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술의 전쟁" 종군기

醉月 2009. 6. 8. 09:50

흔들리는 술잔, 세상사 몽롱한 고백
주간동아 기자, 카페 주인으로 변신 … 불륜 커플 “우리는 유령”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손님 :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며) “오늘 손님이 꽤 있네요.”
주인 : (건성으로 쳐다보며) “자리 없습니다.”
손님 : (턱으로 빈자리를 가리키며) “저기 자리 있네요.”

주인 : ( 빈자리를 보며 퉁명스럽게) “손님이 화장실 갔어요. 곧 오실 거예요.”
기자 :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인에게) “조금 전에 가셨어요. 자리 있어요.”
손님 :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저기 옆에도 빈자리 있잖아요.”
주인 : (고개를 저으며) “그냥 가세요. 자리 없어요.”
손님 : (팔짱을 끼고 꼬나보며) “나 참… 슬슬 오기가 생기네.”
주인 : (일어서며 짜증난다는 듯) “그냥 가시라니까요. 몇 번을 말해야 해요.”
손님 : (함께 온 남자의 소매를 잡아끌며) “이런 ××. 오빠, 가요. 재수 없어. 나 원 참.”

연극 대본으로 읽는다면 1분은 족히 걸릴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3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40대 후반의 여자 손님은 당장이라도 주인(47·여) 머리채를 잡을 듯 눈을 부라리더니 결국 다시 우산을 펴들었다. 함께 온 50대 남자는 두 여성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5월15일 비 오는 날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한 카페에서는 주인과 손님 간 ‘불꽃 일합’이 있었고, 카페에 있던 6명의 손님들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저런 손님은 안 받는 게 좋아요. 철인 3종경기에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옆 손님 얘기하는 데 꼬박꼬박 참견하고 잘난 척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에요. 그것도 새벽까지 ‘완주’한다니까요. 다른 손님이 불편해하니 아예 못 들어오게 할 수밖에요. 저라고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그랬다. 주인은 카페에 있던 6마리 ‘순한 양’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주인을 알고 지낸 지 3년. 술 취한 친구에게 택시비를 쥐어주고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말벗이 돼주고 자투리 1만, 2만원은 계산에서 뚝 떼놓던, 마음씨 좋은 그녀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모성애’는 기자가 3년간 몰랐던 강력한 ‘말발’의 여주인으로 바꿔놓았다.

기자는 5월14, 15일 이틀간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5평 남짓 작은 카페의 ‘1일 주인’이 됐다. 2009년 한국인의 술자리를 술자리에서 떨어져 고찰해보기 위함이었다(하지만 당초 목적이 여의치 않음을 곧 확인할 수 있었다).

첫날 “가게 걱정 말고 이틀간 여행이라도 다녀오시라”고 호기를 부릴 때까지는 정말 몰랐다. 주인이 화장실에라도 갈라치면 “사장님 어디 가시려고요?”라며 애가 타서 붙잡게 될 줄은.
정말 제대로 ‘사장 행세’하려고 했다.
“매일 낮에 주류업체 직원이 방문해 술을 채워놓고, 수금은 월말 주류카드로 대신하고, 단골손님들은 제주산 생무를 좋아하고, 옷은 넥타이 대신 간편복을 입고, 신용카드 단말기 사용은….”

미리 ‘오리지널 사장’에게서 특강을 받았지만 술집 사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단골이 많은 카페인 듯 손님 10명 중 7, 8명은 “사장님 바뀌었어요?”가 첫인사였다. 그래서 말발굽 모양의 바 안쪽에 바텐더처럼 앉아 있었다.
첫날 오후 8시경 30, 40대 직장인 5명이 카페를 찾았다.
“사장님 안 계시나봐요? ‘알바’?”(손님)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앉으세요.”(기자)
“사장 없는데 뭐 하려고… 됐어요. 나중에 오죠.”(손님)
“아, 아니에요. 곧 오실 거예요.”(기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더니. ‘남의 집’ 장사 망치겠다 싶어 사장에게 SOS 문자를 날렸다(이후 기자는 손님과의 대화에 주력했다).

그들은 한 부서에 근무하면서 동고동락하던 ‘옛 전우 5인방’. 저녁을 하며 반주를 한 터. 약속이나 한 듯 위스키와 맥주를 청했고 ‘딸랑’ 소리가 청아하게 맴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취기는 ‘진부한 일상에 대한 눈부신 반역’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과장된 친밀감과 의기투합, 거침없는 속내를 쏟아내면서 반역을 감행했고, 폭탄주는 화기애애한 의전(儀典)의 멍석을 깔아줬다.
“이번에 ○○○가 승진했다면서? 그 ××는 전무 밑에서 딸랑거리더니 결국 잡았어(승진했어).”
“‘공장’(직장)은 그냥 놔둬. 우리끼리 잘 뭉치면 되지. 사장님, 여기 쥐포.”

폭탄주 후유증 … 입만 내놓고 있는 그들

딸랑 소리가 1시간가량 이어지는가 싶더니 40대 중반의 남녀 손님 한 쌍이 문을 열었다. 체크무늬 셔츠와 남색 테일러드 재킷으로 멋을 낸 남자는 옷차림만큼이나 정중히 여성을 안내했다(여성은 재킷을 벗자 리본 블라우스에 스카프를 한 모습이 드라마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김남주 분)를 연상시켰다). 남자는 고급 위스키를 주문하더니 여자에게 ‘알잔’을 건넸고, 조금 전 마신 와인 얘기며 드라마, 자동차를 주제로 대화를 이끌었다. 기자가 생수를 건네자 그는 잔을 권했다.

   

“‘바텐’(더)? 한잔 하세요?”
“음… 그러죠.”

마주 앉은 기자가 그들의 ‘세련미’를 높이 평가하자 분위기는 ‘업’됐고, 여자 손님에게서 천지애 분위기가 난다는 말에 둘은 마주 보며 ‘열광’했다.

남자는 “드라마 속 사장 부인 은소현(선우선 분)과 온달수(오지호 분)의 사랑은 불륜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라며 치켜세웠고, 여자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에게 술은 진부한 삶의 조건들에 대항하는 영감의 원천이었으리라. 위스키 병이 투명한 속살을 많이 드러낼수록 남자의 ‘재능’도 드러났다. 여자의 등을 쓸어내리는 화려한 손놀림, 그리고…. 인습과 도덕에서 탈출한 사적인 관계 속으로 그들은 급속히 빠져들었다.

1 카페 진열대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키핑’된 술.
2 손님들은 카페에서 최소 한 번은 ‘폭탄주 제조 서비스’를 요구했다. 기자에게 폭탄주 제조법을 전수하는 사장 이명진 씨(오른쪽).
3 주문서에는 술 종류만 기록한다. 안주는 무료.

“술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뭔가 재능이 필요한 기술인 것도 분명하지만, 동시에 행운이라는 신비한 힘이 작용한다. 너무 즐거워서 도저히 그만두지를 못한다는 점도 그렇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들려주던 한 선배의 ‘술 철학’이 귓가를 맴돌았다.
기자는 등을 돌려 ‘5인방’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술이 사람을 마셔버린 ‘5인방’은 정말 몸 밖으로 ‘입만 내밀고’ 있었다. 두 시간가량 이어진 폭탄주의 후유증.

“입술은 술의 입/ 입을 가진 액체는 술밖에 없다/ 술은 빨아들인다/ 술 마시는 사람은 술 안으로 사라지고 만다/ 몸 안으로 들어간 술은 모두 몸 밖으로 입만 내민다….”(채호기 ‘너의 입술’)

소크라테스와 보들레르,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마신 술을 그들도 마셔서일까. 혀 놀림은 다소 부자유스러웠지만 그들은 철학, 예술, 경제를 넘나들며 무궁무진한 대화를 이어갔다.
“‘바텐’, 여기 계산해야지.”
등 뒤의 남자가 카드를 내밀며 한마디 한다.
“어디서 일하다 왔어요?”(남자)
“….”(기자)

답을 재촉하는 그에게 취재 의도를 밝혔다. 전표에 사인을 하던 손이 잠시 흔들리더니, 물끄러미 고개 들어 쳐다보면서 한마디 한다.

   

“우리는… 유령이라 생각하시고… 그냥 친구예요.”
서둘러 자리를 뜨는 그들을 보며 사장이 거든다. 직감은 맞았다.
“○○회사 직원들이에요. 남자가 여자에게 대시하더니 요즘 잘 지내더라고. 둘 다 가정은 있는데 외로운가봐.”
“오늘은 그만 하자.”
“야, ‘한 고뿌’만 더 해야지. 딱 한 병. 지금 정신이면 또 내일 후회한다고.”

술 마시고 켠 컴퓨터 ‘여친’을 보냈다

혼자 카페를 찾은 손님들은 대부분 바텐더와 대화를 즐겼고 술 주문도 이어졌다.

오후 11시가 넘어설 무렵 얼굴과 눈이 붉게 물든 30대 남자 3명이 문 앞에서 실랑이를 한다.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 전장에 나서는 대장군의 표정이 저렇게 비장할까. 가까이서 보니 ‘색목인’이 따로 없었다. 국사책에 종종 등장하던, 붉은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의 그 색목인 당삼채(唐三彩). 색목인은 자리에 앉더니 기어이 밖에 있던 친구 둘을 불렀다. 그러나 맥주 ‘각 1병’ 약속은 ‘그녀’ 얘기가 나오자 곧장 무너졌다.

“그래, 내가 그랬지. 술 마시면 컴퓨터 켜지 말라고.”(친구 A)
“내가 미친놈이지. (청첩장) 다 찍었는데….”(색목인)
“어쩌면 잘된 일이야. ‘여친’이 그 정도 아량도 없냐.”(친구 B)
그들은 때로는 색목인의 등을 두드리며, 때론 함께 울분을 토하며 색목인을 위로했다.

얘기는 이랬다. 새로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을 두 달 앞둔 색목인은 며칠 전 얼큰히 취해(그의 표현을 빌리면 ‘해롱해롱한 상태’였다) 귀가한 뒤 컴퓨터를 켰다. ‘정말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 속에나 나오는 옛 여친’에게 마지막 메일을 보냈다. 32년 인생, 후회 없이 사랑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동해안에서, 지리산에서, 필리핀 세부에서 함께한 아름다운 밤을 잊지 못하겠노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퇴근 무렵 결혼을 앞둔 ‘여친’의 문자메시지에 경악했다.
“(결혼식장) 예약 취소했어. (옛 여친과) 열심히 만나고 아름다운 밤 보내.”

두 여자 모두 ‘김씨’인 게 화근이었다. 메일을 쓰고 ‘받는 이’에 ‘김’을 치는 순간 자주 메일을 보내던 현재의 여친 이름과 메일 주소가 가장 위에 뜬 것. 습관대로 ‘클릭’했고, 이튿날 여친의 문자메시지를 받을 때에야 ‘배달사고’임을 깨달았다.
“옛 여친은 위에서 세 번째였는데. 익숙하다 보니 그냥….”
친구들은 진정한 위로(?)를 이어갔다.
“구글이 ‘메일 고글스’(goggles·눈 부릅뜨기) 기능을 선보였대. 술에 취해 e메일을 보내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능이라나. 밤 10시부터 새벽 4시 사이에는 60초 동안 산수문제 5개를 맞혀야 메일을 발송할 수 있다는 거야. 너처럼 후회하는 사람이 많긴 많은가봐.”
“발송자와 수신자가 ○메일을 쓰면 e메일을 읽기 직전까지는 언제든 발송을 취소할 수 있는데….”
잠시 침묵하던 색목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들, 일찍도 알려준다.”

   

다음 날 5월15일. 주당들이 최고로 친다는 ‘비 오는 날 금요일’. 하지만 카페 손님들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어이, 여기 맥주 다섯 병 더.”

5명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오른손을 높이 든다. 순간 옆에 있던 4명은 고개를 숙인다(그중 한 명은 평소 기자가 알고 지내던 보험사 직원이다).

“내가 말이야. 세일즈는 말이야…. 고객의 허점을 파고들란 말이야. 자, ‘원샷’!”
술잔은 높였지만 반응은 시원찮았다. 보험업계 얘기며 직장 분위기 등 여느 퇴근 후 한잔 모임과 비슷했지만 왠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알고 지내던 직원이 화장실을 간 사이 슬쩍 따라붙었다.
“‘자뻑’ 부장이거든요. 평소엔 조용한데 술만 들어가면 저래요. 한 시간 동안 혼자 50분은 얘기할걸요. (부장이) 얘기할 때 손담비의 노래 ‘미쳤어’를 흥얼거렸죠. 미친놈이죠. 계산할 때 보세요. 신발끈 제대로 묶을 겁니다.”

그는 기자에게 반짝이는 눈망울로 술자리 ‘조기 해산’ 비결을 물었지만, 기자는 요술램프 ‘지니’가 아니라고 했다.
다시 돌아 카페. 화제는 프로야구로 바뀌어 있었다.

“SK가 잘할 수밖에 없어. 어이, 김 과장. 회사 앞 실내 야구장에서 내가 배팅 볼 몇 개나 날렸어? 그렇지. 야구 스윙은 상체와 하체의 적절한 밸런스….”
알코올에 영향을 받은 신경전달물질은 부장의 식은 뇌를 뜨겁게 데우고 있었다. 술은 잠들어 있던 괴물의 영혼을 깨웠다. 괴물은 후배들의 조기 해산 염원을 잡아먹었다.
맞은편에는 평소 안면이 있던 50대 중후반의 ‘큰형님’

3명이 기자를 반겼다. 그들은 광화문 바닥에서 알아주는 술 고수. 술 실력만큼 입담도 걸쭉했다.

“(옆 친구를 가리키며) 이 친구는 관주(觀酒·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술을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 단계야. 오늘 술 못 마셔. ‘컨디션 난조’거든. 이 상태에서 마시면 그건 열반주야. 술 때문에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해.”

주성(酒聖)으로 통하던 시인 조지훈이 바둑의 그것처럼 술꾼의 단수(段數) 18단계를 나눴다던 ‘술 18단계’. 그중 마지막 단계는 폐주(廢酒·열반주)로, 술로 세상을 뜨는 단계다. 내공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관주 단계’에 오른 사람이 먼저 일어난다고 해도 “조용히 가시게” 하며 웃는 고수들. 붙잡거나 가야 한다고 애원하는 여느 손님들과는 달랐다. 고수들의 내공을 전수받는 사이 옆 테이블 손님들은 주섬주섬 우산을 챙긴다.

