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란 공식적 호칭이 아니라 그저 낙랑국왕의 딸이란 뜻이다. 다만 성은 부왕의 이름이 최리(崔理)라고 사서에 나오니 최씨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사랑하는 낭군을 위해 본국도, 부왕도 배신하고 마침내 죽음을 택한 비련의 여주인공 낙랑공주.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긴 일에 고귀한 목숨을 기꺼이 바쳤던 용감한 풍류여걸 낙랑공주의 삶은 짧지만 아름다웠다.
고구려 제3대 임금 대무신왕의 맏아들 호동왕자가 자살한 것은 대무신왕 15년(서기 32) 음력 11월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빼어나게 용모가 수려했고, 자라면서는 성품이 착한 데다가, 고구려 사내라면 누구야 갖춰야만 할 미덕인 무술과 담력까지 뛰어나 부왕과 모후의 사랑은 물론 나라 안의 만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던 왕자 호동은 어찌하여 불과 15세 아까운 나이에 귀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렸을까.
그 비극은 바로 6개월 전인 그해 음력 4월 어느 날 호동이 고구려의 수도 위나암성을 떠나 먼 남쪽 낙랑국으로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에 호동은 위나암성의 남문을 벗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느 사냥길처럼 경호무사 서너 명만 거느리고 단출하게 떠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군사적 임무를 띤 성격의 특별한 사냥행차였다. 사실, 호동은 그 전날 부왕과 마주앉아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폐하! 이번 사냥길에는 남쪽 변경까지 내려가 자세히 살펴보고 오겠나이다. 전에 요하 서쪽에 있던 낙랑·대방·옥저 같은 소국들이 본래 있던 땅에서 쫓겨난 뒤 우리나라의 남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은 뒤부터 그 지역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고 하옵니다. 이에 소자가 사냥을 구실삼아 한번 저들의 소굴을 둘러보며 동정을 살펴보고자 하나이다.”
그러자 대무신왕이 만면에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어허, 참으로 우리 호동이 기특하구나! 과연 대고구려 태자답게 기상이 씩씩하도다! 내 어찌 너의 청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네 나이 이미 열다섯에 이르러 신체 강건하고, 무술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며, 또한 이토록 나라를 위한 정성이 지극하니 참으로 장하고도 갸륵하도다! 네 뜻대로 하라!”
그렇게 하여 날쌔고 억센 정예병 100여 명을 선발하여 도성을 출발했던 것이다. 호동이 이끈 부대는 사냥을 하며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살수를 건너고 옥저 땅을 지나 마침내 패수 상류를 건너 낙랑의 국경을 넘어섰다.
호동이 군사들과 사냥도 하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패수를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가던 어느 날, 이들은 수백 명의 신하와 군사를 거느린 낙랑왕 최리의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호동이 먼저 낙랑국왕에게 찾아가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낙랑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 이미 고구려의 호동왕자가 천하의 미장부요 호남아라는 소문을 들은 지 오래라오. 누추하지만 내 궁궐로 모시고 싶으니 며칠 쉬면서 여독이나 풀고 가오. 그러면 우리 양국의 사이도 더욱 좋아지지 않겠소?”
그렇게 하여 호동과 그의 부하들은 낙랑국의 도성을 방문하게 되었다. 최리는 호동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도성으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참으로 듣던 바와 다름없이 미목이 수려하고 행동거지도 의젓하기 그지없구나! 내 어떻게 해서든 궁궐로 데려가 사위로 삼고말리라. 요즘 한창 사방으로 힘을 뻗치고 있는 고구려 왕실과 사돈만 맺는다면 우리 낙랑의 운명은 결코 구다국이나 개마국 신세가 되지 않을 터….
낙랑왕이 호동을 환대한 데에는 이 같은 속셈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는 며칠 전에 이미 '자명고(自鳴鼓)'와 '자명각(自鳴角)'이라고 부르는 두 주술사와 변방 수비군의 보고를 받아 호동이 무사들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도성을 떠나 강변을 오르내리며 이제나저제나 호동을 기다린 것이었다.
궁궐로 돌아간 낙랑왕은 호동을 위해 푸짐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귀여운 외동딸을 불러내 호동에게 소개했으니, 그녀가 곧 낙랑공주다. 두 청춘 남녀는 서로를 처음 보는 순간 그만 첫눈에 반해버렸다.
따라서 호동과 자신의 딸을 정략결혼시키고자 했던 낙랑왕의 의도는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호동과 낙랑공주는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고, 호동은 아내 낙랑공주를 데리고 고구려로 귀국했는데, 그 뒤로 행복하게 오래도록 잘 살았느냐 하면 그게 아니다.
