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동아시아의 대국을 건설한 고구려의 군사전략

醉月 2009. 9. 9. 09:21

동아시아의 대국을 건설한 고구려의 군사전략

작성자 : 노양규 육군대령

 

 

고구려는 한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를 넘어 만주일대와 중원대륙으로 확대한 동북아의 강대국이었다.

백만 대군에 달하는 수, 당의 공격을 막아내고 만주에 우뚝 선 고구려! 건국 이 후 주변 이민족들과 치열한 전쟁을 통해 다져진 불굴의 정신과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만주들판을 누비며 고구려 700년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한국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자주적인 영역을 구축한 대제국 고구려를 뒷받침한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자랑스러운 통일조국의 미래를 가꾸어 나가기 위해, 우리는 고구려의 그 힘찬 기상과 지혜를 가슴속에 담아야 한다.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의 역사 속에는 우리 군이 찾아야 할 ‘한국형 전략의 원형’이 숨겨져 있다.

 

광개토대왕,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개척

고구려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장한 왕은 19대 광개토대왕(391~413년)이었다. 그는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동서남북 가는 곳마다 승리하여 서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남으로는 백제를 쳐서 임진강과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대시키고, 신라에 들어온 왜의 군대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시켰으며, 동북의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로서 고구려는 북으로는 흑룡강, 남으로는 임진강,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내몽고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건설하였다.

 

그가 죽은 뒤 그에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시호를 주어 위업을 추모한 것도 그 까닭이다. 왕의 위대한 업적은 집안현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 자세히 적혀 있으며, 그의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이 비석은 높이가 6.3m, 사면에 1천 8백여 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대왕은 안정된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강력한 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은 18세의 소년왕으로 즉위하여 3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위 20년 동안 64개 성을 격파하고, 1,400여 개의 촌락을 점령하였다.

광개토대왕이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여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비하였다.

그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다져놓은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각 부족단위의 군사집단을 국왕의 군대로 통합하여 일사불란한 지휘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통치제제는 내부를 단결시키고 안정화시켰으며, 나아가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 작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둘째, 고구려군은 강력한 기병군단을 보유한 군사강국이었다.

강력한 기병군단은 고구려에게 대외정복의 힘을 주었으며, 기습공격을 가능하게 하고, 상대로 하여금 충분한 대처를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영락 2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 관미성을 공격할 때, 1만 명의 백제군을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영락 5년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거란족이 거주하는 요하상류 염수방면으로 진출하여 600~700영을 격파하였으며, 영락10년(400)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신라를 지원하였다. 이렇게 광개토대왕이 연나라, 백제, 왜구, 동부여 등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동성과 신속성을 지닌 기병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개토대왕의 기병군단은 거란, 말갈, 선비족 등 주변 유목민들을 휘하에 복속시켜 활용한 덕분이었다. 이러한 기병군단을 바탕으로 서북쪽으로 요동을 장악하고, 북으로는 부여의 농안, 동으로는 길림과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셋째, 고구려 사회는 무(武)를 중시했다.

당시 주변 부족들과 의 투쟁 속에서 호전적이고 적극적인 상무정신을 갖게 되었다.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젊은이들이 ‘경당’이라는 곳에 모여 독서와 활쏘기를 익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경당에서 충성과 효도를 배우고, 활쏘기, 격투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고구려인들은 활을 잘 쏘았고 또 생활 속에서 수렵활동을 통해 전투능력을 다져왔다. 그리고 평소 집집마다 무기를 비치하였다가 유사시에는 전쟁에 참가하였다.

 

넷째, 고구려는 우세한 철을 생산했다.
고구려는 요동지방에서 생산되는 철을 기반으로 강력한 무기와 철갑기병을 운용할 수 있었다. 당시 철의 확보는 강력한 군사력 확보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고구려의 철갑기병은 다른 어느 부족들보다 강력하여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섯째, 광개토대왕이라는 젊고 혈기왕성한 군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랙산더 대왕처럼, 대왕 자신이 직접 병력들을 거느리고 강력한 기병군단을 앞세워 동서남북의 광대한 영토를 정벌하였다.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려는 다물정신,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호태왕의 혈기와 투지, 위대한 통치력이 고구려의 힘으로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광개토대왕은 야심이 많고 무략이 뛰어난 군주로 묘사하였다.

