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06

醉月 2009. 6. 10. 09:52

      金光燮「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시집「겨울날」(창작과비평사刊 1975년)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은 오염되어가는 지상의 문명을 고발한「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천상의 별을 노래한「저녁에」의 시인이기도 하다.

지상과 천상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의 세계에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

인간은 땅위에서 살고있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영어로 컨시더(consider)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별을 바라다본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의 바다든 삶의 바다든 별을 보고 건너갔다. 점성술과 항해술은 근본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천문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이 세상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 하늘의 별이요,
마음 속의 시(도덕률)」라는 칸트의 경이(驚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어둠이 와야 비로소 그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로 시작되는 그 詩題가「저녁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저녁에」의 시를 이끌어가는 언술은「별」(천상)도「나」(지상)도 아니다.「별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라는 언술의 주체는「나」가아니라「별」이다.

 나는「보다」의 목적어로 별의 피사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그렇게 많은 사람중에서 그 별하나를 쳐다본다」의 다음 시구에서는 지상의 사람이, 그리고「나」가 언술의 주체로 바뀌어
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내려다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리 언어로 표현할 때는 불가피하게 말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그 순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저녁에」의 경우도「별」이「나」보다 먼저 나와 있다.

즉 별이 먼저 나를 내려다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시선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이다.

첫행의   경우시점과 발신자가 별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점의 거리를 결정하는「이」,「그」,「저」의 지시 대명사를 보면 별의 경우에는「저렇게 많은 것」이라고 되어 있고, 사람의 경우는「이렇게 많은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점 거리가「저렇게(별)」보다「이렇게(사람)」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처럼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보고 남이 나를 본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격렬한 싸움인 것이며, 인간의 삶과 존재란 결국 이러한 눈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타자(他子)는 지옥」이란 말이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러한 눈싸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정다운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저렇게 많은 별중에」라고 불렸던 별이 나중에 오면「이렇게 정다운 별하나」로 바뀌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렇게에서 이렇게로 변화하게 만든 그 시점은 누구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저녁에」라는 시 읽기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답안을 퀴즈 문제처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펼쳐보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의제목처럼「저녁」이라는 그 시간이다. 별이 나를 내려다본 것이나 내가 별을 쳐다본 것이나 그 이전에 저녁이 먼저 있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둠이라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내려다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저녁이란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하나와 나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異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너하나 나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라는 둘째연의 시구이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그 진부한 주제가 여전히 이 시에서 시효를 상실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그것이 시적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의 정반대 되는 것이

그 사라짐의 명제 속에 교차되어 있다.

그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이면서도 사라지는 시간과 장소는 빛과 어둠이라는 합칠 수 없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다시 분리될 때 나와 별은 사라진다. 이것이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김광섭은 한국의 시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멀고 먼 하늘에 자신의 별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천문학의 별을 배우기 전에 멍석 위에서 별하나 나하나를 외우던 한국의 어린이였다.

그러기 때문에 별의 패러독스는「타자(他子)는 지옥이다」가 아니라「타자(他子)는 정(情)이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은 윤회의 길고긴 시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나는 또하나의 저녁을 기다린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그렇게도 오래오래 남아있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마지막 그 시구이다.

그 시구가 화가와 만나면 한폭의 그림이 되고, 극작가와 만나면 한편의 드라마가, 그리고 춤추는 무희와 만나면 노래와 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는「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의 만남이 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의 하나와 마주보듯이 박모(薄暮)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상의 별하나와 만난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도 모르는 운명의 만남을…….


  그리고 그렇게나 먼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사라진다해도 우리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시구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만나랴」라는 의문형으로 끝나있지만 그러한 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따의 몇광년의 먼 거리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마주  보는 시선을 어떤 시간도 멸하지 못한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수직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는 저녁의 시간…….

그 순간의 만남을 영원한 순환의 시선으로 바꿔주는 것이야말로 시가 맡은 소중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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