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우리 茶 이야기

醉月 2008. 11. 10. 18:46

① 차의 기원 
차(茶)는 이제 우리나라 음료문화의 대표주자가 됐다. 한때 차는 사찰에 가야 맛볼 수 있는 스님들의 ‘전유물’이었다. 평상시 차를 마실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일부러 차한잔 얻어 마시기 위해 절에 갈 정도였다. 이제는 집집마다 다구를 갖춰 놓고 차를 음미하는 시대다. 사찰 문화강좌에 등장하는 다도와 차문화는 호응이 가장 높은 인기강좌다. 차를 마시고, 차를 공부하고, 차문화를 익히는데 현대인들의 관심이 남다르다.

그렇다면 차는 어떠한 역사.문화적 경로를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 본지는 차문화사를 엮어 차의 전래양상과 변화.발전상을 다채롭게 소개할 예정이다. 수년간 차를 연구하고 다사(茶史)를 저술해온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학과 석좌교수 류건집이 저술한 <한국차문화사>의 도움을 받아 차 관련 실증자료와 사료들을 제시할 계획이다. 본란은 1500년의 차문화사를 통해서 선조들의 애틋한 차사랑을 엿보고 시대별 차인들을 만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중국에서 전래됐다는 설과 한국 차나무 자생설 ‘공존’

상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차야말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음료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차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차와 차 문화의 장구한 역사는 곧 빛나는 정신문명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했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던 수많은 시인묵객과 철인들이 차를 벗하며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음악을 즐겼다. 다산의 사상과 추사의 글씨, 매월당의 시와 소치의 그림이 모두 한 잔의 차에서 비롯되고 한 잔의 차로 수렴되었다.

차는 또한 스님들을 비롯한 종교적 수행자들에게 구도의 방편이기도 했다.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고운 최치원 이후 사명당 유정과 나옹 혜근, 그리고 우리 차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초의 의순의 곁에는 언제나 한 잔의 차가 있었다. 그런 사상과 문학, 예술과 선(禪)의 적층 과정이 곧 우리의 정신문화사요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고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차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의 사상사를 이해하는 일에 다름 아니며, 특히 상류층 고급문화와 정신사를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우리 민족이 지난 5000년 동안 갈고 닦아온 찬란한 역사와 문화와 문명의 뿌리에 우리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있었고, 그런 정신세계의 많은 부분은 바로 한 잔의 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차의 원산지설은 여러 가지다. 인도 원산지설이 있는가 하면 인도와 중국의 이원적 원산지설이 있고 동남아 각국의 자연 원산지설이 있다. 중국의 사천과 운남 원산지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같은 다양한 학설이 난무한 원인은 이 지역들이 차나무 생장의 적정지로 꼽히기 때문이다. 차나무는 남위 25도부터 북위 40도 사이에서 자란다. 강우량은 연평균 1300㎜ 정도며 12도 전후의 기온이 적당하다. 이같은 위치와 기후에 알맞은 곳이 중국의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남쪽 지역과 동남아 전역, 인도의 북부 지역 및 한국의 남쪽지역과 일본 대부분 지역이다.

대부분 차의 역사는 중국이 가장 오래됐다고들 한다. 황지근이 저술한 ‘중화다문화’에는 “차의 원산지 중국은 4000~5000년의 역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 기원이 중국에 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는 자생설도 신빙성 있는 견해다. 한국 차문화의 자생설과 도입설은 이렇게 생성됐다.

 

② 한국차의 기원
한국인은 언제부터 차를 마셨을까. 한국차의 기원설에는 백산차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백두산(장백산)의 백산차가 자생차로 언급되고 있다. 고조선 시대부터 선조들이 제사에 올리며 뜨거운 물에 녹차처럼 우려 마셨다고 한다. 청의 건륭황제 때에는 이 차를 만들어 어용차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백산차의 원형이 백두산 일대에 자생하는 철쭉과의 어린잎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차나무의 어린잎으로 만들어진 ‘차’를 칭하는지 애매하다. 차계에서는 백산차와 같은 대용차를 마시는 것은 차를 마실 전조는 되어도 그 자체를 ‘음다(飮茶)’의 시작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대용차가 아닌 차나무에서 차를 채취하여 만든 차를 음다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먼저 기록상 차가 처음 수입되었다는 신라의 반신(叛臣) 대렴(大廉) 때보다는 훨씬 이른 시기부터 차를 마셨다는 견해다. 또 다른 견해는 차가 없었는데, 828년 대렴이 중국으로부터 차씨를 가져다 심은 것이 처음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전자는 자생설,

후자는 전래설로 설명할 수 있다.

자생설과 전래설 있으나 중국전래설에 무게 실려

자생설은 엄격히 말하면 중국보다 빠르거나 같은 시기가 아닌 이상 자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차나무는 다른 식물 종과 마찬가지로 태풍의 영향이나 바다의 조류, 지형변화 등으로 중국 동해안에서 우리나라 서남해안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의 토양분포는 차나무 생장에 좋은 고생대 화강암 지대이다. 우리나라 안면도의 모감주나무 군락은 중국 내륙에서 자라던 모감주 나무의 종자가 해류를 타고 흘러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감주 나무 종자의 유입설은 차나무의 종자 역시 그 표피가 단단하므로 오랜 옛날 해류를 타고 자연스럽게 서해안으로 흘러들어와 우리나라에 자생적으로 분포할 수 있었음을 식물학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자생 차나무 북방한계선은 전북 익산의 봉화산 임해사터가 자리하는 북위 36도로 보고 있지만, 중국은 북위 37도인 산둥반도, 일본은 북위 42도인 아오모리현까지 차나무가 재배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자생 차나무 분포 북방한계선이 더 높아질 여지가 있다.

우리나라 차가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견해는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우리 문화의 생성과 발전상에서 외부와의 주된 교류가 중국이고 차의 역사도 기록에 의하면 중국이 훨씬 빠르기 때문에 전래설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아울러 현재 전하는 다서(茶書)의 대부분이 중국의 것이고 우리차의 상당부분은 중국 다서에서 그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초의의 ‘다신전(茶神傳)’이 장원의 ‘다록(茶錄)’을 일부분 발췌한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행하는 차의 채취에서 전다(煎茶)까지의 전 과정이 중국의 다예(茶藝)와 맥이 통하는 것을 보면 우리차의 뿌리가 중국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차가 도입되는 유형이 자생이든 전래이든 잘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도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차를 약용이나 음용으로 쓰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보편화하여 확산되었을 것이다. 특히 4세기 불교가 전래되면서 수많은 사찰이 생기고 불사가 행해지면서 불전에 헌다하는 의식을 봉행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4세기경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를 음미하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③ 한국차의 전래

남해를 통한 해로전래설과 중국 경유한 육로설 ‘병립’

우리나라의 차는 바다를 통해 전해온 ‘해로(海路)전래설’과 중국서 대륙을 통해 전한 ‘육로(陸路)전래설’이 있다. 해로전래에는 허황옥의 도래와 관련된 주장과 해로의 상교역이나 기타 외교관계로 연관짓는 견해 등 두 가지가 있다. 19세기 말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김해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는데,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종자라고 세상에 전한다(金海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持來之茶種云)”라고 적혀 있다.

또한 신라 문무왕이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낼 때 차를 쓰라고 한 것이나 고대 인도에서 종교행사에 차를 사용한 사실을 미뤄보았을 때 허황옥을 통한 해로전래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사료적 증거가 될만한 확정적인 단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김해 인근에 다전리(茶田里)라는 옛 지명이 현존하고 그 지역이 차의 오래된 산지이며, 그 차가 바로 허황옥이 심은 차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이어오는 것을 보면 고려해볼만 하다. 이 지방에 전해오는 민요에도 ‘선동골이 밝기 전에 금당 복수 길어 와서, 오가리에 작설 넣고 참숯불로 지피어서…’ 등 차를 소재로 하고 있어 눈에 띈다. 류건집 원광디지털대 차문화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 “몇 년 전 창원의 백월산 자락을 중심으로 길이 18㎝ 크기의 대엽차종이 몇 군데서 계속 발견되는 것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며 “대엽차종이 많이 있다는 것은 예로부터 이 지역에 같은 종의 차나무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 지역이 가야의 옛 땅임을 감안하면 허 왕후의 출신지에 대엽차종이 많다는 것을 연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허 왕후의 도래 외에도 여타의 해로유입설도 있다. 백제나 가락, 신라는 지역적 특수성에 따라 해상의 교역이 이른 시기부터 활발했다. 따라서 인도나 중국과의 상교역에서 차에 관한 것이 오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해로전래설과는 달리 중국에서 육로로 고구려를 거쳐 백제와 신라로 전해졌다고 보는 육로전래설은 전적에 남아 있지 않지만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불교의 전래 과정과도 일치한다. 인도나 중국에서 차는 불교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류 교수의 설명대로 “중국이 처음 불교를 수용할 때 무(巫)와 도(道)의 내용들을 더하여 서로 거슬리지 않도록 한데 반해 우리는 토속신앙들이 불교와 어우러져 무불습합(巫佛習合)의 상태가 되었다”며 “이같은 이념적 혼합주의는 다례(茶禮)에도 적용되어 불교의식에 헌다(獻茶)하던 것이 조상제의에도 헌다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과 상통한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이나 상인들, 특히 그 많은 유학승들이 몇 년씩 중국의 차생활을 접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당대의 다풍이나 격식을 그대로 옮겨온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인 음다(飮茶)풍속이 중국문화에 의해 자연스럽게 변화되고 새로운 다속(茶俗)이 자리잡게 됐다. 백장회해의 <칙수백장청규>에도 사원의 의식대례의 종류만 70여개나 되고 그 중 상당부분은 일상적인 것이어서 사찰의 모든 의식에는 차가 필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茶時), 다고(茶鼓), 다당(茶堂)에 관한 기록도 상세하게 실려 있어 불교의식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차가 등장했다.

