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종 : 평화의 댐에 설치된 대형 종이다. 30개국에서 모은 탄피로 제작했다. ⓒ이상엽 |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이불에 들어가 막 잠들려고 할 때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누던 큰형님 소식이었다. 큰아들에게 용돈을 쥐여주고 돌아올 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버스에 올라탈 때 돌아본 아들의 눈가가 제법 젖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덧붙이시던 이야기가 화천 땅 사방거리가 멀기는 멀다는 것이었다. 그때 어린 내게 입력된 낯선 공간이 다름 아닌 사방거리였다. 대체 그곳이 어디이기에 아버지는 그 먼 곳까지 가서 큰형님을 보고 왔을까 궁금했다. 아버지 이야기에 따르면 깊은 산골이라는데 사방으로 통하기에 사방거리일까, 산골이라는 이미지와 사방이라는 이미지가 어린 내겐 잘 연결되지 않았다.
이후 내게 사방거리는 일종의 전방 지역의 대명사, 낯선 공간의 대명사였다. 10여 년 전 광덕산 계곡으로 바람을 쐬러 갔을 때 동행한 큰형님으로부터 사방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때도 그곳에 가보지는 못했다. 이번 민통선 기행에서 40년 만에야 나는 사방거리에 도착했다.
실로 긴 시간이었다. 화천으로 가는 길이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다. 춘천에 있는 대학들에 더러 발표하러 갔을 때 화천까지 가본 적이 있다. 어느 겨울날은 친구와 함께 화천에 가서 평화의 댐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해산터널을 지나 굽이굽이 길을 내려가자 거대한 댐이 돌연 눈앞에 펼쳐졌다.
북한의 수공(水攻)에 맞서 물을 가둬두지 않은 댐의 높은 제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국적인 느낌을 안겨줬다. 하지만 동시에 그 느낌은 전형적인 우리 산야의 편안한 느낌과 어우러져 역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낯섦과 낯익음을 공존하게 했다. 댐 한편에 있는 휴게소에서 캔커피를 마신 다음 서둘러 돌아오려고 하는데 양구에서 평화의 댐을 구경 온 초등학생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이제 양구로 돌아간다고 했다. 고적하기 이를 데 없는 평화의 댐에서 만난 아이들. 날씨가 제법 추운데 한 아이는 사과를 막 베어 물고 있었고, 다른 두 아이는 연방 떠들고 있었다.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이 한 장면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선명히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평화의 댐에서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댐 저편 계곡에 부딪쳐 돌아오는 메아리를 이루는데, 거대한 댐의 위용과 해맑은 아이들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내게 낯익음과 낯섦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차를 타기 위해 주차장으로 돌아오는데 양구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트럭 뒤칸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나 역시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내내 지켜보았다. 금방 눈이라도 내릴 날씨에 이제 돌아가자고 친구가 재촉하던 그날 늦은 오후의 풍경이 여전히 기억의 한편에 생생히 살아 있다.
사창리에서 만난 문화의 세계화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감상이 길어졌다. 화천 기행에서 맨 처음 찾은 곳은 상서면 대성산 지구 전적비와 다목리 인민군 사령부 막사였다. 인민군 사령부 막사는 해방 후 북한에 속했던 1945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원 노동당사와 비교할 때 건물은 상대적으로 평범해 보였지만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군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전투 또는 전쟁만이 아니다. 군대라는 조직 안에는 오히려 훈련이 상당 시간을 차지하고 군인들의 일상도 존재한다. 따라서 군인들의 거주 공간은 일반 시민들의 거주 공간 못지않게 중요하다. 강화에서 여기 화천까지 여러 부대를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전방 군인들의 거주 공간이 최근 적잖이 개선되고 현대화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만났던 상당수 병사는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직후에 군대에 온 이들이며, 이른바 신세대 병사들이다. 이들을 위해 최근 전방부터 이뤄지고 있는 내무반의 현대화 작업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한, 국방을 담당하는 군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일 터다.
화천읍으로 오는 길에 사내면 사창리를 잠시 구경했다. 사창리는 군부대를 위해 형성된 전형적인 배후 지역이다. 각종 군 관련 상품들을 판매하는 상점들, 외박 나온 군인들을 위한 상점들, 그리고 직업군인 가족을 위한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시선을 유독 잡아 끈 것은 적잖은 PC방들이었다.
동행한 정훈장교는 외박을 나온 병사들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고 귀띔해 줬다. 딱히 갈 곳이 없는 병사들이 이곳에서 컴퓨터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병사들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친구들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있고 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젊은 친구들의 문화도 변하게 마련이다. 필자의 전공인 사회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문화의 세계화 물결은 여기 사창리까지 여지없이 흘러 들어왔다. 전방 지역 거리에서도 이제 PC방, 피자집, 편의점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 증거다.
