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오늘의 베트남 있게 한 ‘전쟁 영웅’

醉月 2011. 9. 1. 18:37

 

 

 프랑스·미국·중국 물리친 명장, 보 구엔 지압 ‘20세기 전쟁의 신화’ … 100세 맞은 보 구앤 지압 장군
군인 이전, 지압은 ‘프로 기자’였다

 

보 구엔 지압(武元甲·무원갑)은 신화다. 그의 삶은 역사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 승리의 신화는 골리앗과 다윗의 현대판이다. 베트남은 가난하고 작은 나라 다윗이었다. 강대국 골리앗을 연파했다. 20세기 후반 25년간 프랑스·미국·중국과 싸워 이겼다. 분단 시절 지압은 월맹(越盟·북베트남)의 사령탑이었다. 그의 군대는 프랑스 식민주의를 몰아냈다. 프랑스의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패배는 치욕적이다. 1954년 5월이다. 60년대~70년대 초반 그는 미군과 맞섰다. 그는 미국을 물리쳤다. 75년 4월 월남(越南)은 패망한다. 베트남은 통일된다. 79년 중국은 베트남 국경을 침공했다. 지압의 군대는 중국을 패퇴시켰다. 지압은 군사 천재다. 군 최고사령관·대장·국방장관이었다. 그는 전쟁의 기존 개념을 해체했다. 그는 ‘붉은(공산주의) 나폴레옹’으로 찬사를 받았다. 젊은 시절 나폴레옹 역사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폴레옹 이래의 전통적 군사전략을 무력화시켰다. 지압은 전쟁의 방식과 언어를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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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6월부터 베트남은 중국과 분쟁을 겪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이다. 중국은 위압적으로 나왔다. 베트남은 반발했다. 하노이 시내 중국 대사관 앞에서 수백여 베트남 시민의 시위가 계속됐다. 시위대의 피켓은 장군 지압의 사진을 담았다. 구호를 외쳤다. “지압의 정신은 우리 인민군대에 영원하다(Giap’s spirit is everlasting in our people’s army)” “중국의 야욕을 분쇄하자”-.

 ‘지압의 정신’은 무엇인가. 지압은 “전쟁을 결행하면 승리를 결심해야 한다(決戰決勝)”고 설명한다. 지압식 접근 자세는 독특했다. 그는 승리의 요체를 전쟁의지의 관리에 두었다. 상대방의 전의(戰意)를 꺾는 데 우선 집중했다. 패배감은 전염병처럼 번진다. 프랑스군과 미군은 그 전염병에 감염돼 무너졌다.

 중국은 베트남을 버거워한다. 감추고 싶은 진실 때문이다. 79년 2월 중국은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5개 사단 10만 명을 동원했다. 중국은 허무하게 패배했다. 지압과 중국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전략전술은 유사하다. 여러 부분에서 손자병법을 자기 스타일로 재해석한다. 중국의 패배는 문화 대혁명의 후유증이다. 문화 대혁명의 극단주의는 전략적 유연성을 떨어뜨렸다. 베트남 군대는 실전 경험과 장비에서도 압도했다. 베트남은 1000년간 중국의 식민지였다. 그 후 자력 독립했고 원·청의 중국 왕조 침략을 격퇴했다. 중국에 대한 경계와 투지는 국가적 본능이다.

 G2 중국은 요즘 한국을 함부로 대하려 한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해선 신경 쓴다. ‘지압의 정신’을 의식해서다. 지압은 “자유와 독립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 원인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때문이었다. 폴 포트의 캄보디아는 반(反)베트남·친(親)중국 노선을 취했다. 광기(狂氣)와 공포의 킬링필드 시절이다. 킬링필드를 퇴장시킨 것은 지압의 군대다. 승리의 부수적 산물이다. 자유와 인권을 외친 미국과 프랑스가 아니다. 역사는 기이하게 전진한다.

 지압은 30세 때까지 군사학을 배우지 않았다. 20대 시절 신문기자였고 역사 교사도 지냈다. 그는 프랑스 식민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으로 갔다. 그는 이미 베트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0년 중국에서 호찌민(胡志明·호지명 1890~1969)을 만난다. 그 순간 그의 삶은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보다 민족주의 색채를 띤다.