 

④ 고구려의 차문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스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전을 전했다. 우리는 이를 공식적인 불교 전래의 기원으로 삼는다. 그러면 불교와 뗄 수 없는 음다 풍습이나 헌다하는 습속은 그 이전에 이미 널리 퍼졌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의 불교는 극락정토를 서원하는 아미타사상과 내세의 구원을 기구하는 미륵사상이 혼재된 것이다. 이는 북중국의 북위시대 사상과 연관된다. 고구려는 무사들의 수렵을 통한 기동력과 산악지대의 이점을 활용했기 때문에 만주와 중앙부, 한반도의 동북쪽을 병합하여 5개 부족을 아우르고 세습적 왕권을 확립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이르면 북으로는 송화강에서 남으로는 삼척과 아산까지, 서로는 요하를 넘어서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제국이 된다. 이렇게 낙랑과 대방을 병합하면서 국토 뿐만아니라 중국의 선진화한 문화를 바로 접할 수 있다. 서로 교류하면서 공물도 오가면서 자연스레 중국화한 중국인의 문화를 접하게 된다. 귀족관료의 귀화는 중국의 고급문화가 그대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어서 유교가 들어오면서 조상이나 국조숭배사상이 격식화되고 생활과 깊이 연관을 맺게 된다. 또 국가관이나 이념을 정립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한다. 예의와 격식을 중시하는 유학은 곧 제의와 결부되어 달의 절차가 행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도교는 이보다 조금 뒤에 고구려에 들어왔는데, 도교 역시 예로부터 양생을 생활지침으로 삼았기에 차를 많이 마시고 단약 만들기에도 힘썼다. 도교의 보급 역시 차의 보급과 뗄 수 없는 일이다.

불교전래 이전 헌다 유행 추정 ‘구다국’ ‘돈차’등 용어서 흔적

고구려는 북방에서 상무적 기풍을 주도한 속에 질박한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에 섬세한 음다문화가 신라처럼 보편화되지는 않았으나 지명에 구다국(句茶國)이란 말이 나오고 생활 속에서 그 자취도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의 고토가 만주 일대와 북한 땅이므로 그 유적과 유물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얻을 길은 없지만 기록이나 차 유적을 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나 일부 사료들이 고구려의 차문화를 짐작케 한다. 잘 알려진 고구려 고분에서 나온 ‘돈차(錢茶)’가 있다. 일본의 차학자 아오키 마시루(靑木正兒)가 저술한 책에는 “나는 고구려의 고분에서 출토되었다는 원형의 소형박편의 떡차를 표본으로 가지고 있다. 지름 4cm 정도의 돈 모양으로 중량은 5푼 가량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외에도 차를 무덤에 넣는 습속이 있었다. 이는 차가 일상생활에 많이 사용됐다는 증거다. 불전이나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차문화가 깊숙이 자리잡았다는 의미다. 집안의 조상이나 사찰의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물은 생활에서 우리가 쓰는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올리게 돼 있고 무덤에 부장으로 넣는 것 역시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차와 관련한 오래된 문헌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3년조에 쓰여졌다. “흥덕왕 3년(828)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재위 632~647)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성하였다.” 대렴이 중국에서 차종자를 가져오기 200여 년 가량 앞서 이미 한반도에 불공에 쓰이고 왕실의 예.패물로 다뤄질 정도의 차문화가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대렴의 종자수입은 차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종자개량사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⑤ 백제의 차문화(上)

544년 화엄사 장죽전 뒤에 차나무 심은 기록 전해져

백제의 시조로 알려진 구이(仇台)는 고이(古爾)를 지칭한다. 고이왕(재위 234~286)은 백제의 발전을 주도한 명군이다. 내부적인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법령을 제정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했다. 280년 이후 수차례에 걸친 서진(西晉)에 사신을 파견, 중국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다.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는 국토확장과 함께 동진과 왜 등과 교류하면서 백제인의 해외진출이 활발했다.

중국의 <송서>나 <양서>에는 이 당시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해양국가 백가제해(百家制海)의 뜻이 담겼으며 중국의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백제의 영역 아래 두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침류왕 원년(384)에는 동진으로부터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가 들어와 불교를 전했다. 침류왕이 마라난타 스님을 궁 안에 머물게 하고 이듬해 한산에 절을 세우고 10여 명의 스님과 함께 머물게 했다. 당시 불교는 국가통치의 일원적인 사상의 지주로 호국신앙의 성격을 띠게 됐다.

이처럼 백제의 중국과의 잦은 교류는 중국문화와 소통하면서 중국문화를 적극 수용했음을 시사한다. 관직의 이름이나 복식들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불교의 전래와 다례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인 만큼, 백제의 차문화 수용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문화 전래에 적잖은 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왕들이 매년 대대적으로 동명묘와 구이묘에 친제(親祭)를 올려왔으니 제사에서 헌다(獻茶)는 주요한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면 당시 중국의 차문화 경향은 어떠했을까. 류건집 원광디지털대 교수에 따르면 차의 장려책을 공표하고 다법(茶法)이 제정되는 등 차문화가 정립되는 중요한 시기다.

특히 서진 시기에 안평 출신의 장재(張載)가 사천성의 수도인 서오에 위치한 백토루에서 지었다고 알려진 ‘등성도백토루시(登城都白樓詩)’가 나왔던 시기다. ‘등성도백토루시’는 차를 주제로 하는 최초의 시로 전해진다.

백제에는 현존하는 고찰들이 대거 창건되는데 이 역시 차문화와 연관이 깊다. 426년에 정관대사가 대흥사를 창건했고 527년에는 대통사와 대조사가, 이어서 선암사가 개산했다. 544년에 화엄사가 창건됐는데, 이 때 연기조사가 화엄사 뒤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에 화엄사 주지를 지낸 만우 정병현 스님이 편찬한 <해동호남도지이산화암사사적(海東湖南道智異山華嚴寺事蹟>에 실려 있다. 이어서 581년 선운사, 597년 무위사, 599년에 금산사와 수덕사가 계속해서 창건됐다.

당시 사찰이나 토굴과 같은 수도장에서는 음다문화가 보편화돼 있었다. 불교관계 문장가들이 엮은 시문집 <속동문선> 66권에 이규보가 쓴 ‘남행월일기’에도 원효스님의 차이야기가 실려 있다. ‘원효스님이 기거하니 사포성인이 와서 모셨는데 원효스님께 차를 드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어 난감하던 중 갑자기 물이 바위틈에서 솟아나 그 맛이 달고 젖 같아서 늘 그 물로 차를 끓였다고 한다’는 구절이다. 이처럼 승가에서는 보편적으로 차를 마셔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효스님이 참선에 필수적인 차를 상음(常飮)했듯, 그 시절 대다수의 사찰에서 스님들이 음다문화를 향유하고 전파했으리라.

