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小國 베트남이 大國 중국을 다루는 법

醉月 2011. 7. 7. 08:18

1000년 지배 중국 물리친 ‘독종’ 베트남의 전쟁술

“뭉치면 산다” 국론 통일 땐 천하무적 지형지물 이용한 게릴라 작전
강인한 여성의 힘… 중국 타도 선봉에 위기 때면 나타나는 전쟁 영웅들

對중국 전략은 화전 양면… 평화엔 평화로, 총에는 총으로
원나라 50만·청나라 20만 베트남서 전멸
1979년 중월전쟁 때도 60만 대군 동원한 중국 참패

20세기 명장 지압장군의 ‘3不 전략’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는다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는다
적이 생각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
▲ 응웬떤중 베트남 총리photo 로이터

 

1200년대, 세계 최강의 제국을 이룬 원(元)나라 쿠빌라이 황제는 모두 세 차례 베트남을 침공했다. 1차(1257년) 3만명, 2차(1284년) 50만명, 3차(1287년) 30만명. 전국의 병사를 다 긁어모아야 20만명에 불과한 소국 베트남을 상대로 몽골족의 원나라는 거침없는 정복욕을 불살랐다. 하지만 세 차례 전쟁의 결과는 모두 원의 패배로 끝났다. 원은 정복군의 숫자가 말하듯, 얕잡아보고 벌인 1차 전쟁의 복수전으로 엄청난 병력을 재차, 삼차 동원했지만 결국 베트남의 저항에 무너졌다. 마지막 3차전 때 베트남군은 현재의 하롱베이 부근 바익당(白藤)강 전투에서 퇴각하는 몽골군이 다시는 침공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처절한 타격을 가했다. 당시 전투가 끝났을 때 바익당강에는 10만구에 달하는 몽골군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베트남의 빛나는 대몽 항전사는 몽골군의 말굽에 유린되며 숱한 백성들을 포로로 내준 우리의 고려사와 겹치며 자괴심과 함께 은근한 대리 만족감까지 불러온다. 강한 외적에 오히려 강하게 맞서는 베트남의 독한 정신은 요즘에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근 남중국해에서는 석유가 대량 매장돼 있는 섬들을 둘러싸고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갈등의 주역은 32년 전 국지전을 치른 중국과 베트남. 베트남은 지난 6월 13일 1979년의 중월전쟁 이후 32년 만에 징병 관련 법령을 발표하며 남중국해에서 자행되는 중국의 도발에 단호하게 맞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자 중국은 다음날 남중국해상에서 6월 초에 공수부대를 동원한 상륙작전 훈련을 벌인 사실을 공개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베트남의 즉각적이고 단호한 의지 표명이다. 최근 중국 언론은 “베트남 군부 고위인사가 ‘중국이 서사(西沙)군도를 무력으로 점령하면, 우리는 육로로 베이징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베트남이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베트남은 과거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식민지였으나 자력으로 중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한 역사가 있다. 또 몽골, 미국 등 당대 세계 최강국과 여러 번 전쟁을 치러 모두 이긴 전례가 있다. 가장 최근의 전쟁으로 32년 전 중국과 벌인 국지전(중월전쟁)도 마찬가지다. 당시 중국은 베트남에 교훈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침공했으나 오히려 베트남으로부터 교훈을 받았다.
   
   역사를 전쟁 관점에서 보면 어느 나라나 두 가지 전쟁을 겪는다. 외부와의 전쟁과 내전이다. 이는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베트남의 경우는 항상 외부와의 전쟁이 중요했다. 안으로 서로 갈라져 싸우기보다 외부의 적을 맞아 내부가 똘똘 뭉친 역사가 더 길다.
   
   과거 왕조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은 대외 관계를 항상 3가지로 분류해 대처를 달리했다. 자신과 국력이 대등한 국가와는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태국, 미얀마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국력이 약한 나라는 수시로 쳐들어가고 영토를 빼앗았다.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이 경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처럼 자신보다 국력이 강한 나라에는 화전 양면의 전술을 적절히 구사했다. 자신보다 강하다고 무조건 굴종하는 법이 없었다.
   
