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김봉건과 함께하는 차문화 산책

醉月 2009. 4. 7. 09:24

차 문화 역사

中 차의 기원, 농경의 시작서 찾아…2000년전 문헌 이미 음용기록
위진남북조 긴 혼란기 신선이 먹는 귀한 음식 당나라때 와서 보편화

 
  예부터 차는 단순한 마실거리를 넘어 정신적 성격을 갖춘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사진=이경순
차가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중국인들은 차의 시원을 전설상의 인물인 신농씨(神農氏)에 부회(附會)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농씨는 인류 최초로 농경을 터득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산야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식물의 잎이나 뿌리, 열매 등을 맛보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독이 들어있는 식물들도 있어서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신농식경(神農食經)'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하루에 72가지 독을 만났으나 그때마다 찻잎을 씹어서 해독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은 문자 그대로 믿을 것은 못되지만, 중국인들이 어떤 정서로 차를 대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보겠다.

좀 더 신빙성 있는 기록인 진(晉)나라(265~420) 때의 현지 주둔 지방지인 '화양국지(華陽國志)'의 '파지(巴志)'에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인 서주(西周)시에 옛 파촉국에서는 이미 차를 만들었고, 지금의 사천성에서 하남성에 이르는 엄청난 험로를 거쳐 공납(貢納)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만 하더라도 중국인들이 차를 음용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사회가 어지러우면 사람들은 종교에 마음을 의탁하고 싶어 하는지 중국에서도 위진남북조라는 기나긴 혼란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의 사람들도 꽤나 귀신이나 신선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 같다. '신이기'라는 책에는 동한(東漢) 시대에 우홍이란 사람이 산에 들어가 차를 따다가 도교에서 숭배하는 신선의 시조인 단구자로 자처하는 노인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큰 차나무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속수신기'라는 책에는 진나라 효무제 때에 진정이라는 사람이 산에 들어가 차를 찾다가 수염이 긴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가리키는 곳에서 야생의 큰 차나무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중국에서도 대개 위진남북조 시기까지는 차가 매우 귀한 물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광릉기로전'이란 책에서는 진나라 원제 때에 어떤 노파가 매일 아침마다 홀로 차 한 그릇을 들고 저자에 나가 팔았는데 시장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사먹었는데도 차 그릇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차를 팔아 남은 돈은 길가에 흩어져 있는 고아나 가난한 걸인들에게 뿌려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고을의 형리들이 잡아가두었는데 밤이 되자 차를 팔던 그릇을 챙겨 감옥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했다. 고달픈 삶을 살아가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할머니의 약손 같은 이미지와 차가 결합된 이러한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또 동진 말 유경숙이 지은 '이원'이란 책에 보면, 한 과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차를 달일 때마다 집안에 있는 오래된 무덤에 먼저 올렸다고 한다. 아들들이 못마땅하게 여겨 무덤을 파헤치려고 하자 어미가 굳이 못하게 말렸더니, 그날 밤 꿈에 무덤 속의 노인이 나타나 십만 냥에 이르는 돈을 두고 갔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이 시기에는 이미 차를 영험한 식물(食物)로 치고 있고, 아울러 사회적 덕성을 고양하게 하는 매개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차라는 물건이 단순한 물질적인 마실 거리를 넘어 정신적인 성격까지 갖추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차가 비교적 여러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음료가 된 것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였다. 이는 차인들에게서 다성(茶聖), 혹은 다신(茶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육우(陸羽)라는 인물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그가 지은 '다경(茶經)'이라는 책이 차생활의 정형화와 보편화에 기여한 점은 차문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을만하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선종(禪宗) 사찰에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하여 차의 생산량이 급증한 점을 들 수 있다. 불교, 특히 선종의 승려들은 선(禪) 수행 시 수마(睡魔)를 이기기 위해 각성작용이 탁월한 차의 도움을 필요로 했었다. 그리고 사찰은 대개 산수가 수려한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찰에서 재배되던 차는 그 질도 대단히 우수해서 예로부터 "명산(名山)이 있으면 명찰(名刹)이 있고, 명찰이 있으면 명차(名茶)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선종사찰 수행승들 졸음 쫓으려고 마시면서 대중에 퍼져
다례 담긴 '청규(淸規) 사찰에서 제정해 사용, 당 유학 신라승들이 우리나라에도 전해

