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명호고(名號攷)
스님의 속성(俗姓)은 장씨(張氏), 법명은 의순(意洵), 호가 초의(草衣), 자는 중부(中孚)다. 이 이름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우리 차문화사에서 초의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한 차례 새롭게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출가와 법명 의순(意洵)
초의는 몇 살에 출가했을까? 이희풍(李喜豊)은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에서, “조금 자라 벽봉(碧峯) 화상 민성(珉聖)에게 의탁하여 운흥사에서 머리를 깎으니, 이때 나이가 16세였다. 稍長就依碧峯和尙珉聖, 祝髮雲興寺. 時年十六.”고 적었다.
반면 전법제자인 범해(梵海) 각안(覺岸, 1820-1896)은 『동사열전(東師列傳)』 중의 「초의선백전(草衣禪伯傳)」에서, “열 다섯에 갑자기 출가할 뜻이 있어 남평 운흥사로 가서 벽봉 민성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十五忽有出家之志, 投南平雲興寺, 剃染于碧峯敏性.”이라 하여 15세 때 출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앞서 본 초의가 24세 때 지어 다산께 올린 「봉정탁옹선생(奉呈籜翁先生)」에서 “남쪽 땅 주여하며 백 고을 누벼,
아홉 차례 청산의 봄 어긋났구나. [南遊窮百城, 九違靑山春.]”라 한 9년을 출가 햇수로 따진다면, 각안이 적고 있는 15세 출가설이 옳다.
초의는 15세 때 운흥사의 벽봉 민성에게서 머리를 깎고, 몇 해 뒤에 연담 유일의 법제자인 완호(玩虎)에게서 수계하였다.
의순(意洵)은 머리를 깎을 때 벽봉에게서 받은 법명이었다.
벽봉은 그의 사람됨이 뜻이 한결같고 진실했으므로 이 이름을 붙여 주었을 것이다.
의순(意洵)은 문헌에 따라 ‘의순(意恂)’ 혹은 ‘의순(意詢)’등으로 달리 표기된다. 『금당기주』에서는 모두 의순(意洵)으로 적었다.
다산도 일관되게 ‘의순(意洵)’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일지암시고』나 비문 등 문집과 후대 공식 기록에는 대부분 ‘의순(意恂)’으로 나온다. 초의 자신이 남긴 친필에도 두 가지가 다 나온다. 초의의 인장에도 ‘의순(意洵)’과 ‘의순(意恂)’ 두 가지가 다 있다. 심지어 도장은 ‘의순(意洵)’이라 찍어 놓고, 서명은 ‘의순(意恂)’으로 쓴 것도 있다. 『선문사과만어(禪門四科漫語)』에는 달리 ‘의순(意詢)’이라 하였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맞다. 초기 기록에서 일관되게 의순(意洵)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의순(意洵)을 쓰다가 만년에 의순(意恂)으로 바꾼 것이다.
초의(草衣)란 이름의 연원
초의(艸衣)란 호는 수계 시 완호 스님이 내린 이름이다. 그간 초의란 이름의 유래를 두고 여러 설이 있었다.
고려 야운선사(野雲禪師)의 「자경문(自警文)」에서 따왔다는 설과 『사략(史略)』 연원설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초의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로 지목했던 금령(錦舲) 박영보(朴永輔, 1808-1872)의 문집에서 초의란 호의 소종래를 언급한 내용을 새롭게 확인했다. 박영보는 초의의 수제차를 처음 맛본 후 20운에 이르는 장시 「남차병서(南茶幷序)」시를 지어 보냈던 인물이다. 박영보와 초의의 만남과 둘 사이에 오간 차 관련 시문은 별도로 따져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초의’란 말의 연원과 관련된 부분만 살피겠다.
박영보가 먼저 「남차병서」시를 지어 초의에게 인사를 청했다. 초의는 감격하여 「증교(證交)」 2수로 화답했다.
