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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왜 그렇게 중국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태산에 어느 황제의 무슨 비석과 어떤 마애석각이 남아 있는가를 지난 1월호부터 2회 연속으로 살펴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연은 시인들에게 아름다운 소재다. 하물며 중국인들에게 최고의 산으로 꼽히는 태산은 역대 황제들뿐만 아니라 유명 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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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코스 하산 길에 볼 수 있는 부채바위. 봉우리 정상까지 철계단을 놓아 사람들이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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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자연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시심이 본능적으로 솟아오른다. 굳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하물며 태산이다. 모든 중국인이 우러러보는 산이다. 내로라하는 시인이면 분명 작품을 남겼을 법하다. 어떤 문인이 어떤 글을 남겼을까? 이번 호에서는 그 작품과 함께 태산 여행을 떠난다.
중국 문학 중에 으뜸으로 꼽히는 당시(唐詩)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두보(杜甫)는 당대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불린다. 한때 시성으로까지 추앙받았다. 그는 태산에 올라 그 유명한 ‘망악(望嶽)’을 지어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가 노래한 태산을 보자.
대종부여하(岱宗夫如何)
태산은 과연 어떠한 산인가?
제노청미료(齊魯靑未了)
제·노에 걸쳐 푸른빛이 끝없도다
조화종신수(造化鍾神秀)
천지에 신령함과 빼어남 모두 모아
음양할혼효(陰陽割昏曉)
산의 음지와 양지가 황혼과 새벽을 가르는구나
탕흉생층운(蕩胸生層雲)
가슴 호탕하게 뭉게구름 피어나고
결자입귀조(決 入歸鳥)
눈가 찢어질 듯 저 멀리 돌아가는 새
회당능절정(會堂凌絶頂)
언제든 가파른 꼭대기에 올라가 본다면
일람중산소(一覽衆山小)
한번 둘러보매 뭇 산들 모두 작게 보이리
1·2구는 멀리서 본 태산, 3·4구는 가까이서 바라본 산, 5·6구는 산허리에서, 7·8구는 산 정상에서 뭇 산들을 굽어보겠노라는 두보의 다짐이다. 이 시는 두보가 29세쯤 되었을 때 과거에 떨어져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제·노 일대를 여행하면서 쓴 작품이다. 아직 젊은 패기에 찬 모습을 보여준다. 뭇 산들은 소인배, 즉 관료를 말하며 자신은 기필코 관직에 올라 그들을 내려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두보에게 있어 태산은 선계(仙界)의 세상이 아닌 현실을 잘 헤쳐 나가도록 격려해 주는 인간적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반면 두보와 쌍벽을 이루는 이백은 태산을 선계의 세계로 나타내고 있다. 이백은 ‘유태산(遊泰山)’이란 제목의 연시로 6수를 지었다. 첫 수를 대략 살펴보자.
사월상태산(四月上泰山) 사월에 태산에 오르니
석평어도개(石平御道開) 돌이 평평하니 황제가 갔던 길이라네
육룡과만견(六龍過萬堅) 여섯 용이 만 개 골짜기를 건너
간곡수자회(澗谷隨紫廻) 계곡물 따라 휘감아 돌도다
…중략…
옥녀사오인(玉女四五人) 하늘나라 너덧 명의 옥녀가
풍요하구해( 搖下九垓) 바람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네
함소인소수(含笑引素手) 웃음 머금고 하얀 손 당겨서
견아유하배(遣我流霞杯) 나에게 유하주 술잔을 남겨주네
계수재배지( 首再拜之) 고개 조아려 재배하니
자괴비선재(自塊非仙才) 신선될 재주 아닌 것이 부끄럽다
광연소우주(曠然小宇宙) 마음을 열고 온 우주를 작게 보며
엽세하수재(棄世何愁哉) 세상 버리니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백은 태산의 경치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다가 후반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삽입하여 인간 세상을 떨쳐 버리겠다고 읊고 있다. 이런 수법은 전통적인 산수(山水) 시의 형태다. 이후의 2수부터 6수까지도 1수와 비슷한 형태로 진행된다. 전반부에는 태산의 경치를 묘사하고, 후반부에서는 신선을 등장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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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채바위에서 바라본 B코스 주변의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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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이 신선 세계를 희구하는 열망에 대해 원나라의 이간(李簡)은 이백이 삼선산과 같은 선계를 희구하기는 했지만 안기생과 같은 전설상의 선인을 만나지는 못했다고 꼬집고 있다.
