 일용의 필수품이 되어 천하가 차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차의 제조법에도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당송 시절의 차는 모두 가늘게 가루 내어 반죽해서 떡 조각처럼 만들었다가, 마실 때 다시 차 맷돌에 갈아서 끓였다. 원나라 때도 말차(末茶), 즉 가루차가 있었는데, 이후로는 온 중국이 모두 잎이 그대로 살아있는 엽차를 마시게 되었다. 다산은 이러한 내용을 구준(丘濬)의 글을 인용하여 상세하게 설명했다.
다음은 명대 각다 정책에 대한 2조목이다.
1. 명대에는 각다 관련 사무와 첩사(貼射)와 교인(交引), 차전(茶田) 등 각종 명색을 모두 혁파함. 다만 사천(四川)에 차마사(茶馬司) 한 곳,
섬서(陝西)에 차마사 4곳을 설치함.
2. 『대명률(大明律)』에, 사사로이 차를 만들어 법을 범한 자는 소금을 사제(私製)한 것과 같은 죄로 논한다고 되어 있음.
이로 보면 명대에는 각다 정책이 없어지고, 단지 차와 말의 교역을 담당하는 차마사(茶馬司)만 몇 곳에 존치되었다. 국가에서 생산과 판매를 독점 관리하기에는 시장 규모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이에 이르러 각다는 없고 차마 무역만 국가의 관리 대상이 되었다.
이렇듯 당대에서 명대에 이르는 각다에 관한 역사 사실 기록은 말 그대로 간추린 차문화이기도 하다. 다산은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이와 같이 각다와 관련된 기록을 추출해서, 관련 문헌의 인용을 통해 앞 뒤 맥락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각다고」를 정리해 냈다.
역대 각다 정책에 대한 다산의 태도
중국 역대 왕조의 각다 정책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어떠했던가? 먼저 다산이 당나라 목종 조의 기사를 소개한 후, 끝에 붙인 안설(按說)을 읽어 보자.
생각건대, 차란 물건은 처음에는 약초 중에 미미한 것이었다. 그것이 오래 되자 나르는 수레가 연잇고, 배가 잇달았다. 그리하여 현관(縣官)이 세금을 매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장사해서 판매하는 한 가지 물건이니, 마땅하게 헤아려 세금을 거두면 충분하다. 어찌 하여 관청이 직접 장사를 하면서 백성들이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을 금하고, 베어 죽여도 그만 두지 않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臣謹案。茶之爲物。其始也蓋藥艸之微者也。及其久也。連軺車而方舟舶。則縣官不得不征之。然是亦商販之一物。量宜收稅。斯足矣。何至官自爲商。禁民私賣。至於誅殺而不已乎。
이를 보면 교역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국가에서 차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국가가 판매를 독점하는 각다 정책에 대해서는 다산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각다고」의 끝에 붙인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내가 예전에 재부(財賦)의 제도를 두루 살펴보니, 비록 그 손익과 득실이 시대마다 각기 달랐다. 크게 보면 도가 있는 세상에서는 세금 거두는 것은 박한데도 재용(財用)은 반드시 넉넉했다. 도가 없는 세상에서는 세금을 거두는 것이 반드시 무겁고, 재용은 반드시 부족했다. 이는 이미 지나온 자취만 보더라도 분명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볼진대,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 아니지만, 큰 이익은 박하게 거두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재용이 결핍되는 방법도 한 가지 뿐은 아니지만, 큰 해로움은 무겁게 거두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아아! 천하의 재원은 한정이 있고, 쓰임에는 한정이 없다. 한정 있는 재물로 한정 없는 쓰임에 부응하니, 무엇으로 이를 견디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법을 제정하시어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수입이란 것은 재물이고, 지출이란 것은 쓰임이다. 유한한 것을 헤아려서 무한한 것을 절제하는 것은 성인의 지혜요, 흥하여 융성하는 방법이다. 무한한 것을 멋대로 해서 유한한 것을 고갈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사내의 미혹함이요, 패망의 꾀이다. 무릇 세금을 거두는 법을 제정할 때는 먼저 나라의 쓰임새를 헤아리지 말고, 오직 백성의 힘을 가늠하고 하늘의 이치를 헤아려야 한다. 무릇 백성의 힘으로 감당치 못하는 것과 하늘 이치가 허락하지 않을 것은 터럭만큼이라도 감히 더하지 못한다. 이에 1년의 수입을 모두 계산해서 3분의 2는 1년의 비용으로 지출하고, 3분의 1은 남겨 내년의 비축으로 삼는다. 이른 바 3년을 밭 갈면 1년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부족하게 되면 제사나 손님 접대로부터 아래로 수레와 복식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줄여 검소하게 해서, 서로 알맞게 되기를 기약한 뒤에 그만둔다. 이것이 옛날의 도이니, 다른 방법은 없다.
臣歷觀前古財賦之制, 雖其損益得失, 代各不同. 大較有道之世, 其賦斂之薄, 而其財用必裕. 無道之世, 其賦斂必重, 而其財用必匱. 此已然之跡, 昭昭然者也. 由是觀之, 裕財之術非一, 而其大利無過乎薄斂也. 匱財之術非一, 而其大害無踰乎重斂也.
嗚呼! 天下之財有限, 而其用無限, 以有限之財, 應無限之用, 其何以堪之? 故聖人制法曰: “量入以爲出.”, 入者財也, 出者用也. 量有限以節無限, 聖人之智也, 興隆之道也. 縱無限以竭有限, 愚夫之迷也, 敗亡之術也. 凡制賦稅者, 勿先計國用, 惟量民力揆天理. 凡民力之所不堪, 天理之所不允, 卽毫髮不敢加焉. 於是通計一年之入, 參分之以其二, 支一年之用, 留其一爲來年之蓄. 所謂三年耕, 有一年之食也. 如有不足, 自祭祀賓客, 而下乘輿服飾一應百物, 皆減之爲儉約, 期與相當而後已焉. 此古之道也, 無他術也.
결론에서도 다산은 각다는 백성의 세금을 가중시키기만 하고, 국가의 재용이 넉넉해져도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수입과 지출을 규모에 맞게 하고, 없을 때는 절약하고 남을 때는 저축하는 상평(常平)의 방법으로 천리를 따르고 백성의 힘을 펴주는 정책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각다고」의 자료 가치와 의의를 정리한다.
첫째, 「각다고」는 중국 역대의 차 전매 정책을 통해 중국의 차문화를 살핀 최초의 저술이다.
둘째, 「각다고」는 본문 아래 관련 문헌을 섭렵하여 호인(胡寅)․마단림(馬端臨)․진부량(陳傅良)․구준(丘濬) 등의 언급을 통해 각다의 이면을 소상하게 보충한 기사본말(紀事本末)의 형식을 갖춘 저술이다.
셋째, 「각다고」는 역대 중국에서 차가 국용(國用)의 마련에 한 기여와 구체적 차 산지의 이름, 제도 시행 상의 세부 내용 및 백성들에게 끼친 질고까지를 조대별로 제시하여, 차문화의 실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게 한 저술이다.
넷째, 「각다고」는 산차(散茶)와 편차(片茶), 그리고 말차(末茶) 등 시대 변화에 따른 차의 제법과 특성, 음다법 등을 제시하여 차문화의 변천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육우의 『다경』이 출현한 문화 배경 및 의의 등을 밝혀, 사적 맥락을 짚을 수 있게 하였다.
다섯째, 그럼에도 「각다고」는 앞서 이덕리가 『동다기』에서 펼친 차마(茶馬) 무역론의 구체적 제안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무역의 당위만 원론 수준에서 확인한 채, 전반적으로 각다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 한계를 지닌다.
다산의 떡차론과 구증구포설
우리 전통 수제차가 요즘 우리가 마시는 덖음 녹차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보편화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진공 포장술도 없고 냉장 보관도 어려운 상태에서 덖음 녹차를 장마철이 지나도록 맛이 변하지 않게 보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산 선생이 마셨던 차는 어떤 차였을까? 잎차였을까, 떡차였을까? 초의차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물음이다.
다산이 마신 차는 떡차
2005년 7월 30일, 강진군이 개최한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에 흥미로운 내용을 담은 다산 선생의 친필 편지 한통이 출품되었다. 이효천 선생 소장 유묵으로, 다산이 69세 나던 1830년 강진 백운동 이대아(李大雅)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 속에는 떡차 제조방법에 대한 다산 자신의 친절한 설명이 나와 있다. 전문을 소개한다.
잠깐 눈 돌리는 사이에 세 해가 문득 지났네. 생각건대, 효성스런 마음이 드넓어 내가 미칠 바가 아닐세. 소식 끊겨 생각만 못내 아득할 뿐 안타까운 마음을 펼 길이 없네. 그간 편히 지내셨는가? 또 과거 시험을 보는 해를 맞으니, 비록 영화로운 이름에 뜻이 없다고는 하나 마땅히 글쓰기에 마음을 두고 있겠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가? 나는 나이가 들어 병으로 실로 괴롭기 짝이 없네. 기운이 없어 문밖에도 나갈 수가 없다네. 정신의 진액은 온통 소모되어 남은 것이라고는 실낱같군. 이래서야 어찌 살아 있다 하겠는가.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가까스로 도착하였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올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 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 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알겠는가?
시험 보는 고을은 어디인가? 경과(慶科) 때에는 틀림없이 올라올 테니 직접 줘도 좋겠고, 그렇지 않으면 여름이나 가을에 연지(蓮池) 사는 천총(千摠) 김인권(金仁權)의 집으로 보내주게나. 즉각 내게 전해올 걸세. 이현(泥峴) 사는 조카는 청양(靑陽)에 고을 원이 되어 나간지라, 서울 안에는 부탁할만한 곳이 없어 인편에 전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을 걸세. 잠시 줄이고 다 적지 않네. 삼가 쓰네.
