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도덕을 점치는 소경

醉月 2008. 10. 31. 19:44

황해도 봉산의 장님 점쟁이 유운태… 다급하게 찾아온 고객을 사람다운 길로 인도하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식이 진보할수록 종교와 미신에 덜 이끌릴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다. 큰 선거가 치러지거나 사람들이 큰일을 겪을 때 점을 치러 다니는 일은 현재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언론조차도 그런 현상을 흥밋거리 기사로 내보낸다. 누가 어떤 큰 사건을 예견했느니 어떤 명사가 어떤 점쟁이를 찾아갔느니 하는 보도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점집이 많고, 알음알음으로 족집게 도사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한 번쯤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다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상황이 어땠을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점치는 행위나 점쟁이에 관한 기록이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유가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메스를 가하는 교조적 유학자가 넘치던 조선 사회에서 미신을 전파하는 불온한 자를 기록하거나 우호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래도 귀신같이 맞히는 점쟁이의 도움을 받은 선비들이 간혹 있어서 그들의 이름과 행적이 문헌에 종종 나타난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황해도 봉산군의 장님 점쟁이 유운태(劉雲台)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그는 조선시대 족집게 점쟁이의 계보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명사였다. 그만큼 선비들이 관심을 기울인 점쟁이도 없다. 맹인 점쟁이 사회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했으므로 그의 존재는 문사들의 기록에도, 민중의 구비(口碑)에도 살아 있다.

19세기의 위대한 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맹인 점쟁이의 현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나라 맹인(盲人)은 황해도 봉산(鳳山)과 황주(黃州) 사이에서 많이 배출된다. 해서 지역은 땅이 꺼지는 재변이 있어서 맹인이 많다고 세상에는 전하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다. 맹인은 사(士)·농(農)·공(工)·상(商) 어디에도 끼지 못하므로 의식(衣食)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반드시 주역 점을 배우고, 겸해서 경문(經文)을 외어 생계를 꾸려간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맹인 점쟁이들은 홍계관(洪繼寬)·유은태(劉殷泰)·함순명(咸順命)·합천(陜川)의 맹인을 그들 직업의 할아버지로 여긴다.”

조선조 맹인 점쟁이의 유래와 역사, 현황 그리고 사계의 최고 권위자가 누구였는지를 잘 요약했다. 전문 분야의 역사를 꿰고 있는 이규경의 언급이므로 믿을 만하다. 그가 언급한 점쟁이의 사연은 하나하나가 아주 흥미롭다. 그중에서 세조 때 인물인 홍계관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해 지금도 아이들에게까지 잘 알려졌다. 그는 재능을 시험하려 한 임금의 앞에서 쥐 한 마리를 다섯 마리라고 했다. 임금을 기롱한 죄로 처형당할 찰나 쥐의 배를 갈라보자고 하여 배에서 새끼 네 마리가 나와 화를 모면하고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신복(神卜)이라는 명성을 얻은 점쟁이가 바로 홍계관이다. 이 전설적인 명복(名卜)들에게는 이런 반전이 있고 스릴이 있고 탄성을 자아내는 에피소드가 늘 따라다닌다.

이규경이 말한 유은태(劉殷泰)는 곧 유운태(劉雲台)이다. 가운데 글자가 발음이 약간 달라졌다. 이규경이 맹인 점쟁이의 주요 배출지로 지목한 봉산 출신이다. 이 점쟁이는 과연 어떤 행적을 보였기에 명복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것일까?

<추재기이>에는 그의 행적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유운태는 봉산의 맹인이다. 일곱 살에 눈이 멀었는데 여섯 살 때부터 벌써 <사기>(史記)를 읽었고 고체시(古體詩)를 지었다. 눈이 먼 후에도 부지런히 공부하여 열세 살에는 경서(經書)를 암송하였다. <주역>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선천(先天)·후천(後天)의 학문에 큰 힘을 쏟아 점술에 크게 통달했다. 백 번을 점쳐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아 드디어 온 나라에 이름이 났다. 스스로 호를 봉강선생(鳳岡先生)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찾아와 의심스런 일을 해결해달라고 하면, 곧잘 효도와 공손함, 충성과 신의의 도리를 잘 말해주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엄군평(嚴君平)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일곱 살에 눈이 먼 유운태는 무지한 일반 점쟁이와는 격이 달랐다. <사기>를 읽었고, 시를 지을 줄 알며, 경서를 암송해 공부를 제법 많이 했다. <주역>을 깊이 연구해 실력을 쌓은 점술가로서 기반이 탄탄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아 온 나라에 점쟁이로 명성을 드날렸다.

