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05

醉月 2009. 6. 6. 12:42

      柳致環「깃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야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시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런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안 그는

      「조선문단」(1936년 1월호)


  청마(靑馬) 유치환이라고 하면 누구나「깃발」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깃발과 함께 떠 오르게 되는 것은 바다다.

푸르고 투명한 바다를 향해 나부끼는 한폭의 깃발―그것이 지금까지 그 시를 읽어온 사람들의 가슴 속에 박혀 있는 인상이다.

국어 참고서에서도 학술 논문에서도 유치환의「깃발」은 예외 없이 바다를 향해 꽂혀 있는 기(旗)라고 풀이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마의 고향은 바닷가에 있는 통영이다.

실제로도 그 자신이 바닷가 산허리에서 나부끼는 기를 묘사한 시(「釜山圖」)를 쓴 적도 있다.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을「바다를향한 언덕같은 데 세워진 기(旗)」로 풀이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일본말「우나바라」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기는 하나,「해원」이라는 말이 넓은바다를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손수건」이「깃발」의 은유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 시 전체를 꼼꼼히 읽으면 읽을수록「정말 그것이 바닷가의 기(旗)를 묘사한 것인가」라는의문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청마의「깃발」은 특정한 장소에 꽂혀있는 특별한 기(旗)의 모습을 묘사하려한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뜻보면 깃발이 나부끼는 풍경을 그린 시처럼 보이지만,

그 시의 구조를 보면 깃발의 일반적 특성을 여러 가지 메타포(은유)로 기술해 놓은 관념 형태의 시라느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 전체의 언술(言述)을 하나의 통사구문으로 요약하면「누가 깃발을 맨 처음 공중에 매달았는가」라는 수사적 의문문이 된다.

그리고 깃발이라는 말 대신「소리없는 아우성」에서「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에 이르는 총 여섯 개의 은유를 상감(象嵌)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시의 형태이다. 그리고 동시에「해원을 향해 흔드는…」이라는 구절은 그 여섯 개의 은유 가운데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 구절 하나를 가지고「바다를 향해 나부끼는 깃발」을 그린 시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독해(讀解)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앞서 밝힌대로 시 전체를 결정짓는 것은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한 마지막 시행이다.

그가 묻고 있는 기(旗)의 의미는「바다」가 아니라, 공중(하늘)에 매달린 깃발…

바다이든 산이든 상관 없이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원초적인 그 깃발의 의미요, 이미지이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그 깃발은 반드시「바다」를 향해 나부끼고 있어서가 아니다.

시인 자신의 언표(言表)대로 그것이「공중」(하늘)에 매달려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공중에 매달린 기」를「바다로 향한 기」로 한정해 버리면 깃발의「보편성」은「개별성」으로,
그「수직성」은「수평성」으로, 그리고「상승적」높이를 지닌 나부낌은「확산적」넓이를 지닌 나부낌으로 머물고 만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푸른 해원」에 대한 풀이 자체도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을 뜻하는 은유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손수건」만이 아니라,「해원」(바다)까지도 은유 구조로 읽으면

「바다를 향해서 흔드는 손수건」의 시행 전체가「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깃발」을 비유하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바다 → 하늘」,「깃발 → 손수건」의 병렬적(竝列的) 구조를 지닌 비유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읽으면 그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혀 온「영원한 노스텔쟈」라는 수식도 그 뜻이 명확해진다.

바다 너머로 영원히 떠나는 사람이 육지를 향해 흔드는 손수건이라면 몰라도 뭍에서 바다를 향해 흔드는 손수건이

「영원한 노스탈쟈」가 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바다 ― 손수건」을「하늘― 깃발」의 관계로 바꿔보면「영원」이라는 말,「노스탈쟈」라는 말이 실감 있게 가슴을 친다.

東西를 가릴 것 없이 시인들은 자신의 고향을「지상」아닌「하늘」로 생각해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태백은 자신을 땅에 귀양살이 온 시선(詩仙)이라고 불렀고,

보들레르는 밧줄에 묶여 퍼덕이는 알바트로스의 긴 날개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땅[現實]에 살고 있으면서도 영원하고 무한한 하늘[理想]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가시화하면 바로 공중에 매달려서 펄럭이는 그 깃발이 될 것이다. 그래서「영원한 노스탈쟈」는「슬프고 애달픈 마음」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맨처음 그러한 마음[깃발]을 공중에 매단 사람은原初의 시인, 시인의 元祖가 되는 것이다.

 

  시인의 경우만이 아니다. 실락원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영원한 노스탈쟈」의「하늘」(天國)을꿈꾸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 본래의 근원적인 감정이다. 世俗의 重力에서 벗어나 한치라도 하늘을 향해 높아지려는 발버둥과 그 처절한 초월의 의지…

그것이 바로「소리없는 아우성」이고, 물결처럼 흐르는「순정」이고, 푯대처럼 곧은「이념」이고,

백로처럼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애수」이다. 허공 속에서 펄럭이고 있을 뿐 언제나 높은 하늘이 아쉬움으로 남는 깃발의 마음…

끝없이 비상하면서도 끝없이 깃대에 묶여 있는 그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그것을 가시화한 것이 다름아닌 청마의 깃발이다.


  깃발만이 아니다. 공중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는 모든 형태 모든 생물, 그리고 모든 운동과 그 몽상이야말로 청마의 시를 꿰뚫고 흐르는 중요한 시의 모티브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기회주의자인 박쥐가 청마의 시에 오면 갑자기 슬프고 아름다운 시인의 상징이 되는지,

그리고 왜 장대에 매달아 놓은 생선이 바다 밑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보다도 더 생명적인 물고기로 묘사되어 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땅바닥에서 척추를 세우고 꼿꼿이 일어서는 것, 그리고 수직의 그리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면 그것이 연이었든 소리개였든,

혹은 담장을 기어오르는 덩굴이나 담배연기라 할지라도 모두 아름답고 슬프게 나부끼는 청마의 깃발이 된다.


  「과연 바다를 향해 나부끼고 있는 깃발인가」라는 그 질문은 청마의 시 전체를 따지는 본질적인 물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서 해답을 얻게되면 시인과 깃발과 박쥐가 왜 청마의 시에서는 같은 혈통을 지닌 족보에 올라 있는지도 밝힐 수 있게 된다. 파리한 환상과 몸부림과 그 안타까운 울음 속에서 날개를 키우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쓰고, 깃발은 펄럭이고,

본래 박쥐는 밤마다 서러운 춤을 추며 새처럼 난다.

그것들은 모두 땅이 아니라 지붕 위의 공중, 하늘을 향해 매달려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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