경인년(1830) 3월 15일 먼 친척 아무개 돈수.
轉眄之頃, 三霜奄過. 伏惟孝思廓然, 靡所逮及. 消息頓絶, 思路遂渺, 耿耿之懷, 無以悉喩. 比來起居佳勝. 又當科年, 雖曰無意於榮名, 亦當留神於佔畢. 所做何工? 戚記年固巍矣. 病實苦哉. 委頓不能出戶外. 精神津液都已耗盡, 所存菫一縷耳. 尙何云生世也. 向惠茶封書, 間關來到, 至今珍謝. 年來病滯益甚, 殘骸所支, 惟茶餠是靠, 今當穀雨之天, 復望續惠. 但向寄茶餠, 似或粗末, 未甚佳. 須三蒸三曬, 極細硏, 又必以石泉水調勻, 爛搗如泥, 乃卽作小餠然後, 稠粘可嚥, 諒之如何? 試邑定是何邑? 慶科時, 似必上來, 袖傳爲好, 否則或夏或秋, 入送于蓮池金千摠仁權之家, 必卽傳來耳. 泥峴族姪, 年前出宰靑陽, 京中無可付之處耳. 不宜轉付於風便也. 姑略不宣. 謹狀. 庚寅三月十五日, 戚記逋頓首.
겉봉에는 ‘강진백운동(康津白雲洞) 이대아서궤경납(李大雅書几敬納)’이라 적혀 있다. 발신인에는 ‘두릉후장(斗陵侯狀)’으로 적었다. 수신인 이대아는 다산이 강진 시절에 직접 가르쳤던 막내 제자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을 가리킨다. ‘척기(戚記)’라 한 것으로 보아 사제간에 앞서, 먼 친척 뻘 되는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17년 이시헌의 아버지인 이덕휘(李德輝, 1759-1828)에게 보낸 다산의 또 다른 편지에는, “그대와 아드님의 공부가 모두 아주 근실하고 도타워 더 권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먹는 것이 너무 박해서 병에 걸릴까 염려되니, 이것이 걱정입니다.”라 한 내용이 있고, 보내준 닭과 죽순,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과 약유(藥油) 등에 대해 감사하는 언급이 있다. 두 편지로 볼 때 다산은 강진시절에는 이덕휘의 집에서 보내온 이런저런 먹거리를, 해배(解配)되어 서울로 올라간 뒤에는 백운동에서 부쳐온 차를 받아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편지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대목은 바로 떡차 제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보내준 떡차를 한참 만에 어렵게 받아 잘 먹었다는 말, 떡차로 겨우 몸을 버텨 살고 있으니, 햇차를 따면 새로 만들어 더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배달 사고라도 날까 봐 전달하는 방법까지 시시콜콜히 적은 것을 보면, 차에 대한 다산의 강한 집착이 느껴져 슬그머니 웃게 된다. 이때 다산은 강진 다신계(茶信契)에서 매년 보내는 차 양식도 받아서 먹던 터였다.
다산은 ‘차병(茶餠)’이라고 했다. 떡차가 아니라 ‘차떡’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칫 그냥 차가 아니라 곡물 가루를 섞어 떡으로 만든 것인가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제조법을 보면 차떡이 아니라 떡차(餠茶)를 말한 것이다. 만들어 전달하는데 적어도 몇 달씩 걸리는 노정을 생각한다면, 곡물을 빻아 차잎과 함께 찧어 만든 떡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편지에서 다산이 적고 있는 떡차 제조법은 이렇다.
1. 차잎을 딴다.
2. 삼증삼쇄(三蒸三曬), 즉 세 번 쪄서 세 번 볕에 말린다.
3. 아주 가늘게 빻는다.
4. 돌샘물로 반죽한다.
5. 진흙처럼 완전히 뭉클어지게 찧는다.
6. 작은 떡으로 만든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에 알려진 떡차 제조법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다만 다산은 여기서 세 번 쪄서 세 번 볕에 말리는 삼증삼쇄(三蒸三曬)를 말하고, 가루가 고와야지 거칠면 안 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또 석천수(石泉水) 즉 돌샘물로 진흙처럼 뭉클어지게 짓찧어 작은 떡으로 만들라고 했다.
2006년 10월에 역시 강진군에서 열린 제 2회 「다산정약용선생유물특별전」에도 1816년 다산이 우이도(牛耳島)의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가 출품되었다. 편지에서 다산은 그해 세상을 뜬 중씨 정약전(丁若銓, 1760-1816)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상대의 후의에 감사하는 내용을 전했다. 그리고 보내준 전복에 대한 답례로 ‘다병오십송료(茶餠五十送了)’라 하여 떡차 50개를 보내고 있다.
다산의 떡차에 대한 다른 증언들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도차변증설(荼茶辨證說)」에 다산의 떡차에 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오늘날 차로 이름난 것은 영남의 대밭에서 나는 것을 죽로차(竹露茶)라 하고, 밀양부 관아 뒷산 기슭에서 나는 차를 밀성차(密城茶)라 한다. 교남(嶠南) 강진현에는 만불사(萬佛寺)에서 나는 차가 있다. 다산 정약용이 귀양 가 있을 때, 쪄서 불에 말려 덩이를 지어 작은 떡으로 만들게 하고, 만불차(萬佛茶)라 이름 지었다. 다른 것은 들은 바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차를 마시는 것은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今茶之爲名者, 出於嶺南竹田, 名以竹露茶. 出於密陽府衙後山麓産茶, 名密城茶. 嶠南康津縣, 有萬佛寺出茶. 丁茶山鏞謫居時, 敎以蒸焙爲團, 作小餠子, 名萬佛茶而已. 他無所聞. 東人之飮茶, 欲消滯也.
영남 대밭에서 나는 죽로차(竹露茶), 밀양의 밀성차(密城茶)와 함께 다산의 만불차(萬佛茶)를 조선의 명차로 꼽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체증을 내리기 위한 약용으로 차를 마신다고 한 대목이 중요하다. 앞서 편지에서 다산도 체증이 심해져서 떡차가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고 직접 말한 바 있다.
만불사는 초당이 있던 강진 만덕산 백련사를 가리킨다. 다산은 증배(蒸焙)하여, 즉 찌고 말려 덩이로 지어 작은 떡을 만들게 했다고 했다. 다산의 차가 소단차(小團茶), 즉 작은 크기의 떡차였음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셈이다.
물론 다산이 떡차만 마셨던 것은 아니다.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松南雜識)』 「화약류(花藥類)」의 「황차(黃茶)」항목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신라 역사에, 흥덕왕 때 재상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얻어 지리산에 심었다. 향과 맛이 당나라보다 낫다고 한다. 또 해남에는 옛날에 황차(黃茶)가 있었는데,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정약용이 이를 알았으므로, 이름을 정차(丁茶) 또는 남차(南茶)라고 한다.
羅史興德王時, 宰相大廉, 得種於唐, 種智異山. 香味優於唐云. 又海南古有黃茶, 世無知者. 惟丁若鏞知之, 故名丁茶又南茶.
이 언급에 보이는 황차(黃茶)는 떡차인지 잎차인지가 분명치 않다. 다만 황차라 한 것으로 보아 정차(丁茶) 또는 남차(南茶)로도 불린 해남황차(海南黃茶)는 가마솥 덖음차가 아닌 발효차가 분명하다.
한편 다산이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과 맺은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곡우일에 여린 잎을 따서 볶아 1근을 만든다.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2근을 만든다. 이 잎차 1근과 떡차 2근을 시 원고와 함께 동봉한다.
穀雨之日, 取嫩茶, 焙作一斤. 立夏之前, 取晩茶, 作餠二斤. 右葉茶一斤, 餠茶二斤, 與詩札同封.
여린 첫 싹은 볶아 잎차를 만들고, 곡우 이후 입하 사이에 딴 늦차로는 떡차를 만들었음을 정확하게 말했다. 이는 1823년 다산이 초천으로 찾아온 제자 윤종삼(尹鍾參)과 윤종진(尹鍾軫)에게 기념으로 써준 친필 글씨 속의 다음 대목으로도 확인된다.
“올 적에 이른 차를 따서 말려두었느냐?”
“아직 못했습니다.”
“來時, 摘早茶付晒否?” 曰: “未及.”
이른 차를 따서 볕에 말려두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산이 마신 잎차는 햇볕으로 자연 건조 발효시킨 반발효차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소량이어서 그 즉시 마시는 용도였고, 1년의 차 양식은 대부분 떡차로 해결했다. 더구나 잎차의 경우는 삼증삼쇄나 구증구포의 찌고 말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약한 불에 찌거나 햇볕에 말려 반발효시킨 것이었다.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실체
다산의 제다법과 관련해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실체는 무엇일까? 구증구포는 오늘날 다산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하나의 신화가 된 듯하다. 다산은 앞서 본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증구포를 줄여 삼증삼쇄(三蒸三曬)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산이 만년에 주장을 바꾼 것인가? 이 문제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구증구포란 말 그대로 아홉 번 쪄서 아홉 번 말린다는 말이다. 구증구포는 인삼이나 숙지황 등 한약재의 강한 성질을 누그러뜨려 약성을 발휘시키기 위해 쓰는 방법이다. 이를 차에다 적용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달리 예를 찾기 힘들다. 다산의 구증구포나 삼증삼쇄는 덖음 녹차가 아닌, 곱게 빻아 가루를 내 돌샘물로 반죽해 빚는 떡차에 해당하는 제법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덖음 녹차를 만들면서 다산의 이 구증구포를 적용하고, 이를 마치 절대의 비전(秘傳)인 양 떠받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째서 다산은 그 여린 찻잎을 아홉 번이나 쪄서 말려 차를 법제해야 한다고 했을까? 구증구포에 대한 다산의 최초 언급은 「범석호의 병오서회(丙午書懷) 10수를 차운하여 송옹(淞翁)에게 부치다(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란 시의 둘째 수에 나온다.
