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12

醉月 2009. 7. 10. 09:06

이상의 오감도(烏瞰圖)
       - 詩제1호 -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
       兒孩와그러케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조선중앙일보」(1934년7월24일)

 

「장미 병들다」라는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를 60명의 대학생들에게 읽히고 그 시가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를 물었다.

어느 학생은 뱀에 유혹된 이브를 그린 것이라고 했고, 또어느 학생은 처녀성의 상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답했다.

종교적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해답들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이었지만,

단지 원예과 학생 하나만이  벌레먹은 장미를 읊은 시 라고 대답했는 것이다.

이것은 캐나다의 문예평론가 <노드롭 프라이>의 방송강연을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야기이다.


  시를 우유(寓喩)로 착각하는 오류는 이상(李箱)과 같이 이른바 난해한 시를 읽으려고 하는 경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감도(烏瞰圖)》 詩 제1호 를 놓고 지금까지 많은 평자(評者)들이 소모전을 계속해 온 것도 바로 

13이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 것인가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3인의 아이 를예수의 최후 만찬과 결부시키기도 하고,

혹은 조선 13道의 숫자와 관련지어 풀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외없이 그러한 논자들은  13 이란 숫자의 우유적 의미(寓喩的意味)만 알면《오감도(烏瞰圖)》 詩 제1호 는 단숨에 풀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상(李箱)의 시는 시가 아니라 난수표(亂數表)로, 그리고 비평가
는 비평가가 아니라 암호해독의 판단관으로 대우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누구든지《오감도(烏瞰圖)》  詩 제1호 를 읽었을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13이라는 숫자보다는 시의 통념을 뒤엎는 여러 가지 양식의 일탈성(逸脫性), 그리고 시적 언어의 코드 위반(違反) 같은 것들이다.


  제목부터가  오감도 이다. 조감도(鳥瞰圖)를 오감도라고 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어째서 시의 제목에 건축 용어가 등장하고,

또 어째서 第一號, 第二號와 같은 비정적(非情的) 숫자 번호판이 달려 있는가 하는점이다.

그래서  13 이라는 숫자도 그같은 일련의 낯선 시적 조사법의 하나로 인식된다.

 

조사법만이 아니라 시 전체가 건축 설계도처럼 직선이나 사각도형을 이루고 있다.

띄어쓰기를 하지않았기 때문에 그 도형성은 더욱 강조되고, 모든 문자들은 매스게임을 하듯 기하학적으로 정렬되어 있다.

숫자적이며 기하학적이고, 획일적이며 반복적인 그 도형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근대성(모더니티)이나 도시성 같은 인상일 것이다.


「여러 아이가 길을 달린다」와「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사이에는 또 어떤 의미, 어떤 느낌,

그리고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대두할 것이다. 전자(前者)가 언어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라면,

후자(後者)는 숫자적이고 개념적이다.  길/도로 ,  달리다/질주하다 의 차이는 토착어 對 한자어,

구어(口語) 對 문어(文語)만의 차이가 아니라 그 내포적인 뜻에서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냥  길 이라고 하면 시골의 오솔길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로 라고 하면 최소한 직선으로 뻗친 근대적이고 인공적인 도시의 길을 연상하게 된다. 

인생은 나그네 길 이라는 전통적 비유에 익숙해 왔던 사람들은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 라는 진술에서

그와는 색다른 길의 은유적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저 감동적인 영화  포레스토 검프 와 같은 끝없는 질주와 맞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라는 말은 그냥 뛰다 달리다 라는 말과 다르다. 스피드, 관성, 맹목성과 같은 근대문명의 메커니즘과 쉽게 손을 잡게 되는 말이다.

원래 도로라는 말 자체에 질주라는 공시적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모든 도로는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달리도록 명령지어져 있다.