이백불우안기생(李白不遇安期生)
이백은 안기생을 만나지 못하였는데
안득우익비봉영(安得羽翼飛蓬瀛)
어찌 날개 얻어 삼선산으로 날아갔겠는가?
명나라의 이반용(李攀龍)이 쓴 ‘태산편’에서도 옥수, 영액, 영지 등의 선계 표현을 쓰며 태산을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닌 세계로 착각하고 있다.
선인각옥수(仙人攬玉樹) 선인이 옥수를 잡고 흔드니
수발생청풍(須發生淸風) 모름지기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영액비루원(靈液飛淚湲) 영액은 날 듯이 졸졸 흐르고
지초여고봉(芝草如 蓬) 영지 풀은 고봉처럼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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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코스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며 경관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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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태산은 선계와 속계를 넘나들며 문인들의 작품 소재가 됐다. 신선을 만나고 싶은 문인은 그들대로 감정을 태산에서 풀었고, 자연 경관에 감탄한 문인은 자연 그 자체를 시로 옮겼다. 태산의 자연 경관을 노래한 시인들 중 금나라 원호문은 ‘등악(登嶽)’에서 일출 광경을 보며 전설과 연결시켜 표현했다. 명나라 성주도 같은 제목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역사의 영고성쇠는 자신의 인생 역정과 무관하지 않음을 읊으며 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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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비무자명공재(秦碑無字名空在)
진의 무자비는 헛되이 이름만 남았고
당각마애소자봉(唐刻磨崖蘇自封)
당의 마애석각은 저절로 이끼가 덮였다
추격궁반상왕사(追客窮攀傷往事)
쫓겨난 나그네가 산에 올라 옛일에 마음 상하고
불승비골수강풍(不勝痺骨受剛風)
야윈 몰골을 이기지 못한 채 거센 바람을 맞이한다
당대의 시인 이섭은 진 시황제가 비를 피하게 해준 나무에 9급작에 해당하는 ‘오대부’라는 작위를 하사한 데 대해 소나무에 대한 감탄과 인간의 비애를 동시에 나타냈다.
운목창창수만주(雲木蒼蒼數萬株)
구름처럼 푸르고 푸른 나무가 많건만
차중언명역응무(此中言命亦應無)
이 가운데 명령을 내려도 응하는 것이 없구나
인생부득여송수(人生不得如松樹)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각우진봉작대부(却遇秦封作大夫)
대부에 봉해지는 소나무보다 못하구나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儒)는 ‘하일등대(夏日登岱)’에서 봉선대를 노래하고 있다. 방효유는 진한시대에 봉선의식을 행하던 봉선대를 바라보며, 하늘에 가장 가깝다고 여긴 태산 정상에서 벌어지던 성대한 의례를 상상하며 천지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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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구봉현벽낙(秦漢舊封懸碧落)
진한의 옛 봉선대가 푸른 하늘에 걸려 있고
건곤승개점부구(乾坤勝槪點浮 )
천지 간 승경이 물거품처럼 생겼다 말았다 한다
우리나라 문인 중에서도 태산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였던 양사언(楊士彦)이 시조를 썼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것을 한시로 번역하면 ‘태산수고시역산(泰山雖高是亦山) 등등불이유하난(登登不已有何難) 세인불긍노신력(世人不肯勞身力) 지도산고불가반(只道山高不可攀)’이다.
양사언은 시조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교훈을 태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여 시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실천하지도 않고 어렵다는 생각만으로 도중에 포기하거나 기피하려고 한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그는 해서와 초서 등 글씨에도 능해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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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산 길에 있는 용담호에선 사계절 상관없이 사람들이 수영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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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태산, 걱정도 태산 등 우리 지명 같아
태산은 이와 같이 많은 문인들이 작품으로 남겼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태산은 이미 굳게 자리잡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에서 비유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땐 ‘갈수록 태산이다’라 하고, 차근차근 모으는 것을 비유한 ‘티끌 모아 태산’, 걱정도 태산, 태산 같은 은혜, 입이 태산같이 무겁다, 태산을 알아보지 못 한다 등등 태산이 마치 우리의 한 지명같이 친숙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산에 얽힌 수많은 전설과 신화, 사연들에 대한 상념에 젖어 다시 태산 등산로로 발걸음을 옮긴다. 태산에 몇 번 오르내렸지만 여전히 ‘태산이 왜 그렇게 위대하게 됐을까’라는 의문은 여전했다. 그게 산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산은 역사다’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태산에만 6일 새 세 번째 산행이다. 아직 한 코스 더 남았다. 일주일 동안 총 네 번 오르기로 했다. 중국 태산 트레킹 황동호 사장이 개척한 6개 등산로를 하산까지 포함해서 네 번 만에 끝내기로 했다. 한번 가면 십수 킬로미터를 걸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걷는 일 자체가 역사다. 과거 황제가 걸었던 길이 지금은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후대에 문화유산으로 남아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고 있다. 내 발길도 역사가 될까? 알 수는 없다. 이 등산로에 대해 기사를 쓴 사람은 없다. 그건 역사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자부심과 동시에 태산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황 사장이 개척한 B코스로 올라갔다.
