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龍雲의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
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난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약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모르는 외국의 문학 독자가 아무 선입견 없이 「님의 침묵」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틀림없이 아름다운 연시(戀詩)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남성이 아니라 님을 향한 한 여인의 시시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사포의 서정시를 연상하게 될느지 모른다.
그러나 만해가 불교의 승려이며 기미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님의 침묵」을 사랑의 시로서 읽으려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연시 같으면서도 속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했던 사군가(思君歌)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결과로 님은 님이 아니라 조국을 가리킨 것이며, 침묵은 이별이 아니라 그 조국을 잃은 식민지 상황을 의미한 것이라는 모범답안을 썼다. 그래서「아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님의 침묵」은 기미 독립운동의 좌절을 노래한 삼일절 노래가 되어버린다.
그런가 하면 또 만해의 님은 님이 아니라 니르바나의 마음을 현상화한 부처님이며,
그 침묵은 깨달음을 향한 끝없는 구도(求道)의 길을 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시를 증도가(證道歌)의 하나로 바꿔버린다.
만해의님은 수많은 비평서 속에서 이렇게 속(俗)과 성(聖)의 양극을 오가는 시계추가 된다.
그러나 정말「님의 침묵」은 기미독립선언문이나 혹은 불교 유신론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야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해서 만해 자신이 직접 대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집「님의 침묵」의 첫머리에 실린「군말」이라는서시(序詩)이다.
만해는 그 글에서 자기가 시의 키워드로 삼은 님 이란 말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인 바로「님만 님이 아니라 기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는 구절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구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만아니라」의 그 조사용법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님을 조국 또는 부처님으로 풀이해온 사람들은「님만 님이 아니라 」를「만」자를 빼고
그냥「님은 님이 아니라 」로 읽어온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님의 침묵」은 연시적(戀詩的) 요소가 전연 배제된 애국시 또는 종교시의 이데올로기로서만 남게 된다.
하지만 만해는 분명히「군말」에서「님은 님이 아니라」라고 하지 않고「님만 님이 아니라」라고 읊고 있다.
그가 말하는 님 속에는 일상적인 님[戀人]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만」이라는 토씨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영어의 구문형식으로 대치해 보면 보다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해의 님 은「not A but B」가 아니라,「not only A but B」로 A와 B는 배제적 관계가 아니라 포함적 관계다.
엄격하게 말해서「군말」에서 나오는 님 의 정의는 그야말로 만해 자신만의 정의가 아니라 한국말의 고전적 정의라고 하는 것이 옳다.
「님」이라는 한국말의 원형적 의미는 황진이의「정든 님」의 그 에로스적 사랑만이 아니라 형님, 어머님과 손님,
선생님이라고 할 때의 그 에필리아적 사랑 그리고 햇님 달님의 자연과 초월적인 존재의 하느님에 이르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모든 대상과 관련된 것이다. 마음 속으로「기리는 것」이면 모두다「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님을 어느 한정된 대상에 국한시키려 하는 태도는 한국의 전통적인 말뜻은 물론 만해의 그 정의에서도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용운의「님」은 한국말 그대로 모든 영역을 횡단하고 수용하는 열려진 의미로서의 님 이라는 것을 우리는「군말」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석가의 님이 종교적 층위에 속하는 것이라면 칸트의 님은 사상적 층위에, 장미화의 님은 자연에,
그리고 마시니의 님은 정치적 층위에 각기 위치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이렇게「님」이란 말을 한가지 층위에 국한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이 종교, 사상, 정치, 자연의 모든 영역을 횡단하고 넘나드는 메타 언어였기 때문에 그 말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정녕 궁금하게 여겨야할 것은「님」이란 말의 대상보다는「기리운 것」이라는 그 사투리의 말뜻이다.
그것이 민족이든 중생이든 이성(異性)이든「기리워」하면 모두 다 님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도 님이 아닌 것이다. (「너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그것은 너의 그림자니라.」)
사람들은「기리움」을 간단히「그리움」의 사투리라고 풀이한다.
그렇게 아무일 없이 표준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이라면 만해는 시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세 살때부터 사전이 아니라 삶을 통해 학습한 그 체험의 말은 시로써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기에 그는 독립운동가요,
승려에서 그치지 않고 시를 써야만 했던 것이다.「님의 침묵」에서 님과 동격을 이루는 그「기리움」은 사랑, 그리움, 찬미, 존경, 연민, 아쉬움 등 가지각색의 감정과 관념의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뭐냐. 만해가 애써 찾아서 갈고 닦아낸 님 이라는 그 귀중한 한국말 열려져 있는 말,
모듬 계층과 그 영역을 횡단하는 말, 어느 대상에 가 붙든 그것을 끝없이 새롭게 변형시키고 심화시키는 말,
우리를 목마르게 하는 말, 침묵 속에서 노래를,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고 타다 남은 재를 다시 기름이 되게 하는 기적의 말
그 입체적인 시의 말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망치로 두들겨 펴서 납작하게 만들어 놓았는가.
자유롭고 아름다운 한국말의 그 님 을 정치와 종교의 울 안에 가두어 가축처럼 길들이려 했는가.
「군말」에서 불교도인 만해는 연꽃 대신 장미화나 길잃은 양(羊)과 같은 기독교적 상징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민족운동가인 그가 충무공의 이름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통일한 마시니의 이름을 거명(擧名)하고 있다.
예수도 부처도 산신령도 한국에 오면 예수님 부처님 산신령님이 되듯이, 만해의 님 은 세계의 모든 것을 싸버릴만큼 크고 넓기 때문이다.
님의 뜻보다는 아무래도 그「님」이 누구인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군말」의 맨 마지막 시행을 정독(精讀)하면 될 것이다.「군말」의 구조는 석가, 칸트, 마시니로 시작하는「그들의 님」에서「너희들에게 도 님이 있더냐」의「너희들의 님」,
그리고「나는 해저문 벌판에 」로 끝맺음하고 있는「나」의 님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리워서 이 시(詩)를 쓴다」의 마지막 대목에서
만해는 나의 님이 누구인지 명시(明示)하고 있다. 만해가 기리워하고 있는 대상은「돌아갈 길을 잃은 어린 양」이다.
그리고 그 기리운 것들은 그에게 시를 쓰게 한다. 그에게 예불을 하게 하는 님이 있고 독립선언문을 읽게 하는 님 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시를 쓰게 하는 또하나의 님 이 있었던 것이다.
늑대에 잡혀먹히는 양(羊)이 아니다. 길 잃은 어린 양들―미로 위에 서있는 어린 양들[無垢性]은 시를 갈망하는 존재―자기자신까지를 포함한 세계의 독자들인 것이다.
언제나 미로는 시를 요구하고, 시는 또한 미로를 필요로 한다. 한국 고유의 님 이란 말리 있었기에 만해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목소리,
불교 승려로서의 목소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의 목소리를 한데 묶는 화성법을 일힐 수 있었다.
이 화성(和聲)을 단성(單聲)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미로의 어린 양들의 이름으로 단죄(斷罪)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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