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는 믿음이 있었고 행동은 과감했다 평생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고,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사마천은 유협(遊俠) 혹은 협객(俠客)을 두 부류로 나눈다. 정권에 빌붙어서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자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위험에 빠진 약한 자를 구해주는 정의로운 자다. 전자는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소인배이고, 후자는 군자의 품격을 갖춘 사람이다. 사마천은 유협을 ‘정의’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열전에서는 후자의 인물들을 다룬다. 예나 지금이나 왕이나 최고 통치자는 국가가 정의를 실현한다고 선포한다.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도 그 돈으로 우리를 정의롭게 보호해달라는 것이다. 이른바 깡패들이 점포를 상대로 세금이랍시고 돈을 갈취하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명목도 장사를 잘하게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다. 나라의 정국이 편안하고 질서가 잘 유지되는 사회에서는 유협이 설 자리가 비좁았다. 더 큰 세력인 국가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국을 만나면 협객들은 국가의 정의를 대신 실현해주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아낌없이 바친다. 고대의 국가 통치이념이었던 유가에서는 당연히 유협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문(文)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武)가 있었다. 문무가 국가를 통치했다. 문도 무도 아닌 상태라면 정의로운 행동을 해도 유가에서는 이를 기록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았다. 사마천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사마천은 유가든 묵가든 한비자든 간에 그러한 사상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인간의 본질’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유자는 문으로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은 무로써 금령을 범한다’는 한비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의에서 벗어난 선비들과 협객들을 비난했다. ‘배운 것’들은 글로써 사회정의인 법을 어기면서 교묘하게 살아가고, 힘을 쓰는 자들은 칼을 들고 범법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중국이나 현대사회나 이러한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선비건 협객이건 법을 어지럽히는 자는, 결국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된다. ‘건달의 세계화’ 우리 사회에 ‘주먹’이라고 하는 집단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깡패, 양아치, 조폭, 건달 등으로 부른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건달 혹은 협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건달은 불교용어인 건달바에서 나왔다. 건달바는 수미산 남쪽의 금강굴에서 살며 제석천의 음악을 맡아 보는 불교계의 신이다. 건달바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를 음미하면서 꽃이 이슬을 맞고 살 듯 허공을 날아다니는 미묘한 존재다. 싸움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건달이라는 주먹들은 자신을 평가하길 좋아한다. 아마도 일을 하지 않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국 영화에서 간혹 나오는 장면이 있다. 조폭인 주인공이 스스로 건달이라고 하면서 부하들에게 ‘양아치’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훈육하는 장면이다. 사마천의 협객은 그들이 말하는 건달의 원조인 셈이다. 하지만 이 협객의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사마천의 유협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건달이 의협심과 애국심을 품고 있다면, 협객으로 대접받는다. 전세계 조직범죄단의 실상을 기록한 ‘조폭 연대기’의 저자 데이비드 샤우스웰은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인 코사 노스트라, 미국 마피아, 일본 야쿠자, 홍콩 삼합회, 오르가니자치야(러시아 마피아), 미국의 갱단, 영국의 다양한 갱단, 터키와 쿠르드 갱단을 포괄하는 유럽의 갱단들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직범죄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행해지는, 어림잡아 1조달러 규모의 사업이다. 21세기 키워드는 세계화인데, 지금의 조직범죄보다 더 국제적 상호연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간 활동도 없다. 어느 나라에나 지하세계가 존재하지만,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에는 이에 상응하는 글로벌 암흑가가 출현하고 있다. 이 글로벌 암흑가의 ‘다국적 범죄조직’들은 웬만한 나라보다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중략) 범죄조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회에 적응해나가기 때문에 법적으로 정의 내리기 힘들지만 과거와 오늘날의 범죄조직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는 쉽게 지적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해적, 산적, 노예상인, 마약 밀매꾼들이 국가의 직접적인 후원을 누려왔다. 그런 공식 허가와 보호를 잃게 되면 뇌물을 통해 범죄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려 했다. 