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강열외’ 한국군을 어쩌나 몸보신 ‘관료형 군대’로 흘러 우울한 전망위에선 진급 투서, 밑에선 왕따 폭행…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자료협조·D&D포커스
#1 2월 초 군 수사기관이 한 건의 제보를 접수했다. 지난해 6월 해병대 사령관 진급 인사에서 유낙준 현 사령관이 경북 포항지역 정치인의 보좌관 출신 인사에게 3억5000만 원을 입금하고 각서를 작성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돈이 지역 정치인을 통해 여권 실세에게 흘러갔고, 그 대가로 유 사령관이 진급했다는 게 제보의 골자. 수사기관으로부터 이를 보고받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확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내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군 수사기관의 확인 결과 금품로비는 실체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이번에는 투서를 누가 했는지로 초점이 옮겨갔다. 국방부 감사관실은 감사 결과 유 사령관의 진급 경쟁자였던 H소장과 관련 내용을 논의한 P소장이 조작된 각서를 근거로 군 수사기관에 허위제보를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국방부는 P소장을 보직해임하고 H소장에 대해 군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5월 31일 구속된 P소장은 공교롭게도 7월 4일 총기사고가 발생한 강화도 해병대 초소를 관할한 2사단장이었고, 유 사령관 또한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해 해병대는 지휘부 전체가 흔들리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2 지난해 11월 어느 날 저녁, 서울 교대역 인근의 한 커피숍에서 벌어진 주먹질 사건. ‘병풍사건 때문에 전 정권에서 잘나갔다’는 이유로 몇몇 전·현직 인사가 현 정부의 군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은 것이라 전해 들은 예비역 장성 Y씨가 그 과정에 관여했다고 판단한 현역 장성 K씨를 폭행한 것이다. 구체적인 진급 불이익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거론된 인사들이 1, 2차 장성 진급에서 누락한 것은 사실 아니냐는 게 군 안팎의 대체적인 시선. K씨는 “Y씨가 육사 선배라 일방적으로 맞았을 뿐”이라며 폭행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불이익 여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관여한 바도 전혀 없다”고 말한다.
5월에는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정보원 요원이 정직처분이라는 중징계를 받는 일도 벌어졌다. 관련 사실 검증을 위해 Y씨를 만나 해당 내용을 거론한 당사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해당 요원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국방비서관실에서 파견근무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의 징계절차는 지난해 폭행사건의 피해자였던 K씨의 항의로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무렵 국정원 주변에서는 “해당 요원은 사실 확인 차원에서 관련자를 접촉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징계사유가 되느냐”는 불만의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3 이번에도 투서다. 시작은 지난해 11월. 당시 육군본부 헌병운영처장 Y씨의 장군 진급이 유력시되자 같은 병과의 H중령은 그의 비위 사실을 적은 익명의 편지를 헌병 병과장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그러나 Y씨는 곧 준장 진급에 성공했고, 국방부는 사실 확인 대신 “난무하는 음해로 인한 군 기강 문란을 막겠다”며 투서자 색출에 나섰다. 그러자 올 1월 H중령은 ‘Y준장이 수방사 헌병단장 시절 부대운영비를 횡령해 고위 장성을 상대로 한 로비에 사용했다’는 내용의 익명 투서를 다시 한 번 김관진 장관 앞으로 보냈다.
논란이 확대되자 Y준장은 끝내 자진전역했고, 뒤늦게 투서 내용 조사에 착수한 군 검찰은 제기된 의혹 가운데 일부가 사실이라고 결론지었다. 해당 사건은 현재 민간 검찰이 이첩받아 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Y씨는 자신의 진급 경쟁자와 가까운 사이였던 H중령이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음해한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6월 2일 군 검찰은 지휘계통을 따르는 대신 익명투서라는 형식을 택한 H중령에 대해서도 징계를 의뢰했다. 또 국방부 조사본부장 S소장에 대해서도 ‘철저한 사실 조사 대신 Y씨의 자진전역을 유도하는 부적절한 사건 종결을 건의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징계를 의뢰했다.
#4 지난해 3월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는 현역 준장 S씨가 장군 승진 로비 명목으로 3000만 원을 로비스트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를 확인하고 이를 군 검찰에 통보했다. S씨가 육군 대령으로 국방부에 재직하던 2009년 10월 부동산개발업체 대표 Y씨에게 ‘청와대 인사비서관실의 행정관에게 장군으로 승진할 수 있게 로비해달라’며 3000만 원을 전달했다는 것. 한 달 뒤 사건을 이첩받은 군 검찰은 S준장을 체포해 구속했다.
