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생태관광 주한 외국인들 자연 속에 들어가 코리아를 배우다
- ▲ 천연기념물 수달의 서식지인 전남 구례군 섬진강 유역을 찾은 외국인 체험단. / 멸종위기종복원센터
- 경남 지리산 중산리
정자에 올라 대나무 부챗살 이용한 전통문화 체험
체험단을 태운 27인승 관광버스가 5월 30일 오전 서울 시청역에서 출발해 4시간 만에 경상남도 지리산 중산리에 도착했다.
생태관광에 참여한 주한 외국인 체험단 15명은 주한상공회의소와 ‘서울인터내셔널 하이커스 클럽’ 등을 통해 초청받았다. 특히 ‘서울인터내셔널 하이커스 클럽’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 참가자 10명은 주말마다 산과 바다를 찾아 떠나는 ‘하이킹 매니아’들. 470여명 회원 중 80% 이상이 주한 외국인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관광객들이 중산리 전망대 정자(亭子)에 올랐다. 오후 1시가 넘어가면서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랐지만, 정자 밑은 반소매가 허전할 만큼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곳에서 약 40분 동안 대나무 부챗살 면에 나뭇잎과 물감을 이용해 무늬를 찍는 전통 문화 체험이 이뤄졌다.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제이슨 에반스(39)씨는 평소에도 주말마다 설악산, 관악산 등 한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하이킹을 즐겨왔다고 했다. 에반스씨는 “생태 관광은 다른 사람이나 자연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내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귀중한 경험”이라며 “평소 딱딱하고 격식을 차리던 한국 사람들도 산에 오르면 서로 허물없이 얘기하고 먹을 것을 나눠주는 등 열려있는 모습을 보여주더라”고 말했다. 6월 1일 대만으로 떠나는 제이슨씨에게 이번 여행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이다.
체험단이 너덜지대와 불개미집을 구경하고 내려왔다. 나공주 지리산국립공원 소장이 직접 설명에 나섰다. “너덜지대는 계곡 위쪽에 있던 바위가 풍화작용으로 쪼개진 뒤 굴러떨어져 수축·팽창 작용을 거쳐 만들어진 곳이죠. 이곳 불개미집은 규모가 엄청나 생태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곳이에요.”
전남 구례 섬진강
수달 서식지 방문… 덫에 걸린 거북이 구출 작전
차를 타고 1시간30분가량 이동해 전남 구례군 섬진강 유역에 닿았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33호인 수달이 서식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달은 지리산국립공원에서도 멸종위기 1급 종으로 지정돼 특별 보호하고 있는 동물이다.
강바람을 맞으며 걷던 원광대학교 요가영어 교실 강사 제레미 셀리그손(56)씨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앗, 거북이가 덫에 걸렸어요!” 이 소리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어른 손바닥만한 거북이 한 마리가 철망 덫 안에 입이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불쌍하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살려 보내 줍니다.” 셀리그손씨가 쭈그리고 앉아 거북이의 입을 살살 건드렸다. 10분 넘게 ‘사투’를 벌인 끝에 거북이의 입에 걸린 얇은 고리가 빠져 나왔다. 거북이를 강 모래 위에 놓자, 한동안 죽은 듯 꼼짝 앉고 있던 거북이가 느린 걸음으로 강물로 기어들어갔다.
섬진강 유역은 수달과 너구리의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만 봐도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건 누구 발자국이죠?” “이건 누구 똥인가요?” 까맣게 굳은 3㎝ 크기의 똥을 코 밑에 갖다 대며 낸시 맥키넌(여·54)씨가 에코가이드를 향해 물었다. “비린내 나죠? 수달 똥인데, 수달의 주요 식사가 생선이기 때문이에요. 이곳이 그만큼 수달이 많이 사는 곳이란 얘기예요.” 에코가이드로 나선 정동혁씨가 말했다. 생태관광이 시작되면서 생긴 ‘에코가이드’는 각 관광코스마다 2~4명씩 배치돼 그 지역의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설명을 한다.