   한국도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했지만 베트남은 그 이상이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한(漢) 무제 때 침공을 받아 똑같이 식민지가 됐다는 공통 경험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일부 지역만 약 400년간 지배받았던 반면, 베트남은 전 국토가 무려 1000년 동안 지배받았다는 점이 다르다. 한 이후에도 삼국시대, 남북조, 수·당까지 계속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처럼 초기의 중국·베트남 관계는 중국의 압도적 힘의 우위로 나타났다.
   
   베트남의 놀라운 국민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웬만한 나라라면 식민지배를 100년만 받아도 종주국에 동화돼 버릴 것이다. 그 종주국이 하필이면 세계 최고 수준의 동화력(同化力)을 갖고 있는 중국인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더욱이 베트남은 언어도 고립어로 중국과 같은 계통이다. 성조가 있는 것도 비슷하다. 비록 베트남이 6성(聲)으로 4성인 중국보다 더 복잡하지만 말이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 식민지가 되면서 한자도 우리보다 일찍, 그리고 널리 보급됐다.
   
   사정이 이런데도 베트남은 중국의 일부분으로 동화되지 않았다. 더욱이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했다는 사실에 이르면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베트남 정신’ 같은 게 있다고 봐야 한다. 베트남을 다스리기 위해 중국이 파견한 한인(漢人)들의 대부분이 거꾸로 베트남화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중국의 1000년에 걸친 베트남 지배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서기 40년 쯩짝과 쯩니 등 쯩씨 자매가 중국의 착취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4곳의 군민이 가담해 봉기를 일으켜 65개 성을 되찾았고 쯩짝은 스스로 왕으로 칭했다. 하지만 쯩씨 자매의 반란은 중국이 보낸 2만 대군에 진압됐다. 조직력과 군사력 등에서 밀린 베트남 반란군은 패했고 봉기는 3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쯩왕은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민중 봉기가 끊이지 않았지만 248년에 일어난 여성 지도자 찌에우티찡의 반란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6개월 동안 오(吳)나라 진압군에 맹렬히 대항했으나 수적 열세에 밀려 패했다. 그녀는 지금의 베트남 타잉호아성(省) 미호아현(縣) 푸디엔사(社·우리의 면에 해당하는 행정단위)까지 밀려 자결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3세였다. 베트남은 쯩씨 자매와 찌에우티찡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이 중국 타도의 선봉에 섰다. 세계에서 가장 강인하다는 찬사를 받는 베트남 여성들의 면모가 일찍부터 싹텄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도 263년 르우흥의 반란, 541년 리비의 반란, 722년 마이툭로안의 반란 등 크고 작은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며 중국을 괴롭혔다. 특히 리비의 반란은 그가 이주 중국인의 후예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베트남은 939년 중국 대륙이 5대10국의 혼란기에 접어든 틈을 타 독립한 이후 명나라 때 일시적으로 식민지가 됐던 20년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식민지가 될 때까지 줄곧 독립을 지켰다. 물론 독립이 저절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은 독립 이후에도 송, 원, 명, 청 등 중국 역대 왕조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평화정책을 채택했다. 하지만 사대주의는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처럼 중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중국이 영토 야욕을 갖고 쳐들어올 때는 단호히 군사적으로 대응했다. 특히 베트남전 당시 구찌터널로 상징되는 게릴라전은 과거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양(梁)나라와 베트남인 리비가 세운 나라 반쑤언(文春)의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베트남군은 집요한 게릴라 작전을 펴서 중국 군대를 괴롭혔다. 545년 초에 양은 진패선(陳覇先)을 사령관으로 임명해 반쑤언을 공격했다. 베트남군은 중국군과 몇 차례 접전을 벌였으나 중국군의 전력에 밀려 자짜익(지금의 하이흥성 코아이쩌우현)에 은신했다. 이곳은 넓은 늪지대에 갈대가 우거져 있어 외부에서 발견하기 힘든 곳인 데다 조그만 배 이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늪지대 중앙에는 지면이 솟아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군사훈련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베트남군은 여기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출동해 중국군을 괴롭혔다.
   
   베트남은 938년 중국 5대10국의 하나인 남한(南漢)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도 게릴라전을 펼치며 승리를 거둔다. 남한군이 바익당(白藤)강에 이르기 전에 베트남의 지도자 응오꾸옌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남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바닥에 끝이 뾰족한 쇠와 나무를 박아놓고 남한군을 기다리고 있던 응오꾸옌은 남한군이 강어귀에 다다르자 작은 배를 이용해 남한군을 유인했다. 남한군이 강을 따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강물이 썰물로 바뀌었을 때 도망치던 응오꾸옌은 강가 풀숲에 염초와 건초를 준비하고 매복해 있던 군사들과 함께 일제히 화공으로 남한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남한군의 전함은 쇠기둥에 걸려 뒤집히고 전소돼 군사 태반이 전사했다.
   

