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풍류의 향기_낙랑, 평강공주

醉月 2009. 7. 18. 11:32

사랑 위해 목숨 던진 '로미오와 줄리엣'

                         ▲ 자명고의 한장면

 

낙랑공주도 호동왕자를 따라 이 강을 건너 고구려의 왕성으로 시집왔을 것이다.

낙랑공주(樂浪公主)는 남편인 호동왕자(好童王子)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친정의 나라인 낙랑국을 배반하고 부왕의 손에 죽임을 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전해오지 않는다.

낙랑공주란 공식적 호칭이 아니라 그저 낙랑국왕의 딸이란 뜻이다. 다만 성은 부왕의 이름이 최리(崔理)라고 사서에 나오니 최씨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사랑하는 낭군을 위해 본국도, 부왕도 배신하고 마침내 죽음을 택한 비련의 여주인공 낙랑공주.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긴 일에 고귀한 목숨을 기꺼이 바쳤던 용감한 풍류여걸 낙랑공주의 삶은 짧지만 아름다웠다.

고구려 제3대 임금 대무신왕의 맏아들 호동왕자가 자살한 것은 대무신왕 15년(서기 32) 음력 11월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빼어나게 용모가 수려했고, 자라면서는 성품이 착한 데다가, 고구려 사내라면 누구야 갖춰야만 할 미덕인 무술과 담력까지 뛰어나 부왕과 모후의 사랑은 물론 나라 안의 만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던 왕자 호동은 어찌하여 불과 15세 아까운 나이에 귀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렸을까.

그 비극은 바로 6개월 전인 그해 음력 4월 어느 날 호동이 고구려의 수도 위나암성을 떠나 먼 남쪽 낙랑국으로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에 호동은 위나암성의 남문을 벗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느 사냥길처럼 경호무사 서너 명만 거느리고 단출하게 떠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군사적 임무를 띤 성격의 특별한 사냥행차였다. 사실, 호동은 그 전날 부왕과 마주앉아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폐하! 이번 사냥길에는 남쪽 변경까지 내려가 자세히 살펴보고 오겠나이다. 전에 요하 서쪽에 있던 낙랑·대방·옥저 같은 소국들이 본래 있던 땅에서 쫓겨난 뒤 우리나라의 남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은 뒤부터 그 지역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고 하옵니다. 이에 소자가 사냥을 구실삼아 한번 저들의 소굴을 둘러보며 동정을 살펴보고자 하나이다.”

그러자 대무신왕이 만면에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어허, 참으로 우리 호동이 기특하구나! 과연 대고구려 태자답게 기상이 씩씩하도다! 내 어찌 너의 청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네 나이 이미 열다섯에 이르러 신체 강건하고, 무술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며, 또한 이토록 나라를 위한 정성이 지극하니 참으로 장하고도 갸륵하도다! 네 뜻대로 하라!”

그렇게 하여 날쌔고 억센 정예병 100여 명을 선발하여 도성을 출발했던 것이다. 호동이 이끈 부대는 사냥을 하며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살수를 건너고 옥저 땅을 지나 마침내 패수 상류를 건너 낙랑의 국경을 넘어섰다.

 

호동이 군사들과 사냥도 하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패수를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가던 어느 날, 이들은 수백 명의 신하와 군사를 거느린 낙랑왕 최리의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호동이 먼저 낙랑국왕에게 찾아가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낙랑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 이미 고구려의 호동왕자가 천하의 미장부요 호남아라는 소문을 들은 지 오래라오. 누추하지만 내 궁궐로 모시고 싶으니 며칠 쉬면서 여독이나 풀고 가오. 그러면 우리 양국의 사이도 더욱 좋아지지 않겠소?”

그렇게 하여 호동과 그의 부하들은 낙랑국의 도성을 방문하게 되었다. 최리는 호동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도성으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참으로 듣던 바와 다름없이 미목이 수려하고 행동거지도 의젓하기 그지없구나! 내 어떻게 해서든 궁궐로 데려가 사위로 삼고말리라. 요즘 한창 사방으로 힘을 뻗치고 있는 고구려 왕실과 사돈만 맺는다면 우리 낙랑의 운명은 결코 구다국이나 개마국 신세가 되지 않을 터….

낙랑왕이 호동을 환대한 데에는 이 같은 속셈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는 며칠 전에 이미 '자명고(自鳴鼓)'와 '자명각(自鳴角)'이라고 부르는 두 주술사와 변방 수비군의 보고를 받아 호동이 무사들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도성을 떠나 강변을 오르내리며 이제나저제나 호동을 기다린 것이었다.