 

요동은 고구려 방어의 핵심이었다

요동은 고구려의 최전선지역이었다. 통일된 수·당과 만주의 지배자 고구려가 충돌하는 결전장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위협은 대부분이 요하(遼河)지역을 통해서 다가왔다. 요하 방어성이 붕괴되었을 때는 곧바로 고구려의 국가적 위기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중국세력의 주 침공로상에 방어용 산성을 구축하였다. 고구려의 성장은 곧 중국세력과의 충돌과 승리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충돌과정에서 고구려는 험한 산세를 이용한 성(城)을 쌓았다. 그리고 이 성을 통해 백만 대군을 몰고 공격해 오는 중국 세력을 막을수 있었다.

고구려의 역사는 ‘축성(築城)의 역사’였으며, 그 성의 보존과 활용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 태종도 ‘고구려는 산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쉽게 정벌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로, 고구려는 견고한 산성을 갖고 있었다. 특히 국경선 부근인 요동에 여러 겹의 방어성을 쌓았으며, 수도로 접근하는 통로에 관애와
차단 성을 두었고, 효과적인 수도방어를 위하여 도성체제(산성과 평지성)를 두었다.

수나라 백만 대군의 공격은 요동성이 버티어 주었고, 당 태종의 30만 대군의 공격은 안시성이 막아주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도 요동반도로부터 요하를 따라 북으로 구축되었다. 요동은 고구려 방어의 핵심지역이었다. 고구려의 산성들은 요동지역에 집중되었으며,

수나라 침공 이후에는 수군 공격에 대비해 해양방어용 성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고구려, 수나라 격파, 만주의 패권 장악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이후 요동을 장악하고 만주의 강자로 군림하던 6세기 후반, 동북아에 긴장이 고조 되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이 589년 수나라로 통일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 수나라와 만주의 지배자 고구려 사이에 한판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598년 6월 수 문제가 수륙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방면으로 공격해 왔다. 수나라의 제1차 침공이었다. 이러한 수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던 고구려는 요동방어선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대응하였고, 결국 자신만만하던 수의 문제를 물리쳤다.

중국 대륙의 강자 수나라에 만주의 지배자 고구려가 한판승을 거둔 것이다.

 

수 문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수의 양제는 재침의 기회를 노리며 전력을 강화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통로는 육로로 요동을 거쳐 오는 길과 산동반도에서 바다로 공격하는 두 가지 통로가 있다. 수양제도 이러한 2가지 통로를 이용하되, 먼저 백만 대군으로 요동지역을 장악한 후, 2단계로 수군과 합류하여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하지역의 하천과 늪지대 그리고 고구려의 험한 산성, 장거리 원정 등은 큰 장애요소였다. 따라서 대병력으로 공격하여 전쟁을 속히 끝내는 것이 중요하였다. 만약 전쟁을 오래 끌게 되면 겨울이 다가오고, 식량조달도 어렵게 된다. 그래서 113만여 명의 대병력이 동원되고, 수많은 군량 수송인원이 징발되었으며, 300여 척의 배가 건조되었다.

수의 침략에 대비하여 고구려도 총력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였다. 고구려는 병력은 적지만 요동지역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성곽방어체제는 장점이었다. 군사조직도 행정조직과 일치되어 성의 성주가 행정조직과 군대를 통솔하여 성을 방어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성은 전국에 200여 개나 구축되어 있었는데, 성은 견고하게 축성된 군사거점으로서 일단 유사시에는 식량과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가지고 성 안으로 들어가서 수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군에는 을지문덕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버티고 있었다.

 

고구려는 열세한 전력을 견고한 요동방어체제와 청야입보(淸野立堡), 이일대로(以逸待勞) 전략으로 맞서야 했다. 청야입보는 적 침공로 주변의 곡식이 심겨진 들판을 텅 비워 적이 이용할 수 없도록 하고 백성들은 성안으로 들어가 지킴으로써 적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이었다. 또 이일대로 전략은 적을 깊숙이 유인하여 보급로를 신장시키고 전투력 소모를 강요한 후, 적이 약화되거나 약점을 보이면 기습적으로 반격하여 격멸하는 전략이었다. 대규모 병력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 신속히 전쟁을 끝내려는 수 양제의 전략을 꿰뚫고, 험한 지형과 하천, 기상을 이용하여 수나라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고구려식 유인격멸전략이고 지구전이었다. 113만의 수나라를 30만 명의 열세한 전력으로 상대해야 하는 고구려로서는 산성을 이용한 지연전과 유인격멸이 효과적인 대응전략이었다.