S준장은 자신과 무관하게 친인척이 건넨 돈이라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진급 적기가 지났음에도 금품이 오간 직후 장군으로 진급하는 등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다는 게 군 주변의 시선이다. 청와대와 검찰 모두 “행정관에게는 금품이 전달된 사실이 없다”며 Y씨의 단순 사칭으로 결론 내렸지만,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졌던 진급 관련 청와대 사칭 사건이 다시 등장했다는 점에서 군 당국 관계자 사이에서는 설왕설래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급 위해 군 조직을 흔드는 비방전
상황이 심상찮다. ‘별만 달면 100여 가지가 달라진다’는 장성 진급을 두고 장교들이 피 말리는 경쟁을 벌이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상황은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각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를 뒤흔들었던 앞서의 주요 사건들은 한눈에 봐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장성 진급은 물론 그 후에도 유력 보직 및 승진을 위해 벌이는 암투와 질시가 군 조직 전체를 뒤흔드는 것이다.
군 당국 또한 위기의식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다. 국방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 ‘군기문란행위 엄단’을 공언한 것만도 이미 여러 차례. 한 군 수사기관 관계자는 “난무하는 투서가 모두 사실무근이라면 무시해도 상관없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혐의가 확인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한쪽에서는 진급하려고 로비를 동원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 사실을 다시 투서에 담아 경쟁자를 낙마시키는 도구로 활용하는 악순환이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설명이다.
질문은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최근 군 고위장교의 진급경쟁 수위가 이처럼 도를 넘은 까닭은 무엇일까. 왜 지금 이 시점에 관련 사건이 이례적일 만큼 줄줄이 이어지는 것일까.
대령을 포기한 중령, 장군을 포기한 대령
먼저 구조적인 특수성부터 살펴보자. 최근 수년 사이 장군으로 진급했거나 진급을 앞둔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38기 이후 기수가 ‘좌절의 세대’로 불리는 대표적인 피해자다. 유신 말기였던 1976년 8월 박정희 정부는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위까지 복무한 사람 가운데 일부를 5급 공무원으로 특채하는 이른바 ‘유신사무관’ 제도를 시행했다. 이를 통해 국가공무원에 진출한 사관학교 졸업자가 1987년까지 784명. 문제는 유신사무관 진출을 염두에 두고 사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도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1978년 육사에 입학한 기수는 전 기수보다 정원이 20% 이상 증가했다. 이들이 바로 38기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들이 유신사무관에 진출할 수 있는 연차가 된 1988년에 이 제도를 폐지했다는 사실. 늘려 뽑은 정원은 고스란히 군에 남았고, 이들 사이의 경쟁은 상당수가 사무관으로 빠져나갔던 이전 기수보다 훨씬 치열해졌다. 1989년과 93년에는 또 다른 ‘재앙’이 덮쳤다. 군 인사법 개정으로 계급 정년을 연장하자 앞선 기수가 진급에서 누락한 후에도 ‘대포중(대령 진급을 포기한 중령)’ ‘장포대(장군 진급을 포기한 대령)’로 군에 남아 인사 적체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이들 육사 38기가 장성 진급 대상이 된 게 2007년부터였고, 일부는 현재 소장까지 진급했다. 외교안보 전문지 ‘D·D포커스’는 육사 28기의 경우 80% 가까운 졸업자가 대령까지 진급했지만 38기에 이르러 이 비율은 56%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또 20~25기에서는 장군 진급자가 25% 이상이었던 것에 비해 38기는 13% 내외로 줄었다. 진급에 걸리는 시간도 늘어 22기의 경우 40대 초반이면 장군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40대 후반에야 심사대상에 오르는 상황. 여기에 사관학교와 학군, 3사관학교 등 출신별로 대령 진급 비율을 유지하는 할당제도가 이어져 오다 보니 동기 사이의 경쟁은 더욱 첨예해졌다는 게 당사자들의 하소연이다.