 

엄군평보다 더 어진 사람

이렇게 유명한 점쟁이가 활동한 시기를 조수삼은 밝혀놓지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18세기 중·후반이 그의 활동 연대로 추정된다. 추정의 근거는 유운태를 실제로 만나서 점을 친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사람을 만났을까? 영조 시대 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신광수(申光洙·1712~75)는 1760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평안도를 여행했다. 평안도로 가는 길에 그는 봉산을 들러 하룻밤을 묵으며 유운태를 만났다. 이때 점을 치고 그에게 시 두 편을 지어주었다. 시의 제목은 ‘봉산의 점술가 유운태에게 준다’이다.

남쪽에서 명성을 들은 지 벌써 십 년째
봉산은 천 리 길이라 와볼 길이 없었지.
필마(匹馬) 타고 서관(西關) 가는 오늘에야
시를 지어 내놓고서 복채로 대신하네.

유씨(劉氏)는 엄군평보다 더 어진 사람
복채를 달라지 않아 세상에 명성 가득하네.
길 떠나며 참빗을 정표로 남기노니
헤어진 뒤 머리 빗으며 그리움을 달래보소.

남쪽이라 하면 그의 고향 충청도 한산이다. 시는 유운태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넉넉하게 보여준다. 신광수 같은 풍류의 시인이 봉산에 와서 다른 사람도 아닌, 맹인 점쟁이를 찾은 것이 의외다. 이전에 안면을 튼 것도 아니므로 유운태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음이 분명하다. 시의 내용으로는, 신광수도 점을 쳤다.

그런데 신광수가 점을 치고서 복채를 내놓은 것 같지 않다. 하기사 신광수는 ‘관산융마’(關山戎馬)와 같은 시를 내놓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시인이므로 유운태가 그의 명성을 몰랐을 리가 결코 없다. 실리만으로 따져도 두둑한 복채보다도 시를 받는 것이 이익이다. 또 제아무리 유운태가 명복이라고는 하나, 신광수 같은 시인으로부터 시를 받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니 유운태가 복채를 받았을 리가 없다.

한편, 유운태를 엄군평보다 현명하다고 평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 단순히 복채를 채근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앞서 본 <추재기이>에서도 그를 엄군평의 풍모가 있다고 세상에서 말한다는 언급과 연관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엄군평은 후한 시절의 은사로서 점쟁이의 전설이 된 인물이다. 그는 성도(成都)에서 점쟁이 노릇을 하면서 사람들을 충효와 신의로 이끌었다. 그는 하루에 돈 100전을 벌면 가게 문을 닫고 <노자>(老子)를 읽었다.

유운태를 엄군평에 빗댄 것은 직업적 점쟁이임에도 불구하고 점술로 사람을 현혹시키기보다는 윤리적 행동으로 이끈 도덕적 교사의 일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의심스런 일을 해결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기는 하지만, 점술만을 맹신하지 말고 부모께 효도하고 어른께 공손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들에게 신의를 지키는 게 더 앞세워야 할 일이라고 유도했던 것 같다. 사람답게 사는 도리가 앞날을 예견하고 비상한 방법으로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앞선다고 말해준 것이다. 이렇게 다급하게 찾아온 고객을 사람다운 길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그는 어른다운 덕망을 가진 대인처럼 보인다.

 

