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정민_차문화사_03

醉月 2009. 7. 8. 04:18

「다신전(茶神傳)」의 의미

「다신전」은 초의의 저작이 아니다. 「다신전」은 초의가 『만보전서』란 책에서 차 관련 부분을 따로 베껴 묶은 것이다. 초의는 왜 「다신전」을 베꼈을까? 「다신전」의 내용이 실려 있던 『만보전서』는 어떤 책인가? 초의는 하필이면 정통 다서도 아닌, 백과사전 속에 실려 있는 차관련 기록을 옮겨 적고, 여기에 거창하게 「다신전」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이글에서 알아볼 참이다.

「다신전」은 왜 베꼈나?

무자년(1828) 장마철에 방장산 칠불아원(七佛亞院)으로 스승을 따라 갔을 때 베껴 써서 내려 왔다. 다시 정서하려 했으나 병 때문에 마무리 짓지 못했다. 수홍(修洪) 사미가 이때 시자방(侍者房)에 있었다. 다도(茶道)를 알고자 베껴 쓰려 하였으나, 그 또한 병으로 마치지 못했다. 그래서 참선의 여가에 억지로 붓을 들어 끝을 보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것이 어찌 군자만을 위한 말이겠는가? 총림(叢林)에도 간혹 조주(趙州)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지만 모두들 다도는 모르므로 베껴 써서 보이니 두려워할 만하다. 경인년(1830) 2월 휴암병선(休菴病禪)은 빈창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삼가 쓴다.
戊子雨際, 隨師於方丈山七佛亞院, 謄抄下來. 更欲正書, 而因病未果. 修洪沙彌, 時在侍者房. 欲知茶道, 正抄, 亦病未終. 故禪餘强命管城子成終. 有始有終, 何獨君子爲之. 叢林或有趙州風, 而盡不知茶道. 故抄示可畏 庚寅中春, 休菴病禪, 虛窓擁爐, 謹書.

이 글은 초의가 「다신전」 필사를 마치고 1830년 2월에 쓴 글이다. 그는 2년 전인 1828년에 지리산 옥부대(玉浮臺) 칠불선원의 아자방(亞字房)에 스승을 모시고 갔다. 당시 그곳에 비치되어 있던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실린 명나라 때 장원(張源)이 지은 「다록(茶錄)」을 채록해서 정리해둔 내용을 베껴 써온 일이 있다. 절집에도 간혹 조주(趙州) 끽다(喫茶)의 유풍이 있지만, 절의 승려들이 대부분 다도를 아예 모르므로 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를 베낀다고 했다.
당시 초의는 칠불선원의 승려들이 끓여 내온 차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동다송」의 협주에 자세하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4,50리나 군집하여 자란다. 우리나라 차밭 중에 넓기로는 이보다 더 한 것이 없다. 골짝에는 옥부대(玉浮臺)가 있고, 옥부대 아래로 칠불선원이 있다. 좌선하는 승려들은 늘 뒤늦게 쇤 잎을 따서 햇볕에 말린다. 하지만 나물국 삶듯 솥에서 끓여, 짙고 탁하고 빛깔이 붉으며, 맛은 몹시 쓰고 떫다. 참으로 이른 바 ‘천하의 좋은 차가 속된 솜씨에 흔히 망가지고 만다.’는 것이다.
智異山花開洞, 茶樹羅生四五十里. 東國茶田之廣, 料無過此者. 洞有玉浮臺, 臺下有七佛禪院. 坐禪者常晩取老葉晒乾. 然柴煮鼎如烹菜羹, 濃濁色赤, 味甚苦澁. 政所云 : ‘天下好茶, 多爲俗手所壞.’