야전 지휘관 역시 “사고 안 나는 게 최선”
구조적 배경과 함께 정치적 원인도 빼놓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동안 군 인사를 둘러싸고 청와대와 국방부, 각군 본부가 벌인 주도권 다툼이 진급 시스템의 투명성이나 예측 가능성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인사 개입이냐 육군본부의 인사비리냐를 둘러싸고 참모총장 사표 제출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연출했던 2004~2005년 무렵의 일, 인사안 사전 검토 여부를 놓고 청와대 일각과 국방부 장관이 맞부딪혔던 이명박 정부 초기의 사건, ‘작전 출신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국방부의 파격적인 인사정책 변경으로 군 조직 전체가 술렁였던 2008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렇듯 인사문제에 관한 갈등을 반복적으로 연출하다 보니 ‘누가 결정권자냐’를 두고 대령급 이상 장교의 눈치 보기가 심화했고, 이러한 불안정성이 최근의 진급 관련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군 인사문제에 관여했던 한 전직 안보당국 관계자는 “최근 군 안팎에서 ‘이전 정부 사람’ ‘전직 장관 사람’ ‘전직 총장 사람’ 등의 표현을 공공연히 거론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부작용은 이제 군 전체로 퍼진 양상이다. 야전 지휘관 사이에서 ‘사고가 안 나는 게 최선’이라는 보신주의가 만연하는 현실이나 청와대, 국방부, 합참, 각군 본부 등 이른바 ‘힘 있는 정책부서’에서의 근무 경력이 전방 지휘관 보직보다 진급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져 나가는 분위기가 모두 같은 맥락이다. 한 육군 최전방 지휘관의 말이다.
“합참 등 작전지휘 계통에서는 병사의 사격훈련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지만, 군단이나 사단 차원에서는 그 때문에 사고가 발생할까 염려하는 비공식 구두지침을 동시에 하달하곤 한다. 현장 지휘관으로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병사의 실탄 소지가 적은 후방사단 근무를 선호하는 장교가 늘고, 일부 지휘관이 병영에서 가혹행위가 발생해도 상부에 보고하는 대신 자기 선에서 수습하고 넘어가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도 이런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정치권이나 자신과 가까운 특정 상관에 대한 줄서기 문화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고위급 장성 한 사람이 진급하면 최소한 3~4개의 진급 공석이 연쇄적으로 생기기 때문. 서두에서 살펴본 사건을 조사하는 와중에 몇몇 고위직 장성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흘러나온 것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장성 휘하의 장교들이 ‘플레이’한 결과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았던 게 대표적이다. 쉽게 말해 상관의 경쟁자가 낙마하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돌아오는 구조인 셈이다.
합리적인 ‘軍살 빼기’ 묘안 없어 고민
가장 우려할 만한 대목은 치열해진 진급경쟁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묘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육사 42기부터는 임관 5년 후 예편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현재 군에 남은 정원은 선배 기수보다 다소 줄었다지만, ‘관문’은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좁아지는 까닭이다.
국방부는 4월 공개한 ‘국방개혁307계획안’을 통해 장군 수를 2020년까지 444명에서 15%(약 60명)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각군 본부와 작전사령부 통합 등을 통해 정원 축소를 시행하겠다는 것. 군 인사정책에 관여하는 한 당국자는 “진급경쟁이나 인사 적체를 완화할 유일한 방법은 유휴인력을 전역시켜 사회에 진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기침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군에서만 평생을 보낸 50대 예비역 영관장교를 안정적으로 수용할 일자리를 확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한국군의 관료화 경향은 점점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관련 전문가는 물론 예비역 관계자 사이에서도 쏟아져 나온다. 과도한 진급경쟁과 인사 적체가 불필요한 직위나 조직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군 조직의 합리성 및 효율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전체 전력의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시나리오다. 참모총장 출신인 한 예비역 인사의 말은 이러한 경향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러일전쟁 당시 군사력 총량에서 일본을 훨씬 능가하던 러시아가 패배했던 이유는 오로지 황제와 그 측근의 뜻에만 신경 쓰던 지독히 관료화한 군대 때문이었다. 몸은 전선에 와 있지만 영혼은 진급과 보직을 결정하는 사람들 옆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위협이나 그에 대한 대비책보다 개인의 진급이나 영향력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면 한국군의 미래 역시 불안할 수밖에 없다.”