‘자뻑’ 상사에 시달리는 영혼들

보험사 직원의 ‘화장실 예언’은 적중했다. 출입문에서 가까이 앉은 후배들이 하나둘 빠져나가자 부장도 은근슬쩍 묻혀가려 했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후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기자가 사장을 딱 지목해 결제를 요청했다.
“부장님, 15만원입니다.”
“네? 아… 네.”

   

직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다음 주 월요일 부장은 3만원씩 ‘n분의 1’을 요구했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까. 카페에는 12명의 손님이 각자의 우주를 논하다가 때론 옆 손님들과 잔을 주고받으며 합석해 ‘한민족’의 끈끈한 정을 과시했다. 내일 아침 깨어날 때의 황폐함, 그리고 자기 회환과 환멸, 허무를 곱씹을 그들이었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이성의 발 아래로 심연을 열었다.

기자도 그 대열에 동참하면서 명정(酩酊)의 종착역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한잔’ 하라며 건넨 술잔을 받아들이길 수차례. ‘권력자의 술자리’처럼 날아오는 폭탄주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가짜 주인의 ‘서비스 정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장도 ‘할 만큼 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날렸다.

쾌락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 추락은 필연이었다. 한쪽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발단은 개성공단. “개성공단이 북한의 ‘인질’이 됐다”며 ‘개성공단 철수론’을 주장하던 40대 후반의 한 남자는 친구 2명의 동의를 얻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한 친구가 반대 논리를 폈고, 결국 6·15 공동선언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기어이 한 명이 출입문을 박차고 자리를 뜬 뒤에야 그는 머리를 감싸며 미안해했다. 억제제이자 흥분제이기도 한 술은 그에게 두 가지 효능을 동시에 보여줬다. ‘10년지기’라는 두 친구는 분명 후회했으리라.
‘도어체크(door check)’로 천천히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긴 손가락이 닫히는 문을 정지시켰다. 다시 친구가 돌아왔으리라고 생각한 순간 상황은 전혀 다른 쪽으로 벌어졌다.
“사장님, 기타!”
제법 취기가 오른 40대 중반의 한 남자. 그는 익숙하다는 듯 빈자리에 앉더니 김민기의 ‘친구’를 읊조렸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하나둘 손님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모닥불만 있으면 ‘낭만 대학생’이 따로 없었다.
기자에게 그는 ‘짱가’였다. ‘어디선가 ♪~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주는 ‘눈부신’ 짱가.

그렇게 돌고 돌아 어느새 새벽 2시. 하나둘 손님이 떠나고 기자도 기자수첩과 가방을 챙겼다(이날 자정 이후 기자수첩에 적힌 메모는 ‘판독 불가’였다).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던 시인 천상병의 시구처럼 기자는 달리는 택시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소맥’시장 ‘넘버투’의 반란 건곤일척? 당랑거철?
롯데 두산주류·KKR 오비맥주 도전장 … 진로·하이트는 “찻잔 속 미풍” 평가절하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대한민국 ‘소맥’(소주와 맥주)시장에 전운(戰雲)이 감돈다. 폭풍 전야의 먹구름. 소맥시장 2위 업체 주인이 바뀌면서 ‘넘버원’은 이들 새 주인의 동태 파악에 나섰고, ‘넘버투’는 기습을 노리고 있다.

막강한 영업망을 자랑하는 롯데가 ‘처음처럼’을 앞세우고, 5년간 오비맥주의 주인이 된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ohlberg Kravis Roberts, 이하 KKR)는 ‘카스’의 변신을 예고하며 소맥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목표는 1위 탈환. 하지만 국내 주류시장의 ‘거인’ 진로·하이트그룹의 수성(守成) 전략도 만만찮다. 진로·하이트그룹 대 롯데그룹, 진로·하이트그룹 대 KKR 오비맥주라는 새로운 ‘소맥 전선’에서 ‘넘버투’들의 공격은 어떻게 진행될까. 건곤일척(乾坤一擲)일까, 당랑거철(螳螂拒轍)일까.

‘처음처럼’ 선전에 ‘참이슬’ “깜짝이야”

지난해 두산주류를 인수한 롯데는 올 4월 이효리를 앞세워 ‘처음처럼’ 제3차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룹 인수 후 내부 조율을 끝내고 마케팅 전쟁에 돌입한 것. 이 캠페인은 이효리의 섹시 발랄 댄스와 함께 새로운 카피인 ‘흔들고! 쪼개고! 넘기고!’가 반복되는 가사와 멜로디가 핵심. 롯데는 수도권시장에서 8(진로) : 2(롯데) 구도를 흔들어놓을 것으로 내다본다.

전체 소주시장(군납·수출포함) 중 수도권시장(44.8%) 다음으로 큰 부산·경남시장(15.7%) 공략도 강화했다. 수도권에서는 ‘처음처럼’이 21%의 점유율을 기록하지만 부산, 경남지역에선 각각 0.4%, 0.6%로 절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 그래서 부산·경남 연고팀인 롯데자이언츠의 선수 헬멧에 ‘처음처럼’을 새겨넣고, 부산·경남 팬이 많은 롯데 강민호를 이효리와 함께 모델로 내세웠다. 야구에 죽고 사는 ‘부산(경남) 사나이’들에게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고 있다.

“3월까지는 그룹 인수에 따른 업무 인수인계 때문에 기존 활동을 유지하는 선에서 마케팅 활동을 벌였다. 이젠 이효리를 앞세워 본격 추격전을 펼친다. 수도권은 물론 지방에서도 서서히 점유율을 높여갈 것이다. 음료 유통망과 롯데마트도 적극 활용할 생각이다.”

롯데주류BG 관계자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처음처럼’은 올해 1~3월 전년 대비 매달 3.0% 이상 판매량 증가 추세를 이어갔다. 반면 진로는 ‘강적’ 롯데의 등장과 함께 1분기 연속 마이너스 판매율을 보이며 비상이 걸렸다. 전년 대비 판매량(내수 기준)이 1월 -24.8%, 2월 -9.4%, 3월 -4.6%를 기록한 것.

“12월 말 참이슬의 출고가가 5.9% 인상(888.9원)됐다. 가격 인상 전 미리 사뒀기(가수요) 때문에 판매가 준 것이다. 대수롭지 않다.”

   

진로 이규철 상무의 말처럼 진로는 지난해 12월에는 월별 최고 판매실적(686만 상자)을 냈다. 하지만 롯데도 올해 1월4일 ‘처음처럼’의 출고가를 6.1% 인상(869원)했지만 플러스 판매실적을 이어가고 있어 ‘시장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이 상무의 분석은 이에 아랑곳없다.

“경기침체로 주류산업 전체가 ‘다운’돼 있다. 불황에 강하다는 소주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다 신종 플루 때문에 삼겹살 판매가 줄었고, 덩달아 소주 판매량까지 줄었다. 적게 파는 업체는 조금만 더 팔면 곧바로 플러스 판매율을 보인다. 롯데와 비교할 수 없다.”

진로는 공식적으로는 ‘넘버투’의 도전에 ‘무반응이 상책’이라는 표정이다. 괜히 롯데의 도전에 맞서다가는 그들의 전략에 말려든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윤종웅 사장이 각 사업장을 돌며 업무보고를 받는 등 롯데를 상대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지난 3월23일 여성과 젊은 층을 겨냥해 18.5도짜리 ‘J’를 출시한 것도 주로 젊은 층이 선호하는 ‘처음처럼’을 목표로 한 선제공격 성격이 짙다. 광고 카피도 ‘‘처음’보다 1도 더 부드러운 J’이다. 이로써 진로는 20.1도 ‘참이슬 오리지널’과 19.5도 ‘참이슬 후레쉬’와 더불어 ‘소주 라인업’을 구축했다.

지방 소주회사들도 롯데의 등장에 한판 승부가 불가피해졌다. 지방 소주회사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신세가 되지 않으려고 이를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규정, 지방 소주 애용 캠페인과 수도권시장 역공격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전체 소주시장의 45%를 차지하는 서울·수도권시장을 공략하지 않으면 ‘두 공룡’의 지방시장 잠입에 맞설 수 없다는 판단 때문. 경북을 기반으로 한 ‘금복주’는 프리미엄 소주 ‘오크젠’과 ‘경주법주’ 등을 앞세워 수도권 공략에 나섰다.

한편 지난해 국내 소주 판매량은 1억1613만9000상자. 1상자는 360㎖×30병이니 무려 34억8417만 병이 팔려나갔다. 국민 1인당 72.5병, 19세 이상의 음주 가능인구로 따지면 1인당 93병을 마신 셈이다.

오비맥주 “카스 앞세워 1위 탈환”

최근 오비맥주를 인수한 KKR은 5년 후 AB인베브사에 회사를 되팔아야 한다. 매각 대금의 일정 금액 이상에 대해서는 85%를 가져간다는 조건도 붙었다. 결국 KKR로서는 수익을 많이 낼수록 유리하다. 행운의 여신이 KKR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올해 1분기는 오비가 먼저 웃었다. 오비맥주는 1분기에 1615만 상자(1상자는 500㎖×20병, 수출분 불포함)를 팔아 전년 동기 대비 판매율이 6.6% 소폭 상승했다. 시장점유율은 지난 동기간 39.9%에서 42.2%로 뛰어올랐다. 4월 시장점유율은 43.7%로 크게 올랐다.

주원인은 ‘카스’의 선전. 4월 초 출시한 ‘카스 2X’를 비롯해 ‘카스 후레쉬’ ‘카스 라이트’ ‘카스 레드’ 등 다양한 맥주를 선보인 ‘메가 브랜드’ 전략이 젊은 층을 파고들었다는 게 오비맥주의 자체 분석이다. 지난해 말 한 브랜드 선호도 조사에서 ‘카스’가 37.9%, ‘하이트’가 22.8%를 기록해 ‘젊은 맥주=카스’ 공식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오비맥주 이호림 사장은 “소비자의 니즈(수요)에 발맞춰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마케팅 활동을 강화할 예정”이라며 “성장 모멘텀에 박차를 가해 여름 성수기 시장 선점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하이트는 비상이 걸렸다. 시장점유율이 지난해 4월 60.6%에서 올해는 56.3%로 내려앉았기 때문. 하이트는 ‘하이트’와 ‘맥스’를 더욱 강한 브랜드로 키우고 젊은 층 공략을 위한 스포츠 마케팅도 준비하고 있다.

한편 50년 넘게 경쟁해오며 서로에게 성공과 패배를 맛보게 한 라이벌 하이트맥주와 오비맥주는 지난해 3조3334억원의 맥주시장에서 58.6%와 39.8%로 시장을 양분했다. 오비는 40여 년 가까이 독주체제를 구축했지만 1993년 ‘100% 천연암반수’를 내세운 하이트 앞에서 흔들리더니 3년 뒤 결국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내줬다. 그 후 카스맥주를 인수하면서 맥주시장을 3사 경쟁체제에서 2사 체제로 바꿔놓았다.

 

밤마다 술병 든 전쟁…“사장님, 이모님 우리 술 OK?”, 주간동아 기자, 소주회사 1일 영업사원 아주 ‘빡센’ 체험기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유재영 기자가 종로구 관철동의 한 주점에서 일일 도우미로 고객 홍보 행사를 벌이고 있다.

무작정 김밥 싸서 소풍을 가야 할 것 같은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오후. 일주일 내내 업무에 시달린 회사원 박승균(28) 씨는 창문 사이로 스며든 봄바람을 맞으며 꿀맛 같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꿈쩍도 하지 못했다. 뱃속에서 여러 차례 ‘꼬르륵’ 진동이 울렸지만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잠과 휴식이 절실했다.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무렵, 하루 종일 조용하던 휴대전화 벨소리가 적막을 깼다.

‘흔들고♬~~ 쪼개고~~ 넘기고~~ 라랄랄라♪♬~~ 흔들고♬~~ 쪼개고~~ 넘기고~~.’
“에잇, 쪼개긴 뭘 쪼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휴대전화를 쥐었다. 휴대전화 벨소리는 이효리가 부른 소주 CF송. 다른 벨소리였다면 거들떠도 안 봤겠지만 자신의 회사 CF송이라 본능적으로 귀에 휴대전화를 갖다 댔다.
“여, 여보세요….”
“어, 승균아. 잤냐? ○○갈비집 △△형인데 술 한잔 하자, 나와라.”
“아… 네. 형… 수, 술이요?”
“빨리 나와라.”
“(한숨을 내쉬며) 아, 알… 겠습니다.”
“승균아, 손님들이 소주 두 병 마시면 보너스로 너희 회사 소주 한 병 서비스할게.”
그제야 박씨의 눈에서 불꽃이 인다.
“앗, 정말요? 바로 튀어가겠습니다.”

   

소주 ‘처음처럼’을 생산하는 ㈜롯데주류BG의 영업사원인 박씨에게 일요일에 술 마시자고 전화한 사람은 그가 관리하는 음식점의 매니저. 박씨 회사의 소주를 팔아주는 귀한 고객이다. 몸 상태로 봐선 백번 거절해야 마땅하지만 투철한 직업정신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정신도 몽롱했지만 조건반사적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이렇게 박씨의 한 주는 불운하게도 다른 직장인보다 하루 빠른 일요일에 시작됐다.

소주회사 영업사원의 마케팅 현장을 체험 취재하기로 한 기자는 일요일부터 시작되는 박씨의 ‘무용담’을 듣고 깜짝 놀라 계획을 수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혹독했던 군생활이 떠오르면서 ‘군대도 다녀왔는데 그깟 소주 영업쯤이야…’라는 생각에 박씨와 하루 동안 운명의 동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 이 몹쓸 자신감.

하루 50여 업소 순례 ‘눈도장 찍기’

5월14일 목요일 오전, 서울 중구 장충동의 롯데주류 서울영업본부 특판북지점 사무실. 각자의 구역에서 판촉활동을 벌이려는 영업사원들이 판촉물과 판매율 자료 등을 챙기느라 부산하다. ‘1일 객원 영업사원’에 임명된 기자는 뭐가 뭔지 몰라 어안이 벙벙.