 

⑥ 백제의 차문화(下)
백제는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에 의해 왕실과 귀족사회가 강화되고 화려한 불교문화가 융성하자 사원과 귀족층에서 음다(飮茶) 풍속이 성행했다. 일본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에 백제의 귀화승 행기(行基, 668~748)스님이 중생을 위해 동대사에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류건집 원광디지털대학 차문화학교 석좌교수는 “동대사는 백제의 건축양식에 가까운 사찰로 왕인의 후예가 차를 심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류 교수는 또 “일본 상야공원에 있는 ‘박사왕인비문(博士王仁碑文)’에도 이를 뒷받침할만할 행기승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백제에서부터 오래전부터 차를 마셨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의 문화는 매우 후진적이었다. 일본과 가까웠던 백제의 스님들이 그 문화를 전파한 흔적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준다. 백제는 해양을 접한 나려여서 해외교류가 많았다. 불교는 물론 유교 도교까지 모두 유입됐으니 당시 차문화도 함게 들어와 백제의 차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은 자명하다. 미륵사지에서 연질도기잔이 출토된 사실이나 무령왕릉에서 연질도기잔과 동탁은잔이 발굴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백제는 차 재배지가 가장 광활한 곳인 만큼 당연히 차문화가 성행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C말 불교전래로 음다풍속 성행 “왕인 후예 차 심었다”는 기록도

차와 그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차의 원류는 ‘초암차’다. 초암차에 일본다도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그것을 일본다인들은 ‘와비’로 부른다. ‘와비’는 우리말로 자득(自得), 한적한 정취, 소박하고 차분한 멋, 혹은 한거(閑居)로 설명할 수 있다. ‘와비’는 부유한 귀족층이 많은 돈을 들여 호사를 자랑하며 물질적인 향락을 추구했던 것과는 반대로 가난함, 진지함, 청순함 속에서 화려함을 멀리한 정신세계를 추구했다. 당시 차인들은 한적한 곳에 소박하고 검소한 다실을 세우고 검박하고 자연스러운 조화를 추구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다도의 핵심인 ‘와비’의 정신이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차의 나라로 불린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차외교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일본 지도자들의 차외교는 세계적으로 일본의 정신문화가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음을 선전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일본차와 한국차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다. 이밖에도 백제의 차생활은 일본 문헌을 통해 전해지는데, ‘일본서기’에는 메이천황 13년 백제의 성왕이 담혜화상 등 16명의 스님에게 불구와 차를 일본에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최근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책임자를 지낸 한신대 국사학과 권오영 교수는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던 3~4세기에 이미 차를 즐겼다는 주장을 제기해서 차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권 교수는 “지금까지 백제유적에서 발굴된 중국제 수입 도자기는 100점 이상을 헤아린다”면서 “이 중 일부는 다기가 분명하며 그런 다기용 도자기는 이미 3~4세기 단계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이 무렵에 차문화가 도입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풍납토성 출토유물 중에서도 중국 서진(西晉, 256~316) 시대 계수호와 완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가 차문화를 접한 것은 3세기 대로 올라갈 수 있다”며 “이 무렵에 이미 백제지배층을 중심으로 차를 애호하는 흐름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⑦ 신라의 차문화 
신라의 화랑들은 차를 즐기며 심신을 단련했다. 사료에 따르면 화랑은 호방한 기개로 자연속에 노닐며 드높은 이상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치는 풍류도다. 세속을 초탈한 초연한 마음도 깔려 있다. 화랑들이 음다문화가 활발한 이유도 가는 곳마다 차를 마시고 서로 권면하며 덕목을 쌓았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면서 마음공부를 하고 군자행, 곧 정행검덕(精行儉德)을 수행했다.

조선시대 홍만종이 인물들의 사적(事蹟)을 엮은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화랑들의 행적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화랑들은 동해안 최남단 언양을 시작으로 경주 남산을 거쳐 북쪽으로 금강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에 접하고 내륙으로 태백산맥의 깊은 곳까지 다니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묘련사의 석지조나 한송정의 다천(茶泉), 석구(石臼) 등으로 미뤄어 볼 때 차를 일상에서 즐겨 마셨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고려의 문인 이곡이 지은 동유기에는 ‘화랑들은 차를 나누어 마시며 서로 강하게 결속하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예로써 화합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화랑들이 사용하던 차도구가 동해 바닷가 여러 곳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도 실려 있다.

신라에는 화랑 뿐만아니라 불교의 헌다의식이 성행하면서 차문화가 보편화됐다. 불교의 융성과 귀족사회의 발전으로 사회 전반에 차문화가 보급됐다. 연등제 등 국가행사에 헌다의식이 널리 행해졌고 귀족이나 관리, 문인들의 생활과 스님들의 수행생활에도 차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원효스님과 사포성인의 차생활에 관한 일화는 유명하다.

화랑들, 차 즐기며 ‘심신단련’  연등제 등 국가행사에도 헌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남행일월기’에 있는 원효방에 관한 대목을 소개한다. ‘경신년 8월20일…원효방에 이르렀다. 암자가 하나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사포성인이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스님을 사포가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스님께 드리려 하였지만 샘물이 없어 안타까워할 때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 나왔다고 한다. 맛이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늘 차를 끓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출신의 월명스님은 경덕왕 19년(760) 나라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는 괴변이 일어나자 ‘도솔가’를 불러 이를 물리치고 왕으로부터 ‘차 품평기구’ 한 벌과 수정 염주 108개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우리 차의 역사에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명차라고 불리는 ‘구화산차’에 대한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많은 엘리트 스님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신라왕자 출신인 지장왕보살이라 불리는 김교각(704~803) 스님이다. 교각스님은 신라를 떠날 때 신라의 차를 가져갔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끝낸 교각스님은 신라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의 구화산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곳 구화산에 신라에서 가져간 차를 심어 보급했다. 중국의 팽정구가 쓴 <개옹다사(介翁茶史)>에는 “김지장이 신라차를 구화산에 심어 운경차(雲梗茶)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 시간대별로 따진다면 교각스님이 중국에 신라차를 전한 것은 8세기이고 김대렴이 신라에 차를 가져와 심은 것은 9세기가 된다는 점에서 약 100년이란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차의 역사는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⑧ 가야의 차문화
‘삼월이라 삼짇날 다전리에 햇차 따서…김해 그릇 큰사발로 나라 세운 수로왕님 십왕자의 허 왕후님, 가락국가 세운 은혜 이 차 한 잔 올립니더…’ 옛 가야터 김해지방에서 전해오는 민요의 한 구절이다. 가야차의 역사가 들어 있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가야에는 일찍부터 음다풍속이 있었다. 비옥한 토지에 중국 남방과 교역이 성해서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들어왔던 가야는 다생활도 일찍 시작됐다.

류건집 원광디지털대학 교수는 “5세기 전에 가야에 이미 불교가 있었다고 보고, 허 왕후의 동생 장유화상이 칠불암으로 들어가 수도했다면 2세기경부터 불교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니 불사에 차가 동반됐다면 가야 차의 역사는 실로 오래되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가야의 제사의식(祭儀)은 엄격한 규정을 제대로 잘 지키며 계승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수로왕의 17대손인 급간갱세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을 관리하여 해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과 밥, 차와 과일 등 여러 가지 음식으로 제사 지내기를 그치지 않았다…330년 동안 종묘에 제사는 항상 변함이 없었는데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간혹 거르기도 했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나라가 없어지고 간혹 빠뜨리긴 했지만 제일과 제물을 정해서 제의를 그대로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허 왕후의 차 도래설’에서 허 왕후가 사천 보주를 통해서 온 것은 알려진 바 있지만 그 때 차씨를 가져왔는지는 모호하다. 다만 그가 차와 부처님의 나라인 인도의 귀족으로, 역시 차의 산지인 사천 보주를 거쳐 출가했으니 평소 즐겨마시던 차에 대한 준비를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 남방과 교역…차 생활 빨라 ‘허황후 차 도래설’엔 사천과 교류

최근 인도나 운남 사천에 생장하는 대엽종의 차나무가 발견된 백월산은 가야시대부터 불지성산으로 칭해왔다. 지리산 낙남정맥이 김해로 뻗기 전에 찬주산과 봉림산으로 내치고 다른 하나는 백월산으로 맥을 잇는다. <삼국유사> 중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 따르면 이 산이 당나라 황제의 연못에 비친 산으로 ‘백월’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부처님이 된 두 성인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밖에도 가야에는 차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백월산 동남쪽 다호리(茶戶里), 상동면의 여다리(余茶里), 다시곡(다시곡), 다곡(다곡), 김해의 금강지(금강지)는 원래 다전리(다전리)라 불렀다, 백월산 동남쪽의 다호리 고분에서는 1988년 2000여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출토품 중에 다기로 보이는 그릇들이 있다.

 

⑨ 통일신라의 차문화 〈上〉
통일신라 당시 중국을 다녀온 스님들은 신라문화 특히 신라의 차문화에 이바지했다. 당시 당나라에는 무측천이 등장하여 용문석굴을 조성했고 백장회해의 ‘백장청규’가 나오고 조주종심이 선대행을 하는 등 불교가 크게 융성했다. 육우가 ‘다경’을 쓰고 노동이 ‘다시’를 썼으며 안진경, 백거이, 한유, 온정균, 피일휴 등의 차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중국서 돌아온 선비와 학자들은 의식부터 생활까지 모두 차를 가까이 했다. 스님들은 구산선문을 열면서 사원의 생활을 곧 차생활로 연결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건축불사도 줄을 이었다. 676년 부석사 낙산사를 시작으로 해서 사천왕사, 감은사, 백율사, 감산사, 봉덕사, 불국사, 단속사, 봉은사, 해인사 범어사 등이 창건됐다. 잇따른 도량건립에 맞춰 차문화의 발전도 동반됐다. 원광디지털대학교 류건집 교수는 이같은 사실을 실례를 들어 밝힌 바 있다.