小雨庭菭漲綠衣 보슬비가 뜨락 이끼 초록옷에 넘치길래
任敎孱婢日高炊 느지막이 밥 하라고 여종에게 얘기했지.
懶拋書冊呼兒數 게을러져 책을 덮고 자주 아일 부르고
病却巾衫引客遲 병으로 의관 벗어 손님 맞이 더뎌진다.
洩過茶經九蒸曝 지나침을 덜려고 차는 구증구포 거치고
厭煩雞畜一雄雌 번다함을 싫어해 닭은 한 쌍만 기른다네.
田園雜話多卑瑣 시골의 잡담이야 자질구레한 것 많아
漸閣唐詩學宋詩 당시(唐詩) 점차 물려두고 송시를 배우노라.
1구의 ‘녹의(綠衣)’는 마당에 깔린 이끼다. 아침부터 조찰이 내린 비로 뜨락의 이끼 옷이 자박자박 젖었다. 오늘 같은 날은 마냥 게으름을 부리고 싶다. 갑자기 책을 덮으니 무료하다. 공연히 이래라 저래라 아이를 불러 심부름을 시킨다. 의관을 풀어헤친 채 지내다 갑자기 손님이 오면 허둥지둥 의관을 정제하느라 손님맞이가 늦어진다.
5구에 구증구포가 나온다. 직역을 하면 “지나침을 줄이려고 차는 구증구포를 거친다”는 말이다. ‘설과(洩過)’는 『좌전(左傳)』에 “부족함을 건져서 지나침을 줄인다. 濟其不足, 以洩其過”란 표현이 있는데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차의 성질이 지나치게 강한 것을 감쇄시키려고 구증구포, 즉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과정을 거친[經]다고 했다. 6구에서는 조촐한 살림이라 닭도 두 마리만 기른다는 이야기를 대구로 얹고, 쓸데없는 잡담에 마음 쓰지 않고, 지금까지 보던 당시를 접어두고 송시를 더 읽겠노라는 다짐을 적었다.
차를 법제할 때 구증구포 하는 이유를 ‘설과(洩過)’에 둔 것이 흥미롭다. 지나치게 강한 차의 성질을 감쇄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 것이다. 다산의 구증구포설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운데 「호남사종(湖南四種)」이란 항목에 한 번 더 나온다.
강진 보림사의 죽전차(竹田茶)는 열수 정약용이 얻었다. 절의 승려들에게 구증구포의 방법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이 보이차에 밑돌지 않는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치니, 이를 일러 우전차(雨前茶)라 해도 괜찮다.
康津寶林寺竹田茶, 丁洌水若鏞得之. 敎寺僧以九蒸九曝之法. 其品不下普洱茶. 而穀雨前所採尤貴. 謂之以雨前茶可也.
중요한 기록이다. 보림사의 죽전차를 처음 개발한 사람이 정약용이라고 밝혔다. 다산이 보림사에 갔다가 절 둘레의 야생차를 보고, 구증구포의 방식으로 차를 법제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 품질도 중국의 보이차만 못지않다고 했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쳤다는 것은 앞서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편지에서 곡우 때가 되었으니 서둘러 따서 떡차를 만들어 보내달라고 한 언급과 일치한다.
구증구포 떡차인 보림사 죽로차
이유원은 「호남사종」외에도 문집인 『가오고략(嘉梧藁略)』에 「죽로차(竹露茶)」란 장시를 지어 보림사 차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도 다산의 구증구포설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차의 법제 과정 및 차 맛까지 자세히 적었다.
普林寺在康津縣 보림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縣屬湖南貢楛箭 호남 속한 고을이라 싸릿대가 공물일세.
寺傍有田田有竹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竹間生草露華濺 대숲 사이 차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
世人眼眵尋常視 세상 사람 안목 없어 심드렁이 보는지라
年年春到任蒨蒨 해마다 봄이 오면 제멋대로 우거지네.
何來博物丁洌水 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丁洌水) 선생께서
敎他寺僧芽針選 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 싹을 골랐다네.
千莖種種交織髮 천 가닥 가지마다 머리카락 엇 짜인듯
一掬團團縈細線 한 줌 쥐면 웅큼마다 가는 줄이 엉켰구나.
蒸九曝九按古法 구증구포 옛 법 따라 안배하여 법제하니
銅甑竹篩替相碾 구리 시루 대소쿠리 번갈아서 방아 찧네.
天竺佛尊肉九淨 천축국 부처님은 아홉 번 정히 몸 씻었고
天台仙姑丹九煉 천태산 마고선녀 아홉 번 단약을 단련했지.
筐之筥之籤紙貼 대오리 소쿠리에 종이 표지 붙이니
雨前標題殊品擅 ‘우전(雨前)’이란 표제에다 품질조차 으뜸일세.
將軍戟門王孫家 장군의 창 세운 문, 왕손의 집안에서
異香繽紛凝寢讌 기이한 향 어지러이 잔치 자리 엉긴 듯 해.
誰說丁翁洗其髓 뉘 말했나 정옹(丁翁)이 골수를 씻어냄을
但見竹露山寺薦 산사에서 죽로차를 바치는 것 다만 보네.
湖南希寶稱四種 호남 땅 귀한 보물 네 종류를 일컫나니
阮髥識鑑當世彦 완당 노인 감식안은 당세에 으뜸일세.
海橽耽䔉檳樃葉 해남 생달(栍橽), 제주 수선(水仙), 빈랑(檳榔) 잎 황차(黃茶)러니
與之相埓無貴賤 더불어 서로 겨뤄 귀천을 못 가르리.
草衣上人齎以送 초의 스님 가져와서 선물로 드리니
山房緘字尊養硯 산방에서 봉한 편지 양연(養硯) 댁에 놓였었지.
我曾眇少從老長 내 일찍이 어려서 어른들을 좇을 적에
波分一椀意眷眷 은혜로이 한잔 마셔 마음이 애틋했네.
後遊完山求不得 훗날 전주 놀러가서 구해도 얻지 못해
幾載林下留餘戀 여러 해를 임하(林下)에서 남은 미련 있었다네.
鏡釋忽投一包裹 고경(古鏡) 스님 홀연히 차 한 봉지 던져주니
圓非蔗餹餠非茜 둥글지만 엿 아니요, 떡인데도 붉지 않네.
貫之以索疊而疊 끈에다 이를 꿰어 꾸러미로 포개니
纍纍薄薄百十片 주렁주렁 달린 것이 일백 열 조각일세.
岸幘褰袖快開函 두건 벗고 소매 걷어 서둘러 함을 열자
床前散落曾所眄 상 앞에 흩어진 것 예전 본 그것일세.
石鼎撑煮新汲水 돌솥에 끓이려고 새로 물을 길어오고
立命童竪促火扇 더벅머리 아이 시켜 불 부채를 재촉했지.
百沸千沸蟹眼湧 백 번 천 번 끊고 나자 해안(蟹眼)이 솟구치고
一點二點雀舌揀 한 점 두 점 작설(雀舌)이 풀어져 보이누나.
胸膈淸爽齒根甘 막힌 가슴 뻥 뚫리고 잇뿌리가 달콤하니
知心友人恨不遍 마음 아는 벗님네가 많지 않음 안타깝다.
山谷詩送坡老歸 황산곡(黃山谷)은 차시(茶詩) 지어 동파 노인 전송하니
未聞普茶一盞餞 보림사 한잔 차로 전별했단 말 못 들었네.
鴻漸經爲瓷人沽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은 도공(陶公)이 팔았으나
未聞普茶參入撰 보림사 차를 넣어 시 지었단 말 못 들었네.
瀋肆普茶價最高 심양 시장 보이차(普洱茶)는 그 값이 가장 비싸
一封換取一疋絹 한 봉지에 비단 한 필 맞바꿔야 산다 하지.
薊北酪漿魚汁腴 계주(薊州) 북쪽 낙장(酪漿)과 기름진 어즙(魚汁)은
呼茗爲奴俱供膳 차를 일러 종을 삼고 함께 차려 권한다네.
最是海左普林寺 가장 좋긴 우리나라 전라도의 보림사니
雲脚不憂聚乳面 운각(雲脚)에 유면(乳面)이 모여듦 걱정 없네.
除煩去膩世固不可無 번열(煩熱)과 기름기 없애 세상에 꼭 필요하니
我産自足彼不羨 보림차면 충분하여 보이차가 안 부럽다.
죽로차는 앞서 「호남사종」에서 말한 보림사 죽전차(竹田茶)의 다른 이름이다. 보림사 대밭에 차가 많이 자라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게 차인 줄도 모르고 잡풀 보듯 한다고 했다. 그것을 다산이 와서 보고 절의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어 비로소 보림사 죽전차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곡우 이전의 일창일기(一槍一旗)의 여린 잎만 골라 딴 것을 구리 시루로 찌고 대소쿠리로 말려 구증구포를 거쳤다. ‘아침(芽針)’만을 골라 뭉쳐 쥐면 마치 머리카락이 엇짜인듯 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다산처럼 방아를 찧어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다. 한 점 두 점 작설이 풀어져 보인다고 한 데서, 구증구포한 일창일기 여린 찻잎을 쪄낸 후 그대로 뭉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유원이 마신 보림사의 죽로차는 대나무 발로 짠 작은 그릇에 담아 ‘우전’이란 상표까지 붙인 최고급의 떡차였다.
이유원은 젊은 시절 자하 신위의 집에서 초의가 자하에게 선물로 준 보림사 죽로차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 후 백방으로 그 차를 구했으나 다시는 마셔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고경 스님이 찾아와 차 한 봉지를 선물하였다. 둥근 떡을 실로 꿰어 꾸러미로 만들었는데, 세어 보니 떡차가 110개였다. 차를 마신 소감은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잇뿌리에 단맛이 감돌더라고 했다. 효능은 번열과 기름기를 제거해준다고 적었다.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중국의 보이차에 대해서도 자세한 언급을 남긴 바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마셔본 결과 보림사의 죽로차가 결코 중국의 고급 보이차에 못지 않은 품질을 지녔다고 단언하였다. 그래서 그 맛을 기려 후대의 증언을 위해 보림사의 죽로차를 기록으로 남긴다고 했다.