특판북지점은 강북지역 영업을 총괄하는 곳이다. 이 지점의 영업사원들은 신촌, 홍익대입구, 종로, 명동, 용산, 마포, 대학로, 건국대입구 등 유흥가가 밀집된 주요 지역을 한 곳씩 맡아 자사 주류 점유율과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매일 힘겨운 판촉활동에 나선다. 60여 명의 영업사원이 판촉활동을 벌이는 곳은 대부분 ‘2차처’. 2차처는 영업사원끼리 쓰는 은어로 각종 주점, 고깃집, 횟집, 식당 등을 말한다. 이들은 도매상을 1차처, 소매상을 2차처라고 부른다. 영업사원들은 직접 2차처에 나가 사장, 점원, 아르바이트생을 대상으로 자사 주류를 많이 들여놓고 팔아달라며 로비 아닌 로비를 벌인다. 물론 손님들에게도 직접 다가간다. 업소들은 현행법상 주류 도매상을 통해서만 술을 구입할 수 있다. 따라서 영업사원들에게는 2차처가 1차처를 통해 자사 술을 더 많이 사들이도록 하고, 또 손님에게 자사 술을 타사 술보다 많이 권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특판1과 소속인 박씨의 관할구역은 종각역 인근 관철동, 관수동과 다동 일대. 대기업, 영어학원, 은행 등이 밀집해 주변 상권도 넓게 형성돼 있다. 유동인구의 비율이 젊은 층과 중장년층으로 반반씩 나뉘기에 이를 아우르는 여러 형태의 음식점과 주점이 길게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진로와 롯데주류의 소주 판촉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 초짜 영업사원으로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기자는 당차게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오전 11시. 포스터와 판촉상품을 차에 가득 싣고 박씨와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 박씨는 도착하자마자 관리 업소마다 찾아다니며 얼굴 도장을 찍었다. 그 이전 시간에는 업소들이 점심식사 준비를 해야 하고, 12~1시에는 점심 손님을 받느라 바쁘며, 오후 3~5시에는 식당이나 주점 종업원들이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재빠르게 판촉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박씨가 관리하는 업소는 200여 개. 그중 50여 개 업소는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찾는 집중 관리처다.

“200여 곳 가운데 저희 제품을 아예 받지 않는 업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가 인사만 해요. 반면 업계 1위인 타사 소주와 우리 회사 ‘처음처럼’을 비슷하게 받고, 손님들에게 저희 제품을 먼저 권유하는 업소는 주요 관리 대상이죠. 이런 곳에는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가요. 그러다 보면 자연히 종업원들, 특히 저희가 ‘이모’라 부르면서 살갑게 대하는 서빙 아주머니들과 친해져요. 이모들이 출출해질 시간에 간식을 챙겨 드리거나 일이 끝난 늦은 시간에 집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하죠. 술자리도 자주 갖고요. 이렇게 쌓은 친분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재산이 돼요.”

   

영업사원 박승균 씨(왼쪽)의 차는 언제나 판촉상품과 포스터로 가득 차 있다.

업소를 찾을 때는 무턱대고 인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들의 취향, 취미, 그리고 작은 습관이나 사생활까지 면밀히 살피고 배려한다. 처음엔 “(술은) 손님이 원하는 대로 줘야지”라고 중립을 지키다가도 이런 과정을 통해 친분이 쌓이면 어느 순간 한 제품만을 손님에게 권하게 된다. 박씨가 실전을 통해 익힌 노하우다. 곧바로 ‘현장실습’이 이어졌다.
“저기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 15개만 사오세요.”
박씨가 기자에게 신용카드를 건넨다.
“네?”

박씨는 아무것도 모른 채 비닐봉투 가득 바나나우유를 담아온 기자를 관수동의 한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단체예약이 많아 테이블당 소주 소비량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박씨가 조용히 귀띔했다.
“손님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요. 심지어 한 테이블에 종종 소주 두 짝(60병)씩도 나가는 곳이에요.”
바나나우유를 들고 업소 안으로 들어가니 여종업원들이 ‘고운 님’ 반기듯 한다.
“안 그래도 우유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요. 저기 좀 봐, 저쪽 예약 테이블에 □□소주는 한 병도 안 권했어.(웃음)”

정말 테이블엔 ‘처음처럼’만 잔뜩 올려져 있었다. 바나나우유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 것. 일단 작전 성공이다. 박씨는 “자주 찾아가 눈을 맞추고 이렇게 간식까지 챙겨주면 나중엔 미안해서라도 잘해준다”며 웃었다. 다음 이동지는 관철동. 아니나 다를까. 박씨는 또 다른 미션을 준다. 그러면서 1만원짜리 전화카드를 건넨다.
“이게 뭐죠?”
“지금 우리가 갈 식당은 삼겹살집인데 중국에서 온 교포 누님들이 일을 해요. 전화카드를 주면 아주 좋아들 할 거예요.”
박씨의 말 대로였다. 저녁 영업을 위해 식당 내부를 정리하던 중국 교포 종업원은 전화카드를 받더니 연신 “고맙다”며 냉수를 권했다.
‘이때다’ 싶어 고개를 조아렸다.
“손님들에게 저희 소주 좀 많이 권해주세요.”
기다리던 대답이 돌아왔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뿌듯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오는데, 박씨가 전화카드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어떤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의 말씨를 들으니 중국 교포인 것 같아서 전화카드를 건넸는데, 알고 보니 경상도 분이었어요. ‘니 뭐꼬’라며 눈을 부릅뜨는데…. 그날 한 대 쥐어박힐 뻔했죠.(웃음)”
때 이른 한낮 더위에 힘겨워하던 기자는 박씨의 ‘실전 개그’에 잠시 더위를 잊었다.

오후 2시30분. 관철동 ‘○○닭한마리’ 식당. 박씨는 들어서자마자 줄자를 꺼내더니, 주방장이 만든 음식을 종업원들에게 내놓는 입구 주변을 부지런히 측정했다. 입구 주변으로 파이프가 지나가 보기에 좋지 않다는 업소 주인의 말을 듣고 박씨가 광고물을 제작해 그곳을 가려주겠다고 약속했던 것. 영업사원은 자기가 관리하는 업소 시설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업소 주인이나 종업원들도 영업사원과 어느 정도 친해지면 컵이나 앞치마 같은 물품, 또는 메뉴판이나 광고판 제작까지 종종 부탁한다. 박씨는 “신입사원 때는 식당에서 서빙도 했다”고 전했다.

   

1 찢어진 ‘처음처럼’ 광고 포스터. 박승균 씨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이다.
2 영업 관계자들과 확실하게 친분 맺기, 영업의 성공은 바로 여기에 달렸다.

이런 사정은 주류 판촉업계에선 관행처럼 굳어졌다. 일부 업소에서는 라이벌 회사 양쪽 모두에 ‘협조’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이는 고스란히 영업사원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약속을 잊지 않고 제때 부탁을 들어줘야 효과가 있다. 그래서 박씨의 손엔 ‘약속일지’라는 노트가 들려 있다. 이 노트에는 매 쪽에 업소의 요구사항과 처리 예정 날짜가 깨알처럼 적혀 있다.

요즘엔 컵이나 앞치마 같은 물품은 아예 회사 차원에서 자사 광고 이미지를 붙여 판촉용으로 제작, 업소가 필요할 때마다 공급한다. 메뉴판도 업소 이미지에 맞게 주인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제작해준다. 업소 바깥에 설치하는 광고판도 10만원대를 넘어서지만 회사 부담으로 처리해 제공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오후 3시. 지금까지는 업소 관계자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업소들이 저녁 영업을 준비하는 이때부터 라이벌 업체와 본격적인 판촉전쟁에 나선다.

관철동 ○○김치찜 전문점. 박씨는 업소 안에 붙은 타 업체의 소주 광고 위에 ‘처음처럼’ 포스터를 붙였다. 정작 손님들은 실감하지 못하지만 영업사원들에게 포스터 붙이기는 절대 밀려서는 안 될 자존심 대결이다. 한쪽에서 포스터를 붙이면 30분~1시간 후 예외 없이 다른 업체의 포스터로 바뀌어 있다.

“아이… 이모, 저게 뭐예요….”
“뭘? 나도 몰라 그건…. 언제 그랬지?”

포스터를 다 붙인 박씨는 업소 안쪽을 쭉 둘러보더니 맥 빠진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로 걸음을 옮겼다. 타사의 소주가 냉장고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냉장고의 위쪽 두 번째 칸은 영업사원들 사이에서 ‘골든 존’으로 불린다. 손님들이 술을 주문하면 종업원들은 대부분 눈높이와 거의 일치하는 두 번째 칸의 소주를 꺼내주게 된다. 이 행위 자체가 판매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업사원들은 굉장히 민감해한다. 바로 달려가 자사의 소주로 두 번째 칸을 채워야 직성이 풀린다. 타사의 소주는 라벨이 보이지 않도록 돌려놓기도 한다.

오후 5시경, 종로3가 서울극장 옆 보쌈 골목. 이 골목 중심에 자리한 ○○○보쌈집은 여러 매체를 통해 맛나기로 소문난 곳이다. 오후 7시만 돼도 1, 2층이 만석이다. 손님이 하루에 네 번이나 회전된다. 보통 한 달에 200짝(6000병), 겨울에는 320짝(9600병)의 소주가 팔린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규모. 당연히 소주 업체들이 판촉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요지다. 그러다 보니 라이벌 소주 회사 직원들과 수시로 마주친다. 경쟁업체에선 아주머니 아르바이트 요원까지 동원해 업소 ‘이모’들의 수고를 덜어주기도 한다. 박씨에겐 매우 거슬리는 대목. 결국 보쌈집 앞에서 애처로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거, 불공정행위예요. 새우젓 덜어주지 마세요.”

   

저녁이 되어서도 영업 사원들의 발걸음은 멈추질 않는다.

“에이, 박형. 왜 그래…. 우리도 먹고 살자.”
“그러면 다시는 포스터 도배하지 마세요.”
“안 해, 안 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6시 이후엔 종각역 인근 거리에서 담당 영업사원들끼리 정면충돌을 한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고생한다”고 격려하지만 속내는 편치 않다. 혹여 방금 자신이 붙인 포스터를 뜯어가는 모습을 목격하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몇 년 전엔 멱살잡이도 했어요. 경찰서까지 간 적도 있고요.”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저녁밥을 먹을 때조차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혼자 늦은 저녁밥을 몇 술 뜰 때도 테이블 위에 ‘처음처럼’ 서너 병은 올려놔야 마음이 놓인다. 영업맨에겐 밥 먹는 것도 판촉행위다.

2시간에 소주 20잔, 기자 녹다운

직접 손님들과 접촉해 자사 술을 권하고 장점을 알리는 것도 영업사원들의 업무다. 박씨는 오후 8~9시 이후 손님들과 함께하는 판촉활동을 전개한다. 원하는 손님에겐 명함을 청해 계열사인 롯데제과의 과자를 보내준다. 남성 손님과는 술잔을 주고받기도 한다. 기자도 소주잔 받기를 수차례, 어느새 머리가 핑 돈다. 2시간 남짓 기자가 얻어 마신 소주는 20여 잔. 3병이 넘는다. 매주 닷새,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소주 3병을 마신다고 하니 그 좋아하는 술 생각이 싹 가셨다.
“저희 영업사원들 절반이 신체검사에서 정상 간수치 이상이 나와 재검을 받아요. 어느 정도인지 아시겠죠?”
그래도 쉴 틈은 없었다. 오후 8시30분 ○○로바다야끼. 회식 중이던 은행 여사원들이 박씨가 다가오자 환호성을 질렀다.
“여자친구 없어요?”
예쁘장한 외모의 박씨에겐 이렇듯 여성 손님들의 관심이나 소개팅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고. 박씨가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라며 정중히 사양하자 “처음처럼 좋아요”라는 여성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기쁜 마음에 자기 돈으로 소주 5명을 사서 손님들에게 돌렸다.

박씨는 오후 10시30분이 돼서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판촉하랴, 술 마시랴 녹다운된 기자를 먼저 택시에 태운 뒤 길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처음처럼’ 포스터를 다시 제자리에 붙였다. 기자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쓰러지기 직전 냉장고를 열고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찬 기운이 느껴졌지만 분명 땀도 맺혀 있었다.

자나깨나 술愛 빠진 두 남자, 브랜드 매니저들, 주당 사로잡기 24시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롯데주류 조판기 차장(왼쪽)과 페르노리카코리아 김상훈 차장이 자사 주류 샘플을 시음해보고 있다.

“그래, 이 맛이야. 이거야. 음… 좋다. 어, 안 돼. 다가오지 마!”
스윽~ 헉! 꿈이었다. 회사가 개발한 소주를 시음하다 정말 환상적인 맛을 느꼈다. 그러다 술이 엄청난 파도로 변해 몸을 휘감았다. 길몽 같기도 하고 살짝 가위에 눌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상황이 아니라서 아쉬움도, 불길한 느낌도 없다. 매일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면서도 꿈이라고 의식할 정도다. 좋은 맛을 느낀 꿈이 현실로 재현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오히려 기분이 좋다. 싱글벙글. 출근길 발걸음이 가볍다.

롯데주류BG 마케팅팀 조판기 차장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됐다. 조 차장은 매일 술꿈을 꾼다. 요즘엔 소주 ‘처음처럼’이 단골손님. 첫사랑마저 뒷전이다. 꿈에 첫사랑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는 소주를 사랑한다. 소주에서 희망을 얻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조 차장은 회사 주류제품의 광고·홍보, 시장 조사, 제품 개발을 담당하는 브랜드 매니저다. 정말 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무실 책상 위엔 술병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마치 난을 관리하듯, 술병에 묻은 먼지를 정성스럽게 닦아낸 뒤 본격적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대작’의 추억 … 입에 술 마를 날 없다!

1991년 두산그룹 공채로 입사한 조 차장은 사내 기술원과 마케팅 부서를 두루 거쳤다. 회사에서 작정하고 브랜드 매니저로 육성한 케이스다.
출근한 뒤 무슨 일을 먼저 할까.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대작’인 ‘처음처럼’을 떠올린다. 2년간의 연구 및 개발 끝에 2006년 출시한 ‘처음처럼’. 그 한 방울 한 방울은 술이 아니라 그의 땀이다.