대무신왕은 전에 개마국과 구다국 등을 복속시킨 뒤부터 다음에는 낙랑국의 정복을 점찍어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부모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한 결혼이긴 했지만, 두 사람의 결혼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어느 날 대무신왕은 호동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얘야. 우리 대고구려가 시조이신 추모성왕(동명성제)의 유지를 받들어 조상의 나라인 대부여와 대조선의 고토를 모조리 되찾기 위해서는 더욱 국력을 길러 강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밖에는 없구나. 그런데 남쪽의 낙랑과 백제와 신라의 힘이 갈수록 커지니 걱정이다. 그리하여 내 먼저 낙랑을 쳐서 복속시키고자 하나, 그 나라에 자명고와 자명각이란 두 가지 보물이 있다니 어찌했으면 좋을꼬?”
“폐하! 자명고와 자명각이란 적군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울리는 북과 나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옵니까? 소자가 비록 낙랑국왕의 사위가 되기는 했사오나 그런 신기방통한 물건은 본 적이 없사옵고, 공주에게 물어도 그저 웃으면서 모른다고 하더이다.”
“대체로 군사를 움직여 적을 치는 데에는 방비할 틈을 주지 않고 급습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인 법. 따라서 우리가 낙랑을 공격하기 전에 너는 반드시 그 북과 나팔을 없애야 하느니라. 알았느냐?”
이렇게 부왕의 은밀한 명령을 받은 호동은 그날 밤 잠자리에서 아내 낙랑공주를 이렇게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사랑 공주!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우리의 사랑과 행복은 앞으로 고구려와 낙랑이 한 나라가 되는가, 못 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오. 그런데 장인어른은 양국의 합병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오. 결국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전쟁이 벌어졌을 때 양국의 희생자를 줄이려면 자명고와 자명각을 먼저 없애야만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이 몸이 맨 앞장에 서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오.”
호동의 공갈 협박에 넘어간 낙랑공주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소녀가 어찌 낭군의 뜻에 따르지 않으리까? 소녀를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아껴만 주신다면 반드시 자명고와 자명각 ‘두 사람’을 없애버리고 말겠나이다!”
"아니, 두 사람이라니! 그럼 자명고와 자명각이 북과 나팔이 아니라 사람이란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두 점쟁이의 예언이 너무나 신통하여 그렇게 이름붙이고 외부에는 적군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울리는 신기한 북과 나팔이라고 하여 비밀을 지킨 것이옵니다."
그렇게 호동과 작별한 낙랑공주는 이튿날 고구려를 떠나 낙랑으로 돌아갔는데, 사랑하는 낭군과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낙랑국으로 돌아간 공주는 왕자와 약조한 날 밤 어린 시절부터 키워준 유모와 몸종을 데리고 자명고와 자명각 두 주술사를 칼로 찔러 죽여 신기방통했던 ‘인간 레이더’의 입을 영영 봉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사흘 뒤. 몰래 국경을 넘어온 고구려의 대군이 낙랑국의 도성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사정없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사돈의 나라 고구려의 급습을 당해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다다르자 낙랑왕 최리는 자명고와 자명각 두 주술사가 어찌하여 적군의 침범을 알리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조사하도록 시켰다.
신하들로부터 자명고와 자명각이 모두 칼에 찔려 죽고 범인은 바로 낙랑공주라는 보고를 받은 낙랑왕은 불같이 노했다. 공주를 잡아오라고 한 최리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 천하에 몹쓸 년 같으니! 아무리 시집을 갔다고는 하지만 적국에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고, 그것도 모자라 두 사람을 죽여 버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여봐라! 당장 저 년의 목을 쳐라!"
그렇게 공주를 죽여 버린 낙랑왕은 성문을 나가 고구려 군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호동이 궁궐로 들어가 보니 사랑하는 공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사랑에 눈먼 낙랑공주는 본국을 배신했고, 사랑을 앞세워 그 배신을 사주한 호동은 낙랑공주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이 또한 정략 결혼의 비극적 최후가 아니고 무엇이랴.
태자 호동이 자결로 짧지만 한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고 먼저 간 아내 낙랑공주의 뒤를 따른 것은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 그해 11월이었다.
제1왕비가 끊임없이 호동을 모함한 탓이었다. 그것도 호동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음해였다. 대무신왕도 처음에는 제1왕비가 자신의 소생인 해우의 왕위계승에 위협이 되는 호동을 무고하는 줄 잘 알고 있었지만 베갯머리 송사에는 당할 장사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왜 억울한 사정을 밝히지 않느냐고 묻자 호동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비록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인데 내가 사실을 밝히면 어머니의 허물이 드러나고 아버지가 걱정을 할 터인데 어찌 그런 불효를 저지르랴!" 하고는 칼 위에 엎어져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