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정민_차문화사_05

醉月 2009. 7. 19. 07:53

아암 혜장의 차시

새로운 자료의 잇단 발굴과 소개로 우리 차문화사의 콘텐츠가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아암(兒菴) 혜장(惠藏, 1772-1811)은 다산이 「걸명시(乞茗詩)」와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보내며 차를 청했던 학승이었다. 정작 그의 문집인 『아암집』에는 차에 관한 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 이번에 『연파잉고(蓮坡剩稿)』란 혜장의 다른 시집이 담정(藫庭) 김려(金鑢, 1766-1821)가 엮은 『담정총서(藫庭叢書)』 속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아암집』에 누락된 시 58수가 실려 있다. 다산과 관련된 시가 적지 않고, 무엇보다 그의 차생활을 살필 수 있는 차시 몇 수가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최근 필자는 다산이 혜장에게 준 시문과, 혜장이 다산에게 준 편지를 모아 다산과 아들 정학연이 각각 친필로 써서 엮은 두 개의 『견월첩(見月帖)』을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도 차와 관련된 편지 한 통이 실려 있다.

혜장스님이 거주하던 남도의 작은절 백련사 


다산과 혜장의 교유시

다산과 혜장의 교유는 앞서 다산의 걸명(乞茗) 시문을 검토하면서 논한 바 있다. 다산이 혜장에게 보낸 걸명시와 「걸명소(乞茗疏)」도 앞에서 꼼꼼히 읽었다. 새로 공개된 『연파잉고』에는 다산에게 준 혜장의 시가 11편이나 새롭게 실려 있어 둘 사이의 교유상을 더욱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다산이 아암을 찾아갔을 때 아암은 한 나절 그와 얘기를 나누고서도 그가 다산인 줄을 몰랐다. 하지만 돌아가는 다산을 뒤쫓아 가 붙들어 하루 밤을 함께 묵은 뒤로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시를 주고 받으며 왕래하였다.
시를 한 수 읽어 보자. 제목은 「탁옹이 돌아간 뒤 시를 몹시 부지런히 요구하므로 또 한 편을 보낸다(籜翁歸後, 索詩甚勤, 又寄一篇)」이다. 탁옹은 다산의 별호다.

深嗟肉眼不知君 육안으로 그대를 못 알아봄 탄식하니
山斗高名耳但聞 태산북두 높은 명성 다만 귀로 들었었네.
佛地今無龍象會 불지(佛地)에는 이제 와 용상회(龍象會)가 없느니
宮池舊是鳳凰羣 궁궐 연못 예전엔 봉황의 무리셨네.
孤蹤遠抵金陵海 외론 자취 멀리 이곳 금릉 바다 이르시매
一夢長歸漢水雲 꿈 속에선 언제나 한수(漢水) 구름 돌아가리.
方外交情還爛漫 방외의 우정이 다시금 난만하니
詩中戒語正殷勤 시 속의 경계의 말 참으로 은근하다.

자신이 첫눈에 다산을 알아보지 못했던 일을 부끄러워하며, 둘 사이 방외의 교정(交情)을 기꺼워한 내용이다. 태산북두와 같은 명성으로 대궐의 봉황 같은 존재였던 다산이 멀리 강진 바닷가로 귀양 와서 외로이 지내는 슬픔을 위로했다. 다산은 걸핏하면 혜장에게 시를 지어 보낼 것을 요구했던 모양이다. 다음 시는 다산이 원래 혜장에게 보낸 시다. 『다산시문집』에는 누락되고 없다.

長日藜牀對竹君 긴 날을 평상에서 대나무와 마주하니
六時鐘磬杳難聞 여섯 때의 종경 소리 멀어서 들리잖네.
由旬地近堪乘興 유순지(由旬地) 가까워서 흥 나면 갈만 하고
兜率天高奈絶羣 도솔천(兜率天) 높다지만 어이 닿지 못하리오.
藥塢細沾缾裡水 약초 언덕 조금씩 병 속 물로 적시다가
林壇徐放杖頭雲 임단(林壇)에서 지팡이 끝 구름 더니 놓아주네.
情知結夏嚴持律 하안거(夏安居)라 계율을 엄히 지님 아노니
聯綴瓊琚也自勤 경거(瓊琚)를 줄줄이 뀀 부지런히 하시오.