궁궐로 돌아간 낙랑왕은 호동을 위해 푸짐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귀여운 외동딸을 불러내 호동에게 소개했으니, 그녀가 곧 낙랑공주다. 두 청춘 남녀는 서로를 처음 보는 순간 그만 첫눈에 반해버렸다.

따라서 호동과 자신의 딸을 정략결혼시키고자 했던 낙랑왕의 의도는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호동과 낙랑공주는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고, 호동은 아내 낙랑공주를 데리고 고구려로 귀국했는데, 그 뒤로 행복하게 오래도록 잘 살았느냐 하면 그게 아니다.

대무신왕은 전에 개마국과 구다국 등을 복속시킨 뒤부터 다음에는 낙랑국의 정복을 점찍어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부모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한 결혼이긴 했지만, 두 사람의 결혼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어느 날 대무신왕은 호동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얘야. 우리 대고구려가 시조이신 추모성왕(동명성제)의 유지를 받들어 조상의 나라인 대부여와 대조선의 고토를 모조리 되찾기 위해서는 더욱 국력을 길러 강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밖에는 없구나. 그런데 남쪽의 낙랑과 백제와 신라의 힘이 갈수록 커지니 걱정이다. 그리하여 내 먼저 낙랑을 쳐서 복속시키고자 하나, 그 나라에 자명고와 자명각이란 두 가지 보물이 있다니 어찌했으면 좋을꼬?”

“폐하! 자명고와 자명각이란 적군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나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옵니까? 소자가 비록 낙랑국왕의 사위가 되기는 했사오나 그런 신기방통한 물건은 본 적이 없사옵고, 공주에게 물어도 그저 웃으면서 모른다고 하더이다.”

“대체로 군사를 움직여 적을 치는 데에는 방비할 틈을 주지 않고 급습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인 법. 따라서 우리가 낙랑을 공격하기 전에 너는 반드시 그 북과 나팔을 없애야 하느니라. 알았느냐?”

이렇게 부왕의 은밀한 명령을 받은 호동은 그날 밤 잠자리에서 아내 낙랑공주를 이렇게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사랑 공주!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우리의 사랑과 행복은 앞으로 고구려와 낙랑이 한 나라가 되는가, 못 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오. 그런데 장인어른은 양국의 합병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오. 결국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전쟁이 벌어졌을 때 양국의 희생자를 줄이려면 자명고와 자명각을 먼저 없애야만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이 몸이 맨 앞장에 서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오.”

호동의 공갈 협박에 넘어간 낙랑공주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소녀가 어찌 낭군의 뜻에 따르지 않으리까? 소녀를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아껴만 주신다면 반드시 자명고와 자명각 ‘두 사람’을 없애버리고 말겠나이다!”
"아니, 두 사람이라니! 그럼 자명고와 자명각이 북과 나팔이 아니라 사람이란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두 점쟁이의 예언이 너무나 신통하여 그렇게 이름붙이고 외부에는 적군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울리는 신기한 북과 나팔이라고 하여 비밀을 지킨 것이옵니다."

그렇게 호동과 작별한 낙랑공주는 이튿날 고구려를 떠나 낙랑으로 돌아갔는데, 사랑하는 낭군과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낙랑국으로 돌아간 공주는 왕자와 약조한 날 밤 어린 시절부터 키워준 유모와 몸종을 데리고 자명고와 자명각 두 주술사를 칼로 찔러 죽여 신기방통했던 ‘인간 레이더’의 입을 영영 봉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사흘 뒤. 몰래 국경을 넘어온 고구려의 대군이 낙랑국의 도성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사정없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사돈의 나라 고구려의 급습을 당해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다다르자 낙랑왕 최리는 자명고와 자명각 두 주술사가 어찌하여 적군의 침범을 알리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조사하도록 시켰다.

신하들로부터 자명고와 자명각이 모두 칼에 찔려 죽고 범인은 바로 낙랑공주라는 보고를 받은 낙랑왕은 불같이 노했다. 공주를 잡아오라고 한 최리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 천하에 몹쓸 년 같으니! 아무리 시집을 갔다고는 하지만 적국에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고, 그것도 모자라 두 사람을 죽여 버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여봐라! 당장 저 년의 목을 쳐라!"

그렇게 공주를 죽여 버린 낙랑왕은 성문을 나가 고구려 군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호동이 궁궐로 들어가 보니 사랑하는 공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사랑에 눈먼 낙랑공주는 본국을 배신했고, 사랑을 앞세워 그 배신을 사주한 호동은 낙랑공주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이 또한 정략 결혼의 비극적 최후가 아니고 무엇이랴.

태자 호동이 자결로 짧지만 한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고 먼저 간 아내 낙랑공주의 뒤를 따른 것은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그해 11월이었다.