이런 관행이 정치와의 결탁에 의한 범죄라는 모든 조직범죄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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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00년 역사에서 나타난 범죄조직들의 또 다른 주요 특성은 이들이 국가의 폭력 독점에 도전하며, 그 조직원과 희생자를 모두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포를 이용하고, 서열구조와 내부 규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국가란 큰 도적단이며, 도적단이란 작은 국가일 뿐인가?” 협객의 존재 이유 왜 협객은 존재할까? 중국 고대의 천재 역사학자이면서 선비인 사마천은 장엄한 역사의 강물을 바라보면서 세상살이가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먼저 밝힌다. 공자와 같은 대성현도, 백이와 같은 절개의 인물도, 여상 이오 등 선비로서 수양을 닦은 어진 이들도 인생을 살면서 기가 막히는 일을 당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선비로서 이러한 재난을 만났는데, 하물며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어지러운 세상의 혼탁한 흐름을 건너자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들이 재앙을 겪는 경우를 일일이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문장에는 한 무제에게 이릉 장군을 변호하는 정의로운 말을 했다가 화를 당한 자신의 심경이 포함되어 있다. 사마천이 전통적인 유가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삶의 억울함과 가난하고 불우한 자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신하였던 사마천은 국가가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명제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유협의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칭찬할 점을 찾아 기록했다. “지금 유협의 경우는 그 행위가 비록 정의에 부합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말에는 믿음이 있고 행동은 과감하며, 한번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해 실천하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닥친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생사존망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뽐내지 않았고,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이런 점은 높이 칭찬할 만하다. 사람은 누구든지 위급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위급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온다. 그 순간 우리 앞에 정의를 실현해줄 국가와 법은 저 높은 곳에서 별처럼 빛날 뿐이다. 절차를 거쳐 법의 심판을 받기 위해 세월을 기다려도 그 정의는 실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이라는 미국에서도 그러할 때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할 때가 있다. 협객이 필요한 ‘보통사람들’ 시카고 갱단의 보스 알 카포네로 상징되는 마피아를 모델로 만든 영화 ‘대부’는 미국으로 이민한 한 평범한 이탈리아인이‘대부’에게 와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는 어두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딸을 성폭행한 놈들이 가벼운 벌금형을 받고 법정에서 유유히 빠져나가면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고백한다. 그 순간 법의 정의를 믿었던 시민은 분노하고 좌절한다. 열심히 일해서 세금 내고, 교통법규 지키고, 범법행위와는 거리가 먼 착한 시민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로 치자면 대통령쯤 되는 대부는 힘없고 가난한 그를 직접 만나 독대를 해서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간단하게 마피아 ‘애들’을 시켜서 속 시원하게 그 원한을 풀어준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국가가 실현하지 못하는 정의를 유협이 ‘속 시원하게’ 해결해준다. 우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는 대부, 그는 가난한 자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대부라고 부르면서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물론 미국 마피아 조직이 사마천의 유협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그들은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각종이권 개입, 탈세, 살인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일종의 비즈니스맨이기 때문이다. 유협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홍길동이나 일지매처럼 사심이 없어야 한다. 하여간, 이것은 매우 일천한 비유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대부’가 필요한 경우를 의외로 많이 겪는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경우는 사방 도처에 있다.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행위, 성폭행, 주차장에서 당하는 황당한 주차싸움과 같은 일들, 일일이 거론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러한 문제가 나름 잘 정리된 국가나 사회를 지금 세계에서 몇 나라나 찾아볼 수 있을까? 유협을 원하지 않는 권력자 유협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 시민과 백성의 시각으로 형성된다. 가진 자와 권력자들은 정의로운 유협의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사마천은 말한다. “백이는 주나라가 온 천하를 얻는 것을 추악하게 여겨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지만 문왕과 무왕은 이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도척과 장교는 포악하고 잔인했지만 패거리들은 그들이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끝없이 칭송했다. 이것으로 볼 때 허리띠의 갈고리를 훔친 사람은 처형되고, 나라를 훔친 사람은 제후가 되며, 제후의 문하에는 인의가 있다는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처형당하지만(국가에 의해),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명을 죽인 자는 자국에서는 영웅이 돼서 국가 권력을 독점한다. 