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년 지켜온 그 푸르름이여!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 blog.naver.com/travelmaker |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극히 평범한 뜻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름을 가장 확실하게 남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도 오랫동안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함양 상림을 산책하다 문득 뇌리를 스쳤던 생각이다. 상림의 오솔길을 자분자분 걸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그곳의 아름다운 풍광과 정취를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고운 최치원이라는 인물을 어김없이 떠올리곤 한다. 또한 그 숲의 가치와 은혜를 온몸으로 느끼노라면, 사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상림은 경남 함양군 함양읍의 위천(渭川)변에 자리한 인공림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진성여왕 재위(?~897년) 당시 지금의 함양인 천령 태수를 역임한 고운 최치원(857~?)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함양 땅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위천이 자주 범람하는 바람에 백성들의 고통이 적지 않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둑을 쌓아 위천의 물길을 돌린 다음, 새로 쌓은 둑에 나무를 심어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했다. 처음에 대관림(大館林)이라 불리던 이 숲은 대홍수로 인해 제방 중간이 끊김으로써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 그러다 결국 오늘날에는 길이 1.6km, 너비 80~200m, 넓이 21만4500㎡(6만5000평)의 상림만 남게 됐다. 110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온갖 풍상과 우여곡절을 다 겪어온 천년숲인 셈이다. 상림에는 모두 120여 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의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다릅나무 말채나무 쉬나무 신나무 야광나무 산딸나무 국수나무 윤노리나무 노린재나무 누리장나무 등과 같이 이름조차 생소한 활엽수가 자생한다. 그리고 나무 아래에는 멍석딸기 복분자 노박덩굴 인동 계요등 청미래덩굴 등의 덩굴식물이 난마처럼 얽혀 있어 다양하고도 안정된 생태환경을 자랑한다. 또한 가장 오랜 내력을 지닌 인공림이라는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돼 있다. 인공림인 상림은 웬만한 천연숲보다 더 천연스럽다. 아름드리 활엽수가 울창한 숲 속 한복판에는 흙냄새 짙은 오솔길과 청량한 물소리를 쉼없이 쏟아내는 실개천이 길게 뻗어 있어 언제나 그윽한 운치가 느껴진다. 특히 꽃잎처럼 곱고 화사한 단풍잎이 숲을 쓰다듬으며 지나는 바람에 우수수 흩날리는 가을날의 정취와 풍경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숲의 오솔길에서는 실연당한 사내의 쓸쓸한 뒷모습조차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근사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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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 최치원이 수해 예방 위해 조성 … 역사·학술·생태가치 뛰어나
상림 숲길에서는 물리적 거리라는 게 별 의미가 없다. 어딘가를 목적지 삼아 부지런히 걷는 길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처럼 눌러앉고 싶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만추의 화려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림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들다 보면, 어디론가 다시 길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좀체 일지 않는다. 하릴없는 사람처럼 숲 속 벤치에 앉아 주변 풍경을 완상(玩賞)하거나 물소리, 바람소리, 낙엽 지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만으로도 노루꼬리처럼 짧은 가을 햇살이 아쉬울 따름이다. 상림은 함양 사람들의 쉼터이자 자랑거리이며, 함양 땅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야외박물관이기도 하다. 상림 오솔길을 걷다 보면 옛 함양읍성의 남문이던 함화루, 상림을 조성한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척화비, 함양 이은리 냇가에서 출토된 석불, 함양 땅을 거쳐간 옛 수령들의 선정비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상림의 숲길처럼 내력 깊고 운치 그윽한 길은 아니지만, 함양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길이 또 하나 있다. 함양읍내에서 지리산 동구의 마천면으로 넘어가는 오도재 고갯길이 그것이다. 옛날 함양 사람들이 삼남지방의 장돌뱅이들을 만나기 위해 마천을 거쳐 지리산 장터목에 가려면 이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사가 제법 가팔라서 오늘날은 자동차로 넘기에도 숨이 벅찰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함양 쪽의 고갯길 초입은 구절양장의 완벽한 ‘S’자형을 이뤘다. 고갯길 중턱의 작은 전망대에 올라서면 좌우, 상하로 심하게 굴곡진 고갯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최근에는 전국 각지의 사진동호인들이 무시로 찾아오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상림의 오솔길처럼 마음을 빼앗는 길은 아니지만, 어쩌다 함양 땅을 밟았을 적에 잠시 들러볼 만한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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