   베트남이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펼친 사례는 중국을 기반으로 세계 정복에 나선 몽골족 원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재현됐다. 몽골은 세 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쳐들어 왔으나 모두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1257년 쿠빌라이는 우량카다이에게 3만 대군을 주어서 베트남을 치도록 했다. 이듬해 1월 몽골군과 베트남군은 홍강, 다강, 로강이 합쳐지는 비엣찌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치게 됐다. 초기 전투는 세계 최강답게 몽골군의 압도적 승리였다. 몽골군은 순식간에 수도 탕롱성(城)을 점령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후퇴하는 중에도 몽골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자체 파괴 전략’과 ‘청야(淸野) 전술’ 및 유격전, 기후를 활용한 지구전 등을 효과적으로 구사했다. 베트남군은 성곽과 다리, 건물과 도로를 파괴하고 몽골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전소하는 형태로 완강히 저항했다. 여름에 습기가 많아 풍토병에 걸리기 쉽고 겨울에는 추운 북부 베트남의 기후도 몽골군을 괴롭혔다. 몽골군은 쉽게 수도를 점령했지만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에 시달려 더 이상 공격을 전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의를 요청하는 처지에 몰렸다. 드디어 베트남군의 반격이 시작됐고 몽골군은 허겁지겁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칭기즈칸 이래 승승장구하던 몽골로서는 사상 초유의 굴욕이었다.
   
   몽골의 굴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몽골은 1284년과 1287년에 대규모로 2차와 3차 침입을 단행했으나 더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1284년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베트남군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수비사령관이 전사하고 수도 탕롱성이 함락됐다. 베트남 황제 인종(仁宗)은 몽골에 항복하기로 했다.
   
   이때 ‘베트남의 이순신’으로 불리는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이 등장한다. 그는 영국 BBC가 선정한 세계 100대 전략가에 베트남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포함된 인물이다. “우리의 조국은 이대로 죽지 않습니다. 모든 국민이 떨쳐 일어나 마음을 뭉쳐 싸운다면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그는 ‘격장사(檄將士)’란 글을 지어 장수와 병사들에게 왕조의 위급함을 호소했다. 결사항전을 외치며 사기가 오른 베트남군은 수도를 탈환했다. 쩐 장군은 베트남의 무더위를 전쟁에 활용하고 수군을 활용하는 등 놀라운 전술전략으로 승리를 거뒀다. 베트남군은 팔꿈치에 ‘살달(殺韃·몽골군을 죽이자)’이라는 글까지 써가며 죽을 각오로 저항했다. 몽골군은 연전연패하면서 사령관까지 전사하자 후퇴하고 말았다.
   
▲ 바익당강 전투를 묘사한 그림.

   격분한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은 일본 원정을 포기하고 1287년 다시 30만명의 수륙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2차 전쟁 때 베트남 해군에 당한 빚을 갚아주기 위해 막대한 해군력도 동원했다. 당시 베트남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채 20만명이 되지 않았다. 쩐 장군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유격전술을 썼다. 다시금 청야 전술을 펼쳐 몽골군의 식량 조달을 막았고, 지속적인 치고 빠지기 전술로 적의 병참선을 마비시켰다. 무더위와 열대병으로 고전하던 몽골군은 식량 조달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시는 베트남을 넘보지 못하도록 몽골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것이다.” 쩐 장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상대로 다시 기가 막힌 전술을 생각해낸다. 몽골군이 퇴각하는 길목에 있는 바익당강을 이용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방일보 인터넷판에는 이 바익당강 전투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쩐 장군은 바익당강의 밀물과 썰물의 높이 차이가 큰 것을 활용했다. 먼저 썰물 때 강바닥에 쇠말뚝을 촘촘히 박아두었다. 그러고는 밀물이 되면서 쇠말뚝이 보이지 않게 되자 몽골군을 강 깊숙이 유인했다. 몽골의 해군이 바익당강으로 진격해 왔다. 그가 이끄는 베트남군은 썰물 때까지 필사적으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윽고 썰물 때가 되면서 강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배 위에서 베트남을 공격하던 몽골의 전함들이 쇠말뚝에 걸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나팔을 불면서 베트남군은 쩐 장군의 지휘하에 몽골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불화살과 돌이 몽골 전함에 날아들었다. 해군을 지원하던 몽골의 육군에는 코끼리 부대를 동원한 총공격을 시행했다. 베트남군의 맹공격에 사기가 떨어진 몽골군은 무력하게 쓰러졌다. 전투가 끝났을 때 10만 구의 몽골 병사 시체가 바익당강에 떠다녔다고 전한다.”
   