제1왕비가 끊임없이 호동을 모함한 탓이었다. 그것도 호동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음해였다. 대무신왕도 처음에는 제1왕비가 자신의 소생인 해우의 왕위계승에 위협이 되는 호동을 무고하는 줄 잘 알고 있었지만 베갯머리 송사에는 당할 장사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왜 억울한 사정을 밝히지 않느냐고 묻자 호동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비록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인데 내가 사실을 밝히면 어머니의 허물이 드러나고 아버지가 걱정을 할 터인데 어찌 그런 불효를 저지르랴!" 하고는 칼 위에 엎어져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평강공주, 신분 초월한 사랑의 힘 '바보'를 천하 용장으로 만들다

 

 

▲ 단양의 온달산성.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역사의 현장으로 평강공주와 온달 장군의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평강공주(平崗公主)는 고구려의 제25대 임금 평강왕의 외동딸이니 바로 온달(溫達) 장군과 짝을 이뤄 우리 고대사를 풍류 한마당으로 멋지게 빛내고 간 여걸이다.

우리가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에 실려 전해오기 때문이다. 평강공주의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성은 고구려의 왕녀로서 고씨(高氏)란 사실이 분명하지만, 평강공주란 '평강왕의 딸'이란 뜻이지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강공주는 천대받던 하급무사 온달을 고구려 최고의 용장이 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여걸이었다. 사실 온달은 평강공주의 남편이지만 귀족 출신도, 처음부터 장군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로맨스가 2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주는 것이다.

온달은 뭇사람에게 바보라고 놀림 받던 미천한 존재였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리 민족사에서 빛나는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기인·재사는 많지만 '바보' 소리를 듣고도 역사의 무대를 유유히 가로질러간 사람이 온달 장군 말고 누가 또 있었던가.

어렸을 때 '울보 공주'로 유명했던 평강공주와 거리를 헤매며 구걸하던 바보 온달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강공주가 무슨 까닭에 잘 울었으며, 온달은 어찌하여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공주의 신랑이 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을까.

당시 동북아 최강국으로서 중국의 숱한 하루살이 황제쯤은 우습게 여기던 대고구려의 공주가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서 저자를 헤매며 동냥하던 바보 온달에게, 그것도 제 발로 찾아가 아내가 되었을까. 과연 이러한 일이 절대왕권 시대에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공주는 어려서부터 잘 우는 버릇이 있었다. 걸핏하면 앙앙 소리치며 울어대니 대왕의 걱정이 여간 큰 게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왕이 이런 말로 공주의 울음을 달래었다. "오냐, 오냐, 그렇게 자꾸만 울기만 한다면 이 다음에 커서 좋은 신랑에게 시집가기는 다 틀린 줄 알아라. 자꾸 그렇게 울기만 한다면 저기 저자를 헤매며 비럭질하는 바보 온달이란 녀석에게 시집보내고 말 터이니라!"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주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새까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왕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바지, 바보 온달이 누구야요?" 아마도 온달이란 이름을 처음 듣기에 신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달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통하게도 공주의 울음이 뚝 그쳤던 것이다.

그때 평양성에는 매우 가난한 모자가 살고 있었으니 늙고 눈먼 홀어미는 성도 이름도 없었고,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그의 아들은 온달이라고 불렸다. 이들 모자는 매우 가난했다. '삼국사기'는 온달이 몹시 가난하여 날마다 저자를 헤매며 밥을 빌어 노모를 봉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속마음은 순박했지만 얼굴이 멍청하게 생겨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공주의 나이 꽃다운 열여섯이 되었다. 공주가 어여쁜 처녀로 자라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대왕은 혼처를 물색했다. 사건은 공주의 혼사 이야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부왕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출가시키려 하자 공주가 울며불며 이렇게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바지! 소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시겠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와요? 소녀는 골백번 고쳐 죽어도 다른 데로는 시집가지 않겠사와요!"

난데없는 공주의 생떼에 대왕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공주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겠다니, 그렇다면 네가 이미 점찍어둔 사내라도 있다는 말이냐 뭐냐?"
"아바지께서 소녀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르지 아니하셨어요? 네가 자꾸 울기를 좋아하니 이 다음에 크거들랑 바보 온달의 각시로 주마고 아니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시겠다면 그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소녀는 죽어도 온달을 낭군으로 섬기고자 하나이다!"

그제야 대왕은 공주의 말이 실없는 농담도, 단순한 생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같이 노해 대궐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쳤다.

