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풍류의 향기_양녕대군

醉月 2009. 7. 20. 08:14

양녕대군, 자유를 위해 왕자도 버려 술·미인·명승 즐긴 호걸
천재적 문장가이자 명필… 崇禮門 편액이 친필

▲ 지덕사 뒤 관악산맥 국사봉 기슭의 양녕대군 묘. 부인 수성부부인 김씨와 합장되어 있다.

어느 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평양으로 유람을 떠나기에 앞서서 사사로이는 막내아우인 세종대왕(世宗大王)에게 인사를 하자 임금이 이렇게 당부했다.

“평양은 예부터 색향으로 이름난 곳이라 혹시 형님께서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부디 이번 행차에는 주색을 조심하시고 건강하게 편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어찌 성려를 어지럽힐 수 있으리오. 주상께서는 심려를 놓으소서.”

그리고 길을 떠났는데, 세종대왕이 몰래 평안감사에게 파발마를 띄워 이런 밀지를 내렸다. ‘양녕대군이 평양에 이르거든 대접을 잘 하되 특히 잘 모신 기생에게는 큰 상을 주고 은밀히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평양에 다다른 양녕대군은 평안감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대동강·모란봉·능라도·연광정·부벽루 같은 명승고적을 두루 구경하며 다녔다.

그런데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빈 듯한 느낌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무슨 까닭인고. 아하, 그러면 그렇지! 천하의 풍류남아 양녕대군 가는 곳에 술과 미인이 없으니 명승유람만 가지고서야 어찌 성이 찰 수 있으랴.

하지만 임금과 한 약속이 있으니 드러내놓고 여자타령을 하기도 민망한 노릇이었다. 그때 나타난 절색이 있었으니 곧 평양명기 정향(丁香)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정향에게 빠져 명승고적이며 산천경개는 그만두고 양녕대군은 나날이 쏜살같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운우지락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밤이었다. 양녕대군은 눈물을 흘리며 정표를 간청하는 정향의 치마폭에 이별의 시를 써주었다.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 거침없는 필치였다.

 

평양명기 정향의 치마폭에 써준 사랑의 시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리니
앞으로 어디에서 다시 만나리.
연지곤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
눈썹에 서린 수심 저 거울은 알리라.
달빛은 어이하여 비단베개 엿보며
새벽바람 무슨 일로 휘장을 흔드는고.
다행히도 뜰 앞에 저 향나무 서 있기에
봄뜻에 이끌려 그 가지 하나 꺾었노라. 

 

그리고도 여백이 남아 스스로 흥취를 못이긴 양녕대군은 이런 시도 덧붙였는데, 일필휘지하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훔쳐보며 정향이 야릇한 미소를 흘리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별 길에 향기로운 구름 흩어지고
떠나는 정자 위엔 조각달만 걸렸구나.
가련하다 잠 못 이뤄 뒹구는 밤에
누가 있어 그대 수심 달래어주리.

 

양녕대군이 떠나기가 무섭게 평안감사는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이 귀중한 증거물인 치마폭을 대궐로 급히 올려 보냈다. 세종대왕이 유람 길에서 돌아온 양녕대군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이렇게 물었다.

“형님. 듣기에 이번 길에는 주색을 삼가셨다지요?”
“아암! 냄새도 못 맡고 구경도 못했소이다.”
“참으로 적적하셨겠군요?”

세종대왕이 빙긋 웃으며 다시 묻자 속으론 뜨끔했지만 양녕대군은 이렇게 얼버무렸다.

“아, 뭐 별로… 그랬지요.”

그때였다. 병풍 뒤에서 풍악에 맞춰 이런 노래가 들려왔다.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리니

앞으로 어디에서 다시 만나리.

연지곤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

 

아니, 이럴 수가! 양녕대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노래는 내가 평양에서 정향의 치마폭에 써준 바로 그 시가 아닌가.

그러자 세종대왕이 웃으면서 감춰두었던 문제의 치마를 보여주며 물었다.

“형님. 이건 뭐지요?”

얼굴이 붉어진 양녕대군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신 뒤 이렇게 둘러댔다.

“아, 뭐 그런 것이 다 있었구먼!”

그리고 두 형제는 마주보며 큰소리로 한바탕 웃어댔다. 결국 세종대왕의 배려로 정향은 양녕대군의 소실이 되었다.

 

아우 세종에게 왕위 넘겨주려 일부러 미친짓

▲ 양녕대군의 묘소와 사당 지덕사 전경.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장승백이에 있다. ▲ 양녕대군의 친필인 소동파의 '후적벽부' 8곡 병풍의 목각판. 지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동안 양녕대군은 어려서부터 놀기만 좋아하여 글공부를 게을리했고, 장성해서는 주색에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는 사실 당대의 명필이요, 문장가였으며, 학문이 깊은 천재였다. 단지 그런 사실을 가슴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기에 부왕인 태종도 잘 몰랐을 뿐이었다.