“불국사 대웅전 뒤에 다당의 자리가 남아있고, 석굴암의 벽면에 부조된 보설의 손에 들고 있는 손지름 반 정도의 보발(寶鉢)이 있다. 부처님의 손에 들린 찻잔은 짧은 기간의 음다문화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신성한 신앙의 대상에 찻잔을 조각한다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뿌리깊에 음다문화가 자리잡았음을 말해준다.”

류 교수는 “이같은 경로를 밟아 차문화는 장족의 발전을 했다”면서 “설총의 ‘계왕서(戒王書), 월명사의 ‘다습(茶襲)’, 충담의 ‘다통(茶筒)’, 한송정의 ‘유적(遺蹟)’ 등의 기록이 남았고, 거기에 진감국사나 최치원 등의 차인이 배출되었다”고 설명했다.

구산선문 열며 차생활 일조 茶僧 등장하고 茶所 생겨나

통일신라는 차문화가 번성하면서 도기문화도 함께 발전됐다. 연질도기(土器)와 유약을 칠한 찻그릇도 이 당시 만들어졌다. 임해전지의 안압지에서 출토된 언정차영(言貞茶榮)의 찻잔 등은 한 예다. 통일신라는 이외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음다풍습과 제반문물을 자연스럽게 계승했다. 선왕들의 제례에 차를 올리고 불사가 이어져 차는 여염으로까지 널리 퍼졌다. 왕궁과 사찰에서 차를 마시니 자연스럽게 백성들도 따르게 된 것이다.

또 불전과 조상신에게 차를 쓰니 다른 제사에도 차를 올렸고 차문화는 급속도로 대중화 물결을 탔다. 화랑들은 명산승지를 다니면서 음다풍류의 선적을 남겨 지금까지 전한다. 월명사나 진감국사와 같은 ‘다승(茶僧)’이 등장했고 ‘다연원(茶淵院)’이라 불리는 ‘다소(茶所)’까지 있었다.

물론 우리의 차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 차의 품종이나 다법도 중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천(四川)의 다사(茶史)에 큰 별로 남은 무상스님과 중국 지장신앙의 근간이 된 지장 김교각 스님 등은 모두 왕실의 신분으로 입당해서 불교사는 물론 다사에도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이들이다.

한중(韓中)간의 왕성한 문화교우가 이어지면서 당시는 차가 양국 모두에게 기호음료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획을 긋는 시기가 됐다. 중국에서는 심지어 사상 최초로 다세가 부과됐고, 다마무역(茶馬貿易)이 성행하여 차에 대한 경제적 비중이 크게 늘었다. 수많은 다시가 쓰여졌고 황실에서는 좋은 차맛을 겨루는 ‘명전(茗戰)’의식이 행해질 정도였다

류건집 교수에 따르면 허 왕후의 도래가 역사적인 신빙성을 얻음으로써 백월산을 중심으로 한 야생 대엽종들의 발견이 한층 빛을 보게 됐다. 그는 기존의 사서에서 가야 차에 관한 것들과 합해서 미뤄보면 가야의 차문화는 제대로 밝혀질 터를 마련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경남 김해시가 매년 곡우를 전후로 해서 허 왕후에게 헌공다례를 하고 가야 차문화를 시연하는 차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⑨ 통일신라의 차문화 〈中〉

김교각스님 중국에 차씨 심어

통일신라 차문화사의 중심엔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지장왕보살로 추앙받는 김교각(696~794) 스님이 있다. 통일신라 성덕왕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부귀 영화를 버리고 홀홀 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구도의 삶을 살다 입적한 교각스님은 지금도 중국 구화산 육신보전에 등신불로 봉안돼 있다. 중국 구화산 불교역사서 ‘송고승전’에 교각스님의 기록이 일부 실려 있다. ‘지장스님은 성은 김씨이니, 신라 국왕의 갈래사람이다. 겉모양은 험상 궂으나 마음은 자비롭고 크게 깨달았다. 7척의 몸에 정수리가 많이 솟고 뼈대가 커서 힘은 남자 열 명을 대적할 만했다.’

교각스님은 구화산서 평생 수행정진에 임하며 차 달여 마시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스님이 중국으로 갈 때 차씨를 가져다가 심었다는 이야기도 교각스님이 차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구화산에 심은 차를 ‘공경차(空梗茶)’라고 했고 맛이 특별했다는 기록이 청나라의 <다사(茶史)>에도 전해진다. ‘구화산에 공경차가 있는데 이는 김지장이 심은 것으로, 대체로 안개와 노을이며 구름 속에서 언제나 기운이 다사롭고 부드러우며 심은 땅에 따라 맛이 다르다. 김지장은 신라의 승려로 당나라 연간에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이르러 이 차를 심었다. 나이 99세에 앉은 채 함 속에서 입적하고, 3년 후에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 있는 듯하고, 들어보니 뼈마디가 모두 움직였다.’ 

 구화산 공경차는 다사에 전해

지금도 중국 구화산 노호동에 1200여년 된 노다수가 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은 그 나무를 교각스님이 심은 차나무로 알고 있다. 스님이 719년 처음 간 곳이 노호동이고, 그 때 차씨를 가져다 심었다면 대렴보다 100여년 빠르다. 류건집 원광디지털대 교수는 “노호동에서 생산되는 차는 금지차(金地茶)라 하여 지장스님의 호를 딴 것이며, <구화산지>에서는 금지차를 공경차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며 “대렴 이전에 신라에 이미 전해오는 차가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교각스님의 친형이자 성덕왕의 셋째 왕자 출신으로 알려진 무상(684~762)스님도 중국으로 건너가 선다지법(禪茶之法)을 행했다. 신라의 스님이 중국에서 선법을 전하며 유명해진 무상스님은 ‘맑은 물에 새 차 끓이니 산뜻하기도 하여라’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지난 2001년 무상스님은 중국 불교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는 오백나한에 등장하는 455번째 인물이 됐고, 최근 그의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회의도 중국 성도성 대자사에서 열리기도 했다. 대자사는 무상이 당나라 현종의 칙명으로 주지를 지냈던 절이고, 그가 열반한 공간이다. 특히 무상스님이 선법을 널린 펼쳤던 중국의 사천은 차의 고장이니 원산지로 추정되고 있어 차와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화양국지>에 차의 명산지로 기록되어 있으며 몽정차가 생산되고 오리진이 기원전 53년 경 차 재배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설총의 <계왕서>에도 ‘고량진미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스님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도 있다.
 
⑨ 통일신라의 차문화〈下〉 
향가 ‘제망매가’로 유명한 월명스님과 ‘찬기파랑가’ ‘안민가’로 잘 알려진 충담스님은 통일신라 차문화사에도 빼놓을 수 없는 ‘다인(茶人)’이다. 월명스님은 경덕왕 19년 4월에 두 해가 열흘간 없어지지 않자, 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도솔가’를 지어 괴변을 없앴다.

다음은 류건집 원광대 석좌교수의 ‘한국차문화사’에서 발췌한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월명이 임금께 아뢰기를 “빈도는 국선의 무리에 속해서 향가만 알 뿐 불가의 노래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인연이 있는 스님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다.” 이에 월명은 도솔가를 지어 노래로 만들었다.(중략) 조금 후에 일괴(日怪)가 사라졌다.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차의 도구 한 벌과 수정염주 108개를 주었다.’ 이같은 내용을 보면 당시 스님들이 다구 몇 벌씩은 가지고 차를 마실 정도로 음다문화가 횡행했음을 알 수 있다.

충담스님의 ‘안민가’에 얽힌 차 이야기 역시 다음과 같은 ‘삼국유사’에 전한다. 3월 삼짇날 왕이 귀정문의 누각 위에 나가서 옆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에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스님 한 사람을 데려 올 수 있는가?”라고 했다. 이 때 마침 위엄과 풍모를 갖춘 깨끗한 스님이 한가로이 걸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가서 뵙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말한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돌려보냈다.

월명ㆍ충담스님은 걸출한 차인 왕과 교류하며 노래 만들기도

다시 한 스님이 가사를 걸치고 앵통을 메고 남쪽으로 오고 있었다. 임금이 그를 보고 기뻐하며 누각에 오르도록 했다. 통안을 살펴보니 다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스님이 아뢰기를, “소승은 충담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소승은 매년 중삼일(重三日)과 중구일(重九日)에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 올리는데, 지금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도 차 한잔을 나누어 줄 수 있는가?” 스님은 이에 차를 끓여 올렸는데, 잔에서 향기가 풍겼다. 임금이 이르기를,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습니다.” 임금은 “그러면 짐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보라.”

충담은 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올렸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로 봉했으니 그는 삼가 재배하고 간곡히 사양해 받지 않았다. 그 유명한 ‘안민가’가 탄생한 순간이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 주는 어머니며,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여기면 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살아가는 중생 이들을 먹여 다스려서 그들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하면 나라가 잘 보전될 것입니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가 태평해질 것입니다.’