때마침 혜장이 하안거에 들어 계율을 지키느라 바깥 걸음을 하지 못하자, 그를 만나지 못해 서운한 마음을 이렇게 노래해서 보냈다. 절집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멀어 들리지 않는다고 한 데서도 혜장을 향한 그리움이 애틋하다. 8구에서는 시작(詩作)을 부지런히 하라고 했고, 위 시의 8구에서 혜장은 고마운 뜻을 표했다.
다시 혜장이 다산에게 준 시 「차운하여 탁옹에게 드리다(次韻呈籜翁)」를 읽어 본다.

大賢久轉蓬 대현(大賢)께서 오래도록 불우하시니
令人長歎息 사람에게 긴 탄식 하게 하누나.
雖爲江海士 비록에 강해(江海)의 선비 되셔도
盛名終不極 성대한 이름만은 끝간 데 없네.
翰墨今蕭條 한묵(翰墨)이야 이제와 쓸쓸하지만
高才雄一國 높은 재주 한 나라의 영웅이라네.
雅操凌霜雪 맑은 절조 서리 눈에 끄떡도 않고
佳句兼香色 좋은 싯귀 향과 색을 아울렀구려.
可但文章美 어이 다만 문장만 아름다울까
經術素所熟 경술(經術)이야 평소에 익힌 것일세.
南來少塵事 남쪽에 와 세상 일 많지가 않아
一身寄硯北 한 몸을 글 쓰는 데 부치셨다네.
中酒忘寒瘦 술 취해 춥고 여윔 모두 다 잊고
題詩寫肝臆 시를 지어 속 마음을 펴보이셨지.
得喪已無心 얻고 잃음 어느새 무심하거니
外物敢相逼 외물이 어이 감히 핍박하리오.
世路險羊腸 세상 길 험하기 양장(羊腸)과 같아
知白竟守黑 명백히 알면서도 가만 지켰네.
嗟我不自立 아아! 나는 혼자서 서지 못하니
如鳥未奮翼 아직 날지 못하는 새와 같아라.
香臺未進步 향대(香臺)는 여태도 진보 없으니
何當呑栗棘 어이해 밤 가시를 삼키겠는가.
成人在勸獎 사람 됨은 권면함에 달린 것이니
只待吹噓力 불어주는 힘을 다만 기다리노라.

다산의 불우를 깊이 탄식하며, 우뚝한 문장과 경술을 흠모했다. 자신은 혼자서는 설 수 없는 날지 못하는 새와 같다며, 자신을 북돋워 잘 권장하여 줄 것을 부탁했다. 두 사람은 이렇듯 애틋한 마음을 시로 나누었다.

혜장의 걸명(乞茗) 답시

다산이 혜장과 마음을 나눈 뒤, 대뜸 혜장에게 걸명시를 보내 차를 청했던 것은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혜장의 답장이 『아암집』에 없는데, 이번 『연파잉고』 속에 답시가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공개된 『견월첩』에 실린 혜장의 편지 한통도 다산의 걸명시에 대한 답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차례로 살펴보자. 먼저 『견월첩』에 실린 「답동천(答東泉)」이다.

아껴 돌아보심이 과분한데, 편지로 또 안부를 물으시고 필묵까지 내리시니, 보배로와 아껴 감상할만 합니다. 지극한 감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전처럼 게으르고 제멋대로인지라 두터운 뜻에 부응할 것이 없습니다. 늦물 차는 벌써 쇠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덖어 말리기가 잘 되면 삼가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左顧旣踰所望, 惠牘又蒙存向, 兼賜筆墨, 珍瑰可玩. 不勝感謝之至. 藏懶散如昨, 無以副厚意也. 晩茗恐已老蒼, 但其焙曬如佳, 謹玆奉獻也. 不備.

다산이 1805년 4월에 혜장에게 보낸 「혜장상인에게 차를 청하며 부치다(寄贈惠藏上人乞茗)」와 편지를 받고 답장으로 쓴 편지다. 다산은 백련사 서편 석름봉(石廩峯)에서 좋은 차가 난다는 사실을 적은 뒤, 배쇄(焙曬)를 법도에 따라 해서 우려냈을 때 빛깔이 해맑게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혜장은 답장에서 이미 4월도 지나 5월이 가까워 찻잎이 쇠어 차를 따기에 제철이 아님을 말하고, 그렇지만 정성껏 덖어서 볕에 잘 말려 괜찮은 차가 만들어지면 받들어 올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제자 색성(賾性)이 다산을 위해 차를 드린 것을 알게 된 혜장은 다산시의 운을 차운해서 다음과 같은 답시를 보냈다. 제목은 「탁옹께서 내게 시를 보내시어 좋은 차를 구하셨다. 마침 색성 상인이 먼저 드렸으므로 다만 그 시에 화답만 하고 차는 함께 보내지 않는다(籜翁貽余詩, 求得佳茗. 適賾上人先獻之, 只和其詩, 不副以茗)」이다.

