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5대 이어온 ‘문배술 가문’, “평양 샘물로 제대로 빚겠다”

醉月 2009. 3. 10. 09:21
문배술 이기춘 사장
5대 이어온 ‘문배술 가문’, “평양 샘물로 제대로 빚겠다”
문배주양조원 이기춘(67) 사장은 작년 12월 몽골 울란바토르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몽골의 툰진 바담주나이(Tunjin Badamjunai) 농림부 장관을 만나 문배술 양조공장의 몽골 설립에 대해 한참 얘기를 나눴다. 이 사장은 “몽골 농림부 장관은 문배술이 북한 평양 토속주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며 “원래 문배술에 쓰였던 평양 샘물을 몽골로 공수해와 문배술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만들자는 제안이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북한의 물과, 남한의 양조기술을 합쳐 제3국인 몽골에서 술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몽골 장관은 이 사장에게 “이곳에서 만든 문배술은 한국으로도 가져가겠지만 몽골 내수와 러시아 수출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등 구체적인 판매 계획까지 설명했다. 몽골 장관이 이 같은 제안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기춘 사장이 평양 물을 가져와 문배술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려고 10년 이상 공을 들이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문배술은 알려진 대로 북한의 평양이 원산지다. 평양에서 많이 재배되는 찰수수와 메조를 발효·증류시켜 만든 전통 증류식 소주다. 문배술이라는 이름은 ‘술에서 문배 향기가 난다’고 해서 붙여졌다. 문배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토종 돌배로 그 크기가 아이들 주먹만하고 매우 단단하다. 일반 배와 비교해 상큼한 맛이 특징이다. 누룩과 곡물(조, 수수)만으로 빚은 술인데도 이 문배 향기가 난다는 술이 문배주이다. 술 향기에서 이름을 따온 전통주는 문배술뿐이다.

대동강 유역 암반수로 빚었던 평양 전통주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등장, 화제 불러


현재 경기도 김포에서 만들고 있는 문배술에 쓰이는 물은 김포 지하수. 그러나 원래 문배술은 대동강 유역 주암산 석회암층에서 솟아나오는 지하 암반수를 용수(用水)로 써왔다. 석회암층에서 나오는 지하 암반수는 강한 산성을 띠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물의 성질이 문배술에서 우러나오는 콕 쏘는 듯 강한 느낌의 문배 향을 만든다고 한다. 국내 하이트 등 상당수의 맥주 역시 석회암층의 암반수를 쓰고 있는데 이 역시 술 맛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면서도 물리지 않는 느낌으로 미각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포 지하수는 평양 지역 지하 암반수와 달라 문배 향이 평양 물로 빚은 ‘오리지널’ 제품만 못하다는 게 이 사장의 자체 평가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 사장은 대동강 유역의 지하 암반수를 남한으로 들여오려고 애써왔다. 특히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은 그 같은 노력의 촉진제가 됐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 방문 때 문배술을 가져갔고 그 술을 맛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원래 문배술은 평양 대동강 일대의 주암산 물로 만들어야 진짜배기”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이 같은 지적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먼저 어떤 물을 쓰느냐에 따라 술 맛이 좌우될 만큼 용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다는 의미도 되지만, ‘문배술은 남한이 아닌 북한 술’임을 강조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후 이기춘 사장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한편으론 남북 정상회담 이후 문배술의 인지도가 올라가 한때 판매에 날개를 달기도 했지만 ‘평양 물을 꼭 용수로 써야겠다’는 결심 또한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별 성과가 없었다.

평양 현지공장 건립과 평양샘물 국내 도입, 둘 다 추진했다는데. “그렇다. 그동안 정부 승인을 받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북측 인사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우선 평양 현지공장 설립을 북측에 제의했으나 ‘화끈하게 투자하시오’라는 애매모호한 답만 들었을 뿐이다. 공장 설립에 앞서 현지 여건 실태조사 승인 같은 구체적인 얘기는 한마디도 없이 무조건 투자부터 하라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쪽 전기 사정이 어떤지 기본적인 사전조사 없이 평양공장 설립을 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평양샘물의 국내 반입은 수송 경로가 육로든 해상이든 상관없이 우리 정부나 북측에서 모두 회의적이었다.”

몽골 현지공장 건립 성사 여부는. “몽골 정부 측 얘기에 따르면 현재 남북한 정부의 정치적 화해 무드 조성에 발벗고 나선 나라가 몽골이라고 한다. 미국은 물론 중국 정부의 얘기보다 더 북측이 귀담아 듣는 나라가 몽골이다. 몽골 정부는 ‘북한 샘물의 남한 반입은 어차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북한 당국을 설득해 평양샘물의 몽골 도입을 성사시킬 테니 문배술 측은 양조기술을 몽골에 가져와라’는 식이다.”

문배술 용수로 평양샘물을 꼭 써야 하나. “만약 주암산 물로 문배술을 빚을 수 있다면 이 자체가 ‘남북한의 합작 술’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크다. 문배술의 브랜드 이미지도 많이 올라갈 것이고 통일을 앞당기는 역할까지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北 최고 양조장 아들… 김일성도 공장 방문
당시 1년 세금이 평양시 예산과 맞먹던 규모