류건집 교수는 “충담스님의 이같이 다성(茶性)을 터득하여 실생활에 반영하고 휴대용 다구로 부처님께 차를 올릴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차를 마시는 정도면 당시의 차는 궁궐이나 승려 및 귀족들에게 그야말로 항다반사(恒茶飯事)가 아닐 수 없다”고 평했다.
 

⑩ 고려의 차문화사 〈上〉


연등회 팔관회 등에 다례 필수 사찰 인근 다촌서 茶 생산 전문

고려시대는 다도가 융성했다. 각종 의식에 차문화가 크게 자리잡았다. <고려사>의 ‘예부(禮部)’에 기록된 여러 의식에도 고려시대 이후부터 궁중에서는 여러 의식이 있을 때 다례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저술한 <다도의범>에 따르면 연등회나 팔관회 등 국가적 규모의 연례행사를 실시할 때, 중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 궁중의 주요행사로서 왕실의 후손이 태어나거나 왕자의 책봉, 공주를 시집보낼 때, 선왕(先王)을 위한 의식 등에서 다례가 행해졌다.

고려시대 국가의 가장 성대한 연중행사는 연등회와 팔관회. 이 때 왕실에선 신하들과 어우러져 다과를 나누며 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진다의식(進茶儀式)이라 불린다. 음식과 술을 본격적으로 나누기 전에 신하가 왕에게 제일 먼저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고려사>의 ‘연등회의조’에 실린 진다의식 의례지침의 일부다. ‘왕이 시신에게 진다(進茶)를 명하면 집례관은 전(殿)을 향하여 국긍 재배하고 차를 올린다…이 때 임금은 반드시 태자 이하 시신제관에게 차를 하사하는 것이 정례로 되어 있다…그러면 태자 이하 모두가 왕이 내린 차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재배를 행한다. 집례관의 집전에 따라 차를 마시고 끝나면 읍하고 있다…’

고려에 관한 갖가지 견문을 그림과 문장으로 엮은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기 4편 다조(茶祖)’라는 절목에 고려인의 차습관과 법도, 차에 대한 품평 등이 나와 있다. 책에는 예로부터 고려인은 차 마시기를 좋아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차를 마시고 가라’는 한마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또 중국의 납차(臘茶)와 중국황실에서 쓰던 용봉사단차(龍鳳賜團茶)를 귀중히 여겨 송나라에서 오는 증정품이나 송나라 상인으로부터 산 것을 즐겨 마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산스님은 <다도의범>에서 당시 고려왕실에서 사용하던 토산차(土産茶)는 하동 화개동에서 수학한 유차(孺茶)로서 그 질이 중국의 용봉사단차를 능가하는 우수한 차였다고 밝혔다. 유차란 이른 봄 잔설속에 싹이 튼 눈 잎으로 그 향기와 감미가 각별한데, 오늘날 작설차를 말한다.

궁중과 사대부들의 끽다예법(喫茶禮法)을 보면, ‘붉은색 탁자에 다구를 배열하고 그 위에 홍사(紅絲) 보자기를 덮었으며, 매일 세차례씩 차를 내어오고 다음에는 더운 물을 가져와…사신이 그 차를 다 마시면 기뻐하고 다 마시지 아니하면 불쾌해 하므로 항상 억지로 차를 다 마신다’고 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과 일본 뿐만아니라, 인도 인도네세아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와 국교를 확장해나감에 따라 나라에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예빈사(禮賓社)’를 두었다. 차는 예빈의 핵심이었다. 또한 다방내시(茶房內侍)의 제도를 마련해서 차에 대한 제반 법도를 도맡게 했다. 불교에서는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해서 사찰에 바치는 다촌(茶村)을 두기도 했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전용가마를 두고 각종 그릇과 기와 등을 직접 구워 사용했고 민간에서도 차가게나 다름없는 다점(茶店)과 먼 길을 오가는 이들을 위한 다원(茶院)이 생겼다.
 
⑩ 고려의 차문화사 〈中〉 
우리나라 전통사찰 입구에는 어김없이 찻집이 있다. 통도사 송광사 해인사 등 대다수 사찰의 언저리에는 차를 사고, 마시면서 다기를 구입할 수 있는 다실이 여럿 있다. 이같은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이미 있었다. 고려시대 ‘다촌(茶村)’이 그것이다. 석용운 스님이 지은 <한국차문화강좌>에 따르면 다촌은 고려 광종과 성종 연간에 만들어졌다. 사원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마을을 일컫는다. 당시 사찰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또 음다를 즐기는 불교도들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양산 통도사가 다촌으로 유명하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당에서 모셔온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고 금강계단을 만든 불보사찰이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는 ‘통도사의 북쪽 동을산에 있는 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곳이다. 차 부뚜막과 차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후세인들이 다소촌이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사찰의 가람배치도에도 다당(茶堂)이 있었다. 류건집 원광대 석좌교수는 <한국의 차문화사>를 통해 “선종예법에 다례에 사다(謝茶)가 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차야말로 사원에서는 다반사가 아닐 수 없었다”며 “이런 중에도 구승들이 송의 명차들을 왕실이나 신도들에게 공양받는 일이 많았고, 그 일부는 문인들에게까지 보내준 일도 잦았다. 지금까지 남은 많은 다시(茶詩) 중에 스님께 차를 받거나 보낸 것에 대한 작품이 많은 것도 그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광종때부터 사찰 앞 茶村 유행 가람에도 茶堂 배치해 차 즐겨

고려시대에는 단차(團茶), 말차(抹茶), 잎차가 두루 이용됐다. 고려인들은 소님에게 차를 대접할 대 대면한 자리에서 달이지 않고 뜰이나 다른 장소에서 다린 후 찻잔에 담아 내왔고, 손님은 주인이 권해야 비로소 차를 마시는 것이 예정이었다고 한다. 왕실에서는 광종때부터 공덕재(功德齋)에 공양할 차를 왕이 손수 올리는 풍속이 생겨났고,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왕이 납원차 또는 대차를 내렸다.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펴낸 <다도의범>에 따르면 고려 초기의 문장가로 유명한 최승로(927~989)는 성종에게 차와 관련한 지나친 폐단을 중지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내용을 보면, “폐하께서 공덕을 쌓기 위해 차와 보리를 갈아 불공에 정성을 다한다고 들었사온데, 이는 지나친 일로서 성체를 해칠까 두려울 뿐입니다. 이처럼 공덕을 쌓기 위해 재를 올리는 일은 광종 때부터 비롯된 일로, 불교의 가르침인 인과응보를 그대로 믿는데서 오는 부질없는 일인 줄 아뢰옵니다”라고 했다. 즉 왕이 부처님에게 올리기 위한 말차를 몸소 만들어 공양하는 행위가 지나친 것임을 상소하는 기록이다. 당시 조정과 민간에서 차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수 있는 사료다.

<고려사>의 권64에 따르면 성종은 차와 관련 상소를 올린 최승로를 비롯 나라에 공이 컸던 최지몽 최량이 사망하자 부의품으로 뇌원차 200각과 대차 10근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의 차가 사찰과 왕실 귀족 등의 지배층에 널리 유행해서 수행이나 제의 의례는 물론이고 일반적 접대의 하나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⑩ 고려의 차문화사 〈下〉
차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고려시대엔 다도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시(茶詩)도 풍성하다. 다도가 고려 지배층의 문화로 자리잡아가면서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훌륭한 다인들이 많이 배출됐고, 차를 주제로 한 많은 시작(詩作)을 남긴 것이다. 특히 고려 이후로 스님이나 문인들 사이에 차가 소중한 선물로 자리잡았고, 차를 선물받은 이들은 다시로써 화답하는 풍속이 유행했다.

유명 茶人 배출…茶時도 풍성 혜심스님은 ‘선다일여’도달해

대표적인 다시인은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다. 백운거사로 불린 이규보는 차와 자연을 벗하면서 삶을 관조한 다선일치의 경지를 추구했다. 주옥같은 다시를 남겨 다도의 역사를 풍요롭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규보의 지기인 설봉산 노규선사로부터 조아차(早芽茶)를 선물받고 지은 ‘유다시(孺茶詩)’는 유명하다. 노규스님이 조아차를 그에게 선보이면서 유치라 이름붙이고 시를 청해서 지은 것이다.