고위장성 인사의 ‘게임의 법칙’ ‘별’을 단 후엔 운칠복삼(運七福三)으로 진급 | |
장성으로 진급하고 나면 게임의 룰은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영관급 장교에게 적용하는 평가의 잣대와 고위급 장성에 적용하는 기준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계가 역대 육군참모총장 가운데 장성 진급을 1차로 통과한 사람의 숫자다. ‘주간동아’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숙청으로 군내 사조직 영향력이 제거된 이후 30대 김동진 총장부터 42대 현 김상기 총장까지 총 13명 가운데1차로 별을 단 사람은 7명이고, 나머지 6명은 모두 2차에서 진급했다. 영관장교 시절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일찍 장군이 됐다고 해서 군 최고위직에 오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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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이 지옥’ 끊임없는 병영사고…악습 못 고치면 ‘징병제’ 위기 맞을 수도
7월 4일 해병 2사단의 강화도 해안초소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는 과연 단순한 ‘사고’였을까. 이 사건이 10여 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민에게 충격으로 남은 이유는 4명이라는 사망자 수 때문은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 군대에서 여전히 괴롭힘과 집단따돌림으로 상징되는 전근대적이고 폐쇄적인 조직문화가 똬리를 튼 채 살아 있다는 사실이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 7월 10일에는 포항 해병대 1사단 정모 일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3일에는 육군 201특공여단 이모 일병이 9일 전 자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14일 해병대 2사단 배모 원사의 자살소식까지, 줄을 잇는 비극에 국민은 망연자실에 빠진 형국이다.
생활공간이 아니라 ‘수용소’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군당국이 쏟아내는 대책과 다짐에도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 말하듯 “군대는 원래 그렇다”며 넘어가는 것이 ‘강한 군대’를 위해 바람직한 일일까. 한국군은 과연 이 일을 해결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것일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시계추를 뒤로 돌려보자. 2005년 6월 경기 연천군의 최전방소초(GP) 내무반에서 총기난사로 8명이 사망했다. 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은 국군수도병원으로 조문을 갔지만 유족은 거세게 항의하며 윤 장관을 시신이 모셔진 관 쪽으로 밀어버렸다. 다음 날 필자를 만난 윤 장관은 “장관직을 그만 두고 싶은 심정”이라며 거의 들지 못하는 술을 연거푸 마셨다. 이내 청와대 직속으로 병영문화개선위원회를 만들고 병영문화 혁신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병영에서 악습과 부조리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아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한 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당연시하던 군대 내 구타를 금지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1987년 국방부 일반명령 38호 구타금지 지침이다. 필자는 전무후무할 만큼 강력하게 구타 근절을 천명했던 이 지침의 혜택을 톡톡히 누린 세대다. 훈련받던 육군 훈련소 연대에서 한 기간병이 훈련병의 뺨을 때렸는데 이 모습이 중대장에게 발각됐고, 해당 병사는 즉시 영창에 갔다. 한 대도 맞지 않고 훈련기간을 마친 필자의 군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이 무렵만 해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주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군대문화 역시 급속도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군대’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우리 군이 과거 일본군이 전수한 악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통시적으로 보면 군대 내 구타는 특정 시기에 잠깐 수면 아래로 잠복했을 뿐, 경계를 늦추면 반드시 되살아나 병영사고로 이어지곤 했다. 공시적으로 봐도 사회주의나 권위주의 국가의 징병제를 제외하고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 가운데 아직도 구타나 가혹행위가 문제로 남아 있는 징병제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질문은 간단해진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한국 군대가 다른 나라 군대와 차이를 보이는 병영 시스템의 핵심은 단연 내무반(생활관)이다. 구조적으로 볼 때 이제까지 군대에서 벌어진 각종 총기사고와 자살사고의 공통점을 꼽자면 모두 내무반 생활의 부조리에서 갈등이 촉발했다는 점이다. 군대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우리 군의 내무반은 교육훈련과 임무수행에 지친 병사가 달콤한 휴식을 누리는 생활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사생활을 인정하지 않는 수용소 개념의 구속 공간에 가깝고, 어쩌면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은 고통의 공간일 수도 있다.
훈련은 적당히, 생활은 힘들게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 일본 자위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군의 전통이 한국 군대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기합’이라는 일본군 용어가 ‘얼차려’로 바뀌는 데 40년이 걸렸다. 절대다수의 병사가 전력 강화를 위한 교육훈련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내무반 생활이 힘들다고 토로한다. 물론 최근 들어 내무반 구조를 혁신한 개인 침대형 생활관을 건립하는 등 병영시설 현대화를 추진하지만, 아직도 많은 수의 내무반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본질에도 큰 변화가 없다.