사형에 처할 때마다 점괘가 떠올라

그렇다면 이러한 평가가 어디까지 사실일까? 이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성대중(成大中·1732~1812)이란 학자 역시 유운태에게 점을 친 적이 있다. 그는 <청성잡기>에서 유운태에게 자기 운명을 점치게 한 사연을 실어놓았다. 유운태가 점을 치고서 “운수가 참 좋습니다. 봄바람 같은 온화한 얼굴이요 비단결 같은 고운 마음씨입니다.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살려주는 사람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점풀이를 들은 성대중은 그 뒤로는 늘 사람 살리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인 양 했다. 그래서 사형에 처해질 옥사가 그 덕분에 뒤집혀진 경우가 많았다. 그가 지방관으로 재직한 평북 희천군에서 두 명의 죄수를 죽였고 경주에서도 두 명을 죽였지만, 그들은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라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성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법으로서야 반드시 죽여 용서하지 못할 죄를 저지른 그들이었지만, 그들을 처벌할 때에도 맹인 점쟁이 유운태가 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운태가 실제 점괘를 말해주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선한 의지를 일깨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 유가의 선비인 성대중이 그런 유운태의 점괘풀이를 곧이곧대로 다 믿었을 리야 없겠지마는 그가 한 말을 따라 하는 게 좋은 지방관으로서 바람직한 길을 걷는 것 아닌가?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이 점쟁이에 대해 후한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와 다른 평가를 성대중과 친한 이덕무가 내렸다. 1778년 북경을 가던 이덕무는 3월23일 봉산에 이르러 하룻밤 잘 때 이 점쟁이를 떠올렸다. 봉산에 머물면서 이 지역 명사로서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직접 만나지는 않은 듯하다. 이때의 생각이 기행문인 <입연기>에 실려 있다. 그는 “유은태(劉銀泰)는 봉산 사는 소경으로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다. 가끔 기막히게 맞히기 때문에 이름이 나라 안에 쫙 퍼졌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교묘하게 속이는 것에 불과하건만 그에 미혹된 사람이 많다”라고 평했다. 그가 신통력이 있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혹세무민하는 술수라는 것이다. 이덕무는 본래 점쟁이를 아주 싫어한 학자라서 혹평을 내렸으나 그의 명성까지 부정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이구동성으로 유운태의 명성을 전하는 기록을 보았다. 정리하자면 유운태는 맹인 점쟁이의 전설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신빙할 만한 학자의 언급이므로 그의 높은 명성과 위상은 받아들여야 하리라.

하지만 그의 신기에 가까운 점술과 명성은 이러한 역사 기록보다 오히려 야담에서 더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19세기 최고의 야담집으로 손꼽히는 <청구야담>에는 ‘명복을 찾아가서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나다’는 제목의 야담이 실려 있다.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허구인지 명확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는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명복은 다름 아닌 유운태다. 야담의 줄거리는 이렇게 전개된다.

 

살인사건 진범을 잡다?

전주에서 과부 한 사람이 밤에 목이 잘린 채 죽었다. 핏자국을 따라가보니 서쪽 집 담 안에 그 목이 떨어져 있었다. 서쪽 집 주인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모진 심문을 당하며 여러 달 감옥에 갇혀서 거의 사경을 헤맸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억울함을 이기지 못했으나 진짜 범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 두 아들은 이렇게 상의했다.

“봉산의 유운태는 나라의 명복이라 하니 찾아가서 물어보자!”

드디어 복채와 노잣돈을 후하게 갖고서 말 한 필을 끌고 봉산의 유운태 집을 찾아갔다. 그에게 자세히 사연을 말하고 진짜 범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며 복채를 내밀었다. 유운태는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새벽에 점을 칩시다”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에 유운태는 세수를 하고 도포를 입은 다음 대청에 나와 앉았다. 화로에 불을 태우고 앞에 책상 하나를 놓았다. 또 큰 병풍으로 주위를 둘러치고 그 속에 앉아서 향을 사르고 축문을 외우며 점을 쳤다. 괘를 얻고 나서도 한참을 풀이하더니 밖으로 나와서 두 아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이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되 너희 집으로 들어가지 말라. 곧장 서남쪽 길을 따라 70리쯤 가다 보면 왼편으로 작은 갈림길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길을 가면 그 아래에 삼밭 수십 무(畝)가 있고, 그 아래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초가집이 나타난다. 낮에는 삼밭에 숨고 저문 뒤에는 그 집 울타리 뒤에 잠복하고 있으면 반드시 알아차릴 일이 있을 것이다.”

두 아들이 그 말대로 따랐더니 과연 똑같았다. 밤에 그 집 울타리에 숨어서 귀를 기울였더니 신발을 삼던 남자가 일을 마치고 방 안에 들어가 기쁜 목소리로 아낙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소. 아무개가 내 대신 심문을 자주 당해 이제 곧 죽게 됐소.”

그 말을 듣자마자 두 아들이 바로 뛰어들어가 그자를 포박해 관아로 끌고 갔다. 그자는 과부를 범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서 죽였노라고 순순히 실토했다.

재미는 있으나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유운태가 기가 막히게 점을 잘 맞힌다고 말한 이덕무의 지적이 이러한 유일 것이다. 그러나 진범을 잡기 위해 점쟁이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서 봉산 유운태의 명성이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진 정황은 적절하게 보여준다. 18세기의 명복 유운태에게는 더 흥미로운 사실이 많았을 것이다. 기록이 사라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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