‘화로에 센 불에 손수 차를 달여 찻잔 빛깔과 차맛이 서로 버기네. 향긋한 맛 입속에 부드럽게 녹으니 내 마음 어머니 젖내 맡는 애기 같도다. 끽다와 음주로 평생을 보내면 오며가는 풍류는 이로부터 시작되리니 적적한 방장엔 한 물건도 없고 숲속에서 들리는 생황소리를 즐기네. 차의 품격과 물을 평하는 것이 기풍일 뿐, 어찌 양생하며 천세의 영화를 바라리오. 서생의 굶주림이 장류 흐르듯 해도 입과 배에 곡기만 들어가면 되리니. 만일 내게 보낸 유차가 아주(雅酒)보다 나음을 알면 이는 참으로 우리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리.’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1337~1392)는 차를 즐기면서 수많은 다시를 남겼다. 역사적 현실 속에 처한 상심이 차를 통해 승화되는 경지를 엿볼 수 있다. ‘돌솥에 처음 차 끓는 소리. 풍로엔 불꽃이 붉구나. 물과 불이 천지를 움직이니 이 뜻 무궁 현묘하도다.(石鼎煎茶詩 1)’ ‘나라 위해 한 일 없는 늙은 서생이 차 마시기 버릇되어 세상 일 잊어버렸네. 눈 내리는 밤 고요한 서재에 홀로 누워 돌솥의 솔바람 소리 즐겨 듣노라.(石鼎煎茶詩 2)’

진각국사 혜심이 보조국사 지눌을 찾아 백운산에 이르렀을 때 저 멀리 암자에서 보조스님이 시자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지은 게송도 전해진다. ‘아이 부르는 소리 송라의 안개 떨어지는데, 바람에 실린 차 달이는 향기 돌길에 가득하도다. 백운산 먼길 선사를 찾아 올랐더니, 노스님은 벌써 암자에 차를 달여두고 날 기다렸도다.’ 류건집 원광대 석좌교수는 “혜심은 시의 깊은 예술성과 다심(茶心)을 융화시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선(禪)시인”이라고 했다. 특히 시 ‘인월대(隣月臺)’에서 ‘북두로 은하 길어 밤차 달이나. 차 연기 싸늘히 피어 계수나무 가린다네’의 구절은 “모든 것이 수직구도로 높이 하늘까지 닿는다. 북두칠성을 국자로 은하수를 다천(茶泉)으로 길어 달이는 다연(茶烟)이 하늘의 계수나무를 가리는 표현은 자신의 의취가 벌써 이 세상의 작은 한 인간이기 보다는 이미 범우주적으로 초탈한 대아임을 노래한 것”이라고 평했다. 고려의 다풍은 이처럼 선과 차, 차와 시, 선과 시과 어우러져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경지에 이르렀던 시기다.

 

⑪ 조선 전기 차문화사 〈上〉


억불에 따라 사원 차문화 위축 

조선의 차문화계에는 선비들의 진출이 현저하다. 억불책이 사원의 차문화를 위축시킨 원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유교와 불교 양측에서 상호 보완의 형태로 차문화가 발전되었다. 조선은 상대 교역국이 주로 명나라였기 때문에 차 역시 고려의 연고차 형태에서 산차(散茶)로 옮겨갔다.

류건집 원광대 석좌교수는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나 다풍을 이어받아 사헌부에서 다시(茶時)를 행하는 제도도 있었고, 다모(茶母)라는 직책도 생겨났다”며 “궁내의 제례는 물론 사가(私家)에서도 제사 때 차를 올렸고 분청사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다기(茶器)들이 생산됐다”고 했다.

류 교수는 <한국차문화사>에서 국가의 근간이 유교사상으로 정립된 조선은 불교가 배척의 대상이 되면서 차문화계에 불행을 야기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전대에 차의 중심에 서 있던 선가(禪家)가 그 재력과 인력을 잃어버리고 차의 생산과 보급은 물론 깊은 정신문화의 보급에 차질을 주는 위기를 맞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려의 차 행사가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이뤄진 반면, 조선은 서서히 왕실의 종묘나 봉선다례를 위주로 변모됐다.

찻일이 사찰보다는 왕실 제례나 사신맞이 행사에서 자주 나타났다. 조선시대 제도적 다례의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사신영접 다례는 사신이 오는 길목에서 행해진 원접다례가 있고, 수도에 들어온 후에는 왕이 직접 사신을 접대하는 다례로 태평관에서 행한 친림다례와 인정전에서 행한 접견다례 등을 들 수 있다. 의식규범은 다음과 같다. ‘북쪽 벽에는 중국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붉은 의자에 앉고 서쪽 벽에는 조선의 원접사와 영위사가 검은 의자에 앉게 된다. 대청의 기둥 밖 가까운 곳에 남북향으로 찻상을 놓고 주석으로 만든 차병을 만든 집사 한 명과 각기 찻종을 받는 네 명이 동서의 기둥으로부터 들어와서 찻상 앞에 선다. 찻종을 받는 사람은 각기 찻종으로 차를 받고 잠시 꿇어 앉았다가 올리면, 사신들은 모두 내려와 선 채로 찻종을 잡는다. 사신들이 차 마시기를 끝내면 집사는 꿇어앉아서 찻종을 받는다.’

이외에도 왕이 인정전에서 사신을 맞이하던 접견다례는 더욱 엄격하고 복잡한 절차로 진행됐다. 접견다례에서는 인정전의 대궐마당을 깨끗이 치우고 왕과 왕세자, 신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국의 정.부 칙사에게 차를 접대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예를 나누었다.왕실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차와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술, 채소, 과일, 약 등의 일을 주관하던 관청을 ‘다방(茶房)’이라 칭했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다방은 이조의 내시부에 소속되면서 차의 공급과 외국 사신의 접대를 맡았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유학자들이 차를 많이 즐겼다. 선비다풍이 심오한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어 그들의 도학정신과 안빈낙도의 사상이 차의 정신과 결부됐다. 이 때에 김시습, 남효온, 정희량 등의 차인들이 나와 노장사상에 심취해서 도학과 차, 현묘한 선사상을 조화시켜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출했다.
 
⑪조선 전기 차문화사 〈中〉
조선 왕실을 중심으로 한 제도적 다례가 사신영접 등 관습적으로 행하는 의례를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일반적 차문화는 스님과 문인을 중심으로 사랑을 받으면서 고려시대의 맥을 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차문화는 차를 달이고 마시는 분위기를 즐기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여, 야외에서 차를 즐기는 풍류라든지, 차의 품질과 차도구 등을 중시했다. 차를 마실 수 있는 정원으로 다정(茶亭)을 꾸미고 다실(茶室)을 만들어 이곳에서 다도를 즐겼는데, 이러한 다정문화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표적 다정은 전남 강진에 다산 정약용이 세운 다산초당. 다산은 유배지인 이 곳에 정원을 꾸미고 차나무를 직접 재배하면서 18년간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또한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은 한국이 낳은 다성 초의선사가 입적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당대의 문인들과 다도를 논하고 시를 지으면서 한국다도의 중흥을 일으킨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달이고 마시는 분위기 즐겨 야외에서 풍류 중시 ‘경향’

수많은 선승과 문인들이 차를 주제로 풍성한 문학작품을 남겼고 회화 중에서도 차를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펴낸 ‘다도의범’엔 이같은 작품들이 소개돼 있다. ‘다도의범’에 따르면 이경윤(1545~1611)의 작품 가운데는 차 그림이 많이 나오는데, 다반 위에 차를 내어오는 다동(茶童)의 모습을 비롯해서 찻그릇이 놓인 찻상이 등장한다. 뱃놀이를 하면서 차를 끓여 마시는 풍습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차를 달이는 대표적 장면은 차솥을 차풍로 위에 올려놓고 부채질 하는 다동의 모습이 조선후기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류건집 원광대 교수는 저서 ‘한국차문화사’에서 “그림은 당대 사람들의 생활을 중심소재로 삼는데, 이 무렵부터 제반공사(公私) 모임을 그린 그림이나 개인적 취향의 그림에 차가 등장하게 되었다”며 특히 “이경윤의 작품 등은 이른바 우리 다화(茶畵)의 초기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요즘 TV 인기드라마에 등장하는 단원 김홍도(1745~?)의 ‘시명도(試茗圖)’도 유명하다. ‘시명도’는 탁자 위에 거문고 책 두루마리와 함께 다반 위에 찻그릇이 놓여 있으며 화덕 위에 배부른 찻주전자가 얹혀 있다. 글씨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 ‘명선(茗禪)’ ‘일로향실(一爐香室)’ 등은 초의선사로부터 차를 선물받고 이에 답하고자 쓴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외에도 최근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1713~1791)이 그린 울금바위 그림이 LA카운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근래에 밝혀지면서 다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바 있다. 울금 바위는 우리나라 차문화 공간의 일성을 열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려 때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의 ‘남원월일기’에 원효방 옆에는 항상 원효스님을 모시고 다니며 차를 공양하던 사복(蛇福) 성인이 머물던 암자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 암자는 차인들이 날마다 원효스님에게 차를 올렸던 헌다장소의 하나로 일찍이 자리잡은 곳이다. 울금바위 그림은 그 현장을 찾아낸 강세황이 1770년에 그림을 남겨서 후세에 알려진 작품이다.

 

 ⑪ 조선 전기 차문화사 〈下〉
‘한 잔의 차는 한 사람의 참된 정성이고 그 참된 정성이 이 한 잔 차안에 있다네. 마땅히 이 차 한 잔 맛보소서 그리하면 응당 한없는 즐거움 생길 거외다…’ 회암사 무학스님의 제자인 기화스님이 지은 다시(茶詩)다. 스님은 세속을 떠난 은자의 생활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한가함과 여유로움이 가득한 다시를 많이 지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 선가의 차인들은 다채로운 다시를 지어 읊으면서 풍류를 즐겼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로 있었던 허응당 보우스님 역시 여러 편의 다시를 지어 <허응당집>이란 책을 엮기도 했다.