칠불선원의 승려들이 끓여내 온 차는 차가 아니라 숫제 나물국이었다. 일창일기(一槍一旗)의 여린 잎이라도 시원찮을텐데 다 쇤 잎을 따서, 찌고 덖어 말리는 것도 아니라 그저 햇볕에 말린 후 아예 국 끓이듯 푹 삶아 내오니, 맛은 입에 댈 수도 없으리만큼 쓰고 떫었고, 빛깔은 붉고 진하고 탁했다. 차잎 채취 시기와 가공 방법, 차 끓이는 방식까지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초의가 『동다송』 중 위 인용의 본문에서 “무엇으로 너희 옥부대 위에서 좌선하는 무리들을 가르칠꼬. 何以敎汝玉浮臺上坐禪衆”라고 안타까워하며, 다도를 아는 이가 하나 없는 현실을 개탄한 것을 보면 당시 절집의 음다문화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거의 황무지나 다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오십리나 되는 드넓은 차밭을 갖춘 쌍계사 승려들의 차문화가 이 지경일진대, 여타 다른 곳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초의가 머물던 대둔사에도 세상에서 말하는 대둔 다맥이란 것이 이어져 왔다면 수홍 사미가 다도를 배우겠다고 「다신전」을 등초하는 일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뒤에 따로 살피겠지만 제자인 범해(梵海) 각안(覺岸) 스님의 「차약설(茶藥說)」같은 글을 보면 초의 이후로도 대둔사에서조차 차 마시는 일이 일상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차에 대한 승려들의 무지를 통탄하던 초의는 이것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내친 김에 자신도 한 벌 베껴 써 왔다. 초의는 위 글을 썼던 1830년 가을에 자신이 만든 단차를 서울로 가져가서 ‘전다박사(煎茶博士)’의 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이미 육우의 『다경』이나 그밖에 여러 문헌도 섭렵했을 터이니, 새삼 『만보전서』에 실린 요점 정리가 요긴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베껴왔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정리가 실용에 맞게 항목화 되어 있어, 대둔사의 승려들에게도 다도 학습의 교재로 적절하겠다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다도를 알고 싶어 하는 수홍 사미에게 내버려 두었던 「다신전」을 베껴 쓰게 하고, 수홍이 아파 필사가 여의치 않자, 아예 자신이 붓을 들어 한 벌 등초를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막상 「다신전」은 전체 내용이래야 십여 쪽 22항목 1,400여 자에 지나지 않는, 한 나절이면 베껴 쓰고도 남을 만큼의 적은 분량이다.
결국 초의에게 「다신전」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보다, 차를 모르는 무지한 승려들에게 다도를 보급하여, 제대로 된 차를 만들게 하기 위한 교육용 교재였던 셈이다. 또한 그간 자신이 실전으로 쌓은 제다와 음다의 노하우를 정리하고, 불합리하거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을 조절하는데도 이 책은 중요한 지침이 되었을 것이다.

「다신전」과 초의의 제다법

「다신전」의 저본이 된 초의가 칠불선원의 책장에서 본 『만보전서』는 어떤 책인가? 명말청초에 중국에서 간행된 백과사전이다. 명말 강남 지역의 문인과 출판업자들이 민간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지식정보를 편집 분류해서 엮은 것이다. 『만보전서』는 당시 조선에 불어 닥친 웰빙 열풍에 편승하여 아주 인기 있던 책이었다. 원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가진 사람에게서 책을 빌려다가 자신에게 꼭 요긴한 내용만 간추려서 축약본을 많이 만들었다. 『만보촬요(萬寶撮要)』란 제목의 책도 있다. 『만보전서』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만 베껴 정리했다는 뜻이다. 민간의 수요도 만만찮아 우리말로 풀이한 17책 분량의 『만보전서언해』까지 나왔다. 70년대 우리나라 어느 가정에나 한권쯤은 있게 마련이었던 가정생활백과와 같은 종류의 책이 바로 『만보전서』였다.
그러고 보면 『만보전서』는 그리 귀한 책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초의 같은 전문가가 어째서 이런 수준의 책자를 베껴 썼을까? 초의의 차 이론 수준이 고작 이런 정도였단 말인가? 이미 말했듯 「다신전」은 초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차에 무지한 승려들의 교육용 교재를 염두에 둔 초사(抄寫)였다. 여기에는 『만보전서』에 수록된 차 관련 내용이 실용 중심으로 항목화 되어 있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육우의 『다경』처럼 관념적인 내용이나 불필요한 군더더기도 없었다. 기술도 현학적이지 않고 내용은 이해가 쉬웠다. 무엇보다 육우가 『다경』에서 설명한 송대의 차는 당시 실제 마시던 차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제법이나 음다 환경에 대한 설명 또한 실제와 달랐다. 그런데 『만보전서』의 내용은 당시의 음다풍과 차이가 없는 실제 적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초의는 『만보전서』를 초사하였고, 이는 그간 자신이 적용해 온 제다법을 한번 점검해보고 개선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신전」에 기록된 내용을 초의의 제다법과 음다법으로 보아도 괜찮을까? 그렇지는 않다. 우선 초의가 만든 차는 구증구포의 떡차 또는 단차였다. 크기도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었다. 추사의 편지를 보면 초의가 산차도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극히 소량이었다. 하지만 「다신전」에는 구증구포의 떡차와 관계된 내용은 없고, 제다나 음다의 내용 모두 떡차 아닌 산차를 전제로 한 것이다.
「다신전」의 7번째 항목인 「탕용노눈(湯用老嫩)」을 보자.