그러니 국가 권력이 유협의 세계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민중이 유협을 지지하면 정권 유지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홍길동과 같은 유협은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정의로운 유협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를 기록에 남기지 않기도 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국가의 횡포에 대해 지적했다. “옛 서민 협객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 ) 시정의 협객들은 오로지 행실을 닦고 절개를 지켜 명성을 온 천하에 떨쳤으니 현명하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유가와 묵가에서는 모두 이들을 배척하고 버려 책에 기록하지 않았다. 진나라 이전의 서민 협객에 대해서는 사라져 알 길이 없다. 나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사마천의 이러한 시각은 유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천의 자유로운 시각 때문에 오늘날까지 사기열전이 생명력을 갖게 됐다. 사마천은 한나라 시대 주가, 전중, 왕공, 극맹, 곽해와 같은 인물들을 유협열전에 기록한다. 이들은 당시 국가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개인의 품위와 덕망, 청렴, 겸양에 있어서는 선비들과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기록했다. 즉 폭력을 동원한 깡패는 유협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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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유협에 대해 명증하게 정의했다. “패거리나 세력이 강한 종족이 서로 의지하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부리며, 문벌 세력이 외롭고 약한 사람을 해치고 억누르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따위를 유협의 무리는 수치로 여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폭력배와 협객은 사마천의 이러한 분류로 간단하게 구분된다. 진정한 유협은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세상 사람들이 유협인 주가와 곽해 등을 세력이 강한 종족이나 문벌 세력과 같은 부류로 보고 비웃는 것은 슬픈 일이다. 주가는 노나라 협객으로 당대 유명인사다. 그가 구해준 인물은 호걸만 수백명, 일반 백성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지지기반으로 명예나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군사를 만들어 정부를 전복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조용히 숨어서 정의를 실천했다. 사마천은 주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평생 자기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고,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자신이 은혜를 베푼 사람을 다시 만날게 될까 두려워했다. 남의 어려움을 도울 때에는 우선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사람부터 했다. 그의 집에는 남아도는 재산이 없었고, 옷은 빛깔이 바랜 것들뿐이었고,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았고, 타고 다니는 것은 소달구지가 고작이었다.” 이렇게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해 기어이 구해주었고, 자신의 일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위급함을 생각했으니 우리가 조폭 영화에서 보는 인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유협의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진 점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국가의 법집행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련된 인성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제행동을 할 때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사마천의 유협들이 그렇게 행동했다. 사마천은 이들이 어떻게 유협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임꺽정처럼 힘이 장사인지 일지매처럼 신출귀몰한지 그러한 활극적인 요소가 없다. 다만 그가 한 결과만을 담담히 기록한다. 주가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일찍이 몰래 계포 장군을 위험 속에서 구해준 적이 있었다. 계포는 존귀한 신분이 된 뒤에 그를 찾았지만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함곡관 동쪽 지역 사람치고 목을 늘이고 그와 사귀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가의 뒤를 잇는 극맹과 왕맹 역시 협객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마천이 유협열전에서 가장 길게 다룬 인물은 바로 곽해다. 곽해의 아버지도 협객으로 그는 효문제 시대에 처형됐다. 흥미로운 것은 사마천이 인정한 협객의 대표적인 인물인 곽해 역시 인생 초반에는 건달 혹은 ‘주먹’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엔 심성이 잔인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살인을 서슴지 않았으며, 법을 어기고 강도질을 하기도 한다. 