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04

醉月 2009. 6. 1. 10:43

모란이피기까지는_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서름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
    떨어져 누운 꽃닢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
    의 봄을
    「문학」(1934년 3월)


  꽃을 뜻하는 한자의  花 는 풀초 밑에「변화한다」는  化 자를 붙여놓은 글자이다.

민주화니 정보화니 딱딱한 말에 따라 다니는 그 글자가 왜 하필 꽃처럼 아름다운 것에 붙어있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원래  化 자는 사람이 서 있는 것과 구부리고 있는 것의 모양을 나타낸 상형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자세처럼 수시로 변화(變化)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꽃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드물다. 어제까지 비어있던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갑자기 티눈같이 작은 봉오리가 틔어난다.

그것이 몽우리지고 부풀어 오르고 터지면서 형형색색의 꽃잎과 향내가 피어난다.

그러다가 어느새 시들어 흔적도 없이 져버리고 그 빈자리에 열매가 열린다. 이렇게 트고 부풀고 터지고 피고 시들고 지고 열리는 것―

그「동사(動詞)로서의 꽃」이 바로「花」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꽃을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읽어 온 경우가 많았다. 아름답다.

향기롭다와 같이 시화(詩畵) 속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꽃들은 영화(榮華), 가인(佳人)을 수식하는「형용사로서의 꽃」이었다.

영화(榮華)란 말 자체가 그에 속하는 글자다.  榮 은 벚꽃처럼 꽃잎이 자잘하면서 부리져 피어있는 꽃을 나타낸 것이고, 

華 는 송이가 크고 그 꽃잎이 화려한 꽃을 가리키는 글자다. 특히 이「형용사로 서의 꽃」을 대표해 온 것이 모란이다.

 

그 색이 화려하고 모양이 탐스러워 신라 때 설총의 글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귀공명을 상징해 온「花中王」이다.

그래서 베갯모나 수연(壽宴)의 병풍속에서 모란꽃은 영원히 질 줄 모르는 꽃으로 수놓여져 왔다.
  그러나「형용사」에서「동사」로,「공간」에서「시간」으로 새롭게 바꿔놓은 것이 바로 김영랑의 시「모란이 핏기까지는」이다.

우리가 그 시의 첫행에서 만나게 되는 말도 모란의 색깔이나 그 화려한 꽃잎에 대한 수식어가 아니라「피다」라고 하는 그 동사이다.

「…까지는」,「아직…」과 같이 시간의 한계와 유예를 나타내는 말을 덧붙여「피다」라는 동사를 더욱 강렬하게 못질해 놓았다.

그래서「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라는 독백 속에서 우리는 모란만이 아니라 꽃이 핀다는 그 동
태성과 봄이라는 계절의 지속성을 읽을 수가 있다.
  「피다」로 시작된 이 시는 당연히「지다」라는 거기에서「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서름에 잠길테요」라는 시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란은「피다」보다도 오히려「지다」 쪽이 더 강조되어 있어서「뚝뚝 떨어져버린」이라는 묘사까지 등장한다.

 (「뚝뚝」은 벚꽃처럼 일시에 폈다 지거나 그 꽃잎이 자잘한 것에는 쓰일 수 없는 의태어이다.)

  이렇게 피다와 지다의 시간축(時間軸)으로 펼쳐지고 있는 영랑의 그 꽃은 이미「목단(牧丹)」이라는 한자말보다는「모란」이라는 보다 부드럽고 약간은 나약하기까지한 토박이말에 더 잘 어울리는 꽃으로 변신한다.

그 이름만이 아니라 꽃의 형태도 색채도, 심지어 그 피는 시기마저도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엄격하게 말해서 모란꽃은 화투에서도 육(六) 목단으로 나와있듯이 여름 꽃에 속한다.

하지만 영랑은 봄을 극한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모란을 봄과 여름의 경계선인 오월에 설정한다.

그래서「지다」와「피다」의 그 시간차는 한 계절차이 만큼 벌어지게 된다. 필 때는 봄꽃이고 질 때는 여름꽃으로 말이다.


  「오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떨어져 누운 꽃닢마저 시들어버리고는」에서도 필 때보다 질 때의 모습이 더 강조된다.

꽃을 의인화한 표현은 많지만 떨어진 꽃잎을 보고「누웠다」라고 한 것은 영랑이 처음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진 꽃이 아니라 꽃의 시체이며 흙에 묻는 매장이다. 비극이나 아이러니의 효과는 그 대조가 크면 클수록 커지는 법이다.

꽃모양이 크고 화려할수록 그것이 져서 사라지는 허무의 자리도 크다.


  「피다」와「지다」는 생성과 소멸을 낳는 시간의 모든 비극이고 갈등이며 그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축을 타고 전개되는 영랑의「모란」에서는 모든 삶의 의미와 정서 역시 그와같은 대립과 모순의 언어로 양분되어 진다.「기다림」은「여윔」으로, 「뻗쳐오르는 보람」은「서운케 무너졌느니」로, 그리고「찬란함」은「슬픔」으로 화한다.
  그러나 영랑은 대부분의 한국문화가 그런 것처럼 시간을 처음과 끝으로 이어진 직선으로서가 아니라 둥근 순환의 고리로 생각한다.

봄은 다시 오고 모란은 계절의 모서리 위에서 다시 피어난다. 소망이 좌절로 이어졌듯이,

좌절은 다시 소망으로 이어진다. 피다와 지다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순환의 고리 속으로,

어쩌면 영원 회귀의 반복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는 것같다. 그것이 돌로 나타난 것이 까뮈의 「시지푸스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것이 꽃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영랑의「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고 할 수 있다.


  「삼백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봄까지 합쳐서 일년내내 통틀어 운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뻗쳐오르는 보람」과 그 기다림의 찬란했던 시간가지도 소급해서 모두 뻬어버린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의 끝행은「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라는 첫행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다시 모란이 필 때까지 기다리는 찬란한 시간들이 삼백예순 날의 슬픔 위에 오버랩 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시간의 모순 감정을 통합한 것이 바로「찬란한 슬픔의 봄」이고, 그것을 가시화한 것이 바로 영랑의「모란꽃」이다.

영랑은 모란꽃을 통해서 봄의 보람을 극한까지 떠받치는 튼튼한 버팀목과 동시에 그 봄의 죽음을 장례하는 가장 화려한 상복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래서 귀족적이고 화려하고 중화적(中華的)이었던「목단」이 김영랑의 시에 이르러 비로소 서민적이고 진솔하고 향토적인「모란」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청요리집 같은 모란꽃의 찬란한 빛 속에 슬픔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평면적인 꽃의 이미지를 입체화한 것은

한국의 시인 영랑이었다.
  「미녀를 맨처음 장미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다 그러나 그 똑같은 비유를 두 번째 사용한 사람은 바보다」라는 말이 있다.

영랑은 천년을 두고 부귀영화를 상징해온 중국 문화의 모란 패러다임을 대담하게 바꿨다.

「형용사로서의 목단꽃」을「동사로서의 모란꽃」으로 돌렸다.

그리고「공간 속에 수놓여진 꽃」을「시간 속에서 피고 지는 꽃」으로 끌어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매화의 의미밖에 몰랐던 사람들에게 영랑은 봄과 여름 사이에서 피어나는 경계의 꽃,

모란을 노래하는 즐거움을 보여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