엄격한 공동체적 규율이 요구되는 군대 문화와 신세대의 개인주의 문화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는지는 흥미로운 사회학적 주제이기도 하지만, 현재 군대가 직면한 중요한 현실적 과제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사창리 거리를 걸으면서 떠올려보게 됐다.
군대 속의 사회, 사회 속의 군대
이번 기행에서 눈여겨봐 온 것 중 하나는 군인들의 일상생활이다. 새삼 발견하게 된 것은 군인들의 일상에는 그들만의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일반 병사들은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사회로 복귀한다지만, 직업군인의 경우 자녀교육 문제부터 시작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결코 적지 않은 듯했다.
무엇보다 잦은 전출로 인해 자녀들 역시 전학을 자주 할 수밖에 없는데, 정서적으로 예민한 아이들에게는 상당한 적응의 어려움을 안겨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교육을 위해 가족과 떨어져 사는 장교가 적지 않은데, 그 해법이 쉽지 않겠으나 군인 자녀와 가족을 위한 특별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더불어 제대 이후의 노후문제 역시 체계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다른 직종과 달리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국방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청년과 장년을 보낸 이들이 전역 이후 사회에 복귀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 및 프로그램들을 발굴하고 다양화해야 할 것 같았다.
평화의 댐과 평화의 종
강화에서 시작해 화천 지역까지 오면서 새롭게 주목한 게 있다면, 군대 역시 우리 사회의 변화를 크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교육·주거·노후문제 등에서 그들은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적 배려가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통일이 이뤄진 후에도 우리 사회가 놓인 지정학적 특수성을 고려할 때 국방은 매우 중요한 국가적 의제다.
이 점에서 군대 사회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사회적 관심이 요구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 속의 사회를 발견하는 동시에 사회 속의 군대를 재발견하게 된 것은 이번 기행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평화의 댐을 찾았다. 몇 년 전 갔던 길을 그대로 쫓아갔다.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 해산터널을 지나 역시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과거와 달라진 게 있다면, 옛날에는 댐 아래쪽으로 차를 몰고 갔는데 이제는 댐 위로 지나갈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댐 위에 서서 주위 풍경을 둘러봤다. 오래전 캔커피를 마시던 휴게소가 댐 상류 쪽에 보였다.
하류 쪽으로는 새롭게 조성된 평화의 종 공원이 보였다. 앞서 말했듯이 물을 가둬두는 목적이 아닌 만큼 댐은 거대한 위용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였다. 평화의 종이 걸려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평화의 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난 5월 26일 첫 타종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 평화의 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4년이 걸렸다고 한다. 화천군은 2005년 10월 평화의 종 건립 선포식을 갖고 탄피를 수집하기 시작해 4년간 29개국 분쟁 현장에 있던 탄피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사용했던 탄피 등 전 세계 30개국에서 탄피를 모아 종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분쟁 현장에 있던 탄피 등 다양한 사연이 담긴 탄피들이 포함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평화의 종 무게가 갖는 상징성이다. 종의 무게는 37.5t인데, 전통적인 무게단위인 관(貫)으로 환산하면 1만 관이 되지만 실제 무게는 9999관이라 한다.
이렇게 만든 것은 종 상부에 설치한 네 마리의 비둘기 조형물 가운데 한 마리는 날개 일부(1관)를 따로 분리해 전시해 두었다가 통일이 되면 붙여서 평화의 종을 완성한다는 화천군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통일과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배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평화의 종에 깃든 의미들을 생각하며 비목공원까지 걸어갔다. 비목공원은 댐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위치했다. 이곳은 널리 알려진 가곡 ‘비목’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비목의 가사는 당시 장교였던 한명희에 의해 씌어졌다. 1960년대 중반 화천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하던 그는 여기 평화의 댐에서 가까운 백암산에서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발견하고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여기에 작곡가 장일남이 1967년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가 ‘비목’이다. 오래전 한 드라마에 쓰이면서 더욱 유명해진 이 곡은 여전히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공원 안에 위치한 시비(詩碑) 앞에 서서 노랫말을 읽어봤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 깊은 계곡 양지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 이름 모를 비목이여…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 달빛 타고 흐르는 밤 /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 울어 지친 비목이여….”
이 노래에는 전쟁의 짙은 아픔이 담겨 있다. 초연이란 화약의 연기다. 궁노루란 사향노루다. 바람과 달빛만이 흐르는, 고적한 짐승들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인 적막한 산야에서 비목은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전쟁의 비극을 증거한다.
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
주차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데 몇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느꼈던 낯익음과 낯섦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됐다. 낯익음이란 다름 아닌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이다. 냉대 기후의 북독일 저지대 지방에서도, 사막 기후의 캘리포니아에서도 잠시 살아봤지만, 내게 더없는 편안함을 안겨주고 잔잔하게 마음을 젖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풍경들이다.