채군모(蔡君謨)는 탕(湯)에 여린 것을 쓰고 쇤 것은 쓰지 않았다. 대개 옛 사람이 만든 차는 만들면 반드시 절구질 하고, 절구질 하면 반드시 갈며, 간 것은 꼭 체질하여, 차가 티끌이나 가루처럼 날리기 때문이다. 이때 약제를 섞어 찍어서 용봉단을 만든다. 끓인 것을 보면 다신(茶神)이 바로 뜨는데, 이는 여린 것을 쓰고 쇤 것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만든 차는 체질하거나 맷돌에 갈지 않아 온전히 원래의 형체를 갖추고 있다. 이것을 끓이는 것은 모름지기 물이 순숙(純熟) 해야만 원신(元神)이 비로소 펴 나온다. 그런 까닭에 ‘끓이는 것이 모름지기 오비(五沸)는 되어야 차가 세 가지 기이함을 아뢴다’고 말하는 것이다.
蔡君謨湯用嫩而不用老. 蓋因古人製茶, 造則必碾, 碾則必磨, 磨則必羅. 則茶爲飄塵飛粉矣. 于是和劑, 印作龍鳳團, 則見湯而茶神便浮. 此用嫩而不用老也. 今時製茶, 不假羅磨, 全具元體. 茶湯須純熟, 元神始發也. 故曰‘湯須五沸, 茶奏三奇.’

끝부분에서 “끓이는 것이 모름지기 오비(五沸)는 되어야 차가 세 가지 기이함을 아뢴다.湯須五沸, 茶奏三奇”는 말을 인용했다. 순숙(純熟)한 물에 차를 끓인다고 했는데, 6번째 항목 「탕변(湯辨)」을 보면 순숙한 쇤 물이란 물이 완전히 끓어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김이 곧장 치솟는 상태의 물을 가리킨다. 예전 단차를 끓일 때의 물 상태와 산차를 끓일 때의 물 상태가 같지 않음을 설명한 대목이다. 9번째 항목 「투다(投茶)」에도 처음부터 물과 함께 끓이지 않고 끓인 물에 차를 넣는 여러 방법을 다루었다.
이렇게 보면 구증구포 단차인 초의차와 「다신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포법(泡法)은 서로 맞지 않는다. 「다신전」에서 제시한 포법을 초의의 포법으로 동일시한 결과, 오늘날 초의차를 엽차 형태의 산차로 보는 견해가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문헌 기록상에 보이는 초의차의 제법이나 실제로 행한 포법과 「다신전」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좀더 꼼꼼한 점검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서는 초의차의 실체를 논하면서 꼼꼼히 점검하겠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의는 「다신전」을 보기 전에 이미 차에 대해 일가견을 지녔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칠불선원에서 「다신전」을 베껴 오면서 차의 이론적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얻었다. 이후 그는 「다신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채다(採茶)에서 포법(泡法)에 이르는 내용을 꼼꼼히 점검하며 실제에 적용해 보았던 듯하다. 첫 번째 항목인 「채다(採茶)」에는 차 따는 시기를 곡우 전 닷새가 으뜸이고, 곡우 지난 닷새가 그 다음이며, 그 다음 닷새가 또 그 다음이라고 적혀 있는데, 「동다송」 제 55, 56구의 주석에 이 내용을 소개한 뒤, “우리나라 차에다 이를 시험해 보니, 곡우를 전후해서는 너무 일렀다. 마땅히 입하 전후로 해야 알맞은 때가 된다”고 적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적용의 예이다.
초의가 떡차 외에도 산차, 즉 잎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다신전」을 읽은 이후의 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초의차에 관한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후로도 초의차의 주종은 여전히 떡차였던 것은 분명하다.