양녕대군은 자유와 왕좌를 맞바꾼 우리 역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인물이요, 우리나라 풍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호걸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왕위를 두고 부자 간, 형제 간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골육상쟁은 비일비재했지만 임금 자리가 거추장스럽다고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양녕대군은 부왕의 뜻이 셋째 왕자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있음을 눈치 채고 일부러 미친 척하여 절대 권력이 보장된 세자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자유와 풍류를 찾아 대궐의 높은 담을 훌쩍 타넘었다. 그런 까닭에 왕조사의 국외자로서 주유천하로 일관했건만, 왕관과 자유를 맞바꾼 그의 통쾌한 용기와 풍류의 일생은 후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은 것이다.

국보 제1호 남대문의 본래 이름은 숭례문인데, 편액의 ‘崇禮門’ 세 글자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다. 또한 서울 동작구 상도4동 221번지, 관악산맥이 한강변으로 뻗어 내린 국사봉 기슭의 장승백이약수터에 그의 묘소와 사당인 지덕사(至德祠)가 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 한글을 만들고,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명군 세종대왕이 있기에는 큰형님 양녕대군이 세자위를 미련없이 넘겨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양녕대군의 이름은 이제, 자는 후백(厚伯)으로 태조 3년(1394)에 뒷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李芳遠)의 맏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방원이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은 4년 뒤. 다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 정종(定宗)마저 쫓아내고 스스로 왕좌에 오른 것은 6년 뒤인 1400년 11월이었다.

그때 태종은 34세, 양녕대군은 7세였다. 양녕대군은 태종 4년(1404) 11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종은 왕비 원경왕후 민씨에게서 4남 4녀를 두었고, 많은 후궁을 거느리며 8남 13녀를 두었으니 자식이 모두 12남 17녀, 29명이나 되었다.

그런 부왕을 닮았는지 양녕대군 또한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격이 호탕해져 글공부보다는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고 즐기게 되었다.

 

양녕대군, 이태백도 울다 갈 호방한 삶
미모의 여인 '어리'와의 부적절한 사랑… 25명의 자녀 남겨

< ▲ 자유와 왕위를 바꾼 풍류호걸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 입구.

양녕대군이 세자위에서 폐출된 이유로는 똑똑하고 성실한 막내아우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했다는 설과 어리(於里)라는 미인 때문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어쨌거나 부왕의 눈밖에 밀려났다는 사실에는 다름이 없다.

양녕대군은 14세 때에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어른이 되었지만 몰래 대궐을 빠져나가 사냥과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시중의 건달패와 기생들까지 궁중으로 끌어들여 술판을 벌였다. 그러니 부왕의 귀에 보고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 양녕대군이 부왕과 중신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둘째 효령대군(孝寧大君)은 더욱 근신한 채 하루 종일 글공부에 열심이었다. 혹시 형이 쫓겨나면 세자 자리는 내 차지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양녕대군이 그런 효령대군의 속셈을 간파하고 여러 차례 면박을 주었다.

형의 뜻을 알아챈 효령대군이 마침내 미련을 버리고 그의 뒤를 따라 세자위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효령대군도 인간인지라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절에 찾아가 분을 못 이겨 온종일 북을 치니 북 가죽이 찢어져버렸다.

그래서 ‘효령대군 북 치듯 한다’는 속말이 생겼다고 전한다.

 

가인박명 어리와의 비극적 사랑

어리란 여자는 양녕대군이 소문만 듣고도 선물을 보낼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다. 어리는 그때 지중추부사 곽정의 첩이었다. 태종 17년(1417) 어리가 서울 친척집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녕대군은 좋은 기회라고 여겨 그 친척을 통해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어리는 이미 남의 부인인지라 그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면서 돌려보냈다.

 

몸과 마음이 온통 달아오른 양녕대군은 말을 달려 그녀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찾아가 다짜고짜로 말에 태워 동궁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이 노발대발했다. 세자의 측근은 모조리 엄벌에 처하는 한편, 어리도 직접 불러 문초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죄가 없었다. 태종은 다시는 세자를 만나지 말라고 한 뒤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리에 대한 사랑으로 미칠 지경이 된 양녕대군은 그 뒤에도 부왕 몰래 어리를 만나 마침내 아이까지 낳게 했다.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한 태종은 양녕대군의 장인을 나주로, 세자를 두둔하던 영의정 황희(黃喜)는 남원으로 귀양 보내고, 세자빈은 친정으로 내쫓았으며, 동궁의 문지기와 내시들은 모조리 목을 쳤다.