B코스 들머리는 지난 호에 소개됐던 F코스와 같다. 오전 10시20분 산행 입구인 태악구에 도착했다. 초입의 밤나무는 여전하다.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그대로 자아내고 있다. 어제 올랐던 길이지만 오늘 또 새로운 맛이다. 등산로가 원래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산이 원래 그런 게 아닌가. 깊은 산일수록 보여주는 모습은 시시각각 다르다. 태산은 우리의 지리산 크기와 비슷하다. 어제 갔던 지리산이 오늘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산은 항상 다르다. 가보고 느낀 사람은 안다.
너덜지대와 기다림 바위를 지나 폐가까지 F코스와 똑같이 진행했다. 다른 코스는 모두 정상을 거쳤다가 하산하게 돼 있지만 B코스는 유일하게 정상을 거치지 않고 내려간다. 우두봉이 갈림길이다. 두 시간 만에 소머리를 닮았다는 우두봉에 도착했다. 태산 곳곳에 배설물로 방목 흔적을 남겼던 흑염소가 처음으로 무리 지어 나타났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 풍경이다. 갈라지는 길에서 F코스로 가는 왼쪽을 바라보니 멀리서 용각산과 옥황정 정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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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담호 위에 있는, 태산에서 가장 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흑룡담 폭포.
황동호 사장은 태산을 수백 번 오르내리며 봉우리 이름 짓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한다. 그가 지은 봉우리 이름만도 몇 개나 된다. 아토봉, 연화봉, 스마일봉, 철원봉, 기다림 바위, 만물상, 소리바위 등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봉우리 이름이 우리 땅이 아닌 중국 태산에서 불리고 있다.
이윽고 저 멀리 오래봉이 보인다. 태산의 이름을 가진 72개 봉우리 중 가장 유명한 봉우리다. 높이는 978m로 알려져 있으나 1,000m가 넘는다고도 한다. 태산 주봉보다 높지는 않으나 예리하고 가장 험준한 봉우리다. 우리말로 ‘오랫동안 높은’이란 뜻을 가졌다고 한다. 황 사장 말로는 정상 옥황정에서 뿐만 아니라 매년 이곳에서도 음력 3월 15일 태산신에게 제사를 올린다고 했다.
멀리서 보이던 오래봉에 오후 1시20분에 도착했다. 태악구에서 출발한 지 3시간 만이다. 오래봉까지 가는 길은 의외로 제법 등산로가 있었다. 태산에 이런 등산로가 있었다니 의아했다. 타이안에 있는 대학생들이 한 번씩 올라오는 코스가 이곳이라고 황 사장이 전했다. 황제들이 다니던 남쪽 계단 길은 입장료가 비싸 우회로인 이 등산로를 이용한다고 했다. 그럴 듯한 등산로가 끝나자 아니나 다를까 리지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코스에 접어들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쩐지 무난하다 싶었더니 역시 태산이다. 무난한 코스가 한 군데도 없다. 태산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고 있다.
평평한 자리를 찾아 간단히 요기를 달랬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를 넘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주변 풍광을 봤다. 경관이 파노라마처럼 쭉 펼쳐졌다. 산은 산이다. 어떤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듯하지만 아무 산에서도 볼 수 없는 자신만의 풍광이 모든 산에 있다. 태산은 더욱 그렇다. 천변만화하는 모습에 뭇 황제와 문인들이 수많은 흔적을 남긴 산이지 않은가.