“소주는 79%가 물, 20%가 알코올, 나머지 1%가 당과 아미노산 등의 첨가물로 이뤄집니다. ‘처음처럼’ 개발에 착수하기 직전 다른 회사들이 ‘나머지 1%’에 무엇을 쓸지 골몰해 있을 때 우리는 물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죠. 당시 소비자들이 프리미엄 생수, 녹차 등 건강음료를 선호하는 추세여서 시기도 잘 맞았기 때문에 물에 관한 스터디를 집중적으로 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칼리 환원수라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이게 제대로 히트한 겁니다.”

기존 소주시장의 패러다임과 소비자 트렌드 연구의 고정관념을 깬 당시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그는 업무 시작 전 황홀했던 추억부터 되살려본다. 그리고 흐뭇한 회상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숨 가쁜 일과가 이어진다. 먼저 각 지역 영업지점이 보고하는 일간 및 주간 리포트부터 살펴본다. 자사의 주류 매출, 판매 액수부터 소비자 트렌드 동향, 행사 소비자 반응, 라이벌 주류 업체 홍보, 판매 상황 등의 정보가 망라돼 있다.

‘홍대입구 피카소 거리 좌측 지역은 최근 업소들이 문을 빨리 닫는 반면, 우측 지역에는 24시간 영업 주점이 계속 생겨남.’

   

강북지점에서 보낸 주간 리포트 내용이 조 차장의 눈에 띈다. 곧바로 달력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에 빨간색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현장을 방문할 날짜다. 홍보대행사가 정리해 보내준 업계 뉴스와 해외 주류업체 사이트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 지금껏 출시된 제품을 모아놓은 방을 둘러본다. 옛 제품을 다시 살펴보고 외부에서 만난 소비자들의 반응을 떠올리면서 새로운 포장이나 판촉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짜내는 시간이다. 여기서 ‘처음처럼’ 미니어처와 소주 온도를 시원하게 유지하는 ‘쿨팩’ 등 기발한 판촉물이 나왔다.

포장 라벨 글씨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도 고민 중이다. 조 차장이 매일같이 고심한 끝에 얻은 아이디어는 100여 개. 그중 소비자 트렌드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TFT를 구성해 시장 검증 테스트에 들어간다.

브랜드 매니저 업무의 꽃이자 하루 일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술 테스트다. 소비자들은 소주의 도수나 맛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회사로선 소비자 입맛 트렌드의 작은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현장에서 각계각층 소비자들의 취향을 분석한 뒤 자사 연구소 측에 도수와 맛에 조금씩 변화를 준 샘플을 요청해 가장 먼저 시음해본다.

샘플 정보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번호만 적힌 샘플의 맛을 본 뒤 보고서를 쓴다. 미각이 가장 예민하다는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테스트를 하는데, 정확한 느낌을 분석하기 위해 한 자리에서 샘플 3종류까지만 시음한다. 테스트해야 할 샘플은 무려 140여 개. 조 차장은 “‘처음처럼’을 개발할 무렵엔 집에서 하루 24개까지 테스트해봤다. 아내가 옆에 붙어 앉아서 그때그때 안주를 대령했다”며 웃었다.

테스트는 밤까지, 사무실 밖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최근엔 삼겹살 등 소주에 잘 어울리는 안주와 어떤 술맛이 가장 맞는지를 분석하고 소비자들의 반응을 듣기 위해 연일 회사 배지를 뗀 채 주점을 드나든다. 경쟁사의 제품도 맛본다. 매달 경쟁사의 제품과 자사 제품을 번갈아 시음하고, 3개월에 한 번씩 경쟁사 제품의 맛 변화를 세밀하게 살핀다. 이게 다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툴(tool)도 만들어야 하고, 광고 스터디도 해야 하고, 새로운 패키지 판촉물의 론칭 계획도 짜야 하고, 일본 술 잡지를 뒤적거리며 디자인 분석도 해야 하고…, 휴.”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됐지만 꿈에서 ‘처음처럼’과 이효리를 만날 생각에 다시 시동을 건다.

네트워크 관리에 올인 … ‘가짜 양주와의 전쟁’

양주업계 판매 1위 제품인 ‘임페리얼’ ‘발렌타인’ 등을 생산 및 판매하는 페르노리카코리아 마케팅팀 김상훈 차장은 브랜드 매니저로서 고객을 철저히 살피는 업무로 하루 일정을 짠다. 양주는 상대적으로 고가의 술이라 소비자 사이에서 비용 대비 만족과 불만족이 극명히 엇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보다 현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주류 도매상, 나이트클럽, 단란주점 등 양주를 취급하는 곳을 쉴 새 없이 찾는다. 굳이 사무실에 나가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영업사원 출신이라 주류업계 곳곳에 인맥이 깔려 있어 전화 몇 통만 돌리면 업계 현황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다.

김 차장의 브랜드 관리 철학 역시 ‘고객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업소를 돌아다니며 판매 동향보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집중적으로 듣고, 여기에 포커스를 맞춰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짠다. 술을 많이 마시는 헤비유저들은 따로 일주일에 몇 번씩 접촉해 소비자 보호와 관련된 심도 있는 요구사항을 듣는다. 업계 최초로 개발한 ‘임페리얼’의 위조방지캡은 소비자 보호 철학을 실천에 옮긴 사례.

“어느 술집에 가봐도 고객들은 ‘위조 안 되는 양주가 어디 있냐’며 한목소리를 냈어요. 또 업소에서 양주를 따줄 때 ‘남이 먹다 남은 것을 섞어서 내놓는지 어떻게 믿냐’라고도 하죠.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양주병 캡을 납품하는 회사와 개발에 들어갔어요. 가짜 양주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고객의 말이 아이디어가 된 거죠.”

이후 수년에 걸쳐 위조방지캡이 업그레이드됐고, 최근엔 세계 최초로 3중 위조방지캡이 달린 ‘임페리얼’을 출시했다. 과거 양주 영업을 하면서 업소 주인에게 소금 세례를 받고 쫓겨난 경험도 있다는 김 차장. 그때 의미심장한 교훈을 얻었던 걸까. 브랜드 매니저로서 그의 목표는 ‘소비자들의 소금이 되기’이다.

 

화끈한 효리‘처럼’ 흔들고, 지원처럼 ‘참’하게 벗다! , 소주 광고, 그 色다른 유혹의 세계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이영애 김혜수 이효리 송혜교 김태희 손예진 김정은 한예슬 하지원 김민정 성유리 김아중 신민아 손담비 백지영….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잘나가는 여자 연예인? 맞는 말이다.

하지만 소주깨나 마셔본 주당이라면 그보다 구체적인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들은 모두 소주 광고의 메인 모델을 했거나, 지금도 모델로 활동하며 뭇 남성의 시선을 잡아채는 국가대표급 ‘S라인’ 연예인이다. 정상급 여자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소주 모델을 거쳐간다는 얘기는 이제 정설.

밤 10시 이후 TV 방송 광고가 허용된 맥주와 달리 소주는 지면 광고와 인터넷 동영상 광고(19세 이상만 볼 수 있다)만 허용돼 있다(알코올 도수 17도 미만의 소주는 TV광고 가능). 따라서 대량의 직접 광고 마케팅은 포스터와 달력이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포스터에 어떤 모델을 어떤 콘셉트로 쓰느냐에 따라 매출이 출렁인다. 그만큼 소주 광고 모델 선정이 중요하다. 애주가가 아니어도 ‘처음처럼’의 광고 모델이 이효리라는 것은 안다. ‘처음처럼’ 대신 ‘효리’가 술 이름으로 불리는 게 현실. 어느 밥집, 술집에서든 “효리 주세요”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처음처럼’을 가져다준다.

소주 광고에 여자 모델이 등장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른 나이에 술에 눈뜬 30대 후반 그리고 40, 50대 서민형 주당이라면 1980년대와 90년대 초까지 선술집에 펄럭이던 알록달록한 달력을 기억할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조금 과장해서 그야말로 실오라기만 걸친 미녀들이 달력에서 주당들을 유혹했다. 아슬아슬한 수영복이나 속옷이 훤히 비치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인네들이 교태를 부리는 달력은 ‘선데이 서울’보다 야했다. 술꾼들은 소주 한 잔 들이붓고, 달력 한 번 쳐다보며 “캬~”를 연발했다.

저도주 경쟁으로 광고 전쟁 불붙어

달력이 걸린 쪽의 자리는 언제나 ‘선착순’이었고, 가을을 지나 겨울이 와도 달력은 모델의 노출이 심한 6, 7, 8월에 고정됐다. 주인 몰래 달력을 찢어가는 못된 주당도 있었고, 그래서 달력 밑에 ‘촉수엄금’이라 써놓은 술집도 있었다. 식당들은 ‘좀더 많이 벗은’ 소주회사 달력을 구하느라 안달이 났다. 비키니 미녀 달력은 정부의 집중단속과 1992년 자도주(自道酒) 50% 구입 원칙 붕괴에 따라 역사의 뒷자락으로 사라졌다. 진로(‘참이슬’)의 시장점유율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지방 소주와의 경쟁체계가 무너져 더 이상 여성 모델 노출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1990년대 소주 광고는 남성 일변도였다. 도수가 높은 술이라 강한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70여 년간 이어온 ‘독한 소주’의 흐름이 98년, 소주시장을 주도하던 진로 ‘참이슬’에 의해 깨지기 시작했기 때문. 1924년 알코올 도수 35도로 출범한 국내 소주시장은 40년 만인 65년에 30도, 73년에 25도로 떨어진 후 근 25년간 25도라는 마의 벽을 깨지 못했다. 소주라고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이 25도를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1998년 23도짜리 ‘참이슬’ 출시 후 알코올 도수는 계속 떨어져 2009년 현재엔 18.5도까지 내려왔다. 소주시장에 저도화 시대가 열린 데는 2006년 20도의 벽을 처음 깬 ‘처음처럼’이 큰 몫을 했다. 소주시장에 알칼리 환원수 전쟁을 몰고 온 ‘처음처럼’은 계속 도수를 떨어뜨렸다. 이렇게 해서 ‘저도주 전쟁’이 벌어지자 광고 전쟁도 치열해졌다.

‘심한 노출은 역효과’? … 그래도 벗어야 먹혀

소주 광고에 스타급 여성 모델이 등장한 것도 저도화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소주 도수를 파격적으로 낮춘 진로는 1999년 이영애를 포스터 모델로 영입했다. 당시 히트한 카피는 ‘반했어요’와 ‘깨끗해요’. 이영애는 남성들도 좋아하지만 여성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빅 모델이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시대가 돼 있었다. 이에 ‘경월소주’의 후신이자 ‘처음처럼’의 전신인 ‘그린소주’는 김혜수를 대항마로 내세웠다.

이후에도 깨끗함을 강조한 ‘참이슬’의 여성 빅모델 광고는 계속됐다. 진로는 소주 모델을 미스코리아처럼 대(代)를 붙여 부르는데 2대 황수정(2000년), 3대 박주미(2001년), 4대 김정은(2002년), 5대 최지연(2003년), 6대 김태희(2004년), 7대 성유리(2005년), 8대 한태윤 외 3명(2006년), 9대 김아중(2007년), 10대 김민정 신다은(2008년), 11대 하지원(2009년)이다.

10년 세월 동안 진로의 남성 모델은 2007년의 태진아 이루 부자뿐. 아버지는 ‘참이슬’을, 아들은 더 부드러운 ‘참이슬 후레쉬’를 상징했다. 당시 카피는 ‘세대공감’. 사실 이 광고는 단일 소주 상품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진로소주 전체의 이미지 광고여서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았다.

‘처음처럼’의 두산주류(현 롯데주류BG)는 2000년 이영애의 ‘참이슬’에 맞서 ‘그린소주’ 광고 모델로 김혜수를 잠깐 기용한 뒤 다시 강한 이미지의 남성들을 모델로 세웠다. 최민수 유오성 장동건이 그 주인공. 이들을 통해 ‘산’ 소주의 이미지 광고를 강화하려 했으나 소비자 조사에서 ‘산’ 맛이 ‘참이슬’보다 부드럽다는 결과가 나오자 여성 모델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첫 모델이 손예진. 청순하면서도 도발적인 이미지에 주목했다. 2006년 ‘처음처럼’을 출시한 뒤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이영아, 구혜선(2007년)을 썼는데 ‘처음처럼’의 신선하고 새로운 이미지(이영아)와 부드러운 맛(구혜선)을 광고로 형상화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10여 년 만에 소주 광고에 여성 모델이 복귀했지만 광고의 결은 완전히 바뀌었다. 모델은 국내 최정상급 모델로 격이 높아졌고, 광고 콘셉트도 ‘노출’ ‘강하고 독한 이미지’에서 ‘청순함’ ‘정갈함’ ‘깨끗함’으로 바뀌었다. 노출이 줄어든 것은 저도주 시대에 여성 고객이 느는 것도 한 이유가 됐지만, 소주에 들어가는 원료의 깨끗함을 강조하려면 광고 모델의 청순한 이미지가 먹혀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주 광고 모델의 노출 정도는 일반 광고와 비교하면 여전히 대담한 게 사실. 특히 2008년 ‘처음처럼’의 모델로 등장한 이효리는 과감한 노출과 뇌쇄적인 춤으로 애주가들을 매혹시켰다. 소주와 엉덩이를 함께 흔들며 외치는 “흔들어라!” 카피는 주당들의 가슴을 녹아내리게 했다. 이에 맞서 2009년 ‘참이슬 후레쉬’ 모델 하지원은 가슴을 훤히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나와 술잔을 권했다.

   

1·2 ‘처음처럼’ 1대 모델 이영아와 2대 구혜선.
3 ‘금복주’의 최신 광고 모델 손담비.
4 2008년 진로 ‘J소주’ 광고 모델 송혜교.
5 진로 ‘참이슬’ 6대 광고 모델 김태희.
6 최초의 정상급 연예인 소주 모델인 이영애.

이효리의 섹시한 광고는 지방 소주에도 ‘섹시’ 열풍을 일으켰다. 대구·경북지역 소주인 ‘금복주’도 최근 섹시함의 상징인 손담비를 광고 모델로 영입했다. 이효리는 인터뷰에서 “손담비보다는 내가 더 농염하다”고 말해 화제를 몰고 오기도 했다.

