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풍류의 향기_토정 이지함

醉月 2009. 7. 27. 08:44

토정 이지함, 토정비결 펴낸 청빈한 실학자… 걸인청 세워 貧者들 자립 기반 마련

▲ 토정 이지함 동상, 충남 아산시 인주면 면사무소 앞뜰에 있다.

본명보다도 ‘토정비결’의 작가로 더 잘 알려진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은 우리나라 풍류사에서 신비로운 발자취를 남기고 간 기인이사(奇人異士)였다.

‘재물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재앙이 따르는 법’이라면서 한평생 청빈무욕하게 보낸 토정 이지함, 그는 유학(儒學)은 말할 것도 없고 천문·지리·음률·산술·의술·점복·관상 등 여러 방면에서 비상한 재주를 지녔으나 박학다식을 뽐내지도 않았고 벼슬자리를 탐내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지·기행으로 한 삶을 일관한 토정은 먼 앞날을 미리 내다본 비범한 예언가요 서민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경제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시대를 훨씬 앞서간 실학사상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만년의 짧은 관직생활을 통해서는 오로지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친 청백리이기도 했다.

평생토록 가난을 재미삼아 살아왔으므로 종6품에 불과한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잠깐 맡았던 것도 결코 재물이 탐나거나 입신양명에 눈이 멀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위해 남은 힘이나마 한번 쏟아보고 가겠다는 순수한 인간애·동포애의 발로였을 것이다.

토정이 그렇게 하기 싫던 벼슬길에 나선 것은 56세 되던 해인 선조 6년(1573) 봄. 포천현감이 되어서였다. 이미 마음속으로 작정한 바가 있었으므로 토정은 일부러 남루를 걸치고 짚신 신고 죽장 짚고 걸어서 포천에 부임했다.

마침 저녁 때였으므로 관노가 음식을 차려서 올렸다. 토정이 물끄러미 밥상을 내려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먹을 것이 없구나.”
아전이 뜰 아래서 이 말을 듣고 몸 둘 바를 몰라 이렇게 아뢰었다.
“궁벽한 시골이라 변변한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다시 차려 올리겠습니다.”
아전은 진수성찬을 차려 다시 올렸다. 토정이 여전히 밥상을 내려다보더니 똑같은 말을 했다.
“먹을 것이 없구나.”

육방관속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며 지은 죄도 없는데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속으로는 된통 까다로운 사또를 만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잘 차린 음식을 보고도 먹을 것이 없다니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재물을 긁어모으려는 탐관오리로 오해했던 것이다. 이윽고 토정이 입을 열어 이렇게 타일렀다.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생활이 넉넉지 못한 데도 음식에 절제가 없고, 또 앉아서 편히 먹기를 좋아하니 큰일이다. 나로 말하자면 음식을 상에다 차려서 먹는 것조차도 과분하게 여기는 바이니라.”

그리고 잡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만 내오게 하여 맛있게 먹었다.

 

걸인청은 400년 전의 새마을사업본부

토정 이지함은 또한 400년 전에 이미 이 땅에서 잘살기운동·새생활운동·새마을운동을 실천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토정이 ‘걸인청(乞人廳)’을 세운 것은 아산현감 때였으나 포천현감 시절에도 그와 비슷한 집을 지어 빈민들을 거두어 각자 생업을 주선하여 새 삶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포천현감으로 부임한 이듬해에 백성을 위한 건의를 했으나 조정에서 받아주지 않자 미련 없이 현감 직을 내버리고 훌쩍 떠나버렸다.

그가 아산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선조 11년(1578)이었다. 토정은 고을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뜻밖에도 거지가 매우 많은 데 놀랐다. 거지뿐 아니라 늙고 병들어 벌이도 못한 채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걸인청이었다. 그러자 아전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반대를 했다.

“사또! 거지새끼들은 모조리 쓸어다가 아산 바깥으로 내쫓아버리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데 무슨 까닭에 걸인청을 만들어 우리 고을을 거지소굴로 만들려고 하십니까요?”

토정이 목청을 가다듬어 아전들을 꾸짖었다.

“어허, 고얀 놈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따뜻이 보살펴주는 것이 수령의 본분이 아니더냐? 내가 걸인청을 세우려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여 양민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도 집과 땅을 갖게 하여 잘살게 하려는 것이니라. 너희가 건물이 없다느니 재물이 없다느니 핑계를 대지만 건물은 세미(稅米)창고를 비워서 수리하면 될 것이고 재물은 한 해 동안만 먹여주면 자립할 방도가 마련될 것이 아니겠느냐?”

▲ 걸인청 건물. 여민루 앞에 있었으나 최근에 헐려 없어져버렸다.