 

612년 3월 드디어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되었다. 요하를 건넌 수 양제는 4월 요하방어선의 핵심지역인 요동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공성장비를 동원하고 요동성을 수십겹으로 에워싸 외부 지원을 차단한 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방어도 빈틈이 없었다. 요동성주를 중심으로 병사들과 백성들이 모두나서 저항하였다. 6월까지 평양을 점령하려던 수 양제는 6월이 되어도 요동성도 점령하지 못했다. 초조해진 그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만 별동대를 주어 수군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도록 했다.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포위한 가운데, 별동대 30만 명이 평양성으로 향했다. 그들은 식량의 현지조달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각 병사마다 100일분의 식량을 휴대하여 전진하였으나, 압록강까지 도달하는 동안 지칠대로 지쳐 엄명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식량을 땅에 묻거나 길에 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이 결과 압록강에 이르는 동안에 이미 군량이 떨어져 일부 장수들은 회군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압록강에 다다랐지만 수나라 군사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전투력의 수준은 극도로 떨어졌다.

 

압록강을 방어하던 을지문덕은 항복을 가장하여 자신이 직접 우중문 진영에 들어가 협상을 하면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였다. 수나라군이 굶주리고 지친 것을 파악한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의 약점을 더욱 심화시켜 유인격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적을 평양까지 깊숙이 유인하여 지치고 피로하게 한 후 공격하자는 전략이었다.

을지문덕은 적을 최대한 지연시키며 평양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나라의 수군은 육군과의 협력이 없이 단독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고구려군의 매복에 걸쳐 4만 명이 궤멸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평양성 30리 밖까지 겨우 진출한 우중문·우문술의 30만 별동대는 평양성의 견고한 방어태세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함께 공격하기로 했던 내호아 수군의 궤멸소식을 듣고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굶주리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이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시 한 수를 지어 보내며, 회군할 것을 종용했다.

 

그대의 신같은 방책이 천문을 꿰뚫었고(神策究天文)
절묘한 계략이 지리를 통달하였소(妙算窮地理)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았으니(戰勝功旣高)
족함을 알고 그만두기 바라오(知足願云止)

 

이 시를 본 우중문은 자기들이 을지문덕의 유인전술에 말려든 것을 깨달았다. 위기를 느낀 우중문·우문술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총퇴각을 명령했다. 드디어 을지문덕이 기다리던 반격의 시기가 왔다. 마침내 고구려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굶주리고 지친 수나라군은 도처에서 공격을 받으며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인 공격은 청천강 살수에서 시작되었다. 도처에서 공격을 받으며 퇴각하던 수나라 군대가 7월 24일 살수(청천강)를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의 기습 공격이 실시되었고, 수나라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다. 30만 명의 별동대중 살아 돌아간 자는 2,7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적을 깊숙이 유인하여 지치게 만든 후 기습공격으로 타격하려 한 을지문덕의 전략이 빛을 발한 것이다.

 

요동성 전투를 지휘하던 수 양제는 우중문이 패주해 오자, 8월 중순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고구려가 승리하였고, 고구려의 위상이 만주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 수 양제는 617년까지 3차례나 더 침공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을지문덕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방어체제는 더욱 위력을 발휘하였고, 요동방어 체계는 난공불락이었다.

고구려군의 승리는 을지문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휘체제와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강력한 성곽 방어체제, 그리고 대규모 적을 내륙 깊숙이 끌어들여 약화시킨 후 공격하는 유인격멸전략이 승리요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만 대군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대응한 고구려 백성들의 단결과 상무정신, 불굴의 투지가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당나라를 격파한 위대한 고구려

수나라의 뒤를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4번이나 침공했다가 패배한 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재침의 기회를 노렸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자, 이를 빌미로 고구려 침공을 하기로 하였다. 이에 고구려도 강력한 대응태세를 구축하고,

당나라의 침공에 당당히 맞섰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실패 원인을 철저히 연구하고 이를 교훈으로 삼았다. 당 태종은 641년 진대덕을 보내 고구려 내정과 지형을 탐색하게 했고, 644년 가을 영주자사 장검을 보내 요하주변의 정보를 획득하였다. 당 태종은 수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새로운 전법을 구사했다.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평양성을 최종목표로 설정하되, 육군은 요동을 먼저 점령한 후 평양을 공격하기로 했다. 수나라가 백만 대군을 편성함으로써 군량수송에 어려움을 겪었던 실패를 고려하여 육군을 6만 명의 정예부대로 편성하고, 수군도 4만 3천 명과 500척으로 편성하였다. 특히 육군은 산악전투에 뛰어난 지역출신을 선발하고, 수군은 연해지방 출신으로 편성하였다. 과거 수나라가 백만 대군을 편성함으로써 나타났던 보급상의 문제점을 보완하였고, 고구려가 수성작전에 살수대첩에서 수나라군대를 격파한 을지문덕 강한 것을 대비하여 공성장비를 충분히 준비하였다.

