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07

醉月 2009. 6. 14. 15:46

李陸史「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
      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1939년 8월)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李陸史의 그 유명한 청포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고장」은 일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공간적요소이고,「칠월」은 일정한 계절을 한정하는 시간적 요소이다.

그리고 청포도는 그 시간과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특정한 사물(object)이다.
  그러니까 청포도의 시작은「내 고장/칠월/청포도」의 의미 단위로 시간-공간-사물의 세 꼭지점을 지닌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삼각구도의 모태 속에서 여러가지 의미와이미지가 탄생된다.

청포도를 읽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삼각형의 변화를 추적해 가는 언어의 위상기하학이라 할 수 있다.

 

  청포도의 모양을 묘사한 다음 연을 보면 그의미가 더욱 확실해 진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에서 금세 눈에 띄는 것은「전설」과「하늘」,

그리고「주저리주저리」와「알알이」의 대구(對句)일 것이다.

「주저리주저리」는 포도송이의 선조성(線條性)과「전설」의 지속적(持續的) 시간을 수식하고 있는 말이다.

포도는 줄줄이 열리는 그 연속성 때문에 예로부터 대(代)를 이어가는 다산성(多産性)의 상징이 되어 왔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처녀들이 포도를 먹는 것을 망측하게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알알이」라는 말은「주저리」의 반복어와 대조를 이루는 말로

파랗고 투명하고 무한한 구형의 하늘을 압축해 놓은 공간성을 묘사한 것이다.

내 고장 칠월로 시작된 청포도는 어느덧 전설의 무궁한 시간과하늘의 무한한 공간 속에 용해된「우주의 포도」로 심화되어 있다.
  그 하늘의 꼭지점이 다시 바다로 변하고 전설의 옛 시간이 약속의 새 시간으로 뻗어간 것이 3연째의 시구들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이다.


  자연 그대로의 층위로 제시되었던 청포도의 삼각형이 우주와 일체화한 삼각형으로 심화되고 그것이 3 4연에 오면 인간의 층위,

즉 사회와 역사의 층위로 가 삼각형의 구도가 바뀌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삼각형에서청포도가 있었던 꼭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나」자신이다.

멀리 떨어져 있던 하늘과 아득한 전설이 청포도로 들어와 익어가는 것처럼,

먼 바다에서 어렴풋한 약속을 한 청포입은 그 손님이 찾아옴으로써 「나」의 계절은 익어가는 것이다.


  이와같은 삼각구조를 통해서 유추해 보면 지금까지 청포 입은 손님이 누구냐로 논란을 빚었던 일들이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청포(靑袍)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푸른 도포로 조선조 때 4품에서 6품의 관원들이 입던 관복 이라고 적혀 있다.

그 사전적인 뜻풀이가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평자들은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많은 답안들을 만들었다.

심지어 그 중의 한 답안에는 「내 고장 칠월을 양력으로 치면 8월이 되니까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고

바다에서 온 청포 입은 손님은 우리에게 광복을 가져다 준 미군 병사들」이라고 한 어느 국문학자의「예언설」까지 있다.
  하늘과 전설이 청포도 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처럼 청포 입은 손님은 내게로 오는 것이다.

그것을 우선 음운적 층위에서 보면「청포」는「청포도」와 음이 같다. 글자 하나가 틀릴뿐인 것이다.

그리고 색채 이미지 역시 같은 청색 계열이다.


  이 시의 전체 기조색이 청색인 것이다.

하늘도 바다도 전설도 모두가 청포도와 같은 푸른 색조이므로 그 손님의 옷이 청포라는 것은 조금도 부자연스러울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청색은 흰 돛이나 마지막의 은쟁반,그리고 모시수건 같은 백색 계열과 대응하는 중요한 색채적 이미지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음성이나 영상으로 보면 왜 하필 청포인지 금세 납득이 간다.

다만 소리나 영상의 감각적 기능과 어울리게 되는 관념(이미지)의 부분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관념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의 구조를 결정하는 삼각형의 꼭지점들의 변화를 보면 된다.

마지막 연(聯)에 등장하는 삼각형의구조를 앞의 것과 비교하는 청포 입은 사람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저절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에서 우리는「보는 포도」,

「상상하는 포도」가 마지막에는「따먹는 포도」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1의 삼각형은 내고장 칠월의 청포도이고, 제2의 삼각형의 하늘과 전설로서의 우주적 청포도, 그리고 제3의 삼각형의 따먹는 청포도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의 마지막 시행을 놓고 생각해 보자.

공간의 꼭지점은「마을→하늘→바다」에서「식탁→은쟁반」으로 응축되었다.

시간은 아득한 옛날의 전설에서「마련해 두렴」으로 기다리고 예비하는 근(近)미래의 시간으로 수렴되었다.

그것은 이미 열리고 익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먹는 것을 예비하는 종결의 시간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대상물의 꼭지점이 청포도 하나에서 그것을 먹는 나와 손님까지 셋이다.

최후 만찬의 식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는 그것이  나의 피와 살 이라고 했다.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곧 예수와 그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관념적인 메시지가 신체성(身體性)을 갖고 살과 피로 화(化)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식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포도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나와 손님이 하나의 신체성(身體性)을 획득한「우리」로서 일체화한다.

  육사(陸史)는 그의 시『황혼』에서도 외로운 수녀(修女), 수인(囚人),

그리고 아프리카의 흑인들이나 아라비아의 대상(隊商)들처럼 한 번도 보지 못한 지구 끝의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황혼의 골방을 몽상했다.
  청포도를 먹는다는 것은 곧 하늘의 공간과 전설의 시간을 먹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제1의 자연삼각형, 제2의 우주삼각형, 그리고 제3의 인간(사회, 역사)의 그 삼각형이 오버랩될 때 그의 시적 행위는 종결된다.

그것이 육사(陸史)가「우리의 식탁」이라고 부르고 있는, 바로 모든 것이 일체화하는 그 종결의 장소이다.


  『황혼』에 있어서의 골방처럼 은쟁반의 작고 둥근,

그러나 눈부신 빛의 금속 위에 육사(陸史)는 인간과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로 담았다. 아니다.

마지막 시행들이「   좋으련」,「   마련해 두렴」의 원망(願望) 종지형으로 끝나 있듯이 모든 것을 하나로 담으려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란, 그리고 삶과 인간의 역사란 청포도를 함께 먹기 위해 마련하는「우리의 식탁」,

그리고 그것이 한층 더 응축된 은쟁반을 예비해 두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몽상의 끝에 있는 것은언제나 진솔하고 정갈한 다공질(多孔質)의 섬유, 그 모시수건이 아니겠는가.


「 군 말 」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 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 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刊 1926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