"예끼, 천하에 고약하고 발칙하고 무엄한 간나(계집) 같으니라구! 너는 대고구려 왕녀가 아니냐? 그럼에도 미천한 거렁뱅이의 각시가 되겠단 말이냐?"
"대왕께서 하신 말씀이오니 더욱 중하지 않사와요? 저자의 이름 없는 필부도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이온데, 하물며 대왕께옵서 어찌 거짓말씀을 하시오리까? 소녀는 대왕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음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더욱더 온달에게 시집가고자 하나이다!"

말꼬리가 잡힌 데다 말문까지 막혀버린 평강왕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분노에 못 이겨 냅다 고함을 질렀다.
"고얀 년! 넌 이제부터 내 딸이 아니다! 너 같은 것은 애당초 낳지도 않은 것으로 칠 터이니 썩 물러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거라!"

그렇게 하여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때 공주는 금팔찌 수십 개를 지니고 대궐을 나왔다고 했으니 이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이 부족하여 공주의 신분도 버리고 부왕의 내침을 자초하여 대궐을 등졌을까.

추측컨대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넓디넓은 바깥세상의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평강왕에게는 부인이 두 명이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공주의 생모는 제1왕비로서 일찍 돌아갔고, 계모인 제2왕비가 어머니 자리를 차지하자 매일같이 떼쓰고 울면서 자랐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열전'은 공주가 홀로 궁에서 나와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길을 물어 온달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온달과 함께 살게 되었다.

어쨌든 '바보' 온달은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쳐 비록 몰래 한 결혼이지만 고구려 대왕의 사위가 되었다. '바보' 온달의 행운을 그 누가 따를 수 있었으랴. 공주는 출궁할 때에 가지고 나온 금팔찌며 보석을 팔아 집과 땅과 노비와 소 따위를 사들여 집안을 새롭게 일으키고 가꾸었다. 그리고 온달에게 열심히 무술을 익히게 했다.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고구려에서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서 대왕이 친히 주재하는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북주와의 전쟁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워 마침내 평강왕의 눈에 들어 사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온달은 고구려에 없어서는 안 될 명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이 모두가 부인인 평강공주의 적극적인 내조 덕분이었다.

고구려는 평강왕 28년(587)에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했고, 새 서울로 옮긴 지 3년 뒤인 서기 590년 10월에 평강왕이 재위 32년 만에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곧 영양왕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등장하여 주변국들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걸핏하면 남쪽 국경을 침범하는 신라 역시 골칫거리였다. 양면의 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 그것이 당면 최대의 안보 문제였다. 이에 따라 새로 즉위한 영양왕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보회의를 개최했다. 그날 어전회의는 온달을 총수로 하는 남정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온달이 신라 원정 길에 숨지자 평강공주도 애통해 하며 죽어 합장
신분을 초월한 그들의 사랑은 세월을 넘어 아직도 큰 감동으로…

대궐을 물러난 온달은 이튿날 군사들을 점고하고 출정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맹세했다.

"신라 놈들이 아리수(한강) 이북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서 모조리 다 물리지 못한다면 내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노라!"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을 출발하여 질풍노도처럼 남진하여 마침내 운명의 땅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렀다. '열전' 온달 편은 이렇게 전한다.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길에 쓰러져 죽었다.'

온달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했다는 아단성은 지금까지는 서울 아차산성이란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했다.

그러나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영춘면에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이 쌓았고, 온달이 이곳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성이 있다.

현재 사적 264호로 지정된 온달성 아래에는 온달동굴이 있고, 근처에는 온달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으며, 활고개, 진거리, 쉬는돌, 비마루, 대진목, 군관나루 같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졸지에 총수를 잃은 고구려군이 온달의 유해를 군영으로 옮겼다가 도성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영구가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열전'은 이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아아, 돌아갑시다!" 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고 했다. 물론 관이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고 이는 온달이 고토회복의 한을 품은 채 전사하자 너무나 원통하게 여긴 군사들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일 것이다.

또한 '조선사략'이란 책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달려온 평강공주가 관머리를 부여잡고 "국토를 못 찾고야 어이 홀로 돌아가리오! 님이 아니 돌아가는데 나 또한 어이 홀로 돌아가리오!" 하고 애통하게 울부짖다가 쓰러진 채 영영 깨어나지 못하자 군사들이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내외를 그 자리에 합장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맞는다면 최근 단양군에서 온달묘라고 주장하며 관광자원화하려는 온달성 인근의 고구려식 적석총이 어쩌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이 맞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북한에선 평양 동명왕릉 부근 진파리4호무덤을 평강공주·온달장군의 합장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대받던 하급 무사를 낭군으로 삼아 고구려 제일의 용장이 되도록 정성껏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대왕의 사위가 되고 실지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온달장군의 풍류적 시정 넘치는 진정한 사랑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크나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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