저녁밥은 인근 식당에서 사찰식 산채식사로 이뤄졌다. 27가지 반찬과 대나무통 밥이 어우러졌다. 식사하는 내내 “채식주의 식단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중얼거린 완 스미스(여·59)씨는 주한 호주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1년 전 한국에 왔다고 했다. 그 자신도 호주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스미스씨는 “호주에는 이처럼 국가에서 운영하는 생태관광 코스는 없지만 민간 관광업체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수십~수백 개나 된다”고 말했다. 그만큼 호주에서 생태관광은 일상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생태관광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생태관광이란 ‘그대로 놔둬라(Let it go)’ 정신 그 자체예요. 아무도 자연을 건드리지 않고, 거칠면 거친 대로 뒤죽박죽이면 뒤죽박죽인 대로 그냥 둬요. 여행을 떠나도 대부분 혼자 혹은 2~3명씩 움직이고요. 하지만 한국에선 기본적으로 20~30명씩의 단체 관광이 많은 데다, 시골만 해도 다소 인위적일 정도로 정돈(organized)돼 있잖아요. 자연 그대로를 느끼는 게 생태관광인데 한국 사람들은 자연을 그냥 두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아요.”
- ▲ 1 화엄사에서 예불을 드리는 모습. 2 셀리그손씨가 거북이를 덫에서 구한 뒤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다. 3 정동혁 에코가이드가 체험단에게 수달 똥 냄새를 맡게 해주고 있다. 4 남원 ‘국악의 성지’에서 판소리를 배우는 체험단.
- 구례 화엄사 템플스테이
새벽 3시30분부터 예불·참선하며 명상의 시간
저녁 7시. 화엄사에 도착한 사람들은 템플스테이 복장으로 갈아입고 구층암에서 덕제스님과 다담(茶談)을 나눴다. “환생은 무엇인가” “죽으면 어떻게 되냐”는 말로 시작된 문답은 덕제스님이 따라준 차(茶) 설명에 이르러 후끈 달아올랐다.
덕제스님이 “발효차는 쪄서 만든 녹차와 달리, 잎을 따서 한 번 볶은 뒤 비비고 항아리에 넣어 적절한 온도의 방에서 30시간 이상 발효시킨 것”이라며 “녹차가 몸을 차갑게 해주는 음(陰)이라면 발효차는 뜨겁게 해주는 양(陽)이고 스님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라고 말했다.
호주에서 온 트레이시 호그(여·49)씨가 질문을 던졌다. “녹차엔 카페인이 있지 않나요?”
덕제스님은 빙그레 웃었다. “차 자체의 카페인은 커피의 카페인과는 다른 존재죠. 의학을 공부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차의 카페인이 적당한 각성을 주고, 이게 맑은 머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돼요.”
스님은 “집착하지 말고 모든 걸 그냥 내버려 두라(put it aside)는 생각으로 살면 삶이 정말 편해진다”며 “이게 바로 자연이며 윤회하는 우리 인생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고양시의 한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 수잔 롭키(여·40)씨가 사찰의 어두운 밤거리를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 “동양 사상은 특별해요. 정말 복잡한 질문엔 단순하게 답하고, 정말 단순한 질문엔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하게 답하거든요.”
다음날 새벽 3시30분부터 예불과 참선, 아침 공양과 화엄경 탁본 체험이 이어졌다.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깬 사람들은 졸린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 멸종위기종복원센터 & 성삼재
“인간의 이기심이 반달곰의 야성을 뺏었다”
오전 9시, 체험단이 반달가슴곰이 살고 있는 멸종위기종복원센터를 찾았다. 이곳엔 반달가슴곰 자연적응훈련장과 임시 보호시설인 계류장이 운영되고 있다.
지난 2004년 지리산은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반달가슴곰은 지리산 생태계를 대표하는 우산종(몸집이 큰 종의 서식지를 보존해 그 서식지에 함께 살고 있는 작은 다른 종도 함께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총 27마리를 자연 방사했고, 그 가운데 8마리가 폐사·실종, 4마리가 복원센터로 들어왔다. 복원센터에 들어온 곰은 자연에 방사된 뒤 크게 다치거나 적응에 실패한 개체다.