혹자는 “군대에 사생활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사생활을 인정하지 않는 군대는 오히려 조직의 근본 목적과 존재 이유가 왜곡되기 십상이다. ‘훈련은 힘들게, 생활은 즐겁게’라는 강한 군대의 모토는 ‘훈련은 적당히, 생활은 힘들게’라는 뒤틀린 병영문화로 탈바꿈한다.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이 지침을 통해 악습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효과는 그때뿐이다.
묘하게도 우리 군은 장병이 사생활을 누릴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고수한다. 군대는 흡사 교도소처럼 사생활과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극히 예외적인 조직이며, 그래야 상명하복의 군 기강이 바로 선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누구도 세계 최강임을 부인할 수 없는 미군만 봐도 이는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다시 해병대 총기사고로 돌아가보자. 병영문화 혁신의 일환으로 군에서는 가혹행위를 당한 병사를 위해 고충처리위원회, ARS 전화상담, 병영생활전문상담관 등의 제도를 사단에 설치·운영한다. 그런데 이번에 총기사고가 발생한 해병대의 경우 올해 4월 국방부 감사관실이 구타 관련 감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믿기 힘든 사실이 확인됐다. 해병 1사단 고충처리위원회와 ARS 전화상담에 접수된 구타 관련 사건은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한 건도 없었으며, 병영생활전문상담관은 지난해 292회의 구타 관련 상담을 했지만 병사의 자발적인 의사가 아닌 중대 행정관의 요청에 의해 시행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고충을 처리하는 제도 자체가 아무런 효과도 없이 운영되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국방부 감사관실 보고서에는 구타사고가 발생하면 인사상의 불이익을 우려한 지휘관이 자체 조치로 종결하거나 사건의 은폐 및 축소를 조장하곤 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는 개인적 고충을 상담할 수 있는 권리가 완전히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는 한국군 병영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병사의 기본권에 대한 우리 군의 굴절된 인식이 빚어낸 또 다른 결과다. 병사의 기본권에 대한 공감대와 개념이 수십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는 한국의 징병제는 흡사 진화가 멈춰버린 유기체나 다름없다.
특히 이러한 기본권 개념의 부재가 ‘거칠게 다뤄야 말 잘 듣는 강한 전투원이 된다’는 병사들의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입영하기 전 ‘기수열외’의 존재를 알고 있던 병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신병교육을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이러한 악습의 존재는 자대 배치를 받을 무렵에는 모든 병사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한다. 이러한 문화에 길들여지면 ‘전쟁이 발발해도 민주주의 타령만 할 거냐’며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체계를 적대시하는 것은 물론,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집단의식에 복종하게 된다.
창의적인 병사가 필요한 시대
존중과 배려 속에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는 병사가 강한 전투원이 될지, 반대로 학대와 모욕을 이겨낸 병사가 강한 전투원이 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특히 해병대의 경우 이번 총기사고를 겪은 후에도 병영 저변에는 ‘해병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만만찮게 남아 있다. 예비역 단체 역시 잘못된 전통을 만든 데 대한 책임을 인정하거나 그 흔한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해병대의 전통을 지키려면 어느 정도의 악습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무엇이 강한 군대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현대전의 성격과 첨단 무기체계는 뛰어난 전문성, 용기를 지닌 수준 높은 전투원을 요구한다. 오늘날의 한국군이 유사시 치러야 할 전쟁은 옛 일본군의 태평양전쟁도, 1950년대 6·25전쟁도 아니다. 이른바 ‘4세대 전쟁’을 수행하려면 가장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병사가 필요한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이다. 변화를 무시한 채 오랜 고정관념과 자학적 인간성에 기초한 잘못된 문화를 고집하는 것은 진화를 가로막고 약한 군대, 지는 군대로 가는 첩경이나 다름없다. 이 점을 간과하면 한국의 징병제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기가 곧 닥쳐올 수 있다.
김종대 편집장은 14대 국회 국방위원회 비서관으로 안보정책을 다루기 시작한 이래 16대 대통령직인수위 국방전문위원, 청와대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국방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냈다. 2007년 공직을 접고 외교안보 전문지 ‘D&D포커스’를 창간해 현재 발행인 겸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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