도굴을 해서 재산을 모으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몸을 던져 친구의 원수도 갚아주고, 여러 번에 걸쳐 망명한 사람들을 숨겨주었다. ‘주먹’에서 ‘협객’이 된 곽해의 겸손 이러한 그가 나이를 먹으면서 협객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자기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에게는 덕으로 갚았고, 남에게는 큰 은혜를 베풀었으며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보답하기를 바라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의협심을 실천하는 것만은 더욱 즐겨했으며, 사람의 목숨을 건져주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사마천은 말했다. “나는 곽해를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얼굴 모습은 보통 사람보다 형편없었고, 말솜씨도 본받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천하에서 현명한 자나 못난 자,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정말 그의 명성을 사모했으며, 협객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모두 그의 이름을 말한다. 속담에도 ‘사람이 아름다운 명예로 얼굴을 삼으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아, 정말 애석하다.” 사마천이 이처럼 애석해했던 이유는 곽해 역시 말년에 일족이 몰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곽해의 탁월한 점은 겸손과 공정성에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곽해의 조카가 삼촌의 위세를 믿고선 술을 마시다가 상대방의 명예를 무시하는 무례한 행동을 했다. 화가 난 상대방이 곽해의 조카를 죽이고 달아났다. 곽해는 이 이야기를 듣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곽해의 누나는 길거리에 아들의 시신을 놓고서는 동생인 곽해가 원수를 갚아주지 않음을 원망하면서 장사도 지내지 않았다. 협객이 조카의 원수도 갚아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것이다. 곽해는 은밀히 범인을 알아냈다. 범인은 결국 스스로 곽해를 찾아와 자초지종을 다 말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요즘으로 치자면 전국 조직폭력배 최고 보스에게 찾아가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곽해는 조용히 그의 말을 다 듣고는 이렇게 말하고 조카의 시신을 수습했다. “당신이 그를 죽인 건 진실로 당연하오. 내 조카가 나빴소.” 또한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동네 양아치에게 몰래 선행을 베풀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찾아온 그 사내가 울면서 용서를 빌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선비가 글로써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것과 같다. 특히 곽해가 빛나는 대목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낙양 사람들을 중재하고 나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곽해는 그 고을 안에 명망가들이 화해하려다가 결국 실패한 일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나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낙양의 여러 인사가 중재를 나섰으나 당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들었소. 지금 다행히 이 곽해의 말을 들었소만, 다른 고을 사람인 내가 어찌 이 고을에 계신 어진 분들의 권위를 빼앗을 수 있겠소. 여러분은 당분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하시오. 내가 떠난 뒤에 낙양의 호걸들이 중재에 나서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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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인해 황제까지도 그를 알게 되었고, 한 무제가 지방의 부호들과 호족들을 무릉으로 이주시켰을 때 재산이 없어 가난한 곽해도 그 명성으로 인해 이주하게 될 정도였다. 그때 그를 전송한 사람들이 낸 전별금이 1000여만전이나 되었다고 한다. 곽해는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영웅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곽해와 같은 이는 드물었고, 협객의 거죽은 쓰고 있지만 수치스러운 이가 많았다고 사마천은 기술한다. 사마천이 말하는 협객은 비록 글로써 유가의 덕목을 지니고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어렵고 가난한 자 편에서 정의를 행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인물들은 왕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권 전복과 같은 정치적인 생각이 없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들은 단지 지금 이 순간 주저앉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워주는 역할로 만족했다. 한국 근대사에서 유협의 세계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제법 자세하게 나온다. 김구 선생은 젊은 날 혈기가 왕성하던 시절, 조국의 현실에 통분하고 유협의 마음으로 일본 순사를 맨손으로 처단한다. 선생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위대한 정치인, 사상가로서 존경을 받는 배경에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이 있다. 물론 선생을 유협의 인간 유형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선생은 더 큰 세상을 향해 걸어간 위대한 인물이다. 즉 선생은 숨어 사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한 몸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분이다. 이런 점에서 선생은 유협이 아니다. ‘유협’을 넘어선 백범 김구 선생 김구 선생은 옥중에서 만난 사람을 통해 도적의 역사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자신을 절대 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나라에서 도적이라 명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마천의 시각으로 보면 이들도 유협의 무리에 들어갈 수 있다. “조선시대 이후 도적의 계파와 시원은 이렇습니다. 고려 말 이성계가 나라를 세웠을 때, 두문동 72인과 같이 고려왕조에 충성하고 신왕조에 협조하지 않은 지사들이 비밀리에 연락하여 동지를 모았습니다. 약한 자를 구제하고 기운 것을 바로 세우며, 새 왕조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보복적 대의를 표명하고, 조선의 국록을 먹는 백성을 착취하는 양반과 부자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였소.” 