증쇄를 거듭할수록 차의 독성이 눅는다. 냉한 성질이 따습게 변한다. 향과 맛이 부드러워진다. 다산은 이러한 약리를 잘 알았다. 이러한 제다법은 확실히 약용으로 차를 음용하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위 시를 통해 이유원이 「호남사종」에서 말한 구증구포로 법제한 보림사의 죽전차, 또는 죽로차는 잎차 아닌 떡차임이 더 확실해졌다. 또 다산이 처음 제다법을 알려주었다는 보림사 죽로차를 초의가 그 방식대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초의차 또한 다산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로 이어진 떡차 제법
보림사의 구증구포 죽로차가 떡차였다는 사실은 조선의 차에 관심이 많았던 모로오까 다모쓰(諸岡 存, 1879-1946)와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 1900-1982)가 1938년 전남 나주군 다도면 불회사와 장흥 보림사 등을 직접 답사하여 조사한 결과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답사기에 수록된 불회사의 전차[磚茶] 제다방법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차를 만드는 기본은 순을 딴 뒤의 남은 잎을 채취해서 이것을 하루 안에 3,4회 찐(찐 것을 방안에 얇게 펴서 식히는 정도로 하여 찌며, 찌는 횟수가 많을수록 향기와 맛이 좋다) 것을 절구에 넣고 끈적끈적하게 충분히 찧은 뒤, 지름 아홉 푼(약 2.3cm), 두께 두 푼(약 0.5cm)이 되게 손으로 눌러 덩어리 모양으로 굳히고, 이 복판의 작은 구멍에 새끼를 꿰어서 그늘에 말리며 될 수 있는 대로 짧은 기간에 만들어 사용한다.
몇 번을 찌든 차 잎을 딴 그날 낮과 밤 안에 여러 번을 찌는데, 찌는 횟수가 많을수록 향기와 맛이 좋아진다고 언급한 사실이 흥미롭다. 또한 완전히 건조시키지 않고, 찐 것을 방안에 얇게 펴서 뜨거운 기운을 식히는 정도로만 말린다. 이렇게 여러 번 찌고 말리는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향과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 차례 찌고 말리기를 되풀이한 뒤에 비로소 절구에 넣고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찧는다. 찌는 회수를 3,4회 정도라고 했는데, 앞서 본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다산의 떡차 제조법과 한 치의 차이가 없다.
또 당시 보고서에는 보림사의 청태전(靑苔錢) 제조 방법도 보인다.
이(보림사) 부근에서는 청태전을 보통 차라고 하여, 1919년경까지 부락 사람들이 만들었으나, 그 뒤 작설차(雀舌茶)를 마시게 되면서 만들지 않는다. (중략) 가져온 날잎차는 곧장 가마에 넣고 쪄서 잎이 연하게 되면 잎을 꺼내(찻잎이 누런 빛깔을 띨 무렵) 절구에 넣고 손공이로 찧는다. 찧을 때는 떡을 만드는 것처럼 잘 찧는다. 이때 물기가 많으면 펴서 조금 말리고, 굳히기에 알맞게 되었을 무렵, 두꺼운 널빤지 위에서 내경 두 치(6cm), 두께 5리(0.15cm), 높이 1푼 6리(0.48cm) 가량의 대나무 테에 될 수 있는 대로 짜임새가 촘촘한 얇은 천(무명)을 물에 적셔서 손으로 잘 짜서 펴고, 그 안에 찧은 차를 넣고, 가볍고 평평하게 엄지 손가락으로 눌러 붙인다. 그것이 조금 굳어갈 때에 꺼내서 자리 위 또는 평평한 대바구니 위에 얹고 햇볕에 쬐어 절반쯤 말랐을 무렵에 대곶이로 복판에 구멍을 뚫는다. 잘 마른 다음 곶이를 꿰면 차가 부서지므로, 연할 때에 하나씩 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날 안에 말리도록 한다.
찐 차 잎을 절구에 찧고 말리는 과정 또한 다산의 방법과 같다. 대나무 통을 얇게 잘라 차 잎을 담을 틀을 만들고, 거기에 찧은 차를 눌러 담아 말렸다. 당시 보고서에는 50년도 더 된 청태전이 이 마을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언급도 있다. 다산 이래로 초의가 만들고 이유원이 마셨던 죽로차를 거쳐, 보림사 인근에서 생산된 청태전, 즉 떡차는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던 셈이다.
다산은 구증구포가 차의 강한 성질을 감쇄시키기 위함이라고 했고, 위 글에서는 차의 향과 맛을 더 좋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증포를 거듭하면 강한 성질이 감쇄되면서 향과 맛이 순하고 부드러워진다. 이유원은 위 시에서 차를 마시자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잇뿌리에 단맛이 감돌더라고 해서 이를 뒷받침했다.
구증구포는 여러 차례 되풀이한다는 의미이지, 꼭 숫자를 세어 아홉 번 하란 말이 아니다. 9는 만수(滿數)이므로, 여러 번의 뜻으로 흔히 쓴다. 이렇게 본다면 다산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삼증삼쇄(三蒸三曬)’로 횟수를 줄여 말한 것도 이해가 된다. 다산이 말한 구증구포는 꼭 숫자를 헤아려 아홉 번을 말한 것은 아니었고, 3회 이상 여러 차례 찌고 말리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는 의미로 보아 무리가 없겠다. 즉 다산이 만년에 횟수를 줄이는 쪽으로 견해를 수정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를 오늘날의 구증구포설처럼 교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다산이 직접 말한 증거가 나왔으니 구증구포는 마땅히 삼증삼쇄로 바뀌어야 옳다. 하지만 찌는 횟수가 몇 번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이때 구증구포는 녹차 아닌 떡차를 전제로 한 언급이 아닌가?
이제껏 다산의 떡차론과 구증구포설을 살폈다. 다산이 통상 마신 차는 잎차 아닌 떡차였고, 구증구포로 법제한 차 또한 덖음 잎차가 아닌 떡차였다. 다산이 중국에서도 쓰지 않는 구증구포의 방법을 도입한 것은 당시 조선에서 차가 약용으로 사용된 것과 관련이 깊다. 또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는 당시 조선의 식습관에 비추어 녹차는 성질이 너무 강해 위장에 강한 자극을 주고, 정기를 손상시킨다. 차의 냉한 성질을 감쇄시키고 떫은 맛을 부드럽게 하며 단맛을 강화시키는데 구증구포의 제다법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 연구자들의 과학적인 검토가 더 필요하겠다.
필자는 이글에서 다산 선생께서 마신 차가 떡차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차도 떡차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떡차는 진공 포장이나 냉장 보관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당시에, 잎차를 덖을 경우 장마철을 넘기기도 전에 차가 발효되어 맛이 변해 버리는 상황에서 나온 제다 방법이었다. 떡차가 잎차보다 맛이 더 좋아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시대가 다르고 기술이 발전하면 제다법도 바뀌는 것이 마땅하다.
연암 박지원은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과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을 말했다. 옛 것을 본받되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더라도 능히 법도에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자취를 함부로 왜곡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다산의 걸명(乞茗) 시문
다산은 명실 공히 우리 차 문화의 중흥조다. 그는 아득히 잊혀져 사라진 우리 차문화에 새 빛을 던졌다. 혜장과 초의의 제다법 또한 다산에게서 나왔다. 그렇다면 다산은 언제부터, 왜 차를 마셨을까? 이 글에서는 다산이 혜장에게 차를 청하며 보낸 걸명(乞茗) 시문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해 보기로 한다.
다산의 초기 차생활
다산은 유배 이전에도 차를 마셨다. 21세 나던 임인년(1782) 봄에 지은 「춘일체천잡시(春日棣泉雜詩)」의 앞쪽에 이런 내용이 있다.
鴉谷新茶始展旗 백아곡의 새 차가 새 잎을 막 펼치니
一包纔得里人貽 마을 사람 내게 주어 한 포 겨우 얻었네.
棣泉水品淸何似 체천의 물맛은 맑기가 어떠한가
閒就銀甁小試之 은병에 길어다가 조금 시험 해본다네.
백아곡(白鴉谷)은 경기도 광주 검단산(黔丹山) 북쪽으로, 이곳에서 작설차가 난다는 원주가 실려 있다. 당시 검단산 인근에서도 채다(採茶)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체천은 당시 다산이 살고 있던 남대문 근처 창동의 지명이다.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어렵다. 또 「미천가(尾泉歌)」의 뒷부분에도 차 마시는 일에 관한 언급이 있다.
爲試龍團治癖疾 시험 삼아 용단차(龍團茶)로 고질병을 다스리니
瑩如水精甘如蜜 해맑기 수정이요 달기는 꿀맛일세.
陸羽若來何處尋 육우가 온다하면 어디서 샘 찾을까
員嶠之東鶴嶺南 원교의 동쪽이요 학령의 남쪽이리.
이 또한 20대 서울 시절의 작품이다. 용단차(龍團茶)를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 다산이 단차(團茶), 즉 떡차를 마셨음을 알 수 있고, 약용으로 마신 것이 확인된다. 이런 시의 존재는 다산의 음다(飮茶)가 20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서울 생활에서 차 마시는 일을 언급한 몇 수의 시가 더 있지만 차의 효용에 대한 언급이나 구체적인 예찬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차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해도 당시 서울에서 차를 구해 상음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고질병을 다스린다는 언급으로 보아 당시의 음다는 떡차로 소량을 상비해 두었다가 이따금 약용으로 마시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밖에도 다산의 시문 속에는 음다 생활과 관련된 많은 언급이 보인다.