그렇게 걸인청을 만든 토정은 관속을 풀어 고을 안의 거지들을 죄다 잡아들여 수용하고 일을 시켰다. 노약자와 병자들은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는 쉬운 일을 시켰고, 젊고 튼튼한 거지들은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거나 배를 타고 나가 고기잡이를 시켰다. 그 밖에 손재주가 좋은 자들에게는 도구를 마련해주고 수공업에 종사토록 했으니, 이야말로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산 교훈에 다름 아니었다.

토정 이지함의 본관은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세손으로 중종 12년(1517) 음력 9월 20일 수원판관을 지낸 이치(李穉)와 광산 김씨의 막내아들로 외가인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지영(之英)·지번(之蕃)·지무(之茂) 세 형이 있었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둘째형한테 글을 배웠다.

뒷날 영의정에 오른 이산해(李山海)의 부친인 지번은 글뿐 아니라 토정의 인격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유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에도 정통했으며, 명종 때에 벼슬을 버리고 단양 구담에 은둔하며 신선술에 몰두했다.

늘 털이 검은 소를 타고 강변을 돌아다녔으며, 구담 양쪽 절벽에 칡덩굴로 밧줄을 만들어 가로질러 놓고 거기에 오늘날 케이블카 같은 ‘비학(飛鶴)’을 매달아 타고 오르내렸으므로 사람들이 신선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토정의 풍류정신과 실용주의 사상은 이런 둘째형의 감화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 밑에서 자란 토정은 정종(定宗)의 증손인 이성랑(李星琅)의 딸과 혼례를 올렸는데, 한강변에 진흙을 개어 10여 척 높이의 흙집을 짓고 살았다.

밤에는 그 속에서 자고 낮에는 집 위에 올라가 한강을 오르내리는 돛배들을 바라보거나 ‘주역’을 읽으며 지내니 그 집을 가리켜 사람들이 ‘토정’이라 불렀고 자신도 또한 그것을 아호로 삼았다. 그 토정이 바로 지금 서울 마포구 토정동의 지명이 되었다.

 

토정 이지함 '주유천하'하며 명사들과 교유, 쇠갓 쓰고도 당당했던 '기인이재'

▲ 여민루는 토정이 현감을 지낼 때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다. 그 뒤는 영임등학교이다.

토정은 어디에 뛰어난 인물이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찾아가 만났는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남명(南冥) 조식(曺植),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과의 교유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박현석의 ‘사우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정이 젊었을 때 화담의 학식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배우고자 송도(개성)로 찾아갔다. 낮에는 화담에게 글을 배우고 밤에는 객사에서 잤다. 객사의 바깥주인은 행상이었는데 그의 아내가 젊고 예뻤다.

어느 날 안주인이 서방더러 장사 나가기를 권했다.

지아비가 행상을 떠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누라가 전에 없이 아양을 떨며 장삿길을 재촉한 것이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멀리 떠난 척하고 마을을 빠져나온 다음 그날 밤 몰래 집으로 돌아가 바깥에 숨어 동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여우같은 여편네가 짐작했던 대로 토정의 침소에 들어가 갖은 교태를 부리며 열심히 꼬리를 치고 있었다.

서방이 일이 어찌 되는가 지켜보자 토정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의관을 바로 갖추고는 엄숙하게 남녀가 유별한 인륜도덕을 깨우쳐주는 것이었다. 온갖 교태로 아양을 떨던 마누라가 마침내 부끄러움에 못 이겨 잘못을 빌었다. 이런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서방은 단숨에 화담에게 달려가 말했다.

“소인의 집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사온데 참으로 괴이합니다. 혼자 보기 아까워 감히 아룁니다.”

화담이 그 말을 듣고 객사로 찾아가보니 과연 사내의 말이 틀림없었다. 탄복한 화담이 방안으로 들어가 토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학업과 수양은 이미 내가 가르칠 경지를 넘어섰구려! 원컨대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

화담은 토정보다 28세 연상인데, 그때 혹시나 자신이 그 옛날 명기 황진이(黃眞伊)로부터 유혹을 당했던 사건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남명과의 만남도 비상했다. 토정이 처음으로 남명을 찾아가니 16세 연상인 남명이 뜰 아래까지 내려와 반겨 맞으며 대접이 극진했다. 당황한 토정이 말했다.

“존장께서 어찌 일개 야인에 불과한 후배를 이토록 후대하십니까?”
남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범상치 않은 그대의 풍모를 보고 내 어찌 천하에 명성 높은 토정을 몰라 보리오?”

그 뒤 남명이 서울에 왔다가 하인에게 술과 안주를 들려 한강변 토정의 집 토정으로 찾아왔다. 토정이 의관을 갖추고 토굴 같은 토정 안으로 남명을 맞아들였다.

“존장께서 이처럼 누추한 데까지 어인 행차이십니까?”
“지나던 길에 들른 것이외다. 술과 안주는 내가 장만해왔으니 상이나 봐오소!”