 

그러나 전략의 큰 틀은 수나라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즉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세민의 주력부대, 선봉부대인 요동도행군, 해군인 평양도행군 등 세 부대로 나누어, 요동을 먼저 장악한 후에 평양으로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다만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한 수나라가 평양까지 깊숙이 쳐들어갔다가 실패했던 것을 교훈삼아 무모한 진격보다는 요동지역 공략에 전념하기로 했다. 또한 수군도 단독으로 공격하다가 패배한것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먼저 요동공략에 참가토록 했다.

 

1단계 요동공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당나라가 새로 개발한 전략은 우회로를 통한 기습전 감행, 동시공격,
주요 지역에 대한 병력집중 등이었다. 우회로를 통한 기습공격은 과거 수나라가 사용했던 중앙통로인 회원
진-요동성 방향이 아니라 그 북쪽인 통정진-현도성-신성방향으로 돌아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동시공격을 위해 선봉부대는 북쪽 신성과 개모성 방향으로, 이세민의 주력부대는 중앙 요동성 방향으로, 장검의 제 3제대는 남쪽 건안성 방향으로, 그리고 해군인 평양도행군은 비사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동지역의 핵심인 요동성과 안시성을 공격할 때는 모든 전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이러한 점은 과거 수나라와는 다른 새로운 공격전법들이었다.

 

연개소문도 당나라의 침공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에 비해 영토, 인구, 병력동원, 경제력 등 국력의 총합에서 열세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제한된 국력으로 우세한 적에 대비하기 위해‘선수후공(先守後攻)’ 전략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즉 성을 굳건히 방비하면서 당나라군이 지치고 약화되기를 기다린 후, 기습적으로 적을 타격하는 전략을 준비했다.

청야입보, 이일대로로 대표되는 이 전략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즐겨 사용하던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요동방어가 가장 중요하였다. 따라서 적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중요 성들의 방위력을 강화하고, 적의 작전에 말려들지 않도록 지공작전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신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으로 이어지는 요동방어성들과 천진산맥의 애로들을 보강하고, 각 성들간에는 상호지원이 될 수 있도록 연결망을 구성했다.

당나라군은 전쟁을 오래 끌게 되면 식량보급, 추운 겨울, 전투력의 약화 등으로 불리할 것이다. 반면에 고
구려 입장에서는 적을 험한 산성을 이용하여 방어하면서 기습적인 공격으로 약화시켜 장기전으로 끌고갈수록 유리하다. 그래서 성곽방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한 곳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지역에서 증원하여 보강해야 한다. 성이 무너지면 막을 성책도 준비하고, 성들 간의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고구려는 ‘청야입보, 이일대로’ 전략을 구사하면서 성을 더욱 견고히 보수하고 군량의 비축도 충분히 하였
다. 특히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아 전진방어 태세도 갖추었다. 수나라와의 전투에서 나타난 문제점도 보강하
고, 바다에서의 공격에 대비하여 해안방어체제도 구비하였다.

 

645년 3월 조양을 떠난 당 태종은 요하를 건너 신성과 현토성을 먼저 공격하였다. 요하 하류를 건넌 병력은 건안성을 공격하였다. 한편 장량이 이끄는 수군도 산동반도를 떠나 요동반도의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드디어 요동방어체계의 중심인 요동성에 적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정예병으로 구성된 당의 공격은 매서웠다. 요동성이 위급해졌다. 이에 고구려군은 국내성에서 4만 명을 긴급 출동시켰으나 오히려 기습을 받아 중간에서 무너졌다.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던 요동성이 5월 중순 남풍을 이용한 화공작전에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다. 전사 1만 명, 포로 1만 명, 4만여 명의 민간인과 50만 석의 양곡을 빼앗겼다. 6월에는 백암성마저 무너져 요동방어체계가 최고의 위기에 도달했다.