롯데주류 마케팅팀 김윤종 부장은 여성 모델을 본격적으로 광고에 등장시킨 배경에 대해 “소주 도수의 하향화와 연관성이 높다. 소주 하면 ‘캬~’ 하는 독한 특성을 생각하는데, 이를 부드럽고 편한 쪽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다.

진로 마케팅팀 서상범 대리도 “독주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기존 이미지와 선을 그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여성 모델의 노출에 대해선 두 회사의 얘기가 다르다. 진로 측은 “섹시함을 먼저 들고 나온 건 이효리를 쓴 롯데주류다. 우리는 하지원 외에는 그다지 노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롯데주류는 “심한 노출은 자제했지만 어느 정도의 노출은 음용자 중 남성 비중이 높은 현실에서 브랜드를 가장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받아쳤다. 노출 부담 때문인지는 몰라도 소주회사의 모델 섭외를 거절한 연예인도 있었다고 한다.

롯데주류는 ‘산’ 모델로 전지현을 섭외했다 실패했고, 진로도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소주 모델을 거절한 연예인들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소주 광고의 3대 불문율

소주의 포스터 광고에서는 지켜야 할 불문율이 있다고 전해진다. 모델의 인상과 포즈, 소주병의 위치와 모양에 관련된 것으로 △모델은 깨끗하고 청순하되 어려 보이면 안 되고 △소주잔을 왼손에 들어선 안 되며 △소주병은 포스터의 우측 하단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 실제 소주 광고 포스터를 보면 이 원칙에 위배되는 것을 찾기 힘들다.

소주 모델이 청순하되 어려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은 모델이 미성년자처럼 보이면 안 되기 때문. 그래서 모델 계약을 할 때 주민등록등·초본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진로와 롯데주류 측은 “미성년자를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등·초본을 제출하라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다. 사실이라면 모델 에이전시에서 하는 일일 것”이라고 했다. 소주잔을 쥐는 손에 대해서는 “오른손으로 술을 권하는 우리의 예의 규범에 어긋나는 것이라 왼손으로 술잔을 드는 것은 되도록 피한다”고 했다.

각 회사의 영업직원들은 포스터의 우측 하단에 있는 소주병이 기울어지면 사세가 기운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진로와 롯데주류 측은 “손으로 들고 있지 않는 이상 보편적으로 그 자리가 디자인적으로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을 뿐, 소주병이 서 있는 모양에 대해선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그렇다면 소주 광고의 모델은 매출에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까. 또한 가장 광고효과가 좋았던 모델은 누굴까. 이에 대해 진로 측은 “제품을 구매할 때 어떤 모델이 좋아서 구매한다고 도식화하기 힘들다”며 말을 흐렸다. 롯데주류 측은 매출 증감에 대해선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지만 어떤 모델이 최고냐는 질문에는 자신 있게 답했다.

“‘처음처럼’이 ‘흔들어라’ 캠페인을 시작한 이후 사람들에게 ‘소주 광고 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60%가 ‘이효리’라고 답한다. 그 밖에 ‘생각나는 광고가 없다’고 말한 사람이 30%에 이르는 것을 보면 이효리의 광고 효과가 가장 컸다. 베스트다.”

 

“주말엔 ‘업소 밀집 공원’에서 산책합니다”, 주류업계 34년 ‘왕고참’ 윤종웅 ㈜진로 사장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주말에 산책 가실래요? ‘업소 밀집 공원’이라고…. 산책하다가 식당에서 반주 한잔 걸치다 보면 바닥 경기와 소비자 취향을 금방 알게 되죠.”

㈜진로 윤종웅(59·사진) 사장은 주말과 휴일에 3시간 정도 ‘공원’ 산책을 한다. 공원은 공원인데 ‘업소 밀집 공원’이다. 시장통, 번화가를 가리지 않고 산책한다. 전국이 그의 산책로인 셈이다.

1975년 조선맥주에 입사해 하이트맥주 대표 등 주류업계에서만 34년을 보냈으니, 주말에도 한잔 걸치는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이 가족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말술’을 예상하며 주량을 묻자 “참이슬 1병, 하이트 1병”이라고 ‘정확하게’ 말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량은 마실 때마다 달라질 수 있어요. 저에게 주량은 ‘정신과 몸이 흐트러지기 전까지의 양’이거든요.”
한껏 마신다면 ‘소맥’ 각 1병+α라는 얘기다. 주량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 것은 건강관리와도 통한다.
“술자리는 10시 이전에 끝내고 숙면을 취해야 해요. 그리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아침식사를 꼭 챙기죠. 여기에 틈나는 대로 산책하는 게 저의 건강비결이에요.”

현장 목소리 즉시 반영 ‘실천 경영’

그런 그도 요즘은 매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막강한 자금력과 유통망을 자랑하는 롯데가 소주시장 재편을 노리기 때문.

“낙관적이지만은 않아요.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죠. 진로와 지방 소주사들은 자금력과 유통망을 앞세운 롯데의 시장 공략에 대응하는 마케팅 전략을 세워 철저히 대비할 거예요.”

그러면서도 인수합병(M·A)에 따른 경영 혼란, 비용절감에 따른 마케팅 여력 약화라는 ‘기회 요인’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일 수도 있다. 2006년 두산주류(현 롯데주류)가 20도짜리 ‘처음처럼’을 내놓고 젊은 층을 겨냥한 공격적 마케팅을 시작하자 51.5%(2007년

1월)이던 진로의 시장점유율은 45.3%(2007년 5월)까지 떨어졌다. 이때 ‘소방수’로 등장한 사람이 윤 사장. 하이트맥주를 1위 기업으로 끌어올린 그는 취임 4개월 만에 다시 진로의 시장점유율을 50%대로 끌어올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아니겠어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열심히 하고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면 돼요. 하늘도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도우니까요.”

그는 중국, 동남아시아 등 해외시장과 지방 공략을 강화할 예정이다(지방엔 변수가 많다. 영남에서 정권을 잡으면 진로의 영남 판매량은 늘어난다. 반대 경우는 줄어든다. 지방 사람들이 상실감에서 그 지역 소주를 더 찾기 때문. 이런 ‘정권과 소주 판매량’ 함수가 있다고 진로 고위 관계자는 귀띔했다).

그의 경영철학은 단순하지만 명쾌하다. 고객 만족을 위한 ‘실천 경영’. 구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장 목소리를 즉시 경영에 반영하는 것이다. ‘업소 밀집 공원’을 찾는 것도 이 때문.

“기업은 결국 사람이에요. 능력도 중요하지만 사람 됨됨이, 즉 ‘인성’이 더 중요하죠. 동료와 협력하고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인재를 찾아내는 것도 제 일이에요.”
그는 “세계인이 기쁨과 슬픔을 ‘참이슬’로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라며 웃었다.

 

철학과 대중가요로 푼 酒色 방정식, 욕심으로 마시면 ‘순정’에 반하는 不倫 가능성 커져
홍호표 동아일보 어린이동아 국장· 공연예술학 박사 hphong@donga.com
 
 

신윤복의 ‘야연도’.

가수 박상민의 노래 ‘무기라도 됐으면’은 주색(酒色) 관계의 극단을 드러낸다.
“…하루는 술에 취해서/ 까맣게 필름 끊겼고/ 그 다음 날 그녀는 떠났지/ 난 지금 어딘가 누워 마취에 가물거리며/ 간절하게 주문만 외워댔어/ 1cm만 제발 2cm만 제발/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 무기라도 됐으면….”

이 노래에서 주인공은 5명의 여자를 경험한다. 연상의 싱글맘을 거쳐 마지막으로 만난 ‘완벽한’ 여인에게 이별을 당한다. 술에 취해 ‘사랑’에 실패한 뒤 ‘무기(남근)’를 탓한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여주인공이 ‘무기들’에 질려 머리 깎고 산속으로 들어간 사연의 여성 버전이다. ‘무기라도 됐으면’은 직접적으로는 ‘사이즈’를 한탄하지만 의미적으로는 ‘술 탓’이다. 이것이 술과 색의 패러독스다.

“알코올이 마음의 제동장치를 풀어주긴 하지만 정력을 약화시킨다는 말도 있다. 몸무게가 75kg 정도 나가는 평균 남자의 경우 포도주를 반병 이상 마시면 ‘비판적인 수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뇌 과학으로 풀어본 감정의 비밀’, 동아일보사)

술은 적당히 마시면 의식을 풀어놓아 인간 본성에 가까이 가게 하는 효과가 있다. ‘중용’에서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천명지위성 골성지위도 수도지위교)”라고 했다. 성(性)은 하늘의 명이다. 그 명을 따르는 것이 바른길이고, 그 길이 잘못됐으면 수리해야 한다. 그게 학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술을 제대로 마시는 것(酒道)은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중용’에서는 또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서 시작된다(造端乎夫婦)’고 했다. 그러므로 남녀는 서로 끌려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천명인 성이 이어진다.

   

술은 ‘현실’을 무장 해제시키는 촉매제

인간의 의식은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기능을 한다. 체면도 의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본성을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술은 현실성이 있다. 큰 위험 없이 적은 돈으로 본성에 다가갈 기회다. 의식이 풀어지고 ‘조단호부부(造端乎夫婦)’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술을 마셔 의식이 풀어진 상태, 즉 본성에 접근해본 사람은 다시 술을 찾게 된다. 이때 남녀의 감응을 경험한 사람은 끊임없이 그 상태를 지향한다.

술을 마시면 왜 감응이 쉽게 일어날까. 여기서 우리는 ‘주역’의 함(咸)괘를 떠올려야 한다. 함괘는 택산함(澤山咸)으로 연못(澤)이 위에 있고 산(山)이 아래에 있다. 함은 감(感)이므로 이 괘가 나올 경우 ‘결혼하면 크게 길하다(取女吉)’고 했다.

산은 남자에, 연못은 여자에 비유된다. 하늘(乾道)에서 남자가, 땅(坤道)에서 여자가 나왔으므로 일단 남자가 ‘위’에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연못이 ‘아래’에 있다. 그런데 감응하려면 연못이 위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힘 있는 자가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의미다. 현실에서 힘은 권력, 남성(또는 힘 있는 여성), 돈, 권위 등이다. 모두 의식의 영역에 있고 욕심을 키우는 구실을 한다. 술은 이를 무장해제해 성선설의 관점에서 선(善)으로 이끈다. 따라서 감응하기 쉽다.

문제는 ‘적당한’ 음주에 있다. 만취하면 ‘무의식’의 상태가 된다. 언뜻 장자가 말하는 혼돈(混沌)인 것 같지만 그 혼돈도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상태로서의 ‘한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본성과 색욕이 하나 되는 유물론이 아니다. 거친 현실에서 숨 가쁘게 작동하는 의식을 풀어줌으로써 느긋함을 지니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라면 욕심 줄이기(寡欲)에 해당한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면 솔직한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서로 통하는 것이다. 이 경우 대화는 말하는 사람만 기표(記表)로서 주체가 되고 상대는 기의(記意), 즉 객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끼리의 대화다. ‘원샷’의 폭탄주 문화는 동시에 취하게 함으로써 빨리 ‘한마음’, 즉 기표끼리의 대화가 이뤄지도록 돕는다. 남녀와 직위의 구분이 약화된다. 기표는 기의 아래로 뚫고 내려가야 한다. 라캉의 이 말은 의사소통에서 ‘나’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술자리는 여성은 남성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 대해 ‘나’를 낮출 절호의 기회다. 이는 이자연의 노래 ‘찰랑찰랑’에서 분명해진다. “나는 나는 그대 잔 속에서 찰랑찰랑 대는 술이 되리라/ 그댈 위하여.” 사실 술자리에서 술과 여성(또는 남성)의 관계를 이처럼 잘 표현한 말도 드물다.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는 예이츠의 ‘Drinking Song’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주색잡기(酒色雜技)에서 색(色)은 시각을 통해 알 수 있다. 기(氣)의 영역이며 정(情)의 영역에 있다. 인간의 마음이 외물과 만나 생기는 것이 정이다. 술을 마시면 욕심이 줄어들어 순정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천명인 성은 늘 흘러내리는 것이므로 남녀의 감응도 위계질서와 신분, 성별을 넘어 ‘하나’가 될 가능성이 한결 높아진다. 이것이 주색의 본질적 관계다.

   

풍류 즐기려면 ‘酒色 중용’으로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인간은 살아서, 의식을 갖고 욕심을 줄여 순진한 마음으로 만나야 함께 즐거운 여민동락(與民同樂)이다. 이 상태가 왕도(王道)다. 술은 왕도 실현에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욕심으로 술을 마시면 불륜(不倫)의 우려가 커진다. 불륜은 남의 여자, 남의 남자와 결합하는 것 자체라기보다는 순정의 발현 순서에 어긋나는 것을 말한다. 색욕이 발현하면 그것이 불륜이다. 요컨대 음주를 순선(純善)으로 향하는 길(道)을 닦는 것, 즉 학문으로 보느냐, 욕심을 위한 도구로 보느냐의 차이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술이 거나해지면 나오는 노래를 보라. 처음에는 세대별로 유행하는 노래를 부르지만 무르익으면 세대를 넘어선다.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노래로 대체된다.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대서양을 건너…’.

‘한마음’, 즉 순선을 지향하며 마신 술이 불륜으로 귀결된다? 이제 주색의 관계는 중용(中庸)을 필요로 한다. 중용은 욕심 줄이기(술을 마시는 것)로 순선한 마음을 찾으면서도(中) 의식을 조절해 극단(고주망태)에 이르지 않고, 색욕이 아니라 순정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것(庸)이다.

술을 진정으로 즐긴다면 풍류(風流)가 돼야 하고 순선의 노래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하버마스 식의 유물론에 입각한 ‘몸통 즐기기’ 차원의 노래가 나온다면, 이는 물욕과 색욕에 지배되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히트곡인 채규엽의 ‘희망가’는 이 점을 경고했다. “주색잡기에 침몰하여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욕심은 채울수록 커지는 속성을 지녔다.