다신(茶神)의 정체

한편 초의가 이 책을 베낀 후 제목을 「다신전(茶神傳)」으로 고쳐 붙인 사실이 흥미롭다. 다신(茶神), 즉 차의 신에 대한 전기(傳記)란 뜻이다. 차를 의인화, 신격화 하여 그 일대기를 정리한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초의는 ‘다신이란 무엇인가?’가 이 책의 주제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셈이다. 정작 그 내용은 차를 따서 만들고, 보관하는 방법. 차 끓이고 차 마실 때 유의사항, 물의 선택과 차 마시는 도구 등을 23개 항목으로 정리한데 지나지 않는다. 이 절차와 유의사항을 고려하여 제대로 된 도구를 써서 차를 마신다면 ‘다신(茶神)’과 만나게 되리라는 뜻이다. 『만보전서』에서 「다경채요」 부분을 숙독한 후, 다도(茶道)를 다신(茶神)과 만나는 과정과 절차로 이해하고, 전체 책의 키워드를 ‘다신(茶神)’이란 두 글자로 압축해 낸 초의의 눈매가 맵다.
다신(茶神)이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그 해답은 「다신전」과 『동다송』 속에 반복적으로 나온다. 차 마시는 일은 차와 물의 조화에서 이루어진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찻잎을 제 때에 따서 법대로 볶아, 제대로 된 차를 만드는 것이 선결과제다. 여기에는 차의 감별이나 보관도 포함된다. 그 다음은 물이다. 좋은 물이 아니고는 차 맛을 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불과 함께 있는 물이다. 즉 물을 끓이되 차의 성질이 극대화되도록 알맞게 끓여야 한다. 여기서 차 끓이기에 좋은 물을 선택하고 물을 끓이는 방법에 대한 터득이 요구된다. 차와 물이 만나는 것이 포법(泡法)이다. 좋은 물이 알맞게 끓었을 때 좋은 차를 적당량 넣어야 한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 어긋나도 다신(茶神)과 만날 수 없다.
다도(茶道)란 무엇인가? 차와 물과 불이 최상의 조합으로 만나 다신(茶神)을 불러내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의 경지다.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일체의 과정과 절차를 익히는 것이다. 「다신전」에서 다신과 관련된 논의를 간추려 살펴 보자. 먼저 「품천(品泉)」이다.

차는 물의 신(神)이고, 물은 차의 체(體)다. 진수(眞水)가 아니고는 그 신(神)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차(精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엿보지 못한다.
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非眞水, 莫顯其神, 非精茶, 莫窺其體.

육체 안에 정신이 깃든다. 차가 정신이라면 물은 육체다. 차를 뜨거운 물에 넣어 차의 진액을 우려내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좋은 물이 아니면 다신(茶神)은 나타나지 않는다. 차가 제 맛을 낼 수 없다는 뜻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과 같다. 물이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법제한 차가 아니면 물맛을 알 수가 없다. 이 둘의 절묘한 결합,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통해서만 다신(茶神)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화후(火候)」다.

문화(文火)가 과하면 물의 성질이 부드럽다. 부드러우면 물은 차에게 항복하고 만다. 무화(武火)가 승하면 불의 성질이 매섭다. 매서우면 차가 물에 통제를 받는다. 모두 중화(中和)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차 끓이는 사람의 요지(要旨)가 아니다.
過於文, 則水性柔, 柔則水爲茶降. 過於武, 則火性烈. 烈則茶爲水制. 皆不足於中和, 非烹家要旨也.

문무(文武)의 화후(火候)를 조절하는 법을 논한 대목이다. 문화와 무화는 물과 불의 힘이 어느 한쪽으로 쏠릴 때 생긴다. 불기운이 약한 문화에 차를 넣으면 물에서 차는 제 성질을 부리며 신(神)을 내놓지 않는다. 무화는 불의 기세가 세므로 차는 꼼짝도 못하고 물에 휘둘린다. 다신(茶神)은 차와 물의 세력 균형이 중화의 상태를 이룰 때 드러난다. 문화도 안 되고 무화도 안 된다. 그 중간을 찾아야 한다. 다시 「포법(泡法)」이다.

물 끓이기가 알맞게 이루어지면 일어나는 물을 떠서 먼저 다호(茶壺) 가운데 조금만 붓는다. 탕으로 냉기를 제거하고 따라 낸 뒤에 찻잎을 넣는다. 많고 적고를 잘 가늠해야하니 중정(中正)을 잃으면 안 된다. 차 쪽이 무거우면 맛이 쓰고 향이 가라앉는다. 물 쪽이 많으면 색깔이 말갛고 맛이 엷다. 두 차례 우린 뒤에는 또 찬물로 씻어내서 차호를 차고 깨끗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의 향기를 감쇄시킨다. 다관(茶罐)이 뜨거우면 다신(茶神)이 건강치 않고, 차호가 맑으면 물의 성질이 마땅히 살아난다. 조금 기다려 차와 물이 중화를 이룬 뒤에 나눠 따라 마신다. 따르는 것은 너무 빠르면 안 되고, 마시는 것은 너무 늦으면 안 된다. 빠르면 다신(茶神)이 미처 나오지 않았고, 더디면 묘한 향기가 먼저 사라져버린다.
探湯純熟, 便取起, 先注少許壺中, 祛湯冷氣, 傾出然後, 投茶葉. 多寡宜酌, 不可過中失正. 茶重則味苦香沉, 水勝則色淸味寡. 兩壺後, 又用冷水蕩滌, 使壺凉潔. 不則減茶香矣. 礶熱則茶神不健, 壺淸則水性當靈. 稍候茶水冲和然後, 泠釃布飮, 釃不宜早, 飮不宜遲. 早則茶神未發, 遲則妙馥先消.