박영보가 여기에 다시 화운하니, 제목이 「초의선사가 내 「남차」시를 받고 「증교(證交)」
2수를 보내왔다[草衣禪師得余南茶詩, 委來證交二首]」이다. 시는 뒤에 따로 읽겠고, 첫째 수 제 2구 아래 달린 협주는 이렇다.
초의는 스님의 스승인 완호 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이태백의 「태백호승가서(太白胡僧歌序)」에, “태백산 중봉에 호승이 있는데 풀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 한번은 싸우는 범이 있었는데, 지팡이로 이를 떼어 놓았다.”고 했다.
草衣師之師玩虎所命號也. 李太白太白胡僧歌序, 太白中峯有胡僧, 衣以草葉. 嘗有鬪虎, 以杖解之.
초의란 이름이 이백의 「태백호승가서(太白胡僧歌序)」의 한 대목에서 취해온 것임을 말했다. 초의란 이름의 소종래가 처음 밝혀진 셈이다. 이백의 「태백호승가서」의 내용은 이렇다.
태백산 중봉의 꼭대기에 몇 백 살인지도 모르는 호승(胡僧)이 있었다. 눈썹은 길이가 몇 치나 되고, 몸에는 비단옷을 걸치지 않고 풀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 항상 『능가경(楞伽經)』을 지니고 있었다. 구름 위 절벽은 아마득히 끊어져 사람의 자취가 이르지 않았다. 한번은 동봉에서 범이 싸운 일이 있었다. 약한 놈이 장차 죽게 되었는데, 중이 지팡이로 떼어 놓았다. 서쪽 못에 독룡이 있어 오래도록 근심꺼리가 되었다. 중이 그릇에 담아 가두었다. 상산의 조수(趙叟)가 지난 해 복령을 채취하러 태백산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우연히 이 중과 만났다. 나를 찾아와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늘 홀로 세상을 떠나 살 뜻이 있었으므로 듣고서 기뻐하여 노래를 지었다.
太白中峰絕頂,有胡僧,不知幾百歲. 眉長數寸,身不制繒帛,衣以草葉. 恒持楞伽經. 雲壁迥絕, 人跡罕到. 嘗東峰有鬥虎,弱者將死,僧杖而解之. 西湫有毒龍,久而爲患,僧器而貯之. 商山趙叟,前年采茯苓,深入太白,偶值此僧, 訪我而說. 予恒有獨往之意,聞而悅之,乃爲歌曰
聞有胡僧在太白 듣자니 호승(胡僧)이 태백산에 있다는데
蘭若去天三百尺 절집은 하늘과 3백척 쯤 떨어졌네.
一持楞伽入中峰 『능가경』 늘 지닌 채 중봉으로 들어가
世人難見但聞鍾 세상사람 볼 수 없고 종소리만 들린다네.
窗邊錫杖解兩虎 창가의 석장(錫杖)으로 두 마리 범 떼어 놓고
床下缽盂藏一龍 침상 아래 바리때에 한 마리 용 가두었네.
草衣不針複不線 초의(草衣)는 바느질로 꿰매지도 않았는데
兩耳垂肩眉覆面 두 귀는 어깨 닿고 눈썹 얼굴 덮었다네.
此僧年幾那得知 이 승려 몇 살인지 어이 알 수 있으리
手種青松今十圍 손수 심은 푸른 솔이 열 아름이 되었다지.
心將流水同清淨 마음은 유수(流水)인양 청정하기 그지없고
身與浮雲無是非 몸은 마치 부운(浮雲)인 듯 시비함 아예 없네.
商山老人已曾識 상산의 노인이 진작에 알았거니
願一見之何由得 한번 보기 원한대도 어이해야 얻을 건가.
山中有僧人不知 산중에 중 있어도 사람들은 모르는데
城裏看山空黛色 성 안에서 산을 보니 부질없이 검푸르네.