상념도 잠시, 다시 하산길이다. 50분 가량 휴식하고 일어섰다. 10여 분쯤 걸으니 왼쪽으로 웅장한 부채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이름 그대로 꼭 부채같이 생겼다. 부채바위 봉우리엔 전망대가 있다.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아슬아슬한 철계단 길을 놓아 주변 조망을 가능하게 했다. 탁 트인 사방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이 맛에 등산한다.
조금 더 내려가니 도교 사원이 나왔다. 사람은 없다. 아니 안 보인다. 기척도 없다. 신발은 있다. 하지만 어차피 불러도 말이 통하지 않을 테니 그냥 지나쳤다. 길엔 도토리가 무성했다. 그렇지. 여태 다람쥐 한 마리 못 봤으니 도토리가 길에 널브러져 있을 수밖에. 이걸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달리 도토리나무가 많았다. 그만큼 길에도 도토리가 많이 깔려 있었다.
태산서 가장 긴 흑룡담폭포도 보여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나자 계곡이 나왔다. 태산은 전형적인 악산이니 계곡은 무척이나 길게 보였다. 실제로도 길었다. 저 뒤쪽으로 아름다운 폭포가 흘러내렸다. 흑룡담폭포라고 했다. 태산에서 가장 긴 폭포다. 흑룡이 지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웬만한 산과 계곡은 다 용과 관련된 유래를 지니고 있다. 없으면 명소가 아니다. 있어도 허접한 곳이 많지만 여긴 태산에서 제일 긴 폭포다. 한마디로 족보가 있는 폭포다. 용과 같이 길게 뻗은 폭포가 흘러내렸다. 물이 많았으면 내리는 모습이 장관일 것 같았다.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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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코스는 초입을 조금 지나면 계곡 같은 너덜지대가 1시간 가량 이어진다.
계곡은 우리의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수 뜨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신기했다. 중국에선 지하수를 그냥 먹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먹을까’라는 생각과 ‘이 물은 그냥 마셔도 탈이 없는가’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황 사장 말로는 태산 지하수는 그냥 먹는다고 했다.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내려갔다. 사람이 많이 다녀서 길은 반듯하다.
반듯한 길로 조금 더 가니 용담호 저수지가 나왔다.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노인들이다. 용담호는 경관이 아름답고 여름, 겨울에 헤엄칠 수 있는 노천 수영장 겸용이라고 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상관없이 수영을 즐긴다고 했다. 황 사장은 할머니는 있어도 젊은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 수영하는 사람들이 모두 전라(全裸)다. 중국 사람들은 잘 씻지 않은 걸로 유명한데, 그래도 수영할 저수지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천외촌 광장에 도착했다. 시각은 오후 3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10시20분 태악구 들머리에서 출발한 지 4시간 30분 만이다. B코스가 그나마 가장 짧은 코스였다. 정상을 거치지 않고 옆으로 빠져서 그런 것 같았다. 이젠 내일이면 마지막 E코스이고, 그 코스는 유일하게 북쪽에서 출발한다. 다음 호에서 이 코스를 자세히 소개하고, 태산에 왜 도교 사원이 많은지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태산 가는 길
대한항공이 인천공항에서 중국 산둥성 지난시로 가는 비행기를 일주일에 2회, 월요일과 금요일 운항한다. 비행시간은 1시간 45분 걸린다. 시차는 지난시가 1시간 늦다. 지난에서 오는 비행편도 마찬가지다. 4월부터 일주일에 3편으로 늘릴 예정이다. 중국 국제항공은 일주일에 왕복 3편씩 인천↔지난으로 운항한다. 월, 금, 일, 저녁 8시 인천공항에서 이륙한다. 지난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도 일주일에 3편씩 월, 금, 일요일 오후 4시50분 출발한다. 지난공항에서 타이안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이 걸린다.
인천항에서 배편도 이용할 수 있다. 인천항에서 저녁 6시에 출항하는 선박은 다음날 아침 9시 칭다오항에 도착한다. 일주일에 3차례 있지만 성수기와 비수기 등 이용객에 따라 날짜가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특정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용하려면 인천항에 반드시 사전 문의를 해야 한다. 칭다오항에서 타이안까지 버스로 5시간 소요된다.
중국 태산 등산로를 개척한 중국태산트레킹 황동호 사장에게 문의하면 상세히 알려준다. 문의 전화는 0505-679-1526 또는 0504-898-7440. 한국에서 걸면 무료다.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http://cafe.daum.net/lovetaishan)를 참조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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