몇 편의 다시를 소개한다. ‘언제쯤 선정에서 풀려 대지팡이 짚고 가서 달빛 아래 차 끓여 마시며 얘기 서로 해볼까.(차숭사운 전문)’ ‘차 끓여 같이 마실 생각 그 얼마나 하였으며, 시 지을 때마다 함께 읊고픈 마음 간절하였겠나.(차은법사운 전문)’ ‘유수같은 세월은 늙음이 침노하는 구실이고, 뜬구름 같은 명예는 선정을 방해하는 마물이라네. 다로에 차 익으면 같이 마시고 싶고 서실에서 시 지으면 함께 읊고 싶었네(기명웅이우 전문)’ 이처럼 보우스님은 차의 깊은 경지에 이른 차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류건집 원광대 석좌교수는 <한국차문화사>에서 “보우스님은 화엄사상의 묘체를 잘 표현한 다시 ‘화엄불사의 묘용송’에서 ‘참다운 묘용을 알고 싶다면 일상에서 천연스러움을 따라라’라고 하여 차 마시고 잠 잘자는 일을 모두 하늘의 이치에 맡겨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묘용이라 했다. 이는 바로 화엄의 요체인 ‘행행도처 지지발처’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기술했다.

보우스님 깊은 차 경지 유명 유정스님 茶詩 작품성 ‘탁월’

서산대사로 알려진 휴정스님 역시 탁월한 다시를 남겼다. ‘낮에는 한 잔의 차 마시고 밤들면 한 자리 잠자네. 푸른 산 흰구름이 함께 있어서 생멸이 없음을 같이 얘기한다네.(천옥선자 전문)’ 당시 선승들의 생활 자체를 차로 묘사한 시 ‘도운선자’는 선의 깊은 세계를 담았다. ‘중의 평생 일. 차 달여 조주께 바치는 일.’ 휴정스님의 시 ‘두류산내은적암’에서 ‘함께 달 비친 시냇물 길어 차 달이니 푸른 연기 흩어지네’라고 표현한 구절에 대해 류 교수는 “달빛 아래 물을 긷는 것은 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달을 길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것은 달을 마시는 것이다. 그게 바로 다선일미요 방촌일월의 경지”라고 해석했다.

사명당 유정스님의 다시도 작품성이 뛰어나다. ‘죽림원벽상’이라는 시다. ‘죽림원엔 차 연기 푸르고 꽃핀 삼월이 맑기도 하네. 강호엔 따뜻한 기운 서리고 버드나무는 푸른 실로 희롱하네.’ 유정스님이 일본의 상야수 죽림원에 가서 벽에 쓴 자작시다. 마침 꽃피고 차 마시는 계절이니 섬나라의 봄 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것이다. 전란으로 동분서주하는 당시 스님들을 두고 수도에 전념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일침을 가하는 시도 있다. ‘옆 사람들이여, 세월 헛보낸다고 하지 마라. 차 달이는 틈 한가로울 때 흰 구름 쳐다본다오….’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선가의 다맥을 잇는 선승들이 적지 않다. 이들 스님들을 통해 차문화가 전승되고 다맥이 이어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⑫ 조선 후기 차문화사 〈1〉


 

왜란.호란 겪으며 경작지 급감 정선 김홍도는 많은 다화 남겨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 난을 치르면서 경작면적은 급감했다.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농민들이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토지개간 및 새로운 농기구의 발명과 이앙농법 개발 등으로 17세기 들어 농업에 활기가 띠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농(茶農)은 달랐다. 차 생산은 상당부분 전문영역이기에 어려움이 남달랐다.

류건집 원광대 교수는 ‘한국의 차문화사’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통문관지>에 따르면 사신들이 왕래에 의해 상당량의 차가 공식으로 오가고, 부족한 것은 수행하는 상인들에 의해 거래되어 다른 상품과 함께 들여오기도 했다. 또 중국에 들어간 우리 사행에 일정량의 차를 조참이나 하정 때 내렸는데, 이 시기에 오면 중국의 차 인심도 각박해져 그 양이 줄었다.”

임진왜란 후 일본과 국교가 회복되면서 사신들이 오면 동래부에서 다례를 행하기도 했다. 또한 왕실이나 공식적 의례에서는 차의 수요가 줄지 않았지만 전란 전에 비해 민간의 차생활은 위축되었다. 고려 말부터 다농들이 어려워지고 이농현상이 많아지면서 차의 생산이 조금씩 위축되다 오랫동안 난리를 겪으면서 일반 다농들은 얼마 남지 않게 된다. 류 교수에 따르면 추사가 권돈인에게 보낸 글속에 ‘자신의 글씨를 좋아하는 남쪽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주면 차를 구할 수 있을 터이니 심려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이런 가운데 점차적으로 차 생산은 회복단계에 접어들었다. 국가의 의례나 개인의 제의에는 종전과 같이 차를 쓰게 됐다. 특히 일본과는 대마도를 통해서 교류가 잦아져서 차도구가 많이 거래됐다. 우리차의 품질이 좋아 외국인으로부터 그 향미를 높게 평가받기도 했다.

차의 품질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와 같은 차인을 통해 우수성이 입증되었다. 류 교수는 “조선 후기 접어들면서 ‘다기(茶記)’에서 우리차의 좋은 점을 기록했고 초기의 ‘동다송(東茶頌)’에서 남쪽 스님들 사이에 차 마시는 일이 많고 그 질도 좋다고 나와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차는 원래 중국과 같은 것. 색 향 미 다 갖추었네. 육안의 맛 몽산의 약효, 모두 겸했다 옛사람 일렀다네.’ ‘동다송’의 한 구절이다. 이는 지금도 남쪽의 일부 제다업자나 선가에서 전래해오는 우리 고유의 방식으로 정성들에 법제한 차를 마셔보면 외국의 어떤 차라도 가질 수 없는 방향(芳香)과 고아한 색, 청순한 맛을 느낄 수 있으니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게 류 교수의 설명이다.

조선 후기부터는 실학파 학자들도 차를 즐기며 차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의 출중한 화가들이 실경산수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다화(茶畵)를 남겼다. 이들 화가가 지향하는 바가 관념적인 이념의 세계가 아니고 실제의 생활을 모델로 한 기록화이기 때문에 당시 선비사회에서 차가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가를 보여준다. 18세기 들어가면서 다음 시대에 차문화를 꽃피울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⑫조선 후기 차문화사〈2〉
조선 후기 궁중의 차문화는 의식다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 중국 사신의 왕래가 잦았다. 특히 임난 때는 중국 사신 뿐만아니라 파견된 장군과 관리들의 내왕이 계속됐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행해진 다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류건집 원광대 교수가 저술한 <한국의 차문화사>에 따르면 ‘선조실록’에 나오는 다례만도 200여회 이상 행했다. 종묘나 기타 제의에 수반되는 다례와 상례 때 행한 다례는 쉼없이 계속됐다. 혼전(魂殿)에 수시로 시행한 별다례(別茶禮)부터 가묘 친제의 다례에다가 궁중에 모신 영위에 올리는 주다례(晝茶禮)는 거의 일상적으로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조선 후기 궁중에서는 어떤 차를 주로 올렸을까. 17세기를 지나면서 궁중행사의 차는 인삼차로 자리잡았다. 선조 40년(1607) 4월에 각 관서의 인삼 공납문제를 말하면서 삼을 차로 쓰는 문제가 논의됐다. 또 인조 2년(1624) 5월에는 임금이 다삼(茶蔘)을 내렸다고 한다. 현종 원년(1659) 10월과 숙종 46년(1720) 6월에도 임금에게 황기인삼차와 다삼을 올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개인적인 차생활은 일상약용을 겸한 대용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건강을 돌보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왕실 중심으로 다례의식 발전 사헌부 茶時 행하며 업무논의

  전란으로 인해 차가 귀해지면서 한때 궁중에서도 대비전 이외에는 차를 올리지 못하게 저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록에는 금나라에 천지차와 작설차를 50봉씩 보냈다는 기록도 전해져 차생산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었다. 궁중의 의례에서 차를 쓸때는 반드시 다명(茶名)을 기록하게 했고 궁중 혜민국 소속에 다모간(茶母間)이라는 공간도 존재했다. 한때 금주령이 내려져 궁중에서 유독 많은 차를 쓴 일도 있었다.
 
임금은 물론 세자나 왕손들의 교육에서도 차는 일상화됐다. 시문과 풍류를 곁들여서 다정(茶亭)을 짓고 차를 마시게 했다. 서울 창경궁 후원에 지금도 남아있는 옥류천과 그 위쪽의 청심정이 바로 다정이다. 주련은 다시(茶詩)로 꾸며지고 바로 앞에는 사방 넉자의 네모난 돌로 된 수조가 있는데 그 한면의 중앙에서 천숫물을 뿜게 만들었다.
 