다산과 혜장의 만남과 걸명시
다산이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강진으로 유배 온 지 4년 후, 백련사에서 아암(兒菴) 혜장(惠藏, 1772-1811) 선사와 교유를 갖게 되면서 답답한 체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1801년 말에 강진으로 귀양 온 다산은 처음에 주막집 뒷방에 옹색한 거처를 정했다. 이곳을 다산은 동천여사(東泉旅舍)로 불렀다. 막상 혜장 선사와의 첫 만남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805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다산은 혜장이 대흥사에서 백련사로 건너 와 머물며 다산을 만나려고 애를 쓴다는 소문을 들었다. 다산은 어느 날 슬쩍 신분을 감추고 백련사로 놀러가 혜장과 한 나절 간 대화를 나누었다. 혜장은 그가 다산인 줄을 감쪽같이 몰랐다. 이윽고 작별하고 오는데 뒤늦게 그가 다산임을 안 혜장이 헐레벌떡 뒤쫓아 와서 말했다. “공께서는 어찌 사람을 이렇듯 속이십니까? 공은 정대부 선생이 아니십니까? 저는 밤낮으로 공을 사모해 왔는데, 공께서 어찌 차마 이렇게 하십니까?” 혜장이 막무가내로 붙드는 바람에 다산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방에서 묵어 자며 『주역』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산 앞에서 만장의 기염을 토하던 혜장은 밤중에 잠자리에서 다산이 던진 단 한 차례의 질문에 압도되어 마침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이날은 1805년 4월 17일이었다.
이후 다산과 혜장은 급격히 의기가 투합해서 서로 왕래가 잦았다. 두 사람은 수 십 수의 시를 서로 주고받았다. 혜장은 다산의 후원자 노릇을 자처하며 보은산(寶恩山) 고성암(高聲菴)의 보은산방에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오가다가 일부러 들러 함께 며칠 씩 머물다 가곤 했다. 이들은 『주역』을 공통 관심사로 삼아 토론을 거듭했다. 시를 지을 때조차 『주역』의 괘사(卦辭)를 운자로 삼았을 정도였다.
다음 시는 다산이 혜장과 처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805년 4월에 혜장에게 보낸 걸명시다. 원 제목은 「혜장상인에게 차를 청하며 부치다(寄贈惠藏上人乞茗)」이다. 최초의 걸명시다.
傳聞石廩底 듣자니 석름봉 바로 아래서
由來產佳茗 예전부터 좋은 차가 난다고 하네.
時當曬麥天 지금은 보리 익을 계절인지라
旗展亦槍挺 기(旗)도 피고 창(槍) 또한 돋아났겠네.
窮居習長齋 궁한 살림 장재(長齋)함이 습관이 되어
羶臊志已冷 누리고 비린 것은 비위가 상해.
花猪與粥雞 돼지고기 닭죽 같은 좋은 음식은
豪侈邈難竝 호사로워 함께 먹기 정말 어렵지.
秖因痃癖苦 더부룩한 체증이 아주 괴로워
時中酒未醒 이따금씩 술 취하면 못 깨어나네.
庶藉己公林 스님의 숲 속 차 도움을 받아
少充陸羽鼎 육우(陸羽)의 차 솥을 좀 채웠으면.
檀施苟去疾 보시하여 진실로 병만 나으면
奚殊津筏拯 뗏목으로 건져줌과 무에 다르리.
焙曬須如法 모름지기 찌고 말림 법대로 해야
浸漬色方瀅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으리라.
석름봉은 만덕산 백련사 서편 봉우리의 이름이다. 당시 다산은 섭생이 좋지 않았고 마음의 울결로 체증이 얹혀 고생이 심했다. 다산은 백련사 석름봉에 차나무가 많아 산 이름도 다아산(茶兒山) 또는 다산(茶山)이라 불린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혜장에게 그곳에서 나는 차를 좀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다산은 비위가 약해 기름진 음식은 소화를 못 시키고 술을 마시면 좀체 깨지도 않았다. 속이 늘 더부룩하여 불쾌했다. 다산은 혜장에게 차를 보시해서 이 묵은 체증을 쑥 내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때가 마침 햇차가 날 시기였던 것이다.
끝의 두 구절에서는 ‘배쇄(焙曬)’ 즉 불에 익혀 햇볕에 말리는 절차를 반드시 방법에 따라 해야 나중에 차를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다고 했다. 다산이 혜장에게 차를 청하면서 차를 만드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일러준 것이다. 앞서 본 여러 문헌이 한결 같이 증언하고 있는 대로 보림사의 죽로차 뿐 아니라 강진의 만불차를 구증구포의 제다법으로 처음 알려준 것이 다산이었음을 상기한다면, 혜장에게 구체적인 제다법을 알려준 것 역시 다산이었음이 분명하다. 혜장이 이전부터 차를 만들어 마셔왔을 수도 있겠지만, 혜장은 당시 차가 많이 나는 백련사로 건너와 머문 지가 얼마 되지도 않던 시점이었다.
『다산시문집』에 잇따라 실린 다음 시 또한 위 시와 같은 운자로 지은 걸명시다. 전후 사정이 재미있다. 긴 제목의 내용은 이렇다. 「혜장이 나를 위해 차를 만들어 놓고, 마침 그 문도인 색성이 내게 차를 주자 마침내 그만두고 주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하는 글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앞의 운을 쓴다(藏旣爲余製茶, 適其徒賾性有贈, 遂止不予. 聊致怨詞, 以徼卒惠. 用前韻).」
與可昔饞竹 옛날에 문여가(文與可)는 대를 탐했고
籜翁今饕茗 오늘날 탁옹(籜翁)은 차에 빠졌네.
況爾捿茶山 하물며 그대는 다산(茶山)에 사니
漫山紫箰挺 온 산에 자순(紫箰)이 돋아났으리.
弟子意雖厚 제자의 마음 씀은 저리 후한데
先生禮頗冷 선생의 예법은 매정도 해라.
百觔且不辭 백 근을 준데도 마다 않을 터
兩苞施宜竝 두 꾸러미 주는 게 뭐가 어때서.
如酒只一壺 만약에 술이 달랑 한 병뿐이면
豈得長不醒 어이해 깨지 않고 길이 취하리.
已空彦沖瓷 유언충(劉彦沖)의 찻그릇 이미 비었고
辜負彌明鼎 미명(彌明)의 돌솥도 쓸데가 없네.
四鄰多霍㿃 이웃에 설사병 걸린 이 많아
有乞將何拯 찾아오면 무엇으로 고쳐 주리오.
唯應碧澗月 오직 다만 벽간월(碧澗月)로 부응하여서
竟吐雲中瀅 구름 속 맑은 모습 토해내시게.
이때 다산의 지도로 혜장과 그 제자 색성 등이 찻잎을 따서 각자 차를 만들었던 모양이다. 제목에서 ‘혜장이 나를 위해 차를 만들어 놓고 藏旣爲余製茶’라고 했다. 다산의 요청을 받고 혜장이 일부러 찻잎을 따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혜장은 제자인 색성이 차 한 포를 다산에게 주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만든 차를 아까워하며 내놓지 않았다. 다산은 너무 야박한 것이 아니냐며 당초 약속대로 마저 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화려한 도자기 그릇이건 질박한 돌솥이건 차가 있어야 끓일 게 아니냐고 하면서, 다산은 차를 좀 넉넉하게 나눠 주어야 설사병에 걸린 이웃의 병 고치는데도 쓸 수 있을 테니, 어서 차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15구의 ‘벽간월(碧澗月)’은 혜장이 만든 차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 초의 스님의 『동다송』에 보이는 “건양과 단산은 푸른 물의 고장인데, 품제(品題)는 특별히 운간월(雲澗月)을 꼽는다네. 建陽丹山碧水鄕, 品題特尊雲澗月”라고 한 ‘운간월’과 비슷한 명칭이다.
한편 차를 보내준 색성에게는 고맙다는 뜻을 담아 따로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원제는 「색성이 차를 부쳐준 것에 감사하며[謝賾性寄茶]」이다.
藏公衆弟子 장공의 여러 명 제자 중에서
賾也最稱奇 색성이 제일로 기특하다네.
已了華嚴敎 화엄의 가르침을 이미 깨치고
兼治杜甫詩 겸하여 두보 시를 배우는구나.
草魁頗善焙 초괴(草魁)를 볶아내는 솜씨가 좋아
珍重慰孤羇 고맙게도 나그네를 위로하였네.
5구의 초괴(草魁)는 서초괴(瑞草魁)의 줄인 표현이다. 상서로운 풀 가운데서 으뜸이란 뜻이다. 차의 별칭으로 쓴다. 당나라 때 두목(杜牧)이 지은 「제다산(題茶山)」의 첫 두 구절, “산은 실로 동오 땅이 아름다운데, 차를 일러 서초괴(瑞草魁)라 부르는구나. 山實東吳秀, 茶稱瑞草魁”라 한 구절에서 따왔다. 색성이 만든 차가 품질이 좋고, 고단한 나그네에 대한 마음 씀이 도타와 고맙다고 치하한 내용이다. 당시 색성은 『화엄경』을 다 읽고 나서 다산에게 왕래하며 두시(杜詩)를 배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산의 「걸명소」
다산은 이렇게 해서 혜장과 색성 등에게서 차례로 차를 얻어 마셨다. 같은 해인 1805년 겨울에 다산은 다시 한번 혜장에게 차를 청하는 글을 보낸다. 앞서 초여름에 얻은 차가 진작에 동이 났던 것이다. 이번엔 장난스럽게 상소문의 형식을 빌었다. 이것이 유명한 「걸명소(乞茗疏)」다. 변려투의 문식(文飾)이 두드러진 글이다. 현행 『다산시문집』에는 어찌된 셈인지 빠져있다. 현재 원본의 소재가 묘연하여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다. 현재의 통용본에는 원문에 미심쩍은 곳이 적지 않다. 제목만 하더라도 「걸명소(乞茗疏) 을축동(乙丑冬) 증아암선사(贈兒菴禪師)」로 된 것과 「이아암선자걸명소(貽兒菴禪子乞茗疏) 을축동재강진(乙丑冬在康津)」 두 가지로 전한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글자나 배열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계호(洎乎)’가 ‘박호(泊乎)’로 된다든지, ‘효효(皛皛)’가 ‘정정(晶晶)’으로 바뀌거나, ‘서초지괴(瑞草之魁)’가 ‘초단지괴(草端之魁)’로 된 것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 글은 안팎으로 촘촘한 대우(對偶)를 이루고 있어, 안짝과 바깥짝의 대구가 삼엄하다. 구절의 차례가 뒤엉킨 것은 이것으로 대부분 바로잡을 수가 있다. 이에 몇 가지 통용본을 교감하여 아래와 같이 원문을 정리하고 새로 번역해 본다.