길 위에서 멈춰 서 있다는 것은 남자의 경우라면 부랑자요, 여성인 경우에는 창녀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도로의 질주라는 말에 속도를 더해주는 것이 바로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에서 시작하여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로

반복 나열되어 있는 시행들이다. 무서움이라는 말 때문에 질주란 말은 도주와 도피의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다시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라는 말이 등장함으로써

아이들을 달리게 하는 무서움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질주는 쫓기고 쫓는 끝없는 무한 질주라는 것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는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로 바뀌게 된다.

즉 무서운 아이가 곧 무서워하는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상(李箱)의 시 속에서는  무서운 아이 와  무서워하는 아이 의 그차이와 대립함이 말소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만이 아니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라는 처음의 진술 역시 뒤에 오면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라고 뒤집힌다.

골목길이나 뚫린 길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질주하는 이 도로 상황은 이상(李箱) 이후의 시대에 유행했던  부조리 라고 불려지는 그 세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무서워하는 아이가 곧 무서운 아이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사르트르의  타자(他者) 이론 과 같은 것이 된다.

즉, 내가 타자(他者)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시선 속에 타자(他者)를 구속하고 정복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타자(他者)가나를 볼 때에는 나의 존재가 그의 시선 속에서 징발된다.

 

거미가 먹이를 녹여 먹듯이 남을 본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자신의 의식 속에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동시에 보임을 당한다. 즉, 우리는 무서워하는 아이이며 동시에 무서운 아이의 역할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것이다.

 험실에서 실험관을 관찰하고 있듯 이상(李箱)은 부조리한 인간의 상황을 모순 그대로 관찰하고 기술한다.

그것은 전30편으로 된 연작시의 제목을《오감도(烏瞰圖)》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원래 조감도(鳥瞰圖) 라는 말은 새가 높은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것과 같이 그려놓은 도형(圖形)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李箱)은 바로 그 새  鳥 에서 획 하나를 떼내어 까마귀  烏 로 바꿔《오감도(烏瞰圖)》라고 한 것이다.

아이를  아해(兒孩) 라고 한자말로 고쳐놓은 것처럼 굳은 살이 박혀버린 그 한자말에 새로운 비유적 이미지가 살아나게 한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눈앞에는 겨울날 고목나무 가지에 앉아 마을전체를 굽어보고 있는 까마귀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음산하고 불길하며 흉칙한, 그리고 황량한 불모의 풍경이 그 까마귀 밑에 펼쳐진다.

그 중의 하나가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이들 의 모습인것이다.

 

   詩

 

 장미 병들다 란 시를 있는 뜻 그대로  벌레먹은 장미 라고 대답한 원예과 학생의 말이 의외로  블레이크 의 시에 접근해 있었던 것처럼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 역시 마찬가지이다. 

13인의 아이 를예수의 최후 만찬에 모인 사도 혹은 조선 13道에 비겨 도민 대항 체육대회 같이 만들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읽으면 자연히 서로를 무서워하면서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도시의 우리들 모습이 보이게 될것이다.

따라서  13 이라는 숫자 역시 단순한 우유(寓喩)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하나로 인식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숫자가 지닌 절대적이고 비정적(非情的) 이미지,

기하학적 도형 즉  文明의 鳥瞰圖 를 만들어내는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 시의 구조상, 

十 의 정수에서 일단 끝나고 한 行을 비운 다음  十一 로 새로 시작한 것, 그리고  도 란 조사를  가 로 바꾸어 은 것 등에서

이상(李箱)이 시도한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 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까마귀와 조응 관계를 이룬  13 이란 숫자의 불길   불안한 이미지 등에서 우리는《오감도(烏瞰圖)》에 내재된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것이다.

 는 정답을 감추어 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鍼)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神經網)

그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穴)을 찾는 작업이다.
  이상(李箱)에 의해서 한국시는 처음으로 표현(表現)이 아니라 관찰(觀察)이 되었고,

느낌의 방식이 아니라 인식(認識)의 양식(樣式)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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