登頓層峯頂 층봉의 꼭대기로 간신히 올라
薄採天中茗 천중(天中)의 찻잎을 조금 따왔지.
聞諸採茶人 차 따는 사람에게 얘기 들으니
最貴竹裡挺 대숲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此味世所稀 이 맛은 세상에 드문 것인데
飮時休敎冷 마실 때 차갑게 하면 안 되네.
石花何足比 석화(石花)를 어이 족히 이에 견줄까
明月亦難竝 명월도 나란히 서기 어렵네.
去疾在須臾 질병을 낫게 함은 잠깐 사이고
豈愁眠不醒 잠들어 깨지 못함 근심 않누나.
淸宵汲銀缾 맑은 밤 은병에 물을 길어서
長日䰞石鼎 대낮에 돌 솥에다 삶아낸다네.
我無苦海航 고해(苦海)에서 배 저을 일 내야 없으니
沈淪詎可拯 가라앉음 어이해 건질 수 있나.
賾也有分施 색성이 나누어 드리었으니
亦足助淸瀅 또한 족히 맑게 함에 도움 되시리.

층봉의 꼭대기는 석름봉 정상을 말하는 것일 테고, 2구의 ‘천중명(天中茗)’은 햇볕에 노출된 상태의 차나무를 말한다. 혜장은 다산의 말을 듣고 석름봉으로 차를 따러 갔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산 꼭대기에서는 찻잎을 충분하게 딸 수가 없었다. 찻잎을 채취하는 사람을 만나 묻고 나서야 대숲 속에서 난 차가 가장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서 차는 차게 마시면 안 되고, 그 효능은 질병을 낫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여 잠을 가시게 해준다는 내용을 적었다. 차 끓이는 방법도 설명했다. 한밤중에 은병(銀缾)에 물을 떠와서 하루 밤 재웠다가 낮 시간에 돌솥에다 넣고 끓인다. 이 시로 볼 때, 혜장은 다산의 부탁 이전에는 따로 차를 따서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고, 다산의 부탁과 다산이 일러준 방법에 따라 차를 채취했던 듯하다.
이 시를 받고 다산은 즉시 「혜장이 나를 위해 차를 만들어 놓고, 마침 그 문도인 색성이 내게 차를 주자 마침내 그만두고 주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하는 글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앞의 운을 쓴다(藏旣爲余製茶, 適其徒賾性有贈, 遂止不予. 聊致怨詞, 以徼卒惠. 用前韻).」라는 시를 지어 보내, 제자의 마음 씀은 후한데 스승의 예법은 매정하기 그지 없다며, 그러지 말고 만들어 둔 차를 마저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보냈다.
혜장의 이 시는 다산의 걸명시에 대한 답시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된다. 아울러 차에 대한 혜장의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차 중에서 대숲에서 나는 차가 가장 좋다고 하여 죽로차(竹露茶)의 우수성을 강조한 점이다. 둘째, 병을 낫우고 잠을 적게 하는 차의 치병과 각성 효과에 대해 뚜렷히 인식했다. 셋째, 차를 차게 마시면 안 된다고 한 것은 마시는 방법을 말한 내용이다. 넷째, 밤중에 은병에 물을 길어, 낮에 돌 솥에다 차를 끓인다 하여, 취수(取水)와 전다(煎茶)에 필요한 다구(茶具)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있었다.

혜장의 차시

『연파잉고』에는 이밖에 혜장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는 몇 수의 시가 실려 있다. 차례로 살펴본다. 먼저 「진일(盡日)」이란 작품이다.

幽棲盡日閉松門 사는 곳 온 종일 송문(松門)을 닫아 거니
石泉依然栗里邨 돌샘은 변함없는 율리(栗里)의 마을일세.
一塢雲中忘甲子 온 언덕 구름 속에 세월을 다 잊었고
兩函經上度朝昏 두 상자의 경전 위로 아침 저녁 지나간다.
竹間茶葉將舒舌 대숲 사이 차 잎은 장차 혀를 펴려하고
墻外梅枝已斷魂 울 밖의 매화가지 이미 애를 끊누나.
林下邇來成寂寞 숲 아래 가까이 와 적막함을 이루니
禽啇志操有誰論 새가 지조 있음을 뉘 있어 논하리오.

