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03

醉月 2009. 5. 26. 09:13

     南으로窓을내겠소_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가리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시집 「망향(望鄕)」(1937년판) 중에서

 

  거울은 모든 것을 거꾸로 비춰준다. 다만 그 반사된 모습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사람의 얼굴은 대칭형으로 되어 있어서 더욱 그렇다. 좌우가 뒤바뀌어 있는데도 그것을 자기 얼굴이라고 믿는다. 조우만이 아니라

사실은 앞뒤까지도 뒤바뀌어 있다. 내가 북쪽을 보고 있을 때 거울 속의 나는 정반대로 남쪽 방향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거울이 정직하게 자기 모습을 비춰 준다면 거울 속에는자기 얼굴이 아니라 그 뒤통수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간까지가 그렇다.
거울 속에서는「과거」가「현재」처럼 혹은 다가오는「미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달리는 자동차의 백미러를 보면 이미 지나온 그 길들이 다시 다가 오고 있지 않던가.


  시의 텍스트도 때론 거울과 같은 작용을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의 생활을 시의 언어에 비춰 보면 아마도 김상용의「남으로 창을 내겠소」와 같은 풍경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대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하는 도시의 빌딩 창문들은 동서남북의 구별이 없다.

그것을 시의 거울에 비춰 보면「남으로 창」이 나 있는 우리들의 작고 따뜻한 옛집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죽어서도 남향받이가 아니면 묻히려 하지 않았던 한국인들의 오랜 삶을 가리켜 온 화살표이다.

 

「북」으로 창이 난 회색의 도시가 압박해 올 수록「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 첫구절은 절규처럼 들려 올 것이다.
  창이 밀봉된 빌딩 속, 플라스틱 사무 용품과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화이트칼라의 하얀 손가락 위로

「밭이 한참가리/괭이로 파고/호미론 풀을 베지오」라고 한 그 흙묻은 손이 오버랩 된다.

그리고 컨베이어 벨트의 온갖 기계 부품들 사이로 사람의 손때 묻은 괭이와 호미가 얼비치게 될 것이다.

「시인과 농부」라는 곡목도 있듯이 시인들은 현대 문명의 아스팔트 위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는 농부들이다.

시를 뜻하는 영어의 버즈(VERSE)가 바로 밭을 간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지 않던가!
  노동만이 아니다. 놀이와 휴식의 양상도 뒤집혀 있다. 밭갈이의 노동은「땅」이「하늘」(「구름」과「새」)의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휴식과 놀이의 상황으로 옮아간다. 그것이「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라는 구절이다.


  생각해 보면 도시인들은 모두 구름의 꼬임 때문에 흙을 버리고 떠나온 사람들이다. 이 떠돌이의 도시문화는 농경 문화와 대립하는 것으로「신 유목민」(네오 노마드)이라고 불려진다.

그 들의 놀이는 관광처럼 끝없이 돌아다니거나 노래도 돈을 주고 부르는 노래방 같이 소비 위주의 오락이다.

그러나 농경민들의 놀이와 휴식은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 그리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적(自適)의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연과의 관계는 그대로 인간과의 관계로 이어진다.「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가 그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은「강냉이가 익걸랑」이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바로 계절이라는 자연의 리듬이다.

그것은 시장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인간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시장은 자신들이 생산한 것을 매매하고 거래하기 위한 것이지만 강냉이가 익는 곳은 함께 먹고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한 잔치이다.
  사회학자「일리치」의 용어를 빌리자면「컨비비얼리티」(conviviality)라고 불리는 공식(共食)과 상생(相生)의 장치 문화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김상용의 거울은 경쟁의 전리품인 도시인들의「먹이」를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의 의식(儀式)같은「빵과 포도주」로 바꿔 놓은 셈이다.

  이렇게 이 시인은 산업 문화의 생활양식을 그 전후좌우가 모두 바뀌어 버린 농경 문화의 전형적인 풍경으로 비춰 준다.

시적 메시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시의 구성도 그렇게 되어 있다. 이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땅 다음에는 하늘,

그리고 마지막에는「사람」으로 天-地-人 三才 思想의 삼태극 도형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이 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구성은「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최종 악장의 스타카토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남쪽으로 낸 창문, 밭갈이, 구름과 새노래, 그리고 강냉이를 함께 먹으며 지내는 그 생활은 모두가「어떻게 사느냐」에 답하는「삶의 양식」이다. 그런데 그 어떻게가 갑자기 튀어나온「왜」라는 그 물음에 의해서 핸들을 꺾고 급회전을 한다.


  「삶의 양식」이「삶의 본질」로, 요즘 말로 하자면「노 하우」에서「노 와이」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다.

개미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왜?」라는 원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어떻게!」라는 해결로 돌진한다고 한다.

그러나 까다로운 인간은 그렇지가 않다. 잘된 일이든 못된 일이든 우선「왜」라고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바로 근대 합리주의의 삶이며 모든 것을 이성과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한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 사상이다.
  그러나「왜」라는 물음에 대해서 말로, 논리로 답하려고 할 때 이미 그 삶은 삶 자체의 빛을 잃고 생명의 선혈은 싸늘하게 굳어 버린다.

 

  석가도 시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 대신 그냥 웃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염화시중(염華示衆)이라고 하고 기호학에서는「폴리세믹」(복합적이고 암시적인 多기호체계)이라고 한다.「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시(예술)이고, 설명해서는 안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과학(논리)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미소이다. 모나리자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지만,

그 모델 조콘다의 이름은「생의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슬픔과 생의 기쁨이 엇갈려 있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다빈치의 그 신비한 미소는 살 수 있다.
  왜 사느냐라는 말에 그냥「웃지요」라고 대답한 김상용 시인의 미소는 말로는 표현할 수도 논증될 수 도 없는 삶 그 자체이다.

애매성과 모순성으로 뭉쳐진 삶 자체의 다의성(多義性)을 그대로 옮긴 것이 그 웃음이며 시의 언어이다.
  과학과 법과 정치와 경제가 우리의 삶을 해부하고 정의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 시인은 오직 침묵으로
웃음으로 삶과 마주 본다. 그래서 우리는 김상용의 그 시적 텍스트를 요술 거울 속에서 본다.

 

도시인들이 차고 다니는「스마일」배지의 뒤통수를 뒤집어 놓은 참신하고도 은밀한 한국적 미소의 그 반사체(反射體)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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