   전쟁에서는 온갖 술수가 용납되는 법이다. 베트남은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 항복, 거짓 알현 등의 계책도 유연하게 구사했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도 알아 중국에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도 전통 베트남 방식이다.
   
   송(宋) 태종은 베트남을 병합할 목적에서 980년 여름 후인보(侯仁寶)를 수륙 양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유징(劉澄)과 손전흥(孫全興)을 각각 수륙 사령관으로 삼아 바익당강과 랑선 두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981년 3월 수륙 양면으로 베트남을 공격해 온 것이다. 송의 전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던 베트남은 송군에 거짓 항복해 송군을 유인한 다음, 기습 공격으로 후인보를 살해하고 2명의 부장을 생포해 전세를 바꿔 놓았다. 이에 유징은 육군이 무너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중국으로 철수했다.
   
   송군을 물리쳤지만 당시 베트남 황제인 레호안은 송군의 제2차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붙잡은 중국군 부장(副將) 두 명과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고 조공을 바쳤다. 송은 베트남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들이 게릴라전을 펼쳤던 구찌터널.

   1788년 청의 건륭제가 20만 대군을 보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청은 광동, 광서, 귀주, 운남 등의 4개 성에서 20만 대군을 모집해 3개의 방향으로 나눠 베트남을 침공했다. 청군은 사령관의 지휘 아래 뚜엔꾸앙, 까오방, 랑선 등 세 방향으로 진격했다. 당시 베트남 황제인 응우옌후에(阮惠·1753~1792)는 청군을 물리치기에 앞서 1788년 11월 25일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꾸앙쭝(光中)이라 했다. 그는 곧바로 수륙 양면에서 대군을 동원해 북진했다. 응에안을 거쳐 타잉호아에 이르는 동안 전력을 증강해 10만 군사에 100마리 전상(戰象·전투용 코끼리)의 전력을 갖췄다.
   
   그는 엄청난 속도전을 펼쳐 청군을 기습했다. 전 군대를 3인조로 묶어서 편성했는데 병사 두 사람이 들것을 메고 전진하는 동안 한 사람은 그 위에서 잠을 잤다. 또한 말이나 코끼리를 이용해서 두세 명 이상의 병사를 말이나 코끼리 위에서 쉬게 했다. 이렇게 쉬지 않고 행군해 청군이 상상도 못한 시간에 탕롱에 도달해서 술 마시며 구정축제를 즐기고 있던 청군을 급습했다. 당시 20만 청군은 거의 전멸하며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패전 소식을 접한 건륭제는 즉시 내각관(內閣官) 복강안(福康安)을 양광(兩廣) 총독으로 임명하고 7개 성의 병마를 동원해 다시 베트남을 평정하도록 했다. 광서에 도착한 복강안이 사람을 베트남에 보내 먼저 사죄를 요구하자 꾸앙쭝 황제는 즉시 그에게 금은을 보내 남진을 저지하는 한편 조카 응우옌꾸앙히엔과 부후이떤을 청조에 파견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이미 금은으로 매수된 복강안 등의 간곡한 제안에 따라 꾸앙쭝 황제의 직접적인 알현을 약속 받고 그를 안남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꾸앙쭝 황제는 신하 중 자신과 용모가 비슷한 가짜를 내세워 건륭제를 알현하도록 했다. 가짜 안남 국왕이 중국 황제를 알현하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청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무력으로 베트남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에 가짜 안남 국왕의 알현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후대 역사학자들의 해석이다.
   