결국 차를 끓이는 것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정(中正)과 중화(中和)의 때를 얻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다도는 진수(眞水)와 정차(精茶)를 얻고, 문무의 화후를 알맞게 조절하여, 물과 차의 양이 조화를 이루고 온도를 잘 맞춰서 찻잎에서 다신(茶神)을 건강하게 추출해내는 과정을 다룬다.
이것은 인간의 삶 속에 비추어 보더라도 참으로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정신과 육체의 조화 상태를 유지하고, 문무를 겸비하며, 때의 선후를 잘 판단해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알맞게 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적인 삶을 가꾸는 최상의 비결이 아닐 것인가? 세상이 나를 알아준다 해도, 내가 명성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면 물은 좋은데 차가 나쁜 것이다. 내가 미처 준비되지 않았는데 세상이 나를 부르거나, 내가 준비되었을 때 세상이 나를 받아들일 태세가 되지 않아 서로 어긋나는 것은 문무의 화후가 조화를 잃은 것이다. 물도 좋고 차도 좋고, 화후도 조화를 얻었다. 하지만 내가 과욕을 부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상황을 너무 낙관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기도 한다. 차와 물이 중화를 얻지 못한 것이다. 「동다송」 제 55구에서 62구까지는 바로 다신을 드러내는 과정과 효능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吸盡瀼瀼淸夜露 송송 맑은 밤 이슬을 죄다 빨아들인 잎에
三昧手中上奇芬 삼매(三昧) 솜씨 거치니 기이한 향 올라온다.
中有玄微妙難顯 그 가운데 현미(玄微)함은 드러내기 어려워서
眞精莫敎體神分 참된 정기 체(體)와 신(神)을 나누든 못하리라.
體神雖全猶恐過中正 체와 신이 온전해도 중정(中正) 잃음 염려되니
中正不過健靈倂 중정이란 건(健)과 령(靈)이 나란함에 불과하네.
一傾玉花風生腋 한번 옥화(玉花) 기울이자 겨드랑이 바람 일고
身輕已涉上淸境 어느새 몸 가벼워 상청경(上淸境)을 노니누나.

좋은 차는 체와 신을 온전히 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중정(中正)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 적정한 양의 차잎을 알맞은 상태로 우려내어 다신(茶神)이 최대로 발현된 상태가 중정이다. 중정을 초의는 건(健)과 령(靈)이 나란한 상태로 설명했다. 체건신령(體健神靈)이요 차건수령(茶健水靈)의 상태다. 초의는 「동다송」 제 59구의 평에서 이를 이렇게 종합했다.

채취함에 묘를 다하고, 만들 때 정성을 다하며, 물은 진수(眞水)를 얻고, 우려낼 때 중화를 얻는다.

체와 신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건과 령이 나란해진다. 여기에 이르면 다도는 끝이 난다.
採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與神相和, 健與靈相倂, 至此而茶道盡.

간결하게 다도의 정신을 압축 설명한 부분이다. 초의의 차정신이 바로 이 구절 속에 집약되어 있다.
논의를 정리한다. 초의의 「다신전」은 초의의 저작이 아니다. 다른 책의 내용을 베껴 적은 것일 뿐이다. 이것을 초의의 저술 목록에 넣는 것은 어찌 보면 초의 자신이 민망해할 노릇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초의는 책 제목을 심상하게 『다경채요(茶經採要)』란 원래 책제에서 취하지 않고, 일견 엉뚱해 보이는 「다신전(茶神傳)」으로 붙였다. 기호 식품에 불과한 차에 인격성을 부여한 그 발상이 우선 놀랍고, 다도의 핵심이 바로 다신(茶神)의 획득에 있음을 간파한 그 혜안이 놀랍다. 다신의 획득은 오직 중정(中正)과 중화(中和)를 통해서만 가능하니, 인간 삶의 제 양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가 「다신전」을 통해 깨달은 다도의 정신은 그대로 「동다송」으로 발전되어, 초의차 사상의 얼개를 이루는 기본 정신으로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