 
  우리나라 차문화는 선불교와 계합해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사진 제공= 사진가 이경순
중국 당나라 시대는 차생활이 급속히 대중에 보급된 시기였다. 이것은 불교의 선종 사찰에서 승려들이 차를 많이 음용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선종 사찰에서의 승려들은 선수행 시에 수마(睡魔)를 이기기 위해 차를 애용하였는데 스스로 사전(寺田)에 차를 심어 가꾸며 차문화를 융성하게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마조도일(馬祖道一) 같은 이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정신으로 청정한 농선(農禪)을 실천하였고, 마조의 제자 백장회해(百丈懷海) 같은 이는 최초로 '청규(淸規)'를 제정하여 선원 내에서의 대중의 생활을 규정하였는데, 이 청규 속에는 이미 다례를 다루는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조사어록들에는 '차 석 잔', '식후에 차 한 잔', '끽다거(喫茶去)' 등과 같은 차를 소재로 한 공안(公案)들까지 유행할 정도였다.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작은 당대의 이들 선종 사찰의 차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대에는 역대 왕이 불교를 보호하여 사원 경제의 규모가 매우 방대하였다. 특히 왕공과 부호들의 보시에 의한 전답이 큰 규모였는데, 이와 같은 보시 성행의 이유는 자기의 현세·내세의 공덕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반면 사원의 면세 특권을 이용해 자기 장원의 과세를 면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로 행해진 것도 적지 않았다. 사원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사장(寺莊) 점유에 급급하여 토지의 매매 겸병 그리고 대자본을 투자하여 개간하는 등 사원 스스로가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당시 사원은 광대한 장원(莊園)을 소유하여 이를 노비, 혹은 객호(客戶)라는 소작인에게 경작하게 했으며 이외에도 방앗간, 수레 대여, 금융 사업 등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결국 당 무종(武宗)의 회창 연간(841~845)에 엄청난 규모의 훼불사태가 일어났는데 이때에 중국의 불교계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기록에는 이때 불교계가 입었던 피해에 대해 대사(大寺) 4600, 소사(小寺) 4만 여가 파괴되었으며, 승니(僧尼) 26만 명이 환속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몰수된 사전(寺田)이 수천만 경(頃), 노비 15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역사에서는 이 훼불사태를 두고 도교 쪽의 참언(讒言)에 의한 일이라고 하지만 실은 불교계 스스로 자초한 면도 없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있는 자들의 차명계좌 같은 짓들이 문제이고, 또한 부유한 종교 집단이 스스로 자멸하는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여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교훈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청정한 농선과 청규를 이행한 선종은 당말 이후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전성시기를 이루었으니 이 사실은 더욱 더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복은 화가 숨어있는 곳이요(福兮禍之所伏), 화는 복이 기대어있는 곳(禍兮福之所倚)'이라고 했던가. 회창의 폐불 때에 자국의 승려는 환속시키고 외국의 유학승들은 귀국을 종용하였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도의 체징 홍척 혜철 등의 신라승들이 대거 귀국하여 우리나라의 불교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거의 강서 홍주의 선종사찰들에서 수학한 선승들인 바 이들이 귀국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열면서 선학(禪學)과 다례(茶禮)를 함께 펼쳤을 것은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후 우리나라의 고려·조선조를 내려오는 동안 이어져 온 다맥(茶脈)은 주로 이 구산선문을 통한 마조 문하의 홍주 선맥(禪脈)과 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 옳으며, 우리나라의 차문화가 대체로 불교문화 특히 선불교와 계합(契合)하여 내려온 연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겠다.

우리나라의 차의 전래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신라 흥덕왕 3년(AD 828년)에 견당사로 당을 다녀온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가져온 것을 지리산 자락에 심었다고 되어 있으나, 필자는 마조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제자인 홍척(洪陟)이 흥덕왕 원년(826년)에 귀국하여 남원에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근년에 실상사지 부근에서 야생의 차수(茶樹)가 발견되고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 차는 대렴이 가지고 온 차 씨와 더불어 우리나라 차수의 양대 조상의 하나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송대 서민서 귀족까지 茶생활 널리 보급… 차 달이는 시합도
성리학 등 문화적 영향 국 끓이는듯한 자차 대신, 거품많은 점차가 유행 사치성 차·도구도 극성

 
  찻사발에 가루차와 끓인 물을 붓고 차선으로 격불(擊拂)하여 거품을 일으키는 모습. 사진 제공=사진가 이경순
차문화는 송대(宋代)에 들어 매우 화려하고 번쇄한 방향으로 발전되어 갔다. 역사적으로 송나라는 이전의 당(唐)에 비해 국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북방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북송이 망하자 도읍을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 가까스로 웅크리고 있던 형국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부유해서 관리의 급료도 넉넉했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적이었으니 자연히 문화도 무르익었다.