나그네는 요즘 들어 다도(茶饕) 즉 차 욕심쟁이가 된데다, 겸하여 약용(藥用)에 충당하고 있다네. 글 가운데 묘한 깨달음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세 편과 온전히 통하니, 병든 숫누에는 마침내 노동(盧仝)의 일곱 사발 차를 다 마셔 버렸다오. 비록 정기를 고갈시킨다는 기모경(棊母㷡)의 말을 잊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막힌 것을 뚫고 고질을 없앤다고 한 이찬황(李贊皇)의 벽(癖)을 얻었다 하겠소. 아침 해가 막 떠오르매 뜬 구름은 맑은 하늘에 환히 빛나고, 낮잠에서 갓 깨어나자 밝은 달빛은 푸른 냇가에 흩어진다. 잔 구슬 같은 찻가루를 날리는 눈발처럼 흩어, 산 등불에 자순(紫筍)의 향을 날리고, 숯불로 새 샘물을 끓여, 야외의 자리에서 백토(白兎)의 맛을 올린다. 꽃무늬 자기와 붉은 옥으로 만든 그릇의 번화함은 비록 노공(潞公)만 못하고, 돌솥 푸른 연기의 담박함은 한자(韓子)보다 많이 부족하다네. 해안어안(蟹眼魚眼)은 옛 사람의 즐김이 한갓 깊은데, 용단봉단(龍團鳳團)은 내부(內府)에서 귀하게 나눠줌을 이미 다했다. 게다가 몸에는 병이 있어 애오라지 차를 청하는 마음을 편다오. 들으니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비결은 단나(檀那)의 보시를 가장 무겁게 치고. 명산의 고액(膏液)은 서초(瑞草)의 으뜸인 차만한 것이 없다고 들었소. 애타게 바람을 마땅히 헤아려,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기 바라오.
旅人近作茶饕, 兼充藥餌. 書中妙辟, 全通陸羽之三篇, 病裏雄蠶, 遂竭盧仝之七椀, 雖浸精瘠氣, 不忘棊母㷡之言, 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洎乎朝華始起, 浮雲皛皛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乎碧澗, 細珠飛雪, 山燈飄紫筍之香, 活火新泉, 野席薦白兎之味,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潞公, 石鼎靑烟澹素, 庶乏於韓子. 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 龍團鳳團, 內府之珍頒已罄. 玆有采薪之疾, 聊伸乞茗之情,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 宜念渴希, 毋慳波惠.
구문의 짜임새를 좀더 효과적으로 보이기 위해 대구에 맞춰 원문을 두 줄씩 짝지어 아래 위로 배열하면 이렇게 된다.
1. 旅人近作茶饕,∥書中妙辟, 全通陸羽之三篇,∥雖浸精瘠氣, 不忘棊母㷡之言,∥
2. 兼充藥餌.∥病裏雄蠶, 遂竭盧仝之七椀.∥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1. 洎乎朝華始起, 浮雲皛皛於晴天,∥ 細珠飛雪, 山燈飄紫筍之香,∥
2. 午睡初醒, 明月離離乎碧澗.∥ 活火新泉, 野席薦白兎之味.∥
1.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潞公,∥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玆有采薪之疾,∥
2. 石鼎靑烟澹素, 庶乏於韓子.∥龍團鳳團, 內府之珍頒已罄.∥聊伸乞茗之情,∥
1.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宜念渴希,
2.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毋慳波惠.
1을 읽다가 ‘∥’표시가 있는 곳에서 아래쪽 2로 내려가 읽고, 다시 1로 올라오는 방식으로 읽으면 전체 글의 대구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얼마나 정확하고 엄격한 대구로 이루어진 글인지 한 눈에 보인다.
글의 서두에서 스스로를 다도(茶饕)라 한 것이 재미있다. 도(饕)는 고대 상상의 동물인 도철(饕餮)이다. 탐욕이 많고 흉포한 성질을 가졌다. 천하에 맛보지 않은 차가 없다고 자부했던 청나라 때 원매(袁枚)도 자신의 별호를 다도(茶饕)라 한 바 있다. 차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란 뜻이다. ‘서중묘벽(書中妙辟)’은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삼매의 경계가 육우가 『다경』에서 말한 경지와 상통한다는 뜻인 듯하다. 『대장경』 가운데 『공작왕주경(孔雀王咒經)』 1권에 『묘벽인당다라니경(妙辟印幢陀羅尼經)』이 있다. 묘벽이란 오묘한 깨달음이다.
‘병리웅잠(病裏雄蠶)’는 누에가 뽕잎을 먹고 최면기에 들어 한잠 자고 나서 다시 깨어난 상태를 말한다. 이때 누에의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잠에서 깨어난 숫누에는 욕심 사납게 다시 뽕잎을 갉아 먹는데, 여기서는 다산 자신이 마치 갓 깨어난 숫누에가 뽕잎 찾듯 차를 갈급한다는 의미로 썼다. 노동(盧仝)의 칠완(七椀)은 흔히 「칠완다가(七椀茶歌)」로 널리 알려진 「붓을 달려 맹간의가 햇차를 보내온 데 감사하다(走筆謝孟諫議寄新茶)」란 시의 내용을 두고 이른 말이다.
기모경(棊母㷡)은 당나라 때 우보궐(右補闕)의 벼슬을 한 사람이다. 차를 싫어 해 ‘척기모정(瘠氣耗精)’으로 차의 폐해를 지적하고 차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벌다음서(伐茶飮序)」란 글을 남겼다. 이찬황(李贊皇)은 본명이 이덕유(李德裕)다. 당나라 때 재상을 지냈고, 차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그는 특히 차를 끓일 때 혜산천(惠山泉) 물만을 고집해 역말을 이어 달려 혜산천의 물을 실어 날라 당시에 ‘수체(水遞)’란 말이 생겨날 만큼 차에 벽(癖)이 있단 말을 들었던 인물이다. 또 그는 촉 땅에 들어가 몽산의 떡차를 얻어 고기국에 넣고, 이튿날 열게 하여 고기 덩어리가 다 녹은 것을 보여주며 차가 지닌 소옹(消壅), 즉 체기를 내리는 효과를 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다. 기모경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다산 자신이 체기를 내리는 신통한 효과 때문에 이찬황이 그랬던 것처럼 차에 벽이 들었음을 말한 것이다.
‘세주비설(細珠飛雪)’과 ‘활화신천(活火新泉)’, `해안어안(蟹眼魚眼)’ 은 모두 소동파의 「시원전다(試院煎茶)」시에서 따왔다. 특히 ‘세주비설(細珠飛雪)’은 단차를 차맷돌에 갈아 찻가루가 눈가루처럼 흩날리는 형상을 묘사한 것이다. 다산이 당시 즐겨 마신 차가 떡차였음을 다시 한번 증언한다. ‘자순(紫筍)’과 ‘백토(白兎)’는 차의 이름이다. 자순차는 육우가 『다경』에서 이미 천하 제일의 명차로 일컬은 바 있다. 백토차는 월토차(月兎茶)를 변려문의 대우에 맞춰 색채어로 달리 표현한 것이다. 송나라 때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에 얽힌 고사도 같은 시에 나온다. 문언박은 서촉(西蜀)에서 차 달이는 법을 배워 와서 정주(定州) 땅의 홍옥(紅玉)을 쪼아 만든 호사스런 화자(花瓷)로 차를 달여 마셨다. 석정(石鼎)과 한자(韓子) 운운한 것은 앞서 걸명시에서 본 한유(韓愈)의 「석정연구시서(石鼎聯句詩序)」에서 따온 말이다. 자신이 문언박의 도자기 찻잔의 호사스러움이나 한유의 돌솥의 담백함에는 못 미치지만 차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그들에 못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정작 혜장 선사의 『아암집(兒菴集)』에는 차에 관한 언급이 많지 않다. 다산과 만난 후 그와 『주역』을 논하며 주고받은 화답시인 「삼가 동천께 곤괘 육효의 운으로 화답하며(奉和東泉坤卦六爻韻)」란 시에서 처음으로 “패엽(貝葉) 불경 광주리에 가득하거니, 찻잎을 주머니에 담아 두었지. 貝葉曾盈篋, 茶芽更貯囊”라 한 구절이 있다. 동천(東泉)은 앞서도 말했듯 당시 다산이 머물던 강진 읍내 동문 밖 우물 옆 주막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 살펴본 차를 청하는 다산의 걸명 시문을 통해, 다산이 차에 관한 전문 지식이 상당히 깊었고, 생활화된 음차 습관은 물론, 차 제조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이 있었음을 본다. 또 한 가지, 당시 차의 용도가 단순히 기호 식품이 아닌 체증과 설사 등의 치료약으로서의 쓰임이 컸음을 이들 시문들은 한결같이 증언한다.
