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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케팅의 최고수, 한기선 두산인프라코어 사장

醉月 2009. 4. 7. 09:23

술 마케팅의 최고수, 한기선 두산인프라코어 사장

참이슬·처음처럼… 모두 내 자식, 술은 그만, 첫 직장 COO로 컴백!
지난 3월 10일 오후 서울 동대문 두산그룹 빌딩 두산타워에서는 두산인프라코어 이사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기선 전 두산주류BG 대표이사 사장이 두산인프라코어의 새 COO(Chief Operating Officer·최고운영책임자·사장급)로 임명됐다.

현재 두산인프라코어에는 최승철 대표이사 부회장, 김용성 대표이사 사장이 있다. COO로 임명된 한 사장은 두산인프라코어 최고경영진에 선임된 셈이다. 그는 임명 직후 기자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COO 자리는 CEO를 잘 보좌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내 목소리를 강하게 내기보다는 두 분의 CEO를 보좌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됐다. 두산그룹은 올 초 두산중공업에 이어 두 번째로 두산인프라코어에 COO 자리를 신설했다.

두산그룹이 술 회사에서만 20년 이상 다닌 사람을 갑자기 두산그룹을 대표하는 중공업 관련 계열사에, 그것도 사장급으로 임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한 사장의 ‘첫 직장’에 있다. 여기서 잠시, 한기선 사장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한 사장은 1988년 진로에 이사로 입사해 2001년 11월 말 진로를 그만둘 때까지 위스키 임페리얼, 소주 참이슬을 히트시킨 주류 마케팅의 산역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이후 오비맥주로 옮겨 2년간 부사장으로 근무한 데 이어, 두산주류BG에 가서도 알칼리수 소주 ‘처음처럼’을 히트시킨 주역이다. 그런데 이들 3곳의 주류회사에서 21년 동안 근무하기 전 첫 직장이 지금은 이름을 두산인프라코어로 바꾼 대우중공업이었다. 두산은 2005년 4월 대우중공업(당시는 대우종합기계)을 인수했다.

한 사장은 대학 졸업 후 대우중공업에 입사, 10년1개월을 다니다 1988년 진로로 직장을 옮겼다. 이후 주류 마케팅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왔지만 바로 전 직장이던 두산주류BG가 롯데에 매각되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될 뻔했다. 하지만 두산그룹이 그가 두산주류BG에서 4년여 동안 보여준 경영능력을 높이 사 핵심계열사 사장으로 다시 중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 사장은 21년 만에 첫 직장에 사장급으로 금의환향한 셈이다. 그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산업현장 중 한 곳인 인천에 얼마 전에 다녀왔다”며 “10년 동안 근무했던 회사라 전혀 낯설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임머신’을 타고 그가 COO에 임명되기 나흘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는 어떤 심정으로 무얼 하고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주류가 아닌 다른 업종에서 일할 줄이나 알고 있었을까.  

기자가 주간조선 ‘술의 달인’ 시리즈에 한 사장을 소개하기로 하고, 그를 찾아간 날이 지난 3월 6일이었다. 그날 오후는 공교롭게도 두산주류 전체가 롯데주류 사무실로 이사 가는 날이었고 한 사장이 두산주류BG로 출근하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그가 부사장으로, 또 CEO로 4년여간 근무했던 두산주류는 작년 말 롯데에 매각된 후 이미 이름을 롯데주류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의 공식 직함은 ‘두산주류BG 전 사장’이었다. 그를 제외한 전 직원은 다음날부턴 서울 역삼동 롯데주류로 출근하기로 돼 있었다.

이날 두산주류BG 직원이 상주해왔던 두타의 28층 두산주류BG 사무실은 ‘파장 분위기’였다. 각종 제품이나 자료는 물론 책상 걸상 같은 집기류까지 모두 트럭에 실린 후여서 사무실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28층 한쪽 귀퉁이에 위치한 한기선 사장 집무실 역시 이미 반 이상은 비워져 있었다. 한 사장은 “인터뷰 후에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사무실에 있는 소주 샘플만 치우지 않았다”며 “집으로 가져갈 자료나 책들은 이미 박스에 다 챙겨 넣었다”고 말했다. 그의 책상 뒤쪽으로는 그가 탄생시킨 소주 ‘처음처럼’ 액자가 아직 걸려 있었다.(인터뷰 도중 한 사장은 이 액자를 배경으로 여러 번 사진을 찍었다.)