당대의 문화가 대체로 외향적이고 개척적인 성향이었다고 한다면, 송대의 문화는 내성적이어서 안으로 수렴하고 함양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리하여 당의 문화가 다원적인 문화 요소들이 공생하는 문화였다면, 송의 문화는 그러한 문화 요소들을 교직하고 온양(醞釀)하여 섬세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한 문화였다. 철학에서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를 거쳐 주희에 이르러 성리학이 완성되어 동양의 깊고도 그윽한 세계관과 인성론의 정형이 이루어지고, 문학에서도 소식 소철 등이 심의(心意)의 자득(自得)을 추구한 것이나 육유 황정견 등이 양심(養心)과 치성(治性)을 강조한 것 등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차문화에서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차를 달이는 방식이 당대에 행해지던 자차(煮茶)의 방식에서 점차(點茶)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자차란 떡차를 가루 내어 물이 끓는 솥에 넣어 국이나 죽처럼 끓여 먹는 방식이다. 이때 자연 차의 죽면(面)에 거품이 어느 정도 일어나게 되는데 당대에도 이 거품이 일어난 모양에 따라 말(沫)이니 발이니 화(花)라고 지칭하며 대단히 귀중하게 쳤다.

그러나 송대에는 이와 같은 자차에 비해 거품을 훨씬 잘 일으키는 점차의 방식을 창안했다. 점차란 가루차를 사발에 넣고 그 위에 끓인 물을 부어서 개고 이것을 다시 차선(茶筅)이라 부르는 대나무 솔로 저어 훨씬 많은 양의 거품을 용이하게 일으킬 수 있는 방식이다.

송대는 당대에 비해서 차생활이 더한층 널리 보급되어 서민에서 왕공 귀족에 이르기까지 차 마시는 일이 보편화되었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투차(鬪茶)나 시차(試茶), 혹은 명전(茗戰)이라 불리어지던 섬세한 품감 행위가 성행했다. 투차란 단순히 차 달이는 솜씨를 가리는 시합 정도가 아니라 차면에 일어나는 거품의 모양이나 색깔·향기·맛 등에 대해서 심오한 예술적 감상이 곁들이는 수준 높은 문화행위였다.

