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풍류의 향기_백호 임제

醉月 2009. 7. 13. 16:35

거문고와 시로 일세 풍미, 충청감사 아들에 말오줌 먹여

타고난 풍류가객… 별을 찌를 기백으로 시대 앞서가

▲ 황진이 묘에서 제사지낸 일로 유생들의 비난을 받았던 백호 임제 묘. 나주시 다시면 신걸산 기슭에 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이 시조는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묘를 찾아가 읊은 것이다. 그때 임제는 35세.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는 길이었는데, 개성을 지나다가 평소에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풍류 여걸 황진이가 겨우 석 달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사들고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주고 이렇게 아쉬운 심정을 읊었던 것이다.

명색이 사대부 출신으로 벼슬하는 자가 천한 기생의 무덤에 찾아가 곡을 하며 제사를 지내고 시까지 읊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임제에게는 벼슬아치와 선비들로부터 숱한 비난이 쏟아졌고, 심지어는 이 때문에 파면까지 당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그 알량한 양반의 체면을 형편없이 구겨버린 괘씸죄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쫓겨난 것이 아니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예조정랑을 지냈다.

하지만 일세의 풍류남아 백호 임제의 일생에서 그까짓 벼슬이 얼마나 높았고 무엇을 지냈는가는 전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칼과 거문고의 조율사, 멋과 기백의 풍류남아

칼과 거문고의 조율사, 멋과 기백의 풍류 기남아, 시대를 앞서간 우국지사…. 이는 모두 당대의 풍류객 백호 임제에게 따라다닌 비범한 수식어였다.

백호 임제는 조선 명종 4년(1549)에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에서 임진(林晉)과 남원 윤씨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 외에 풍강·겸재·소치·벽산 등이 있었지만 백호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임제의 가문은 문무 양반에서 뛰어난 인재를 많이 배출한 명문이었다. 그는 장성한 뒤 세상을 뜰 때까지 칼과 거문고를 늘 지니고 다녔다. 그 자신 뒷날 이렇게 읊기도 했다.

 

아름다운 거문고와 보검이면 행장은 족하도다
바둑판과 찻잔은 세상사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

칼집에는 별을 찌르는 명검이 있고
꿈속에는 귀신이 곡할 시가 있노라.

 

임제의 기백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선이 굵고 색깔이 분명했으니 그는 타고난 풍류가객이었다.

그는 6세부터 장가들던 16세까지 김흠(金欽)이란 학자에게서 글을 배웠고, 16세에 대사헌 김만균(金萬均)의 딸인 경주 김씨와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었는데, 숙종 때의 대학자요 정치가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바로 임제의 셋째딸이 낳은 외손자이다.

그의 스승은 대곡(大谷) 성운(成運). 백호가 집을 떠나 충북 보은군 속리산 기슭 종곡마을로 대곡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대곡선생은 연산군 3년(1497)에 태어나 30세에 과거를 보아 합격했지만 형이 을사사화에 걸려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종곡마을로 낙향해 은둔생활을 하며 시와 거문고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후학들은 박절하게 대하지 않아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남명(南冥) 조식(曺植),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약관의 백호가 대곡선생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72세였다.

그런데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학문과 인격을 닦는다고는 하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호방한 기백과 풍류의 기질은 어쩔 수 없었다.

백호 임제가 당시 속리산에서 약간 덜 떨어진 감사의 아들에게 말의 오줌을 신선들이 마시는 불로주라고 속여서 먹인 일화는 우리 풍류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다.

 

신선이 마신 불로주로 변한 말 오줌

▲ 백호 임제의 풍류와 문학 정신이 서린 영모정.

어느 날 백호가 방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고 읽는데 저 멀리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충청도 감사의 아들이 한 패거리를 이끌고 속리산 법주사 구경을 하러 온 것이었다.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한 백호가 읽던 책을 덮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지름길로 법주사를 찾아가 노승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서 바둑을 두라고 하고, 동자승에게는 푸른 옷을 입혀 그 곁에서 시중들도록 시켰다.

그리고 다른 스님 한 명에게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이른 뒤에 자신은 산중턱에서 옥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감사의 아들이 법주사에 거의 다 이르렀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들려오자 마중 나온 스님에게 물었다.

“저 피리소리는 어디서 누가 부는 것인고? 제법 그럴 듯하구먼 그래!”

“아, 예. 이 산에는 옛날부터 이따금 신선이 찾아와 저렇게 피리를 불면서 놀다가 갑니다만 아무도 그 신선을 본 적은 없습니다요.”