풀잎으로 옷 해 입고 『능가경』을 늘 외우며, 유수(流水)처럼 청정하고 부운(浮雲)인양 시비에 초연한 삶을 산다는 신비의 호승. 싸우는 범을 지팡이로 떼어놓고, 독룡을 그릇에 담아 가두는 이적도 행하였다. 그의 풀잎 옷은 바느질도 하지 않아 따로 꿰맨 자국도 없었다. 박영보는 초의 스님의 별호가 바로 이 「태백호승가」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완호(玩虎) 스님은 자신의 법제자들에게 ‘의(衣)’자를 돌림자로 해서 법명을 내려주었다. 호의(縞衣)․초의(草衣)․하의(荷衣)의 ‘삼의(三衣)’는 완호 문하의 삼걸로 꼽혔던 인물들이다. 완호또한 풀이하면 ‘호랑이를 가지고 논다’는 뜻이니, 지팡이로 싸우는 범을 떼어놓았던 태백 호승과 무관치 않다. 범해(梵海) 각안(覺岸, 1820-1896)은 이들 세 사람을 대상으로 「삼의가(三衣歌)」란 고시 장편을 지었다. 자료 제시를 겸하여 세 사람의 이름을 풀이한 중간 대목 몇 구절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赤壁秋夜向南飛 적벽이라 가을 밤에 남쪽 향해 날아가니
翔彼千仞覽德輝 저 천길 위 날아올라 덕의 광휘 살폈다네.
雖處衆緇自不緇 중들 틈에 처해서도 절로 중과 같지 않아
示其不變常白衣 변치 않음 보이려고 늘 흰 옷을 입었다오.[호의]
一生所好與世違 일생에 좋아한 일 세상과는 어긋나니
脫然逾城投佛依 툴툴 털고 성을 넘어 불문에 귀의 했지.
駕風一葦任性去 갈대 잎 배 바람 타고 천성대로 떠나며
披烟採荷徧身幃 안개 헤쳐 연잎 따서 온 몸에 걸쳤다지.[하의]
開花錦城三鄕曲 금성(錦城)의 삼향곡(三鄕曲)에 꽃이 활짝 피어나고
結實塞琴九曲春 새금(塞琴)의 구곡(九曲) 봄에 열매가 맺었구나.
欲避名聲架三椽 명성을 피하고자 초가 삼간 얽어 두고
石田編草遮一身 돌밭에서 풀을 엮어 한 몸을 가리셨네.[초의]
4구절씩 차례대로, 불변의 뜻을 보여 흰옷만을 입은 호의(縞衣), 속세를 떠나 자연에 몸을 숨긴 하의(荷衣), 명성을 피해 돌밭에 띠집 지은 초의(草衣)를 각각 기린 내용이다. 이를 두고 근대 보정(寶鼎) 스님은 「초의진신찬(草衣眞身贊)」에서 ‘삼의안항(三衣雁行)’이라 하여 이들 세 사람이 형제처럼 나란히 우뚝한 자취를 드러냈음을 기린 바 있다.
명성을 피해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 암자를 짓고 숨어 산 초의의 행적은 일견 태백 호승의 그것과도 방불하다. 완호(玩虎)는 순박하고 과묵한 그의 성품을 보고서 호의와 하의에 이어 초의란 이름을 내려주어 세속을 떠난 질박한 삶과 우직한 공부를 주문했던 듯하다.
한편 다산도 초의란 이름을 두고 쓴 글이 있다. 앞서 본 「금당기주」 속에 실린 「초의거사게(草衣居士偈)」와 「제초의선게후(題草衣禪偈後)」가 그것이다. 두 글 모두 문집에는 빠졌다. 차례로 읽어 본다. 먼저 「초의거사게」다.
贋貨苦饒眞寶絶 거짓 재화 너무 많아 참 보배 끊겼나니
包裹諸惡外鮮潔 갖은 악을 포장해서 겉만 아주 깨끗하다.
鴟夷之革出九穴 치이(鴟夷)의 가죽 부대 구혈(九穴)이 나오니
涕洟次濃溲糞血 눈물 콧물 진해져서 오줌 똥과 핏물일세.