   베트남이 늘 중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드물지만 선제공격도 감행했다. 중국 송나라 때 일이다. 송의 신종은 남진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은 송의 남진 의도를 사전에 간파하고 사신을 보내 중국의 의중을 알아보려 했으나, 송의 방해로 여의치 않자 1075년 리트엉끼엣과 똔단으로 하여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북진했다. 베트남의 공격에 맞서 중국 광서성의 도감(都監)이던 장수절(張守節)이 군사를 이끌고 옹주를 회복하려 했으나 리트엉끼엣에게 살해됐다. 당시의 북진으로 베트남은 흠주, 염주, 옹주를 점령했고 중국인 10만명 이상을 살해했다. 또 전리품으로 많은 재물과 사람을 노획해 귀국했다.
   
   베트남이 독립 이후 중국에 늘 이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 때는 다시 20년간 중국의 식민지가 된 적도 있다. 1406년 11월 명의 영락제는 베트남 침공을 단행했다. 명군은 20만 대군을 둘로 나눠 광서와 운남 지역에서 베트남으로 쳐들어왔다. 명은 파죽지세로 8개월 만에 베트남 정복을 완료했다. 명나라보다 훨씬 무력이 강했던 천하무적 몽골군도 못했던 일을 한족의 명나라가 해낸 것이다. ‘베트남의 역사’ 저자 송정남씨는 “당시의 패배 원인으로는 무엇보다도 당시 베트남 왕조인 호 왕조가 전(前) 왕조인 쩐 왕조를 찬탈했다고 백성들이 보는 데서 오는 민심 이반을 들어야 할 것”이라며 “민심 이반은 그동안 중국의 복속으로부터 독립을 찾고 또 그 독립을 지키는 데 가장 결정적 요인이 됐던 전 국민의 단결의 와해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강대국을 다루는 데 능한 베트남인의 DNA는 20세기 들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베트남은 유럽의 강국 프랑스와 세계 최강 미국을 잇따라 굴복시킨 데 이어 지난 1979년에는 중국을 상대로 ‘중월전쟁’으로 불리는 국지전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 명칭은 국지전이지만 내용은 웬만한 전쟁 못지않은 규모였다. 송정남 저 ‘베트남의 역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을 응징하기 위해 수천 대의 탱크와 장갑차, 대포로 무장한 정규군 9개 군단 예하 30개 사단, 60만 대군을 투입해 1400㎞에 달하는 국경선을 따라 베트남을 침공했다. 국경선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벌어진 전쟁은 한 달 만에 중국의 참패로 끝났다. 놀라운 것은 이때 베트남은 거의 민병대만으로 중국 정규군을 맞아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이다. 민병대원 중에는 여성도 많았다. 당시 베트남 정규군의 대부분은 캄보디아 점령에 차출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당나라 군대’로 전락한 중국군이 세계 최강 미군을 물리친 베트남군을 얕보고 덤볐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한 셈이다.
   
   베트남은 인재 운도 따르는 나라다. ‘쩐흥다오의 재림(再臨)’이라 불리는 전쟁 영웅 보응우옌지압(1911〜)을 배출했으니 말이다. 그는 20세기 프랑스·미국·중국 등 강대국을 상대로 ‘3불(不) 전략’을 구사해 승리를 거뒀다. 지압 장군은 자신의 3불 전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강한 군대와 싸우면서 세 가지를 하지 않았어요. 첫째, 우선 그들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고 둘째, 그들이 싸우고 싶어 하는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며 셋째,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 방법으로 싸웠습니다.” 이러한 지압 장군의 3불 전략은 결국 모두가 안 된다고 한 싸움을 승리로 만든 원동력이 됐다. 상대가 낮에 싸우려고 하면 밤에 싸우고, 평지에서 싸우려고 하면 정글로 유인하고, 화력을 앞세워 전면전으로 싸우려고 하면 게릴라전으로 기습했다.
   
   지압 장군은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며 카이사르·나폴레옹·칭기즈칸에 비견할 만한 위대한 전략가로도 불리고 있다.
   
   지금 전개되는 중국과 베트남의 긴장 국면이 전면전으로 치달을 경우 중국군이 이길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중국이 앞서는 것으로 평가받지만 전쟁은 객관적 수치만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이 물리친 몽골이나 미국은 현재의 중국보다 더 대단한 나라였다. 레드억아잉 베트남 전 국가주석이 최근 베트남 인터넷 신문과의 회견에서 “중국의 위협에 물러서지 말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주문한 것은 베트남인의 심저(心底)에 흐르는 기류를 대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