‘작업’ 목적의 음주는 ‘한마음’이 되는 듯하지만,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또 다른 욕심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비틀어놓은 것을 다시 비틀어 오늘날의 주색 풍경을 비판적으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술자리라는 체스게임에서는 ‘한마음’과 ‘순정’이라는 꼭두각시가 언제나 승리한다. 왜냐하면 주욕(酒慾)과 색욕(色慾)이라는 곱사등 유물론이 테이블 밑에서 조종하기 때문이다. 색욕은 감춰야 할 것이므로 절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적당하면 藥 넘치면 毒 술에는 죄가 없나니 , 肝 박사들이 들려주는 술과 건강의 진실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간 질환 권위자인 변관수 고려대 구로병원장.

최근 많은 주당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보건복지가족부(이하 보건복지부)의 절주(節酒) 공익광고 방송 가운데 한 대목. 직장 상사의 “위하여!” 외침에 소주잔이 연거푸 부딪친다. 모두가 취할 무렵, 화면이 흐릿해지면서 자막이 올라온다. ‘음주로 인한 결근 100명 중 12명’ ‘음주로 인한 가정폭력 100명 중 23명’ ‘알코올 사용 장애환자 180만명’ ‘음주로 인한 교통사고 연간 28416건’…. 엔딩 자막은 ‘다음 잔은 누구를 위하여 들겠습니까, 오늘은 절주’.

해마다 금연 캠페인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보건복지부가 술에 대해선 ‘금주’ 대신 ‘절주’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담배는 한 개비만 피워도 몸에 해롭다는 데 의학계의 합의가 있었지만(소송과는 별개) 술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광고 어디에도 술을 한 잔만 마셔도 국민의 건강에 해롭다는 말은 없다. 술 마시고 결근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건강이 나빠졌다고도 할 수 없다. 광고에 비친 음주 폐해는 모두 사회적인 부분. 문제는 술이 아니라 그 빈도와 알코올 섭취량이다.

폭탄주를 사랑한 酒黨 간박사들

사람들에게 술의 가장 큰 해악이 뭐냐고 물으면 “간 손상”이라고 대답한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엔 실제로 얼굴이 어두워진다. 이럴 때 사람들은 “간을 혹사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국내 최고 권위의 ‘간 박사’로 잘 알려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김정룡(74) 박사는 칠순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두주불사하며 제자들과 폭탄주를 즐긴다. 현재 대한간학회 소속의 내로라하는 교수들은 대부분 그의 영향을 받은 (범의의) 제자이거나 후배들. 김 박사는 현직에 있을 때 “소주를 매일 한 병 정도(알코올 40~80g) 마셔도 간질환에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소위 ‘김정룡 사단’이라 불리는 서울대 부속병원 간연구소와 내과 교수들 사이에는 금주회(금요일 술 마시는 모임)와 목탄회(목요일 폭탄 마시는 모임)가 아직 있으며, 이 모임의 좌장은 여전히 김 박사다.

기자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일 무렵, 세계적인 간 전문가로 알려진 이종수(80) 박사와의 술자리를 잊을 수 없다. 당시 독일 본대학 종신교수로 있던 그는 저서 ‘간 다스리는 법’(동아일보사 펴냄) 출간과 관련해 한국을 찾았다. 이 박사는 초면인 기자와 저녁을 먹다가 대뜸 “폭탄주 마셔요?”라고 물었다. 기자가 “의사, 검사, 기자는 다 잘 마시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 박사는 바로 폭탄주를 제조했다. “아니, 간 박사님이 간에 해로운 폭탄주를 드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거의 꾸지람에 가까운 답변이 돌아왔다. 말은 안 했지만 ‘의학 담당기자란 사람이 이렇게 무식해서야…’ 하는 표정이었다.

“폭탄주든 뭐든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마시느냐가 문제예요. 소주 한 병에 해당하는 알코올은 매일 마셔도 간에 전혀 지장이 없죠. 다른 신체기관엔 몰라도. 폭탄주는 맥주의 탄산까지 들어가 더 빨리 취할 수 있어 좋잖아요. 일찍 취하고 일찍 자면 아침에 깨끗하지, 1시간에 알코올 8g이 해독되니 취침시간에 해당되는 양만큼만 폭탄주를 마시면 되지. 매일 이렇게 마시고도 논문 5편은 꼭 보고 자는데, 한국의 후학들은 논문을 너무 안 읽어요.”

   

한국 간 학계의 큰 스승인 김정룡 박사.

그러고는 폭탄주 6잔을 연거푸 마시고 잔을 딱 엎었다. 더 이상은 안 마시겠다며. 이유를 묻자 “폭탄주 6잔에 든 알코올 양이 소주 한 병에 든 알코올 양과 같아요. 더 마시면 간에 해롭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술 한 잔에 든 알코올의 양을 계산해가면서 술을 마시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이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 비결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변관수 고려대 구로병원장]
“독주 희석시킨 폭탄주, ‘원칙’대로만 마시면 좋은 술”

그렇다면 현역의 간 박사들은 술과 건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이를 자신의 음주생활에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술’ 하면 생각나는 대학교가 있다. 고려대, 그중에서도 간질환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변관수(52) 고려대 구로병원장(소화기내과 교수)이 떠올랐다. 술과 간에 대한 논문을 많이 냈고 인용 빈도도 높은 인물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술이 간에 나쁜가.

“무조건 간에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술에겐 죄가 없다’. 그 안에 든 에틸알코올이 문제다. 보통 소주는 알코올 도수 20도를 기준으로 360ml 한 병에 57.6g(상자기사 참조)의 알코올이 들어 있다. 에틸알코올 자체도 아주 소량을 매일 먹는다면 간에 좋고 나쁠 게 없다. 소주 2~3잔이 심혈관계에는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술도 잘 마시면 약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내 전공이 아니라 단언할 수 없지만 특히 레드와인이 그렇다고 한다. 남성이 10년간 자기 몸무게 10배 이상의 알코올을 섭취하면 간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이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뿐 아니라 비만한 사람에게도 지방간은 있다. 알코올성 지방간은 술을 안 마시면 저절로 없어진다. 문제는 알코올성 간염과 간경화인데, 중증 간질환에 걸리려면 많고 잦은 알코올 흡수와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등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 술을 지독하게 많이 마셔도 알코올성 간질환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보면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성 간질환에 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미리 알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인의 10%쯤이 그럴 거다. 간에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적은 사람이다. 아예 효소가 없는 사람도 있다. 우리 대학 교수 중에도 있는데, 알코올이 들어간 음식만 먹어도 쇼크가 온다. 응급실에 실려가 겨우 살아난 적도 있다. 그래서 학회 참석차 외국에 나갈 경우 응급 상황에 대비해 식당에 갈 때마다 후배 교수를 끼고 다닌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 절대 술을 권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술을 마시면 바로 얼굴이 붉어지지만 그럭저럭 잘 마시는 사람도 있다.

“간에는 알코올을 분해하는 몇 가지 효소가 있는데, 흡수된 알코올의 대부분을 산(酸)으로 만들어 오줌과 땀, 호흡 등으로 빼내는 효소가 하나 있고, 또 아세트알데히드로 분해하는 효소(알데히드)가 있다. 그런데 알데히드는 사람을 괴롭힌다. 피부 혈관을 확장시키고 뇌와 신경에 과민 반응을 일으킨다. 이 효소가 잘 작동되는 사람은 얼굴이 빨리, 그리고 잘 빨개진다. 과음한 다음 날 두통, 구토 증세가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 효소가 잘 작동하는 사람은 좀처럼 알코올 중독에 걸리지 않는다. 며칠간은 술이 꼴도 보기 싫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 효소가 잘 작동하지 않는 사람, 즉 술을 마셔도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알코올을 산으로 분해해 몸 밖으로 내보내는 효소가 잘 작동하는 사람은 중독이 되기 쉽다. 술을 많이 마셔도 척척 분해되고 고통이 없으니 술 먹기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고 딱히 간이 손상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까 말했듯, 알코올성 간질환은 간의 알코올 분해 능력과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두루 맞아떨어져야 걸린다. 반면 얼굴이 빨리 빨개지는 사람은 뇌를 비롯한 신경계와 타 장기에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간질환에 안전한 술의 양은 어느 정도인가.

“사람마다 달라 특정하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남성은 하루 알코올 섭취량 30~40g(알코올 도수 20도 기준으로 소주 반병에서 2/3병)이다. 여성은 알코올 분해 능력이 남성보다 많이 떨어진다. 소주 1/3병 정도가 안전선이다. 요즘 술 잘 마시는 여성도 많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자신이 알코올 중독임을 알아채는 방법이 있나.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술을 마시면 비판력과 분별력을 상실한다 △술을 마시는 데 대해 죄의식이 든다 △눈만 뜨면 술 생각이 난다. 이 가운데 2개 이상에 해당하면 중독을 의심해야 한다. 주로 혼자 마시는 사람들이 위험하더라. 알코올 중독 환자 중 서로 모르던 3명의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하다 결국 모두 간경화로 사망한 경우가 있다. 세숫대야에 소주를 가득 부은 뒤 빨대를 꽂고 매일 쭉쭉 빨아먹었던 것이다. 밥도, 물도 안 먹고 소주만 마셨다. 마시다가 잠들고 깨면 또 마시고. 그러다 결국 죽었다. 매일 소주 20~30병을 1년간 마셨다. 그러면 간질환으로 확실하게 죽는다.”

술에 든 알코올 양 계산법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20도(%)라는 말은 소주 100ml에 알코올이 20ml(=cc) 들었다는 뜻. 알코올은 중량(g)으로 표시해야 하므로 알코올 양 ml를 무게 g으로 환원하려면 용량 ml에 0.8을 곱하면 된다. 알코올 1cc의 무게가 0.8g이기 때문이다. 공식으로 정리하면 ‘마신 알코올 중량=마신 양(ml)×알코올 도수(농도, %)×0.8÷100’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 도수 20도의 소주 360ml 한 병에 든 알코올 양은 360×20×0.8÷100=57.6g이다.

폭탄주 무죄론 “잠 충분히 자면 OK!”

일과 후에 인터뷰를 시작한 탓에 곧 저녁식사 시간을 넘겼다. 근처 횟집으로 옮겨 인터뷰를 계속하는데,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 새 ‘폭탄주’ 제조가 시작됐다. 고려대 구로병원 의료진의 단골 횟집인 듯,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조기’가 들어왔다. 맥주:소주 70:70의 폭탄주(각 술잔의 7부씩 채운 ‘7부주).

   

폭탄주를 자주 마시는가.

7부 폭탄주(아래)를 만들어 권하는 변관수 병원장.

“자주 마시지만 오래, 많이 마시진 않는다. 그리고 10시 이전에는 반드시 술자리에서 일어난다. 늦게까지 마시면 다음 날 업무에 지장이 있다. 또 일주일에 이틀은 술을 쉰다. 그래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술을 쉬는 건 언제인가.

“토요일과 일요일.(웃음) 보직을 맡고 있어 저녁에 행사도 잦고 사람 만날 일도 많아서 그렇다.”

폭탄주는 아주 나쁜 술버릇으로 알려져 있다.

“술을 왜 마시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윤활유 구실을 하고, 인생사 슬프고 기쁠 때 마시지 않나. 폭탄주도 여느 술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독주의 알코올 도수를 희석시킨다. 우리는 주로 연한 ‘맥소 폭탄’을 마시는데, 사실 맥소 폭탄 한 잔은 70:70 기준으로 알코올 양이 9g 정도에 불과하다. 소주 한 잔에도 7.5g이 들어 있으니 특별히 나쁠 게 없다. 게다가 맥주의 탄산은 취기를 빨리 오르게 해서 술자리를 금방 끝나게 만든다. 간에도 더 나쁠 건 없다. 섭취하는 알코올 양이 같다면…. 언젠가 대한간학회에 갔더니 맥주와 양주의 혼합 비율에 따라 폭탄주에 들어간 알코올 양을 계산한 후배 교수가 있더라. 대단한 친구다.”

폭탄주를 몇 잔 정도 마시나.

“그런 건 계산하지 않는다. 즐기면서 천천히 마시고, 못 마시는 사람에겐 권하지 않는다. 철칙이다. 대부분 7시 넘어 술자리를 시작해 소주를 마시다가 폭탄주로 넘어간다. 10시에 집에 들어가 8~9시간 푹 자면 괜찮다. 간에서 1시간 동안 분해하는 알코올이 8~9g이니까 8~9잔은 마셔도 문제없다.”

환자들에겐 엄격하지 않나.

“술은 정상인에겐 관대하지만 질환, 특히 간질환이 있는 환자에겐 독약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 술냄새를 풍기면서 환자를 보지 않는다. 환자는 절대, 단 한 방울도 안 된다.”

정말 칼 같은 사람이다. 저녁 9시가 되니 “이제 더 할 얘기도 없는 것 같으니 일어서자”고 했다. 분위기로 봐서는 끝까지 갈 듯하더니 아니었다. 10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내일 업무를 소화할 수 있단다. 기자와 변 원장이 마신 소주와 폭탄주는 각 4잔. 소주 360ml 한 병은 50ml 잔으로 7.2잔이 나오니 1인당 총 알코올 섭취량은 약 65g. 정상인이 8~9시간 자고 나면 분해되고도 남는 수치였다.

   

[서울대 의대 소화기내과 김윤준 교수]
“적당한 양의 술은 유일하게 검증된 장수 보약”

서울대 의대 김윤준 교수. 폭탄주에 든 알코올 양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김정룡 사단’의 막내격인 서울대 의대 소화기내과 김윤준(43·간 연구소 소속) 교수. 변관수 고려대 구로병원장이 말한 ‘폭탄주에 든 알코올 양을 정확히 계산한 교수’가 바로 그다. 폭탄주를 즐기는 김정룡 박사와 달리 김 교수는 “폭탄주를 마실 수는 있지만 즐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김 교수는 와인 마니아였다. 저녁식사에 와인을 곁들였는데, 고르는 품세가 고수급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와인을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술로 여기지만, 사실 맥주보다 3~4배 높다. 와인 한 잔(30~43ml)에는 소주 한 잔(50ml)과 비슷한 알코올(10g)이 들어 있다. 프랑스 와인 생산지역의 농부들이 와인을 과음해 건강을 해쳤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는 신중론자였다.

술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보나.