소나무로 얽어 세운 사립문은 온종일 닫혀 있다. 돌샘에서 퐁퐁 샘물이 솟는다. 언덕은 늘 구름에 잠겨 책력(冊曆)을 잊었다.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책상 위에 얹힌 두 상자의 경서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읽는 일 뿐이다. 5구에서 대숲 사이에 찻잎이 장차 혀를 펴려 한다고 했다. 매화 시절이니 일창일기의 작설이 이제 막 그 여린 혀를 펼칠 때다.
다음 시는 「가리포 절제 김종환 공에게 주다(贈加里浦節制金公宗煥)」란 작품이다.

旅館相逢破寂廖 여관에서 서로 만나 적료함 깨뜨리고
繫舟灘石共逍遙 여울 바위 배를 매고 함께 소요 했었네.
秋深古島山容瘦 가을 깊은 옛 섬에 산 모습 수척하고
風積平湖水勢饒 바람 많은 평호에는 물의 형세 넉넉하다.
已具茶湯遲半日 차탕(茶湯)을 갖춰 놓고 반 나절을 더디 놀다
更將燈燭話中宵 다시금 등촉 밝혀 한밤까지 얘기하네.
殘經見解元無實 잔경(殘經) 대한 견해는 애초에 실이 없어
慚愧多年但問橋 여러 해를 가는 길만 묻고 있음 부끄럽다.

가리포 첨사 김종환과 만나 포구의 가을 풍광을 바라보며 노닌 하루 일을 적은 내용이다. 5구에서 다탕(茶湯)을 갖춰 놓고 반나절을 더디 지나보낸 일을 말했다. 종일 고금도의 가을 산 풍경과 평호의 넘실대는 물을 보면서, 차도구를 갖춰놓고 잔경(殘經)에 대한 해석을 놓고 긴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차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우려내고 하는 동안 해는 어느새 기울어 깊은 밤중이 되었다. 두 사람은 어쩌면 끝도 없을 경전 이야기로 이렇게 또 밤을 지새울 눈치다.
다음은 「장춘동 잡흥. 이사군 태승에게 드림(長春洞雜興呈李使君台升十二首)」12수 중 제 8수다. 이태승은 혜장이 다산과 함께 가장 가까이 지냈던 술친구였다. 혜장의 시명(詩名)이 서울까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태승 때문이었고, 혜장이 술로 일찍 세상을 뜬 것도 그의 탓이 없지 않았다.

金塘澗勢自瀠洄 금당포 물길 형세 감돌아 흘러드니
芳草垂楊一洞開 수양버들 풀 욱은 곳 골짝 하나 열렸구나.
春入雲山長不出 봄이 온 구름 산서 나올 줄을 모르는데
水流人間定無回 인간으로 흐르는 물 돌아옴이 없구나.
行持硯匣時濡筆 길 떠나도 연갑(硯匣) 지녀 때로 붓을 적셨고
坐擁茶爐試畵灰 차 화로 끼고 앉아 재에 획을 긋곤 했네.
昔與琴湖游此岸 예전에 금호(琴湖)와 함께 이 기슭에 놀러와
幾年玄觀賞桃來 몇 년을 현관(玄觀)으로 도화 감상 왔었지.

6구에 ‘다로(茶爐)’가 나온다. 장춘동은 해남 대흥사 어귀의 골짝이다. 바랑에 벼루갑을 넣어두고 틈틈이 시를 쓰고, 앉아서는 차화로를 끼고 앉아, 화로의 재 위에다 획을 긋는다.
다시 「탁옹의 곤괘 육효의 시운에 삼가 화운하다(奉和籜翁坤卦六爻韻)」를 읽는다.

嶮巇人世上 험난한 인간의 세상 위에는
步步凜如霜 걸음마다 서리처럼 오싹하구나.
置屋成三逕 집 지어 세 갈래 길 만들어 놓고
安身著一方 몸 편안히 한 귀퉁이 부치어 있네.
碧牕看古蹟 푸른 창엔 옛 유적 바라보이고
幽巷詠新章 깊은 골목 새 노래를 읊조리노라.
貝葉曾盈篋 패엽 불경 광주리를 가득 채웠고
茶芽更貯囊 찻잎은 주머니에 담아 두었지.
烟霞隨杖屨 안개 노을 내 걸음을 뒤따라오고
風月滿衣裳 바람과 달 옷 위로 가득하구나.
卽此爲身計 이것으로 몸 위하는 계책 삼으니
何須羨綺黃 어이해 누런 비단 부러워하리.