철창살로 된 계류장에 멈춰선 체험단은 몸을 이리저리 뒹굴며 반기는 반달곰의 애교에 “귀엽다” “대단하다”고 손뼉을 쳤다. 하지만 정동혁 에코가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 저 애는 ‘귀여워서’ 여기 갇혔어요. 자꾸 애교 부리니까 사람들이 먹을 것을 던져주고, 그러니까 게을러져 사냥을 안 하고… 결국 센터로 들어온 거예요. 야성을 잃고 혼자 힘으론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대전 국가핵융합연구소 실험운영팀 연구원 알란 잉글랜드(77)씨는 “자연을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자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1995년까지 미국 오크리지연구소에서 35년간 핵융합 연구원으로 일한 그는 자신의 제자였던 남궁원 현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의 권고로 한국에 오게 됐다.
그는 ‘한국동굴환경학회’란 글자가 가슴에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매주말마다 학회 회원 20~30명과 함께 강원도 일대 동굴을 탐사한다고 했다.
복원센터를 떠난 체험단은 해발 1100m에 위치한 지리산 성삼재에 도달했다. 화엄사에서는 도보로 약 3시간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고개 아래엔 우리나라 산수유열매의 30% 이상을 생산하는 구례 산동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
- ▲ 1 부채무늬찍기에 열중인 라초씨. 2 이른 새벽, 화엄사 경내를 청소 중인 체험단. 3 섬진강 유역에서 만난 흑염소 가족.
남원 국악 성지 & 목기공예장
“자연·문화가 어우러진 색다른 경험”
생태관광의 마지막 코스인 ‘국악의 성지’ 박물관에서 체험단은 ‘진도 아리랑’과 춘향전 ‘사랑가’를 따라 부르며 판소리를 체험했다. 또 목기 공예 제작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번 지리산 생태관광은 자연과 지역 문화가 어우러진 새로운 형태의 ‘에코 투어’였다. 서울외국인학교 교사 알리샤 헌터(여·25)씨는 “호주는 대부분의 섬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자연 생태계 보호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다”며 “나뭇가지 하나, 꽃 하나를 꺾어도 수백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할 만큼 제재도 엄격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태관광이 발달된 호주나 핀란드의 여행은 대부분 자연 그 자체만 즐기는 수준이다.
이탈리아문화원 원장인 루치오 라초(40)씨는 “알프스 산과 호수 등으로 하이킹을 많이 다녔지만 자연과 역사를 함께 배우는 생태 관광은 처음이었다”며 “휴양에 집중된 서구식 생태관광을 넘어, 배움과 깨달음이 함께 하는 한국식 생태관광의 새로운 형태를 봤다”고 말했다.
오후 4시, 체험단이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라초씨의 아내인 안토니에타(50)씨는 “서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복잡한 쇼핑의 도시’뿐이었는데, 서울만 벗어나도 이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자연이 있다는 걸 몰랐다”면서 “다음에 또 지리산을 찾아 구석구석 살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생태관광
자연을 배우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여행인 ‘에코 투어(Eco-Tourㆍ생태 관광)’는 우리의 여행 관행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생태 관광은 선진국,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 등지에서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관광 형태다. 생태계를 파괴했던 지금까지의 관광과 달리, 자연을 배우고 최대한 보호하면서 관광의 즐거움도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친자연주의 여행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 생태관광은 아직 초기 단계다. 하지만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전국 19개 국립공원 생태관광 프로그램은 지난 1월 실시 이후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생태계도 잘 보존돼 있고, 자연·문화를 소개하는 ‘탐방해설 프로그램’도 활용할 수 있다. 1월 60명에 불과했던 생태관광 관람객 수는 3월 890명, 5월 2587명으로 급증했다. 특히 1967년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생태관광객들로부터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곳이다. 총 면적 440.485㎢, 전라남도·전라북도·경상남도 3도에 걸쳐 있는 지리산에서는 자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지난 1월부터 전국 19개 국립공원 생태관광 프로그램을 찾은 관람객 5400명 가운데 10%인 500여명이 지리산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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