“사실 술의 해악은 사회적인 게 대부분이다. 음주운전, 폭력, 중독, 생산량 감소, 자살에 이르기까지. 술은 양날의 칼이다. 소주 2~3잔(여성은 1잔)을 매일 마시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확실하다. 의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운동과 아스피린이 사망률을 낮춘다는 것은 아직 과학적 검증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적당량의 음주가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거의 유일하게 검증된 사실이다. 하지만 와인도 혼자 1병(1ℓ, 알코올 도수 14도, 알코올 양 112g 기준)을 매일 마시면 간에 타격이 온다. 많은 양을 매일 마시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간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술의 양은 얼마인가.

“사람마다 달라 ‘절대’라는 말은 붙일 수 없다. 대부분 남성 기준으로 일주일에 소주 21잔(3병)까지는 간질환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알코올성 간질환을 일으키는 알코올의 최소량은 1일 40~80g씩을 적어도 1년간 섭취한 양이라 볼 수 있는데, 여성이나 만성 C형 간염 환자는 이보다 적은 양으로도 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여성이 술을 많이 마시면 유방암과 불임 등의 질환에 걸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양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맞나.

“느는 게 맞다. 일단 간의 분해효소가 증가하고 뇌세포와 신경계가 거기에 적응한다. 그리고 행동학적 요인도 작용한다. 문제는 술에 대해 처벌을 내리는 알데히드의 작동, 즉 얼굴 빨개짐, 두통, 구토 같은 증상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알데히드가 별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빨리 적응한다.”

와인을 즐긴다면서 폭탄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폭탄주의 알코올 양을 계산한 걸 보면.

“은사와 선배들이 워낙 좋아해 함께 마시긴 하지만 그다지 즐기진 않는다. 폭탄주가 알코올 양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나쁜 술이 아닌데, 지나치게 욕을 먹는 것 같아 제대로 계산해봤다.”

   

간 박사의 권주시(勸酒詩)

양주 폭탄주엔 알코올이 얼마나 들었나.

김윤준 교수는 와인 마니아였다. 술을 절도 있게, 멋있게 마실 줄 아는 사람이다.

“165ml 맥주잔, 30ml 양주잔에 알코올 40도짜리 양주와 4.5도짜리 맥주를 100:100으로 혼합한 폭탄주의 알코올 양은 15.3g, 70:70 폭탄주의 경우는 11.3g이다. 다시 말해 ‘온폭’은 소주 2잔, ‘7부주’는 소주 1.5잔의 알코올 양과 비슷하다. 소맥 폭탄의 알코올 양은 이보다 30% 정도 적다. 소주의 알코올 도수가 양주의 절반인 데다 소주잔이 양주잔보다 20ml 더 커서 그렇다. ‘소폭’이 ‘양폭’보다 부드러운 건 당연한 귀결이다.”

서울대 부속병원의 금주회와 목탄회에선 폭탄주를 얼마나 마시나.

“대략 7~12잔. 금요일은 다 함께 마시기 때문에 7잔 정도, 목탄회는 김정룡 선생님 이하 잘 드시는 분들이 주로 마시기 때문에 12잔 또는 그 이상도 간다. 물론 알코올 계산은 안 하고 마신다. 7부주를 주로 먹지만 ‘온폭’을 하기도 한다. 다들 기분 좋을 때까지 마시는데 김정룡 선생님은 지금도 12잔 정도는 거뜬히 드신다.”

비가 오면 술이 생각나는 이유가 있나.

“그건 정신과적 문제다. 내과의가 답할 질문이 아닌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양갈비 스테이크 코스 요리가 끝나고 와인(750ml, 14도) 한 병이 비었다. 와인 한 병에 든 알코올은 84g. 각자 소주 2/3병만큼의 알코올을 흡수했다. “2차로 폭탄주 한 잔 더 하자”고 했더니 “다음에…”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기자와 헤어지면서 “한번 읽어보라”며 시 2수를 권했다. 중국 시인 우무릉(于武陵·810~?)의 ‘권주(勸酒)’와 일본의 선승 모리야 센얀(78)의 ‘술통’이라는 시다.

“이 금빛으로 빛나는 잔에 술 한 잔 권하노니/ 잔이 넘친다고 그대, 부디 사양하지 말게나/ 꽃이 피면 비바람이 많고/ 우리 인생에는 이별도 많으니.”(‘권주’)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밑동이 샐지도 몰라.”(‘술통’)

김윤준 교수의 ‘술 잘 마시는 방법’
● 알코올을 최대한 천천히 몸에 흡수시키자. ‘안주발’을 세우되 칼로리가 높은 것은 피한다. 되도록 식사와 함께 하는 게 좋다. 한꺼번에 들이켜지 말고 천천히 마시며, 물도 충분히 먹는다. 될 수 있으면 물로 희석해서 마시자.
● 간이 알코올을 해독할 시간을 충분히 주자. 빨리 술자리를 뜨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
● 간 이외의 신체기관으로 알코올을 분해하거나 배설할 방법을 찾자. 알코올은 위와 소장에서도 분해되는데, 천천히 식사와 함께 마셔야 위의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제대로 작동하고, 작동할 시간도 벌 수 있다. 위의 효소 작동에 방해되는 약제(아스피린, 잔탁 등)는 피한다. 물을 많이 마셔 소변으로의 배출을 촉진하고,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도 좋다. 적절한 운동도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심한 운동은 금물.
● 불가피하게 술을 많이 마셔야 할 일이 있다면 수일 전부터 적당량의 음주로 신경계와 행동습관이 술에 적응하도록 만들자. 이렇게 간의 알코올 대사 기능을 미리 30% 정도 증진시켜 놓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들에게 두유와 식빵이 금지된 이유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 24시 … 환자 대부분은 술이 센 사람들, 자만에 빠졌다 중독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그거 뭐 가랑비에 옷 젖는 거지.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 싹 젖잖아. 축축한 느낌뿐이면 그나마 다행이게? 옷이 젖는 순간부터 몸과 다리가 무거워지고, 눈물이 나고, 춥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알코올 중독도 같은 이치야. 옷을 빨고 말리고 몸에서 빗물을 닦아내고 해봐야 가랑비를 다시 만나게 돼.”

한 정신과 전문의는 알코올 중독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잔, 두 잔 자신도 모르게 목으로 넘어가는 술. 외로움을 덜어주기도 하고, 고통을 잊게도 해주지만 때로는 적으로 돌변한다.

혈액을 타고 체내 여기저기로 흘러들어 어느 순간이 지나면 신체 기능을 손상시킨다. 소화기는 물론 뇌에도 영향을 미쳐 정신건강까지 위협한다. 뒤늦게 술의 위험을 자각하고 자제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마시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도 또 가랑비를 기다리는 셈. 알코올 중독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술 소비량이 늘면서 알코올 중독의 폐해도 그만큼 늘었다.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술을 마시면서도 그것이 술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중증 중독자가 크게 늘었다는 사실. 이에 보건복지가족부는 2006년 국가알코올종합대책 ‘파랑새 플랜 2010’을 발표했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알코올 중독자의 치료를 돕고 재활, 예방까지 책임진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 이 대책에 따라 국립서울병원과 국립부곡병원은 알코올 중독 전문 치료센터를 운영하면서 상태가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들의 회복을 돕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일까. 알코올 중독은 어떠한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나. 증상은 무엇이고, 치료는 가능할까. 이러저러한 궁금증을 품고 국립서울병원 알코올 중독 치료 병동을 찾았다.

5월19일 오전 10시 국립서울병원 알코올 중독 전문 치료센터인 22병동 사무실. 50여 명의 알코올 중독 입원환자가 대화기법 및 정서순화기법 강의를 듣고 있다. 주의 깊게 강의를 듣는 환자도 있고, 아직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더러 있다.

국립서울병원 중독정신과 이태경 과장(정신과 전문의·의학박사)은 “유전적 원인입니다”라는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 알코올 중독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술에 대한 개인의 타고난 적응력과 자신감의 비이상적 발현’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알코올 중독자들을 보면 체질적으로 술이 센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아버지가 두주불사이면 자식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경우가 많죠. 술 하나는 자신 있다며 몸이 망가져도 끄떡없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어느새 중독이 되는 거예요.”

   

알코올 중독 치료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이 정서순화기법 강의를 듣고 있다(좌). 환자들이 병동 밖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우).

병동에서 만난 A(64)씨. 병동에 입원한 지 3주차가 되는 그 역시 ‘말술’이다. 입원 후 신체검사 결과 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단순 위염 증세만 있었다. 그는 고령임에도 최근까지 매일 습관적으로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다. 지난 2월 공사장 경비원을 그만둔 A씨는 병동에 오기 전 일주일 동안 무려 99병의 막걸리를 마신 뒤 ‘정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제 발로 병원을 찾았다.

“술을 40년 동안 마셨어. 그래도 멀쩡했지. ‘뭘 마시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술에 손이 가는 거야. 잠도 안 자. 밥은 생각도 없어. 막걸리 한 병은 딱 두 모금이면 끝나지. 그런데 맛도 잘 모르겠고, 취한 것도 몰라. 여기 와보니 다른 환자들도 주량이 보통이 아니야. 다들 비슷해.”

“완치는 없다” … 알코올 중독은 평생 관리 질환

한 달 전 입원했다는 B(43)씨. 20년간 거의 매일 소주 7병을 마셨다는 그는 밤낮을 잘 구별하지 못할 만큼 신경 계통에 이상이 왔다.

“술을 마시면 밤인지 낮인지 모르겠는 거야. 또 그것만 생각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라고. 당연히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감이 안 왔지.”

알코올 중독자의 행동유형 가운데 하나는 시간 개념을 상실한다는 점. 밤낮이 바뀌도록 술을 마시다 어느 순간 아예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이에 대해 이 과장은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면 향후 계획도 세우지 못한다”며 “그러다 보니 무조건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시간 개념의 상실은 고유의 생체리듬 역전 현상과 직결된다. 모든 생물은 고유의 생체리듬을 지니는데, 알코올 중독자들에게선 보통사람들과는 정반대의 흐름이 감지된다. 이 과장은 “인간은 주간성 동물이기 때문에 주요 활동시간인 오후 2~4시에 혈압이 가장 높아졌다가 새벽 3~4시에 가장 낮아진다”며 “반면 알코올 중독자들은 늦은 밤이나 새벽에 오히려 생체리듬이 활발해지거나 아예 일정 리듬을 잡기 어려운 상태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흥미로운 부분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점도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나타나는 큰 특징 가운데 하나. 이 과장은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여가활동을 해보고 개그 프로그램을 봤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노(No)’라는 대답이 돌아온다”고 전했다.
“특이 질환이 아니고 그저 당뇨병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치료받으면 완치가 가능하냐는 기자의 물음에 이 과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뇨병처럼 치료는 치료대로 하되 평생 관리해야 한다는 것. 중독을 경험한 이후에는 아무리 관리 중이라 해도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게 쉽지 않은 까닭이다.

   

국립서울병원 중독정신과 이태경 과장(위). 치료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이 읽는 해외 알코올 중독자 치료 사례집(아래).

“병동에선 외부로부터 두유나 요구르트 반입을 금지하는데, 일부 환자들이 이것으로 막걸리(발효주)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진짜 술은 아니지만 그만큼 환자들이 음주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는 방증이죠. 병동 규정에는 비닐로 포장된 일반 빵만 반입 가능하고, 제과점 빵은 (봉투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어서) 반입을 금지한다는 조항도 있습니다.

식빵의 중앙을 파내고 거기에 술을 감춰서 들여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술을 멀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독 치료 과정을 끝낸 환자들의 재입원율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45세의 C씨는 무려 17년간 이 병동에서 알코올 중독 관리를 받고 있다. 눈이 약간 풀려 있고 발음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혈색이 좋고 늘 웃는 낯이었다. 예전보다 상태가 호전된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이곳에 와서 몸이 많이 좋아졌나요?”
“네. 지금은 전혀 술 생각이 안 나요. 20세 때부터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어요. 지금도 오전에 병원에 와서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고 오후에 집에 가요.”

이처럼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는 여느 병동과 대조적이라고 할 만큼 분위기가 자유롭다. 이 병원의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는 성주병동과 해주병동으로 나뉘는데,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져 응급실에서 직행해온 해주병동 환자들은 몰라도 성주병동 환자들의 상태는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다.

입원한 지 얼마 안 된 일부 환자들은 금단 증상으로 고생하지만, 대부분 밝은 모습으로 하루 일정을 소화한다. 그 때문일까.

이곳 의료진은 환자의 정상적인 생활과 생체리듬을 찾아주는 데 치료의 중점을 둔다. 외출 후 복귀시간을 어기는 등 규정을 위반하면 벌점을 주는데, 이것 역시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시간 상황에 대한 판단력을 향상시키는 훈련 과정이다.

말술 마시던 D씨 “입원 후회한 적 없다”

이곳에 입원한 환자들은 오전 6시30분에 기상해 오전, 오후 교육을 받고 중간에 산책과 휴식을 한 뒤 오후 10시에 취침한다. 3주 후에는 보호자의 동의하에 외출과 주말 외박이 허용된다. 환자들은 개인 상태에 따라 하루 두 번씩 충동을 억제 및 조절하는 약을 먹는다.

항갈망제, 항불안증, 항우울증약이다. 입원 기간은 한 번에 3개월이고, 한 달 주기로 3차례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이 과장은 “중독 치료센터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큰 의미를 둔다. 실제 100% 환자들과 가족이 원해서 이곳에 입원한다”고 밝혔다.

   

제주 출신인 D(37)씨는 결혼을 앞두고 가족과 약혼자의 동의를 얻어 입원한 뒤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고 있다. D씨도 매일 소주 8~9명을 마시던 ‘말술’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본인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지만, D씨는 “입원 결정을 후회한 적 없고, 입원한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A씨도 “들어올 때는 암 선고를 받은 것처럼 심적 고통을 겪었는데 이제는 다 사라졌다”면서 “치료가 끝날 즈음엔 ‘내가 술을 끊었구나’라는 자부심을 느낄 것 같다”며 D씨의 말을 거들었다.

취재를 마치고 병동을 떠나려는 순간, 입원 환자 가운데 가장 어린 E(27)씨가 재미있는 말로 발걸음을 붙잡았다.

“이제 술과 안 싸우려고요. 기사 잘 써주시고, 우리 밖에서 만나요. 아, 저기 간호사들 오시네. 예쁘다, 하이!”
서울의 유명 나이트클럽 웨이터인 E씨의 ‘재간’에 함께 있던 환자들과 의료진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의 문을 두드렸지만 나올 때는 분명 희망도 봤다. 언제 그들이 다시 ‘가랑비’를 맞을진 모르지만.