그들은 의협심이 없이 도적질만 하는 자들을 스스로 처단하기도 한다. “강원도에 근거를 둔 기관을 목단설이라 하고, 삼남에 있는 기관을 추설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북대는 무식한 자들이 임시로 작당하여 민가를 털고 약탈합니다. 그러니 목단설과 추설끼리는 초면에도 오래된 동지처럼 서로 인정하고 돕지만, 북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적대시하여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형시킵니다. 목단설과 추설의 최고 수령은 ‘노사장’이고, 그 아래 총무를 보는 자와 각 지방 주관자를 유사라 합니다. 양설이 같이하는 공동대회를 ‘큰 장 부른다’고 하고, 각기 단독으로 부하를 모으는 것을 ‘장 부른다’고 합니다.” 이 계보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의 유협은 김두한이 아닐까 싶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서 안동 김씨의 자부심을 가지고 종로통 상인들의 유협으로서 ‘야인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유협은 빛을 발한다. 일제강점기는 혼란과 혼돈의 기간이었다. 이 시절에 진짜 유협은 일제에 대항하면서 별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광복이 되자 유협의 세계는 정부의 공권력에 의해 서서히 무너져내린다. 다년간 한국 ‘주먹’을 취재해 주먹세계에 정통한 조성식 기자는 근저(近著)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에서 이렇게 썼다. “야인시대의 주인공은 김두한, 시라소니(이성순), 이정재, 이화룡 4명이다. 1950년대 서울 주먹계는 이 네 사람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실력으로나 명성으로나 한국 최고의 주먹이었다. 하지만 정치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거의 무너졌고, 따르던 아우들도 흩어졌다. 조직으로는 자유당 정권을 등에 업은 이정재의 화랑동지회, 혹은 동대문사단이 가장 셌다. 명동파의 이화룡은 시라소니와 손을 잡고 이정재에 맞섰다. 특정 조직을 거느리지 않았던 시라소니는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과 두루 관계를 맺으며 자유롭게 활동했다. 김홍빈(1950년대 명동파 두목 이화룡 직계이면서 시라소니와 관계를 맺었다)씨에 따르면 이정재의 세력이 커지면서 김두한의 주먹계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이정재가 동대문시장을 발판으로 종로와 광화문, 서대문 일대까지 장악하자 김두한은 갈 곳이 없어졌다. 돈 문제 등으로 주먹계에서 인심을 잃은 탓이라는 게 김홍빈씨의 증언이다. 김씨는 ‘김두한은 말년에 사업 실패로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김두한의 사망 배경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정치 깡패’ 이정재 VS ‘건달대표’ 이화룡 국회의원 김두한은 국회에 똥물을 뿌린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그가 부패한 정치인들의 행태를 참지 못하고, 분통이 터져 똥물을 뿌린 행위는 의협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행위에 대해서 관대하지 못하다. 속 시원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치인으로서 미성숙하다는 평가도 가능한 것이다. 당대나 지금이나 국회에 똥물을 뿌릴 일은 비일비재하다. 유협이 정치인이 되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국회의 추억의 명장면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유협들은 자신의 활동반경에 선을 분명히 그었다. 사마천의 유협들은 조용히 은둔자의 생활을 했는지도 모른다. 곽해와 같은 경우 맘만 먹는다면 정권 전복을 기도할 만한 세력을 갖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두한처럼 정치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인 이미지가 강한 이정재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역시 조성식 기자의 글이다. “김씨는 이정재에 대해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얼굴이었다. 정말 아까운 사람이 처형당했다. 이정재가 정치깡패였던 건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은 참 신사였다. 학자적인 면모도 있었는데, 글씨를 참 잘 썼다. 다른 조직의 주먹들이 사무실에 놀러 가면 돈봉투를 건네곤 했다. 인정이 많고 의리가 강했다’고 평가했다. 동대문시장에서 출발한 이정재가 서울 주먹계의 강자로 우뚝 선 것은 화랑동지회를 결성한 이후다. 화랑동지회는 서대문의 최창수, 광화문의 장용빈, 종로의 아오마쓰(심종현) 등이 이정재를 중심으로 연합한 단체다. 김홍빈씨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화랑동지회와 동대문사단은 별개의 조직이지만 하나의 단체로 인식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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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룡과 시라소니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화룡은 키가 170㎝인데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작았다. 하지만 보스 기질 면에서는 최고였다는 것이 김씨의 평이다. 싸움도 잘했다고 한다. 김두한의 측근인 무옥이 이화룡과 맞대결을 했다가 패했다고 한다. 이정재 세력은 정치권력을 업은 힘이었다. 건달세계 대표자는 어디까지나 이화룡이었다. 그는 약자를 위할 줄 아는 건달이었다.” 이화룡 밑에는 정팔을 비롯해 15형제, 한국체육관파, 신상사(신상현) 등이 있었다. 정팔의 직계인 신상사는 원래 독자 조직을 갖고 있었다. 중앙극장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이화룡 밑으로 들어간 그는 돌격대장 노릇을 했다. 화랑동지회 습격사건의 주동자도 신상사였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엄연한 정부의 행정구역이 있는데도, 이들은 동사무소 하나 차려놓지 않고 동대문 일대는 누가, 중앙극장 근처는 누가 이런 식으로 구역을 나누어 관리를 했다. 이른바 ‘나와바리’라고 하는 구역싸움이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영웅호걸들이 패권을 다투던 모습과 비슷하지만, 결국은 나라와 정부라는 거대조직 앞에서는 무력화된다. 고대의 곽해 역시 한 무제의 한마디에 일가가 몰살당했다. 