 45년 8월 프랑스는 베트남에 다시 진주했다. 호찌민은 그해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호찌민은 코끼리와 메뚜기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우리는 오늘 코끼리와 싸우는 메뚜기다. 하지만 내일 우리는 코끼리의 내장을 가를 것이다.” 메뚜기 군대의 지휘를 지압에게 맡겼다. 메뚜기는 짧은 거리지만 잘 뛰어 달아났다. 코끼리는 몸집과 달리 메뚜기를 밟아 죽이지 못했다.

 지압 전략의 원칙은 세 가지다. “작은 것(小)으로 큰 것(大)을 이긴다, 적음(少)으로 많음(多)과 맞선다, 질(質)로 양(量)을 이긴다”-. 그 실천 전술로 3불(不) 지침을 내렸다. “▷적이 원하는 시간을 피하고 ▷적에게 낯익은 장소를 멀리하고 ▷적이 익숙한 방법으론 싸우지 않는다”였다.

 지압의 무대가 열린다. 라오스와의 국경 부근 디엔 비엔 푸다. 밀림 속 산악지역이다. 53년 11월 프랑스 군대는 그곳 분지에 활주로와 요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압의 군대를 기다렸다. 장비와 화력에서 프랑스군이 압도했다. 지압의 천재적 영감이 발동된다. 집요한 포위작전은 상식을 깼다. 프랑스는 중형 야포의 출현을 생각하지 못했다. 지압의 군대는 밧줄로 몸에 묶어서 끌고 왔다. 중장비를 분해해 짊어지고 와서 재조립했다. 105㎜ 곡사포는 한 번에 1인치씩, 하루에 800m, 3개월 동안 운반했다. 200대의 자전거 짐수레는 강과 정글을 뚫고 식량을 운반했다.

 54년 4월 첫 공격 때 지압은 전세를 장악했다. 중국은 한국전 때 썼던 인해전술을 권유했다. 그러나 지압은 지구전이었다. “기회를 극대화한다. 승리가 확실할 때만 공격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참호와 땅굴을 파서 코끼리의 목을 조르며 압박했다. 포위 공격 55일 만인 5월 7일 프랑스군은 항복했다. 식민지 군대가 종주국을 처음 물리친 것이다. 역사적 승리였다.

 그것으로 전쟁은 완성되지 않았다. 미국과의 20년 전쟁이 남아 있었다. 미국은 도미노(연쇄적 공산주의화) 망령에 시달렸다. 사상 최대 군대와 첨단무기를 베트남에 보냈다. 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는 미군식 정공법의 승리를 확신했다.

지압은 90대 초반까지 책을 읽고 일을 했다. 군사 영웅은 죽을 때까지 현역 대장으로 복무할 수 있는 영예를 받았다.
지압은 전쟁철학과 개념을 혁신했다. 전투 승리의 축적이 전쟁 승리로 연결된다는 이론을 뛰어넘었다. 전쟁의 구성요소에 정치·외교를 넣었다. “전쟁은 다른 수단의 정치”(카를 클라우제비츠)라는 개념을 실천했다. 그는 인민전쟁의 개념을 심화·발전시킨다. 국민 총력전이다. 그는 “무기도 중요하나 사람이란 인적 요소, 정치적 요소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68년 1월 설날(테트) 공세는 지압식 전쟁의 극적 등장이다. 지압의 군대는 월남의 주요 시설을 동시 공격했다. 사이공(현 호찌민시)의 미국 대사관은 일시 점령당했다. 웨스트모얼랜드의 반격은 성공했다. 지압의 작전은 실패한 듯했다. 월맹 정규군과 베트콩(민족해방전선) 게릴 3만여명이 숨졌다. 주월 한국군(맹호·백마·청룡)은 제대로 싸웠다.

 하지만 전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 사상자 숫자의 게임에서 벗어났다. TV에 비춰진 전쟁의 참상은 미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 목표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웨스트포인트(미국 육사)의 군사교리는 방향감각을 잃었다. 미국의 지식인들부터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TV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라고 의문을 던졌다. 린든 존슨 행정부의 전쟁의지는 약해졌다. 국론 분열은 독감과 같다. 급속히 번졌다. 지압의 전략은 성취됐다. 기묘한 전쟁, 절묘한 승리였다.