“그래? 그렇다면 내 오늘 저 신선을 꼭 한번 만나보고야 말리라!”

감사의 아들이 큰소리치고는 피리소리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더니 과연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시중들던 동자가 신선들에게 아뢰었다.

“저기 속객(俗客)이 오고 있사옵니다.”

“어허, 기특하구나! 그렇다면 이 불로주를 속객에게 주고 속히 마시도록 하라.”

감사의 아들은 신선이 내린 불로주라는 말에 너무나 감격하여 단숨에 다 마셨는데, 그것은 사실은 백호가 미리 준비한 말 오줌이었으니 맛이 괴상할 수밖에.

감사의 아들이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것을 몰래 숨어서 보고 있던 백호가 동자승을 시켜 시 한 수를 전해주게 했다. 감사의 아들이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붉은 띠를 두른 미소년이여
진세(塵世) 간에서 기특한 남아로다
한 병 술로 서로 전송하며 헤어지니
속리산 구름이 만리로구나.

 

속리산 기슭 종곡마을에서 대곡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백호는 늙은 스승을 하직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고향 회진으로 돌아온 백호는 벼슬길에 뜻이 없어 신걸산에 오르기도 하고 영산강변을 거닐기도 하고 벗들과 영모정(永慕亭)에서 술 마시고 시 읊고 거문고 뜯으며 풍류 속에서 즐거운 한 시절을 보냈다.

영모정은 백호의 중부 임복과 부친 임진 형제가 명종 11년(1556)에 선친인 귀래정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로서 백호는 자주 벗들과 이곳에서 어울렸다.

백호가 풍류를 즐기던 영모정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90번지에 있으며, 현재 지방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영모정 바로 아래에는 백호의 조부 귀래정의 유허비와 백호의 기념비가 서 있다.

백호는 그렇게 지내다가 또다시 훌쩍 방랑길에 올랐다. 속리산으로 입산하기 전인 10대에 이어 두 번째 방랑길이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홀로 산길을 가는데 시골 선비들이 화전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마침 출출하던 백호가 그냥 지나칠 리 없어서 대뜸 끼어들며 말했다.

“지나가던 길손인데 요기나 좀 하고 갑시다.”

그러자 일행 중 한 명이 대꾸했다.

“먹을 건 많지만 글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줄 건 없소. 시를 지을 줄 아오?”

“저는 글이 짧아서 시는 지을 줄 모릅니다만, 육담으로 대신해도 좋겠습니까?”

그래서 선비 하나가 한문으로 받아 적을 터이니 입으로 불러보라고 했다. 백호가 읊었다.

 

개울가의 돌을 고여 놓고 솥으로 판을 씌워
흰 가루와 맑은 기름으로 두견화전을 지지네
쌍젓가락으로 그것을 꺼내 먹으니
입안에 향기가 가득하고
한 해 봄빛이 뱃속에 전해지는구나. -

 

이것을 한문자로 맞춰보니 매우 훌륭한 칠언시가 되는 것이었다. 좌중이 모두 놀라 혀를 내두르며 그제야 백호가 비범한 시재를 지닌 풍류객이란 사실을 알고 잘 대접했다고 한다.

 

춘정 아우른 피리 가락에 평양 명기 일지매 꺾이다
정감어린 시어로 시속풍정 노래한 천재적 풍류가객

남북을 오르내리며 방랑하던 백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29세 되던 선조 10년에 비로소 과거를 보아 문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고산찰방으로 짧은 벼슬살이의 첫발을 내디뎠다.

양사언(楊士彦)·허봉·차천로(車天輅) 같은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듬해 봄에는 북도평사로 부임하여 묘향산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찾아가 만났는데, 소설 <원생몽유록(元生夢遊綠)>을 지은 것도 바로 그해였다.

백호는 풍류남아로서 시만 잘 읊은 것이 아니라 <원생몽유록>을 비롯하여 <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등 세 편의 한문소설도 남겼다. 특히 <수성지>는 그의 후학으로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이 '천지 간의 대작'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선조 16년(1583) 35세 때 평안도 도사를 지냈지만,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치 않아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고루한 선비들의 평판에 기죽을 백호가 아니었다.

예부터 남남북녀라고 했고, 그 가운데서도 평양은 색향으로 이름난 고장이 아니던가. 평양에서 백호는 감칠맛 나고 시정 넘치는 풍류 일화를 많이 남겼다.