이정재도 1961년 8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른바 군대라는 총과 칼의 집단이다. 군사정권이 대의로 내건 명분도 국민의 안위와 혼란한 정국의 안정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부패한 정권을 바로잡는다는 유협의 명분은 국가적 차원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정부는 이러한 아류 집단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내가 하니까 넌 빠져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힘으로 제압해버린다. 그것은 고대 중국 한나라 사마천의 시대에도, 한국 군사정권의 시대에도 일맥상통한다. 사실 중국의 요순시대와 같은 좋은 시절에 유협은 그 필요성이 없어진다. 반대로 살벌한 독재 정권인 북한과 쿠바와 같은 나라에도 유협의 존재감은 없다. 유협의 무력보다 훨씬 강력한 대포가 있기 때문이다. ‘진화’하는 한국의 주먹 그래서 우리는 ‘연장’이 아닌 주먹 하나로 자웅을 겨루던 일제강점기의 주먹들을 전설처럼 추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처럼 주먹들이 맨몸으로 대결하는 모습은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김홍빈씨는 “우리 때만 해도 일대일 싸움실력이 없으면 건달생활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조직으로만 움직이고 주먹이 아니라 칼로 승부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가 한국 주먹사에서 최고로 꼽은 주먹은 시라소니다. 싸움 실력도 최고였지만, 인간성도 좋았다고 한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정의감이 넘치던 진정한 건달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정의감과 의협심을 강조한다. 사마천의 유협은 결국 이러한 정의감에 넘치는 은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시라소니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과 유신정권의 출범 등으로 한국에서 ‘주먹 지형도’는 크게 달라졌다. “현재 경찰에서 파악하는 전국 조직폭력배는 총 199개 파에 4153명이다. 검찰은 전국 28개 지청을 통해 주요 조직폭력배 162개 파와 668명을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수사기관이 편의상 분류해놓은 것일 뿐 실제 사정은 사뭇 다르다. 이른바 실세들은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 데다 대부분 사업가이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세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경찰 검찰이 파악하고 있는 조폭들은 뿌리가 아니라 빵(감방)에 드나드는 ‘가지’일 뿐이라고 말했다. (중략) 주먹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지역 주먹과 전국구 주먹이다. 지역 주먹은 특정 지역에서만 힘을 쓴다. 반면 전국구 주먹은 말 그대로 전국 어디서나 실력이나 이름값을 인정받는 주먹이다. 주먹세계에서 호남주먹이 돋보이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국구 주먹의 상당수가 호남에서 배출됐기 때문이다.”(‘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조성식 기자는 말한다. “오늘날 주먹은 진화하고 있다. 유흥업소의 자잘한 이권을 두고 칼부림을 하거나 소영웅주의에 빠져 수사기관의 ‘실적 쌓기’에 공헌하는 조무래기 주먹을 말하는 게 아니다. 수사기관은 위장으로 간주하겠지만, 다들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사업과 조직의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업 분야도 다양하다. 일부 주먹들은 사회봉사활동도 한다. 일본의 독도 침탈에 항거해 단지 시위를 벌인 주먹들도 있다.” 신문의 사회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주먹들인 김태촌과 조양은을 비롯해 경기 주먹계의 실세 박복만, 서울 주먹계의 실력자 백민, 전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 주먹계의 새로운 모델 양길모, 주먹계 우국지사 조일환, 시라소니 이후 맨손싸움 일인자 조창조 등을 조성식 기자는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유협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고 이 글의 초반에서 밝힌 바 있다. 정권에 빌붙어서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자도 있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위험에 빠진 약한 자를 구해주는 정의로운 자도 있다. 지금 주먹들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 사마천처럼 당대의 협객을 만나고 평가하는 사학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변했다. 고대의 유협들은 현재의 주먹들을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도 알 수 없다. 고대의 유협들처럼 정말 이름을 숨기고 행동하는 ‘정의로운 자’가 있을 수도 있다. 사마천은 말한다. “지금 학문에 얽매이거나 작은 의를 품은 채 오랜 세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 어찌 천박한 의론으로 세속에 부합하여 세상의 흐름을 따라 부침하며 영예로운 이름을 얻는 것만 못하겠는가? 그러나 포의의 무리로서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고 승낙한 일은 반드시 실천에 옮기고, 천리 몇 곳까
지 가서도 의리를 외치며 실천하고, 의를 위해서 죽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평을 돌아보지 않으니, 이 또한 유협 무리의 뛰어난 점으로 구차스럽게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름 있는 선비들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그들에게 목숨을 맡기게 된다. 그들이야말로 어찌 사람들이 말하는 현인이나 호걸이 아니겠는가? 만일 민간의 유협들과 계차 원헌의 권세와 역량을 비교한다면, 그 시대에 이룬 공적을 놓고는 한 날에 같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구체적인 성과와 말을 하면 신의를 지키는 점에서는 협객의 정의를 또 어찌 경시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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