錦纏綉帕同心結 비단 두른 수(綉) 장막에 동심결을 맺어두니
何以繢之鸞皇鷩 난황(鸞皇)의 붉은 꿩은 무엇으로 수놓을꼬.
犇犇走走胥閴咽 내달아 달아나니 모두 가만 목 메이고
卽墨之尾油葦爇 즉묵 땅 소 꼬리엔 갈대 묶어 불 질렀네.
抱鼠嘄朴喉欲裂 쥐를 안고 소리치니 목구멍이 찢어질 듯
芼糝苓通勸人啜 씀바귀 나물 국을 남 마시라 권하누나.
靑山回首杳巀嶭 청산에서 돌아보매 아스라이 산은 높아
白雲如絮閑起滅 흰 구름은 솜처럼 한가롭게 피어난다.
采采菅蒯薄言袺 무성한 골풀로 엷게 옷섶 여미고
紉以葛筋防潰決 칡뿌리 노를 꼬아 터짐을 막는다네.
上衣下裳無攸觖 옷옷과 치마에 터진 곳 없다 해도
阿梨那識愁不屑 아리나식(阿梨那識) 근심 겨워 조금도 기쁘잖네.
淸淨法身乃蝓蛻 청정한 법신마저 훌훌 벗어 내던지라.
是則名爲草衣訣 이것을 이름하여 초의결(草衣訣)로 부르리니
茶波羅蜜休分別 차 바라밀 그 경계와 나누어 분별 말라.
입성(入聲) 설(屑)부의 험운(險韻)을 매 구 끝에 넣은 시다. 초의의 시재(詩才)와 선기(禪機)를 잘 드러냈다. 시 속에 많은 고사를 썼다. 사람들은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것을 속에 지녔으면서도 겉만 번드르하게 꾸미기에 바쁘다. 온갖 부귀영화도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사람이 한번 죽어 청산에 묻히고 나면 골풀이 몸을 덮고 칡뿌리가 몸을 얽어 온통 풀잎 옷을 입는다. 하지만 죽은 후에 뉘우친들 무슨 소용인가. 아리나식(阿梨那識)은 불교에서 말하는 팔식(八識)의 하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한다. 자아의 본원 속에 포함된 일체 사물의 씨앗을 가리키는 말이다. 청정한 법신마저 훌훌 내던져서 대자유의 경계를 미리 얻음만 같지 못하다. 이 대자유의 경계를 ‘차바라밀(茶波羅蜜)’이라고 표현한 것은 흥미롭다.
위 게송을 이어 다산은 「제초의선게후(題草衣禪偈後)」란 글을 써 주었다. 역시 『다산시문집』에는 누락되고 없다.
『시경』에서 “비단 옷 입고는 덧옷을 입고, 비단 치마 입으면 덧치마 입네.”라 한 것은 그 무늬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 것이다. 티끌 세상 인간의 내장 안에는 쌓인 것이 아름답지가 않다. 비단 옷으로 덮어 가리고 구슬과 비취로 이를 꾸며도, 나는 그 냄새가 향기롭지 않을 것을 안다. 게다가 석화(石火)가 한 차례 번쩍하면 북망산천으로 돌아가고 말아, 마침내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모두 풀뿌리로 몸을 덮게 된다. 그럴진대 어느 누구 하나 초의(草衣) 아닌 이가 없을 것이다. 어찌하여 유독 의순(意洵)만이 이를 나무라는가? 부처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유가의 법도에 구애됨 없이 운수에 내맡겨, 제멋대로 만물의 위를 소요하고 온 세상 안을 부침한다면, 사람들은 오직 초의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만 볼 터이니, 어찌 영화로운 이름과 이록(利祿)에 능히 얽매이겠는가? 가경(嘉慶) 갑술(1814) 다산.