그러나 이 사장이 10년 이상 평양샘물 반입에 ‘올인’ 하는 동안 국내 주류시장의 여건은 크게 변했다. 우선 와인을 선두로 소위 알코올 도수가 약한 저도주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희석식 소주마저 도수가 20도 이하로 떨어져 문배술 같은 전통 증류주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요즘에는 명절 대목에도 전통주를 아예 진열하지 않는 백화점이 적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당연히 매장에 갖다 놓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희도 백화점 대신 대형마트, 우편 판매 위주로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정(酒精)에 물을 타서 만드는 희석식 소주가 소주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50년 전만 해도 증류식 소주가 대세였다. 소주(燒酒) 이름 자체에 이미 ‘증류’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부의 양곡 정책에 의해 증류식 소주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정부는 1955년 ‘양곡관리법’을 제정, 곡물로 술을 만드는 것을 전면 금지함에 따라 오랫동안 문배술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주정에 물을 섞어 만드는 희석식 소주가 국민 입맛을 사로잡았고, 한번 바뀐 입맛을 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이 사장은 “자판기 커피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3000~4000원 하는 진짜 커피 맛을 모르듯이 희석식 소주에 오래 맛들인 사람에게는 아무리 비싼 술을 내놓아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은 한 해 매출이 수십억원에 불과한 중소기업으로 전락했지만 한창 때의 문배술은 북한 최고의 기업이었다. 이 사장은 “1950년대에 아버지(이경찬 옹·작고)가 평천양조장을 경영할 때는 1년에 내는 세금이 평양시 전체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에는 공장 안으로 석탄을 실어 나르는 기차가 다녔으며 ‘아들의 납치’를 우려한 이경찬 사장은 공장 안에 학교를 만들어 아들을 교육시켰다. “6·25 전쟁 전에 김일성이 우리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제가 화동(花童)으로 꽃을 전달했던 기억이 납니다.”

쌀 부족해 한때 금지… 회사 다니다 뒤늦게 가업에
전통주 외면으로 사양길, 1년에 겨우 반만 공장 가동


전쟁이 터지자 문배술 사람들은 몸만 빠져 나와 피란길에 올랐다. 그 후 서울에서 다시 증류식 소주 사업을 재개했지만 “먹을 쌀도 모자라는데 술 만드는 데 쓸 곡물이 어디 있느냐”는 정부 방침에 따라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장은 “아버님(이경찬)은 ‘희석식 소주는 술도 아니다’며 증류식 소주만 고집, 희석식 소주 사업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 행사에서나 쓸 정도의 증류식 소주만 빚어왔다”고 말했다. 이기춘 사장 역시 1973년에 대한항공에 입사, 17년 동안 경영조정실 등에서 근무하다 오랫동안 금지돼 왔던 문배술 제조 및 판매허가가 나온 뒤인 1990년에 가업을 본격적으로 잇기 시작했다.

그 후 문배술은 1991년 한·소 정상회담 만찬장,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방문 기념 파티,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눠 마시면서 ‘한국을 알리는 술’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러나 지금의 문배술 위상은 너무 초라하다. 최근 찾아간 문배술 김포공장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현대식 증류기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문배 향 짙은 문배술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판매량이 많지 않아 1년 중 약 절반 정도만 공장을 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주 직원도 10명 안팎. 이기춘 사장은 “사람들이 전통주를 외면하게 된 데는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저희 잘못이 크다”면서도 “영국의 위스키, 프랑스의 코냑 같은 세계적 명주가 국내에서도 나올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배술은 현재 유네스코(UNESCO)로부터 세계문화유산 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술이 외국에서 아무리 호평을 받는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배술은 알코올 도수 40도 외에 23도, 25도 세 종류가 있다.

| 5대 이은 문배술 가문 |

증조 할머니부터 150년 내려온 가문의 비법
이기춘 사장 이어 아들 승용씨 5대 전수자로


문배술의 원산지는 북한의 평양 지방이고 원료는 평양 지방에서 많이 재배되는 찰수수와 메조를 사용한다. 조로 누룩을 만들어 찰수수와 일정비율로 혼합해 15일 정도 발효를 시킨 후 증류를 통해서 전통 증류식 소주 문배술을 만든다. 문배술 제조 방법은 4대 150년을 거치며 이기춘 사장 집안에 내려오는 비법이다.

 문배주는 평안도의 도읍인 평양 지방의 토속주로 알려져 있다. 그 역사는 고려시대부터라고 한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렇다. “고려 태조 왕건 시대에 신하들이 왕에게 다투어 좋은 술을 진상하여 벼슬을 얻었는데 그중 문배술을 바친 신하가 가장 높은 벼슬을 얻었다.”

이기춘 사장의 증조모인 박씨 할머니 때부터 문배술을 담그기 시작하여 할아버지인 2대 이병일 옹이 양조원을 설립하였고 부친인 3대 이경찬 옹(1993년 작고)이 그 양조장을 이어받아 평양 최고의 기업으로 키웠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경찬 옹은 가업을 잇기 위해 서울에서 양조장을 설립하고 다시 문배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5년 정부의 양곡관리법에 의해 곡식으로 만드는 모든 술의 생산이 금지된 이후 20여년간 문배술은 생산이 중단됐다. 그 당시 생산될 수 있었던 술은 밀가루로 만드는 막걸리와 희석식 소주, 그리고 맥주뿐이었다. 이경찬 옹은 희석식 소주는 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예 양조장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명맥을 잇고 조상의 차례상에 올리기 위하여 4대 이기춘 사장에게 그 비법을 전수했다.

1986년 문배술은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3대 이경찬 옹은 중요 무형문화재 86-가호 기능보유자에 선정됐고 1990년 비로소 정식으로 전통술 제조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1995년 4대 이기춘 사장이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후 그 비법을 다시 아들 5대 이승용(사진 왼쪽)에게 전수하며 가문의 비법을 이어가고 있다.

이승용씨 역시 대학 졸업(농화학 전공) 후 영자신문에서 2년간 근무한 뒤 2004년부터 문배술 사업에 뛰어들었다. 현재 국내는 물론 해외영업을 활발히 개척하고 있다. 중국, 홍콩, 몽골 등지에 문배술이 수출되고 있으며 일본, 미국, 러시아 등에도 수출을 추진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