 지압은 이렇게 회고한다. “테트 공세를 군사적 측면에서만 거론하는 것은 틀렸다. 정치적이고 동시에 외교적인 공세다. 우리는 적을 섬멸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군의 전쟁의지를 없앨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게 테트 공세의 목표이자 이유다.”

 워싱턴의 덜레스 공항 근처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별관(스티븐 우드바르-헤이지 센터)이 있다. 그곳에 우주왕복선 엔터프라이즈, 베트남전 전투기·미사일도 전시돼 있다.

 베트남전에서 노획한 월맹군 군화가 한쪽에 있다.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들었다. 최신예 전투기와 폐(廢)타이어 신발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군사력 최강의 미군은 가난한 군대에 패배했다. 지압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단결하고 의지를 길러야 하는지를 아는 국민은 어떤 침략자라도 물리친다.” 지압의 그런 인식은 항상 유효하다. 지금의 한국에도 적용된다. 국민적 통합과 전쟁의지만이 진정한 평화를 보장한다.

박보균 편집인

보 구엔 지압 ‘100세 기념 인터뷰’ 

“ 군사전략은 예술이다 … 소가 대를, 소로 다를, 질이 양을 이긴다 ”


지난 6월 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베트남은 대립했다. 하노이 시내 중국대사관 앞에서 베트남 시민들은‘지압의 정신’을 외쳤다. [사진=AP]
군사영웅 보 구엔 지압(1911년생)이 100세 생일(25일)을 맞았다. 그는 병원에 누워 있다. 그에게 100세 기념 인터뷰를 요청했다. 인터뷰는 노환과 고령 탓에 그의 측근을 통해 서면으로 했다.

●베트남 시민들이 지난 6월 하노이의 중국 대사관 앞에서 중국 규탄 시위를 했다. 시민들은 ‘지압의 정신(spirit)’을 외쳤다.

 “그 정신은 ‘결전결승(決戰決勝·전쟁을 결행하면 승리를 결심한다)’ ‘독립, 자유보다 귀한 것이 없다’ ‘단결, 단결, 대단결’이다. 오랜 역사 동안 외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이긴 베트남 국민의 힘과 지혜가 그 정신에 담겨 있다.”

●장군은 프랑스·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역사 속 베트남은 땅이 넓지 않고 인구가 많지 않았다. 베트남은 강력한 침략군을 패배시키기 위해 수많은 세대를 거쳐 군사적인 사고력과 국민적인 전략을 수립·개발해 활용했다. 전쟁은 단순한 군사전략이 아니다. 군사·정치·경제·외교 등을 합친 종합적·포괄적인 전략이다. 군대는 싸울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군인과 민간인 간 단결의 힘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국민이 군인이 되고, 모든 동네가 요새가 되고, 전국이 모두 전장(戰場)이 되어 어디에서나 적을 분산·봉쇄·공격·패배시켰다.”

●장군은 전략과 전술을 독특하게 개발해 발전시켰다. 지압식 전략전술은 무엇인가.

 “적과 싸울 때 언제나 국민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게릴라 유격전과 정규전을 결합해야 한다. 모든 방법으로 적과 싸워야 한다. 손에 있는 모든 무기로 적과 싸워야 한다. 전략의 핵심은 ‘적극성, 주도, 활력, 창조, 전격’ 다섯 가지다. 전쟁의 예술은 ‘소(小·작음)로 대(大)를 이긴다, 소(少·적음)로 다(多)와 맞서 싸운다, 양질(良質)로 다량(多量)을 이긴다. 약(弱)으로 강(强)을 이긴다’에서 나온다. 적의 강·약점을 발견한 뒤 기회를 적시에 활용해 최소의 피해로 최대의 효과를 내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것이다.”

●1979년 중국과의 국경전쟁에서 승리했다. 전략전술에서 중국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때 베트남 국민은 또다시 조국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을 했다. 조국보호전쟁과 민족해방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다. 정당한 전쟁이어야 전 국민을 동원할 수 있다. 선배들은 중국의 옛 군사전략가의 책을 많이 참고했다. ‘조속 공격, 조속 승리’라는 전략을 활용하거나, 힘이 적보다 열 배 더 세어야 공격한다는 전략을 활용한 것이 아니었다. 베트남 장군들이 전쟁 시기를 거쳐 세계의 군사지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제로 싸웠을 때 ‘베트남 방식’에 따랐다. 그래서 승리했다.”