 

연이은 승리에 고무된 당 태종은 7월에 요동의 마지막 버팀목인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즉각 말갈병을 포함한 15만 명의 지원군을 고연수 장군 지휘 하에 안시성으로 증원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 요동방어체계가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은 강했다. 안시성 성주인 양만춘은 백전노장으로서 강한 정신과 용기를 지닌 고구려의 맹장이었다. 증원군이 무너지고 수십겹으로 포위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당 태종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내었다. 초조해진 당 태종은 성남쪽에 토산을 쌓아가며, 공성장비를 동원하여 거의 매일 6~7차례의 파상공격을 하였으나, 양만춘을 중심으로 필사적인 항전을 한 안시성은 난공불락이었다. 고구려군 역시 토산의 높이에 따라 성벽을 더 높이 쌓고, 성벽이무너지면 목책으로 긴급 보수하며 적의 성 돌입을 막는 한편, 밤에는 특공대가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 적을 기습하는 등 필사적인 항전을 수행하였다. 토산이 높아져 성안이 감제되자 고구려군은 3일간의 혈전 끝에 토산을 점령하여 버렸다. 당 태종은 더 이상 안시성을 공략할 수도 없었고, 안시성을 두고 평양으로 진격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요동의 겨울추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에 대한 준비가 없던 당군은 군량마저 바닥이 나고 있었다. 요동의 다른성에서는 고구려군이 계속하여 당군의 보급로를 위협하며 물고 늘어졌다. 9월 중순당 태종은 드디어 총퇴각을 명령하였다. 요하의 습지대 요택으로 급히 퇴각하던 당나라군은 고구려군의 공격과 습지대에 빠져 또다시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안시성이 고구려를 살려냈다. 안시성의 군대와 백성들의 결사항전이 만들어 낸 대승리였다. 성안의 백성과 병력들은 양만춘을 중심으로 강한 응집력을 발휘하였다. 당 태종이 38일간이나 집요하게 공격하였지만, 안시성은 난공불락이었다. 상하가 성주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뭉친 결과였다.

1차 침공에 실패한 당 태종은 647년, 649년에 2차례 더 침공을 단행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5월에 병사하였다. 그는 더 이상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당나라 능력만으로는 고구려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660년 백제가 무너졌다. 이를 바탕으로 당 고종은 661년 4월 35만 명의 대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오히려 군량의 부족과 혹한으로 평양에 고립되어 위기에 처했다. 신라 김유신으로부터 식량을 보급 받아 662년에 겨우 철수하고 말았다. 당나라는 4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하였지만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하였다,고구려는 598년 수 문제가 침공한 이래, 당 고종이 패배하고 철수한 662년까지 66년 동안 8차례의 대전쟁을 승리로 마감하고, 위대한 고구려로 만주에 우뚝 섰다.

 

그 후 고구려를 무너뜨린 것은 외침이 아니라 내부 분열이었다. 막리지 연개소문이 666년 세상을 떠나고, 장남 남생이 막리지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으려는 간신들이 형제간을 이간시켜 분쟁이 일어나고,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항복하는 등 내부에서 분열되었다. 결국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4차례나 막아내고, 당나라의 4차례 침공도 막아내었던 만주의 강대국 고구려는 결국 내부로부터 무너져버렸다.

 

구려의 위대한 정신

수(隋)와 당(唐)의 백만 대군을 요동벌판에서 거리낌없이 막아설 수 있었던 고구려의 기상은 무엇인가?

수나라 30만 별동대를 평양까지 깊숙이 끌어들일 수 있었던 그 용기와 배짱은 무엇이었는가?

당태종의 끊임없는 공격을 막아낸 안시성의 결사항전 정신은 어디에서 형성되었는가?

고구려는 700년간 중국대륙의 수많은 침략을 굳건히 막아내고 만주에 우뚝 선 한민족 웅비의 제국이었다.
고구려는 만주벌판에서 주변 부족들과의 투쟁의 과정을 통해 건국한 이후,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과 상무정신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고구려는 행정과 군사조직이 일치된 체제를 통해 위기에 대응하였고, 기병군단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구비하였다. 요동은 고구려 방어의 핵심지역으로서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였다. 험준한 산세에 위치한 산성은 고구려의 지탱점이었고, 청야입보와 이일대로 전략을 가능케 하였다.

 

‘청야입보’와 ‘이일대로’ 전법은 원정작전을 수행하는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괴로운 전법이었다. 그들은 신속히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고구려는 그러한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 더욱 지체시키고 끌어들이고 분산시켰다. 고구려는 험한 산세를 이용한 성곽들이 있었고, 무적의 철갑기병과 기병군단이 존재했으며, 을지문덕, 양만춘, 연개소문 같은 걸출한 영웅들이 있었다.

자랑스러운 통일조국의 미래를 가꾸어 나가기 위해, 우리는 고구려의 그 힘찬 기상과 지혜를 가슴속에 담아야 한다. 만주를 호령하던 대제국 고구려 역사 속에는 한국군이 찾아야 할 ‘한국형 전략의 원형’이 숨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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