다산이 혜장에게 보낸 걸명 시문은 훗날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일련의 걸명서(乞茗書)와 함께 우리 차 문화사의 특별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차를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던 조선의 특수한 상황이 빚어낸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다산의 걸명 시문 이래 걸명의 풍조는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갔던 듯하다. 이들 시문 속에는 선인들의 차 사랑과 풍류와 해학이 오롯이 살아 있다.
다산초당과 다산의 차생활
이 글에서는 다산초당에서 이루어진 다산의 차생활에 대해 살펴보겠다.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과 「다암시첩(茶盦詩帖)」 및 최근에 자료를 구해 본 「이산창수첩(二山唱酬帖)」에 실린 두 편의 차시 등을 중심으로 검토하겠다. 다산초당의 공간배치와 세부 구성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상세히 살핀 바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산초당의 다조와 약천
현재 『다산시문집』에 초당 정착 이후인 1811년부터 해배되던 1818년 사이의 8년 간의 시가 한 수도 남아 있지 않은 점은 이상하다. 초당 생활 이후 다산이 비로소 정신적 안정을 찾아 작업에 몰두한 것으로 볼 때, 이 시기에 시작(詩作) 또한 활발한 창작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시기 시를 묶은 책이 무슨 사정에서인지 통째로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때 지은 다산의 시는 각종 시첩의 형태로 상당수가 전해진다. 시문이 온전히 남았더라면 차생활과 관련된 직접적인 내용을 지금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문집에 누락된 자료들에 보이는 차와 관련된 시만을 간추려 읽어본다. 우선 살필 것은 「다산사경첩」이다. 다산은 다산초당의 4경으로 다조(茶竈)․약천(藥泉)․석병(石屛)․석가산(石假山) 네 가지를 꼽았다. 이 가운데 다산의 차 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다조와 약천이다.
靑石磨平赤字鐫 반반하게 청석 갈아 붉은 글자 새기니
烹茶小竈艸堂前 차 달이는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
魚喉半翕深包火 반쯤 닫은 고기 입에 불길 깊이 스미고
獸耳雙穿細出煙 짐승 두 귀 쫑긋 뚫려 가늘게 연기 나네.
松子拾來新替炭 솔방울 주워 와서 새로 숯과 교체하고
梅花拂去晩調泉 매화는 불어 없애 늦게 샘물 조절한다.
侵精瘠氣終須戒 정기를 삭게 함은 끝내 경계해야 하니
且作丹爐學做仙 단약 화로 만들어서 신선 됨을 배우리라.
4경 중 제 1경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 다조(茶竈), 즉 차 끓이는 부뚜막이다. 지정(池亭) 앞에 이것이 있다고 했으니, 초당 앞에 놓여있던 것이다. 2구에서 ‘소조(小竈)’라 한 것으로 보아 작은 크기의 청석(靑石)을 평평히 갈아 만든 화덕이었다. 여기에 붉은 글씨로 ‘다조’란 두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했다. 현재 초당 앞에는 꽤 큰 평평한 돌 하나가 놓여 이것을 다조로 설명하고 있는데, 다산의 1,2구 진술로 볼 때 어림없는 딴 물건이다.
생김새는 어떠했을까? 숯을 넣는 구멍은 물고기가 목구멍을 반쯤 열어 뻐끔대는 모양이고, 위쪽 양 옆으로 짐승의 귀처럼 삐쭉 솟은 곳에 작은 구멍이 있어 그리로 연기가 빠져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육우가 『다경』에서 그려 보인 화로와 부뚜막의 모양을 하나로 합친 모양에 가깝다. 그러니까 속은 텅 비고 숯을 넣는 구멍은 반쯤 벌린 물고기 입 모양이며, 찻주전자가 얹힐 자리에는 구멍이 뚫렸고, 양 옆 손잡이 부분이 봉긋 솟아 여기에 연기를 배출하는 작은 구멍을 뚫은 소박한 형태의 화덕이었다.
다산은 처음에 숯을 넣어 찻물을 끓이다가 불기운이 세지면 숯을 꺼내고 솔방울을 넣어 화후(火候)를 조절했다. 6구에서 매화를 불어 없앤다함은 물위에 뜬 유화(乳花)를 걷어낸다는 뜻인 듯하다. 유화는 떡차를 가루 내어 끓일 때 생기는 거품이다. 7구에서는 기모경(棊母㷡)이 「벌다음서(伐茶飮序)」에서 말한 차가 정기를 삭게 한다는 ‘침정척기(侵精瘠氣)’의 경계를 환기했다. 내친 김에 단약을 끓이는 화로를 만들어 신선술을 배울까 싶다고 말하며 시상을 맺었다.
다산의 12승(勝)을 노래한 「다암시첩」의 제 5수도 바로 이 다조를 읊은 것이다. 잇달아 읽어 본다.
壘墼小茶竈 마른 벽돌 쌓아 만든 작은 다조(茶竈)는
離火巽風形 이화(離火)와 손풍(巽風)의 형상이라네.
茶熟山僮睡 차 익을 제 산 머슴은 졸고 있는데
裊煙猶自靑 하늘하늘 연기만 홀로 푸르다.
1구에서 다조의 모양을 ‘누격(壘墼)’이라 한 것이 흥미롭다. ‘격(墼)’은 불에 굽지 않은 생벽돌이다. 이 말 대로라면 다산의 다조는 벽돌을 포개 쌓아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앞서 본 시에서 청석을 평평히 갈아 붉은 글자를 새겼다는 언급과 겹쳐 보면, 아래쪽은 벽돌을 포개 쌓고 위쪽 덮개 부분은 청석을 갈아 평평하게 만들어 회반죽으로 빈틈을 메운 것이다. 아래쪽 숯을 넣는 구멍은 물고기가 입 벌린 모양으로 내고, 위에는 양 옆에 연기 나가는 구멍 두 개를 짐승 귀처럼 봉긋하게 뚫은 형태였다.
2구는 다조에 뚫린 구멍의 형상에 대한 설명이다. 이화(離火)와 손풍(巽風)은 모두 『주역』의 괘상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육우(陸羽)는 『다경』의 「로(爐)」항목에서 구리쇠로 만든 세발솥의 한쪽 발에 ‘감상손하리우중(坎上巽下離于中)’이란 글을 새겼다고 했는데, 그 의미는 “위에는 물, 아래는 바람, 가운데는 불”을 둔다는 의미였다. ‘리(離)’는 『주역』 8괘(離)의 하나로 두 양(陽)의 한 가운데 음(陰)이 있어 모든 사물이 잘 통과하는 형상이고, ‘손(巽)’은 위로 두 양(陽)이 있고 맨 아래 음(陰)이 있는 형태로 사물을 잘 받아들이는 덕을 상징한다. 결국 2구의 ‘이화손풍형(離火巽風形)’이란 불을 잘 빨아들이고 바람을 잘 들게 하는 형태를 갖춘 풍로를 말한다.
이는 위 「다조」 시에서 물고기 목구멍 같고 짐승의 쫑긋한 두 귀 같다는 표현의 다른 설명이다. 이로 보아 다산이 다조를 만들 때 육우의 『다경』을 십분 참고하여 아래쪽 숯 넣는 구멍을 뚫고 위쪽의 두 손잡이 부분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쫑긋한 구멍으로 대체하여 책 속의 설명에 가깝게 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다산이 다조의 위치를 지정(池亭)의 앞이라고 특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다조는 그때그때 들어 위치를 옮길 수 있는 이동식이 아니라, 바닥에 장치된 고정식이었던 듯하다. 현재 다산 초당 앞에 놓인 바위는 다산 당시의 다조와는 애초에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다탁으로는 쓸 수가 있겠다.
다산 4경 중 두 번째로 꼽은 것이 약천(藥泉)이다. 차를 끓이려면 차에 못지않게 물이 중요하다. 이 약천에 대해 다산은 “약천은 지정(池亭)의 서북쪽 모서리에 있다. 처음에는 그저 웅덩이였는데, 내가 이를 파자 맑은 샘물이 돌 가운데로부터 솟아났다. 藥泉在池亭西北隅, 始唯沮洳. 余鑿之, 淸泉自石中迸出.”고 적었다.
玉井無泥只刮沙 옥우물 뻘은 없고 다만 모래 깔려 있어
一瓢㪺取爽餐霞 한 바가지 떠 마시면 찬하(餐霞)인 듯 상쾌하다.
初尋石裏承漿穴 처음에 돌 틈에서 승장혈(承漿穴)을 찾았더니
遂作山中煉藥家 마침내 산 속의 약 달이는 집 되었네.
弱柳蔭蹊斜汎葉 여린 버들 길을 덮어 빗긴 잎이 물에 뜨고
小桃當頂倒開花 이마 닿는 어린 도화 거꾸로 꽃이 폈다.
消痰破癖功堪錄 담 삭히고 고질 낫움 그 공 기록할만 하니
餘事兼宜碧磵茶 틈 날 때 벽간차(碧澗茶)를 끓이기에 알맞다오.
첫 수 「다조」의 7구에서는 ‘침정척기(侵精瘠氣)’를 경계한다 해놓고, 「약천(藥泉)」의 7구 같은 자리에서는 ‘소담파벽(消痰破癖)’ 즉 가래를 삭혀 주고 고질을 낫게 하는 차의 효능을 말했다. 이 두 대목은 다산이 「걸명소(乞茗疏)」에서 “비록 정기를 고갈시킨다는 기모경(棊母㷡)의 말을 잊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막힌 것을 뚫고 고질을 없앤다고 한 이찬황(李贊皇)의 벽(癖)을 얻었다 하겠소. 雖浸精瘠氣, 不忘棊母㷡之言, 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라 한 대목의 부연 설명인 셈이다. 8구에서는 이 맑고 시원한 약샘물로 일의 여가에 벽간차를 끓여 마시겠다고 했다.