한기선 사장은 소주시장 점유율 50%를 넘겨 ‘국민 소주’로 통하는 진로의 ‘참이슬’과 소주시장 2위인 롯데의 ‘처음처럼’을 모두 탄생시킨 주역이다. 하나도 히트 시키기 어려운 소주를, 그것도 국내 1, 2위 브랜드 소주를 모두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

한 사장은 첫 직장인 대우중공업에서 진로로 옮긴 뒤 10년쯤 지난 1998년 진로의 영업·마케팅본부장 자리에 앉았다. 당시 진로소주의 시장점유율은 38%대까지 밀려 있는 상태였다. 진로그룹 역시 유통, 건설 등 과잉투자로 인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에서 진로그룹의 모태인 ‘진로소주’를 회생시키라는 특명을 받은 것이다. 그는 우선 지방의 소주시장을 알아보기 위해 지방 여러 곳을 다녔다. 당시만 해도 이미 부산의 ‘시원소주’, 대구·경북의 ‘참소주’ 등은 알코올 도수를 종전의 25도에서 23도로 낮추는 등 ‘부드러운 소주’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강원도 경월소주를 인수한 두산의 ‘그린소주’가 선전해 진로는 서울과 지방 양쪽에서 협공 당하는 형편이었다.

“제가 영업본부장을 맡기 직전에 진로에서도 알코올 25도의 ‘진로 골드’ 외에 23도짜리 ‘순한 진로’를 내놓았는데, 시장 반응이 신통치 않았어요. 설상가상으로 순한 진로를 내놓으니까 기존 제품(진로 골드)조차 졸지에 ‘독한 진로’가 돼버려 매출이 더 떨어졌어요.”

매달 ‘진로 골드’ 판매가 곤두박질치고 있었으나 빼앗긴 시장을 ‘순한 진로’가 넘겨받지 못한 채 그린소주와 지방소주들이 챙겨가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진로는 특단의 조치로 당시 한기선 전무를 영업본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당시 신제품 참이슬은 어떤 컨셉트에서 내놓게 됐나요. “국내 소주시장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소주가 대세였어요. 그런데 이 시장을 그린소주와 지방소주들이 선점하고 있었고 진로는 반대로 정통소주, 다시 말해 독한 소주를 대변하는 입장이었어요. 때문에 진로 역시 변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다고 보고, 부드러운 소주의 이미지를 주기 위해 ‘깨끗한 소주’를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웠지요.”

소주가 깨끗하다는 의미를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했나요. “운이 좋았습니다. 때마침 ‘대나무 숯에 관한 연구’ 논문이 나왔어요. 당시 PVC의 보급으로 대나무 판매가 부진하던 때라 한국임업연구소에서 대나무 판매장려를 위해 대나무 숯의 효용성을 적극 홍보하고 나섰어요. 그래서 우리는 ‘대나무 숯으로 두 번 걸러 참이슬은 깨끗하다’고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대나무 숯은 실제로 탈취·정제 기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칼륨 같은 미네랄이 풍부해 소주의 풍미를 더해주는 효과가 있거든요.”

수십 년 동안 지켜왔던 진로 대신 ‘참이슬’을 새 소주 이름으로 정한 이유는 뭡니까? “참이슬의 이름은 정확히 말하면 ‘참眞이슬露’예요. 80년 이상 된 ‘진로’를 강조하면 ‘독한 소주’의 이미지가 강해져, 가급적 이를 피하면서도 진로의 뜻은 살리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름은 ‘참眞이슬露’로 정했지만, 소비자들은 그냥 ‘참이슬’로 불러주었으면 했죠. 우리가 원했던 대로 소비자들은 ‘참이슬’이라고 불러주었고요. 소주시장에서는 아직도 참이슬만한 ‘대박’이 없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고, 지금도 애주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제품이 됐죠.”

사실 그의 탁월한 마케팅 감각은 참이슬 이전에도 유감없이 발휘된 적이 있었다. 국내 12년산 프리미엄급 위스키 시장에서 독보적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임페리얼 12’ 역시 한 사장의 머리에서 탄생한 제품이다. 한 사장이 진로의 마케팅 상무를 맡았던 1994년 당시 국내 위스키 시장은 섬씽 스페셜, 패스포트 등 경쟁사의 스탠더드급 위스키(숙성연도를 표시하지 않는 중급 위스키)가 대세였다. 진로에서는 같은 급 위스키 VIP를 이미 내놓고 있었지만, 시장점유율은 10%밖에 안될 정도로 열세였다. “새 제품을 내더라도 비슷한 품질(스탠더드급)로는 경쟁이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국내 처음으로 숙성(에이징) 12년산 프리미엄급 위스키(숙성한 지 12년 이상 된 원액만을 골라 블랜딩한 위스키) ‘임페리얼 12’를 내놓고 위스키 시장을 공략해 들어갔어요.”