詩云: ‘衣錦褧衣, 裳錦褧裳.’ 惡其文之以著也. 塵土腸胃, 所貯不芳. 被之以羅綺, 餙之以珠翠. 吾知所聞非薌. 且也石火一閃, 歸于北邙, 至竟賢愚貴賤, 都以草根被體. 則無一而非草衣者也. 奚唯意洵是嗔哉. 不縛於佛律, 不拘於儒法, 任運肆志, 逍遙乎萬物之表, 沈浮乎四瀛之內, 人唯見其草衣褊褼, 而豈榮名祿利之所能繫者哉. 嘉慶甲戌茶山.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누구나 풀 뿌리 옷, 즉 초의(草衣)를 입게 마련이다. 초의란 이름을 가지고 인생의 덧없음과 영명이록(榮名利祿)의 허망함을 일깨웠다. 흙으로 돌아가면 현우귀천(賢愚貴賤)의 분별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죽어 초의를 입는 것을 두고 미망(迷妄)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나무랄 일은 아니다. 차라리 유불(儒佛)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소요만물(逍遙萬物)하고 부침사해(浮沈四海)함이 어떻겠느냐고 화답했다. 초의의 불가적 입장을 유가적 견지에서 슬쩍 비판한 것이다.
정리한다. 초의란 이름은 첫째, 완호 스님의 ‘의(衣)’자 항렬 법제자임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둘째, 이백의 「태백호승가」에 보이는 호승(胡僧)에게서 따와 스님의 질박하고 꾸밈없는 성정에 견준 것이다. 셋째, 누구나 죽어 땅에 묻혀 입게 되는 풀잎 옷으로, 인생의 허무를 벗어던진 명리에 얽매임 없는 대자유의 경계를 환기한다.
중부(中孚)란 자의 의미
중부(中孚)는 초의의 자다. 중부는 잘 알려진대로 『주역』의 괘 이름이다. 초의가 중부란 자를 직접 쓴 가장 이른 글은 「백운첩(白雲帖)」에서다. 「백운첩」은 초의가 27세 나던 1812년 9월 12일에 다산이 제자 윤동(尹峒, 1793-1853) 및 초의와 함께 월출산 아래 백운동에 놀러 갔다 와서 만든 시첩이다. 백운동 13경에 붙여 다산이 시를 짓고, 초의가 다산의 시 일부를 전서(篆書)로 썼다. 여기에 다산의 명에 따라 다시 초의가 백운동과 다산초당을 그림으로 그려 합첩한 것이 「백운첩」이다.
초의는 이 첩에서 자신의 이름을 ‘중부(中孚)’로 적었다. 초의는 당시 다산에게서 『주역』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으므로, 초의에게 중부란 자를 지어준 사람은 바로 다산이었다. 중부란 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중부괘(中孚卦)는 태하손상(兌下巽上)으로 못[兌] 위에 바람[巽]이 있는 형국이다. 6효(爻)를 나란히 세우면 양음(兩陰)이 가운데 있고, 사양(四陽)이 아래 위를 감싼 모습이다. 따라서 안에 부드러움을 머금고 있어 바깥의 강함이 중(中)을 얻는 괘요, 믿음이 돼지나 물고기에게까지 미치는 상이다. 『잡괘전(雜卦傳)』에는 ‘중부는 신의다.[中孚信也]’라 했고,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는 ‘안에서 믿음이 나오는 것을 중부라 한다. 信發于中, 謂之中孚’고 했다. 뜻이 진실하다는 의미인 의순(意洵)의 법명에 꼭 부합한다.
한편 중부란 자는 차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층적 의미를 갖는다. 중부는 이백의 「족질 중부(中孚)가 옥천산의 선인장차를 준 데 답례하여(答族侄中孚贈玉泉仙人掌茶)」란 시에 나오는 승려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백의 원문을 보자.