그리하여 두 풍류고사가 마주앉아 권하고 마시면서 고금의 일화부터 학문과 시사(時事)에 이르기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날 토정의 학식과 인품을 눈여겨보고 탄복한 남명이 이르기를 “그대야말로 도연명(陶淵明)에 못지않은 고매한 선비”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그 옛날 풍류 군자들의 멋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토정은 남루를 걸치고 삿갓 쓰고 죽장 짚고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런 차림새로 주유하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과 명사들을 만나는데 조금도 거리낌 없었다.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혹인기사’라는 책에 나온다.

‘선생은 키가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고 골격도 건장했다. 또 얼굴이 검으면서도 둥글고 살집이 좋았다. 발 길이는 한 자가 거의 다 되었으며, 목소리 또한 맑고 우렁찼다. 말수가 적었으며 기개가 당당했고 위풍이 늠름했다.’

이 책은 또, 토정이 늘 저자와 산수 간을 돌아다니다가 잠이 오면 두 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잠이 드는데,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소나 말도 놀라 도망치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머리에 쓰면 갓, 뒤집으면 밥솥

그렇게 한 세상을 떠돌며 토정은 풍류사에 길이 남을 숱한 전설적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는 ‘쇠갓’을 만들어 쓰고 다닌 일일 것이다. 관례(冠禮) 이후 수십 년간 쓰고 다니던 갓이 망가져버렸는데 선비로서 의관이 없으면 바깥출입을 못하던 당시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런데 낡을 대로 낡아버린 밥솥까지 구멍이 뚫려 더는 못쓰게 되어버렸다. 궁리를 거듭하던 토정은 마침내 기발한 착상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쇠갓이었다.

쇠로 갓을 만들었으니 낡아서 버릴 염려도 없고 뒤집어놓으면 밥솥도 되니 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 아산향교. 아산면 아산리에 있으며, 본래 영인중학교 근처 향교골에 있던 것을 토정이 현감 재직 시 옮긴 것이다.

이런 일화는 토정의 기인다움도 돋보이게 하거니와 그가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던가를 분명히 반증해준다고 하겠다. 장대한 체격의 사내가 보기에도 괴상한 쇠갓을 쓰고 다니니 그는 이내 서울의 명물로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토정의 부인 전주 이씨는 끼니 때마다 ‘움직이는 밥솥’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이처럼 토정은 청빈무욕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상인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이미 상업과 경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본보기삼아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떼돈을 번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조각배를 타고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서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수천 석의 곡식을 사서 빈민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는 쌀 한 됫박 들여놓지 않으니 부인이 바가지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토정은 풍류거사였을 뿐만 아니라 앞날을 미리 내다볼 줄 안 도통한 예언가이기도 했다. 서산대사·이율곡·이순신과 등과 더불어 토정도 임진왜란을 예측한 몇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또 사람의 안색과 음성만으로도 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토정은 또한 풍류객답게 음률에도 정통했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의 둘째아들 산휘(山輝) 역시 지음(知音)의 기재(奇才)였다고 전한다.

율곡이 ‘경연일기’ 선조 11년(1578) 7월조에 이렇게 썼다.

‘아산현감 이지함이 죽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욕심이 없고 인색함을 몰랐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 추위·더위·주림·갈증을 잘 참았다. 어떤 때는 알몸으로 거센 바람을 맞았고, 또는 열흘을 음식 한 번 먹지 않아도 병들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기를 위주로 하니 백성 모두가 그를 흠모했으나 갑자기 이질을 앓아 세상을 버렸다. 나이 62세였다.’

1578년 음력 7월 17일 일세의 풍류기재 토정 이지함이 아산현감 자리에서 세상을 뜨자 수많은 고을 백성이 길을 메우고 마치 부모상을 당한 듯 애통해했다.

아산에 동상과 선정비, 보령에 묘

▲ 아산시 영인면은 토정이 현감 재직 시 아산현 관아 소재지였다. 김옥균 묘에서 바라본 것으로, 멀리 여민루와 영인저수지가 보인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은 토정이 아산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아산현 관아 소재지였다.

영인면사무소 앞뜰에는 1997년 12월 23일에 세운 토정 이지함의 동상이 있고, 그 뒤쪽에는 토정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가 있다. 또 영인초등학교 입구에는 토정 당시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가, 여민루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토정이 이전한 아산향교가 있다.

하지만 토정이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치던 걸인청 건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으나 시골까지 불어닥친 개발 바람에 밀려 사라져버려 이제는 영영 찾아볼 길이 없다. 토정의 묘소는 서해의 낙조가 내려다보이는 충남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에 있다.

토정 이지함, 그는 참으로 우리 풍류사를 빛낸 비상한 기인이재(奇人異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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