「다암시첩」 제 4수도 바로 이 약샘물을 노래했다.
牆根一眼泉 담장 아래 구멍 하나 샘물 솟는데
石髓千年液 돌의 정기 천년 지나 액체가 됐네.
鹿飮有新痕 사슴 마셔 새롭게 난 흔적이 있고
虎跑無古跡 범이 후빈 옛 자취는 찾을 수 없네.
약샘을 석수영액(石髓靈液)에 견주었다. 사슴이 밤마다 와서 마시고 가서 샘물 가엔 사슴 발자국이 있고, 예전 범이 와서 긁어 팠던 묵은 자취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석수(石髓)의 약천이라 영물들도 알아본다는 뜻을 행간에 담았다.
새로 찾은 다산의 차시
초당 정착 이후 다산은 혜장 등에게 손 벌리지 않고도 차를 자급자족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당에 정착한 지 6년 째 되던 1814년 3월 4일에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1839)와 주고받은 「이산창수첩(二山唱酬帖)」에 다산의 차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차시 두 수가 남아 있다.
雨後新茶始展旗 곡우 지나 새 차가 비로소 기(旗)를 펴자
茶篝茶碾漸修治 차 바구니 차 맷돌을 조금씩 정돈한다.
東方自古無茶稅 동방엔 예로부터 다세(茶稅)가 없었거니
不怕前村犬吠時 앞마을에 개 짖어도 염려하지 않는도다.
따로 붙은 제목은 없다. 곡우가 지나서야 햇차가 도르르 말려있던 새잎을 편다. 일창일기(一槍一旗)는 우전차(雨前茶)의 대명사다. 2구는 갓 펴진 새잎을 보고, 찻잎을 따서 담을 차 바구니와, 차 끓일 때 떡차를 가루 낼 차 맷돌을 꺼내 정돈하는 정황 설명이다. 차 맷돌을 말한 것에서 다산이 주로 마신 차가 떡차였음을 거듭 확인한다. 다산은 혜장에게 준 「제장상인병풍(題藏上人屛風)」에서도 “볕드는 창가 책상에서 독루향(篤耨香)을 사르고, 소룡단(小龍團) 떡차를 다린다. 燒篤耨香, 點小龍團.”고 적은 바 있다. 3,4구는 차를 딴다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차 세금을 매기는 법이 없어, 앞 마을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아전이 세금을 독촉할까봐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앞서 「각다고」에서 중국 역대의 각다 정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것과 맥락이 서로 통한다.
다산의 초당 생활이 6년째로 접어들던 안정기에 지어진 시다. 이 시가 중요한 것은 다산은 이 무렵 이미 직접 차를 따서 만들어 마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차 바구니와 차 맷돌을 갖춰두고 채다에서 제다까지의 모든 공정을 자체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제다의 경험과 품다(品茶)의 누적에 바탕하여 다음과 같은 시도 지었다. 역시 「이산창화첩」에 실린 문산 이재의에게 차운하여 준 작품이다. 제목은 「삼연 김창흡의 만덕사 시에 차운하여(次韻三淵萬德寺之作)」이다.
犖确坡頭略彴橋 흰 자갈 언덕 머리 외나무 성근 다리
茶山東不百弓遙 다산의 동쪽과는 백궁(百弓)도 채 못 되네.
山含雨力舒春樹 빗기운 머금은 산 봄 나무는 잎을 펴고
海浸雲根作晩潮 구름 뿌리 바다 젖어 저녁 조수 일어난다.
癡欲品茶追陸羽 바보같이 품다(品茶)하여 육우(陸羽)를 따르고저
淸誰畵藕配參廖 뉘 맑게 연꽃 그려 참료(參廖)와 짝 지을꼬.
年年花事禪樓上 해마다 선루(禪樓) 위에 꽃 소식 들려오면
內馬金鞍憶早朝 금안장에 내마(內馬) 타던 조정 시절 떠오르네.
만덕사와 다산 동암의 거리가 가까워 백궁(百弓), 즉 백 걸음도 안 된다고 했다. 봄비에 젖은 새잎은 고사리 손을 펴고, 구름 자옥한 바다에는 저녁 조수가 밀려든다. 5구에서 다산은 바보같이 품다(品茶)로 다성(茶聖) 육우의 경지를 따라보려고 한다고 했다. 안될 줄 알면서도 하려하니 바보 같다고 했지만, 차를 따서 덖고 떡차를 만들어 끓여 마시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의 경지를 은연중에 육우에 견준 것이다. 꽃 소식을 따라 멀리서 찾아온 벗을 만나니 예전 조정에 있을 적의 화려한 봄날이 더 그립다는 말로 시를 맺었다.
다산의 소실 정씨 모녀와 자족적 차생활
이 시기 다산의 차 생활에서 간과하지 못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당시 다산초당에는 강진군 동면 석교리(石橋里) 출신의 과수댁 정씨(鄭氏)가 머물며 살림을 맡아했다. 다산은 정씨와의 사이에 홍임(弘任)이란 딸까지 두었다. 강진 지역에서는 다산이 처음 머물던 강진 주막집 노파의 과부가 된 딸이 그녀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간 다산의 소실인 홍임 모녀에 관한 이야기는 선생의 덕에 누가 될까 하여 함구해 왔으나 굳이 그럴 일이 아니다. 초당 생활 초기에는 혜장이 보내준 백련사 승려가 초당에 머물며 다산의 먹거리 마련과 살림살이를 도왔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면서 강학과 연찬이 본격화되고 살림의 규모도 커짐에 따라 살림살이를 전담할 일손이 없을 수 없었다. 다산과 십 여명에 달하는 제자들이 온 종일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식사 문제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처음 정씨를 맞아들인 것은 이러한 필요에서였던 듯하다.
홍임 모녀는 다산이 해배되어 상경하면서 함께 따라 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모녀는 다산의 집에서 소박을 맞아 다시 강진의 다산초당으로 내려와 머물게 된다. 이 여인의 기구한 운명과 소박 맞아 쫓겨온 심정, 그리고 애타게 낭군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실명씨의 시 「남당사(南塘詞)」 16수가 현재 전한다. 짐작컨대 다산의 아내 윤씨와의 갈등이 원인이었던 듯하다.
「남당사」에서 서울에서 쫓겨온 홍임이가 “아비를 부르고 울먹이며 어째서 돌아오시지 않느냐고 묻고[喚爺啼問盍歸歟]” 있는 것으로 보아, 다산이 정씨를 소실로 들인 것은 다산 초당으로 옮긴 두어 해 뒤의 일로 여겨진다. 위의 각주에서 홍임 모녀에 관한 편지를 증언했던 윤재찬 옹은 임형택 교수의 논문에서 다시 이 같은 증언을 남겼다.
다산선생이 해배되어 돌아가신 뒤에까지 홍임이 모는 초당에 남아 있으면서 해마다 차 잎이 새로 돋아나면 따서 정성스럽게 차를 제조해서 경기도 마현으로(강진의 경주인(京主人) 편을 이용해서) 보내드리곤 했다 한다. 다산 선생이 그 차를 받아 보시고 지은 시구가 전해온다면서 윤옹은 읊었다.
雁斷魚沈千里外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리 밖에
每年消息一封茶 매년 오는 소식 한 봉지 차로구나.
위 각주에서 언급한 윤옹이 벽에서 수습했다는 다산의 친필 편지는 유감스럽게도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고, 현재는 소재조차 알 길이 없다. 모녀를 그리는 다산의 참담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단 두 구절로 남은 싯귀 속에 절절하다. 이 시는 또한 우리에게 초당 시절 다산의 차 생활의 일단을 희미하게 증언하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자료다.
다산은 처음 혜장과 색성 스님 등에게 걸명시를 지어 보내며 차를 얻어마셨다. 하지만 다산초당 정착 이후 다산은 제자들을 시키거나 직접 차를 따서 차를 만들어 마셨다. 추사처럼 지속적으로 걸명 시문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초의는 초당 정착 이듬해인 1809년에 다산에게 처음 인사를 올린 이후 사제의 인연을 맺고 지속적으로 왕래했다. 초의가 다산에게서 제다법을 배운 것도 이 때가 틀림없다.
이러한 자족적 차생활의 일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바로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이다. 이글은 다산이 해배되어 떠나면서 제자들과 차로 맺은 계의 절목을 적은 글이다. 워낙에 널리 알려진 내용이어서 상세한 인용은 피한다. 내용을 보면, 곡우날 어린 차를 따서 잎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든다고 했다. 다산이 이른 차로 잎차를 만들고, 늦차로 떡차를 만들어 마신 일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주로 마신 것은 떡차였지만, 소량이나마 잎차도 만들어 마셨다. 또 찻잎 따는 일은 각자 일정량을 맡아 하되,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는 귤동 마을 어린이의 놉을 얻어 차를 따게 했다. 이런 방식은 다산이 초당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대로 행해졌을 것이다. 즉 다산의 해배에 즈음하여 새삼스럽게 다신계를 결성한 것이 아니라, 상호 결속과 유대를 다지면서, 그전부터 해오던 채다(採茶)와 제다(製茶)를 계속하여, 안정적으로 차를 공급받기 위한 방편이 바로 다신계였던 것이다.
이는 앞서 본대로 다산이 마재로 찾아온 제자에게 준 친필 글에서, 올라올 때 이른 차를 따서 말렸느냐고 묻고 있는데서도 거듭 확인된다. 이미 다산의 제자들은 차를 직접 따서 말리고 떡차로 만드는 전 공정을 충분히 소화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1828년 5월 5일에 지은 「단오일차운육방옹초하한거팔수(端午日次韻陸放翁初夏閑居八首)」시의 제 6수 4구에 “남녘 선비 정 깊어 매번 차를 부쳐오네[南士情深每寄茶]”라 한 것으로 보아 다신계의 약속은 그 후로도 오래도록 변함없이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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