내가 듣자니 형주의 옥천사는 청계산 여러 봉우리와 가깝다고 한다. 산골짝엔 이따금 종유 동굴이 있다. 굴 속에는 옥샘물이 많이 흐른다. 그 가운데 흰 박쥐가 사는데 크기가 갈가마귀만 하다. 『선경(仙經)』을 살펴보니, 박쥐는 일명 선서(仙鼠)라 한다. 천년이 지난 뒤에는 몸이 눈처럼 희어진다고 한다. 거꾸로 매달려서 산다. 대개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을 마셔서 장생한다. 그 물가에는 여기저기 차 풀이 무리지어 자란다. 가지와 잎이 푸른 옥과 같다. 오직 옥천진공(玉泉眞公)이 늘 채취하여 이를 마셔, 나이가 80여세인데도 낯빛은 복사꽃이나 오얏꽃 같았다. 이 차는 향기가 맑고 맛이 부드러워 다른 것과 다르다. 그래서 능히 늙음을 떨쳐 어린이로 돌아가게 하고, 사람의 장수를 돕는다. 내가 금릉에 놀러갔다가 한 집안 중 중부(中孚)를 만났다. 그가 내게 이 차 수십 조각을 보여주는데, 포개서 쌓은 모양이 손과 같았으므로, 이름하여 선인장차(仙人掌茶)라 하였다. 대개 새로 옥천산에서 나온 것이어서 옛날에도 보지 못한 것이다. 인하여 이를 가져와 주면서 아울러 시를 주어 내게 화답하게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 시를 지었다. 훗날 고승(高僧)과 대은(大隱)들은 선인장차가 중부선자(中孚禪子)와 청련거사 이백에게서 출발했음을 알 것이다.
余聞荊州玉泉寺, 近淸溪諸山. 山洞往往有乳窟. 窟中多玉泉交流. 其中有白蝙蝠, 大如鴉. 按仙經, 蝙蝠一名仙鼠, 千歲之後, 體白如雪. 棲則倒懸. 蓋飮乳水而長生也. 其水邊, 處處有茗草羅生,枝葉如碧玉. 惟玉泉真公常采而飲之. 年八十餘歲, 顏色如桃李. 而此茗清香滑熟,異於他者. 所以能還童振枯,扶人壽也. 余遊金陵, 見宗僧中孚, 示余此數十片, 擧然重疊, 其狀如手, 號爲仙人掌茶. 盖新出乎玉泉之山, 曠古未睹. 因持之見遺兼贈詩, 要余答之. 遂有此作. 後之高僧大隱, 知仙掌茶發乎中孚禪子及靑蓮居士李白也.
常聞玉泉山 일찍이 들으니 옥천산에는
山洞多乳窟 산골짝에 종유굴이 많다고 하네.
仙鼠如白鴉 흰 까마귀 비슷한 박쥐가 있어
倒懸清溪月 시내 달빛 거꾸로 매달려 있네.
茗生此中石 이 가운데 바위에서 차가 나는데
玉泉流不歇 옥천이 쉴새없이 흘러내린다.
根柯灑芳津 그 진액 뿌리 가지 뿌려 적시니
采服潤肌骨 따먹으면 피부에 윤기가 도네.
叢老卷綠葉 묵은 떨기 초록 잎이 말려있는데
枝枝相接連 가지마다 서로 이어 붙어 있구나.
曝成仙人掌 볕에 쬐어 선인장(仙人掌)을 만들어내니
似拍洪崖肩 신선 홍애(洪崖) 어깨를 두들기는 듯.
舉世未見之 온 세상 아무도 본 이 없으니
其名定誰傳 그 이름 참으로 누가 전할까.
宗英乃禪伯 집안의 젊은이 선백(禪伯)이라서
投贈有佳篇 내게 주며 좋은 시도 지어 주었네.
清鏡燭無鹽 맑은 거울 무염(無鹽)을 비춰 보이니
顧慚西子妍 서시(西施)의 어여쁨이 부끄러워라.
朝坐有餘興 아침 나절 앉았자니 남는 흥 있어
長吟播諸天 길게 읊어 세상에 퍼뜨리노라.