7.8구에 패엽에 쓴 불경은 광주리에 가득하고, 찻잎을 다시금 주머니에 담아 두었다는 언급이 있다. 불경을 읽다가 차를 달여 마시고, 안개 노을과 바람과 달을 벗삼아 지내는 무욕의 삶을 노래했다. 찻잎을 주머니에 담아 두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혜장의 차는 떡차가 아닌 산차였던 듯 하다.
「산거잡흥(山居雜興)」 20수의 제 2수와 제 14수에도 차를 노래한 내용이 보인다.

一簾山色靜中鮮 주렴 가득 산빛이 고요 속에 신선한데
碧樹丹霞滿目姸 푸른 나무 붉은 노을 눈에 가득 곱구나.
叮囑沙彌須䰞茗 사미를 시켜서 차를 끓여내게 하니
枕頭原有地漿泉 머리맡에 원래부터 지장(地漿) 샘이 있다네.

澹靄殘陽照上方 엷은 노을 남은 볕이 절집을 비추이니
半含紅色半含黃 반쯤은 붉은 빛에 반쯤은 누런 빛.
淸茶一椀唯吾分 맑은 차 한 사발이 다만 내 분수거니
羶臭人間盡日忙 누린내 나는 세상 온 종일 바쁘구나.

암자 위쪽으로 지장천(地漿泉)이 있다고 했으니, 좋은 샘물을 길어와 사미승을 시켜 차를 달여 마시는 전아한 운치를 말했다. 또 제 14수에서는 맑은 차 한 사발이 다만 내 분수라고 하여, 붉은 노을 지는 해를 보며 한 사발 맑은 차로 하루를 마무리 짓는 조촐한 삶을 예찬했다.
마지막으로 『아암집』에 수록된 「화중봉낙은사(和中峰樂隱詞)」 16수 연작 중 제 3수를 소개한다.

登嶺採茶 산마루 올라가 차를 따고서
引水灌花 냇물을 끌어다 꽃에 물주네.
忽回首山日已斜 문득 고개 돌려보면 해는 뉘엿해.
幽菴出磬 그윽한 암자엔 풍경이 울고
古樹有鴉 해묵은 나무엔 까마귀 있네.
喜如此閒如此樂如此嘉 기쁘다 이처럼 한가롭고 즐겁고 아름다움이.

산마루 비탈에서 햇차를 딴다. 대통으로 물을 끌어와 꽃밭에 물을 준다. 그러다 보면 하루해가 또 다 간다. 암자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 잘 준비를 마치고 고목 나무 위에 모여 앉은 갈가마귀 떼. 모든 것이 넉넉하고 아름답다. 그는 이런 삶이 참 한가롭고 기쁘고 즐겁다고 담백하게 말한다. 다산을 통해 차를 깊이 알게 된 이후, 철 따라 차를 따서 만드는 것이 혜장의 일상이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아암의 친필 서첩으로 알려진 『아암필법(兒巖筆法)』에는 ‘필상다조(筆床茶竈)’니 ‘명완로향(茗椀爐香)’이니 하는 차관련 글귀가 적혀있다. 다만 글씨의 내용이 대부분 기존에 있던 글귀의 집구거나, 당나라 왕유(王維)와 조선 중기 양경우(梁慶遇)의 한시 등 다른 작가의 작품들을 옮겨 적은 것이 뒤섞여 있다. 글씨야 혜장의 것이라 하더라도 시 자체는 혜장의 것이 아니다.
이상 새로 공개된 『연파잉고』를 중심으로, 혜장의 알려지지 않았던 차시를 소개하고 감상했다. 이들 차시는 채다와 제다, 그리고 차 끓이고 마시는 일련의 과정을 생활 속에 녹여 즐길 줄 알았던 혜장의 차생활을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대숲 차를 으뜸으로 꼽는다든지, 차게 마시면 안된다거나, 차의 치병과 각성 효과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점, 은병과 석정(石鼎) 등의 다구를 구비하고 있었고, 샘물을 하루 밤 재워 차를 끓인다거나, 차를 덖어 볕에 말려 주머니 속에 담아 두고 마시는 차 보관 방법까지 알려주고 있는 점 등은 이번에 전혀 새롭게 확인된 사실이다.

다산과 혜장이 걷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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