이처럼 궁중에서의 차문화는 왕성하게 활기를 띠다가 어려움에 봉착하여 발전을 더디게 만들기도 했다. 류건집 교수에 따르면 고종 21년(1884)에 왕이 “농상과 직조, 도자기와 벽돌 굽는 일, 목축, 제지, 제다는 모두 국가 경상비용에 관계가 있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니 새로 담당하는 국(局)을 설치하여 관원을 두고 제반 조치를 하여 품처하라”고 했다. 이 사안은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다. 류 교수는 “만약 그 때라도 그런 제도가 잘 시행됐다면 우리 차문화는 좀더 뚜렷하게 발전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편 사헌부에서는 거의 매일 벼슬아치들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업무를 논의하는 다시(茶時)를 시행했다. ‘승정원일기’나 ‘일성록’에도 다시가 시행됐음이 기록돼 있다. 행여 대사간이 공석이거나 참석하지 못하면 감찰 주도하에 다시를 시행하겠다는 계를 올리고 다시를 행했다고 하니, 다시 시행의 중요성을 짐작할 만하다. 다시의 시행을 감시하는 ‘감다(監茶)’라는 절차를 두어서 행함에 있어 잘못을 범하면 벌을 주기도 했다.
 
⑫ 조선 후기 차문화사 〈3〉 
조선 후기는 ‘다도(茶道)의 황금기’라 불릴 만하다. 유배지에서 다도에 매료된 다산(茶山) 정약용,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 금석학의 최고봉인 추사(秋史) 김정희 등은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다인들의 삶의 자취와 문학의 흥취는 이후 다도사의 귀중한 자산으로 전해온다.

다산 정약용(1762~1836).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으로 강진으로 유배됐다. 18년간 강진서 유배생활을 하는 와중에 다산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실학 명저를 남겼다. 다시집인 <다합시첩(茶盒試帖)> 역시 이 때 지어졌다. 다산이 차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유배생활 4년만에 만덕산 백련사의 혜장스님을 만나면서부터다. 유불(儒彿)의 만남을 통해 다산은 혜장스님에게 다도를 터득해 나갔다. 혜장은 다산에게 주역의 원리를 배우기도 했다. 차를 구걸하는 ‘걸명소’와 같은 재미난 시 작품도 이 시기에 다산이 혜장스님에게 보낸 것이다.

‘다도의 황금시대’로 불릴 만 초의 정약용 등 차인들 나와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저술한 <다도의범>에 따르면 1805년(순조 5) 다산이 차를 얻기 위해 임금에게 올리는 ‘소(疎)’자를 붙인 ‘걸명소’를 지어서 혜장스님에게 전했다. ‘걸명소’에서 다산은 “나는 요즘 차를 탐식하고 겸하여 약으로 마신다오.…나무도 하지 못할 깊은 병이 들어 애오라지 차를 구걸할 분이오. 듣건대 고해(苦海)를 건너려면 명산의 고액(膏液)이자 풀 중의 영약으로 으뜸인 차를 베풀어주는 것이 가장 큰 시주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헤아려 달빛과 같은 은혜를 아끼지 말기 바라오…”라고 했다. 혜장스님으로부터 구걸한 차를 기증받고 소회를 노래한 ‘기증혜장상인걸명(寄贈惠藏上人乞茗)’이란 시는 다산 특유의 위트가 가미돼 있다. “…궁한 이는 채식이 버릇되어 노린내 나는 고기는 생각없고, 돼지고기 닭죽 같은 호사한 음식 먹기가 아득하다.…바라오니 스님 숨에 자란 차 육우의 차솥에 조금만 채워주소서. 베풀어주시면 내 병 고쳐주고 나룻배로 건너줌과 어찌 다르리.”이 무렵에 다산은 혜장스님을 통해 해남 대흥사에 주석하던 초의스님을 알게 된다. 또한 초의스님은 다산의 아들을 통해 추사를 만나게 되어 세 사람은 다도사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다산은 초의스님이 백련사에 머물때부터 서로 왕래했고 초의스님이 대흥사로 처소를 옮긴 뒤에도 계속 왕래하며 다도의 정수를 습득하고 두터운 정을 쌓았다.

고산스님은 <다도의범>에서 초의스님의 ‘동다송(東茶頌)’에 현전하지 않는 다산의 ‘동다기(東茶記)’가 인용돼 있다고 소개했다. ‘동다기’에는 “어떤 이는 의심하기를 우리나라 차의 효능이 중국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색과 향과 그 맛이 조금도 차이가 없다”라고 기술돼 있다. 우리차의 우수성을 예찬한 다산의 심정이 담긴 구절이다.

이외에도 다산은 동자승이 차를 끓이며 졸고 있는 차 부뚜막을 바라보며 ‘차는 끓고 산(山)의 동자승은 졸고 있는데 간들거리는 연기는 오히려 절로 푸르구나…’라는 시를 읊기도 했다.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면서 보내게 되는 유배생활. 불안초조한 나날들이 다산에게 있어서는 차의 맛과 향, 멋과 정취에 빠져 되레 ‘극락’과 같은 귀양이 된 셈이다.
 
⑫ 조선 후기 차문화사 〈4〉

초의스님과 추사선생 만남은 당대 차문화사에 큰 획 그어

초의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만남은 당대 차문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추사는 서른살 무렵에 다산의 아들의 소개로 동갑인 초의스님을 만났다. 이들 만남을 두고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은 <다도의범>에서 “당대의 명필 추사와 남도의 선승 초의의 만남은 조선조 말의 꽃이요, 차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교류는 한국 차문화사의 백미를 이루는 것”이라고 평했다.

당시 땅끝마을 해남에서 서울까지 빠른 걸음으로도 보름은 족히 걸리던 시절, 해마다 초의스님은 대흥사 일지암에서 정성스레 만든 차를 추사에게 보내줬다. 차를 받은 추사는 염주와 향, 부채, 책 등과 주옥같은 글씨를 초의스님에게 답례로 보냈다. 추사가 9년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초의스님은 매년 차를 선물했다고 한다. 추사가 초의스님에게 써보낸 ‘명선(茗禪)’은 다도계의 명필로 전해져 온다. 명선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당대 두 거장의 교유에 이렇듯 차의 존재는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위트와 정이 넘쳤던 추사는 차가 떨어질 듯하면 초의스님을 닦달해서 차 얻어먹기를 즐겨했다. 두 사람은 서신을 주고받는 가운데 차를 둘러싸고 허물없이 농을 하고 을러대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차를 빨리 보내라고 어린아이처럼 보채는가하면 때로는 남의 차를 가로채기도 한다.

<다도의범>에 실린 ‘차를 청하며’란 제목으로 추사가 초의스님에게 보낸 서신내용이다. “편지를 보냈지만 한번도 답은 보지 못하니 아마도 산중에는 필히 바쁜 일이 없을 줄 상상되는데 혹시나 세체(世諦)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 나처럼 간절한 처지인데도 먼저 금강(金剛)을 내려주는 게요. 다만 생각하면 늙어 백발나이에 갑자기 이같이 하니 우스운 일이요, 달갑게 둘러 갈라진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오.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란 말이오. 나는 그대를 보고 싶지 않고 또한 그대 편지도 보고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지도 부수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게 좋을 거요. 그렇지 않으면 마조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을 받을 것이니 이 한 할과 이 한 방은 수백천의 겁이라도 피할 길이 없을 거외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차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고 농담체로 협박조까지 담긴 이같은 편지는 두 거장이 허물없는 유쾌한 관계임을 엿볼 수 있다. 초의스님으로부터 차를 받고 쓴 답장에도 위트가 넘친다. “인편에 느닷없이 편지와 차를 받아보니 차 향기에 문득 눈이 열림을 깨닫겠구려. 편지를 동봉했는지는 본래 관심밖이었다오.” 초의스님이 추사에게 차를 보내면서 백파스님에게도 한 봉지 전해줄 것을 부탁한 적도 있었다. 차 욕심이 남달랐던 추사는 좋은 차를 보자 그것을 백파스님에게 전해주지 않고 가로채면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누어 주라고 보낸 차, 백파에게 주기가 너무 아깝네. 그 큰 싹, 고아한 향기와 맛이 너무도 뛰어나구려. 한 포만 더 보내줄 수 없겠소? 병중에 쓰는 글이라 양해하시오.” 도대체 초의스님이 만든 차맛이 얼마나 좋기에 추사는 이토록 차를 극찬하고 그도 모자라 남의 차를 가로채기까지 하는 것일까. 차 한봉지를 얻기 위해 익살을 떨고 애교를 부리는 가하면 병을 핑계삼아 동정심까지 유발한 추사. 초의스님의 차이야기가 새삼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