중부(中孚)는 속성이 이씨로, 이백의 집안 먼 조카뻘 되는 승려의 이름이다. 중부가 이백에게 옥천산의 종유굴에서 나는 찻잎을 볕에 말려 차로 만들어 선물했다. 조각으로 편을 지은 차덩이 수십 개를 포개 놓은 모양이 꼭 사람 손바닥과 같다 해서 이백은 이 차의 이름을 선인장차(仙人掌茶)라고 붙였다. 이 차의 제법은 이렇다. 오래된 묵은 떨기에 도르르 말린 잎이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 잎을 따서 볕에다 쬐어 말린다. 찻잎이 나는 종유굴 안에는 1천살이 넘어야 희게 변한다는 흰 박쥐들이 산다. 이 박쥐들은 종유굴에서 나는 유수(乳水)를 마셔 이처럼 장수한다. 그러니 그 물의 기운을 받아 자란 찻잎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백은 선인장차의 효험을 ‘환동진고(還童振枯)’라 했다. 비쩍 마른 노인에게 기운을 불어넣고 동자(童子)의 상태로 되돌려 준다는 말이다. 찻잎의 약효는 옥천진공(玉泉眞公)이란 선인이 늘 복용하여 나이 80이 넘어서도 젊은이의 혈색을 유지한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초의의 「동다송(東茶頌)」 제 41구와 42구에 그대로 나온다. “늙음 떨쳐 젊어지는 신통한 효험 빨라, 80 먹은 노인 얼굴 복사꽃인 듯 붉네. 還童振枯神驗速, 八耋顔如夭桃紅”라 한 것이 그것이다. 초의 또한 중부란 승려의 존재를 이백의 시를 통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무염(無鹽)은 제나라 선왕(宣王)의 후비의 이름이다. 그녀는 덕이 있었으나 외모가 몹시 추했다.
다산은 왜 초의에게 중부란 자를 선물했을까? 첫째, 자신이 초의에게 가르치던 『주역』의 중부괘가 지닌 의미가 초의의 덕성과 꼭 부합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못 위에 부는 바람처럼 군자의 온화한 기풍을 지녀 기뻐하고 겸손하며 믿음으로 감싸 안는다는 의미의 중부괘가 초의의 삶 속에서 음미되어 실현되기를 바란 것이다.
둘째, 귀한 차를 이백에게 선물했던 승려의 이름이 중부(中孚)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백은 금릉(金陵)에 놀러 갔다가 중부를 만나 선인장차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금릉은 강진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다산은 이백이 그랬던 것처럼 금릉에서 초의를 만나 차를 받았다. 시의 맥락에 충실하자면, 초의는 초당에서 다산을 모시고 공부를 하면서 차에 새롭게 눈을 떴고, 다산은 혜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드는 과정을 초의에게 알려주어 차를 만들게 했던 듯하다. 그 차를 받고서 이를 예전 중부선자가 이백에게 선인장차를 가져다 준 것에 비겨,
『주역』 중부괘의 의미에 포개어 중부란 자를 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다산 자신과 초의를 통해 강진차가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함의도 있다.
이백이 서문에서 선인장차란 이름이 중부선자와 청련거사 두 사람에 의해 세상에 기억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 것과 맥락이 닿는다.
넷째, 초의란 이름이 이백의 「태백호승가」에서 나온 데 착안하여,
역시 이백의 시로 짝을 맞추고 제다(製茶)의 의미를 보태려는 의도가 있다.
이상 의순과 초의, 중부 등 초의의 명호(名號)와 관련된 유래와 의미를 살폈다. 의순과 초의와 중부는 모두 그의 사람됨과 꼭 맞는 이름이었고, 의미에도 상호 일관성이 있다. 특히 중부는 선인장차를 만들었던 금릉의 승려 이름에서 따온 것이어서 당대 전다박사(煎茶博士)의 호칭까지 있었던 초의에 걸맞는 호칭이 아닐 수 없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전통정원과 그 속의 상징세계 (0) | 2009.07.31 |
---|---|
백년명가_함흥냉면 (0) | 2009.07.30 |
풍류의 향기_토정 이지함 (0) | 2009.07.27 |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14 (0) | 2009.07.25 |
풍류의 향기_원효대사 (0) | 2009.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