특히 평양 명기 일지매(一枝梅)와 한우(寒雨)와의 로맨스가 대표적이다. 백호가 평안도 도사 직을 마치고 한우와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자 취흥에 시흥이 겹친 백호가 이렇게 시조 한 수를 읊었다.

 

북창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

 

그러자 한우가 망설이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풍류장부와 풍류기생의 정염이 이와 같이 상통했으니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일지매와의 사연은 평양 근무 시절이 아니라 백호가 서울로 돌아온 뒤의 일이다. 일지매는 재색을 겸비한 당시 평양 제일의 명기였다. 그러나 절개 굳고 자부심 강해 웬만한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벼슬이 종2품 당상관인 평안감사의 유혹과 위협에도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서울의 백호에게 절친한 벗인 평안감사가 편지를 보냈는데 안부 끝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나도 일지매를 수청 들게 하는데 실패했으니 자네가 와서 한 번 꺾어보지 않겠는가?'

백호가 편지를 받고 며칠 뒤 남루를 걸친 초라한 행색의 생선장수로 변장하여 평양에 이르렀다. 드높은 명성과는 달리 일지매의 집은 검소한 초가였다.

백호가 싱싱한 숭어를 사라고 외치자 마침 사군자를 치고 있던 일지매가 생선장수치고는 낭랑한 목소리에 마음이 끌려 계집종을 시켜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런데 싱싱한 생선이라는 것이 한 물간 숭어 다섯 마리였다.

"물이 간 숭어를 싱싱하다니,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일지매의 핀잔에 백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에야 물이 좋았지요. 그런데 저녁이 되니 한 물 갔구먼요. 아, 사람도 늙으면 쪼그라드는데 그러지 말고 말아주오."

그런 수작 끝에 떼를 쓰다시피 하여 그날 밤을 일지매네 문간방에서 보내게 되었다. 휘영청 달 밝은 5월. 춘정을 이기지 못한 일지매가 거문고를 뜯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간방 쪽에서 피리소리가 울려와 화음을 이루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깊은 밤중에 누가 저토록 절묘한 가락의 피리를 부는 것일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일지매가 일어나 피리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찾아가 보니 거기에는 아까 그 생선장수만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일지매가 돌아서며 다시 한 수 읊었다.

 

창가에는 복희씨 적처럼 달이 밝구나.

그러자 문간방 쪽에서 이렇게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루에는 태고 적 바람이 맑도다.

신기하게 생각한 일지매가 다시 한 구 읊었다.
비단 이불을 그 누구와 더불어 덮을꼬.

그러자 여전히 문간방에서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나그네 베갯머리 한 쪽이 비었네.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일지매는 주저하지 않고 자는 척하는 백호에게 쫓아가 사정없이 잡아 일으켜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帝國도 아닌 나라에 태어났다 죽는데 무엇이 슬프냐?"

공리공론과 부귀공명을 백안시하고 솔직담백하게 짧지만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천재적 풍류가객 백호 임제, 그는 정감어린 시어로만 시속풍정을 노래했을 뿐 아니라 남다른 우국충정으로 비분강개하는 시도 많이 남겼다.

 

▲ 백호 임제 기념비, 나주시 다시면 화진리 염모정 아래에 세워져 있다.

백호는 별 볼일 없는 벼슬길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도 아니요, 흔해빠진 선비들처럼 음풍농월로 허송세월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나라와 겨레를 걱정한 고매한 인품의 우국지사였으며, 탁월한 문장가였는가 하면, 진정으로 풍류를 사랑한 멋쟁이였다. 평안도 도사에 이어 예조정랑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온 백호는 얼마 뒤 사직하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 팔도강산을 주유천하하기 시작했다.

벼슬살이를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된 동서당쟁이 점점 심해가는 꼴을 보고 벼슬길에 완전히 정이 떨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세의 기남자, 때로는 다정다감한 시인, 때로는 천군만마를 호령할 만한 기백의 지사, 헛된 명리를 멀리하고 저자와 산수 간을 넘나들던 백호 임제는 선조 20년(1587) 음력 8월21일에 39세 한창나이로 짧지만 굵직했던 한 삶을 마치고 저세상으로 갔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백호는 임종하기 전에 구슬피 우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황제를 칭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우리나라만 예부터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처럼 누추한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죽는다고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

일세의 풍류가객 백호 임제의 묘는 영산강 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중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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