그러나 스탠더드급 위스키보다 값이 거의 배에 달하는 프리미엄 위스키는 소비자들뿐 아니라 유흥업소로부터도 ‘가격 저항력’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사장이 선택한 전략이 세계 최초로 500mL 용량의 위스키를 만들어 가격을 스탠더드급 750mL 위스키에 맞추자는 것이었다. “500mL 용량의 위스키는 전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했어요. 일단 업소에서 ‘대박’이 났습니다. 750mL 한 병 마시던 손님들이 500mL 두 병을 마시니, 수익이 훨씬 좋아진 때문이죠. 우리가 처음 만든 500mL 제품이 국내 위스키 시장에서 선전하니까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같은 글로벌 브랜드 위스키들도 잇따라 500mL 제품을 내놓더군요.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죠.” 임페리얼은 현재 조니워커, 시바스리갈에 이어 세계 3대 위스키 브랜드(판매 기준)로 자리잡았다.

한 사장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1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로를 나와 2002년 오비맥주에 들어갔으나, 2년도 안돼 대장암 판정을 받고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진로 근무 당시 소주 참이슬과 위스키 임페리얼을 ‘띄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영업활동을 한 탓이었다. 한 사장은 “임페리얼 출범 초기에는 하룻밤에도 서너 군데 업소를 방문하면서 신제품을 홍보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제품을 홍보하다 보면 기본적으로 자사 제품을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고, 결국 몇 년 지나 몸에 이상징후가 온 것이다.

한 사장이 주류업계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2004년 두산주류BG의 부사장으로 오면서부터였다. 당시 매물시장에 나와 있던 진로 인수를 진두지휘하라는 특명을 두산 오너 측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진로는 하이트로 넘어갔고, 한 사장은 두산주류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후인 2006년 2월 필생의 작품 ‘처음처럼’을 내놓게 된다. 그가 대장암 치유를 위해 꾸준히 마셔온 알칼리수를 세계 처음으로 ‘처음처럼’ 소주의 용수(用水)로 사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처럼’과 ‘참이슬’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한판이었다. ‘처음처럼’ 출시 당시 경쟁사인 진로의 소주시장 점유율은 두산의 10배가 넘었다. 진로의 참이슬 역시 한 사장의 ‘자식’이었지만, 지금은 경쟁사의 주력제품으로서 소주시장에서 독보적 1위를 점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만든 제품이지만, 이제는 주 공격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참이슬을 물리치기 위해 그가 내세운 카드는 ‘알칼리 이온수로 만든 소주’였다. 한 사장은 “소주 전쟁은 ‘어떻게 소주를 부드럽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라며 “처음처럼은 물성적으로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은 우리 몸의 청소부 역할을 합니다. 알칼리수는 물 입자가 적어 우리 몸 곳곳에 침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소주가 뭡니까. 약 20%의 알코올(주정)과 80%의 물이 섞이는 겁니다. 다시 말해 소주는 물과 물 사이에 주정이 끼인 것인데, 알칼리수는 물 입자 크기가 일정하기 때문에 주정이 고르게 끼여 술맛이 부드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출범 당시 5%였던 두산의 소주시장 점유율은 ‘처음처럼’의 선전 덕분에 최근 12%까지 올랐으며, 업계 순위도 6위에서 2위로 껑충 올라섰다. 두산그룹이 지주회사 전환 등을 위해 내놓았던 두산주류BG 매각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 역시 처음처럼의 잠재력을 롯데 측이 높이 산 덕분이었다.

한 사장은 3월 중순부터 두산인프라코어 COO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 중 여러 차례 “이제 술 회사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술도 가급적 와인처럼 가벼운 술을 마실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처음처럼’에 대한 애착은 여전했다. 한 사장은 “술 마케팅은 ‘습관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며 “‘처음처럼’이 갖고 있는 장점을 앞으로도 소비자에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다면 소주시장 1위 등극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