내가 낯설어 했던 것은 이 풍경 속에 깃든 짙은 상흔들이다. 이 땅을 지켜온 선조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던 상처들은 그것이 주는 역사적, 현재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현실을 지켜볼 때 마음 한 구석이 처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양구로 돌아가는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이야기 속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미래에 대한, 평화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여야 하며,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어야 하며, 아픔이 아니라 행복이어야 한다는 소망을 낯익음과 낯섦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나는 몇 년 전 여기 평화의 댐을 처음 찾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각했을지도 모른다.
평화의 댐을 둘러본 다음 칠성전망대로 향했다. 해산터널로 되돌아오지 않고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 민통선 지역을 경유해 산양리로 나갔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산골의 풍경은 더없이 고적하면서도 아름다웠다. 1시간 가깝게 달려가 산양리에 도착해서야 바로 이곳이 사방거리임을 알았다.
한적한 산골 마을에 편의점, 음식점 그리고 숙박업소 등이 제법 줄지어 있었다. 사방거리 주변에 7사단, 27사단, 15사단의 여러 부대가 밀집해 있는 탓이다. 오전에 들렀던 사창리보다는 작았지만, 한갓진 산골 풍경 속에 놓인 사방거리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산골의 이미지와 도회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다.
사방거리라는 이름은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휴전 이후 이 지역에서 군 복무를 마친 장병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산양리 일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곳에 이런 거리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 이름의 기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시 모든 건물이나 표식 등이 폭격으로 파손돼 이 지역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식별 가능한 도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방으로 도로가 뻗어 있는 것에 착안해 사방거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 이곳에서 장날 상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다음 장이 서는 곳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사방거리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사방거리를 지나 한참 산길을 올라가서야 칠성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칠성전망대는 행정구역상 화천군이 아니라 철원군에 속한다. 전망대에 서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비무장지대를 바라봤다. 지난번 성재산 관측소에서 느꼈듯이 강화에서 여기 화천까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비무장지대는 태백산맥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은 높아지고 계곡은 깊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왼편으로는 적근산 줄기가, 오른편으로는 백암산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철책선을 지키는 초병에게 한겨울 이곳이 어떠냐고 물어봤다. 큰형님으로부터 대성산, 적근산, 백암산 추위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춥다는 이야기 대신 흰 눈 가득히 쌓인 산야가 아름답고 나라를 지키는 보람을 느낀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겨울이 되면 여기 전방 고지들은 영하 30도가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겨울이 가장 긴 지역이기도 하다. 수고한다는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거리에서 듣는 ‘대니 보이’
칠성전망대에서 내려오니 산골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렸다. 저녁을 먹고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면 사방거리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중국음식점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혼자 나와 캔커피를 마시면서 사방거리를 찬찬히 둘러봤다.
40년 전 아버지는 어디서 큰형님과 밥을 드셨을까, 어디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버스를 타셨을까, 40년 전 사방거리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큰 거리는 아니지만 사방거리는 말 그대로 사방으로 열려 있는, 화천으로, 김화로, 양구로 열려 있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온 길을, 이제는 이렇게 내가 다시 예기찮게 찾아온 셈이었다. 세계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지금 이렇게 여기 사방거리에 서서, 이제 다시 세계로 나아가는, 사방으로 열려 있는 길 위에 내가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낯익은 멜로디 하나가 떠올랐다.
‘대니 보이(Danny Boy)’였다. ‘아! 목동아’라는 제목으로 옮겨진 이 노래는 1850년대에 채록된 북아일랜드 민요다. 처음에 그 제목이 북아일랜드 도시인 런던데리에서 따온 ‘런던데리 노래(Londonderry Air)’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니 보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이 노래에는 아일랜드의 현대사를 이루는 영국의 지배와 이에 대한 항거가 담겨 있다. 노래의 내용은 전쟁터에 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간절한 심정을 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특히 두 번째 구절이다. 서투르게 번역하면 “저 초원에 여름이 돌아오고 / 골짜기가 조용해지고 흰 눈이 쌓일 때 너는 돌아오라 / 나는 햇빛 속에서나 그늘 속에서나 이곳에 있으리라”라는 구절이다.
지난 2개월 동안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을 돌아다니며 내가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민통선은 우리 외부에 있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 아니었을까. 타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바로 내 아버지의 땅, 어머니의 땅, 큰형님의 땅, 무엇보다 내 삶의 땅이라는 자각이었다.
비목이 노래하듯 ‘비바람 긴 세월’을 의연히 지켜온, 대니 보이가 노래하듯 ‘햇빛 속에서나 그늘 속에서나’ 머물러 있어야 할 우리 땅이 바로 민통선 아니겠는가. 2009년 7월 어느 여름날 저녁, 여기 사방거리에서 나는 세계로 나가는, 세계로부터 들어오는 동시대인들의 삶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화천읍으로 가는 저쪽에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고적한 산골 마을에서 만난 저녁 바람이 춤을 추고, 가로등 불빛에 모인 나방들 역시 춤을 추고 있었다. 메마른 나의 영혼도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 화천 취재 여행을 안내해 주신 15사단 황지훈 중위, 7사단 강은진 중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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