●미국은 왜 패배했는가.

 “미국은 베트남의 역사, 지리, 문화, 풍습, 사람은 물론 지도자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베트남을 침략했다. 이라크 전쟁의 실패도 미국의 반복된 역사적 실수였다.”

●장군은 한국군과의 전투를 회상하면서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와 문화에서 공통점이 많다. 서로 이해하기 쉽다. 물론 예전에 한국군이 미군의 침략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당연히 당시 정권의 책임이었다.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가 날로 증진될 거라고 확신한다.”

단순한 논객이 아니었다

200km 떨어진 현장, 자전거 타고 가 취재


보 구엔 지압의 20대는 신문 기자였다. 그 시절 반제(反帝)·반독립운동가들은 신문을 활용했다. 대부분은 논객으로 나섰다. 레닌, 트로츠키, 호찌민이 그랬다. 하지만 지압은 취재 기자였다.

 그는 사실과 현장을 중시한 프로 기자였다. 1936년 북쪽 광산에서 시위가 있었다. 신문사가 있는 하노이에서 200㎞ 떨어졌다. 그는 자전거로 달려갔다. 프랑스 기업의 노동착취와 베트남 광부의 실상을 취재했다. 돌아와 르포 기사를 썼다.

 그는 “정확한 사실 보도는 적확한 단어를 요구한다. 어휘 선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언론인 경력의 자부심을 표출한다. 1991년 베트남 기자협회는 그에게 공로 메달을 주었다. 25년 이상 언론계 종사자에게 주는 상이다.

 그의 기자 생활은 프랑스 식민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 대상이었다. 중학교 시절은 반항의 시기였다. 동맹 휴교로 퇴교를 당한다. 그는 열아홉 살 때 ‘민성(民聲)’이란 신문에서 처음 기자 생활을 했다. 그는 가명으로 프랑스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그 직후 베트남 공산당에 가입한다.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13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는 하노이로 간다. 사립 탄동 학교에서 역사와 문학 교사로 일했다. 하노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지압은 신문을 직접 발행하기로 결심한다. 36년 ‘젊은 혼(魂)’이라는 베트남어 신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은 폐간을 명령했다. 프랑스어 신문은 감시가 덜했다. 프랑스어 신문을 창간해 편집국장을 맡았다. ‘르트라바이(Le Travail·노동)’란 제호의 신문에 팜반동(나중에 베트남 총리)도 합류했다.

 그는 정력적으로 일했다. 취재·편집·교열을 혼자 맡을 때도 있었다. 그는 “취재 내용에 맞는 문체와 제목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힘들었지만 독자들이 내 기사에 관심을 가졌을 때 기뻤다”고 기억한다.“ 좋은 기사는 취재정보의 경중(輕重)을 가려 결합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에게 흥미를 준다.”(기자협회 수상소감) 그 말은 전문적 기자 언어다.

 그러면서 지압은 5년간 사립학교 교단에 섰다. 그의 베트남 역사 수업은 인기였다. 그는 중국에 맞섰던 고대 베트남 투쟁사를 가르쳤다. 하지만 삶의 중심은 신문에 기사 쓰기였다. 기자 시절 결혼한 첫 부인은 민족주의 독립투사였다. 그러나 2년 뒤(41년)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감옥에서 숨진다. 기자의 삶은 군 지휘관으로 나서면서 마감한다. 그 경험은 영감을 주었다. “기자는 신명나는 일이다. 신문은 종합적 시각과 판단이 필요하다. 나는 작전을 준비하면서 신문 작업과 비교하곤 했다.”

하노이는 검소하다. 청빈의 호찌민 정신이 녹아 있다. 하노이 주석궁은 정상회담 장소다. 거기에 호찌민 흉상(胸像·얼굴상)이 있다. 호찌민의 전신(全身) 동상은 거리에서 찾기 힘들다. 그 소박함은 ‘인민’에 대한 배려다. 그것은 북한과 대비된다. 북한은 김일성 동상으로 넘친다. 지압의 동상도 찾을 수 없다. 그의 100세 생일도 소박하게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