 

술 익는 名酒의 고향 나라를 먹여 살렸다, 역사와 자연 살피면 해외여행 재미 배가
김원곤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술 칼럼니스트
 
 

미국 켄터키 주 우드포드사의 버번위스키 삼중 증류기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이 자율화된 지도 20년, 이제 세계여행도 명승고적 위주의 ‘사진찍기 여행’에서 한 걸음 나아가 ‘테마 여행’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영상이나 활자매체로 대하던 것들을 직접 현장에서 접하면 어설픈 지식은 그때서야 자신의 것이 된다.

건축, 음악, 미술, 역사 등 다양한 테마 여행이 책이나 잡지에 소개되지만 술과 관련된 여행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술은 남자의 전유물이란 ‘구석기적 착각’을 하는 이가 많기 때문일까. 다른 이유라면 명주(名酒)의 고장을 찾는 길이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것일 터. 그러나 대부분의 테마 여행은 절대 한 번에 끝마칠 수 없다. 술 테마 여행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지역에 가든 차로 10시간 거리 안에는 명주의 고장이 있으니 출장 등으로 외국에 나갈 일이 있으면 틈을 내 찾아가면 된다.

필자는 이런 방식으로 20여 년간 애주가 대부분이 아는 명주의 고향들을 섭렵했다. 오늘 소개할 곳은 술로 많이 알려졌지만 정작 제조환경이나 특산 지역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이다.

달콤한 바닐라 향이 매력 … 미국 버번위스키 트레일

버번위스키는 특유의 짙은 바닐라 향과 대중적인 이미지로 국내는 물론 세계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는 술이다. 가장 정통적인 켄터키 스트레이트 버번위스키는 미국의 관련 법규에 따라 ‘켄터키 주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옥수수가 51% 이상 혼합된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양조주를 증류해 80% 이하의 증류액을 만든 다음, 안쪽을 불로 그을린 새 오크통에서 2년 넘게 숙성시켜 알코올 농도 40% 이상으로 병입한 것’으로 규정돼 있다.

   

이 버번위스키를 만드는 켄터키 버번 지역의 증류소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이 ‘버번위스키 트레일(Bourbon Whiskey Trail)’이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과 켄터키 더비로도 유명세를 떨치는 켄터키 주는 버번위스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도 강해 이 코스를 중요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 버번위스키 트레일에는 짐빔, 헤븐힐, 메이커즈 마크, 우드포드, 버펄로 트레이스, 와일드 터키, 포 로지스 등 주요 버번위스키 증류소가 포함된다.

출발 지점은 보통 켄터키 주의 중심 도시인 루이빌과 렉싱턴 중 한 곳. 광활한 지역과 미국 자동차 문화 특성상 이들 증류소를 보려면 개인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투어버스 같은 단체관광 프로그램은 버번위스키 축제 기간을 제외하고는 운용하지 않는다.

버번위스키는 옥수수를 주재료로 보리, 귀리, 밀 등을 사용해 만든다. 회사마다 이들 재료의 혼합비율이 다르고, 같은 회사 상품 중에서도 제품에 따라 혼합비율이 달라진다. 메이커즈 마크는 밀을 처음으로 다량 사용해 버번위스키 맛에 전기를 마련한 바 있다.

재료 혼합비율이 결정되면 이들을 발효시켜 양조 알코올을 만들고 난 뒤 증류 과정을 거쳐 높은 알코올 농도의 술을 얻게 된다. 증류가 끝난 술은 숙성 과정에 들어가는데, 버번위스키의 오크통 숙성은 2년이라는 의무기간에 관계없이 보통 4년 넘게 계속된다. 최근에는 6~8년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제품도 많이 출시된다. 다만 스카치위스키와는 달리 수십 년간 장기 숙성시키는 것은 피한다. 너무 오래두면 지나친 오크통 향으로 버번위스키의 특성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

몰트위스키의 성지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

아일라(Islay)는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제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 남북으로 40km, 동서로 32k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으로, 인구도 34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인구의 3분의 1은 바닷가 마을인 보모어(Bowmore)에, 또 다른 3분의 1은 남쪽의 항구도시 포트엘렌(Port Ellen)에 산다. 그 나머지 3분의 1이 섬 이곳저곳에 살고 있으니, 섬 크기에 비해 체감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1 미국 켄터키 주에서 생산되는 버번위스키 제품들.
2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보모어 증류소.
3 아일라 섬의 브루클라딕 증류소.
4 아일라 섬에서 생산되는 몰트위스키.

그런데 이 섬을 유명하게 한 것은 사람이나 풍광이 아니라 위스키다. 이 작은 섬에 무려 8개의 위스키 증류소가 있다. 그것도 대부분의 증류소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품질 면에서도 스카치위스키 중 최고를 자랑한다. 특히 이곳에서는 피트(peat, 土炭)라는 천연 매장연료를 사용해 몰트 보리를 볶는데, 술에서 배어 나오는 강력한 피트 향은 수많은 아일라 위스키 마니아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 때문에 아일라 섬은 ‘위스키의 성지’로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 코냐크 지방에서 생산되는 ‘코냑’.

8개의 증류소 중 킬코먼(Kilchoman)은 규모도 가장 작고 설립된 때도 2005년 11월로 역사가 짧아 제품 인지도가 높지 않다. 그러나 나머지 7개 증류소는 위스키 애주가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곳이다. 섬 북쪽에는 부나하먼(Bunnahabhain)과 쿠릴라(Caol Ila) 증류소가 있고, 포트엘렌 근처에는 아드벡(Ardbeg), 라가불린(Lagavulin), 라프로익(Laphroaig) 증류소가 삼총사처럼 모여 있다. 그리고 섬 중간에는 전통의 보모어 증류소와 브루클라딕(Bruchladdich) 증류소가 있다.

지역에 따라 술맛도 차이가 뚜렷해 남쪽의 3개 증류소는 강한 피트 향이 특징인 데 비해 북쪽의 2개 증류소는 피트 향이 약하다. 지역적으로 중간에 있는 보모어는 피트 향도 중간이고, 브루클라딕 증류소의 현재 제품들은 피트 향이 강하지 않으나 곧 강한 피트 향의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이들 외에도 여러 증류소가 있었으나 폐쇄됐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은 1820년대 후반 설립됐다 폐쇄된 포트엘렌 증류소. 이곳에서 생산한 제품은 지금도 인기가 대단해 위스키 마니아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된다.

사람들이 아일라 섬을 찾는 큰 이유는 위스키 증류소 때문이지만 조류 관찰, 낚시, 캠핑 등 여가를 즐기러 오는 이도 적지 않다. 아일라의 해안선은 퍽 아름답다. 마을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가 하면, 마치 미니어처 다도해 같은 풍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낮은 관목이 펼쳐진 구릉과 초원 등 내륙의 풍치도 빼어나다.

아일라 섬으로 가는 길은 배로 가는 방법과 비행기로 가는 방법이 있다. 배를 타려면 글래스고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 30분가량 달려 케너크랙(Kennacraig) 부두까지 가야 한다. 페리에 차를 실을 수 있어 편리하다. 비행기는 글래스고 공항에서 아일라 공항까지 직항이 있다. 35분쯤 걸려 빠르긴 하나, 배에서 아름다운 섬을 바라보며 들어가는 낭만은 포기해야 한다.

스카치위스키 본고장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영국 북쪽에 자리한 스코틀랜드는 세계 최고의 위스키로 평가받는 스카치위스키의 본고장이다. 그 위상에 걸맞게 스코틀랜드 전역에는 90개가 넘는 증류소가 지금도 활발하게 위스키를 만들어낸다. 그중에서도 하일랜드 동북쪽에 있는 스페이사이드(Speyside)는 위스키의 최중심지.

스페이사이드는 글자 그대로 스코틀랜드에서 긴 강 중 하나인 스페이 강 유역을 일컫는다. 스페이사이드는 8개의 소지역으로 나뉘는데, 이곳으로의 여행은 보통 유서 깊은 도시 엘긴(Elgin)에서 시작된다. 엘긴은 스페이사이드의 상업 중심지이자 가장 큰 도시로, 스코틀랜드 양대 도시인 에든버러나 글래스고에서 기차로 연결된다. 엘긴과 그 주변에는 시내에 자리한 ‘글렌 모레이(Glen Moray)’를 포함해 8개의 증류소가 산재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스페이사이드 증류소를 여행하려면 이곳에서 40~50분 버스를 타고 더프타운(Dufftown)이라는 마을로 가야 한다. 더프타운은 스페이사이드의 노른자위 지역. 인구 25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한때 9개의 증류소가 있어 ‘세계 위스키의 수도(malt whisky capital of the world)’라는 별칭을 얻었다.

   

더프타운에 기반을 둔 9개 증류소 중 3개는 폐쇄됐고, 현재 가동 중인 증류소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글렌피딕사(William Grant · Sons)의 ‘글렌피딕(Glenfiddich)’ ‘발베니(Balvenie)’ ‘키닌비(Kininvie)’ 3개와 디아지오사의 ‘모틀락(Mortlach)’ ‘더프타운’ ‘글렌둘란(Glendullan)’ 3개다. 더프타운에선 해마다 봄, 가을 2차례 위스키 축제를 벌이는데, 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밖에 스페이 강 본류 유역에는 ‘매캘란(Macallan)’ ‘아버라워(Aberlour)’ ‘글렌파클라스(Glenfarclas)’ 등 ‘빅3’를 비롯한 여러 증류소가 자리해 스카치위스키 애주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브랜디의 황제’ 만드는 프랑스 코냐크 마을

코냐크 마을은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브랜디 ‘코냑(cognac)’의 핵심 생산지다. ‘코냑’이란 명칭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브랜디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

코냐크 마을은 프랑스 서쪽 중간에 있는데, 항구도시는 아니지만 대서양 연안 가까이 있다. 코냐크 마을로 가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지만 유명 와인 산지인 보르도에서 기차로 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보르도역에서 코냐크역까지는 1시간30분 정도 걸리지만, 중간에서 환승할 때 시간이 잘 맞지 않으면 2~3시간 걸리는 경우도 많다.

코냐크는 로마시대 이전의 유물이 발굴될 만큼 역사가 오래된 곳이지만 인구 2만여 명의 작은 마을이라 웬만한 곳은 기차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다. 코냐크 마을에는 이 지역의 젖줄 노릇을 하는 샤랑트(Charente) 강을 중심으로 유명 코냑 회사들이 들어서 있다.

샤랑트 강의 중심부에는 세계 최대의 코냑 회사인 헤네시(Hennessy) 본사가 자리잡았다. 1765년 리처드 헤네시가 만든 이 건물은 강가에 연해 양쪽으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해 그 위세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방문객을 위한 비지터센터도 있고, 투어 프로그램도 잘 짜여 있다. 유람선을 타면 강 양쪽의 회사를 모두 구경할 수 있다.

1 스코틀랜드 더프타운의 스카치위스키 ‘글렌피딕’ 증류소.
2 프랑스 코냐크 마을의 간이역 코냐크역.
3 멕시코 테킬라의 관문 과달라하라의 구시가지에 있는 대성당.
4 다양한 테킬라 제품들.

헤네시만큼이나 잘 알려진 레미마르탱(Remy Martin) 본사도 코냐크 마을 중심지에서 4km 떨어진 메르팡(Merpins)에 있다. 1724년 설립된 레미마르탱은 현재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코냑 회사로 인정받는다.

코냐크 마을에는 또 세계 5대 코냑사에 드는 마르텔과 까뮈를 비롯해 오타르, 라센, 프론삭 등의 군소 회사가 들어서 코냑 본고장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코냐크 동쪽에 자리한 인구 5000여 명의 마을 자르낙(Jarnac)은 넓게는 코냐크 지역에 속하지만 하나의 독립된 마을로 코냑 생산의 제2 중심지다. 이곳에는 역시 샤랑트 강변을 끼고 세계 5대 코냑사의 하나인 쿠보와지에를 중심으로 여러 코냑 회사가 있다.

   

‘멕시코의 영혼’ 원산지 테킬라

멕시코의 아이콘이라 할 ‘테킬라(Tequila)’는 멕시코를 넘어 세계적인 술로 위상을 굳힌 지 오래다. ‘테킬라’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면 멕시코 5개 주에 걸친 특정 지역 내에서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켜 생산된 술이라야 한다.

법정 테킬라 지역의 범위는 매우 넓지만, 테킬라를 유명하게 만든 곳은 할리스코(Jalisco) 주의 테킬라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구체적으로는 테킬라 생산 1, 2위 회사가 자리잡은 테킬라 마을, 그리고 제3의 회사인 에라두라(Herradura)가 있는 이웃 동네 아마티탄을 말한다. 이들 지역을 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도시가 멕시코 제2의 도시이자 할리스코 주도인 과달라하라.

과달라하라에서 테킬라 마을로 가는 방법은 크게 3가지.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일일 투어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테킬라 마을의 호세 쿠에르보 증류소와 아마티탄의 에라두라 증류소를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테킬라 익스프레스’라는 기차를 이용하는 방법. 매주 토요일 에라두라 증류소로 출발하는 기차에선 마리아치의 음악 연주와 테킬라 무한 제공 등의 서비스를 하는데 방문객에게 인기 높은 프로그램이다. 다만 예약이 어렵고 요일이 한정되며 값이 비싼 게 단점이다. 세 번째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30분마다 출발하는 버스를 타는 방법인데, 일반 여행객은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세계 최고의 테킬라 회사 호세 쿠에르보는 테킬라 중심지에 있다. 굴지의 회사답게 잘 만들어진 비지터센터를 갖추고 일주일 내내 투어 프로그램을 운용한다. 건물에 들어서면 까마귀 동상을 마주하는데 ‘쿠에르보’는 스페인어로 까마귀를 뜻한다. 투어에는 일반 투어(100페소)에서 VIP 투어(300페소)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 투어가 끝나면 자체 바에서 테킬라 베이스로는 가장 유명한 칵테일인 ‘마가리타’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세계 제2의 테킬라 회사인 사우자(Sauza)도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한편 에라두라는 아마티탄에 있는데 대지가 매우 넓다. ‘테킬라 익스프레스’의 종착지답게 투어 프로그램도 잘 마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