북송(北宋)의 마지막 황제 휘종(徽宗) 조길(趙佶)은 그 자신 대단한 문인서화가요 차문화 애호가로서 차문화에 관한 그림과 글을 많이 남겼다. 그는 또 '대관다론(大觀茶論)'이라는 불후의 저작을 남겨 송대 차문화의 면모를 우리들에게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대관다론'에 보면 당시의 점차의 방식에 대해 섬세한 음미 과정을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는 가루차와 끓인 물을 사발에 넣고 차선으로 저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그 간단한 일을 일곱 단계의 과정으로 세분하여 각각의 과정에서의 변화를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송대의 차인들이 얼마나 섬세하게 차를 다루고 있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차 마시는 일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마땅히 좋은 차가 있어야 하고, 또 멋진 차 도구도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송인들은 사향이나 용뇌 같은 향약을 섞어 차를 만들고, 떡차의 표면에 금으로 용과 봉을 장식하여 이른바 '용단봉병(龍團鳳餠)'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 덩어리에 수만금이나 나가는 고가의 차도 있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차 도구 또한 금이나 옥으로 만들어 사치의 극을 다했다. 이와 같이 차에 향약을 섞어 인위적으로 향을 더하는 일이나 금·은으로 차 도구를 만드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논하기로 하겠지만, 어떻든 차문화에 이처럼 깊이 천착·침잠하여 유감없이 향유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 차문화의 한 특징이랄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송인들의 문화적 안목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잘 나타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송대의 차문화는 우리나라의 고려와 일본의 막부시대 초기 차문화의 전형을 이루게 되며, 특히 현대에 있어서도 일본 다도의 주축을 이루는 말차(抹茶) 문화는 송대 차문화의 점차 다법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명·청대에 가루대신 찻잎 원형 보존한 '산차'가 만들어져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차는 명·청 시기에 제작되었다. 사진제공=사진가 이경순
중국의 명·청(明淸) 시기는 차생활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문화가 되었고 또한 차의 제조법이나 우려 마시는 방식에 있어서도 크게 변화한 시기였다. 우선 제다의 방법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육대차류(六大茶類)가 대거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육대차류란 녹차·청차·홍차·백차· 황차·흑차류이다. 차나무에서 갓 딴 찻잎에는 폴리페놀 옥시다제(Polyphenol oxidase)라는 산화효소가 들어있어서 이것을 그냥 두면 잎이 누렇게 황갈색으로 변질된다. 그러므로 열로 처리하여 산화효소의 작용을 막아야 하는데 이를 살청(殺靑)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살청을 언제 하느냐에 따라서, 다시 말하면 자연적인 산화와 또 그에 의한 전색(轉色)을 어느 시기에 중단시키느냐에 의해 각각 다른 종류의 차가 된다. 뿐만 아니라 살청을 가마에 쪄서 하느냐, 솥에 덖어서 하느냐, 햇볕에 말려서 하느냐, 그냥 시들리기를 하느냐에 따라 차는 각각 다른 맛을 내게 되고, 또 그 중간중간에 어떤 인공적인 조작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차의 맛은 천차만별이 되어 수많은 차의 종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상해문화출판사에서 1992년에 초간되어 2002년에 15차 인쇄된 '중국차경(中國茶經)'에 보면 녹차류 138종, 홍차류 11종, 청차류 16종, 백차류 4종, 황차류 10종, 흑차류 5종의 명차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대부분의 차들이 바로 이 명·청시기에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의 형태 또한 보이차나 천량차와 같은 흑차류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당·송대의 떡차와 같은 모양이 아니라 잎의 모양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원래의 모양을 온전히 갖춘 산차(散茶)로 제작되어 제다의 방법에서 확연한 변화를 가져왔다. 당연히 차를 우려 마시는 방법 또한 변화되어 당·송대의 자차법이나 점차법과 같이 떡차를 갈아 물에 타서 모두 마시는 것이 아니라, 산차를 끓는 물에 넣어 진액만 우려마시고 찌꺼기는 버리는 포차(泡茶)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찌꺼기라고는 하더라도 아직 차의 유효성분이 상당량 남아 있는데도 이를 버린다는 것은 이 시기에 와서 차가 매우 흔한 식물(食物)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법의 변화와 일관성을 단위로 하여 명·청대를 한 시대로 구분하였지만 명과 청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조대(朝代)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청 양대의 차문화의 특성은 대개 질박(質朴)과 고졸(古拙)을 숭상하였다는 데에 공통성이 있다.

그 첫 번째 특성은 역시 차의 제조 방식에 있다. 이 시기에 와서 차의 종류가 현저히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산차의 형태로 만들어 찻잎의 질박한 자연성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당·송대의 떡차는 찻잎을 쪄서 방아에 넣고 찧어 그 형체가 완전히 문드러졌고 이것을 다시 본에 넣어 원반 형태나 벽돌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먹을 때도 맷돌에 갈아서 체에 쳐 완전히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마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른 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특성은 차를 다루는 도구에서 나타났다. 명대에 발명되어 청대까지 휩쓴 자사(紫砂) 다기들은 이 시기의 차문화를 대표하는 그릇이다. 자사 다구들은 돌을 빻아 가루 내어 이것으로 다기를 빚어 고온에서 구워 만든 것인데, 그 단단하기가 돌과 같았으며 유약도 바르지 않은 이 다기들은 한결같이 고졸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이 자사의 다구로 산차를 우리면 비록 당대의 두보(杜甫)가 말한 "금주전자 기울여 옥잔에 차 따르니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누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아취(雅趣)는 실로 높은 곳으로 흘러 차라리 속됨을 면하는 것이다.

명말 숭정(崇禎) 연간에 주고기(周高起)가 쓴 '양선명호계(陽羨茗壺系)'란 책에 "명인(名人)이 제작한 자사 차호(茶壺)는 그 무게가 불과 몇 냥에 지나지 않지만 가치는 금 일이십 냥에 해당하니 이는 흙으로 하여금 능히 황금과 그 값을 다투게 한 것이다"고 한 것을 보면 명·청대의 차인들의 안목이 얼마나 비범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조선조의 산림유(山林儒)들이나 선승들의 차생활이나 일본의 '와비' 차풍은 이 명·청대의 차풍과 함께 또 한 시대의 동양문화의 특성을 이루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