 

참을 수 없게 된 양녕대군이 부왕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부왕께서는 많은 후궁을 두고, 또 여자들을 무시로 궁에 출입시키면서 왜 세자궁에 여자를 들이는 것은 금하십니까?’ 태종은 그 편지를 읽고 분기탱천하여 세자를 갈아 치울 결심을 굳혔다. 그는 중신들을 불러들여 세자폐출을 결의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니 1418년 6월이었다.

 

양녕대군은 세자위에서 쫓겨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죄인이 되어 경기도 광주로, 다시 이천으로 유배당했다. 어리를 만나게 해달라는 청이 거부당하자 양녕대군은 지키는 군사들 몰래 담을 타넘어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해 8월에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부왕 태종과 아우 세종은 걱정이 태산 같아서, ‘양녕을 찾아오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했다. 군졸들이 어리의 집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고, 그 사이에 어리는 강압에 못 이겨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비관하며 스스로 목매 죽어버렸다. 양녕은 아차산 바위틈에서 발견되어 대궐로 끌려왔다.

 

태종과 양녕대군 부자 간의 갈등은 세종 4년(1422) 태종이 64세로 세상을 뜨면서 막을 내렸다. 그때 양녕대군의 나이 29세였다.

그러나 양녕대군 3형제의 우애는 매우 두터워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예나 이제나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아첨꾼과 기회주의자들은 있게 마련이어서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 허물까지 들춰내 귀양을 보내자느니 죽여야 한다느니 참소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마다 세종은 이런 말로 과잉충성자들의 입방아에 쐐기를 박았다.

 

“원래 이 자리는 양녕대군이 앉을 자리가 아닌가. 한갓 민간의 필부라도 형제 간의 잘못은 감춰주고 좋은 점은 추켜주는 것이 도리요, 불행히도 죄를 지으면 하다못해 애걸도 하고 뇌물이라도 써서 모면토록 하는 게 형제 간의 의리며 인정이거늘, 하물며 나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민간의 필부만도 못하게 형님도 도와주지 말라는 말인가?”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한편,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하여 자주 절을 찾고 불공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냥길에서 돌아오던 양녕대군이 꿩·노루·토끼 따위를 잡아 효령대군이 머물고 있는 양주 회암사에서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였다.

“형님! 살생을 금하는 불전에서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걱정 없으니 가서 염불이나 외라구.”
“…?”
“안 그런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 될 터인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허허허허!”

이처럼 양녕대군은 세상을 거침없고 호탕하게 살았다.

1450년 세종대왕이 재위 32년 만에 54세로 세상을 떴을 때 양녕대군은 57세였다. 이어서 즉위한 문종이 병약하여 2년 3개월 만인 1452년 5월에 39세 한창 나이로 죽고 겨우 12세의 어린 단종이 뒤를 이었다. 조정에는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불었다.

1453년 10월에 야심만만하던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이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충신을 무참히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데 이어, 다시 2년 뒤 6월에는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니 그가 곧 세조이다. 이때 세조의 백부 양녕대군은 62세로 왕실 종친 가운데 가장 높은 어른이었다.

 

▲ 양녕대군 묘비.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난 것을 근래에 다시 붙여 세웠다.

자유를 위해 미련 없이 왕좌를 버렸던 일세의 풍류호걸 양녕대군은 세조 8년(1462) 음력 9월 6일에 69세를 일기로 천수를 마쳤다. 그는 정실에게서 3남 4녀, 후실에게서 7남 11녀, 모두 10남 15녀 25명의 자손을 두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도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임종시 그는 자녀들에게 “내가 죽으면 호화로운 장례를 치르지 말고 묘비도 상석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다.

꾸밈없는 천성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다간 양녕대군은 지금 서울 동작구 상도4동 221번지에 잠들어 있다. 강정공(剛靖公) 양녕대군과 한때 세자빈이었던 수성부부인 김씨 부부의 합장묘 앞에 있는 묘비는 1915년에 새로 세운 것이고, 본래의 비석은 1910년 8월 28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전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져 두 동강으로 깨져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서 전해오는 양녕대군의 필적은 앞서 말한 숭례문 편액과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 8곡 병풍 목각판이 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양녕대군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양녕은 젊어서부터 글을 잘했으나 세종이 덕이 있음을 알고 겉으로 글을 알지 못하는 척하면서 미친 듯 스스로 방탕한 행동을 했으므로 위에서도 그가 글 잘하는 줄을 몰랐다. 늘그막에 양녕이 어떤 중에게 써준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산허리에 둘린 안개로 아침밥을 지어먹고

밤에는 댕댕이덩굴에 걸린 달빛으로 등불을 삼네

외로이 바위에 누워 잠자니 마치 한층 탑과 같구나.

아무리 글 잘하는 문장가로도 이보다 더 잘 짓지는 못하리라. 양녕이 비록 덕을 잃어 폐세자는 되었지만 미친 척하고 자취를 감추어 호방하게 지낸 일은 실로 태백(泰伯 : 주문왕의 삼촌)의 행동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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